창원의 세스페데스 공원...조선 땅을 최초로 밟은 서양인은?
-스페인人, 세스페데스 신부의 발자취를 찾아서
때마침 황금연휴를 맞이해서 서울역으로 갔다. 목적지는 진해. 지금은 창원시에 통합됐으나 필자는 어쩐지 진해라는 이름이 더 익숙했다.
10시 5분. 출발시간이 되자 KTX열차는 지체 없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기차가 덜그렁덜그렁 한강철교를 지나더니 순식간에 서울을 버리고 초록의 산하(山河)에서 더욱 속도를 높였다. 계절도 고속 질주. 산과 들은 여름을 서둘러서 푸름을 알리고 있었다.
창원 중앙역에서 내려서 긴 기다림 끝에 택시를 탔다. 가는 곳이 어려웠을까. 택시 운전사의 나이가 많은 탓일까.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했다. 세스페데스 공원은 택시 운전사에게 너무나 어려운 이름이자 장소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눈에 들어오는 안내 표지판을 보면서 창원시 관광 해설사 최영임(55)씨의 원격 조정을 받아서 가까스로 공원을 찾았다. 세스페데스 공원은 아파트 건설공사가 한창인 신도시의 큰 길 모퉁이에 있었다. 필자는 카메라 셔터를 열심히 누르면서 작고 아담한 공원을 몇 바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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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페데스 공원 |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 그는 누구인가.
1515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는 인도의 고아에서 서품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선 땅을 최초로 밟은 외국인 신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12월 27일 그는 지금의 진해인 웅천(熊川)에 첫발을 내디딘 인물이다. 당초의 목표는 크리스마스에 맞추어서 올 예정이었으나 풍랑으로 인해 차질이 생겼던 것이다.
그의 방문에 대해 상반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가 조선을 침략한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요청을 받고 온 종군(從軍) 신부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스페데스 신부 연구의 전문가 외국어대 박철 교수의 의견은 전혀 다르다. 그의 저서 <16세기 서구인이 본 꼬라이>를 통해서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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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조선선상륙 400년 기념비(스페인에서 제작 기증함) |
<세스페데스는 일본군의 종군신부로서 조선까지 따라온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한 포부를 갖고 순수하게 가톨릭 교리의 일환으로서 조선 땅을 밟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방한은 히데요시(秀吉) 몰래 이루어졌고, 일 년 만에 그의 행각이 발각되어 타의에 의해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단순히 일본의 종군 신부로 조선에 온 것으로만 속단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찾은 여러 자료에 의하면 박철교수의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그렇다면 세스페데스 신부는 어디로 상륙했을까. 다시 박철교수의 저서 <16세기 서구인이 본 꼬라이>를 통해서 알아본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은밀하게 남해안 고문가이(熊川: 진해의 옛 이름)에 도착하여 천주교 다이묘의 영접을 받아 인도되었다. 특히 그가 고문가이 성(城)에 머물면서 일반 병사들의 눈에 띄지 않게 성채의 가장 높은 윗부분에서 지냈으며 주로 말을 이용해서 선교활동을 했음을 그의 편지에서 볼 수 있다.>
필자는 최영임 해설사의 안내로 한적한 바닷가로 갔다. 도로 아래 해안에 큰 바위들이 세월을 머금고 잔잔한 물결들과 노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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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마을의 탕수 바위 |
“이곳입니다. 탕수 바위라고 하죠. 이곳이 세스페데스 신부가 최초로 상륙한 지점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세스페데스 신부의 최초 상륙지는 사도마을 바닷가로 나온다. 필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멜보다 60년 앞서서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은 서양인 신부 아닌가.’
그는 비록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하지 못했으나 전쟁을 막아보려고 노력했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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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 바위에서 바라본 웅천왜성 |
“저기 산이 보이시지요? 저기가 웅천왜성입니다. 저산의 높은 곳에서 신부께서 기거하셨답니다. 지금도 일 년에 한번 진해 덕산성당의 신부님들과 신자들이 오셔서 세스페데스 신부와 그 때 희생된 조선인들을 위한 미사를 올립니다.”
최영임 해설사가 생각에 잠겨 있는 필자에게 부연 설명을 했다. 필자는 웅천왜성을 오르기로 마음먹고 발걸음을 옮겼다.
425년 전의 상흔(傷痕)을 찾아 웅천왜성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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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왜성의 산길 |
웅천왜성은 숲이 우거져있었다. 그러나 가파른 경사 때문에 중턱에서부터 숨이 거칠어졌다. 그래도 역사의 흔적을 직접 더듬어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새순이 돋아남과 동시에 바로 녹음으로 이어지는 숨 가쁜 자연의 섭리도 인간사와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불고불 산길을 올랐다. 7부 능선 쯤 오르자 성(城)의 잔재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너진 돌담이었으나 형태가 왜성(倭城)임에 틀림없었다. 정상 부근에 이르자 3개의 관문이 나왔다. 문지기는 키 큰 나무들이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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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세월... 왜성의 잔재들 |
드디어 해발 184미터의 산 정상에 올랐다. 천수각이 세워졌을 자리에는 깨어진 돌(石)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고, 사이사이 야생풀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에는 부산 신항만의 컨테이너들이 가득했고, 멀리 거가대교가 섬과 섬을 잇고 있었다. 흩어진 돌무더기 위에 세워진 녹슨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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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왜성의 설명문 |
<웅천왜성(熊川倭城)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장기전에 대비하여 우리나라에 쌓은 18개의 성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의 지형은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고 북쪽으로는 웅포만을 끼고 있어서 왜군이 수백 척의 함선을 정박시키기에 적당하였다. 또한, 안골포, 가덕도, 거제도 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과의 연락도 편리하고 본국과의 거리도 가까웠으므로 군사 주둔지로 유리한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이곳에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사용하였다...성의 구조는 일본식으로서 산꼭대기에 본성을 두고 아래 족으로 능선을 따라 제1외곽, 제2외곽을 각각 배치하였다. 그리고, 육지 쪽의 방비를 위해 또 다른 성(羅城)을 두었다. 원래 성의 넓이는 약 15,000평방미터 정도였으며 높이는 지형에 따라 약3-5미터 정도였으나 대부분 훼손되어 지금은 산등성이와 산정상부분에 길이 약 700-800미터, 높이 약 2미터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안내문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기돼 있었다. 이 성의 형태는 ‘성(城)의 달인’으로 알려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쌓았다는 설(說)이 있으나, 조선의 방어용 성을 고니시(小西)가 점령하여 개축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경상남도는 웅천왜성을 기념물 제79호로 지정하고 있었다.
아무튼, 웅천왜성에서의 뱃길은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九州)의 요부코(呼子)에 다이묘들을 모이게 했고, 쓰시마(對馬島)를 중간 기착지로해서 조선 땅을 무참히 짓밟은 것이다.
필자는 웅천왜성의 중턱 세스페데스 신부가 기거했을 법한 곳에 앉아서 가지고간 자료를 펼쳐 봤다. 그가 조선에서 쓴 최초의 편지이다.
<우리는 마침내 성요한 축일에 두 번째로 항구(쓰시마)를 떠나 하느님의 가호로 조선에 도착하였습니다. 고문가이(熊川)는 우리 일행이 상륙한 곳으로부터 10-12레구아(1 Legua: 약 5,572미터) 떨어져 있었으므로 즉시 그곳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간단히 종합해보면 평화가 금방 이룩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평화의 제의를 시작했던 중국의 중요한 인물(沈惟敬)이 중국이 당초에 허락하기를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해온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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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성 천수각의 돌담 |
<웅천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조만간에 완성되리라 여겨지는 놀랄 만큼 거대한 방어 작업이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부하들이며 맹우들인 모든 귀족들과 군사들이 야영하고 있는 성(城)에 높은 방어벽들과 망루들과 튼튼한 초소들을 세워 놓았습니다....1레구아 주위에 여러 요새들이 있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小西行長) 동생인 ‘도노메도노 베드로(Tonomedono Pedro)’가 있었으며 다른 한 곳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위 쓰시마 영주인 ‘다리오(Dario)’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는 시고쿠(四國) 지방의 4왕국의 영주들이 머물고 있으며...>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을 출발해서 조선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일기를 쓰듯이 자세하게 기록해서 자신의 조선 방문을 허락한 베드로 고메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서 쓴 첫 번째 편지다.
필자는 나름대로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종교인이자 평화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