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났다더니 봄을 시샘하는 춘설(春雪)에 길 나설 심사만 마냥 더디었다 두어 시간 하늘만 쳐다보다 나선 길. 큰길이 낫겠지 싶어 영동고속도로로 들어섰다.
명주사는 강릉 위쪽으로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 마을, 그러니까 오대산 동쪽의 만월산에 자리잡고 있다. 어성전(魚城田), ‘물이 깊어 고기가 많고 주위의 산은 성과 같으며 밭이 기름져 부모를 모시고 처자를 기르기에 적합한 이상향’이라는 뜻이다. 한여름에도 차가운 물과 수려한 산세는 관광지로 이름난 강원도에서도 무릉도원에 비유될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그러한 풍광에 흰눈을 걸친 설경을 감상하다보니 어느새 절 아래 마을에 다다른다. 전화를 드리니 차는 아래 두고 올라오라는 이야기다. 지난 설 전에 허리께만큼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았단다. 신발을 고쳐 매고 옷매무새를 단단히 하고 계곡을 따라 오른다. 2km 남짓, 눈 속에 파묻힌 길이며 계곡이 입춘이 지났다지만 강원도 골짝은 아직도 쌓인 눈만큼이나 두터운 한겨울이다. 그래도 봄햇살에 반사된 눈빛은 예전과 달리 따뜻하고 가만히 멈추어 서면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하! 얼마나 올랐을까, 눈을 이고 선 부도와 탑들이 저절로 탄성을 불러 일으킨다. 8각의 옥개석엔 그대로 8각의 새하얀 눈부도가, 석종형 부도에는 둥그런 소종(小鐘)의 눈부도가 바람이 깎아놓은 대로 부도 위에 올려져 있다.
이 부도밭에는 부도 12기, 탑비 5기가 가지런히 모셔졌는데 부도들 사이가 다소 좁아 보이고 모셔진 부도에 비해 그 터가 작게 느껴진다. 옛 순례기에는 중봉당선사탑(中峰堂禪師塔)이 저 아래 옛 절터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하니 여기 저기 방치되어 있던 부도들을 근래에 들어 한몫에 관리할 요량으로 여기 이렇게 모셔둔 것이리라.
이 부도들의 조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원당형 부도의 경우 8각으로 조성된 기단부와 옥개석은 고려시대 이후의 방식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연파당(蓮坡堂)의 부도는 짝을 이루는 탑비에 의해 조선 순조 18년(1818)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 4기의 탑비도 순조 12년에서 고종 20년(1883)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조선 후기의 부도 중 강원도 내에서 가장 뛰어난 각감솜씨를 보여준다. 눈부도를 사진에 담느라 사진기자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릎 넘게 쌓인 눈에 빠진다며 비명을 지른다. 이 부도밭을 오른쪽에 두고 산등성이 한쪽을 살짝 돌면 저만치 몇몇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만월산 명주사이다. 건봉사의 말사이기도 했던 명주사는 사지(『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따르면 1009년(고려 목종 12년)에 혜명(惠明), 대주(大珠) 두 대사가 창건하고 비로자나불좌상을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절 이름은 두 대사의 이름 한 자씩을 따서 명주사라고 칭했다. 부속암자로는 1123년 청련암, 운문암을, 1673년 향로암을 창건하였으며, 1781년에는 원통암을 창건하고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했다.
1861년 명주사와 원통암 등 부속암자까지 불타는 등 수 차례의 화재를 겪은 명주사는 1897년 화재로 산내 암자인 원통암에서 사무를 보게 됨으로써 이후 원통암을 명주사라 칭하게 되었다. 독성각 1칸, 어향각 9칸, 원통암 30칸, 미타암 6칸 등 모두 95칸의 규모로 중건·유지되던 명주사는 6·25 전쟁으로 다시 폐허가 되었다.
지금의 명주사는 이 원통암 터에 법당, 삼성각, 요사채를 중건한 것이다. 때문에 현재의 명주사에서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절 아래 부도밭이나 현재 남아 있는 조선 후기(1704년) 양식의 명주사 동종(도 유형문화재 64호), 그리고 옛 절터 군데군데 남아 있는 돌우물, 돌암반만이 이곳이 이름난 선원이었으며 수많은 학승들을 배출했던 전당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현재 명주사에는 홍진 스님이 주석하시며 두 분의 보살이 오가며 살고 계신데 스님은 여기서 네 해째를 맞고 있다 한다.
“옛날에 명주사는 건봉사 다음으로 큰절이었다고 하지요. 명주사는 금강산 들어가는 길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월정사에서 하룻밤 자고, 명주사에서 하룻밤, 저 위 화엄사나 신흥사에서 하룻밤, 그리고 건봉사 들러 금강산을 들어가곤 했다지요. 그러다보니 이곳을 거쳐가는 스님들이 많았고 이곳에 머물게 된 스님들도 많았겠지요. 명주사에는 선객들이 많았고 여기 옛 원통암에는 강백들이 많았다고들 합니다.
지금도 이곳 명주사만큼 조용한 절도 드물어요. 공부하기에 참 좋지요. 지금으로서는 사람들이 와서 편히 쉬고 기도 열심히 할 수 있는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녁예불 시간, 모두들 법당으로 향한다. 정성 들여 부처님께 하루를 회향하고 다시 눈쌓인 겨울밤을 뒤로한 채 마주 앉았다.
광주에서 이곳 어성전 마을로 시집와 45년 가까이 절일을 돌보았다는 공정례(66세) 보살님이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어 주신다. 보살님의 옛 이야기 속에서는 월정사에서 공부하던 두 스님이 기도 중에 밝은 빛이 비추는 곳을 따라 온 곳이 이곳 명주사 터였다. 또 명주사의 우물물 효험 때문에 일어난 사건도 전설로 남아 있었다.
“옛날 밭을 갈면 온통 기왓장이었어요. 그래 웬 기왓장이 이렇게 많으냐고 작은 시아주버니께 물어보니 절이 불에 탄 이유를 얘기해주시는 거예요.
옛날에 이곳 절에 아기를 임신한 부부가 살았는데 그만 처사가 죽자 부인이 절 가까이에 무덤을 만들고는 절을 떠나 서울서 아들을 낳아 길렀데요. 그 아들이 자라서 큰 벼슬을 하자 부인은 그제사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보도록 일렀다지요.
그 즈음 이곳 명주사 스님의 꿈에 옛날 처사가 나타나 아들이 오면 자기의 무덤 자리를 알려주라고 당부했답니다. 하지만 스님은 높은 벼슬을 한 그 아들이 아버지의 묘를 찾는다고 이곳 명주사를 빼앗을까봐 그 아들이 지나가는데도 차마 얘기를 못했지요. 무덤을 찾지 못한 아들이 할 수 없이 고개를 넘어 돌아가려고 하자 절에 큰 불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의 혼령이 절에 불을 내어 아들을 불렀다는 거지요. 밭에 있는 기왓장은 그 때 불탄 절에서 튀어나온 기와 파편이구요.”
어성전 마을에 전해지는 명주사가 불에 탄 전설이다. 수 차례의 화마를 겪은 명주사이지만 불에 탄 뒤 그 터를 옮겨온 후의 이야기니 비교적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대대로 내려온 명주사 터(명당)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믿음과 조선 후기 벼슬아치들의 불교에 대한 횡포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정월 보름이 벌써 지났지만 눈쌓인 산골, 환한 달빛을 머금은 명주사의 밤이 그 이름마냥 아름답기만 하다.
저문밤 은은히 들려오는 명주사의 종소리가 어성십경(魚城十景)의 하나라더니 오늘밤은 바람이 두드리는 명주사의 동종소리에 어지러운 마음은 온데 간데 없고 부처님 목소리에 한껏 귀기울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