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일생이 평가받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군가의 일생을 논(論)할 때, 그가 생전에 얼마나 많은 돈과 명예를 얻었는가를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그가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가를 근거로 삼는다.
이순신, 우리 역사에서 그가 지니고 있는 무게는 감히 나 같은 사람은 감당하기조차 버거울 정도이다. 그것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역사의 중간기에 해당하는 선조(宣祖) 연간의 왜적의 침공 시기에, 육지에서 적(敵)들과 맞서 항쟁한 인물들은 무수하지만, 바다에서 그들의 수송로를 견제하고 아울러 그들의 목줄을 조인 인물은 오로지 이순신 뿐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전쟁에서도 그러하지만, 바다를 끼고 있는 반도 등의 전쟁에서는 후방 수송로의 중요성은 새삼 말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비중이 높다.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과 같은 섬나라의 침략을 당한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적들의 후방 보급선 즉, 해상수송로를 단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현재 일본의 전략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2000 해리 전수방위’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말레카해협(싱가폴과 인도네시아 사이)까지 자신들의 해군력을 진출시키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해상자/위대는 매년 몇 차례씩 말레카해협 인근 해역에서 그들이 자랑하는‘호위대군(扈衛隊群)’의 함대기동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헌법상 군사력을 보유할 수 없는 일본이 ‘자/위대(自衛隊)’라는 다소 이중적인 이름의 물리적 억지력을 보유하고도 모라자서, 최근‘오오스미 급’수송함(실질적으로는 헬리콥터 항모)를 건조하는 이유는, 단순하게 ‘본토방위’의 개념을 벗어나 적극적인 물리적 개입 즉, 필요에 따라서는 이웃의 국가를 침략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현재의 한국해군은 일본 해상자/위대를 ‘저지 및 격퇴’할 수 없다. 대개 육군력으로만 결판이 나던 20세기 초중반이라면, 일본의 육상 자/위대는 한국 육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일전에 만났던 육군의 영관급 장교(내 고등학교 선배다)는 “일본 육상자/위대는 일주일이면 한국 육군에게 괴멸된다”고 자랑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랑일 수가 없다. 해군력이 일본의 그것과 비교해 거의‘전무(全無)’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현실에서, 어떻게 바다를 건너서 가겠다는 소리인가. 그러니까 시시때때로 국방부가‘육방부’라는 비아냥을 듣는 것이다.
사설이 길어졌다. 다시 이순신으로 돌아가자.
이순신에 대한 일본사서(日本史書)의 평가는 대개 한 부분에서 일치한다. 그것은 이순신이‘조정의 대신들보다는 수하 무장과 병사들에게 더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가 남긴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짐작하겠지만, 그가 지닌 인간적인 매력은 다름 아닌,‘인간에 대한 다함없는 예의’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순신은 평생 남을 미워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의 속마음까지 우리가 들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이순신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미워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난중일기’와‘선조실록’혹은 임진왜란 이후 무수하게 쏟아져 나온‘회고록 류’들을 아무리 읽어봐도, 이순신이 누군가를 (정치적이든, 개인적이든) 미워했다는 증거는 없다.
원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인 상식’에 따르자면, 원균은‘한낱 시기심에 사로잡혀 판세를 그르친 인간’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그가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박정희 정권 당시의 무리한‘이순신 영웅 만들기’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악역이 필요했고, 그 배역에 원균이 낙점되었을 뿐이다.
마치, 해방 이후 친일민족반역자들이 자신들의 입장 변화(친일 → 친미)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빨갱이 사냥’을 했듯이...
역사 속의 기록으로만 평가한다면, 이순신은 지장(智將)이요, 원균은 용장(勇將)이라 해야 마땅하다. 한 사람을 민족의 성웅(聖雄)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을‘역적’으로 모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지나온 역사에 대한 올곧은 평가가 수반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해군은 ‘대양해군’으로 거듭나기 위한 발걸음을 딛고 있다. ‘KDX 사업’이라고 명명(明命)된 한국형 구축함 사업은 이제 그 첫 단계를 지나, 두 번째 단계를 힘차게 걷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새로이 건조되는 전투함들의 제원이보다도, 그 이름들이다.
KDXⅠ의 Class name은 ‘광개토대왕’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드넓은 영토를 개척(혹은 수복)한 군주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변변한 함대공 미사일 하나 없이 우리의 영해를 근근이‘경비’하던, 이전의 울산급 혹은 포항급과는 달리, 우리 스스로 대양(大洋)을 향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상징이다.
또 KDXⅡ의 Class name은 ‘충무공 이순신’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KDXⅡ는 향후 20년 이상 한국해군의 주력으로 자리 잡는다. 따라서 이 주력함들의 Class name에 ‘한국해군사의 불멸’이라 할 수 있는 충무공 이순신을 붙인 것은, 더 이상의 침략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팁 하나! ^^ 한국 해군 잠수함들의 이름들을 보면, 장보고, 이천, 최무선, 박위, 이종무, 정운, 이순신(충무공 이순신과 동명이인), 나대용, 이억기 등‘왜구박멸에 일가견이 있는’위인들의 이름을 차용하고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 애들이 알면, 은근히 짜증날 일이다.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마치 오늘이 '충무공 탄신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생활정치는 다른 것이 아니다. 하루에 한 번 달력 아래의 조그마한 글자들을 보고 살아가자는 것이다. ‘무슨 무슨 날’은 한 달에 거의 열흘 이상이다. 그 날들의 의미를 하루에 딱 10분만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오늘이 ‘충무공 탄신일’이라고 할 때, 누군가는「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를 떠올릴거고(솔직히 한 번도 못봤다), 누군가는 우리 역사의‘영웅 만들기’의 문제점을 떠올릴 것이고, 또 누군가는 임진왜란 당시의‘의병(義兵)’으로 상징되는‘들불 같은 민중의 저항정신’을 떠올릴 것이다.
승리의 첫째 조건은 물론,‘우리의 역량이 적들보다 강해야 한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열린 사회의 적들’을 먼저 처단해야 한다. 언제나 패망 혹은 패배는 우리 스스로에 의해서 일어난다.
과거사 청산, 알고 보면 쉽다. 그저 우리의 역사를‘솔직하고 당당하게’가르치고 배우면 저절로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하루 하루를‘짜증과 공포’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다름 아닌, ‘수구친일친미민족반역자 집단’으로 자연스럽게 규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