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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새벽기도15>우리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마태복음 8:14~22, 말씀:하용조 목사님
신앙생활은 <간증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매일 밥을 먹듯이, 하나님의 기적은 매일 나타 납니다.
오늘도 새벽기도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여러분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실것을 확신합니다.
오늘은 <기도의 응답>과 <예언의 응답>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14절을 먼저 보십시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가셔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마8:14)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느낄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집에 유숙했다”는 사실과
<베드로가 결혼했다>는 것과 그의 장모님이 <열병으로 앓아 누워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예수님같은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집안에 병든자가 있으니 얼마나 미안했겠어요?
15절을 보니 “예수께서 그 장모의 손을 만지시자, 열이 내렸고, 장모는 곧 일어나 예수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마8:15)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장모님의 손을 만지고 기도하니까, <열이 내리고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에는 예수님이 그들의 손을 만지며 <기도하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그려져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나의 손을 만지는 것>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그런 상상을 하면, <능력>이 나에게 <전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가서, 가만히 조용히 앉자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뭔가 자기가 도와줄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설 것입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장모가 아픈 사실을 알고, 그를 위해 손을 얹고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또 한편 장모의 입장에서는 기도를 받다보니, 열이 내리고 병이 나은 거예요.
우리들도 이런 체험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던 어떤 사람이 갑자기 변하여, \\"동네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공동 화장실을 청소한다\\"고 생각해 봐
요.
교회는 이런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곳>입니다.
선교사는 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가는 사람이예요.
그가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데 누리지 않고, 미지의 다른 나라로 훌쩍 떠나는 사람이예요.
성도 여러분?
베드로 장모의 얼굴은 어땠을까요?
그 분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기쁨에 겨워 방방 뛰어 다닐 거예요.
제 자신에 대한 간증을 하나 할께요.
저, 하용조도 대학 다니던 시절에 그런 경험을 했어요.
제가 건국대학교 다닐 때 폐병으로 1년을 휴학하고, 인천요양원에 있을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날, 밤 11시에 주님이 저를 찾아 오셨어요.
그 때에 주님이 하신 말씀은 “너는 나를 위해 살지 않으렴......”
그 말씀에 저는 깜짝 놀라서 “그럼 제가 목사가 되란 말이예요?”라고 반문했어요.
그때 까지 <제가 목사가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어서 의아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다음날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온 거예요.
그리고는 “너 목사가 되지 않을래......”하시는 거예요.
그때에 제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폐병이 치료되었고, 곧이어 군대에 갔지요.
그후 간염이 걸렸고, 간염이 진행되어 간경화로 오랬동안 앓아 왔지요.
그리고 간암으로 발전했어요.
간암에 대한 수술을 여러번 받았고, 지금은 그 간암의 흔적은 없어 졌어요.
이것은 <내가 교만하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나를 병으로 묶어놓은 결과>라고 생각해요.
저는 30년 동안 당뇨로 고생하고 있으며, 고혈압도 있어요.
그리고 최근에는 신장이 망가져 신장투석을 해야 해요.
그래서 내 별명은 <움직이는 종합병원> 이예요.
그런데 나는 참으로 신기한게 있어요.
내가 설교를 하면, 더 기운이 펄펄나고, 생기가 솟아요.
그러나 나는 설교를 안하면, 풀이 죽어 기운이 없어요.
그리고 제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잘 생긴데가 한군데도 없어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괜찮아요.
저는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성한데가 없어요.
저는 안식년을 한다고 해도 별로 쉬지 않아요.
제가 영국에 가려고할 때에 의사가 “목회를 그만두라”고 경고까지 했어요.
그러나 저는 그대로 하던 일을 계속 했어요.
그때에 제 생각으로는 <병이 나를 어쩌지 못한다>
<나는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
그것은 나에게 있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을 물리쳐 줄꺼다>라는 생각뿐 이었어요.
나는 내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으면, <나에게 다가오는 어떠한 병도.....>
<나에게 닥치는 어떠한 고난도.....> 모두 뛰어 넘어 승리할 거예요!
내가 아플때 마다 교회는 성장했고, 내가 고통스러울 때마다 일이 자꾸자꾸 발생해요.
저는 아는 사람들은 <이제 좀 쉬라>고 강요해요.
또 <제발~ 일 좀 벌리지 말라>고 충고해요.
그럼 저는 <내가 일을 벌리는게 아니고, 하나님이 일을 펼치시는 거라>고 대답해요.
이것이 바로<하나님의 계획>이예요.
저는 반드시 제가 갖고 있는 병을 이기고,
여러분 앞에 당당히 서서, 이와같이 간증할 거예요.
마태복음 8장 16절을 보세요.
“날이 저물자 사람들이 예수께 귀신들린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셨고, 아픈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마8:16)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첫째, <귀신 들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고,
둘째, 그런 귀신들은 예수님 앞에서<꼼작을 못한다>는 사실이예요.
셋째, 그것을 예수님은 <말씀으로 해결했다>는 거예요.
우리가 기도할 때에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이고,
병든자를 치료할 때에도 <말씀>을 듣고, 치유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말씀>을 듣고, 행동해야 해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른게 뭔가에 씌워서 그랬다”고 해요.
그것이 <귀신>이예요.
또 어떤이는 “평소에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떤 세력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데요”
그래요 그것이 바로 <마귀>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서 은혜를 받아야 하지,
어떤 알 수 없는 귀신이나 마귀의 <힘>으로 그런 세력에게 사로잡히면 안돼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문이 열린것이다“(마7:7)
어떤 자매의 간증을 들어보면 “저는 닭이 아니고 독수리예요”
“나는 먹이만 받아 먹는 닭인줄 알았는데, 성경을 보다보니 나는 창공을 날아다니며 먹이를 스스로 찾아서 먹는 독수리
예요“
17절을 보세요.
“이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그는 몸소 우리 연약함을 담당하셨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 지셨습니다”(마8:17)
여기에서 두가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기도의 응답>이고, 또 하나는 <예언의 응답>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렇습니다.
“사실 그가 짊어진 병은 우리의 병 이었고, 그가 짊어진 아픔은 우리의 아픔 이었다.
그런대도 우리는 그가 <맞을 짓>을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때리시고>,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했다“(사 53:4)
“사실은 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고, 우리의 약함이 그를 짓뭉겠다. 그가 책망을
받아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아서 우리의 병이 나은 것이다“(사53:5)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그는 몸 소 연약함을 담당하셨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것은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져서 우리가 새로워졌고, 그가 내 병을 가져가서 내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
다.
그것이 <십자가의 보혈사건>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많은 무리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 8:18)
여기에서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왔을 때에는 그 인기 안에 있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떠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려면, 대중을 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혼자 일어나거나, 하나님과 독대하였습니다.
인기있는 사람은 고독합니다.
박수 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는, 무대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러니 큰 박수소리 뒤에는 고독이 따릅니다.
열광 다음의 고독은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그럴 때는 하나님을 찾아서 마주 앉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특이하게 발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언제나 홀로 계십니다.
그리고 밤 늦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연설한 후에도 즉시 그 자리를 뜨고 사람을 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행동을 보이시면서 고독하게 홀로 죽는 죽음을 묵상하셨습니다.
19절~20절을 보세요.
“그때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다가와 <선생님,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8:19)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를 둘 곳이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마8:20)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예수님의 본질>을 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곳이 없다” 는
이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따라 다니면서 혜택을 보려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들으시고 실망했어요.
예수님은 무소유 이므로, 가진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고, 고독하신 분입니다.
그저 심플한것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그런게 더 좋아요.
그는 털어도 먼지하나 나지않는 순수한 분이예요.
소유가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돈도많으면 아주 불편해요.
이렇게 예수님의 삶은 아주 단순하고, 고독하고, 외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독하지 않는것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때문입니다.
21절~22절을 보세요.
“다른 제자가 <주님! 제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그러나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에게, 죽음 사람을 묻게하고, 너는 나를 따라>라고 말씀 하셨다”(마8:21~22)
예수님이 너무나 단순하고 심플하니까, 예수님을 따르는데 장애가 아주 많았어요.
그를 따라 가 보니까 아무것도 없었어요.
결혼을 하고 색시가 시집에 가보니까, 아무것도 없었어요.
우리가 결혼을 할 때에, 조건을 따지지 마세요.
오로지 본인 한 사람만 보세요.
여기 오늘의 성경을 보니까, 예수를 따라 다니면 부수입이 있고 떡고물이 좀 떨어질줄 알았는데, 막상 따라가 보니,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러나 그분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이유도 여러가지 입니다.
1. 내가 돈을 좀 벌고 나서 시작하겠다.
2. 내가 나이 좀 든 다음에 믿겠다.
3. 장사가 조금은 된 다음에 믿겠다 등등
선교사가 선교지로 떠나면서 가장 고통스런 마음은 <늙으신 부모님과의 이별>입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고통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부모님도 다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십니다.
<부모님 죽고나서 떠난다>고 이유를 대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떠날 때에는 말없이........과감하게 떠나야 합니다.
떠나고 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주님을 따르고 싶으면, 그 어떤 핑개도 대지 말고, 그냥 말없이 떠나세요.
다만 <믿음>을 갖고 떠나세요.
그리고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떠나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두가지 <양면성>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과 <예언의 응답>입니다.
하나는 귀신을 쫓으시는 예수님을 통해 <기도의 응답>을 보았고
또 하나는 외로움과 단순함을 지닌 예수님을 통해 <예언의 응답>을 보았습니다.
이 두가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이 세상의 화려함을 보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의 이익도 없고,
알아주지도 않는 고독함을 간직하고,
그냥 성령에 이끌려 떠나는 선교사님들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우리들도 그런 외로움과 고독함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40일 새벽기도16>주님과 함께하는 인생, 마8:23~34, 말씀: 하용조 목사님
마태복음 8장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많은 무리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 했습니다\\"
(마8:18)
여기를 보면, <예수님이 병을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 듭니다.
이렇게 인기가 있다보니까 예수님은 군중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인기를 거절하는 예수님의 <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기를 의식하지 않고, 즉시 떠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인기가 있을 때에 정신을 차리고 조심하십시오.
그런 얄팍한 칭찬에 빠져들면 안됩니다.
인기를 거절하면 축복이 오지만
인기에 야합하면 파멸이 옵니다.
무대에 있을 때와 내려올 때를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8장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배에 오르셨고, 제자들도 뒤따랐습니다. 갑자기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 배안으로 파도가 들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마8:23~24)
그래서 예수님은 배에 오르시고, 바다에 폭풍우가 일어 배안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이것은 마치 우리 인생살이의 한 단면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기대하지 않았던 폭풍이 우리에게 닥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러다가 앞으로 망하는건 아닌지.....\\"라고 의심이 들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이러다가 내가 죽는건 아닌지......\\"라는 걱정이 있지만, 문제는 24절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주무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 인생에 위기가 찾아 왔는데도.....>
<내가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전혀 응답이 없으시니.....>
그런데도 더욱 한심한 것은 <예수님은 잠자고 계신다>는 생각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거기에 없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거기에 계시면서도.....
그런데 거기서 <자고있다>는 사실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가서 예수를 깨우며, <주님,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빠져 죽게 생겼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마8:25)
\\"제자들은 놀래서 예수님을 깨울 수 밖에 없었고, 예수님은 벌떡 일어나며
<왜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이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호수는 아주 잔잔해 졌습니다.(마8:26)
드디어 예수님이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나며, <왜 겁을 먹느냐? 믿음이 없는 사람이여!>라고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그 이유는 \\"비록 폭풍이 불어와서..., 파도가 배안에 들어와도..., 내가 배에 타고 있는데....., 왜 두려워 하느냐?\\"는 호통
입니다.
\\"또 죽으면 너만 죽느냐?\\"
\\"우리는 다 같이 한배에 타고있는 운명인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위기가 오면, 우리는 나만 홀로 버려진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어쩔줄 몰라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자여! 나는 너를 버린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26절에서 풍랑을 꾸짖었습니다.
여기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어떤 인격을 꾸짖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떤 인격>을 꾸짖었을까요?
그것은 바람을 일으키게 하는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겉으로는 바람을 꾸짖은것 같으나, 실제로는 뒤에 숨은 <사탄의 세력>을 꾸짖은 거예요.
나는 여러분들이 [영]을 구분하는 <영 분별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탄의 세력>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조용히 상의하듯 얘기하는게 아니고, 단호하고 강하게 꾸짖어야 물러 갑니다.
\\"마귀는 이제 떠나가 주시겠습니까?\\"라고 사정할게 아니고,
\\"마귀야! 물러가라\\"는 식으로 명령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첫째, 이런 영적원리를 깨닫고
둘째, 그 영적원리를 발견했으면, 단호하게 선포하세요.
예수님이 바람과 파도에게 <말씀>하시니, 파도는 잠잠해 졌고 폭풍우는 물러 갔습니다.
성도여러분?
가끔 여러분은 가만히 있는데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요?
마귀는 얼마나 교활한지 분노를 일으키게 하고, 자기는 얼른 빠져나가고 도망을 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화를나게 한 <어둠의 세력>을 꾸짖어야 해요!
어떤 사람은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괜히 <화내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화내는 악한 영>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마귀>는 잠시 그 사람에게 들어와서 화를 내게 만들고, (잠시 당신을 건드려 놓고)
정작 화를 내면, 자기는 슬쩍 빠지는 것이 <귀신>입니다.
그런 귀신이 우리 주변에는 아주 많아요.
27절을 보세요
\\"사람들은 놀라며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도대체 저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파도까지도 저분께 복종하는가?>\\"
사람들은 그 결과를 보고 놀랐습니다.(마8:27)
그러나 우리는 그 결과를 보고 놀라는것이 아니라, <말씀>을 보고 놀랍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고 제자들에 말씀하셨습니다.
(마28:18)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병고치는 능력> 뿐이 아니고, 귀신쫓는 일을 비롯한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귀신을 쫓을 때, 귀신부터 쫓으려고 하지말고, <말씀>을 보세요.
귀신을 쫓으려고하면, <말씀선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권능과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호수 건너편 기다라 지방에 이르셨습니다. 그때 무덤에서 나오던 귀신들린 두 사람이 예수와 마주쳤습니다.
이들은 너무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을 지나다닐 수 없었습니다\\"(마8:29)
오늘의 성경에 나오는 두번째 얘기는 <귀신들린사람>의 얘기 입니다.
여기서 <귀신>과 <귀신들린 사람>은 다릅니다.
이 두가지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귀신>은 악한 영, 악한 존재이고,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이 들어간 불쌍한 존재입니다.
또 <귀신>은 귀신이란 [영]이고, 귀신들린 사람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다\\"고 때리지 마세요.
그도 사람인데, 맞으면 아프지요.
<귀신>은 우리가 미워할 대상이고, <귀신들린 사람>은 내가 구원해야 할 대상입니다.
단지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에게 인격을 빼앗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사람은 <인격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병든것보다 더 비참합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자기 스스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못해요.
<귀신들린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아주 공격적이고, 사나워서 폭력을 행사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귀신은 예수 믿는 사람을 싫어해요.
귀신은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보고서 덤벼 들어요.
즉, 성령받은 사람에게는 귀신이 안들어 와요.
귀신은 자기의 운명과 때를 너무도 잘 알아요.
예를 들어서 들판에 있는 돌을 옮기면, 그 속에 숨어있던 지렁이들이 햇빛을 받아서 어쩔줄을 모르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귀신은 그것과 마찬가지로 빛이 들어오면, 우선 숨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난 이후에도 우리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는데도, 예수님은 자고 계십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했는데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요\\"
우리들에게 항상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아주 많아요.
그럴 때에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치 욮에게 시련을 주니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소리치며 부릅니다.
하나님은 \\"여기 계시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음에도, 다시 고기잡이 하러 갔습니다.
\\"나는 하나님을위해 헌신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하소연 하지만,
하나님은 주무시는것이 아니고, 거기에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이 개입해야 할 시간을 재고 계시는겁니다.
믿음은 내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도....
믿음은 내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고 잊지 않으십니다.
찬송가 344장의 가사를 음미해 보세요.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버리고,
걸어가세! 믿음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없어도.....
내가 폭풍속에서 잠을 자고 있어도 <나는 너를 보호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는
<믿음의 귀>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예수님만 바라 보세요.
예수님은 더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지셨습니다.
나의 고통은 <죄인의 고통>이고,
예수님의 고통은 하나님 자식인데도 <죄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두운 세력>들은 떠나갈찌어다.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어둠의 세력이 <악한 영>을 물리치고,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는
우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0일 새벽기도18> 복음의 나팔소리, 마태복음9 :1~38, 말씀: 하용조 목사님
벌써 새벽기도가 반환점을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새벽에 모이는 것은 <내 노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갖고 이렇게 모입니다.
그러나 안 믿으면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믿음>이 조금 있으면 조금만 일어나고, <큰 믿음>이 있으면 크게 변화될 거예요.
그러나 안 믿으면, 국물도 없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에게 치유받으려는 사람들이 몰려 와서 치유해 주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마태복음 9장 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중풍환자 한 사람을 자리에 눕힌 채, 예수께 데려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안심하거라,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9:2)
중풍병자는 본인이 걸을 수 없어서 친구에게 이끌려서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고> 병을 고쳐 주셨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병>이 아니고, <죄>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아픈 것은 <죄 때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기 전에 <네 죄가 용서 받았다>고 <죄>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한 까닭은 <죄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보고 몇몇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구나”라고 말했습니다. (마9:3)
이 말은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 [죄의 문제]를 거론하니까 화가 나서, <죄는 하나님의 문제이지, 예수가 죄를 거론
하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항의입니다.
\\"이 말에 예수님은 왜 그런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네 죄가 용서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
떤 말이 더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마9:4~6)
\\"그리고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일어나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마9:6~7)
이를 보고 거기에 있는 무리들은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마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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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세리, 마태를 부르는 예수님을 보세요.
마태복음 9장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마태는 일어나 예수를 따랐습니다.”(마9:9)
예수님은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로 화려하고 능력있고 좋은 것만 보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겉으로 드러난 직업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세리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제자
로 삼으셨습니다.
세리 마태는 왠일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따라 나섰습니다.
그는 조건을 따지지 않고, 어디를 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께서 집에서 저녁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도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마9:10)
\\"이것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너희 선생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느냐?> (마9:11)
\\"이 말을 듣고 있던 예수가 말씀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다>라고 말씀하신 뜻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9:10~13)
예수님은 세리 마태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 하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합니다.
또 금식에 대하여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낡은 옷에 새로운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운 천 조각이 낡은 옷을 잡아당겨 더 찢어지게 된다”(마9:16)
여기에서 <낡은 옷>은 과거의 낡은 사고방식이고,
<새로운 천 조각>은 복음과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가 못쓰게 된다.
그러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전된다.”(마9:16~17)
그리고 낡은 포도주는 과거의 전통과 과거의 나쁜 습관을 말하고,
새 포도주는 새로운 미래와 복음과 진리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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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18~26절을 보십시오.
“갑자기 회당장 한 사람이 예수앞에 무릎을 꿇고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시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그와 함께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뒤 따랐습니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인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 순간 여인은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회당장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피리 부는 사람들과 곡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물러가라. 이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집 밖으로 내보내시고, 방으로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 났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은 그 지역 온 사방으로 널리 퍼졌습니다.(마9:18~26)
이것은 회당장의 <딸>얘기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인 회당장이 체면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찾아 왔을 때는 이미 죽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손을 얹어 기도하면, 죽었던 딸이 다시 살아 났어요.
이것은 <믿음>이예요.
우리의 문제는 <이성>이 움직여야 이해할 수 있지만, <믿음>은 나의 경험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결됩니다.
우리들은 믿을까(?) 말까(?) 하다가도 도중에는 꼭 포기해요.
<믿음>이 채 생기기도 전에 도중에 하차해요.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회당장은 <예수님이 안수하면 살아날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우리도 그런 말에는 이해가 가지 않아도, <성경에 기록되었다>면 믿으세요.
그래야 그 딸같이 살아나게 되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엉뚱한 부탁(?)을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예요.
저는 이 얘기를 보면서 회개합니다.
예수님의 발가락의 때만도 못한 제가, 가끔 <바쁘다>는 핑계로 성도님들의 기도요청을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어요>
주님은 한번도 그런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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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20~2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바로 그때,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은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내가 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인을 보시며 <딸아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 순간 여인은 병이 나았습니다.”
(마9:18~22)
이 여인은 너무나 오랫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했습니다.
혈루병은 요샛말로 <출혈성 자궁 내막염>으로 산부인과 질병입니다.
그곳에 피가 계속해서 나오니까 얼굴은 빈혈로 인해 창백했을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어요.
그러나 그 여자의 생각으로는 <예수의 옷자락을 만져도> 자기 병이 나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여러분도 이런 <믿음>을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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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태복음 9장 27~31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먼 두 사람이 예수를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보게 할 수 있다고 믿느냐?>라고 물으니까
그들은 <그렇습니다 주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엄히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께 대한 소문을 그 지역 온 사방에 퍼뜨렸습니다.”(마9:27~31)
벌써 3일째, 병든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몰려 왔어요.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계속해서 3일째 병든자를 고쳐 주었어요.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습니다.”(마9:35)
여기에 예수님의 <3가지 사역>이 나옵니다.
첫째,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둘째, 복음을 전파하시고,
셋째,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습니다.
36절,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고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마9:36)
여기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죄인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병자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철이 들이 않은 아이를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
또 엉터리 남편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을 보면서 서로 불쌍하게 여기십시오!
이 모두 다 너그러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라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갈등도 모두 다 해결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9장 37절을 보세요.
\\"그때 예수께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없구나! 그러므로 추수할 주인에게 추수할 들판으로 일꾼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9:36~37)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일꾼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추수할 일꾼으로 하나님 앞에 부름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백성이 되십시오.
오늘도 이런 마음으로 승리하시고 내일 또 뵙겠습니다.
<40일 새벽기도19> 복음의 일꾼들, 마10:1~15, 말씀: 하용조 목사님
오늘은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시는 예수님>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시고,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고치게
하셨습니다\\" (마10:1)
예수님은 사람을 선택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일꾼을 부르시는 예수님은 그냥 불렀을까요? 아니예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권능>을 주셨어요.
첫번째, 예수님은 먼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셨고,
두번째로,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어요.
이말은 우리의 일상과는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니지만, 그래도 마태복음 10장 1절에 <병고치는 은사를 제자들에게
주셨다>고 했어요.
마태복음 10장 2절~4절을 보세요.
\\"열 두 사도들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먼저 베드로라고도 하는 시몬과 그 동생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열심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를 배반한 가룟사람
유다 입니다\\" (마10:2~4)
여기를 보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형제의 이름이 나와요.
최근에는 가족들 끼리 해먹는 일이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의 일을 가족끼리 하면 좋아요.
제자들 가운데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어부를 비롯하여, 존경받지 않는 세리, 의심많은 도마, 그리고 유다와 같이 자기를 배신할 사람도 예수님은 제자로 선택
했어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한 이유는 각자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서 선을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지요.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다 제 각각 성격이 달라요.
사람이 각각 <다양성을 보인다>는 것은 아름다운 거예요.
<서로 각각 다르다>는 것은 축복이예요.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하늘나라>로 같지만, 다양한 사람이 모여서 다 다르게 행동하므로, 그것이 조화를 이루면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거예요.
교회는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일하는 곳이고요.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을 먼저 이해하고 만나야 해요.
예수님은 5절~7절에서 [제자 선택의 원칙]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어요.
\\"예수께서 12명을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방 사람들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이 사는 마을에도 들어
가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마 10:5~7)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 파송 원칙>입니다.
첫째, 이방 사람들의 길로 가지 말고,
둘재, 사마리아 마을에도 가지 말고
셋째, 오직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과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라.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얘기한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과는 180도 다른 얘기입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증인이 되거
라\\"(행1:8)
사도바울은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하라>고 했어요.
그럼, <가서 뭘 할꺼냐?>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마10:7)
여기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여기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즉, 여기에서 얘기하는 <하늘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고, <예수님이 역사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면, 내 마음 속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서 <하늘나라>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아픈 사람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고치며, 귀신을 쫓아 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면서 해야할 일, 즉 <사명>을 주시는 것 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까 너희들은 가서
첫째로, 아픈사람을 고쳐주고,
둘째로, 죽은 사람을 살리고,
셋째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고치고,
넷째로, 귀신을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병환자는 그 당시의 저주의 상징이 <나병>이었으니까 \\"나병환자를 고쳐준다\\"는 뜻은 <저주를 물리치라>
는 뜻입니다.
또 \\"귀신을 쫓아내라\\"는 것은 <마음의 병을 고쳐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공짜로 거져 받았으니, 너희들도 사람을 고쳐 줄 때는 공짜로 <거저해 주라>는 말입니
다.
마태복음 9절~1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주머니에 금도, 은도, 동도, 지니지 말라. 여행 가방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챙기지 말라. 일꾼이 자기
가 필요한 것을 받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마10:9~10)
이것은 전도할 때 필요한 <좋은 지침서>입니다.
전도하러 나가면서 <돈을 주머니에 넣고 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어야 \\"그때부터 기도하게 되고, 주님만 의지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이 구절을 보니, 대학교 시절에 <거지전도>라는 이름으로 전도하던 경험이 생각납니다.
10절에서 \\"여행가방도 챙기지 말라\\"는 말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전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그런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사례비도 일해서 받는 월급이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사역비냐(?)의 논란이 계속되
는 것입니다.
교계에서는 일하고 받는 <월급의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했으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는 논리입니
다.
내가 헌금하는 것은 [나] 라는 사람을 통해서 헌금은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것>을 [내가 대신 믿음으로 받치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헌금>은 은혜받은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또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월급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신성한 노동을 위해서 일하는 거예요.
11절을 보세요.
\\"어느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무르라\\"(마10:11)
어느 도시나 어느 마을이나 다 하나님께서 일할 일꾼을 준비해 주십니다.
좋은 사업에는 좋은 파트너를 준비해 주십니다.
그것은 내가 찾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미리 준비했다> 나에게 주십니다.
\\"그 집에 들어갈 때는 평안을 빌라\\"(마10:12)
\\"그 집이 평안을 받을 만하면, 그 평안이 거기 머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마10:13)
저는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면, 두 가지 기도를 합니다.
첫번째 기도는 이집에 있는 귀신들은 물러갈 찌어다.
두번째 기도는 이 집안에 평안이 함께할 찌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것을 알려 주십니다.
여러분의 눈 앞에 위기를 보지 말고, 높이 계신 하나님을 바라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앞날에 희망이 보일 것입니다.
<40일 새벽기도20>지혜롭고 순결하라, 마10:16~33, 말씀: 하용조 목사님
오늘의 주제는 <지혜롭게, 순결하게, 담대하게 살아라>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6~17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늑대 소굴로 보내는 것 같구나. 그러므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
(마10:16~33)
이 말씀은 요즘 시대에 아주 잘 맞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늑대의 소굴>과도 같아서, 양과 같은 크리스찬들은 잘못하면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바다 위에 떠있는 조각배와 같아서 언제나 불안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크리스찬들이 산속에서 혼자 살수도 없고, 조악이 가득찬 세상에서 살수 밖에 없어요.
그럼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너무나 험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두사람 있어요.
한 분은 <요셉>이고, 또 한분은 <다니엘>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합니다.
그는 이방 나라인 거기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이 신실했기 때문에 발탁이 되어, 드디어 그 나라의 총리대신까
지 되었어요.
요셉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예수를 믿지않는 애굽이지만, 요셉의 지혜를 높이 평가한 결과입니다.
또 한사람으로 <다니엘>이 있습니다.
바빌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우상이 난무하는 가운데에서도 목숨걸고 싸웠어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 그는 국가 서열 3위까지 올라 갔습니다.
원수에게도 인정받는 아주 큰 사람이 되었어요.
다니엘을 보면서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은 <신앙>을 탓하지 말세요.
불교계통의 회사를 다니고 있어도 자기의 <믿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앙탓만 해요.
하나님은 오히려 거기에 계신 사장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리더가 될수 있도록 도와 줘요!
언제나 그런 지혜와 총명과 순결한 마음을 주셔서 우리가 화합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쪽박을 깨지 않으려고 고민합니다.
깽판을 안치려니까 고민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17절을 보세요.
“사람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너희를 채찍질할 것이다”(마10:17)
여기에서 성경은 <누구를 조심하라>고 합니까?
그것은 <사람>입니다.
이 말은 사람을 의심하고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의 칼날이 날아 옵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문제가 발생해요.
우리는 그런 사람을 조심해야 해요.
미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목사님을 초빙한 사람이, 한참 뒤에는 그 사람이 앞장서서 목사님을 내 쫓아요.
그러니 사람에 대하여 안심하지 말아요.
사람은 그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고, 그런 존재예요.
저도 교인으로부터 고발을 당하여 대검까지 갔다 왔어요.
인간은 그래요. 그 인간이 잘나고 못나서가 아니예요.
인간의 속성이 다 그래요. 이해관계가 안맞으면 남을 모함하고, 가만히 놔 두지 않아요.
나는 당뇨로 인해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해요.
그러는 나보고 <마약한다>고 소문을 내요. 그래서 다녀 왔어요.
18절을 보세요.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또 이방사람들에게 증인이 될 것이다”(마10:18)
예수 믿으면 잡혀가는데 <하나님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재판을 받는데 <하나님은 너와 함께 있어서> 증인이 될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9~21절까지 보세요.
“그러니 그들에게 잡혀가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가 말할 것을 일러주실 것이다. 말하
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 즉, 아버지가 자식을 배신해서 죽
게 만들고, 자식이 부모를 거역해 죽게 만들 것이다”(마10:19~21)
21절에 나오는 사람들이 공산당이예요.
6.25 전쟁 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존재해요.
모슬렘에서는 종교를 기독교로 바꾸면, 자식까지도 죽여요.
2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10:22)
핍박의 시대나 환란의 시대에는 이런 일이 일어 납니다.
북한이 그런 나라입니다.
예수 믿으면 감옥 보내므로 눈치보며 지하 교회에서 모여요.
우리는 자유를 만끽하니까 그런 건 몰라요.
24절을 보세요.
“제자가 스승보다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 위에 있을 수 없다. 제자가 스승만큼 되고, 종이 주인만큼 되면 그것으로 충분
하다. 그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블이라 불렀으니, 하물며 그 집안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심하겠느냐?”(마10:24~25)
여기에서 <스승>과 <주인>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제자가 예수님보다 높을 수 없고, <종>이 예수님보다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제자가 예수님만큼 되고, <종>이 예수님만큼 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람을 두려워 말고, <주변의 환경을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육체는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영혼과 육체를 한꺼번에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환경이지만, 겁먹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마10:28)
이런 세력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공산주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자기혁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교인을 탄압해요.
29절~31절을 보십시오.
“참새 두 마리가 앗사리온 동전 한 개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땅에 떨
어지지 않는다”(마10:29)
“또한 하나님은 너희 머리카락 수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마10:30)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도 더 귀하다”(마10:31)
29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참새까지도 간섭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지 않겠느냐?>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그 수를 세시는 분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당신은 참새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참새같이 살지 말고, 독수리같이 사세요.
그러면 우리는 매일 승리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
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할 것이다.”(마10:32~33)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선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하루도 생기있게 승리하는 생활을 사십시오!
<40일 새벽기도21> 다툼과 영접, 마10:34~42, 말씀:하용조 목사님
먼저 마태복음 10장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땅에 평화를 주러왔다고 생각 하지 말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마10:34)
이 말씀은 <복음의 이중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복음>은 무엇을 뜻합니까?
<복음>은 우리에게 평화와 연합과 일치와 기쁨을 줍니다.
그럼, 여기에서 <칼>은 무엇입니까?
<칼>은 전쟁과 분리와 슬픔을 나타 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개념]이고,
반대로 <칼>은 그 사람을 [죽이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을 살리려]고 하지만,
어두운 빛이 나타나면 <어두운 [영]이 우리를 싸우라>고 하면서, [다툼]을 일으키게 유도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지만, <복음>에는 \\"타협해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에 대해서는 <칼처럼 타협하지 말라>는 메세지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북한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도적인 관점에서 <무조건 퍼 줘야한다>고 하지만, 한편에서는 말이 많습니다.
북한의 속 마음이 진정으로 선을 추구하지 않고 <악의 축>이라면, 타협할 수 없어요.
35절을 보세요.
\\"나는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다투게 하려고 왔다\\"(마10:35)
이 말씀에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영적인면에서 안되는 것은 안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탄에 속한 것은 아무리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타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에서 <악과 타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론 물보다 피가 진하지요.
그러나 피보다 진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피보다 진한것을 영적원리로 생각하면 <믿음이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결코 <가족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본직적인 뜻(=믿음)과 비 본질적인 것(=가족과 다툼)은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렇게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내게 이것을 증거합니다.
곧 내게 큰 근심이 있다는것과 내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 동족이 구원만 얻는다면, 내가 저주
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롬9:1~3)
사도바울은 자기 민족을 무척 사랑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는데 불만이 많아서 한 말입니다.
사도바울도 옛날에는 예수를 거부했지요.
그러나 예수를 받아드리고 나서 과거를 후회합니다.
자기의 혈육이 예수를 거부하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내 민족을 구원하지 못하면, <내가 저주를 받겠다>고 얘기 합니다.
그러다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자기 민족을 버리고, <이방인의 사도>로 떠납니다.
사도바울은 떠나고 나서도 자기 민족과 가족을 잊지 못하고 있어요.
진짜로 <복음>을 알면, 사도 바울과 같이 가족을 버릴 수 없어요.
마태복음 10장 3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안 식구가 될 것이다\\"(마10:36)
\\"누구든지 나보다 자기 부모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사
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마10:37)
오해하지 마세요.
\\"사람의 원수가 집안에 있다\\"는 말은 집안식구들이 <왠수>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족끼리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사랑은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본뜻은 [하나님의 가치]가 \\"자기 민족이나 가정보다 높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회사에 다니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직장을 우선할 것인가(?), 아니면 가정을 택할 것인가(?)에 고민 할때
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 내가 \\"직장을 선택했다\\"고해서, <가정을 버린다>는 의미가 아닌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가족과 내 민족을 버리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가치가 더 높다]는 뜻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역시 내 제자로서 합당하지 않다\\"(마10:38)
자기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요.
사랑이 뭐예요?
내가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여자를 사랑한다면, 한편으로는 지구의 반을 차지하는 다른 여성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 <포기>가 없으면 사랑이 아니예요.
그런<희생>을 각오해야만, 한 여자에게 충실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중요한 것은 포기 안해요.
우리의 기도는 <나를 잘되게 해달라>는 기도이지만, <복음>은 그게 아니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겁니
다.
예수님에게 <자기 십자가>가 있듯이, 나도 <내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성격>이 될 수도 있고, <나의 못된 습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특별 새벽기도 40일을 통하여, 이런 나의 <못된 성격>이나 <못된습관>을 고치도록 노력하세요.
십자가는 역시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피하지 마세요.
39절을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아끼려는 사람은 그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10:39)
\\"자기가 목숨을 버리려고 마음을 먹으면 생명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순신장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이긴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가되, 한번지고 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매일매일, 매 순간, 지고 가는 거예요.
그것은 물론 고통이므로 나를 괴롭히지요.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지 말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는 거예요.
제일 큰 나의 십자가는 <자기 성격>입니다.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니까, 그것과 자기와의 싸움이예요.
이 때에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자기는 <죽었다>고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첫번 째 생각은 : \\"이미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두번 째 생각은 : \\"죽은 사람이 왜 말이 많으냐?\\"는 얘기입니다.
참고로 이와같은 내용이 누가복음 9장 23절에도 나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사람
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눅9:23~24)
40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부터 <영접>에 대한 애기가 나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마 10:40)
여기에서 말하는 <영접>은 \\"섬긴다\\"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을 영접했다\\"고 하지만, 그를 <섬기는 개념>이 없어요.
<섬김>은 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말로만 \\"섬긴다\\"고 하면서, 자기가 <종>이 되기는 커녕 <자기를 앞세우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요.
42절을 보세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제자라는 이유로 이 <작은 사람>들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
드시 상을 받을 것이다.\\"(마10:40)
여기에서<작은 자>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작은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상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크리스찬은 이런 <작은 자= 소자>의 개념이 중요해요.
하나님은 이런 <작은 자>를 섬기는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삶에 이런 <영적인 흥분>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용서>입니다.
그러나 그런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매일 매일, 매시간마다 죽여야 합니다.
자기 성질을 없애야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남을 섬기게 됩니다.
오늘도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승리하는 생활이 되십시오!
<40일 새벽기도22>의심에서 믿음으로, 마11: 1~15, 말씀:하용조 목사님
먼저 마태복음 11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열두제자에게 가르치고 또 다른 여러 마을에서도 가르치려고 그곳을 떠나셨습니다“(마11:1)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선택하고,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천국복음도 전파하시고, 병도 고쳐주는 일을 계속 하셨습니
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쉬지 않고 계속하여 <3대 사역>을 묵묵히 수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서도 \\"끝났다\\"고 생각하는게 결코 끝나는게 아닙니다.
<특새 40일이 지났다>고 예수믿는 일이 끝나는게 아닙니다.
또 우리가 나이들어 은퇴하면, 그때부터 우리의 신앙이 끝나는 겁니까?
아닙니다. 은퇴하면 그때부터 더 바빠져야 해요.
그동안 직장을 핑개로 봉사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다보면, 퇴직하고 나서 더 바빠 집니다..
다만 직분과 위치가 달라진 것이지, 내가 해야 할 일은 또 있어요.
“회사를 그만 두었다”고 기도하는 일을 쉬겠어요? 봉사하는일을 멈추겠어요? 전도하는 일을 그만 두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은퇴가 없어요. 신앙인은 쉴 시간이 없어요.
우리의 기도와 봉사와 전도는 계속 되는 것입니다.
회사때 맡았던 직책인 사장의 임무가 당신의 전부가 아니예요.
회사를 그만 두어도 사장의 직책은 끝났어도, 교회에서 할 일은 계속되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 2~3절을 보세요.
“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께 물었습니다. <오실 그분이 바로 선생님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사람
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물어 보게 했습니다“(마11:2~3)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 되었지만, 세례요한은 감옥에서 억류되어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아가 오면 세상이 뒤 바뀔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아주 조용히 병든 사람들이나 귀신
들린 사람을 치료해 주시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에게 의문이 생겼습니다
“저분이 정말로 메시아인가?”
“메시아가 오면, 혁명적으로 세상이 바뀔것으로 생각했는데, 어! 그런데 이게 아니잖아!” 하면서 예수님을 의심하며 반
발하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세례요한은 전통적인 생각을 강조하는 사람이므로 그렇게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서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마11:4)
세례요한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어요.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이길 바랬는데, 막상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면서 실망을 느낀 거예요,
예수님이 오면 심판을 하고, 세상이 바뀔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하는 일은 긍휼만 강조하여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시니
자기가 기대한 것보다 더 낮은 것 같아서 오해를 하는 거예요.
5~6절을 보십시오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고, 다리를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 지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
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 ”
“<나를 의심 하지않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전해주라\\" (마11:5~6)
예수님의 생각은 세례요한과 달라요.
혁명주의자인 세례요한이 볼 때는 예수님이 너무나 답답한 거예요.
예수님은 폭력적인 방법이나 혁명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어요.
예수님은 어려운 사람, 병든 자를 고쳐주는 <긍휼한 마음>을 보이고 있어요.
노무현 정부에서 전 교조가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 되는게 아니예요.
그들의 주장이 겉으로는 옳은 것 같아도, 그런 투쟁적인 방법으로는 오래가지 않아요.
예수님의 사역은 조용히, 아주 조용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긍휼한 마음>을 갖고,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주고 있어요.
혹자는 <교회가 왜 침묵만 하느냐?>고 소리치지만, 교회는 사회갈등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면 안돼요.
7절~9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느냐? 너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좋
은옷을 입은 사람이냐? 아니다. 좋은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그러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느냐? 사실 요한은 예언자 보다도 더 훌륭한 인물입니다 “(마11:7~9)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례요한에 대한 평가입니다.
여기를 보아도 요한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겠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내가 분명히 얘기 하지만,
지금까지 여인에게서 난 사람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 그러나 하늘 나라 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
보다는 크다“(마11:10~11)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침략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들이 그 나라를 차지 하게 될 것이다
(마11:12)
천국은 침략하는 자가 차지한다.
이 말씀은 <적극적인 믿음을 가진자>가 “하늘나라, 천국을 차지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있는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으면, 감이 입으로 떨어져 먹을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기다리면 안되지요.
사람이 자기몸을 움직여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감을 자기 손으로 따서, 먹어야, 하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도 주고, 발도 주었으니, 그것을 이용하여 감도 따서 먹어야 합니다..
천국은 그렇게 <공격하는자>에게 차지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십니다.
15절의 말씀은 “귀있는 사람은 들으라”(마11:15) 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이런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침략하는자가 차지합니다.
적극적인 사고 방식으로 <큰 믿음>에 도전 하세요.
성도 여러분?
하용조 목사를 사랑하는 것은 고마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나 하용조를 사랑 하지 말고, 예수님을 사랑하세요.
나는 그분이 바라시는 <하늘나라>의 길목을 안내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목표는 하용조가 아니고, 예수님 이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을 보시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 보세요.
오늘도 승리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40일 새벽기도23>기적마저 부인하는 교만, 마11:16~30, 말씀: 라준석 목사님
먼저 마태복음 11장 16절을 보세요.
\\"이들은 마치 장터에 앉아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소리치는 아이들 같다. <우리가 너희를 위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도하는 노래를 불러도 너희는 슬피울지 않았다>\\"(마11:16)
16절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반응하지 않는 세대>라고 규정하고, <장터에서 함께 놀다 싸우는 모습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피리\\"는 <결혼식 놀이>를 말하고, \\"애도하는 노래\\"는 <장례식 놀이>를 말합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요즘 세대는 <결혼식 놀이>를 해도 춤을 추지 않았고, <장례식 놀이>를 해도 곡하지 않는 세대
이다.
한마디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사람을 믿고 신뢰하고 받아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왜 사람들을 받아 드리지 않을까요?
그것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집안에서 우리들도 왜 싸웁니까?
그것은 아내 생각과 남편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싸웁니다.
<내 생각>으로는 치약을 끝에서부터 차곡차곡 짜야 하는데, 남편은 가운데를 푹 눌려서 쓰기 때문에 아침마다 신경질
이 나서 싸우는 거예요.
또 내가 남을 싫어하는 까닭은 뭘까요?
내가 <남을 바라보는 기준>과 그것을 <받아드리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내 기준>은 모든 것이 다 좋아도 어떤 특정한 것 한가지라도 내가 싫으면, 그 때는 싫은 거예요.
그러나 남은 또 다른 생각을 갖기 때문에 서로 다투는 거예요.
그러나 그럴 때에 <내가 선택하는 기준>은 뭡니까?
모든 것이 다 싫어도 어떤것 하나가 <내 맘>에 들으면, 나는 이기적으로 그를 좋아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이와같이 너무나 다른 이중성을 갖고 있지요.
그러나 은혜받으면 모든게 다 싫어도, 한가지 때문에 그 사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18절~19절을 보세요.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사람들이 <저 사람이 귀신 들렸다>하더니,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니 <여기 먹보에
다 술꾼 좀 보라>, <거기다가 세리와 죄인과도 친구가 아닌가?>라고 말하는 구나.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그 행한 일
이 옳다는 결과를 입증하는 법이다\\"(마11:18~19)
이 말은 \\"세례요한은 금식해서 싫고, 예수님은 너무 많이 먹어서 싫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방금 전에 17절에서 예수님이 비유하신 것과 같이 \\"장터에서 기뻐도 춤추지 않고, 슬퍼도 울지 않는 세대들\\"이
라고 말한 것과 같이 <요한은 금식해서 싫고, 예수님은 많이 먹어서 싫다>는 말입니다.
역시 요즘세대가 그러하니 \\"은혜를 받으면 금식해도 좋고, 많이 먹어도 좋다\\"로 변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회에오면 크게 기도해도 좋고, 묵상기도를 해도 좋아 보여야 합니다.
은혜가 임하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을 보면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재물
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롬12:1~2)
이렇게 거부하던 세대를 본받지 말고, 새롭게 변화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온전한 뜻을 알아야 합니다.
20절~22절을 보십시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기적이 많이 나타난 도시들은 꾸짖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기적의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라신아! 네게 화가 있을 것이다.
벳새다야! 너희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다.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이 두로와 시돈에서 나타났다면,
그들은 벌써 오래전에 삼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더 쉬울 것이다\\"
\\"그리고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들려 올라갈 것 같으냐? 아니다. 너는 저 음부(지옥)로 내려갈 것이다.
네게 베푼 기적들이 소돔에서 나타났다면 그 도시가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마10:20~23)
여기에 도시 6개의 이름이 나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기적이 일어 났는데도 하나님을 거부한 도시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일어 났는데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도시>입니다.
기적이란 체험한 사람은 물론이지만, 그 옆에서 그것을 본 사람도 <은혜>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그렇게 옆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거예요.
25절을 보세요.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제가 찬양합니다. 이 모든것을 지혜롭게
학식있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니 감사합니다\\"(마11:25)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기셨습니다.
아버지외에는 아들을 아는 사람이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이 택해 계시해 준 사람들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
이 없습니다(마11:26~27)
여기를 보면 연결되는게 또 하나 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지혜롭고 학식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받아드리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영성이 민감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영성>도 사람마다 다 달라요.
남들은 듣지 못했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그 반대로 기적을 보아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영성>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장터에서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 말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함>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새벽기도의 간증문처럼 말씀 한마디를 듣고도 기뻐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받아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모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
는 메기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8~30)
예수님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서운 암을 가진 사람이나 감기에 걸린 사람이나,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증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혼자서 끙끙거리지
말고, <다 내게로 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니 너희 얘기를 듣겠다\\"고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내게와서 기도하면, 평안과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맺습니다.
장터에서 서로 싸우지 말고,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와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십시
오.
그리고 모든것을 털어 놓고 기도하세요.
지식과 학식이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거부하지 말고,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놀라운 체험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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