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11월 1일 금요일]
『대동야승』 제11권
[기묘록 속집 (己卯錄 續集)] 「구화사적(構禍事蹟)」
구화사적(構禍事蹟) : 기묘사화 시종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병인년(1506)에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 박원종(朴元宗)과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과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이 반정을 하려 할 때에 우의정 강귀손(姜龜孫)을 시켜 비밀리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생각을 떠보게 하였다.
이에 수근이 말하기를,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세우는 것이니 나는 말할 수가 없소.” 하였다. 곧 연산(燕山)의 비(妃)는 수근의 누이요, 중종(中宗)의 전 왕비는 수근의 딸이기 때문이다. 귀손이 마침 등극사(登極使)로 명 나라 서울에 가는데 일이 발각될까 스스로 의심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이 되어 길에서 죽었다.
원종 등은 귀양가 있는 이과(李顆)가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수령과 더불어 본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기일을 당겨서 먼저 거사하려 하였다. 그런데 9월 초이튿날에 마치 연산군이 장단(長湍)의 적벽(赤壁)에서 놀이를 하게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초하룻날 저녁에 원종 등이 장사들을 훈련원(訓練院)으로 모으기로 약속을 하니 그날 모인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으나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이에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 유자광(柳子光)을 부르고 그의 계책에 따라 두터운 유지(油紙)를 오려 표신(標信)을 만들어서 장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죄수와 역부(役夫)를 몰아 돈화문(敦化門) 앞 수백 보쯤 되는 곳에 나가서 말을 세워 진을 치고, 운천군(雲川君)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의 저사(邸舍)를 호위하게 하고, 변수(邊修)ㆍ최한홍(崔漢洪)ㆍ심형(沈亨)ㆍ장정(張珽)을 시켜 궁 내성(內城)을 지키면서 내사복시(內司僕寺)에 쌓아둔 꼴더미에 불을 질러 뜻밖의 변에 대비하게 하고, 또 신윤무(辛允武)를 보내어 용맹한 장사 이조(李藻)를 거느리고 신수영(愼守英)ㆍ신수근(愼守勤)ㆍ임사홍(任士洪)의 집으로 가서 그들을 끌어내어 쳐 죽이게 했다.
그리하여 초이튿날 자순대비(慈順大妃)의 전지를 받들어 관원을 보내어 종묘에 고하고, 왕을 폐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아 교동(喬桐)으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진성대군을 맞아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하고, 그의 부인 신씨를 봉하여 왕비로 삼아 법가(法駕)를 갖추어 궁중에 들어와서 여러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국내에 대사면령을 내려 죄수를 석방하고, 여러 역사(役事)를 파하니 기뻐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초4일에, 세 대장(大將 성(成)ㆍ박(朴)ㆍ유(柳))와 유자광 등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미 그 아버지 신수근을 베었으니, 그 딸이 왕비의 지위에 있을 수 없다.” 하고, 폐하여 친정으로 내쫓고, 윤여필(尹汝弼)의 딸을 책봉하여 왕비로 삼으니 곧 그가 장경왕후(章敬王后)다.
장경왕후는 을해(乙亥, 1515) 2월 26일에 원자(元子)를 낳고, 7일 만에 승하하였다. 그리하여 그때 여론이 연산군의 모후(母后)와 자순왕비(慈順王妃)가 모두 후궁으로 있다가 승진하여 정비(正妃)가 된 일이 있으니, 만일 성종(成宗)조의 전례를 따른다면 박숙의(朴淑儀)와 홍숙용(洪淑容)이 모두 장성한 아들이 있으므로 새로 낳은 원자를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이라 하고,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원자는 곧 우리 인종(仁宗)이다.
이때에 충암(冲庵)ㆍ김정(金淨)은 순창(淳昌) 군수로 있고, 눌재(訥齋)ㆍ박상(朴祥)은 담양(潭陽) 부사로 있었는데, 조정에서 여론을 듣겠다는 전교(傳敎)를 받고 이들은 공동으로 소(疏)를 올려 항의하기를,
“본국의 심온(沈溫)이 태종(太宗)에게 죄를 지었으나, 소헌(昭憲)왕비의 옥체(玉體)에는 흠이 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제 원종의 무리가 스스로 제 일신을 위하려는 꾀로 군부(君父)를 협박하고 국모(國母)를 쫓아내어 천하의 큰 명분을 범하였으니, 관작을 삭탈 추방하여 그 죄를 만세에 밝히고, 신씨를 복위시켜 예전 은혜를 온전히 하게 하라. 그렇게 해야만 옆자리에 있는 후궁들이 엿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8월 12일에, 양사(兩司)에서 알성별시(謁聖別試)초시(初試)를 시행하여 파장(罷場)하고 숙배(肅拜)한 뒤에 양사의 관원들이 모두 서빈청(西賓廳)에 모였다. 이때 대사간이행(李荇)이 주장하기를, “만일 다시 신씨를 세움으로써 왕자의 경사가 있게 되어 가례(嘉禮)의 선후를 의논한다면 신씨가 먼저이니, 원자(元子)를 어느 땅에 두려는가.” 하여, 김정ㆍ박상의 상소를 잘못된 주장으로 몰아 버렸다. 대사헌 권민수(權敏手)등도 이 이행의 의견에 붙좇아 죽일 죄로 몰려고 합사(合辭)하여 심문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보내어 이들을 잡아 올려다가 신문하였으므로 일이 거의 헤아리기 어렵게 되었다.
이때 좌의정 정 문익(鄭文翼), 정광필(鄭光弼)공이 조정 신하들을 거느리고 이들을 구제하려고 말하기를, “그들의 말이 비록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죄를 주어서는 안 되오. 죄를 주면 진언(進言)하는 길을 막게 하는 것이오.” 하였다. 그리하여 8월 23일에 곤장 1백을 때리고, 도형(徒刑) 3년에 처하여 외방 역(驛)으로 정배시키고 직첩(職牒)만 모두 빼앗게 했다. 그러나 곤장은 면하게 되었으니 이는 정 대신의 힘이었다.
안 정민(安貞愍, 안당〈安瑭〉)공이 이조 판서로서 대신의 뜻이 조정에서 행하여지지 못하여 체통이 서지 않는 것을 분하게 여기고, 8월 28일에 조회가 파하자 곧 아뢰기를,
“박상과 김정(金淨) 등이 무슨 의견이든지 제시하라는 조정의 영을 공손히 받들고 충성을 다하여 진언을 한 것인데, 지금 한두 사람의 말을 들어 도리어 엄한 견책을 가한다면 이것은 실상 진언하는 길을 막고 사기를 저상시키어 만세의 비방을 사는 것이다. 재상은 국론을 바로잡고 국사를 결단하는 것이요, 대간은 특별히 허물을 다스리고 어긋남을 규탄할 뿐이다. 그래서 대신과 육경(六卿)과 시종신(侍從臣)들이 모두 그들에게 죄를 주지 말기를 청하였으니 국시(國是)가 여기에 있는 것이오. 그런데 대간은 홀로 그르다고 하니 이것이 공정한 주장이라 할 수 있는가. 또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를 죄준다면 누가 몸을 잊고 나라에 따르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권민수와 이행은 다시 안 정민을 반박하고 나라를 그르친다고 지탄하여 거의 한 달이나 지나서야 물의가 가라앉아 정지되었다. 이 뒤로부터 조야의 인사들이 모두 용기를 잃고 두려워서 몸을 움츠리고 말을 꺼리면서도 권민수ㆍ이행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응교(應敎) 이언호(李彦浩)가 9월 초4일 밤에 임금 앞으로 나가 아뢰기를,
“신이 근자에 시관(試官)이 되어 한 응시자가 대답한 책문(策文)을 보니, 거기에, ‘대간으로서 박상(朴祥)등에게 죄를 주자고 주장한 것은 스스로 직책을 잃은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유생의 망령된 주장이니 의당 낙방을 시켜야 옳았을 터인데, 오리어 뽑았으니 심히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지 않으니, 우부승지 신상(申鏛)이 곧 아뢰기를, “과거 보는 자가 대답하는 책문은 각각 자기의 뜻을 말하는 것이니 문리가 화려한 것을 취할 뿐입니다. 그런데 만일 자기와 다르다는 것을 혐의하여 합격시키지 않는다면, 선비를 취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언호가 감정을 품고 대사헌 권민수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민수는 곧 신상을 탄핵하려고 하였으나 대간들이 협조를 하지 않아 드디어 폐기되고 말았다.
그 뒤 11월 28일에 정암(靜庵)ㆍ조광조(趙光祖)가 처음으로 정언이 되어 곧 이행의 무리를 배척하여 말하기를,
“대간은 직책이 언로를 맡고 있는 것인데 도리어 사실을 말하는 사람을 죄주어 먼저 언론의 길을 스스로 막음으로써 임금으로서 간함을 막는 부끄러움을 이루어 놓았으니 그 실수가 크다. 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니 파직시킴이 옳다.”
하고, 되풀이하기를 마지않았다.
이에 임금은 대신에게 의논하여 양사의 관원들을 모두 갈아 버리게 하였다.
12월 초2일에 신임 대사헌 이장곤(李長坤)과 신임 대사간 김안국(金安國)은 언로를 구원하자는 조정암의 주장을 두둔하였다. 그러나 장령 유보(柳溥)와 김희수(金希壽)는 이언호의 의논에 현혹되어 권민수와 이행을 두둔하여 말하기를, “언로라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장곤은 여러 번 되풀이하여 상대편을 타일렀으나 여전히 서로 용납되지 못하므로 대궐로 나가서 각각 자기들의 주장을 전달하였다. 이에 임금은 장곤과 안국을 체임시키고, 유보 등으로 대신 그 직책에 나가도록 명하였다.
이때 직제학(直提學) 김안로(金安老)양쪽이 다 옳다는 의논을 제기하여 보 등의 체직(遞職)을 논박함. 등이 분명히 분별하지 않고 “조광조는 언로를 부식(扶植)하기 위함이었고, 권민수ㆍ이행은 종사를 위하여 죄주기를 청한 것이니 처음부터 모두 그른 것이 아니다.” 하였다.
당시에 조정 의론이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여 다투므로 박열(朴說)은 대사헌이 되었으나 병을 칭탁하여 사표를 제출하고, 방유녕(方有寧)은 대사간이 되어 의론이 정암과 같았으나 홍문관의 탄핵을 받았다.
그때 의론이, “김정과 박상이 허물없이 폐비된 신씨의 원통함을 풀어 주고 또 첩이 정실 아내가 되는데 대의명분이 없다는 것을 밝히려 함이었는데, 권민수ㆍ이행은 이를 간사한 의논이라 지탄하니, 실상은 재주를 질투하고 착한 이를 원수같이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언호가 간사함에 아첨하는 것이나 안로가 양쪽이 옳다는 것이 모두 만세 공론에 죄를 얻은 것이다.” 하였다.
하루는 한림(翰林) 이약빙(李若氷)이 공적인 일로 좌의정 정 문익공의 집에 갔었다. 문익공이 말하기를, “대간은 직책이 언로를 맡은 것인데, 유보ㆍ김희수는 언로를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편견을 고집하니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또 홍문관은 양편이 옳다는 말만 내세워 분명히 분별함이 없으니 나는 그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였다.
그때 대신과 육경(六卿)이 권민수ㆍ이행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집에서만 의논할 뿐 조정에 나아가서는 변별하여 해명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고집하는 무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임금의 뜻에 의혹을 조장시킬 뿐이었다.
병자년 봄에 이르러 대신ㆍ대간ㆍ시종들이 박상ㆍ김정의 석방을 청했으나 임금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차자를 올려 힘써 건의하였으나 또다시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두들 말하기를, “양쪽이 다 옳다는 의논에 끌리어 오래도록 용서를 받지 못한다.” 하였다. 그리고 공론이 다시 벌어져서 허물을 옥당(玉堂)의 상소에 돌렸다.
3월 초 8일에 정언 박세희(朴世熹)가 직책을 내놓으면서, “신이 전에 부수찬(副修撰)으로 있을 때에 직제학 김안로(金安老)가 양쪽이 다 옳다는 말을 꾸며 내었습니다. 그때 신의 뜻은 그렇지 않았으나 남에게 구속을 받아서 감히 따로 자기의 뜻을 말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 말에 대답하기를, “자기 뜻에 그르다고 생각하였다면 그때 곧 진달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금 와서 내 뜻이 본래 그렇지 않았다 하면 어찌 그게 말이 되는가.” 하였다. 이에 세희는 진땀이 등을 적시어 죽고자 하나 죽을 땅이 없었다.
장령 홍언필(洪彦弼)과 지평 윤지형(尹止衡)이 또한 사표를 제출하면서, “언필이 응교가 되고 지형이 수찬이 되었을 때 김안로의 교묘한 속임수에 끌리어 같은 말로 함께 상소를 올렸다.” 하였다.
3월 초 10일에 홍문관 교리(校理) 신광한(申光漢)ㆍ부교리(副校理) 이청(李淸)ㆍ부수찬 윤자임(尹自任)ㆍ저작(著作) 기준(奇遵) 등이 이때에 와서 뉘우쳐 깨닫고 또한 사직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권민수와 이행이 조정암을 아주 미워하게 되었다.
이언호는 김모재(金慕齋)와 이 일을 이야기하게 되었을 때, 언호가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그때 왜 김정ㆍ박상을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두어 조정 의론을 이렇게까지 시끄럽게 만들었는가.” 하였다.
이 해 겨울 12월 초 3일에 김정ㆍ박상이 공론에 따라 조정으로 들어오자 언호는 전라 감사로 나가 기묘년에 죽고, 민수는 충청 감사로 나가서 무인년에 죽었으며, 이행은 파면을 당하였다. 그때 수원 부사 이성언(李誠彦)이 소(疏)를 올려 신구(伸救)하다가 그도 또한 탄핵을 당하여 파면되었다. 김안로도 이조 참의로부터 경주 부윤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때부터 의론을 주장하는 선비들은 착한 것을 보면 포상하여 천거하고, 악한 것을 보면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여, 행실이 효제에 어긋나고 인의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조정에서 일을 함께 하고자 아니 했으므로, 반드시 착한 것을 좋아하여 그 청백함을 함께 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여 그 더러운 것을 함께 싫어하니, 좋고 나쁜 것이 분명하고 옳고 그른 것이 칼로 벤 것 같았다. 그리하여 착한 무리들이 등용되고 사람들이 맑은 이름을 사모하여,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된 것이 이때에 가장 성하였다.
대개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아랫사람은 더 심하게 좋아하고, 굽은 것을 바로잡다가 도리어 곧음이 지나치는 것은 필연한 이치이다. 연소한 신진들이 제도를 개혁하기에 용감하나,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 어질어진다.”는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당우(唐虞)의 정치도 기일이 되어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기묘년에 이르러, 득실을 근심하는 무리들이 한산한 벼슬에 버티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찬양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비방하여 청류(淸流) 좋아하는 무리라 하면서 남을 지탄했다. 후생들 중에 힘써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소학(小學)의 무리라 하고, 천거되어 뽑힌 선비들을 현량과(賢良科)라 하여, 서로 비방하고 속된 말을 퍼뜨려 듣는 사람들이 스스로 의심을 갖게 하였다. 이에 같은 것끼리는 당을 만들고 다른 것들은 공격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정 문익(鄭文翼)ㆍ신 문경(申文景)ㆍ안 정민(安貞愍)이 함께 삼공의 자리에 있으면서 양쪽을 화해시켜 억제하려 했으나, 간원(諫院)에서는 도리어 삼공의 재기(才氣)가 부족하다고 논핵하였다. 조 문정(趙文正)도 그때 대사헌으로 있었는데 그도 또한, “이럴까 저럴까 하여 시속을 따른다.”는 비방을 받았다.
이때 왕의 은총을 받던 여러 현인들은 매양 경연에 나아가 한 장(章)을 강할 때마다 의리를 이끌어 비유하고, 경전(經傳)에 출입하여 미묘한 곳까지 관철하였다.
이때 기준(奇遵)ㆍ박세희(朴世熹)ㆍ양팽손(梁彭孫)ㆍ최산두(崔山斗) 같은 이는 말이 경솔하였고, 그 나머지 재주 있고 날카로운 선비들도 경솔한 결점이 있었으나,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건의하여 사뢴 것에 대하여서는 기어코 왕의 동정을 얻고자 아침에 강연(講筵)을 시작하면 해가 늦은 뒤에야 파했다. 그래서 임금의 몸이 피로해지고 권태를 느끼며 때로는 하품을 하기도 하고 혹은 용상에 기대어 신음하는 소리까지 있었다.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두 사람은 이 강연에 대하여 임금이 싫어하는 눈치를 알고 드디어 모의하여 서로 결탁했다. 그리하여 심정이 몰래 경빈(敬嬪) 박씨(朴氏)가 본가로 문안 보내는 계집종을 통하여 조광조(趙光祖)가 나라를 도맡아서 정치를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여 왕을 삼으려 한다는 말을 하게 하고, 또한 항간의 무식한 사람들의 말처럼 꾸며 궁중에 전파시키니, 궁중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때 홍경주(洪景舟)는 일찍이 찬성(贊成)이 되었다가 논박을 당하여 체임되었으므로, 그는 항상 조광조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남곤ㆍ심정과 곧 서로 친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주를 시켜 그의 딸 희빈(熙嬪)에 이르기를, “온 나라 인심이 모두 조씨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을 아침저녁으로 임금에게 아뢰어 임금의 뜻을 흔들어 놓게 하였다.
그리고 또 산벌레는 나무 열매의 달콤한 즙(汁) 들쥭여 늛물 을 잘 먹으므로 그 즙으로 ‘주초가 왕이 된다〔走肖爲王〕’는 네 글자를 궁중의 동산에 있는 나뭇잎 위에 써 놓게 하였다. 혹은 뽕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산 벌레가 갉아먹어 자국이 나니 도참(圖讖)의 글과 비슷하게 되었다. 그리고 궁녀를 시켜 그 잎을 따다가 임금께 바치어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니 박빈의 친정집 종의 말과 서로 같아지게 되어 겉과 안이 서로 부합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의 뜻이 더욱 의심을 나타내어 사사건건 놀라고 두려워하여 밀서를 경주에게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남곤은 시국의 의논이 과격하고 바르지 못하다는 말로 신 문경(申文景)을 찾아가 말하고 그의 뜻을 떠보니 문경은 한 말로 그 간사한 속임수를 꺾어 버렸다. 그래서 남곤은 속으로 풀이 죽었으니 대개 신 문경이 일을 처리하는 데 판단을 잘하기 때문에 남곤은 그 간사한 꾀를 팔지 못한 것이었다. 10월 초3일에 문경이 세상을 떠나니 이미 꺼릴 것이 없었다.
이보다 먼저 정암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이욕(利欲)이란 사람이 빠지기 쉬운 것이요, 국가의 병폐의 근원도 이 이(利)의 근원에 있다.” 하여, 반정 때에 공이 없어 허위로 책록된 사람을 삭제하여 그 욕심을 징계하기를 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못하여 드디어 폐기된 일이 있었다. 그후 정암이 다시 대사헌이 되자 대사간 이성동(李成童)과 함께 양사(兩司)를 합하여 상주하고, 홍문관도 이에 동조하고 정부와 육조(六曹)도 모두 한결같이 앙청하였다. 그래서 11월 초9일에 마침내 윤허를 받은 일이 있다.
남곤ㆍ심정은 이번의 기회 탄 것을 다행으로 여기어 경주를 시켜 밀서를 가지고 굽히고 있는 재상들에게 함께 조광조 일당을 해하자는 뜻을 말하니, 지중추(知中樞) 안윤덕(安潤德)은 자기는 능력이 없다고 대답하고, 권균(權鈞)은 지위가 낮다고 사양하고, 여성부원군(礪城府院君)ㆍ송질(宋軼)은 병으로 일어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그 밀서에, “광조의 무리가 정국(靖國) 공신을 삭제하기를 청한 것은 강상(綱常)을 중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공이 없었던 자를 삭제하고 그 후에 겨우 20여 명만을 남겼는데, 명색이 연산군을 폐한 죄를 천단(擅斷)하자고 하는 것이니, 경의 무리가 어육(魚肉)이 될 것이고 내게까지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주초(走肖)의 무리들은 간사하기가 왕망(王莽)ㆍ동탁(董卓)과 같다. 그래서 온 나라의 인심을 얻고 백관의 첨앙(瞻仰)하는 바가 되었으니, 하루아침에 송 태조(宋太祖)와 같이 황포(黃袍)를 몸에 걸치는 변이 있다면 비록 사양하려 하나 사양할 수 있겠는가. 광조 등이 현량과를 두자고 청한 것은 사람을 얻기 위함이라고 여겼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반드시 우익(羽翼)을 심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제거하려 생각하나 경의 사위 김명윤(金明胤)이 또한 그 속에 끼어 있으므로 이것이 한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의 심복이 몇 사람이 있는가. 광필(光弼)은 왕실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다. 장곤(長坤)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소아배(小兒輩)에게 붙었으니 믿을 수 없다. 심정은 비록 근일에 논박을 당하였지마는 재간이 있으니 대임(大任)을 맡길 수 있다. 그러니 내가 광조 등을 제거하려는 뜻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말고, 남곤ㆍ심정에게 물어 보는 것이 어떠한가. 용근(庸謹)ㆍ한충(韓忠)ㆍ세희(世熹)ㆍ자임(自任)은 모두 무예(武藝)가 있어 두려운 자들이니, 아침에 이 무리들을 없애면 저녁에 죽더라도 반드시 걱정이 없겠다.
지난번에 경연에서 기준(奇遵)이 광조 같은 이야말로 정승의 자리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그러니 벼슬을 명하는 것이 모두 이 무리에게 나오는 것이므로 나를 반드시 임금이라고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한갓 자리만 지키고 있는 존재로 알 것이다. 광조는 말이 공손하고 용모가 온순하여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수년 동안에 순서를 뛰어 발탁하여 등용했으므로 현달하게 되었는데 도리어 내가 주초(走肖)의 술책 가운데 떨어졌다. 그래서 드러내 놓고 죄를 주려 하나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ㆍ육조 유생이 모두 불가하다고 말할 터이니, 내가 능히 할 수가 없다. 어떻게 처치하여야 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근일 이래로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고 자도 베개를 편안히 하지 못하여 야윈 뼈만 앙상히 튀어나온다. 내가 명색은 임금이라고 하지마는 실상인즉 나 자신 임금인지 알 수가 없도다. 옛날에 용근(庸謹)이가 나를 거만한 눈초리로 보았으니 반드시 임금으로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경 등은 이들을 먼저 제거하고 뒤에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본가에 내린 것은 언문 편지인데, 한문으로 번역하여 지금 싣는다. 그리하여 사실이 이와 같은데 이것이 도리어 간흉한 무리의 문자라고 여기는가.
이에 고형산(高荊山)ㆍ홍숙(洪淑)ㆍ손주(孫澍)ㆍ방유녕(方有寧)ㆍ윤희인(尹希仁)ㆍ김근사(金謹思)ㆍ성운(成雲) 등이 비밀리 약속한 기일에 모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거사할 때에 병조 판서가 없으면 위사(衛士)들을 호령할 수가 없으므로, 판서 이장곤이 집에 없는 틈을 타 날마다 세 번씩 가서 명함을 들여보내어 먼저 의심하게 하고 장곤이 대궐로 들어가 이 사실을 아뢰는 저녁에 쪽지 편지로 속여 불러냈다.
또 미복(微服)으로 걸어서 영의정 정 문익공의 집으로 가서 달콤한 말과 위급한 말로 달래려고 위협하였으나, 공은 끝내 수긍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어리석고 미혹하여 계교가 이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남곤은 할 수 없이 물러와서 홍경주에게 말하기를, “영상은 굳이 말리나 우리들은 꼭 해야 하겠다.” 하고 홍경주를 시켜 임금에게 아뢰도록 했다. 내용인즉, “변(變)을 고하려 하나 근시(近侍)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심복들입니다. 사태가 위급하오니 신무문(神武門)을 열어 주시옵소서. 밤을 타서 들어가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이는 사관(史官)과 승지가 알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15일 초저녁에 홍경주ㆍ김전(金銓)ㆍ남곤ㆍ이장곤ㆍ고형산이 신무문 밖에 모이었고, 이미 대궐에 들어간 도총관(都摠官) 심정과 참지(參知) 성운이 직무 보는 곳으로부터 와서 합치어 함께 합문(閤門) 밖에 앉아서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기를, “신 광필ㆍ경주ㆍ곤(袞)ㆍ장곤ㆍ형산ㆍ홍숙(洪淑)ㆍ정(貞)ㆍ주(澍)ㆍ유녕(有寧)ㆍ희인(希仁)ㆍ근사(謹思)ㆍ운(雲) 등은 엎드려 살피건대 조광조가 서로 붕당을 만들어 자기에게 붙는 사람은 진급시키고 자기와 달리하는 사람은 배척하여 명성과 위세가 서로 붙쫓고, 권세와 요직을 모조리 차지하여 임금을 속이고 개인적인 행동만 하여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후진들을 유인하여 공정하지 못하고 과격한 것으로 습성을 만들어 젊은이로서 어른을 능멸하며 천한 자로서 귀한 사람을 무시하게 하여 나라 형세가 전도되고 조정 정사가 날마다 글러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속으로는 분함과 탄식함을 품었으나 그 세력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곁눈질이나 하고 다니며 두려워 발을 모으고 설 뿐입니다. 자세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한심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청컨대 유사(攸司)에게 회부시켜 그 죄를 명백하게 밝혀 주소서.” 하였다.
그리고 경주를 시켜 아뢰게 하고 김근사ㆍ성운으로 가승지(假承旨)를 삼고, 심사순(沈思順)으로 가주서(假注書)를 삼으며, 남곤으로 이조 판서를 삼고, 또 무기를 대궐 뜰에 베풀어 놓으니 이는 대궐 문으로 잡아다가 죽이려 함이었다. 그리고 남소(南所)를 지키는 군사에게 시위(侍衛)를 명하여 사정전(思政殿)에 나와 대기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주와 남곤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일이 급하여 친히 국문할 겨를이 없사오니 빨리 승정원과 홍문관에 들어와 번드는 인원을 잡아다가 가두도록 명령하시옵소서.” 하였다. 이때에 승정원에서는 전연 알지도 못하고 있다가 근정전(勤政殿)에 불빛이 일어남을 본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숙직하는 좌승지 공서린(孔瑞麟), 우승지 윤자임(尹自任)ㆍ주서 안정(安珽)ㆍ검열(檢閱) 이구(李構)가 합문(閤門) 밖에 나가니, 근정전 서쪽 뜰에 호위하는 군사들이 늘어서서 촛불을 밝히고 모여 앉았다. 윤자임이 나가서 묻기를 “재상이 입궐하는데 승정원(承政院)에 알리지 않았으니 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였다. 그러나 좌우가 서로 쳐다만 볼 뿐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장곤이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말을 하려 하다가 감히 말을 꺼내지 않는다.
조금 있다가 내시 신순강(申順剛)이 나와서 성운을 부른다. 성운이 곧 칼을 차고 급히 들어간다. 안정이 붓을 잡고 합문까지 쫓아 들어오니, 순강이 문지기를 시켜 잡인(雜人)을 금하게 하였다. 안정이 성운의 띠를 붙들고 들어가려 하자 문지기가 안정의 손을 잡아 제치며 여럿이 붙들어 내어 밀친다. 이에 심정이 빨리 걸어 나와 안정의 손을 잡고, “상감이 지금 매우 노하여 계시니 들어가지 말라.” 한다. 조금 있다가 성운이 나와서 소매 속으로부터 작은 쪽지를 꺼내어 이장곤에게 주면서, “이 사람들을 급히 하옥(下獄)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승지ㆍ주서ㆍ검열 및 응교 기준(奇遵)ㆍ수찬 심달원(沈達源) 등을 하옥시키니 누수(漏水) 북[鼓]이 두 번 울었다.
이에 먼저 기미를 알고 명단에 이름을 서명했던 여러 재상들이 모두 대궐로 들어가 드디어 합문에 모인 재상들과 더불어 입대(入對)하여 두렵고 놀랄 만한 일이라고 크게 들먹이며, 임금에게 권하기를, 빨리 선전관과 금부도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참찬 이자(李耔)ㆍ형조 판서 김정(金淨)ㆍ대사헌 조광조(趙光祖)ㆍ대사성 김식(金湜)ㆍ부제학 김구(金絿)ㆍ도승지 유인숙(柳仁淑)ㆍ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ㆍ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ㆍ동부승지 박훈(朴薰) 등을 궐문에 잡아다가 죽이라고 하였다. 장곤이 이때 비로소 그날 밤에 때려 죽이자는 의논임을 알고 극진히 간하기를, “수상에게 숨기고 도적의 꾀를 행할 수는 없으니 수상을 불러다가 죄를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경주가 급히 처단하기를 청하고자 약간 기동하려는 형세를 보이니 장곤은 손을 내두르며 말리기를, “공이 어찌 이렇게까지 하오.” 하고,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니 경주가 자기 꾀대로 못하고, 임금의 노여움도 조금 풀어졌다. 그래서 영의정 김광필을 부르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정원(政院)에서는 이조에 숙직하는 낭관들을 경연청으로 불러들여 대간ㆍ홍문관ㆍ승지ㆍ주서ㆍ한림이 모두 갈렸으니 승전(承傳)을 받으라고 재촉하였다.
그때 좌랑 구수복(具壽福)이 이유를 알지 못하여 정원 관리에게 물으니 정원 관리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남곤ㆍ이장곤에게 말하기를, “대간ㆍ시종과 사필(史筆)을 잡은 사람들을 모두 바꾼다면 조정에 이목이 없으니 밤중의 이런 일이 또한 민멸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차마 여기에 이름을 쓸 수 있는가. 자세히 이유를 물어본 뒤에 이름을 쓰겠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영의정이 명령을 받고 급히 대궐 뜰에 들어오니, 수복이 나가 묻기를, “정원에서 패초(牌招 왕명으로 승지가 신하를 부르는 일)하여 대간ㆍ시종이 모두 갈렸으니 빨리 승전을 받으라고 재촉하였고, 또 듣자니, 이자ㆍ김정ㆍ조광조ㆍ김구ㆍ김식ㆍ유인숙ㆍ박훈ㆍ박세희를 모두 잡아오라고 명령하고 번드는 승지 윤자임ㆍ공서린ㆍ주서 안정ㆍ한림 이구ㆍ응교 기준ㆍ수찬 심달원은 이미 금부(禁府)에 하옥되었다는데, 화를 일으킨 연유를 알지 못하므로 감히 승전(承傳)에 서명할 수가 없습니다. 뜻밖에 이런 변을 만나니 할 바를 알지 못하겠소이다.” 하였다. 이에 영상이 대답하기를, “사세를 보아서 처리하겠다.” 하고 경연청으로 들어갔다.
이때 승지가 이조 좌랑이 전지(傳旨)를 받지 않으므로 들어가 임금께 아뢰어 치죄하려 하자 영상이 말리면서, “지금 상감의 노여움이 극에 달했는데 지금 만일 아뢴다면 나이 젊은 낭관이 반드시 큰 죄를 지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홍경주ㆍ김전과 급히 입대하여 하교를 듣는데, 광필이 눈물을 흘리며 극진히 간하기를, “나이 젊은 유생들이 시기의 적당함을 알지 못하고, 옛일을 본따서 이제 실시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조금만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대신과 함께 의논하게 하소서.” 하며, 눈물이 두 볼로 흘러내려 옷소매가 모두 젖으니 임금이 갑자기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간다. 광필이 빨리 나가 임금의 옷자락을 붙들고 머리를 조아리니, “이자(李耔)의 무리를 옥에 가두고 우의정 안당(安瑭)을 부르라.” 명령하였다.
이때 수상이 빈청(賓廳)에 나오자마자 다시 아뢰기를,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모두 죄를 줄 수 있습니까. 승지는 본래 본심이 아니고 바른 의론을 좇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이자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어서 국가에서 앞으로 반드시 크게 쓸 사람이니 파직만 시키는 것이 온당할 것 같고, 광조의 무리는 무슨 털끝만한 사의(私意)가 있겠습니까. 한갓 예전 사람의 글만 보고 지극한 정치를 본받으려 하였고, 그 사이에 혹시 과격한 일이 있었더라도 중하게 다스릴 것은 못 됩니다. 방금 성군(聖君)이 들어선 시대에 불행히 선비를 죽였다는 소문이 나면 반드시 사책(史冊)을 더럽힐 것이니, 부디 금부로 하여금 추문(推問)하여 죄 있는 자는 죄를 주고 죄 없는 자는 벌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김전ㆍ남곤ㆍ심정이 머리를 나란히 모으고 의론하여 죄목과 전지(傳旨)를 썼다.
이때에 지평 이희민(李希閔)은 기별을 듣고 달려 서문(西門)에 이르니 지평 이연경(李延慶)ㆍ홍문 정자(弘文正字) 권장(權檣)이 먼저 이르러 함께 보루문(報漏門) 앞에 이르니, 판서 김정(金淨)을 벌써 잡아왔다. 이조 좌랑 구수복이 마침 월화문(月華門)으로 나왔다가 함께 그 옆에 앉아 서로 이야기하고 얼굴빛을 잃었다. 두 지평이 드디어 월화문 안으로 들어가니 부장(部將)이 막고 들여보내지 않는다. 김근사가 또 잡인을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지평이 이미 갈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아뢰고자 하는가.” 하였다. 희민이 분이 나서 탄식하며 연경과 함께 곧장 경연청으로 들어가서 영상을 보고 말하기를, “오늘 밤의 일은 너무 남몰래 한 일입니다. 저희들의 직책이 비록 갈렸으나 오래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었으니 이런 큰 변을 보고 감히 모르는 체하고 앉아서 보기만 할 수는 없소이다. 또 좌우에 사필(史筆)을 잡는 자가 없으면 국가의 큰일이 민멸되어 전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민망스럽소이다.” 하였다.
영상이 이 말에, “그대들은 잠시 물러가라 상감의 노여움이 매우 심하여 광조 등을 죄주려 하는 것이지 우리들이 어찌 선비를 죽이려고 하겠는가. 마땅히 힘을 다하여 구제하도록 주선하겠다.” 하고 봉교(奉敎) 조구령(趙九齡)ㆍ채세영(蔡世英)ㆍ권예(權輗)로 하여금 전과 같이 사건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희민과 연경이 드디어 물러나오니 밤이 이미 오경이나 되었다. 그들은 연추문(延秋門) 밖에 나와서 우상 안당(安瑭)을 만났다. 연경이 앞으로 나가서 말하기를, “나라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오직 대감을 바랄 뿐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봉교 채세영이 본관(本館)으로 나가니, “모두 파직되었다.” 하였다. 그리하여 갈 바를 모르고 머뭇거릴 즈음에 영상의 사기(史記)를 편수하라는 지시에 따라 앞으로 나가 여러 재상들에게 묻기를, “어떻게 국사를 써야 마땅할까요, 그 시초부터 들려 주시오.” 하였다. 그러나 좌우가 서로 쳐다볼 뿐 감히 말을 못하였다. 그래서 나가서 영상에게 물으니, “다만 본 대로 쓸 뿐이다.” 하므로 “그리하겠다.” 하고 물러났다.
우상과 영상은 힘을 다하여 신구(伸救)하는 한편 조정에 모여 함께 의론하자고 아뢰기도 하고 또 여러 번 되풀이하여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새벽에 먼저 유인숙ㆍ공서린ㆍ홍언필이 석방되고 다음에 안정ㆍ심달원ㆍ이구가 석방되었으며 최후로 이자가 석방되었으나 파직되었다.
이때에 성균관 유생들은 대궐 뜰로 몰려들어 호곡(號哭)하며 각 동네 향약(鄕約)의 무리들도 차자를 올리고 대궐을 지키므로 도리어 그 떠도는 말을 사실로 만드는 결과가 되어 방면되지 못한 자가 여덟 사람이나 되었다. 그 중에 윤자임ㆍ박훈은 대신들이 모두 사면해 주기를 청한 자들이었으나 오히려 방면되지 않았다.
그때 신순강이 임금께 참소하기를, “성운이 명령을 받고 합문으로 들어오는데 윤자임이 안정을 시켜 끌어내었고, 말이 또한 공손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더욱 노하여, “자임은 무예가 있으니 더욱 두렵다.”하고 먼저 위졸을 시켜 대궐 뜰에서 포위하게 하였다.
이날 남곤을 불러 정사를 맡으라고 하였으나 그는 병을 핑계삼아 명령을 보류하게 했다. 당시에 화를 만든 것은 실상 남곤이 주동이 되었던 것인데, 환심은 자기가 사고 스스로 물러나 앉아서 두 번이나 불러도 느긋하게 버티고 움직이지 않으니, 그 계교가 교묘하고 간사하다. 어찌 주모자의 간사한 꾀를 면할 수 있으랴.
이에 영상과 우상에게 명하여 정사에 참여하여 주의(注擬)하게 하였다. 대사헌에 유운(柳雲), 대사간에 윤희인(尹希仁)은 특지(特旨)에 의한 것이요, 홍문관ㆍ예문관(藝文館)은 바꿀 사람이 없어서 그대로 유임하게 하였다. 새 대사헌 유운은 한 번 상주하여 사직하고 집의(執義) 윤세림(尹世霖)ㆍ장령 이겸(李謙)ㆍ지평 조광좌(趙廣佐)ㆍ임추(任樞)ㆍ신변(申抃) 등과 급박하게 화를 구원하느라 미처 숙배도 못하고 합문에 엎드려 극진히 간하기를, “만약 공정한 일이라면 광명 정대하게 처리하십시오. 대개 사람을 처형하면 여러 사람을 함께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 등이 듣건대, 이 일은 궤휼하고 간사한 자가 몰래 알린 것입니다. 대체로 몰래 알린다는 것은 종사를 위태롭게 하고 망하게 하는 조짐입니다. 전날 이줄(李茁)이 밀고하자 대간이 그 점점 더해갈 것을 극진히 말하였음을 임금께서도 이미 환하게 아실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 있는 공경이 모두 어질고 착하므로 진실로 몸을 바치어 훌륭한 정치를 도모하는 터인데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신 등이 직책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의리로 보아서도 직무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비옵건대 신 한 사람의 머리를 베어 간사한 사람 마음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소서.” 하였다.
새 대사간 윤희인 등은 사은한 뒤에 다른 동료 사간 오결(吳潔)ㆍ헌납(獻納) 이충건(李忠健)ㆍ정언 윤개(尹漑)ㆍ유형(兪炯) 등과 함께 논계(論啓)하기를 마지않았다. 그리고 전 승지 유인숙ㆍ공서린ㆍ홍언필은 보통 옷으로 대궐로 나가고, 전 대간 이성동(李成童) 등이 또한 대궐에 나가 광조와 더불어 옥에 나가 같이 죄를 받기를 청하면서 해가 지도록 아뢰면서 강청하였다. 또 전한(典翰) 정응(鄭譍)도 동료를 거느리고 차자를 올렸는데 말뜻이 간절 측은하였고, 파릉군(巴陵君) 경(璥)도 빈청(賓廳)에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극진히 간하고, 또 병조 판서 희강(希剛)의 자(字)를 부르면서, “여우와 쥐 속에서 꼬리를 흔들며 함께 선량한 사람을 해친다.” 하며 못 할 말 없이 맹렬히 꾸짖었다.
한편 김전ㆍ성운 및 양사(兩司) 판의금(判義禁) 이장곤ㆍ지의금(知義禁) 홍숙을 보내어 함께 추문(推問)하여, 조광조ㆍ김정ㆍ김구ㆍ김식을 국문하기를, “권세와 요직을 두루 차지하며 후진을 달래어 끌어들이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하며 자기에게 붙는 자는 끌어올리어 서로서로 패를 지어 속이고 논격함으로써 풍습을 이루어 조정 정사를 날로 그르치고 국사를 뒤엎어 놓았다.” 하였다. 그리고 박세희ㆍ윤자임ㆍ박훈ㆍ기준을 추문함에는, “서로서로 패를 지어 속이고 논격함으로써 풍습을 이루어 조정 정사를 날마다 그르게 만들어 국사를 뒤엎어 놓았다.” 하였다. 그러나 모두 항복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은 드디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대체로 대궐문이 아홉 겹이나 되니 우러러 진달할 길이 없도다. 한번 친히 묻는 것을 허락하여 주신다면 만번 죽어도 한이 없다.” 하므로, 곧 명하여 추문하고 법률에 따라 하였는데, “광조 등 네 사람은 마땅히 사형에 처하고 세희 등은 곤장을 때려 귀양보내어 종이 되게 한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광조ㆍ김정은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곤장을 때려 귀양보내라.” 명하고, 도승지 김근사를 시켜 받아 쓰도록 하였다. 그러자 근사는 임금의 앞에서 사관이 가지고 있는 붓을 빼앗아 뽐내며 이를 쓰는데 조금도 어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봉교(奉敎) 채세영은 옆에 있다가 분함을 참지 못하여 나가 아뢰기를, “비록 죄가 있는 사람이라도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한 연후에 죽이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죄목이 모두 죽을 죄가 아닙니다. 죽을 죄가 아닌데 잘못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나라의 중한 일을 대신들과 더불어 가부를 의논하지 않고 독단으로 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근사에게 대들며 항언하기를, “이것은 사필(史筆)이니 다른 사람이 잡을 수 없는 것이오.” 하고, 도로 빼앗았다. 그때 그의 말이 심히 정직하므로 좌우가 모두 숙연하였다.
판결이 내려지자 대신들이 급히 면대하기를 청하고 말이 심히 간절 측은하니 임금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 광조 등 네 사람은 곤장을 때려 유배시켜 안치하고, 박세희 등 네 사람은 곤장을 감하여 부처(付處)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영상이 많은 관원들을 거느리고 다시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만일 곤장을 맞으면 반드시 다시 살 희망이 없사오니 가벼운 형벌을 적용하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7번이나 아뢰고 이경(二更)에야 물러나왔다. 이때 광조 등의 죄를 결정하자 도성 사람들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고 보는 사람들은 얼굴빛을 잃고 통곡하였다.
드디어 광조는 능성(綾城)으로, 김정은 금산(錦山)으로, 김구는 개녕(開寧)으로, 김식은 선산(善山)으로, 박세희는 상주(尙州)로, 박훈은 성주(星州)로, 윤자임은 온양(溫陽)으로, 기준은 아산(牙山)으로 나누어 귀양보냈다. 그 이튿날인 17일에, 나누어 귀양보낸 8사람을 도로 금부에 모이라고 명령하고, 승지 성운을 보내어 하교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시종하는 신하로서 상하가 같은 마음으로 지극한 정치를 나타내기를 기약하였으니, 너희들의 마음이 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 너희들이 조정의 일을 처리하는 데 지극히 과오가 많아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부득이 죄를 주는 것이다. 그러니 내 마음인들 또한 어찌 편안하며 죄주기를 청한 재상도 어찌 사사로운 뜻이 있으랴. 너희들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모두 내가 밝지 못하여 그 기미를 먼저 막지 못한 때문이다. 만일 법대로 죄를 준다면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나 너희들이 사심이 없이 나라 일을 하였기 때문에 감하여 가벼운 것을 좇아서 죄주는 것이다. 너희들은 오래 경연[經幄]에 있어서 보통 관원이 아니므로 특별히 너그러운 법을 쓰는 것이니, 너희들은 알고 가라.” 하였다.
그 이튿날인 18일에, 홍경주ㆍ남곤ㆍ김전을 불러 모두 입시케 하였다. 그때 홍경주는 말하기를, “요즘 인심이 모두 두려워하는 눈치인데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제 공을 어전에서 말하는데, “신이 하루 전에 김전의 집에 가서 사림(士林)의 일을 이야기하다가 김전의 말에, ‘나이 젊은 것들이 대신의 반열에 붙어 있으면서 늙은 신하들의 조그마한 허물만 보아도 입이 닳도록 배척하므로 조정 정사가 글러지고 인심이 불안해지니, 내가 아침에 이 뜻을 아뢰다가 저녁에 죄를 당하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편안하겠다.’ 하므로, 신이 이미 상감의 뜻을 짐작하므로 모두 말해 주었습니다. 또 남곤을 만났을 때 시국 일에 이야기가 미치자, 곤은, ‘요즘 젊은 아이들이 상감의 융숭한 권애를 믿고 시국 정사를 극단으로 논하여 늙은 신하는 전혀 용서하지 않아 조정 정사를 날마다 글러지게 하니, 후세에 비록 소인으로서 군자를 죽였다는 이름은 면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이 뜻을 아뢰려고 조복(朝服)을 입기까지 하였다가 그만두었다.’ 하므로, 신이 이미 상감의 뜻을 짐작하는 까닭에 숨김없이 말해 주었습니다. 곤이 또 말하기를, ‘이 일을 아뢰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광필에게 물어 보고 조처해야 한다.’ 하므로 그날로 곤은 광필의 집으로 찾아가 사림의 얘기를 끄집어 내니 광필이 굳이 말리며, ‘사림의 화를 일으키려 하는가. 나는 어리석고 미혹하여 계교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하므로 곤이 두 말도 하지 않고 물러왔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이튿날 또 남곤을 만나서 말하기를 ‘영상이 굳이 말리니 우리들이 마땅히 스스로 하여야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5일 어둑 무렵에 신 등이 북문으로 들어가서 비밀히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보다 먼저 경주(景舟) 등은 근거도 없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가짜로 참문(讖文)을 만들어서 임금께 올리어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후에 당류(黨類)가 이미 이루어지자, ‘정국 공신(靖國功臣)을 삭제하자고 청한 것은 마음대로 연산군을 폐한 죄를 주상에게까지 미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여 공포를 느끼게 하니 임금은 일찍이 유언비어와 참문에 미혹된지라 북을 내던지는 거동이 없지 않았다. 또 겁을 주기 위하여, ‘무부(武夫)들이 무리를 모아 선비들을 쳐 없애려고 하는데 자고로 사림의 화가 일어나면 종사가 편안히 보존되던 때가 없었으니, 먼저 광조 등을 죄주어 경동하는 인심을 가라앉히느니만 못합니다.’ 하였으므로 왕은 재빨리 사건을 유발시켜 정귀아(鄭歸雅)의 사건이 비로소 발각되었다. 그러나 임금은, “광조의 복이다.” 하였으니 그 현혹된 것이 이렇게 심하였다.
경주가 스스로 공로를 말한 것은 보답받기를 바람이었는데 그 작록을 보답받기 전에 먼저 죽었다. 또 유운이 광조들에게 감정을 품었다 하여 대사헌을 제수하였는데, 도리어 광조를 신구(伸救)하고 또 그는 윤희인이 밀계에 이름을 쓴 것에 대하여 침을 뱉었으므로 본래 물망이 없다고 탄핵받아 이빈(李蘋)으로 대신하였다. 그런데 빈은 또 유운이 숙배를 하지 않아서 조정에서 체모를 잃었다고 탄핵하여 체임시키고 이항(李沆)으로 대신하였다. 이빈은 남곤ㆍ심정의 매와 사냥개[鷹犬] 노릇을 하며 대간에 출입하여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을 제거했으나 겨우 두어 해의 영광과 총애를 누렸다. 이항이 부름을 받고 올라올 때에 함양(咸陽) 군수 문계창(文繼昌)이 시를 지어 주며 송별하였는데 시는 상권에 보인다 항이 조정에 돌아온 지 수일 만에 다시 광조의 무리를 의논하여 죄를 더하고, 또 35명이 당을 만들었다고 탄핵하여 모두 귀양을 보내자고 청하였다. 임금이 근정전에서 정부와 대간에게 고루 물으니, 정(鄭) 영의정이 극력 신구하였다. 그러므로 대간에게 전교하기를, “이 사람들에게 모두 죄를 준다면 인심이 퍽 두려워할 것이다. 만일 그 괴수 되는 자의 죄만 다스린다면 그 나머지는 저절로 나아가는 길이 바르게 되고 인심이 정하여질 것이다.
또 소인이 조정에 가득하여 크게 종사에 관계하는데, 대신은 이웃집 일 보듯 두리번거리고만 있으니 어찌 대신의 체모인가. 시종하는 신하들도 또한 두 생각을 가지고 후일의 계교를 꾸미는 자가 있으니 나는 이 사람들도 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무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면 뿌리가 마르면 가지와 잎이 저절로 시들고, 도적을 다스리는 데 비유하면 먼저 그 괴수를 다스리면 따라다니는 자들은 다스리지 않아도 된다. 삼정승들이 가만히 앉아서 조정일을 바라보기만 하고 시비를 정하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직책을 잃은 것이다.” 하고, 영의정 정광필을 좌천시켜 중추원 영사(中樞院領事)로 삼고, 우의정 김전을 영의정으로 삼고, 찬성 남곤을 좌의정, 참찬 이유청(李惟淸)을 우의정으로 삼아 면대하여 경중을 의논하여 등수를 나누어 죄를 정하는데, 조광조는 사사(賜死)하고 김정ㆍ김구ㆍ김식은 절도(絶島)에 귀양보내고 박세희ㆍ윤자임ㆍ기준ㆍ박훈은 지극히 먼 변경에 귀양보내고 유용근(柳庸謹)ㆍ정응(鄭譍)ㆍ최산두(崔山斗)ㆍ정항(鄭沆)은 외방에 귀양보내고, 최숙생(崔淑生)ㆍ이자(李耔)ㆍ이희민(李希閔)ㆍ양팽손(梁彭孫)ㆍ이약빙(李若氷)ㆍ송호지(宋好智)ㆍ송호례(宋好禮)ㆍ이연경(李延慶)ㆍ이충건(李忠健)ㆍ윤광령(尹光齡)ㆍ조광좌(趙光佐)ㆍ이청(李淸)ㆍ시 산정(詩山正) 정숙(正叔)ㆍ강녕 부정(江寧副正) 기(祺)ㆍ숭선 정(嵩善正)총(灇)ㆍ장성 수(長城守) 엄(儼)은 관직을 삭탈하고, 안당ㆍ유운ㆍ김안국ㆍ김정국은 파직하고 위 유용근 이하 20명은 3공과 대간이 3등을 나누어 표를 붙이어 정죄한 것 또 한충(韓忠)은 절도에 귀양보내고, 파릉군 경(璥)과 안찬(安瓚)은 원방에 귀양보내고 위 세 사람은 각각 논계한 자이다. 이장곤ㆍ권벌(權橃)ㆍ윤구(尹衢)ㆍ이구(李構)ㆍ김세필(金世弼)도 추가 의논하여 국문한 뒤에 파직시켰다.
화가 일어나던 날 각 방리(坊里)의 소두가 되었던 사람 충찬위(忠贊衛) 정의손(鄭義孫)ㆍ박자일(朴自逸)ㆍ안숭복(安崇福)ㆍ전의전함(典醫前銜) 이성(李誠)ㆍ왜학훈도(倭學訓導) 정철현(鄭哲賢)ㆍ이세손(李世孫)ㆍ악생(樂生)송기(宋冀)ㆍ서리(書吏) 최인석(崔仁碩)ㆍ이중진(李仲進)은 모두 곤장을 때리고, 왕자제군(王子諸君)의 청구노(請求奴) 학년(鶴年)은 곤장 백 개를 때리고 귀양가는 것을 면하게 하였다. 천과(薦科)를 혁파하여 성수종(成守琮)의 급제(及第)를 삭제하고 신광한(申光漢)ㆍ정순붕(鄭順朋)ㆍ유인숙(柳仁淑)ㆍ이성동(李成童)ㆍ구수복(具壽福)ㆍ권장(權檣)ㆍ김광복은 또한 바깥 관원이나 한산한 직책을 제수하였다가 조금 뒤에 모두 파면하였다. 무릇 당인이 천거하여 뽑아서 벼슬을 시킨 사람과 보증하고 천거하여 수령이 된 사람은 함께 연루되니, 조정이 비다시피 되었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좌천되고 귀양간 사람이 각 고을에서 서로 바라볼 정도였다. 그런데도 형조 판서 심정은 옥이 비었다고 임금을 속여 상을 받았다. 이때문에 아첨하고 간사한 짓이 풍습을 이루어 아부하여 상을 바라는 자가 서로 줄을 이었다.
경진년에 이신(李信)은, “김대성이 대신을 해치기를 꾀한다.” 하니, 당시의 재상이란 자들이 자기에게 저촉된 데 노하여 용납하여 숨겨준 자는 변방으로 보내고, 제자들은 곤장을 때려 귀양보내고, 죄수의 친족으로서 문안한 자 남봉년(南鳳年)ㆍ여해(呂海) 같은 사람도 또한 심문하고 곤장을 가하였으며, 김대성과 함께 유숙한 하정(河珽)은 곤장을 계속 4백여 대를 맞고 거짓 공술을 하였다. 배소를 멋대로 떠난 김정과 기준은 추가 논죄하여 도주하여 피신한 것으로 지목하고 모두 가시 울타리 속에 가두었다.
신사년 9월에, 안처겸(安處謙)ㆍ문근(文瑾)ㆍ유운ㆍ유인숙ㆍ정순붕(鄭順朋)ㆍ신광한ㆍ이성동ㆍ박영(朴英)을 추가 논죄하여 각각 죄목을 만들어 삭탈하였다.
그 해 겨울에 이르러 송사련(宋祀連)이 고변(告變)하자 대신을 해치려고 꾀하였다는 것을 모두 이미 자복하였는데, 남곤ㆍ심정이 중한 죄에 빠뜨리려고 하다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므로 형방승지(刑房承旨) 조옥곤(趙玉崑)이 그 사주(使嗾)를 받아서 사실 아닌 것으로 끝까지 문초하였다. 시산정(詩山正) 정숙(正叔)은 도망하여 숨었다가 4일 만에 자수하였다. 그때 옥곤은 홀로 대궐 뜰 위에 서서 크게 말하기를, “죄수 놈들이 이미 모두 항복하였으니 너는 도마 위 고기와 같다. 물을 것도 없으니 다만 속히 사실대로 토설하라.” 하였다. 정숙이 오래 굶어 정신이 혼미한데다가 엄하게 곤장 두어 개를 맞자 심신(心神)이 떨리고 겁에 질려 중얼중얼 헛소리를 하였다. 곤장을 잡은 자가 살살 꾀어 말을 시키고 이를 굳혀 옥안(獄案)을 만들고, 고의로 큰 죄에 빠지게 하였다. 그리고 고문을 당하여 죽게 된 사람들은 또 모두 법에 의하여 처치하였었다. 송사련이 불러 댄 명록(名錄)에 든 사람은 모두 곤장과 유배를 당하고 양민과 천인은 모두 먼 변방으로 옮기었다. 김정과 기준을 추가 논죄하여 망명(亡命)의 율(律)을 적용하여 적소에서 사사(賜死)하였다.
남곤이 제 손으로 소장(疏章)을 지어 당인(黨人)의 행위를 일일이 들어 반역을 옹호한 죄를 교묘하게 꾸미어 되도록 엄한 형벌과 중한 법을 준용(遵用)하는 뜻으로 대간을 사주하여 올리게 하였다.
그 대강에 말하기를, “지난번에 국운이 불행하여 사림의 틈을 만들었다. 박상ㆍ김정은 본래 음흉하고 간사한 바탕으로 과격한 의논을 주장하였으므로, 이때를 당하여 시비가 끝이 없었고 의논이 물 끓듯 하여 몇 달이 지나고 오랜 기간이 흘렀다. 안당(安瑭)이 뒤를 이어 아무 공로도 없는 소인으로서 전형(銓衡)을 맡아서 사람을 등용하고 물리침에 있어서 조정에서 의논하지도 않고 사사로이 집에서 의논하였다. 조광조ㆍ김식ㆍ박훈은 모두처겸(處謙)과 친한 친구이므로, 그 아비에게 말하여 처음으로 6품 벼슬을 제수하여 조종(祖宗)의 사람 쓰는 법을 허물어뜨리고 그 권세가 이미 이루어져서, 안당이 정승이 되자 많은 소인들이 뜻을 얻어 서로 칭송하고 찬양하게 되어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유운ㆍ김안국ㆍ이자ㆍ최숙생ㆍ김구ㆍ한충ㆍ유인숙ㆍ박세희ㆍ김정국ㆍ신광한ㆍ기준ㆍ정응ㆍ이약빙ㆍ최신두ㆍ이충건ㆍ이희민ㆍ양팽손ㆍ정완(鄭浣)ㆍ이청(李淸)이 요직에 임명되고, 대간 시종에 드나들며 중요한 기무(機務)를 잡고 붕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행동은 더러우면서 다스리는 체하고 사사로운 일을 공무라 가탁하여 날마다 붕당 만드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만일 자기와 다른 자는 비록 공경 대신이라도 반드시 그 과실을 얽어서 배척하고, 자기에게 붙는 자는 혹은 학행이 있느니 혹은 이학(理學)을 아느니, 혹은 향방(向方)을 아느니 하여 두둔하므로 이 뒤로부터는 자기에 붙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이것뿐 아니라 이약빙ㆍ기준은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에서 노골적으로 말하기를, ‘광조는 이조 판서에 합당하고 이자는 병조 판서에 합당하고, 문근은 형조 판서에 합당하다.’ 하였다. 심지어 안찬은 서얼인데도 또한 형조 정랑이 될 수 있다 하여 조금도 기탄이 없었다. 편전(便殿)에 입시하여 광조는 말하기를, ‘문근은 옛사람의 순박하고 곧은 풍조가 있다.’ 하고, 문근은, ‘광조는 정주학을 연원으로 한 학문이 있는데 이 따위 일들은 이루 다 말할 필요도 없고 성명(聖明)께서도 통찰하신 것이다.’ 하였다. 또, 간당들의 일이 실패 하던 날, 그들의 죄를 드러내어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곧 정법(正法)대로 하지 못한 실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아주 간특한 자는 제거되었으나 그 뿌리가 아직도 남아 있어 근거를 잃고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무리들이 여러 날을 대궐에 엎드려 모두 죄가 없다고 말하고, 혹은 이 사람들은 충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여, 아래로 유생에 이르기까지 궐문을 밀치고 곧장 들어와서 머리를 풀어뜨리고 통곡하였으니, 광조의 무리가 사람을 속이고 세상을 미혹함이 이렇게까지 심한 것을 볼 수 있다. 아주 흉한 자는 자취를 감추었으나 속으로 붙어 몰래 자라 오랜 뒤에 나타나서, 지금 광조의 여당인 정숙ㆍ안처겸이 정세가 불리하게 되어 모두 사형을 받았으므로, 임금은 반성하고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비록 한 가지 재앙이 닥쳐옴을 당하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다시 두려운 생각을 더하여 경계하고 조심하여야 하겠거든, 하물며 이 흉역의 변괴에 있어서는 정히 전하께서 반성하여 스스로 책망하고 근본을 단정히 하고 시초를 고칠 날이다.” 하였다.
대개 남곤ㆍ심정의 무리가 반역이라고 얽어 씌워 모함하는 짓을 자행하여 온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당인들을 의논하여 신구(伸救)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계교를 꾸민 것이 극히 간사하고 교묘하였다. 아, 조광조 일당의 일을 일부러 비뚤게 들추어 내고, 그들의 말을 거짓말로 지적하여 죄과 속으로 끌어넣되 남의 눈에 비단으로 보이듯이 찬란하게 하고 남의 귀에 생황 소리로 들리듯이 교묘히 꾸며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떤 벼슬에 합당하고, 어떤 사람의 재주는 어떤 임무에 알맞다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통속적으로 하는 말이요, 서로 칭찬하는 말은 아니다. 문근의 순직한 것과 조정암의 이학(理學)은 나라 사람들이 함께 칭송한 것이니, 임금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함이요, 본래 헛명예로 서로 칭송한 것은 아니다. 형조 좌랑 조광좌(趙光佐)가 옥사의 의심스러움을 조정암에게 물었다. 그때에 유명한 선비들이 자리에 가득한데 안찬이 뒤에 도착하므로 그 의심나는 것을 그에게 물은 일이 있었는데, 안찬의 분석하는 것이 명류들의 결단한 것과 같았다. 정암은 말하기를, “만일 안찬으로 하여금 형조에 앉게 한다면 지연될 옥사가 없겠다.” 하였으니, 대개 안찬의 재주를 아깝게 여기고, 조광좌의 결단 못 하는 것을 기롱한 것이었다. 어찌 서얼로서 낭관을 시키고자 한 것이랴. 기타 곧은 것을 뒤집어 나쁜 것으로 만들고, 글을 부연하여 헐뜯기를 구한 것이 모두 이런 종류다. 어진 선비를 발탁하여 자격을 따르지 않으면 자기를 위해서라고 헐뜯고, 공천을 써서 특별히 별과(別科)를 설치하면 당파를 만든다고 지목하며,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배척하면 자기와 다른 사람은 배척한다 하고, 행실이 착한 사람을 추천하면 떠밀어 주고, 칭찬하고 아부하고 결탁한다고 하여, 임금을 시비에 현혹시키고 신하가 감히 의논을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권세를 오로지 마음대로 하여 기염(氣焰)이 하늘을 흔들어 못하는 짓이 없으니, 이 때문에 온 나라 사람들이 참혹한 화를 두려워하여 당인으로 화의 장본을 삼아, 친척간에도 서로 통문을 하지 않고 보기만 하면 자기를 더럽힐 것같이 하고 길에서도 피하였다. 참으로 하늘의 도는 순환하기를 좋아하여 제게서 나온 것은 제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개 남을 해하고 자기를 이롭게 하여 스스로 총애와 녹을 굳힌 자는 멀어야 10년을 지나지 못하고 혹은 제 명에 죽지 못하니, 눈앞의 한때의 영광과 총애를 얻기 위해 더러운 냄새를 만세에 남기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홍경주 찬성(贊成) ㆍ김전 영상(領相) ㆍ이빈 참판(參判) ㆍ성운 경상감사(慶尙監司) ㆍ채침(蔡忱) 대사헌(大司憲) ㆍ조침(趙琛) 참판은 4ㆍ5년 동안에 서로 이어 사망하고, 병술년에 남곤 영상이 죽고, 이항 사성(司成)은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고, 심정 좌상도 귀양갔다가 신묘년(1531)에 함께 죄를 입어 죽었다. 이행(李荇)도 유배되어 있는 곳에서 시체로 묻혔으니 이것은 모두 김안로가 개인적인 원망을 갚은 것이요, 그 죄를 바로 잡은 것은 아니다.
이보다 먼저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바로 인종(仁宗)의 맏누이다. 연성위(延城尉)에 봉해지고 안로는 갑자기 경상(卿相)에 승진되었다. 갑신년(1524)에 이조판서로서 권세를 오로지하여 마음대로 하자, 정부와 6조가 모두 그 죄상을 탄핵하여 멀리 내쫓았으니, 심정ㆍ이행ㆍ이항이 그때 의논을 주장한 자이다. 그 뒤에 안로가 공주를 인연하여 풍덕(豐德)으로 이배되었다.
민수천(閔壽千)이 경기 감사로 있는데 가서 안로를 달래기를, “왜 기묘년에 관계했던 사람들을 조정(調停)하는 뜻으로 두 심씨와 서로 결탁하지 않는가.” 언경(彦慶)ㆍ언광(彦光) 하였다. 대개 두 심씨가 기묘년 사람들을 쓰고자 하였으나 후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안로는 마음속에 넣어 두었다가 민수천의 말대로 그의 처족 채무택(蔡無擇)에게 달려가 고하였다. 그때 정언으로 있었다. 무택은 주창하기를, “동궁(東宮)이 외로우니 심히 근심스러운 일이다. 동궁의 우익(羽翼)과 기묘년 사람들을 조정하는 것은 안로가 한 번 일어나는 데 있다.” 하였다. 대사헌 심언광이 그 조정한다는 말을 믿고 따라 호응하여 붙쫓으니 온 조정이 그편으로 쏠렸으나,
사간 이언적(李彦迪)만은 힘써 말하기를, “그 마음가짐과 처신을 보면 참으로 소인의 정상(情狀)이니, 만일 뜻을 얻게 되면 나라를 반드시 그르칠 것이다.” 하자, 심언광이 조정(朝庭)에서 선언하기를, “언적이 조정에 있으면 안로가 들어올 수 없다.” 하여, 드디어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부제학(副提學) 성세창(成世昌)이 동료를 거느리고 안로를 쓸 수 없다고 논계하며, 심정이 사림을 얽어 빠뜨린 것과 같다고 무함하여 귀양보내니, 온 나라 사람이 감히 말을 못하였다.
안로가 일단 뜻을 얻어 임진ㆍ계사 연간에는 조정에서 당인을 등용할 뜻이 있어, 먼저 귀양가 있는 사람을 사면하는데, 오직 김구와 박훈이 살아 있어서 석방되자, 김안로가 의정 김근사에게 사주하여 이미 내린 공론을 꺾어 없애 버리고 전보다 더 심하게 금고(禁錮)시켰다. 정유년에 이르러, 세 간흉이 죄를 입자 그 때에 윤안인(尹安仁)이 내지(內旨)를 받아 대사헌 양연(梁淵)과 대사간 김희열(金希說)이 김안로ㆍ허항(許沆)ㆍ채무택을 논책하여 사사(賜死)하였다.
태학에서 소장을 올려 기묘의 원통함을 말하니, 온 나라 신민들이 기뻐하며 서로 경사로 여기어, “봉황이 조양(朝陽)에서 우는 것 같다.” 하였다. 당시에 당인으로서 생존하여 등용된 이가 겨우 10여 명이었다. 중
종이 말년에 크게 경장하려 하였고,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덕 있는 여러 현인들이 왕의 계획을 보좌하고, 후진 여러 선비들이 성군의 세상을 쫓아 사모하여 무릇 풍습을 바로잡고 기강을 세우는 것을 반드시 기묘의 정치를 본받아서 지극한 다스림을 일으키기를 바랐으나, 불행하게도 두 성군이 서로 이어 승하하므로 세상일에는 변천이 많아 정순붕ㆍ기(李芑)가 또 을사년에 화를 일으켰다.
윤원형(尹元衡)이 일찍이 말하기를, “을사 반역인들이 곧 기묘의 남은 싹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공론이 이루어지려다가 도로 위축되어 오래도록 떨치지 못하였다. 원형의 무리는 성품이 본래 시기를 좋아하고 혹독하여 자기의 원망이 아니라도 선량한 사람을 미워하여 해쳤으나 실상은 자신이 도리어 간사하고 악한 함정에 빠지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융경(隆慶) 무진년에 금상(今上)께서 경연에서 찬성 이황(李滉)에게 묻기를, “근일에 시종하는 신하들이 모두 남곤이 간사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자, 황은 “조광조를 무함하여 해쳐서 기묘사림의 화를 얽은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 김계(金啓)가, 남곤이 도깨비 짓을 하여 사림을 일망타진한 일을 죽 들어서 일일이 진달하자, 황이 다시 나와 말하기를, “신은 입이 둔하여 분명히 전달하지 못하였는데 김계의 말이 모두 옳습니다.” 하였다. 즉일로 임금이 정원에 명하여 김계의 말을 써서 아뢰게 하고, 또 옥당ㆍ양사로 하여금 남곤의 죄상을 의논하여 열거하게 하였다.
이에 옥당과 대간이 소장을 번갈아 남곤의 관직을 삭탈하기를 청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삭탈하여 그 죄를 50년 뒤어 밝히고, 정암에게 높은 관직과 아름다운 시호를 주고 천과(薦科)를 회복하였으니, 기묘의 원통함이 거의 깨끗이 씻어졌다. 그러나 하늘의 그물이 넓어서 홍경주가 오히려 빠졌고, 심정이 또한 죄의 괴수로 후세에 이름짓지 못하였으니, 어찌 사림의 유감이 되지 않으랴. 또 지금의 의논하는 자가 위협당하여 복종한 자는 다스리지 말라는 뜻에 따라서 북문(北門)으로 들어간 재상들은 오히려 괴수와 위협당하여 복종한 자를 분간하려 하니, 슬프다, 붙쫓은 무리들이 실은 더 심한 짓을 하였으니, 당초에 고변할 때에 비록 그 간사한 꾀가 이미 궁중에서 용납되었다 하더라도 김전ㆍ고형산ㆍ홍숙ㆍ손주가 없었다면 공사를 칭탁하여 간악한 꾀를 이루어 임금의 총명을 속이고 가리지 못하였을 것이고, 이원(李湲)ㆍ세정(世貞)이 없었다면 선비의 공론이라고 말하여 죄를 더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이빈ㆍ채침ㆍ조침이 아니었다면 패거리를 만들어 세력을 차지하고 사대부들을 해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굽어봄이 심히 밝아서 벌을 내린 것이 더욱 참혹하였다. 혹 비명에 죽거나, 고육계(苦肉計)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나, 동창(東窓)에서 뉘우치고 한하는 것들이니, 간흉한 무리는 원래가 괴수와 추종자를 의논할 것이 아니다. 우리 태종(太宗) 대왕이 권신에게 아부한 손흥종(孫興宗)의 죄를 중한 법으로 처치하려 한 것은 간사한 적신을 베는 아름다운 뜻이니, 실상 만세의 마땅히 법받을 것이다.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