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여름 날 같더니, 오늘은 비오고 춥구요, 봄이 왔다고 겨울옷 정리해서 넣어 두었더니, 추워서 다시 꺼내 입는 날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봄꽃들이 순서도 없이 한꺼번에 피어나 꽃동산 속에 사는 것 같아 한동안 황홀했습니다.
이 황홀한 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동과 나라 간의 충돌로 어린 생명들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하고, 애꿎은 국민들이 미사일 발사와 공습을 받아, 식구들과 삶의 터를 잃어버리고 넋 나간 표정으로 헤매고 다니는 광경들을 매스컴의 중계로 보고 있으면 공포와 슬픔이 밀려옵니다. 무섭습니다. ‘먼 나라, 먼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나는 상관없다’ 이것 아닙니다.
요즈음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란 사이에 일어난 다툼이 전쟁 상황으로 치달아 가며 많은 희생자들을 내고, 자연과 자원을 파괴하였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피해를 당하는 곳 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변 국가에게만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 세계 경제가 모두 연결되어 있어서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현대문명은 화석연료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화석연료가 에너지원이 되는 나라들은 모두 이 싸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이 다툼이 어서 끝나기를 기다리고, 휴전 협정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툼이 끝나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다투는 이들은 옛날부터 한 지방 같은 땅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두 편이 다 그 땅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며 다투지요. 종교도 다릅니다. 그리고 힘(군사력)으로 서로 가지려고 뺏고 뺏기는 힘자랑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힘없고 죄 없는 생명들이 죽어갑니다. 이 죽임을 위해 점점 더 스마트하고, 파괴를 잘하고, 한꺼번에 많은 이들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들려고 기술을 기르고 있습니다. 경쟁은 점점 더 심해지고,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가슴이 답답합니다. 갈피도 잡을 수 없는 가운데 서 있습니다.
얼마 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공습하는 영상이 나오는 뉴스를 보다가 레바논에 회의하러 갔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2000년 4월 20일부터 5월 1일까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근교에 있는 드 슈르 복음센터에서 독일서남지구선교협의회와 자매관계를 맺고 있는 8개국(가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독일, 레바논), 26개 교회(교단)의 여성 36명이 모여서 자매교회 여성협의회를 가졌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2000년부터 시작한 “폭력극복 10년”이 주제였습니다. 이 협의회는 시작부터 난항이었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직후, 주변 아랍국가들과 벌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면서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난민이 되었습니다. 그 후 삶의 터를 잃어버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은 늘 있어 왔지만, 1987년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돌과 시위로 저항하며 첫째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군사전쟁이 아닌 민중봉기였습니다. 두 번째 봉기는 2000년 자살폭탄 테러와 군사충돌이 증가하면서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으며, 여전히 싸움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 때, 협의회가 열리기로 했으니, 참가자들이 레바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었습니다. 어쨌든 계획된 협의회는 진행한다는 주최 측의 의지에 따라 대표들이 모였습니다. 비상시국에 전화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잘 도착했다는 소식도 전할 수 없었습니다. 베이루트 시내 건물에 총알 자국들이 넘쳐나고, 이스라엘과 맞닿은 지역에는 높은 철조망이 쳐 있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터 같은 현장에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폭력’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교회여성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결단하는 것으로 마무리 했었습니다, 눈 덮인 헤르몬산을 바라보고 함께 불렀던 찬송, 바알벡 신전이 있던 자리에 돌 위에 돌 하나도 얹힌 것이 없는 폐허를 보았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매일 아침 제가 드리는 기도는 언제나 평화를 기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전쟁이 없는 평화, 일상이 유지되는 평화, 남북이 하나 되는 평화. 세계가 하나 되는 평화를 기도합니다. 제 기도를 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주시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제 기도와 달리 평화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인 모두가 하나님의 평화를 기도하고 있다는데, 왜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예언자 이사야와 미가는 전쟁이 없는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방법을 확실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2:4, 미가 4:3)”
이 말씀은 먼저 ‘민족들 사이의 분쟁 판결과 열강 사이의 갈등 해결은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이라고 확실하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판결과 해결해 주심을 믿고, 우리의 삶의 방향을 우리가 바꾸어야 함을 단호하게 말합니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하는 능력가진 사람들, 인간은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를 필요에 따라 만들어냅니다. 사람이 만든 도구 중 ‘칼’은 무언가 자르는 도구로 만들어졌고, ‘창’은 양식이 되는 짐승을 잡아먹고 사는데 필요한 도구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칼과 창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게 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해치는 도구이지요. 전쟁터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 되었습니다. ‘보습’은 밭을 가는 쟁기의 날로, 밭을 갈 때 흙을 뒤집는 부분으로 농사를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낫’은 곡식을 베는 도구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익은 곡식을 수확할 때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지요.
칼과 창이 사람을 해치는 죽임의 도구라고 한다면, 보습과 낫을 생명 살림의 도구입니다.
두 예언자는 한목소리로 죽임의 도구를 생명 살림의 도구로 전환하라고 합니다. 도구의 전환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삶의 방향 자체를 바꾸어야,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전쟁 없는 평화가 우리에게 올 것이다. 온다!
미가 예언자는 이에 덧붙여 ‘일상의 평화’ 모습을 그려 보여줍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미가 4:4)”
자기 ‘포도나무, 자기 무화과나무’가 있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할 양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나무 아래 앉아 있음은 거처할 곳도 있다는 표현이지요. 거처할 곳과 먹을 양식.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기도 속에 들어 있는 평화입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고, 우리 조상들도 느낀 평화의 모습입니다.
한 가지 더,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면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불안은 다른 데서 오는 위협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런 위협도 없는 곳. 주님이 약속한 삶, 주님이 주신 평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평화는 ‘내 삶을 죽임의 도구를 삶의 도구로 바꾸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깨달아서, 지금 내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혼자 해 봐야 소용없다. 그냥저냥 좋은 게 좋은 거야 하며 살다 가지.’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일어나 방향을 생명살림으로 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지금처럼 살고 있는 한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무시무시한 죽임의 무기들이 우리 머리 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힘과 권력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키는 악한 사람들에게 기대지 말고, 믿지도 말고 내 삶을 바꾸어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앞서 가시는 그 길을 따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