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의 초록 물결과 순천만의 바람 사이에서
아침 햇살이 호텔 창문을 두드릴 무렵, 나는 하루를 시작했다.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나오니 형이 이미 호텔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 전, 고향 집 진돗개들과 산책하다 넘어져 머리를 열 바늘이나 꿰맨 일이 있었다. 오늘은 그 스테이플을 제거하는 날이었다.
형의 차에 올라 고향 병원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들녘보다 더 반가운 것은 오랜만에 형과 나누는 대화였다. 살아가다 보면 가족은 늘 곁에 있는 것 같지만, 정작 마음을 나누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병원으로 가는 길은 짧았지만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오래 묵혀 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병원에서는 생각보다 금방 진료가 끝났다. 의사는 컴퓨터 화면을 보더니 “일주일 되셨네요.” 하고는 핀셋으로 스테이플을 하나씩 제거했다. 채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병원비는 CT CD 비용까지 포함해 약 26달러. 미국 응급실에서 지불해야 할 비용을 생각하면 놀라울 만큼 저렴했다.
병원을 나서며 문득 의료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한국의 의료는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공감은 조금 아쉬웠다. 미국 병원에서는 환자를 왕처럼 대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물론 제도적 이유도 있지만, 환자의 불안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려는 노력 역시 중요하다. 한국의 의사들도 바쁜 현실 속에서 그런 여유를 갖기 어려운 것일 테지만, 가끔은 의술보다 따뜻한 한마디가 더 큰 치료가 되기도 한다.
나는 병원비 영수증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래, 서운함은 잠시 접어 두자. 이 정도 비용이라면 감사한 일 아닌가.”
병원을 나온 보성으로 향했다.
버스 창밖으로 펼쳐지는 초록빛 들판을 지나 도착한 곳은 대한다원 녹차밭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하늘 높이 뻗은 삼나무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길을 지키고 있던 수문장 같았다.
차밭에 들어서자 끝없이 이어진 녹차나무들이 언덕을 따라 계단처럼 펼쳐졌다. 마치 누군가 산 전체에 초록빛 융단을 깔아 놓은 듯했다.
가이드의 안내로 녹차 아이스크림 하나를 손에 들고 천천히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형제들과 이곳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낯설기보다는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반가움이 먼저 다가왔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하지만 고개를 들 때마다 펼쳐지는 풍경은 숨이 찰 만큼 아름다웠다. 연둣빛 차잎들이 바람을 따라 출렁이고, 노란 꽃 주변에서는 벌과 나비가 분주히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수명이 며칠에 불과한 나비조차도 온 힘을 다해 꽃을 찾아다니는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정상에 올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녹차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언덕 아래 펼쳐진 차밭은 계단식 물결처럼 산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오래 눈에 담고 싶었지만 시간은 여행자의 가장 큰 적이었다.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을 일행을 생각하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녹차밭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자연이 사람에게 건네는 초록빛 위로였고, 바쁘게 살아온 삶에게 잠시 쉬어가라고 말해주는 쉼표였다.
보성을 떠난 우리는 순천만으로 향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도착한 순천만 습지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갈대밭 사이를 걷는 순간 바람의 소리가 먼저 나를 맞아 주었다.
수천만 개의 갈대 잎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리는 마치 자연이 연주하는 거대한 교향곡 같았다.
갈대숲 어딘가에서는 새들이 짝을 부르는 소리를 냈다. 몸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만으로도 그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갯벌에서는 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어린 시절 영산강 둑에서 게를 잡던 기억이 떠올랐다.
호롱불 하나 들고 밤길을 걸으며 게 구멍에 손을 넣던 시절.
게에게 손가락을 물려 눈물이 날 만큼 아팠지만, 저녁 밥상에 오를 게를 생각하며 참아냈던 그 어린 날의 추억이 순천만의 갯벌 위로 다시 살아났다.
짱뚱어들은 물길을 따라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우리 집 마당을 뛰어다니던 강아지들 같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갈대밭을 지나 용산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순천만은 말 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였다.
S자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물길.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멀리 반짝이는 바다.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등줄기는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갯벌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 땀을 식혀 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도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갯벌은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었다.
게와 짱뚱어, 낙지와 조개.
그리고 그 생명들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자연은 욕심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늘 풍요를 선물하지만, 욕심을 부리는 순간 등을 돌린다.
순천만은 그 단순한 진리를 조용히 가르쳐 주고 있었다.
순천만을 뒤로하고 우리는 부산으로 향했다.
도착 전 들른 갈빗집에서는 로봇이 음식을 배달하고 있었다.
외국인 동료들은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한국 음식이 최고예요!”
정말 그랬다.
푸짐한 반찬과 정성 어린 음식은 여행의 피로를 잊게 만들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맛있는 음식은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밤이 되어 나는 해운대 해수욕장을 찾았다.
무려 오십 년 만의 재회였다.
백사장에는 마침 모래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거대한 모래 조각들이 황금빛 조명을 받으며 밤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었다.
파도는 잔잔하게 밀려왔다가 물러가기를 반복했다.
마치 오랜 세월 만에 찾아온 나를 향해
“잘 왔다.”
하고 인사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멀리 파도 소리가 들리고, 짠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곧 뉴욕으로 돌아가겠지만, 오늘 하루 만난 초록빛 녹차밭과 갈대밭의 바람, 그리고 해운대의 파도 소리는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여행은 결국 장소를 보는 일이 아니라, 그곳에서 잊고 있던 자신의 기억을 다시 만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나는 보성의 차향 속에서, 순천만의 바람 속에서, 그리고 해운대의 파도 소리 속에서 또 하나의 추억을 가슴에 담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