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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髮의 군주들
물론 이때는 우리가 이미 메로빙 왕조에 대해서 조사해 보고 난 후였다. 우리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카타리파와 성당기사단의 주변보다도 더 불투명한 환상과 불확실성의 안개
속을 더듬어 왔다. 우리는 역사와 우화가 복잡하게 뒤얽혀 꼬인 실마리를 풀어 내느라 몇 달을
보냈다. 그러나 우리들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메로빙 왕가는 거의 대부분이 그대로 신비
속에 싸여 있었다.
메로빙 왕조는 전체적으로는 프랑크족으로 알려지고 있는 독일 민족 가운데 한 부족인 지캄브
리아족으로부터 기원하였다. 5세기와 7세기 사이에 메로빙 왕가는 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에
해당하는 영토의 대부분을 통치하였다. 메로빙 왕가가 권좌로 부상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 유명
한 ‘성배’ 이야기가 피어난 시기인 아아더왕의 시대와 맞먹는다. 이 시기는 오늘날 우리가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바, 역사상의 그 어느 때 보다도 가장 헤아려 밝혀내기가 어려운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밝혀낸 그 ‘암흑시대’란 그렇게 실제로 어두운 시대였던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고의적으로 그 시대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이 드러
나게 되었다. 학문에 대해서 그리고 특히 저술에 대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할 독점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시대 후에 잔존하게 된 기록들이란 어떤 특정한
계층의 이권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한 이권에 어긋나는 대부분의 기록들은 사멸되거나 검열
단속되었다. 그러나 때때로 이 구석 저 모퉁이에 과거를 가로막고 드리워져 있는 커튼 사이로
빠져 나온 자료들이 공식적으로는 이야기 되지 않아 감추어져 있는 것들을 이모저모 알려주고
있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러한 자취들로부터 한 실상이 재구성될 수 있었다. 그 실상
은 아주 흥미진진한 것이며, 정통적인 주장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전설과 메로빙 왕가
우리는 메로빙 왕조의 기원에 관한 많은 수수께끼들과 직면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보통 한 왕조를 생각할 때, 한 통치자의 가문이나 집안을 다른 가문이나 집안이 단순히 계승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선임 왕가를 쫓아내거나 폐위시키거나 또는 책략을 써서 밀어내는
방법으로 다른 왕가가 권력을 잡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은 왕조들이
이런 저런 방법의 쿠데타, 때로는 이전의 선임 왕통이 멸절되기도 하는 쿠데타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장미전쟁을 보면 왕조의 변화가 분명히 드러난다. 한 세기가 지나
서 튜더 왕가가 멸절된 후에야 비로소 스튜어트 왕가가 영국의 왕좌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스튜어트 왕가의 사람들은 오린지 가와 하노버 가에게 강압적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그러나 메로빙 왕가의 경우는 다르다. 어떤 폭력에 의하거나 갑작스러운 변화도 없었고, 어떤
형태의 찬탈이나 폐위나 선임 통치세력의 멸절도 없었다. 반면에 메로빙 왕가라고 불리게 된
그 가문은 이미 프랑크족을 통치하고 있었던 것 같다. 메로빙 왕가 사람들은 이미 정당하고도
당연하게 인정받는 왕들이었다. 그러나 그 가문 가운데 한 인물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그전 왕조의 이름으로 명명했던 것이다.
그 가문에 메로빙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 통치자는 가장 알 수 없는 인물이며 그의 역사적인
실상은 전설로 가려져 있다. 메로베(Merovee, 메로베크 또는 메로베우스)는 그의 이름조차도
그가 어떤 기적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과, 그가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이름은 프랑스어로 ‘어머니’라는 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바다’라는 말고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유력한 프랑크족 연대기 기록자와 그 이후의 전승에 따르면, 메레베는 두 명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클로디오왕의 아내였던 메로베의 어머니는 그 왕에게서 메로베를 태중에
임신하고 있었을 동안, 아마도 바다에 헤엄을 치러 갔었던 것 같다. 그녀는 물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바다 저쪽에서 온 어떤 동물에게 유혹을 받았고 겁탈을 당했다고 한다. 그 동물
은(bestea Neptuni Quinotauri similes) 즉 퀴노타우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퀴노타우르
와 비슷하게 생긴 해신인 넵튠의 동물이었다고 한다. 이 동물은 분명히 그 여자에게 두 번째로
임신을 시켰다. 그래서 메로베가 태어났을 때, 그의 혈관 속에는 두 개의 다른 피가 섞여 흘렀
다고 하는데, 하나는 한 프랑크 통치자의 피요, 또 하나는 신비스러운 수생 동물의 피였다.
물론 이러한 환상적인 전설들은 고대세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후대 유럽인들의 전승 가운데
서도 아주 흔한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전설들을 완전히 상상적으로 꾸며낸 것만은 아니
며 오히려 상징적 또는 우화적인 것으로서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그 전설들의 황당
무계한 모습 뒤에 감추어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메로베의 경우에 그 전설적인 이야기는 아마
도 어떤 종류의 이족(異族) 결혼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면 유대교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어머니를 통하여 혈통이 이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거나, 또는 프랑크족이 다른 종족
과 혈맹을 맺게 됨으로써 왕조의 혈통이 뒤섞이게 되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도 있다.
아주 가능성 있게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서 프랑크족이 혈맹을 맺게 되는 그 다른 종족이란
‘바다 저쪽에서 온’ 종족 – 즉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후대의 우화에서 수생동물로 탈바꿈
되어 이야기된 종족일 것이다.
어쨌든 메로베는 두 가지 혈통을 물려받음으로 인해서 인상적인 일련의 초인적 능력들을 타고
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전설 뒤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사실이 어떻든 간에 메로빙 왕조는
계속해서 주술, 마술 그리고 초자연적인 능력 등의 후광을 입게 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비약을
만드는 법을 주관했고 비법 시술자들을 다스렸다. 그래서 그들은 거의 동시대의 전설적인 인물
인 메롤린과 적수가 될 법하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종종 ‘마술사 왕들’ 또는 ‘요술사
왕들’로 불렸다. 그들의 피에는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병자에게
손을 얹음으로써 병을 고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의 관복 가장자리에
달린 장식술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투시를 통하여 또는 영감을 통하여 동물들이나 주위에 있는 자연세계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으며 주술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고 이야기
되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을 보호해 주고 보기 드문 장수를 보장해 주는 비법의 주문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는 이에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모두 출생시부터 태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 태점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었고, 그들이 그 왕가의
점지받은 군주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들이 반신적인 거룩한 피를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러한 태점은 붉은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가슴 위에 있거나, 또는
양어깨의 견갑골 사이에 있던 것으로 신비하게도 성당기사단의 문장이 미리 예시된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메로빙 왕가의 왕들은 또한 흔히 ‘장발의 군주들’로 불린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삼손처럼, 그들
은 머리를 깎는 것을 몹시 꺼려하였다. 삼손의 머리카락처럼 그들의 머리카락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능력의 핵심과 비밀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메로빙 왕가 군주들의 머리카락의
능력에 대한 이러한 신앙의 근거가 무엇이든지 간에 머리카락은 대단히 신중하게 취급되었고
후대인 A.D. 754년까지도 그러했다. 754년에 킬데릭 3세가 폐위되어 투옥되자 교황의 특명
으로 그의 머리카락은 정중하게 의식을 갖추어 잘리게 되었다. 메로빙 왕가를 둘러싸고 있는
전설들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것이든 간에 그러한 전설들은 어떤 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
즉 메로빙 왕가의 군주들이 그들의 생전에 누렸던 지위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메로빙 왕가의 군주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왕과는 다르게 생각되었다.
그들은 제왕들, 즉 바꾸어 말하자면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과 비슷한 신의 화신들로 생각되었
다. 그들은 단순히 신의 은층으로만 다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분명히 살아있는 신의
은총의 화신이나 현현체로 간주되었던 갓 같다. 즉 우리가 보통 오로지 예수에게만 부여하는
신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왕보다는 사제가 관여했던 제의적 관습들을 담당
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메로빙 왕가 군주들의 두개골들은 왕관 안에 있는 제의적인 칼자국이나
구멍으로 나타나는 흔적을 지니고 있다. 이와 유사한 칼자국은 고대 티베트 불교의 대사제들의
두개골들에서 발견되는 것으로서, 이는 죽을 때에 영혼을 도망치도록 해주며, 신과 직접 접촉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성직자의 삭발이 곧 메로빙 왕가의 관습
의 잔재라고 생각할 수 있다.
1653년에 가장 중요한 메로빙 왕가의 한 무덤이 아아든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메로베의
아들이자 클로비스의 아버지인 킬데릭 1세의 무덤으로서 그 왕은 메로빙 왕가의 모든 통치자
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던 사람이었다. 이 무덤에는 사람들이 왕의 무덤에 들어
있는 것으로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무기. 보물, 그리고 왕위를 나타내는 왕보들이 들어 있었다.
이 무덤에는 또한 왕권보다는 주술사, 마술사 또는 강신술사의 특성을 잘 나타내주는 품목들이
들어 있었다. 예를 들면 절단된 말의 머리, 금이나 수정구슬로 만들어진 황소의 머리 등이었다.
메로빙 왕가의 가장 거룩한 상징은 꿀벌이었다. 그래서 킬데릭 왕의 무덤에는 순금으로 만들어
진 삼백 마리 이상의 축소형 꿀벌 형상들이 들어 있었다. 그 무덤의 다른 매장품들과 함께
이 꿀벌 형상들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네덜란드 군부통치자이자 황제 페르디난드 3세의 형제
였던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 빌헬름에게 기탁되었다. 결국 킬데릭의 거의 모든 보물들은
프랑스로 되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1804년에 황제의 자리에 앉을 때 나폴레옹은
자신의 대관식 예복에 금으로 된 꿀벌 형상들이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단지 나폴레옹이 메로빙 왕가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을 이야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한 피숑신부에게 메로빙 왕가의 혈통이 그 왕조의 몰락 이후에도 잔존
하였는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계보들을 편찬해 내도록 위임하였다. ‘소수도원 문서’ 가운데
나오는 계보들은 주로 이렇게 나폴레옹이 위임하여 만든 계보들에 기초한 것이었다.
아르카디아로부터 온 곰
메로빙 왕가를 둘러싸고 있는 전설들은 아더왕과 그 성배의 전설의 시대에 어울리는 것임이
드러났다. 동시에 그 전설들은 우리가 알아내고자 하는 역사적 실상과 우리들의 사이에 엄청난
성벽처럼 가로놓여 있다. 만일 결국에 우리가 그 역사적 실상으로 접근하게 되고 극히 적게
잔존해 있는 역사적 실상으로 다가서게 된다면 이러한 실상은 전설과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역사적 실상이 전혀 신비로운, 또는 평범하지 않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
는 것이 아닌 평범한 실상은 아니다.
우리는 메로빙 왕가의 실제적인 기원에 대하여 증명해낼 수 있는 어떤 정보를 거의 찾아낼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노아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모세보다는 오히려 노아를 모든
성서적 지혜의 근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흥미로운 견해로서 천 년 후에 유럽의 프리
메이슨단에서 다시 표면화된 것이었다.
메로빙 왕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대 트로이인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사실은
어찌되었거나 이러한 주장은 프랑스 내에 있는 트로이, 파리 등과 같은 트로이식 명칭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었다. ‘소수도원 문서’의 저자를 포함해서
보다 현대적인 작가들은 메로빙 왕가의 근원지를 고대 그리스, 특히 아르카디아라고 알려진
지역으로 추적해 올라가 보려고 노력해 왔다. 이러한 문서들에 따르면 메로빙 왕가의 조상들은
아르카디아의 왕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시대가 도래할 즈음인 어떤 확실치 않은
시기에 아마도 그들은 다뉴브 지방으로 그 다음에는 라인 지방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며, 오늘날
의 서부 독일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를 잡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메로빙 왕가가 최초로 트로이나 아르카디아로부터 나왔다는 주장이 학문적인 근거가 있는
주장이든 아니든 간에 그 두 가지 주장들 사이에는 필연적인 모순점이 없다. 호머에 따르면
실제로 아르카디아인으로 구성된 한 파견대가 트로이 전투에 참전했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
서들에 따르면 트로이는 사실상 아르카디아로부터 온 정착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고대
아르카디아에 있어서 곰은 신성한 동물이었다는 것을 알아둘 만하다. 곰은 신비한 제의들의
기초가 되고 의례적인 제물이 바쳐지던 토템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아르카디아’라는 명칭은
‘곰의 백성’이라는 뜻을 가진 ‘아르카데스’라는 말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고대 아르카디
아인들은 자신들이 그 땅의 수호신인 아르카스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아르카스
라는 이름도 ‘곰’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신화에 따르면 아르카스는 사냥의 여신인 아르
테미스와 관련이 있는 한 요정 칼리스토의 아들이었다. 현대인들에게는 칼리스토가 별자리
우르사 마요르, 즉 큰곰좌로 널리 알려져 있다.
메로빙 왕가가 기원하게 될 지캄브리아의 프랑크족들도 이와 비슷하게 곰을 상당히 높은 신분
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고대 아르카디아인들고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르테미스 형상을 지난
– 또는 보다 특별하게 갈리리의 아르테미스라 할 수 있는 아아든 사람들의 여수호신 아르두이
나의 형상을 지닌 곰을 숭배한다. 아르두이나의 신비한 제의는 중세에까지 잘 보존되었다.
이 문제의 도시는 르네빌레로 조사 연구중 자주 등장하는 다른 두 유적지들인 스테내와 오르
발에서 그리 멀지 않다. 훨씬 후대인 1304년에 교회당국이 이 이교 여신에 대한 숭배를 금지
한다고 선언한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그 여신들의 신상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곰의 주술적이고 신화적이며 토템적인 지위가 아아든족의 메로빙 왕가 중심부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시온의 문서들에서 라틴어로 ‘곰’이란 뜻의 ‘우르수스(Ursus)’라는 이름이 메로빙
왕가의 혈통과 연결된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오히려 보다
놀라운 일은 웨일즈어로 곰이라는 말이 ‘아드(Arth)’라는 사실이다. 이 말로부터 ‘아더’왕의 이름
이 유래한 것이다. 물론 우리가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추론해 온 것은 아니지만, 메로빙 왕가
와 아더왕의 일치점은 흥미를 자아내는 일이다. 즉 아더왕은 메로빙 왕가의 사람들과 동시대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그들과 마찬가지로 곰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지캄브리아인들이 갈리아에 들어감
일찍이 5세기 초에 훈족의 정복으로 말미암아 거의 모든 유럽의 종족들은 대규모의 이주를
하게 되었다. 메로빙 왕가의 사람들 –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메로빙왕가의 지캄브리아인 조상
들 – 이 라인강을 건너서 집단으로 갈리아로 이주하여 오늘날의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에 해당
하는 아아든 지방 근처에서 정착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의 일이었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이
지역은 오스트라지 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오스트라지 왕국의 심장부는 오늘날
로랭 지방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캄브리아인들이 갈리아로 이주해 들어간 것은 거칠고 난잡한 야만족의 무리가 그 땅을 난잡
하게 짓밟아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반면에 그 이주는 평온하고 문명적인 사건이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그 지캄브리아인들은 로마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그들이 비록
이교도들이었다고는 하나 야만인들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로마의 관습과 행정에 아주
익숙해 있었으며 로마의 형식을 따랐다. 어떤 지캄브리아인들은 로마 황제의 군대에서 높은
지위의 장교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로마의 집정관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지캄브리아족의 이주는 습격이나 정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평화로운 흡수였다. 그리고
5세기 말엽 로마제국이 붕괴되자 그 지캄브리아족들은 그 공석을 채우게 되었다. 그들은 폭력
적으로나 강압적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옛 관습을 그대로 보존시켰고 거의 바꾸지
않았다. 어떠한 형태로든 대변동을 겪지 않고 그들은 이미 존재하고는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비어 있는 유명무실한 행정기관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래서 메로빙 왕가의 초기 통치는
고대 로마 제국의 통치 모형에 아주 밀접하게 일치하였던 것이다.
메로베와 그의 후예들
우리의 조사 결과 메로베라는 이름을 가진 역사적 인물이 적어도 두 명이라는 것이 드러났으
며, 그리고 한 수생동물의 후손으로 믿어지는 그 전설의 주인공이 그 두 사람 중 누구인지는
전혀 분명치가 않다. 한 메로베라는 사람은 지캄브리아족의 족장으로 417년에 살아 있었으며
로마인들의 치하에서 투쟁하다가 438년에 사망하였다. 적어도 그 시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라면 이 메로베가 실제로 로마를 방문했었으며 어떤 물의를 일으킬 만한 일을 주장했었으리라
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 위풍당당한 프랑크족 지도자가 로마를 방문했
으며 흘러내린 노란 머리카락 때문에 이목을 끌었다는 기록이 있다.
448년에 이 첫번째 메로베의 아들이자, 아버지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메로베가 투르나이에서
프랑크족의 왕임을 선포했으며, 10년 후 죽기까지 프랑크족을 통치하였다. 그는 하나의 연합된
민족으로서 프랑크족 최초의 공식적인 왕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또는
두 가지 피를 가진 그의 전설적인 출생으로 상징된 그 일로 말미암아 그를 계승한 왕조를
메로빙 왕조라고 부르게 되었다.
메로베의 계승자들이 다스리는 동안 프랑크 왕국은 번창하였다. 이 프랑크 왕국의 문화는 우리
가 종종 상상하듯이 그렇게 거친 야만적인 문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문화는 많은 면에서
비잔티움의 ‘고도의 문명’과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일반 문학조차도 장려되었다. 메로빙 왕조
의 통치하에서의 일반문학은 두 왕조들 후의 그리고 500년 후의 일반문학보다도 더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학활동은 통치자 자신들에게까지도 파급되었다. 그런데 가장 놀라운 일은
후대 중세의 군주들은 무식했으며, 교육도 받지 않았고 문맹했다는 사실이다. 통치자들의 문학
활동의 예를 든다면, 6세기에 통치하였던 왕 킬페릭은 파리와 소아송에 거대한 로마 양식의
원형 경기장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열정적이고 기예를 갖춘 시인이었으며, 자신의 기예에 대하
여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교회 당국자들과 벌인 토론을 문자 그대로 기록
해 놓은 것이 있는데, 그 기록은 당시의 한 왕이 그런 자질을 갖추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
울 정도로 비범한 정교함과 사변과 학식을 반영해 주고 있다. 이러한 많은 토론들에서 킬페릭
은 자신의 성직자 대담자들보다 더 뛰어났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메로빙 왕가의 통치 하에서 프랑크족은 때때로 잔인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천성이나 성향이
실제로 호전적인 민족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그들은 바이킹족이나 반달족, 서고트족
이나 훈족 같지는 않았다. 그들의 주업은 농업과 상업이었다. 한편 그들은 해상무역, 특히 지중
해에서의 해상무역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메로빙 왕조시대의 공예품들은 수톤 후(
Sutton Hoo) 보물선들이 보여 주듯이 참으로 놀라운 기술을 반영해 주고 있다. 메로빙 왕가의
군주들이 축적했던 부는 후대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엄청난 것이었다. 이러한 부의 대부분은
아주 좋은 질의 금화들이었다. 그 금화들은 어떤 중요한 자리들에 있었던 왕립 조폐국들에서
생산했던 것으로, 그 조폐국이 있던 자리 가운데 한 곳은 오늘날의 스위스에 있는 시온에 해당
한다. 그러한 금화들의 견본들은 수톤 후 보물선에서 발견되었으며, 지금은 대영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동전들 가운데 많은 것들에는 가로 길이와 세로 길이가 동일한 십자가
모양이 뚜렷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후에 십자군 운 기간에 예루살렘의 프랑크 왕국을 상징하
는 표시가 되었다.
왕 족
메로빙 왕조의 문화는 온건하면 놀라우리만치 근대적이기는 하지만, 그 문화를 다스렸던 군주
들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그 시대의 전형적인 인물들이 아니었으며, 더욱이 그들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다른 통치자들과도 달랐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생전에 조차도 그들을 둘러 싸고
있던 신비롭고 전설적인, 그리고 주술적이며 초자연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 만일 메로빙 왕조
가 다스리던 세계의 관습들과 경제가 그 시대의 다른 곳과 뚜렷이 다르지 않았다면, 그 왕조의
미묘한 분위기와 그 왕가의 혈통은 전혀 독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메로빙 왕조의 피를
받은 아들들은 ‘임명된’ 왕들이 아니었다. 반면에 그들은 열두번째 생일이 되면 자동적으로
왕으로 여겨졌다. 공공적으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은 의식도 없었고. 어떤 종류의 대관식도
없었다. 권력은 거룩한 권리에 의해서 주어지듯이 단순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 왕은 그 영토
에서 지상적인 권력자이기는 하지만 그는 결코 통치하는 세속적인 일로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었고 – 또한 그렇게 기대되지도 않았다. 그는 본질적으로 제식적(祭式的) 인물이었으며, 하나
의 제왕(祭王)이었고, 그의 역할은 필연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왕은 지배하였지 통치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지위는
오늘날의 영국과 왕가와 비슷하다. 통치와 행정은 왕족이 아닌 관리에게 맡겨졌는데, 이는
재상과 동등한 인물로 ‘궁전의 대신’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메로빙 왕가의 통치의 전체
구조는 근대의 입헌 군주들과 공통된 점들이 많이 있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 조차도 메로빙 왕조의 통치자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족장들처럼 일부
다처였다. 경우에 따라서 그들은 동양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후궁들을 거느렸다. 교회의
압력 때문에 그 귀족사회가 엄격하게 일부일처제를 시행했을 때에도 군주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충분히 호기심이 가는 문제이긴 하지만 교회도 어떤 특별한 무리없이 이 특전을
용인했었던 것 같다. 오늘날의 한 해설가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왜 그것이(일부다처제) 프랑크족 자신들에 의해서 무언중에 인정되었느냐? 고대세계에는 한
왕가에 – 즉 어떤 유리한 결혼에 의해서도 그 혈통이 더 고귀해질 수 없고 또한 노예들의
혈통에 의해서도 낮아질 수 없는 가문에는 일부다처의 관습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왕비가 왕족으로부터 간택되느냐 아니면 매춘부로부터 간택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
다…… 그 왕족의 운명은 그 혈통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그 혈통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왕조의 운명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우리가 메로빙 왕가를 생각함에 있어서 고대 이주 시기의 한 왕의 가문으로부
터 독일의 헤르쾌니게라는 한 왕조가 유래했다는 것을 견주어 생각한다는 것은 아주 가능성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상 얼마나 많은 가문들이 그런 특별하고도 지고한 신분의 특전을 누렸었겠
는가? 왜 그들의 혈통에는 그렇게 엄청난 능력이 옷입혀져야만 했는가? 이러한 질문에는 우리
를 계속해서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다.
클로비스, 그와 교회와의 협정
메로빙 왕가의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메로베의 손자 클로비스 1세로 481년
부터 511년까지 다스렸다. 클로비스라고하면 프랑스의 어린이들도 모두 알고 있는데, 이는
프랑크족이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한 것이 클로비스 치하에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마가
서부 유럽에서도 아무도 경쟁할 수 없는 지상권을 – 즉 천 년 동안이나 도전받지 않고 존속
되었던 지상권을 획득하기 시작한 것이 클로비스를 통하여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496년에 이르러서 로마 교회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5세기를 경과하면서 그 교회
의 존재 자체가 대단히 크게 위협을 받아왔었다. 384년과 399년 사이에 로마의 주교는 이미
자신을 교황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식적인 지위는 어떤 다른 주교들보다
위대한 것이 아니었고, 오늘날의 교황의 지위와는 전혀 달랐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기독교계
의 영적인 지도자도 아니었고 지상적인 우두머리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단순한 성직관계자
단체 – 즉 기독교의 여러 다른 형태들 가운데 하나의 대표자였을 뿐이며 많은 대립적인 분열
들과 신학적 입장들에 대항하여 살아 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한 단체를 대표하였을
뿐이었다. 공식적으로 로마교회는 켈트교회보다 더 큰 권위를 지니지 않았었다. 로마교회는
계속해서 켈트교회와 불화하였다. 로마교회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의
인성만을 인정했던 아리우스주의와 같은 이단에 대해서도 더 큰 권위를 갖지 못했었다. 실제로
5세기의 많은 기간 동안 서부 유럽의 모든 주교구들은 아리우스파 주교들이 맡고 있었거나
공석이었다.
만일 로마교회가 살아 남으려 했다면, 그리고 더욱이 그 권위를 주장했었다면 한 투사의 후원
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즉 로마교회를 대변해 줄 한 막강한 세속적 인물을 필요로 했을 것이
다. 만일 기독교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일치하여 발전되려고 했다면, 그 교리는 세속적
권력 – 즉 적이 되는 기독교의 신조들의 도전을 저지하고 결국에는 그것을 근절시킬 수 있는
충분히 강력한 세력에 의해서 전파되고 실행되면 강요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놀랍지도 않게
로마교회는 가장 절박한 순간에 클로비스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486년에 이르러서 클로비스는 메로빙 왕조의 통치영역을 크게 늘려, 아아든 지방으로부터
시작하여 많은 인접 왕국들과 공국들을 병합하고 많은 적대 민족들을 정복하였다. 그 결과
트로이, 랭스, 아미앵 등 많은 중요한 도시들이 그의 영토에 합병되어 들어왔다.
10년 이내에 클로비스는 서부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실권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클로비스가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조사 연구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던 그 당시에 즈음하여 그 사건에 대한 한 기록이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편찬되었다. [성 레미의 생애(The Life of Saint Remy)]라고 불리는 이 기록이
250년 후에 소멸되고 몇몇 흩어진 원고 조각들만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단편들은 관련되어 있는 사실들의 중요성에 대한 증거를 간직하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클로비스의 개종은 갑작스럽고 얘기치 않은 사건이었으며, 로마교회의 열렬한
신도였던 왕의 아내 클로틸데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아마도 남편이 자신의
신앙을 받아들이기까지 몹시도 졸라댔던 것 같으며, 결국 그녀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시성되었
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임에 있어서 그녀는 자신의 고해사제인 성 레미의 인도와 도움
을 받았었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들의 뒤에는 대단히 실질적이고 세속적인 역사
적 실상이 놓여 있다. 클로비스가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여 최초로 프랑크족의 가톨릭교도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아내의 칭찬보다도 더 큰 어떤 것이 있었으며, 하늘나라보다는
보다 명백하게 실질적인 왕국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알려지고 있는 바로는 496년에 클로비스와 성 레미 사이에 많은 비밀 회합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즉시 클로비스와 로마교회 사이에 한 협정이 비준되었다. 로마교회의 편에서 보면 이
협정은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승리였다. 이 협정은 교회의 존속을 보증해 주었을 것이며,
그 교회를 서방에서의 지상의 영적 권위로서 세워 주었을 것이다. 이 협정은 로마의 지위를
콘스탄티노플을 본거지로 하는 희랍 정교회 신앙과 동등한 것으로 굳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협정은 로마의 패권의 전망을 밝게 하여 주었고, 히드라의 머리와도 같은 이단들을 효과적
으로 근절시키는 방편이 되었다. 그래서 클로비스는 이러한 일들을 실행시키는 방편이 되었을
것이다. 즉 로마교회의 검이 되었고, 로마가 그 영적인 지배권을 휘두를 수 있는 도구가 되었
으며, 로마 세력의 세속적인 힘과 명백한 표현이 되었다.
한편으로 클로비스에게는 ‘새로운 콘스탄티누스 대제’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한 통일된 제국 – 즉 아마도 콘스탄티누스 대제 하에서 세워졌고, 얼마 전에 서고트족과
반달족에 의해서 멸망당한 한 제국을 계승하려고 의도적으로 세워진 ‘신성 로마제국’ – 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시대에 대한 한 역사전문가에 따르면 클로비스는 세례를 받기 전에 [로마
제국의 환상을 계승하여, 메로빙 왕가 후손들의 유업이 되어야 할 한 제국에 대한 꿈을 가지
고……….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고 한다.
또 다른 한 명의 현대의 저술가에 따르면, [클로비스는 이제 일종의 서방의 황제, 서부 게르만
족의 족장, 모든 백성들과 왕들을 지배하지는 않았지만 통치하는 자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고
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클로비스와 로마교회와의 협정은 그 때 당시의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그 후
천 년 동안의 기독교계에 있어서도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클로비스가 개종
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의 새로운 로마제국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제국은 로마교회에 기초를 둔 기독교의 제국이었고, 세속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메로빙
왕가의 혈통에 의해서 지배되는 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서로가 영속적으로 결속되어 있는 바 불가분리의 결합이 교회와 국가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496년 이 협정을 비준함에 있어서 클로비스는 랭스에서 성 레미에 의해서 세례를
받을 것을 허락하였다. 그 의식의 절정에서 성 레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Mitis depone colla, Sicamber, adora quod incindisti, incendiquod adorasti
(지캄브리아 사람들이여, 겸손하게 머리 숙여 그대들이 불살랐던 것을 존경하고,
그대들이 존경했던 것을 불사르라,)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역사가들이 때때로 그렇게 상상하듯이 대관식을 행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 두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는 클로비스를 왕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왕이었고,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를 왕으로 인정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함으
로써 교회는 교회자체를 클로비스에게만 묶어두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결속시
켜 두려고 하였다. 즉 교회가 결속하고자 했던 것은 클로비스 개인하고만이 아니라 메로빙
왕가의 혈통과의 유대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동맹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다윗왕과
하나님과의 계약과 흡사하였다. 즉 솔로몬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수정될 수는 있지만 취소되거
나 파기되거나 거역될 수 없는 계약이었다. 그래서 메로빙 왕가의 사람들은 그러한 대비(對比)
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다.
클로비스는 그의 남은 여생 동안에 로마에 대한 야심에 찬 기대를 완전히 실현시켰다. 저항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신앙은 검에 의해서 부과되었다. 그리고 로마교회의 특전과 영적인
위임통치령과 더불어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에 대부분의 프랑스와 독일의 많은 부분을 포함하
는 동쪽 땅과 남쪽 땅으로 그 영토를 확장하였다. 클로비스의 많은 적대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
했던 것은 서고트족이었다. 그들은 기독교의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였다. 클로비스가 아주
구석구석까지 협정을 맺어 군사적으로 공격했던 곳은 바로 이 서고트족 제국이었다. 그 서고트
제국은 피레네산맥 양편으로 걸쳐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툴루즈까지 뻗어 있었다. 507년에
그는 부이예전투에서 서고트족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그 직후 아퀴텐느와 툴루즈는 프랑크
의 손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서고트제국의 피레네산맥 북부는 프랑크의 맹곡격 앞에 사실상
무너지고 말았다, 툴루즈로부터 서고트족은 카르카손느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카르카손느로부
터 쫓겨난 그들은 그들의 수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최전선 진지를 라제 지방에 있는 레데
에다 세웠다. 이곳은 오늘날의 렌느 르 샤토라는 마을에 해당한다.
다고베르 2세
511년 클로비스가 죽자 그 제국은 메로빙 왕가의 관습에 따라서 그의 네 아들들이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백년 이상 동안 메로빙 왕조는 본질적으로 다른 많은 왕국들
그리고 종종 서로 싸우기까지 하는 왕국들을 다스려왔다. 한편 계승의 왕통은 점차 적으로
얽히게 되었고 왕위에 대한 주장도 점점 복잡하게 되었다. 한때 클로비스에게 집중되었던 권위
는 점진적으로 분산되었으며 보다 불완전하게 되었고 세속적인 질서는 타락되었다. 계략과
음모와 납치 그리고 정치적인 암살이 보다 흔하게 되었다. 그리고 궁중의 재상들, 즉 ‘궁중의
대신들’은 점점 더 권력을 모으게 되었으며 결국 이로 말미암아 그 왕조는 몰락하게 되었다.
점점 더 권위를 빼앗기게 된 후대의 메로빙 왕가 통치자들은 종종 ‘나약한 왕들’이라고 불리워
졌다. 후손들은 그들을 나약하고 무능한 군주들이라고 경멸적으로 비난했으며, 교활하고 야심
만만한 고문관들의 손아귀에서 유약하고 줏대없는 군주들이었다고 비난하였다. 우리의 연구
결과 이러한 상투적인 문구가 엄격하게 정확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참조> 프랑크왕국
– 메로빙가 왕국들 (지도)
계속적인 전쟁과 근친복수 그리고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투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메로빙
왕가의 군주들이 아주 젊은 나이에 왕좌에서 살해를 당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쉽게
그들의 고문관들에 의해서 조종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망을 얻었던 자들은 그들의
선임 왕들과 같이 강하고 담대하였다. 이러한 경우가 바로 다고베르 2세의 경우였던 것 같다.
다고베른 2세는 651년에 태어났으며 오스트라지 왕국을 물려받았다. 656년에 그의 아버지가
죽자 그의 왕위를 계승을 방해하려는 터무니 없는 시도들이 있었다. 참으로 다고베르의 초기
생애는 중세기의 한 전설과도 같고 아름다운 이야기와도 같다. 그러나 이것은 잘 기록되어
있는 역사이다.
그의 아버지가 죽자 다고베르는 그리모알드라는 이름을 가진 당시의 왕궁의 대신에 의해서
납치되었다. 그 다섯 살 난 어린아이를 찾으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그가 죽었다고 믿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리모알드는 다고베르의 죽은 아버지인 선왕의 희망
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다. 이 계략은 효과적으로 수행되었다.
다고베르의 어머니조차도 아들이 죽었다고 믿고 그 야심만만한 왕궁의 대신에게 순응하였다.
하지만, 그리모알드는 그 어린 군주를 실제로 살해하는 데는 실패했었다. 다고베르는 비밀리에
포아티에 주교의 손에 맡겨졌다. 아마도 이 주교 역시 이 어린아이를 죽이기를 꺼려하였던 것
같다. 다고베르는 그렇게 하여 아일란드로 영원히 추방되었다. 그는 더블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일란드의 슬레인 수도원에서 어른으로 장성하였다. 그리고 그 수도원의 부속학교
에서 그 때 당시 프랑스에서는 받을 수 없었던 교육을 받았다. 이 기간 중 어느 때인가 그는
타라의 대왕의 궁정에 나갔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슬레인에서 교육받은 노덤브리아의 세
군주들과 친하게 되었다고 한다.
666년에 아일란드에서 다고베르는 켈트족의 한 공주인 마틸드와 결혼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는 아일란드로부터 영국으로 갔으며 노덤브리아 왕국에 있는 요오크에서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그는 요오크의 주교였던 성 윌프리드와 친밀한 교제를 갖게 되었는데 그는 다고베르의
신용있는 조언자가 되었다.
문제의 그 기간동안 켈트교회는 로마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교회 사이에는
분열이 여전히 존속하였다. 이 두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켈트교회를 로마교회 안으로 끌어들이
려고 하였다. 그는 이 일을 이미 그 유명한 664년의 휘트비교회 회의에서 이루었었다. 그러나
다고베르 2세에 대한 그의 계속적인 우정과 후원이 이면적인 동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
다. 다고베르의 시대에 이르러 – 150여년 전에 교회와 클로비스간의 동맹이 지시했던 바와
같이 – 메로빙 왕가의 로마에 대한 충성은 과거보다는 어느 정도 약하게 되었다. 로마에 대한
충실한 추종자로서 윌프리드는 로마의 지상권을 영국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유럽대륙에 있어서
도 견고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만일 다고베르가 프랑스로 돌아와서 오스트라지 왕국을 되찾
게 된다면 그의 충성을 얻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윌프리드는 그 유배된 왕이 앞으로
미래에 교회의 오른팔이 될 사람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670년 켈트족 출신인 다고베르의 아내 마틸드는 셋째 딸을 낳으면서 사망하였다. 윌프리드는
당시에 마음을 가누지 못하던 그 군주에게 새로운 배우자를 주선해 주려고 서둘렀으며 그래서
671년에 다고베른 두번째로 결혼하였다. 그의 첫번째 결혼이 잠재적으로 왕조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의 두번째 결혼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고베르의 새로운 아내는 라제의
백작의 딸이자 서고트족 왕의 조카였던 기젤레 드 라제였다. 바꾸어 말하면 메로빙 왕가의
혈통은 서고트족의 왕의 혈통과 동맹을 맺게 된 셈이었다. 여기서 한 제국이 싹트고 있었는데,
그 제국은 오늘날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땅을 통일시키고 피레네산맥으로부터 아르덴
느 지방에까지 이르는 영토를 가지게 될 제국이었다. 더욱이 그 제국은 서고트족들을 – 여전히
강한 아리우스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로마의 지배권 아래로 견고하게
귀속시키게 되었다. 다고베르가 기젤레와 결혼했을 때 그는 이미 대륙으로 돌아가 있었다.
오늘날 현존하고 있는 문서에 따르면 그 결혼식은 기젤레의 공식적인 거처가 있던 레데, 즉
렌느 르 샤토에서 거행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 결혼식은 성 막달라마리아교회에서 거행되었
다. 그런데 그 교회의 유적지에는 후에 베랑자르 소니에르교회가 세워졌다. 다고베르는 첫
번째 결혼에서 세 딸들을 얻었으나 아들 상속자는 얻지 못했다.
다고베르는 기젤레에게서 두 명의 딸들을 더 얻었고 마지막으로 676년에 한 아들을 얻게 되었
다. 그 어린아이가 바로 시지스베르 4세였다. 그리고 시지스베르가 태어났을 즈음에 다고베르
는 한 번 더 왕위에 앉게 되었다. 약 3년 동안 그는 북쪽의 자기 영토의 변화를 관망하면서
렌느 르 샤토에서 기다렸던 것 같다. 결국 674년에 기회가 왔다. 그의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조언자들의 도움을 받아 오랫동안 유배되었던 그 군주는 도착을 알렸고 그의 영토를 되찾았으
며 공식적으로 선포된 오스트라지의 왕이 되었다. 요오크의 윌프리드는 다고베르가 다시 왕위
에 오름에 있어서 한 몫을 담당하였다. 제라르 드 세드에 따르면 역시 그가 왕위에 오르는데
도움이 되었던 사람으로서 스위스에 있는 시온의 주교성 아마투스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없으며 그에 대해서 알기란 대단히 어렵고 신비하기 짝이 없는 일이
라고 한다.
일단 왕권을 회복한 다고베르는 ‘게으른 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클로비스의 후계자다
왔다. 즉시 그는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고 견고하게 하였으며 온 오스트라지 왕국에 만연해
있던 무질서를 가다듬어 질서를 재건하였다. 그는 엄격하게 통치하였으며 왕권에 도전하기
위하여 군사적인 힘과 경제적인 힘을 충분히 가동시키고 있었던 여러 반역적인 귀족들의 권력
을 깨뜨렸다. 그리고 렌느 르 샤토에서 그는 실제적인 보화를 모았다고 한다. 이러한 재물들은
아퀴텐느를 다시 정복하는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아퀴텐느는 약 40년 동안 메로빙 왕가의 권력
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으며 자기네가 하나의 독립된 공국임을 선언하였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다고베르는 요오크의 윌프리드에게 크게 실망했던 것이 틀림없다. 윌프리
드가 그에게 교회의 힘이 되어줄 것을 기대하였을 때 다고베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영토 내에서 교회가 팽창되는 것을 막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
써 그는 성직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화가 난 한 프랑크의 고위 성직자가 윌프리드
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그 편지에서 그는 다고베르가 세금을 부과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교회들을 그 주교들과 함께 조롱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것이 다고베르가 로마 당국과 충돌하게 된 단 하나의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서고
트족의 공주와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오늘날의 랑그도크에 해당하는 상당히 넓은 영토를
획득하였다. 그는 또한 그 밖의 다른 것도 얻었을 것이다. 서고트족은 단지 명목상으로만 로마
교회에 충성하였다. 사실상 로마에 대한 그들의 충성이란 극히 미미한 것이었으며 왕가에서는
여전히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경향이 득세하고 있었다. 다고베르가 어는 정도 이러한 경향을
띠게 되었다고 추측할 만한 증거가 있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3년 후인 679년에 이르러서 다고베르에게는 세속적인 그리고 교권적인
많은 강력한 적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는 그 적대자들의 반역적인 자치권을 억제함으로써 복수
심에 불타는 귀족들의 적개심을 샀던 것이다. 교회가 확장되어 나가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그는
교회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함으로써 그는 다른 프랑
크족 실권자들, 즉 인접한 왕국의 통치자들의 시샘과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통치자
들 가운데 몇 몇은 동맹자를 가지고 있었고 다고베르의 영토내에 대리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그 다고베르뢍 자신의 궁중 대신이었던 페팽이었다. 다고베르의
정치적인 적들과 비밀리에 제휴를 하고 있었던 페팽은 배신이나 암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메로빙 왕가 통치자들처럼 다고베르는 최소한 두 개의 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스테내였다. 이 곳은 아르덴느 지방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스테내에
있는 왕궁 근처에는 울창하게 우거진 큰 숲이 있었는데 이 곳은 오랫동안 신성한 곳으로 생각
되어 왔으며 웨브레스의 숲이라고 불리워 왔다. 679년 12월 23일에 다고베르가 사냥을 나갔다
고 하는 곳은 바로 이 숲이었다. 이 날의 그 사냥은 아마도 일종의 제의적인 행사였던 것
같다. 어쨌든 이에 뒤따라 일어난 사건은 많은 원형적인 메아리들을 불러 일으켰는데 예를
들면 니벨룽겐의 노래에 나오는 지그프리드의 살해와 같은 것이다.
정오 무렵에 피로에 지친 그 왕은 나무 가장자리에서 시냇물 옆에 누워서 쉬고 있었다. 그가
자고 있을 동안 아마도 그의 대자(代子)였던 한 신하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여 그에게로
다가갔으며 페팽이 지시한 대로 창으로 그의 눈을 내려찍었다. 그 살해자들은 스테내로 돌아와
서 그 곳에 남아 있던 나머지 가족들을 몰살시키려고 하였다. 그들이 이 계획을 실현시켰는지
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다고베르와 그의 가문의 통치는 갑작스럽고도 장렬하게 끝났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교회는 오랫동안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교회는 즉시
왕의 암살자들의 행위를 긍정하였다. 심지어 한 프랑크의 고위 성직자가 요오크의 윌프리드에
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 왕 살해사건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하였다.
다고베르의 유해와 죽은 후 그의 지위는 아주 많은 신기한 변화들을 겪게 되었다. 그가 죽자
마자 그의 유해는 스테내에 있는 성 레미 왕립교회에 매장되었다. 거의 2세기가 지난 후인
872년에 그의 유해는 발굴되었고 다른 교회로 옮겨졌다. 이 새로운 교회는 성 다고베르의
교회가 되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해에 죽은 왕이 성자로 시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성자로
시성한 것은 교황이 아니라 수도 대주교 콘클레이브 였다. – 1159년까지는 성자를 시성하는
것이 교황만의 권한이 아니었다 – 다고베르가 시성된 이유는 아직도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다.
한 자료에 따르면 그가 성자가 된 이유는 그의 유해가 바이킹족의 침입 때에 스테내 지방을
보호해 주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의문을 남기게 된다.
왜냐하면 왜 이 유해가 최초로 그러한 능력을 가졌어야 했는가 하는 이유가 분명치 않기 때문
이다. 교회 당국자들은 입장이 난처하여 이 일에 관하여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
은 어떤 이유 때문에 다고베르가 충분히 성숙한 제의의 대상이 되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의
축일을 갖게 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의 축일은 그의 사망기념일인 12월 23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그가 그렇게 높임을 받아야만 했는가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교회는 그 왕의 죽음에 있어서 교회가 저지른 과오에 대하여 가책을 느낀 것인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다고베르를 성자로 시성한 것을 수정해 보려는 시도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왜 그러한 행동이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될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이유에 대한 언급도 없고 왜 그것이 2세기 동안이나 지연되었어야만 했는가
하는 이유에 대한 언급도 없다.
스테내, 성 다고베르의교회 그리고 아마도 그 교회가 소장하고 있던 유물들은 그 이후 여러
세기 동안에 많은 유명한 인물들에 의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1069년
고드프라드 부용의 할아버지인 로랭의 공작은 그 교회를 특별히 보호해 주기로 협정하였으며
그 교회를 고르제의 대수도원의 후원하에 두었다. 몇 년 후에 한 지방귀족이 그 교회를 차지하
게 되었다. 1093년에 고드프라 드 부용은 군대를 일으켜 스테내에서 큰 규모의 전투를 벌렸다.
단 한가지 이유는 교회를 다시 찾고 그 교회를 고르제의 대수도원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기간 동안 그 교회는 파괴되었으며, 성 다고베르의 유물들은
전 프랑스의 다른 많은 유물들과 마찬가지로 분산되었다. 오늘날 다고베르의 것이라고 알려지
고 있는 두개골, 즉 제의에서 칼로 벤 자국이 있는 한 두개골이 몽스에 있는 한 수녀원에 보관
되어 있다. 그 왕의 다른 모든 유물들은 없어졌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아주 진귀한 한 문서
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시로써 스물 한 개의 운문 연도(連禱)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 다고베르 순교자의 시’라
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제목은 다고베르가 무엇인가를 위하여 순교당했다고 하는 것을 암시
해 주고 있다. 이 시는 적어도 중세기 그리고 아마도 훨씬 더 일찍 기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단히 중요한 이 시는 오르발의 대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카롤링 왕조에 의한 찬탈
엄격히 말해서 다고베르는 메로빙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가 아니었다. 사실상 메로빙 왕조의
통치자들은 그 후로도 3세기 반에 걸쳐서 최소한 명목상의 지위는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
마지막 통치자들은 ‘게으른 왕들’이라는 호칭을 받기에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들 중 많은 자들
은 지극히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대개 실권을 상실한 나약한 왕들이었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거나
자신들의 뜻대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마치 궁중의 대신들 손에 놀아나는 앞잡이들과 같았다.
그들은 사실상 희생 제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후대 메로빙 왕조통치자들은 클로비스와 메로베로부터 내려오는 장손 계열에 속하는
자손들이 아니라 그 밖의 계열에 속하는 후손들이었다. 메로빙 왕조의 장손 계열은 다고베르
2세와 함께 왕위로부터 밀려났다. 따라서 어느 모로 보나 다고베르의 암살은 메로빙 왕조의
종말을 고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킬데릭 3세가 754년에 죽었을 때 메로빙 왕조가
끝났다고 보는 것은 왕조의 권력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하나의 격식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프랑크족 메로빙 왕조 혈통의 통치자들은 사실상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사라졌었
기 때문이다.
권력은 메로빙 왕조로부터 새어 나와 궁중 대신들의 손으로 흘러들어갔는 바, 이러한 현상은
이미 다고베르의 치세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다고베르의 암살을 획책하였던 사람은 궁중
대신 페팽이었다. 페팽은 그의 아들 페팽 2세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페팽 2세는 그의
아들은 그 유명한 샤를르 마르텔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후대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샤를르 마르텔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영웅적인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에게 이와 같은 찬사가 돌려지는 데는 분명 약간의 근거가 있다. 샤를르의
통치하에서 무어인들의 프랑스 침공이 732년 포아티에 전투에서 저지되었다. 그리고 샤를르는
이 승리 덕택에 어떤 의미에서는 ‘신앙의 수호자’이자 ‘기독교의 구세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상
한 사실은 샤를르 마르텔은 그 자신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던 왕위를 결코 장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상 그는
왕위를 어떤 미신적인 두려움을 갖고 대하였던 것 같으며, 또한 십중팔구는 메로빙 왕조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왕위를 장악했던 샤를르의
후계자들은 메로빙 왕조의 공주들과 결혼함으로써 자신들의 왕위의 합법성을 애써 입증해
보이려고 하였다.
샤를르 마르텔은 741년에 사망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왕 킬데릭 3세의 궁중 대신이었던
그의 아들 페팽 3세는 왕위에 대한 공식적인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교회의 도움을 요청하였
다. [누가 왕이 되어야 하겠나이까? 실제로 권력을 쥐고 있는 자입니까, 아니면 명의상으로는
왕이로되 아무런 실권도 갖지 못한 자입니까?]라고 페팽의 사절들이 묻자, 교황은 페팽에게
유리한 대답을 해 주었다. 교황은 사도적 권위에 의거하여 페팽을 프랑크족의 왕으로 취임시키
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 이는 곧 250년 전 클로비스와의 사이에 맺었던 조약에 대한 철면피적
인 배신이었다. 이와 같이 로마의 인준을 얻은 페팽은 킬데릭 3세를 폐위시켜서 한 수도원에
감금 시킨 후에 굴욕감을 주고 또한 그에게서 ‘마술적인 능력’을 제거해 버리기 위해서 그의
신성한 머리를 깎아 버렸다. 그로부터 4년 후 킬데릭이 사망하였으며, 그 결과 왕위에 대한
페팽의 권리 주장과 관련하여 생겨났던 문제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게 되었다.
이보다 1년 앞서 하나의 중대한 문서가 편의상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 문서는 차후의 서방
역사의 경로를 바꾸어 놓게 되었다. 이 문서는 ‘콘스탄티누스의 헌납’이라고 불리워졌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 문서가 교황청 재판소 내에서 – 별로 능숙하지도 못하게 – 조작된 위조
문서였다는 사실의 거의 의심할 여지없이 받아 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그 문서는
진짜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그 영향력은 막대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헌납’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하는 A.D. 312년에 작성된
것처럼 조작되어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의 황제로서의 상징들과
황보(regalia)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주교에게 주었으며, 이리하여 이것들은 교회의 소유가 되었
다. 더 나아가서 이 문서는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주교를 ‘그리스도의 대리’라고 처음 선언
했었으며, 또한 그에게 황제의 지위를 부여해 주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대리’ 자격
으로 그 로마의 주교는 그 황제의 황보를 돌려 주었다고 하며, 황제는 그것들을 돌려 받아
교회의 인가와 허락을 얻어 어떤 의미에서는 차용하는 형식으로 그것들을 다시 착용하였다고
한다.
이 문서가 내포하고 있는 의도는 매우 명백하다. ‘콘스탄티누스의 헌납’에 의하면, 로마의 주교
는 전체 기독교 세계에 대하여 영적인 면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면에 있어서도 최고
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사실상 교회의 황제로서 자기가 원하는 바에 따라 제국의 왕을
폐위시킬 수도 있었고, 그 대신 자기가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자에게 자신의 권력을 위임할
수도 있었다. 바꾸어 말해서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왕들을 임명하거나 폐위시킬 수 있는
일정 불변의 권한을 소유하고 있었다. 차후 세속적인 문제들에 대한 바티칸의 권력은 궁극적으
로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의 헌납’이라는 문서로부터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콘스탄티누스의 헌납’의 권위에 의거하여 페팽 3세를 위하여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교회는 찬탈자들의 피나 이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신성하게 해줄 수 있는 하나의 의식을
창안하였다. 이 의식은 대관식과 도유식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 이러한 용어들은 중세의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통용되었다. 페팽의 대관식에서 주교들은 처음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으며, 세속 귀족들의 지위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대관
식 자체는 더 이상 왕을 승인하거나 왕과의 계약을 맺는 의식이 아니라 왕의 취임식이나 다름
없는 의식이 되었던 것이다.
도유식도 이와 비슷한 성격으로 변형되었다. 과거에는 실시된다 하더라도 단지 승인이나 인준
하는 행위로서의 의식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이제 도유식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제 도유식은 피보다 우월권을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말하자면 불가사의하게 피를 정결케
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유식은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 이상의 것이 되었다.
그것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자에게 수여되는 실질적인 행동이 된 것이다.
그리고 교황은 이 도유식을 집행함으로써 하나님과 왕들 사이에 최고의 중개자가 되었다.
피는 이제 기름에 종속되었다.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은 궁극적으로 교황에게 종속되고 또한
그에게 추종하는 자들로 간주되었다.
754년 페팽 3세는 퐁티용에서 정식으로 도유식을 받았으며, 이렇게 해서 카롤링 왕조가 시작
되었다. 카롤링왕조의 명칭은 샤를르 마르텔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비록 일반적으로는 그 명칭
이 왕조의 통치자들 중 가장 유명한 샤를르 대제와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800년
샤를르마뉴는 신성로마 황제로 선포되었다 – 그런데 이 신성로마 황제라는 호칭은 3세기 전
클로비스와의 계약상 메로빙 혈통에게만 주어지기로 되어 있었다. 로마는 이제 서방 유럽 전체
를 포괄하는 한 제국의 왕조가 되었으며, 이 제국의 통치자들은 단지 교황의 승인을 얻어 통치
할 뿐이었다.
496년 교회는 영원히 메로빙 혈통을 지켜 나갈 것을 맹세했었다. 다고베르의 암살을 용인하고
대관식 및 도유식과 같은 의식들을 창안해 내며 왕위에 대한 페팽의 권한을 인정해 줌으로써,
교회는 은연중에 그 자신의 계약을 깨뜨려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샤를르마뉴를 신성로마황제
로 임명함으로써 교회는 자신의 파약을 공식화했을 뿐 아니라 기정 사실화했던 것이다. 근래의
한 저자의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유를 사용하는 카롤링 통치자들의 도유식이 긴 머리에 의해서 상징되던
피의 마술적인 능력들의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만일 그 도유
식이 무엇인가를 보상하고자 한 것이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충성 선서를 아주 충격적인 방법으
로 깨뜨림으로써 초래된 신앙의 손실을 보상하고자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로마는 도유식에 왕의 즉위식을 첨가시킴으로써 모든 프랑크족의 양심상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양심상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왕위 찬탈자 자신들은 죄책감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자신들의 합법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필요성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페팽 3세는 자신의 도유식 바로 직전에 메로빙
왕조의 공주와 여봐라는 듯이 결혼하였다. 그리고 샤를르마뉴도 그와 비슷하게 행하였다.
더욱이 샤를르마뉴는 자신의 대관식 내에 포함되어 있는 배신적인 요소를 매우 뼈아프게 생각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당대의 진술들에 의하면 그 대관식은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행사였으며, 프랑크족 통치자 배후에 있던 교황에 의해서 교묘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관식에서 샤를르마뉴는 깜짝 놀라고 굉장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왕관은 이미
비밀리에 준비되어 있었다. 샤를르마뉴는 로마에 불러들여졌으며, 그 곳에서 한 특별미사에
참여하도록 설득되었다. 그가 교회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교황은 예고도 없이 그의 머리
에 왕관을 씌웠으며, 그러는 동안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에 대해 [하나님에 의해서 왕위에
오르시게 된 샤를르 아우구스투스여! 로마인들의 위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황제로다.]라고
외쳤다. 그때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연대기 기록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샤를르마뉴는 [자신이
만일 교황이 계획하고 있었던 바를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그날이 교회의 모든 축제일들 중
가장 중대한 축제일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여하튼 그날 대성당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고 한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한 샤를르마뉴의 책임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클로비스 및 메로빙 혈통과의
계약은 파렴치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연구 결과는 이 배신이 비록 1100여
년 전에 일어났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온수도회에게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뼈에 사무치는
일로 기억되어 왔다.
앞장에서 인용된 바 있는 독립적인 탐구가 마티유 파올리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 즉 시온수도회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진정한 귀족 가문은 비지고트족 메로빙 혈통을 가진
귀족이다. 가톨릭 가문과 그 밖의 다른 모든 가문들은 찬탈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그들
은 영토를 관리하도록 위임을 받은 왕의 관리들에 불과하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영토를
통치하는 자신들의 권리를 세습적으로 물려 주다가는 마침내 자신들 스스로가 왕권을 장악해
버렸던 것이다. 교회는 800년 샤를르마뉴를 황제로 임명할 때 스스로 그 자신의 맹세를 깨뜨
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교회는 클로비스에게 세례를 베풀 때 프랑스를 교회의 맏딸로 만들어 준 메로빙
왕조와 결연할 것을 굳게 맹세했었기 때문이다.
다고베르 2세, 역사로부터 축출되다
679년 다고베르 2세가 살해당함으로써 메로빙 왕조는 사실상 끝났다고 할 수 있다. 755년
킬데릭 3세의 죽음과 더불어 메로빙 왕조는 세계 역사의 현장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던 것으
로 보인다. 하지만 ‘소수도원 문서’에 의하면 메로빙 왕조의 혈통은 사실상 계속 존속해 왔다고
한다. ‘소수도원 문서’에 의하면 메로빙 혈통은 다고베르가 그의 둘째 아내 기젤레 드 라제로부
터 얻은 아들인 그 어린 시지스베르 4세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계속 내려오고 있다.
그 시지베르가 존재했었고 그가 다고베르의 상속자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소수도원 문서’를 제외한 다른 모든 자료들에 의하면 시지스베르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었는지가 분명치 않다. 어떤 연대기 저작자들은 시지스베르 4세가 그의 아버지 및 왕족
에 속하는 다른 모든 친족들과 함께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암암리에 추정해 왔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지스베르는 조숙한 사냥꾼이었어야 할 것인 바,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가
사냥중에 살해당하였을 때 고작해야 3살 밖에 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시지스베르의 죽음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그렇다고 – ‘소수도원 문서’를 제외하고 나면 –
그가 살아 남았었다는 사실에 관한 기록도 전혀 없다. 이와 관련된 문제는 시대의 기억으로부
터 사라져갔던 것으로 보이며, 시온수도회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러한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시온은 다른 곳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정보를 비밀에
부쳐 두고자 하였거나, 연구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주는 것의 중요성을 너무 경시해 버렸거나,
아니면 계획적인 억압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지스베르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렇게
놀라운 것이 아니다. 17세기에 이르기까지는 다고베르에 대해서조차도 공식적으로 받아 들여질
만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중세기 중 어느 한 때는 다고베르를 역사로부터 완전히 제거해 버림
으로써 다고베르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에는 그 어느 백과사전을 찾아 보아도 다고베르 2세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1646년
까지는 그가 이 세상에 살았던 적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었다. 1646년 이전에
편찬된 프랑스 통치자계보는 그 어느 것을 보아도 다고베르 2세는 생략해 버리고 – 언어도단
적인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 다고베르 1세로부터 715년에 사망한 메로빙 왕조의 마지막 통치
자들 중의 한 사람인 다고베르 3세로 뛰어 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고베르 2세가 프랑스왕
들의 계보에 다시 들어가게 된 것은 1655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로부터의 제거
과정을 고찰해 볼 때 우리는 시지스베르에 관련된 정보의 결핍 현상에 대해 그렇게 놀라지
않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관한 어떤 정보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 정보가 계획적으로 제거
되었으리라는 사실을 추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고베르 2세가 왜 역사로부터 삭제되어야만 했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그와 같은 삭제에 의해서 어떤 사실이 감추어졌는가? 그들은 왜 한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 버리고자 하였던가? 물론 이에 대한 한 가지 가능한 해답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상속자들의 존재를 부정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다고베르 2세가 이 세상에 산 적이 없었다
면 시지스베르도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지스베르가 이 세상에 살았었
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17세기에 이르기까지도 그처럼 중요하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그가 실제로 살아 남아 있었다면 그의 후손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하나의 위협적
인 존재로 간주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폐되어 있던 어떤 종류의 사실을 확실하게 다루어 나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만일 시지스베르의 생존에 관한 지식이 공공연하게 알려지게 된다면 상실될 수 밖에 없는
어떤 중요한 기득이권이 있었던 것이 거의 명백하다. 9세기와 더 나아가서 아마도 십자군 전쟁
때까지는 이러한 기득이권이 로마가톨릭교회 및 프랑스 왕족의 계보와 관련되어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문제가 어떻게 해서 루이 14세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계속 문제시 되어야
만 했을까? 그것은 분명 학술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이미 세 개의
프랑스 왕조들이 오고 갔으며 그러는 동안 프로테스탄트교는 이미 로마 가톨릭의 지배권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만일 메로빙 왕조의 피와 관련된 아주 특별한 어떤 것 – 즉, 어떤 ‘마술
적인 능력’이 아니라 마술적인 피에 관한 미신을 제거해 버린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 효력을
발생하는 어떤 다른 것 – 이 실제로 있지 않는 한에 있어서 말이다.
라제 백작이며 귀염 드 겔론느 황태자
‘소수도원 문서’에 의하면 시지스베르 4세는 그의 아버지가 살해당했을 때 그의 누나에 의해
구출되어 남쪽으로 도망쳐서 그의 어머니인 비지고트족의 공주 기젤레 드 라제의 영지로 몰래
잠입해 들어 갔다고 한다. 그는 681년 랑그도크 지방에 도착했었다고 하며 그로부터 얼마 후
그의 아저씨의 칭호들인 라제 공작과 레데 백작이 라는 칭호들을 얻었다고(혹은 물려 받았다
고) 한다. 그는 또한 메로빙 포도나무의 ‘힘차게 꽃을 피우는 어린 가지’라는 호칭으로부터
나온 플랑타르(Plant-Ard ; 후에는 Plantard)라는 별명 혹은 애칭을 얻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름
과 그의 아저씨로부터 얻은 호칭들 아래 그는 그의 혈통을 계속 존속시켜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886년에 이르러서는 그 혈통의 한 가계가 베르나르 플랑타벨뤼라는 사람에 이르러
그 절정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의 아들은 아퀴텐느의 초대 공작이 되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그 어떤 역사가도 이러한 주장들을 확증하
거나 논박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대체로 역사가들의 주목을 끌지 못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당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시지스베르는 실제로 살아 남아서 그의
혈통을 존속시켜 나갔으리라는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받아 들여질 수 밖에 없다. 다고베
르 2세를 역사로부터 주도면밀하게 축출시켜 버린 사건은 이러한 결론을 더욱 믿을 만한 것으
로 만들어 준다. 다고베르의 존재를 부정해 버림으로써 그로부터 나온 후손의 그 어떤 계보도
무효화되어 버렸을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제외해 버린다면 이 행동의 동기를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시지스베르의 생존을 증거해 주는 다른 근거 자료들 중 718년에 작성된
한 헌장을 들 수 있는 바, 그것은 ‘시지스베르, 라제 백작과 그의 아내 막달라’ 에 의해 세워진
렌느 르 샤토로부터 수 마일 떨어져 위치한 한 수도원의 설립에 관한 것이다. 이 헌장을 제외
하고는 그 후 1세기 동안 레데나 라제라는 호칭들은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
한 호칭이 다시 나타났을 때 거기에는 지극히 흥미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742년에 이르러 남부 프랑스에는 독립적이고 또한 완전히 자치적인 국가가 하나 생겨났는데,
이 국가는 어떤 자료에 의하면 제후국이었다고 하고, 다른 어떤 자료들에 의하면 완전히 격식
을 갖춘 왕국이었다고 한다. 이 국가에 관한 문서는 개략적인 초고에 불과하며 또한 역사도 그
국가에 대해 명료한 사실을 밝혀 주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사실상 그
국가의 존재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국가가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다. 그 국가는 샤를르마뉴와 그의 계승자들에 의하여 공식적
으로 승인되었으며, 또한 바그다드의 칼리프와 이슬람 세계에 의해서도 승인됐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도 마지못하여 승인하였는데. 교회는 그 국가의 영토의 일부를 몰수하였다.
그 국가는 9세기 말까지 존속되었다.
759년부터 768년 사이의 어느 한 때 이 국가 – 이는 라제와 렌느 르 샤토 지방을 포함했었다
– 의 통치자는 공식적으로 왕이라고 선언되었다. 그 통치자는 로마교회의 불찬성에도 불구하고
카롤링 왕조에 의해 그처럼 인정되었는데, 그는 그 자신이 카롤링 왕조에 대해 봉신이 될 것을
맹세했다. 현존하는 문서들 내에서는 그가 데오도릭 혹은 디에리라는 이름으로 가장 자주 지칭
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그를 메로빙 왕조의 후손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가
어떻게 메로빙 혈통을 갖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근거 자료가 전혀 없다. 그렇지만
그가 시지스베르의 혈통을 이어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짙다. 여하튼 790년에 이르러 데오도릭
의 아들 귀염 드 겔론느가 라제의 백작이라는 호칭을 얻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
한 바, 이 호칭은 시지스베르가 얻은 후 그의 후손들에게 물려 주었다고 하는 바로 그 호칭이
다.
귀염 드 겔론느는 그 당대의 가장 유명한 인물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의 역사적 실재성은 샤를르마뉴나 고드프라 드 부용의 역사적 실재성과 마찬가지로 전설에
의해서 불투명해져 버렸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에 벌써 그에 관해 저작된 수준급
서사시가 최소한 여섯 편이 되었는 바. 즉 그 유명한 <롤랑의 노래>와 유사한 <무훈시
(chamsons de geste)>이다. 단테는 그의 신곡에서 그에게 아주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일찌기 단테 이전에도 귀염은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었다. 13세기 초에 그는 이미
볼프람 폰 에셰바하 그의 유명한 작품 - <파르찌발>은 아마도 성배의 신비들을 다루는 소설들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일 것이다 – 에 의해서 저작된 미완성 서사시적 소설 <빌헬름>의 주인공
으로 나타난 바 있다. 그의 모든 다른 작품에서 성배. 성배가(家)의 혈통을 다루던 볼프람이
어떻게 해서 갑자기 완전히 다른 주제인 귀염 드 겔론느를 다루게 되었는지 언뜻 보기에 약간
이상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볼 때 볼프람은 다른 하나의 시에서 ‘성배가’
가 거주하던 ‘성배 성’은 피레네 지방 – 9세기 초엽 이 지방은 귀염 드 겔론느의 지배하에
있었다 – 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귀염은 샤를르마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사실 그의 누이는 샤를르마뉴의 아들들 중
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으며, 이렇게 해서 한 왕조는 황제의 혈통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귀염 자신은 무어인들과의 끊임없는 전투에 있어서 샤를르마뉴의 가장 중요한 사령관
들 중 하나였다. 샤를르마뉴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직후인 803년에 귀염은 바르셀
로나를 체포함으로써 그 자신의 영토를 배로 늘렸으며 그 결과 그의 영향력은 피레네 지방에
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샤를르마뉴는 그의 이와 같은 헌신적인 수고에 대해 지극히 기뻐
하였으며, 그래서 황제는 그의 공국이 영속적으로 결속하도록 확정지워 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확증해 줄 수 있는 헌장은 분실되었거나 아니면 파기되어 버렸지만, 그러나 이러한 헌장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증거들은 풍부하다.
독립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근거 자료들은 귀염 드 겔론느의 혈통, 그의 가족과 그의 후손
들의 상세한 계보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 자료들은 그의 아버지 데오도릭을 제외
하고는 그의 선조들에 관해서는 아무런 사실도 제공해 주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가족
의 실제적인 기원은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일반적
으로 그와 같이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귀족 가문이 그렇게도 갑작스럽게 출현한 불가해성에
관해서 어느 정도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간에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즉 886년에 이르러 귀염 드 겔론느의 혈통은 베르나르 플랑타벨뤼라는 사람에게서 그 절정기
를 맞이하였는 바, 그는 아퀴텐느 공작령을 세웠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귀염의 혈통은 ‘소수도
원 문서’에 의해서 시지스베르 4세와 그의 후손들에게 돌려지고 있는 혈통의 절정기 인물과
정확하게 동일한 인물에게서 그 절정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지레짐작으로 ‘소수도원 문서’에 나타나 있는 계보들을 공인된 역사에서 공백으로
남겨둔 그 간격을 보충해 주는 자료로서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아 왔다. 즉, 우리는 귀염
드 겔론느의 그 불가해한 기원이 ‘소수도원 문서’에서 플랑타르라는 이름하에 언급되고 있는
혈통인 다고베르 2세와 시지스베르 4세 및 폐위당한 메로빙 왕조의 장손 혈통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아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현존하는 문서 자료들의 혼란된 상황 하에서
우리는 플랑타르 혈통과 귀염 드 겔론느 혈통 사이를 결정적으로 정확하게 연결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 둘은 실제로 하나의 혈통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어느
한때 서로 교혼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 두 혈통 모두가 886년에
이르러 베르나르 플랑타벨뤼 및 아퀴텐느 공작령에서 그 절정기를 맞이하였다는 점이다.
비록 이들 두 계보가 연대나 이름들의 번역에 있어서 언제나 정확하게 들어맞지는 않지만,
귀염 드 겔론느와 관련된 계보는 ‘소수도원 문서’에 들어 있는 계보에 대한 하나의 독립된
확증적인 자료가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선 임시적으로 그러나 어떤 그 반증적인 자료는
없는 가운데 메로빙 왕조의 혈통이 ‘소수도원 문서’가 주장하는 바와 비슷하게 계속되었으리라
는 추정을 받아 들일 수 있다. 즉 우리는 시지스베르가 그의 아버지가 살해당한 후에도 계속해
서 살아 남았으며 플랑타르라는 이름을 성으로 받아들인 후 라제 백작으로서 그의 아버지의
혈통을 계속 유지해 나갔다는 추정을 임시적으로나마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황태자 우르수스
물론 886년에 이르자 [메로빙 왕가라고 하는 덩굴나무의 꽃가지]는 거대하고 가지가 많은
나무처럼 번성하게 되었다. 베르나르 플랑타벨뤼와 아퀴텐느의 공작이 한 가지를 이루었다.
물론 손자 시지스베르 6세가 ‘황태자 우르수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877년과 870년 사이에 ‘황태자 우르수스’는 공식적으로 ‘왕 우르수스’로 선포되었다고
한다. 두 명의 귀족 – 즉 베르나르 도베르튜와 고티 후작 – 의 도움을 받은 그는 자신의
정당한 유산을 되찾기 위하여 프랑스의 루이 2세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독자적인 역사가들은 877년과 879년 사이에 실제로 그러한 반란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인정한
다. 이 역사가들은 또한 베르나르 도베르뉴와 고티 후작도 언급하고 있다. 그 반란의 영도자,
즉 선동자가 시지스베르 6세라고 특별히 지칭되지 않는다. 그러나 ‘황태자 우르수느’는
님므(Nimes)에서 있었던 한 진기하고 정성 들여 행해진 예식에 참가했었다고 하는데, 그 예식
에서는 500명의 성직자들이 <Te Deum> 성가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모든 이야기들로
미루어 보건대 이 예식은 대관식이 아니었다 한다. 소수도원 문서가 ‘황태자 우르수스’를
왕으로 선포한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대관식이었다고 충분히 생각할 만하다.
다시 한 번 그 소수도원 문서는 독자적인 지지를 얻었다. 다시 한 번 그 문서들은 다른 곳에서
는 얻을 수 없는 정보, 즉 이미 받아들여진 역사 가운데 비어있는 부분을 보충 시켜주고, 때로
는 그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기조차 하는 정보를 주고 있는 듯하다. 이번 경우에만 하더라
도 그 문서들은 역사 가운데서 잘 알 수 없는 인물인 ‘황태자 우르수스’가 실제로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그는 바로 살해된 다고베르 2세의 후예이며 시지스베르 4세를 통하여
왕통을 잇게 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태까지 역사가들의 모르고 있던 그 반란은 권력
을 잃게 된 메로빙 왕조가 그 유산을 되찾기 위하여 일으킨 것으로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건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유산은 로마가 클로비스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메로빙
왕조에게 수여된 것이며, 로마의 배신으로 빼앗기게 된 것이엇다.
‘소수도원 문서’의 독자적인 자료들에 따르면, 그 반란은 실패하였고, ‘황태자 우르수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881년 포아티에 근처에서 벌어졌던 한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한다. 이러한 패배로
말미암아 플랑타르 가문은 프랑스 남부에 있는 그 소유지들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가문은 레데의 공작, 라제의 백작이라는 명목상의 신분만은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황태자 우르수스’는 브리타니에서 죽었다고 한다. 한편 그의 혈통은 브레톤 공작 가문과 결혼
을 함으로써 그 가문과 혈맹을 맺게 되었다. 그래서 9세기 말엽에 이르자 메로빙 왕가의 혈통
은 브리타니의 공작 가문과 아퀴텐느 공작 가문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 가문은 후에 브리타니의 공작이 된 알랭을 포함하여 영국에서 은신처를
찾아 ‘플랜타(Planta)’라고 불리우는 한 영국계 가문을 이루었다고 한다. 한편 독자적인 역사적
전거들은 알랭과 의 가문 그리고 그 측근들이 바이킹족을 피하여 영국으로 피신하여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수도원 문서’에 따르면, 그 영국계 가문 출신인 베라(Bera) 6세는 '건축가(the
Architect)’라는 별명을 가졌었다고 한다. 아델스탄왕 때에 영국의 한 피난처에서 발견된 베라와
그의 후손들의 ‘건축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수수께끼와 같은 이야기이다. 재미
있는 것은 프리메이슨단의 자료에 따르면 영국에서의 이 조합운동은 아델스탄 왕의 통치시기
에서 기원했다고 하는 점이다. 우리가 이상히 여기는 것은 프랑스의 왕통을 주장하던 메로빙
왕가의 혈통이 어떻게 해서 어떤 방법으로 프리메이슨단의 핵심과 관련이 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성배 가문
중세 시대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풍부하고 서로 잘 어울리는 신화로 가득 차 있다. 이러
한 신화는 형식상으로는 크게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적인 역사적 인물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아더왕, 샤를르마뉴 대제, 비바르의 로드리고 디아즈(Rodrigo Diaz, 즉 엘시
드로 널리 알려진) 등이다. 그 밖의 신화들 – 예컨대 성배와 관련된 신화들 – 은 처음에는
미미한 근거에 기초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의 신화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백조 기사’ 로엥그린의 신화
이다. 이 신화는 한편으로는 성배의 이야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별한 역사적 인물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사실과 환상이 뒤얽혀 있다는 점에서
아주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그너의 오페라와 같은 작품들을 통하여 그 이야기는
그 원형적인 호소력을 오늘날에까지 보존해 오고 있다.
중세기의 이야기에 따르면, 로엥그린 – 그는 때때로 태양과의 관련성을 의미하는 헬리아스로
불리움 – 은 잘 알 수 없는 전설의 신비에 싸인 ‘성배 가문’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볼프람
폰 에셰바하의 시에서 보면, 그는 사실상 최고의 ‘성배의 기사’ 파르찌발의 아들이다. 하루는
거룩한 신전 또는 몽생비쉘에 있는 성배의 성곽에서 로엥그린은 사람이 치지도 않는 성당의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선가 그의 도움을 급히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예시적인 사건으로서, 곤경에 빠진 한 여자가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어떤 자료들에 따르면 그 여자는 브라반트의 공작 미망인이었다고 하며, 그 밖의 다른 자료들
에 따르면 부용 공작의 미망인이었다고 한다. 그 여자는 아주 절망적인 상태에서 한 영웅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로엥그린은 백조들이 인도하는 대로 급히 서둘러 배 안에 있는
그녀를 구하러 갔다. 간단한 전투로 그 공작 미망인의 압제자를 물리치고 그 여자와 결혼하였
다. 하지만 결혼식에서 그는 아내에게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그 신부는 그에게 그의 기원이나
조상, 그가 어떤 배경에서, 어느 곳에서 태어났는지를 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그 부인은 남편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의 적대자들의 천박한 아첨
으로 본능적인 호기심에 자극을 받은 그 금지된 질문을 감히 묻기 시작하였다. 이 질문을 받고
그는 떠날 수밖에 없게 되어 백조가 이끄는 자신의 배를 타고 황혼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그의 아내와 함께 불확실한 혈통의 한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떠났는데, 이 아이가 후에
고드프라 드 부용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당시의 일반인들이 고드프라를 얼마나 중요한 인물로 여겼을 것인가를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고드프라 당시의 일반인들 생각뿐만 아니라 후대인 17세기
의 일반인들의 생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십자군운동을 생각할 때
리차드 커르 드 리용(리처드 1세), 존 왕, 아마도 루이 9세(성 루이) 또는 프레데리크 바바로사
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고드프라
가 누렸던 인기나 명성을 얻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제 1차 십자군 운동의 영도자였던 고드
프라는 최고의 인망을 얻은 뛰어난 영웅이었다. 십자군 운동을 시작한 사람도 바로 고드프라였
다. 예루살렘을 사라센족으로 탈환한 것도 역시 고드프라였다. 그리스도의 무덤을 불신앙자들
의 손에서 찾아낸 것도 바로 고드프라였다. 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고드프라는 높은 기사도
정신의 이상과 열렬한 기독교 신앙을 조화시킨 인물이었다. 그래서 고드프라가 죽은 후 제의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제의가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높은 지위가 부여됨으로 말미암아 고드프라가 유명한 신화적 가문들의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볼프람 폰 에셴바하와
그 이외의 중세기의 이야기꾼들은 그를 직접적으로 성배와 연결시킬 수 밖에 없었다는 것 –
즉 그 신비스러운 ‘성배 가문’의 직계 후손으로 묘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설적인 가문들은 고드프라의 사실상의 혈통이 불확실하다는 사실에
의해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역사는 언짢게도 그의 조상에 대하여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다.
그 ‘소수도원 문서’는 가장 그럴 듯한 – 아마도 실제로는 최초의 그럴 듯한 고드프라 드 부용
의 족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으며, 그것은 이미 빛을 보게 되었다. 그 대부분이 확인될
수 있는 바, 확인된 범위 내에서 볼 때 이 족보는 정확한 기록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는
그 기록에 상치되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많은 자료들이 이 기록에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록은 확실히 난처한 문제로 남아 있는 많은 역사적인 빈 틈을 메워 준다.
‘소수도원 문서’에 나오는 그 족보에 따르면 고드프라 드 부용은 – 1009년에 위그 드 플랑타르
와 결혼했던 그의 증조모에 의해서 – 플랑타르 가문의 혈통을 이은 후손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고드프라는 다고베르 2세, 시지스베르 4세 그리고 메로빙 왕가의 ‘잊혀진 왕들’의 피를 이어받
은 직계 후손으로서 메로빙 혈통 출신이었다. 400면에 걸쳐서 메로빙 왕가의 피는 여러 가문
들로 이리저리 흘러 들어 갔다. 결국 포도나무 재배에 있어서 포도나무를 이 나무 저 가지에
접목시키는 것과 흡사한 과정을 통하여 로랭의 공작인 고드프라 드 부용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열매는 로랭의 집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세습 가문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십자군 운동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빛을 던져 준다.
우리는 십자군 운동을 이제 새로운 시각에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십자군 운동들 가운데
서 사라센족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무덤을 되찾는 상징적인 의미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고드프라를 지지했던 자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보기에도 그는 로랭의 공작 그 이상의 어떤
인물이었다. 그는 사실상 정당한 왕 – 679년 다고베르 2세가 살해됨으로 말미암아 왕권을
잃게 된 그 왕조의 합법적인 계승자 –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드프라가 만일 정당한 왕이었
다고 한다면, 그는 역시 왕국이 없는 왕이었고, 그래서 로마 교회가 지지하던 프랑스의 카페티
왕조는 그 당시 자신들의 왕조를 폐위시키고자 하는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왕국 없는 왕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이 온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왕국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자신이 밟았던 땅 성지 팔레스타인일것이다. 그러한 곳의 통치자를 유럽
어느 땅의 통치자와 비교나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이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을 다스
리면서 4세기 전에 자신의 조상들을 배신한 그 교회에게 달콤한 복수를 할 수 있지 않았겠는
가?
알 수 없는 신비
점차적으로 당혹스러웠던 문제들 가운데 확실한 부분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만일 고드프라가 메로빙 왕가의 출신이라고 한다면, 서로 연관시킬 수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많은 단편적인 사건들이 연결되게 되고 일관된 하나의 연속성을 띄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메로빙 왕조와 십자군 운동, 다고베르 2세와 고드프라. 렌느 르 샤토, 성당기사단. 로랭
의 가문, 시온의 수도원 등과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연결시킬 수 없는 것들이 일치된다
고 하는 것을 강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오늘날에 – 알랭포에르, 앙리 드 몽페자(덴마아크 여왕
의 부군), 피에르 플랑타르 드 생 클레어, 로랭의 명예공작이며 예루살렘의 왕인 오토 폰 합스
부르크 등의 인물에서 메로빙 왕가의 혈통을 추적해 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아주 결정적인 문제들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그 메로빙 왕가의 혈통이 무슨 이유 때문에 오늘날에 그렇게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의 중요성
을 가져야 하느냐는 것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아직도 그 메로빙 왕가의 주장이 무슨 이유 때문
에 그 왕가가 여러 세기에 걸쳐서 그렇게 뛰어난 많은 인물들의 충성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우리는 메로빙 왕가 군주의 합법성이 전문적으로 볼 때는 어찌 되었든 간에 오늘날에
그가 그렇게 중대한 승인을 받게 되는 이유도 알 수 없다. 아주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메로빙
왕가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못보고 넘어왔다는 것이다.
유배당한 부족
메로빙 왕조의 혈통에 혹시 정통적인 학술 이론에서 말해지는 것과 다른 특별한 무엇이 있지
는 않을까? 현대인들에게 정말로 문제가 될 무엇이 있지 않을까? 현재의 사회, 정치 및 종교
제도에 영향을 주거나 어쩌면 변혁을 일으킬 만한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이러한 물음들을
계속 우리를 성가시게 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은 아무데도 없는 듯했다.
우리는 소수도원 문서집. 특히 가장 중요한 부분인 <비밀문서>를 다시금 면밀히 조사하여
보았다. 이전까지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구절들도 다시 검토하였는데, 이번에는
그러한 구절들이 그럴 듯하게 이해되어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구절들이 우리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나, 핵심적인 물음에 답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아니다. 한편 어떤 구절들
중에서는 아직도 그 의미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물론 그러한 구절들은 우리
의 수수께끼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 대신 그 구절들은 우리로 하여금 아주 특별한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게 하였고, 그 입장은 점차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 판명되었
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메로빙 왕조는 그 당시의 연대기 편자들에 의하며, 스스로를 고대
트로이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소수도원 문서의 어떤 부분을 보면 메로빙 왕조의
혈통의 트로이성 포위보다 오래 되었고, 구약성서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비밀문서>에 나오는 족보들 중 어떤 것을 보면, 각주나 주석이 상당히 많이
달려 있다. 그런데, 이들 중 많은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12부족(지파) 중 하나인 베냐민 부족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어느 하나는 세 군데의 성서 구절을 인용하며 강조하고 있는데,
곧 신명기 33장, 여호수아서 18장, 사사기 20~21장이 그것이다.
신명기 33장은 모세가 12부족의 각 족장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모세는 베냐
민 부족에 대해서는 [주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주는 그를 날이 맞도
록 보호하시고 그는 그의 어깨 사이에 거하리로다] (신명기 33장 12절)이라고 일렀다. 말하자
면 베냐민과 그의 후손들은 선별되어서 아주 각별하고도 대단한 축복을 받은 것이다. 이 점
만큼은 누가 보나 명백하다. 그러나 물론, ‘베냐민의 어깨 사이에’ 주께서 거하시겠다는 약속을
우리를 애먹였다. 이것을 메로빙 왕조의 전설적인 모반(母斑)인 어깨 사이의 붉은 십자가와
연결시킬 것인가? 그러한 연결은 좀 견강부회식인 듯했다. 한편, 구약성서 속의 베냐민과 우리
의 조사 대상 사이에는 또 다른 명백한 유사성이 있다. 로버트 그레이브스에 의하면 베냐민에
게 있어서 거룩한 날은 12월 23일이었는데 이 날은 곧 다고베르 축제일이다. 베냐민 부족을
구성하는 세 씨족 중에 아히람이라는 씨족이 있었는데, 아히람의 정착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솔로몬 신전의 건축자이며 석공 전통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인 히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히람의 가장 충실한 제자가 베노니라고 불리워졌었는데, 흥미롭게도 원래 베노니라는
이름은 베냐민이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인 라헬이 죽기 전에 그에게 지어준 이름이었던 것이
다.
<비밀문서>에 인용된 두 번째의 성구인 여호수아서 18장은 좀 더 명확하다. 그것은 모세의
백성들이 약속된 땅에 도착한 일과 12부족에게 각기 영토로부터 특정한 지역을 지정해 주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거기에 나타난 대로 지정되었다면 베냐민 부족이 차지한 영토는 후에
거룩한 도시가 된 예루살렘을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은 다윗이나 솔로몬의 수도
가 되기 이전에 이미 베냐민 부족에게 할당된 생득권(生得權)이었던 것이다. 여호수아서 18장
28절에 의하면 베냐민 족속의 생득권은 [셀라, 엘렙, 여부스 곧 예루살렘, 기브앗. 기럇 따위의
열 네 성읍과 거기에 딸린 천막촌들이다. 이것이 베냐민 후손이 가족을 따라 얻은 유산이다.]
<비밀문서>에서 인용된 세번째의 성구는 상당히 복잡한 사건의 전개를 담고 있다. 어느 레위
인이 베냐민의 영토를 지나가다가 블리알(수메르인의 어머니 신으로서, 바빌론인들에게는 이시
타르로, 페니키아인들에게는 아스타르로 알려져 있다)의 숭배자로부터 습격당하였고 그의 첩은
강간당한다. 그 레위인은 열 두 부족의 대표들을 불러 직접 보게 하고는 그 끔찍한 일에 대해
복수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회중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그 무뢰한들을 재판장에 끌고
오도록 지시한다. 많은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들이 즉각 이에 순응했으리라고 예측하겠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들은 그리하지 않고, 무력을 동원해서 ‘블리알의 아들들’을 보호하기로
한다. 그 결과 베냐민 족속과 다른 11부족 간에 처참하고 유혈이 낭자한 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교전하는 중에 11지파에 속하는 사람들을 베냐민 사람에게 딸을 보내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는 것을 맹세한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끝이 나고 베냐민 사람들이 사실상 전멸되었을
때,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이 잔혹했음을 후회한다. 그러나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스바에서, 아무도 딸을 베냐민 가문에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이스라엘군은 하나님의 집(베델)으로 가서 저녁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앉아서 소리를 질러
대성통곡하며 아뢰었다. [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주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이런 일을
당해야 했습니까? 어찌하여 오늘 이스라엘에서 부족 하나가 없어지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
니까?] (사사기 21장 1~3절)
몇 구절 뒤를 보면, 이러한 비탄은 다시 반복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동족인 베냐민 지파를 생각하고 마음들이 언짢아서 말하기를 [오늘
이스라엘에서 부족 하나가 없어졌구나. 우리가 아무도 딸을 베냐민 가문이 시집보내지 않겠다
고 주께 서약을 해 놓았으니,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아내를 얻어 줄 수 있을까?]
(사사기 21장 6~7절)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기를,
주께서 이스라엘 부족들 사이에 틈이 생겨나게 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은 베냐민 부족을 생각하
고 마음이 언짢았다. 그래서 회중의 장로들은 [베냐민의 여인들이 모조리 없어졌으니, 살아남은
남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어 줄 수 있을까?]하고 의논하였다. [이스라엘중에서 부족
하나가 없어지지 않게 베냐민 족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씨를 이어야 할 터인데 어떻게 하면
될까? 우리 딸들은 그들과 결혼시킬 수 없고…] 이스라엘 백성은 베냐민 부족에 딸을 시집보내
면 저주를 받겠다고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사사기 21장 15~18절)
일개의 부족이 소멸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직면해서 장로들은 재빨리 해결책을 궁리해낸다.
베델에 있는 실로에서는 곧 축제가 열리게 되어 있었는데, - 실로의 남자들은 전쟁동안 중립을
취하고 있었다 – 실로 처녀들이라면 괜찮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베냐민 족속의 생존자들로
하여금 실로에 가서 포도밭에 숨어서 기다리다가, 축제가 시작되어서 읍내의 처녀들이 떼를
지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냉큼 하나씩 잡아다가 아내를 삼도록 조처하였다.
<비밀문서>에서 왜 이 구절에 유의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이유야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구약의 역사에 관련된 한에 있어서는 베냐민 족속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서 참패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수적으로야 열세를
당분간 면할 수는 없었겠지만, 위신은 재빨리 회복한 것이다. 사무엘상서를 보면,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을 세울 만큼, 그들은 정말로 훌륭하게 회복이 되었다.
그렇지만, 베냐민 족속이 어느 만큼 회복되었든지 간에, <비밀문서>는 블리알의 숭배자로
인한 전쟁이 아주 중대한 전환점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충돌 때문에 거의 다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수의 베냐민 족속들이 망명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문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이 대문자로 적혀 있는 것이다.
ONE DAY THE DESCENDANTS OF BENJAMIN LEFT THEIR COUNTRY ; CERTAIN REMAINED ;
TWO THOUSAND YEARS LATER GODFROI VI [DE BOUILLON] BECAME KING OF JERUSALEM
AND FOUNDED THE ORDRE DE SION.
어느 날엔가 베냐민의 후손들은 그들의 고장을 떠났고, 일부는 남았다. 그로부터 2000년 후
부용 출신의 고드프라 6세가 예루살렘의 왕이 되어 시온체제를 창건하였다.
처음에 볼 때는 이런 뚜렷한 불연속선간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러한
몇 개의 단편적인 글귀들을 한 데에 모아 보았더니, 일관성이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나타났다.
그 이야기란, 대부분의 베냐민 족속들이 망명길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그리스로,
중부 펠로폰네서스로, 즉 아르카디아 지방으로 망명했을 것이고, 아마도 아르카디아의 왕손들
과 맺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 후 1세기까지 그들은 다뉴브 강가 및 라인 강가에까지 진출
하면서, 튜튼족과 서로 혼인하고 마침내는 메로빙 왕조의 직접적인 조상인 지캄브리아의 프랑
크족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수도원 문서’에 의하면 메로빙 왕조는 베냐민 족속으로부터, 아르카디아를 거쳐서 혈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메로빙 왕조와 그들은 후손들 – 예를 들어 플랑타르 가
나 로렌느 가 – 은 궁극적으로는 셈족 또는 이스라엘족 태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예루살렘이 베냐민 족속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생득권이었다면, 그드프라 드 부용은 거룩한
도시를 향해 행군해 나아갈 때 자신의 오래된 합법적인 유산의 반환을 요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제 1차 십자군 원정에 나선 당당한 서방 군주들 중에서 유독
고드프라만이 떠나기 전에 자기의 전재산을 팔아치웠다는 점이다. 이는 자신이 유럽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의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정말로 메로빙 왕조의 원조가 베냐민 족속이었는지 아닌지 확인
할 길이 없다. 앞서 보인 바와 같이 ‘소수도원 문서’는 너무나 먼 옛날의 알기 어려운 과거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확증이나 기록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전혀
유일무이하거나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말은 어렴풋한 소문이나 막연한
전승으로 오랫동안 퍼져 있었다.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프루스트는 그의 작품에서 이 이야기
를 바탕으로 글을 썼다. 보다 최근의 예를 들면, 소설가 쟝 도르메송은 어떤 프랑스 귀족 가문
이 유대인의 혈통을 타고 났다고 시사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자기 나라 사람을 헐뜯기 좋아하는
로저페이르피트는 1965년에, 프랑스 귀족 전부와 유럽의 귀족 대부분이 궁극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유대인이라고 소설을 통해 환호를 하며 크게 외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장은, 증명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사실상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 ‘소수도원 문서’에 나타난 대로 베냐민 부족이 망명하여 이주하였다는 사실도
그러하다. 베냐민 부족은 블리알 – 어머니 신의 일종으로서 흔히 황소나 송아지의 형상을 띠기
도 한다 – 의 숭배자를 위해서 무기를 들었다. 베냐민 족속들도 바로 그 신을 섬겼으리라고
하는 것은 다 근거를 가지고 하는 말이다. 출애급 당시의 금송아지 – 이 금송아지는 푸생의
가장 유명한 작품의 화제(畵題)이기도 하다 - 에 대한 예배는 베냐민 족속의 특별한 의식이었
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의 다른 11부족과의 전쟁에 뒤이어 망명길에 오른 베냐민 족속들은 마땅히 서쪽을
향해서, 즉 페니키아 해안 쪽으로 도주했을 것이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많은 수의 망명자들을
수송할 만한 배를 가지고 있었을테고, 또 도망가는 베냐민 사람들과 손을 잡았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도 하늘의 여왕 아스타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 신을 섬기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베냐민 족속이 팔레스타인으로부터 탈출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흔적을 그리스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는 벨루스 왕의 아들 다나우스에 대한 전설이 있다. 그는 그의 딸
들과 함께 배를 타고 그리스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의 딸들은 후에 아르카디아의 신앙으로
확립된 어머니 신에 대한 숭배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들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로버트
그레이브스에 의하면 다나우스의 신화에는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온 이주민]이 펠로폰네서스에
도착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레이브스의 주장은, 벨루스왕이 사실은 바알 혹은 벨이
며, 또한 어쩌면 구약성서의 블리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밝혀둘 만한 점은,
베냐민 부족에 속한 씨족 중에 벨라라는 씨족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르카디아 지방에서 어머니 신에 대한 숭배는 번창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에 속한 다른
어떤 지방에서보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 신앙은 드메터에 대한 숭배와 결합되었고, 그 후
에 다시 다이아나 혹은 아르테미스에 대한 숭배와 결합되었다. 아르테미스는 아르데네스 지방
에서는 아르두이나로 전해졌는데, 그 지방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아르테미스가 지캄브리아 프랑크 족이 지금의 프랑스를 탄생시킨 곳이다. 아르테미스로서
신성시되었던 토템을 암곰으로서 칼리스토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그의 아들 아르카스는 역시
새끼 곰으로서 아르카디아의 수호신이었다. 칼리스토는 아르테미스에 의해서 하늘로 옮겨져서,
큰 암곰 별자리, 즉 큰곰자리가 되었다. 그러므로 메로빙 혈통을 가리켜 암곰이라고 되풀이해
서 지칭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신화외에도, 유대인이 아르카디아에 이주해 왔음을 암시하는 증거는 또 있다. 아르카디아라고
불려지는 지방은, 고대에는 막강한 군국주의 국가인 스파르타가 통치했었다. 스파르타인은
구 아르카디아의 문화를 상당히 흡수하였다. 그래서 아르카디아의 전설적인 인물인 리케우스
는, 사실은 스파르타 법전을 편찬했다는 리쿠르구스와 동일한 인물일 것이 거의 확실하다.
스파르타인은 메로빙인들과 마찬가지로 성인이 되고 나면 머리카락에 특별하고 마술적인 의미
를 부여하였다. 그래서 메로빙인과 마찬가지로 머리카락을 길게 늘였다. 어떤 권위자에 의하면,
[머리카락의 길이에 따라 신체적인 힘이 표시되었으며, 긴 머리카락은 거룩한 상징이었다.]
더욱이, 성서외경 중에서 마카베 양서(兩書)는 유대인과 스파르타인 사이의 연계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카베 후서에 보면 몇몇 유대인들이 [라케디모니아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의 인척 관계
를 구실로 보호를 받고자 출항하였다] 라고 말하고 있다. 또, 마카베 상서를 보면, [스파르타인
과 유대인에 관한 글에서 그들이 서로 형제이고 아브라함의 가족이라는 점이 발견되었다] 라고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 유대인들이 아르카디아로 이주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만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 소수도원 문서’도 그것이 정확하다고 증명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무시해 버릴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셈족이 프랑크 문화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는 확고한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었다. 페니키아족 및 셈족의 무역로는 남부 프랑스
전연, 즉 보르도에서부터 마르세이유와 나르본에 이르기까지 지역을 관통했던 것이다. 그 무역
로는 론에까지도 이르렀다. 일찍이 기원 전 700~600년 경에 프랑스 연안지방 뿐 아니라 카르
카손느나 툴루즈 등지의 내륙지방에도 페니키아인의 정착촌이 있었다. 그러한 고장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상당수가 셈 문명 계통의 것이다. 이것은 별로 놀랄 만한 일이 못된다. 왜냐하
면, 기원전 9세기에 티르지방의 페니키아왕들은 이스라엘이나 유대의 왕들과 통혼하여 왕가끼
리 동명을 맺었으며, 또한 그 결과 각 나라에 속한 백성들간의 긴밀한 유대도 생겨나게 했기
때문이다.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점령 및 성전의 파괴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거룩한 땅으로부터
대거 탈출을 하였다. 따라서 서기 79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땅 속에 묻힌 도시 폼페이에는
유대인의 거주지역도 포함이 된다. 바로 그 즈음에 남부 프랑스의 특정 도시들 (예를 들어, 아
를르, 뤼넬, 나르본)은 유대인 망명객들에게 피난처가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유럽 특히
프랑스에 몰려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세기의 예루살렘 몰락보다 훨씬 전의 일이다. 사실상
그 일은 기원전부터 진행되어 오고 있었다. 기원전 106년부터 48년 사이에 로마에는 유대인의
부락이 형성되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멀리 라인강변 콜론느 지방에도 그러한
부락이 생겨났다. 어떤 로마부대 내에는 유대인 노예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는데, 그들은 지휘
관을 따라서 유럽 전역을 다녔다. 이 노예들 중 상당수는 나중에 자유를 쟁취하였거나 매입
하였거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 획득하여서, 지역 공동체를 이룩하였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도처에는 전형적인 셈어 지명이 상당히 많이 산재해 있는 것이다. 그 중 몇
몇은 구 메로빙 영토의 한가운데에 정통으로 자리잡고 있다. 예를 들어, 스테내로부터 몇 킬로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 바로 다고베르가 암살된 거룩한 숲 가장자리에 바알론이라는 부락이
있다. 또, 스테내와 오르발 사이에는 아비옫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로렌느에 있는 시온산
– 영감의 언덕 – 의 원래 이름은 세미타 산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수도원 문서’에서 주장하는 바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무시해버
릴 수도 없다. 그것이 적어도 근거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증거는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는 ‘소수도원 문서’ 가 참일지도 모른다고 널리 알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메로빙
왕조와 그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많은 귀족가문이 셈족에 기원을 두고 파생되었을지도 모른다
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가 찾고자 하였던 것의 전부이었던가라고 우리는 반문해 보았다. 이것이
바로 수세기 동안 숱한 소란과 음모와, 수많은 책략과 미스터리와, 수많은 논쟁과 싸움을 불러
일으킨 놀라운 비밀이었던가? 잊혀졌던 어떤 종족의 단순한 전설이? 아니. 설령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었다손치더라도 바로 이것이, 정말로 시온수도회의 동기와 메로빙 왕조의 자격을 설명해
준다는 말인가? 정말로 이것이 레오나르도나 뉴튼과 같은 사람들의 충성과 귀즈 가문이나 로
렌느 가문의 활동과, 성체회의 은밀한 노력과, 스코틀란드의식. 프리메이슨단의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설명해 준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베냐민 부족의 후손들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비밀
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는가? 또 보다 결정적인 반문을 한다면, 오늘날에 와서 베냐민 부족의
후손이 문제될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오늘날의 시온수도회의 활동 및
목적을 밝힐 수 있겠는가?
우리의 물음은, 셈족이나 유대민족에 관계된 것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당연히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의 물음은 또 기독교적인 요소도 특별하게, 심지어는 열정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는 것인가? 예를 들면, 클로비스와 로마교회 사이의 조약 – 고드프라가 기독교 신앙을 공인
하였다는 사실과 예루살렘 점령 – 다소 이단적이기는 하지만 기독적인 카타리파와 성당기사단
의 정신 – 성체회와 같은 종교적인 제도 – 연금술에 통달하고 귀족적이면서 기독교적인 프리
메이슨단 – 그 외에 높은 왕위로부터 부데나 소니에르 같은 지방교구사제에 이르기까지의 수
많은 교회의 사제에 대한 언급들…….
메로빙 왕조의 원조가 유대인이라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부수
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탐구 이면에 존재하는 실제의 사실이 무엇이든, 우리가 보
기에 그 비밀은 구약의 유대교보다는 기독교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간단히 말해서,
이 시점에 있어서 베냐민 부족에 관한 논의는 우리의 주의력을 딴 데로 쏠리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중요한 것이든,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어떤
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