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꿈을 향해 행진, 또 행진하는 씨킴의 철학에 감동받은 한 학생이 헌사한 그림.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 씨킴의 집무실 입구에 붙어 있다. 2 세계적 컬렉터는 “<럭셔리>와의 인터뷰를 위해 벨벳 재킷으로 멋을 좀 냈다”고 했다. 그는 평소에도 이렇듯 크게 잘 웃는다.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 주변은 씨킴CI Kim(본명 김창일의 이니셜을 따왔다)을 대단한 재산가이가 ‘지역 유지’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하다. 천안 초입에 있는 천안 버스터미널, 터미널에서 차로 5분 거리의 아라리오 갤러리, 그 옆의 조각 광장, 그 옆의 시네마 멀티플렉스와 식당가 그리고 갤러리아백화점 건물 모두가 그의 것이다. 미술 애호가라면 그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작품에 또 한 번 놀란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아라리오 갤러리 입구에 있는, 인체의 장기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약 7m 높이의 조형물. 작품 한 점의 가격이 20억~100억 원을 넘나드는 영국의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으로 방탄유리벽 설치에만 3억 원이 들었다. 아라리오 갤러리 안팎은 이밖에도 대단한 작품들로 빼곡하다. 미국의 유명한 팝아트 작가 키스 헤링, 데미언 허스트의 또 다른 억 소리 나는 작품들, ‘러브LOVE’ 조각 작품으로 유명한 로버트 인디애나 등 ‘명품’이 가득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영국의 세계적 미술 전문지 <아트 리뷰>, 독일의 예술 생활 잡지 <모노폴> 등이 선정한 ‘세계 100대 컬렉터’에 3년 연속 포함됐는데 이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해 100억 원 이상을 미술품에 써야 한다.
세계적 컬렉터를 만난 건 그의 다섯 번째 전시회 때문이었다. 올해는 그가 직접 그림을 그린 지 10년째가 되는 해다. 자신의 그림 그리기를 부자의 사치 놀음이라 폄하하는 이들에게 그는 말했다. “단지 재미를 위해 꼬박 10년을 바치는 이는 없다.” 실제로, 그는 꼬박 10년을 그림에 바쳤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그리고, 뿌리고, 붙이고, 말리고, 자르고, 던지는 작업을 거른 적이 거의 없다. 언뜻 작품성을 논하기에는 부족할 듯싶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전시회를 하자”는 러브 콜을 여기저기서 받는다. 기업가로, 컬렉터로, 화가로 1인 3역을 멋지게 해내는 그의 인생은 참으로 달콤해 보인다. 성공한 인생이란 저런 것이겠거니, 애초부터 부자였겠거니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무슨 재주를 타고났기에 사는 작품마다 가격이 폭등할까 하는 호기심도 스친다. 그는 “꿈이 있어 가능했다”라고 말한다. 살다 보면 끈 떨어진 연처럼 꿈의 행방조차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저리도 크고 화려한 꿈을 꾸고, 키우고, 완성할 수 있었을까?
토마토를 그림 위에 던지고, 말리는 과정이 이번 작업의 주요 과정이라고 들었다. 그렇다. 고흐, 오드리 헵번, <뉴스위크> 등 과거의 ‘아이콘’을 캔버스에 정밀하게 묘사하고 그 위에 토마토를 던졌다. 뿌리고, 으깨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토마토의 색은 애초의 그림 원료와 섞여 뭉치고 탈색됐다. 여름에는 날벌레가 날고, 악취가 났다. 원하는 색감이 나오면 그 위에 바니시를 발라 부패를 멈추었다. 그렇게 탄생한 그림은 마치 오래전 명화나 포스터, 잡지에 곰팡이가 핀 것 같다. 그림 자체가 ‘역사’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그림이 왜 이리 큰 건가? 소품은 하나도 없어 은근 주눅이 든다. 하하. 그런가. 300×220cm 사이즈다. 제작이 가능한 가장 큰 캔버스 사이즈다. 사실 나는 이것보다도 더 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그러면 캔버스가 휜다. 처음 그림을 그릴 때부터 ‘소품’은 그리지 않았다. 앞선 네 번의 개인전에서 작품을 단 한 점도 팔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그렇다. 사업적으로 아는 분들이 전시회에 와서 한 작품이라도 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부담을 갖는 것이 불편하다. 또 이왕 작품을 판다면 구매자가 손해를 보면 안 되는데 아직까지는 쑥스럽고 자신이 없다. 컬렉터로서의 씨킴이 워낙 유명해 화가로서의 씨킴은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는 느낌이다. ‘네가 무슨 그림이냐?” 하고 무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내 작업실에 와서도 그림을 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을 보면 더 오기가 생긴다. 힘도 불끈 솟는다. 살다 보면 고난이 숱하게 찾아오는데 이를 에너지 삼아 더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 나다. 전시실 입구에 소만 한 강아지 인형이 놓여 있더라. 목에는 “배고파. 꿈을 먹고 싶어 I am Hungry. I Wanna Eat a Dream”라고 적힌 푯말을 걸고 있던데. 꿈은 내 평생의 화두다. 꿈을 향한 도전과 행진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 최고의 컬렉터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인 줄 알지만 나의 궁극적 꿈은 세계적 화가가 되는 것이다. 취미삼아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건강을 위해 쉬엄쉬엄 북한산 오르듯 작업했다면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새벽 3~4시에 일어나 매일 10시간씩 손톱이 닳도록 그림을 그렸다. 내 작업 공간은 놀이터가 아니다. 전쟁터다. 국내외의 수많은 갤러리에서 전시회 제의가 들어온 것으로 안다. 꾸준히 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갤러리를 직접 찾아가보는데 그분들께는 죄송한 얘기지만 무대의 크기가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더 실력을 쌓아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고 싶은 것이 욕심이다. 너무 욕심이 과한 것 아닌가? 이미 세계적 컬렉터이고 엄청난 자산가인데… 꿈을 향해 달릴 뿐이다. 스스로 ‘씨킴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 기분 좋다. 이렇게 계속 노력하면 어디까지 갈까 궁금하기도 하다.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물은 정확히 100℃가 되어야 끓는다고 한다. 99℃에서 뚜껑을 열면(주저앉으면) 다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나는 100℃가 될 때까지 가열차게 달릴 것이다. 중간에 쉬거나, 돌아가거나, 주저앉고 싶지 않다. 이제 쉬엄쉬엄 즐기며 살 법도 한데 당신의 오늘은 치열해 보인다. 지금 당신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다. 내 머릿속에는 4가지밖에 없다. 어디를 가도 이 4가지만 보고 연구한다. 1. 미술관 2 멀티플렉스 3 식당 4 그림 공부! 아라리오 갤러리 베이징을 수시로 가지만 아직 만리장성도 가보지 않았다. 골프도 못 치고, 도박도 못 한다. 하지만 관심 있는 작가가 해외 어딘가에서 개인전을 한다고 하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간다. 이 4가지는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들이다. 1999년에 750억 원을 투자해서 시작한 멀티플렉스와 백화점 사업, 2006년에 550억 원을 투자한 아라리오 스몰 시티 확장 사업 등은 내 꿈이므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 돈이면 중소기업 몇 개를 사거나, 임대 사업을 해 편히 살 수 있을 텐데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느냐”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저 편히 하루하루를 살고 싶지는 않다. 경희대 경영학과와 단국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화가가 되었나? 어디나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그것도 필름 카메라. 캐논 ELPH LT 260 모델을 쓰는데 이 카메라가 100대도 넘는다. 안방, 거실, 차 안, 회의실, 작업실 등 어디에도 카메라가 있다. 좋은 그림 혹은 영상을 놓치기 싫어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미술관, 멀티플렉스, 식당, 그림 공부만 생각하는데 배울 것이 있다 싶은 레스토랑에서는 사진을 못 찍으니 냅킨이나 메모지에 그림을 그린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사진과 함께 스케치를 남긴다. 그 사진과 스케치를 합하면 수십만 장이 넘는다. 그 작업이 내 ‘그림 선생’이 될 줄은 나도 몰랐다.
1 그의 꿈은 세계 최고의 컬렉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가는 화가가 되는 것이다.
씨킴의 본명은 김창일로 1978년 시작한 천안 아라리오 종합 버스터미널을 기반으로 터미널, 백화점, 영화관, 음식점, 갤러리를 보유한 ‘아라리오 그룹’을 일구었다. 처음 번 돈으로 인사동에 가서 미술 작품을 살 만큼 그림에 애정이 있던 그는 28년째 세계적 컬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아트 리뷰> 등 세계 최고의 미술 전문지는 씨킴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컬렉터 100인’에 3년 연속 선정했다. 아시아인 중에서는 유일한 ‘타이틀’로 일본 최고의 부동산 재벌이자 대단한 미술품 애호가로 알려진 모리 그룹의 모리 미노루 회장도 작년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의 궁극의 꿈은 화이트 큐브, 가고시안 같은 세계적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는 화가로서의 씨킴이다.
2 한 유명 컬텍터가 그의 작품을 약 2만 달러에 산 데서 알 수 있듯 그의 그림 실력은 결코 빈약하지 않다.
그의 작업실은 100평이다. 웬만한 운동장보다 크다. 작업실엔 온갖 ‘잡동사니’로 만든 작품이 가득하다. 신문지, 팔레트, 포장용 박스, 인형, 초콜릿 통은 물론이고 국자와 빨래집게도 작업 도구가 된다. 그는 그곳에서 하루 대부분을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미친 듯 ‘열공’한다. 그림은 1978년 4월에 처음 그렸다. 첫 작품들을 도록으로 만들어 갖고 있는데 표지에는 “넌 꿈이 있니? 넌 반드시 꿈을 가져야 해Do You Have a Dream? You Should Have a Dream”이라고 적혀 있다.
왜 서울이 아닌 천안에 사나? 문화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서울이 더 편할 텐데. 이제껏 서울에서 자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새벽 2~3시가 돼서도 반드시 천안으로 왔다. 사업가나 컬렉터로 자리를 잡기 전에 천안에 산다고 하면 ‘촌놈’이라고 대번에 무시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살 생각이 전혀 없다. 천안에 세운 ‘미니 도시’를 더 문화적이고 더 성공적으로 가꾸는 것 역시 나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미술 컬렉션이라니 돈이 엄청나게 드는 취향을 지녔다. 처음부터 탄탄한 재력이 있지 않으면 시작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떻게 부자가 되었나? 대학을 졸업하고 천안으로 이주해 어머니가 인수한 천안 고속버스터미널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 내 나이 스물여덟 살인 1978년이다. 매달 어머니께 300만 원의 임대료를 내는 조건이었다. 당시 터미널의 경영 성과는 엉망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매달 5000만~1억 원이 적자였다. 당시 꿈에 불타던 나는 어떻게든 이 사업을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불탔다. 전국의 모든 터미널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매점을 직영으로 운영하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고 현금을 맡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매점 운영이 돈이 되겠다 싶어 매점 5개를 직접 운영했다. 그 과정에서 몇몇 임대업자가 목에 사시미 칼을 들이대기도 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매점을 레노베이션했다. 알루미늄으로 쇼윈도를 만들고 물건을 사고 싶도록 아름다운 진열대를 만들었다. 서서히 수익이 나기 시작했다. 점포당 매출이 높다 보니 코카콜라에서 일본도 보내주고 격려금으로 1000만 원도 주었다. 그것이 내 흑자 인생의 첫 시작이었다. 그 수익을 몽땅 지금의 아라리오 스몰 시티에 투자한 건가? 그렇다. 터미널과 조각 광장, 아라리오 갤러리 등을 모두 합친 부지가 1만 8000평 정도인데 1985년 당시 200억 원을 투자해서 오늘의 규모로 키웠다.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천안 인구가 18만 명인데 겨우 그 숫자를 보고 200억 원을 투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천안은 물론, 주변의 예산, 홍성, 평택, 조치원 인구까지 포함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인구가 1000만으로 늘어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처럼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나는 반드시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나 깊은 명상을 했는데 그러면 왠지 우주의 기운이 내 편이 돼줄 것만 같았다.
1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 전시실 옆에 있는 아트 숍. 씨킴에 관한 ‘기록’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있는 곳이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의 기운도 내 편이 된다’고 말하는 책 <시크릿>의 구절 같기도 한데 우주는 정말 당신 편이 돼 도움을 주었는가? 처음부터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세팅되는 성공은 없다. 1989년도에 아라리오 갤러리를 오픈했는데 투자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 힘들었다. 건설 회사에 어음을 끊어주었는데 당장 10억~20억 원을 막을 재간이 없을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을 겸 제주도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간 적이 있는데 거세게 부딪치는 파도를 보니 순간 그대로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고민을 하다 문득 시계를 보면 6시가 되어 있었다. 돈이 무서운 거로구나, 함부로 빌리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절실히 했다. 아라리오 그룹이 흑자를 낸 건 2003년 정도부터였다. 그 정도로 압박이 심했다면 포기할 만도 한데 무슨 힘으로 버텼나? 글쎄 예전부터 꿈을 이루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아카시아 나무를 심는다 치자. 꽃이 피고, 향기가 진동해 벌이 날아오고 그 벌이 내 통에 꿀을 담아주기까지는 열심히 물을 주는 수밖에 없다. 꿈이라면 더더욱. 비록 위기를 맞긴 했지만 다른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토록 큰 사업을 추진시켜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당시의 당신은 무척 젊었다. 물론이다. 베트남 국수를 하면 되겠다 싶어 4억 원을 들여 가게를 오픈했다가 4개월 만에 문을 닫기도 했고 슈퍼마켓을 말아먹은 적도 있다. 실패할 것이 뻔하다며 많은 이가 말렸지만 해보지도 않고 실패를 말하는 것이 싫고, 실패를 하더라도 직접 경험을 해봐야 뼛속 깊이 느낄 것 같아 추진했다. 그리고 끝내 망했다. 그 경험들이 큰 자산이 됐다. 이 정도 되면, 당신 스스로에 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다. 어쨌든 당신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고 또 추진하고 있으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내 자신을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디펜던트>지가 1면을 할애해 소개했을 정도면 출세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난 아직도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미술계에 빠지면 빠질수록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 조각 배 같다는 생각을 한다. 미술이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은 이런 겸손함이다. 세계적 컬렉터나 작가들은 이 세상에 차고 넘치니까. 사는 그림마다 ‘대박’을 터뜨리는 것 같다. 허스트의 작품만 열 점이 넘는데 그의 그림 값은 최근 수년간 그야말로 폭등했다. 그렇지 않다. 초창기에 샀던 그림 대부분은 실패했다. 지금까지 산 그림의 50%가 실패였다고 보면 된다. 액수로 따지자면 어마어마할 거다. 속거나 당한 적도 많다. 미술 세계는 하이에나가 우글거리는 정글이니까. 그때의 실패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난 진작 미술 업계에서 떨어져 나갔을 거다. 지난 2007년 아라리오 소장품 전이 열렸을 때 미술 애호가들은 씨킴의 컬렉션에 적잖이 놀랐다. 데미언 허스트의 초기 원형 페인팅 ‘Gorgeous Concentric Red Blue Hot Cold Painting’, 키스 헤링의 1986년작 조각 ‘무제-Acrobats’, 중국 최초의 팝아트 작가 왕광이의 ‘대비판’, 작품가가 80억~100억에 이르는 중국 최고의 작가 위에민준의 ‘Maze’ 시리즈 등 미술 경매 시장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명작’ 45점이 공개됐다. 이중에는 길버트와 조지, 얀 페이밍, 신디 셔먼, 데이비드 살르, 토마스 루프의 작품도 포함됐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새발의 피’로 아라리오 갤러리는 총 3000점의 컬렉션을 자랑한다.
컬렉션을 하면서 경영을 할 때보다 더 큰 돈을 훨씬 쉽게 벌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하다. 예를 들면 자신의 피를 뽑아 작업하는 마크 퀸의 작품은 20만 달러에 사서 60만 달러가 됐다. 오히려 정반대다. 내가 산 그림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해서 나는 남는 장사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차익을 바라고 팔 그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을 컬렉션하다 보면 그림 한 점 파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알게 된다. 자식 같은 작품을 어떻게 돈만 보고 넘길 수 있는가. 한 번 판 그림은 다시 되사지 못한다. 더 이상 예전의 가격이 아니니까. 그런데 부득이 팔아야 할 때가 있다. 아라리오 갤러리는 천안에도 있지만 뉴욕에도 있고, 베이징에도 있다. 한 해 20억~30억 원이 우습게 들어간다. 그 갤러리를 세계적인 것으로 키우고, 직원들 월급을 주고, 계속 시설 투자를 하고, 전속 작가들도 보살피려면 엄청난 돈이 든다. 지금, 시그마 폴케 그림 한 점을 팔아야 하는 상황인데 너무 마음이 아파 혼자 삭이는 중이다. 얼마 정도에 팔 생각인가? 대략 150만 달러 정도가 될 것 같다. 하지만 돈은 문제가 아니다. 말한 것처럼 돈을 벌려고 작품을 산 게 아니니까. 나는 작품 가격이 아무리 폭등을 해도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아니면 절대 작품을 팔지 않는다. 나의 철칙이다. 이 철칙을 한 번 깨면 피폐해지는 건 시간 문제다. 이익에 휘둘려 좋은 작품을 골라내는 감식안도 잃는다. 그래도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은 필수이지 않을까?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변치 않는 인내심, 꿈을 이루기 위해 할 것과 하지 말 것을 흔들리지 않고 실천하는 ‘원칙’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보다 돈은 벌고 싶다고 벌리지 않는다. 세상이 돈을 벌게 내버려두나? 돈을 벌려면 이를 악물고 노력해야 하고, 원칙을 지켜야 하며, 기다려야 한다. 실패 경험도 부지런히 쌓아야 한다. 실패 경험이 많지 않은 이는 언젠가 무너진다. 사실, 처음부터 하고 싶던 질문인데 오랫동안 참았다. 좋은 그림을 사는 비결은 도대체 뭔가? 하하. 그랬나? 우선, 작가가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큼 독창적이지 않으면 세계 무대에서 통하지 않는다. 갤러리의 지원도 중요하다. 좋은 갤러리에서 작품을 사는 것은 그림 투자의 첫 번째 원칙이다. 갤러리와 딜러의 지원 없이 작가 홀로 성공하기는 힘들다. 반 고흐의 그림이 오늘날 폭발적 인기를 누리는 것도 화랑을 하고 있던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작가의 그림이라도 유심히 살피는 습관도 중요하다. 유명해지면 어느 순간부터 그림을 대충 그리는 작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가 감지되는 작가의 작품을 나를 포함한 ‘선수’들은 절대 사지 않는다. 일반인이 가장 쉽게 범하는 우愚는 무엇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예쁜 그림만 좋아한다. 세계적 작가의 그림은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 그렇다. 내 경우를 들면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 ‘찬가’, ‘체러티’ 등은 작품이 절반도 완성되기 전에 구매했다. 마크 퀸이 자신의 피를 뽑아 만든 두상 ‘셀프’ 1991년작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으면 내게 기회가 오지 않는다. 사치 같은 거물이 득실득실한데 그렇지 않겠는가. 단, 배팅을 할 때는 반드시 마스터피스(걸작, 대표작)로 한다. 소품은 사지 않는다. 작가들과의 인맥은 그렇게 시작된다. 반도 완성되지 않은 그림을 믿고 구매하겠다는 컬렉터는 작가에게도 기분 좋은 존재다. 딜러가 개입할 때 “이거, 씨킴한테 줘” 하고 편을 들기도 한다. 수십 억 원의 비용이 드는 일인데, 작품 구매 결정이 쉽지 않겠다. 작품을 살 때 5분을 넘기지 않는다. 워낙 고가의 그림이라 “예약만 해도 된다”며 직원들이 만류하지만 그러면 결코 원하는 작품을 손에 쥘 수 없다. 그 어마어마한 비용을 대려면 ‘실탄’이 적잖이 필요할 텐데 어떻게 재산 증식을 하나. 부동산이나 주식을 하나? 1970년대 이후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를 한 적이 없다. 내 등기를 보면 안다. 이런 돈 놀이에 빠지면 일하는 즐거움, 꿈을 실현하는 쾌감을 잃는다. 소장품이 3000점에 이르는 데 어디에 두고 관리하나? 대부분 작품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비닐하우스 같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수장고’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온도, 습도, 통풍이 완벽하게 조절된다. 그렇게 투자를 하지 않으면 세계적 화랑이나 컬렉터와 맞붙을 수 없다. 도난의 우려 때문에 위치는 알려줄 수 없다. 세계적 작가의 그림을 사고, 갤러리와 접촉하려면 영어도 완벽해야겠다.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기본 회화는 하지만 깊이 들어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목표가 있으면 보디 랭귀지를 써서라도 반드시 내 뜻을 전달한다. 간절한 꿈을 이룰 기회인데 못할 게 뭐냐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직껏 외국인과 만나는 것을 기피한 적이 없다. 워낙 경쟁이 치열하니 작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업적 마인드를 갖춰야 할 것 같다. 나는 완벽하게 정리된 상업적 아이디어를 지닌 작가를 싫어한다. ‘진심’이 없는 상업성은 금방 탄로가 난다. 100명의 사업가가 있다고 치자. 95명은 망하고 5명 정도만 성공을 한다. 성공한 이들은 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정치적이지도 않다. 그저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묵묵히, 그러나 치열하게 노력할 뿐이다. 나의 원칙은 초지일관 한결같다. 더 높고 더 낮게More Quality, More Cheap!
2 전시실 입구에 놓여 있던 개 인형. “배고파, 꿈을 먹고 싶어”라고 적힌 목걸이를 걸고 있다.
3 그는 오늘도 행진한다. 그 누구도 그를 멈출 수 없고 그 역시 진군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당신은 꿈과 함께 존재하는 것 같다. 당신이 처음 꿈을 꾸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가.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서부터다. 내가 삼수를 하지 않았나. 휘문고를 나왔는데 당시 세 반이 우등반이었다. 우등반에서도 내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그런데 대학을 두 번씩이나 떨어지고 나니 무참하더라. 종로 바닥을 헤매고 다녔다. 길에서 행인과 시비가 붙어 치고 박고 한 적도 여러 번이다. 응암동 구치소에도 몇 번 갔다. 삼수 끝에 대학에 들어갔지만 패배감이 가시지 않았다. 키 178cm면 육군 의장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 무턱대고 자원했다. 잘못한 결정이었지.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많이 맞았다. 새벽 2~3시에 보초를 서고 있으면 허탈하고 괴로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보초를 서면서 ‘아악~’ 하고 악을 써보기도 했다. 2~3개월이 지났을까? 서서히 빛이 보이더라. 내 몸 속에 ‘드림 바이러스’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내무반에서 잠을 자며, 보초를 서며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야, 넌 할 수 있어!” 하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때부터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 매일 “나는 성공한다, 나는 성공한다’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지금도 나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하고 자기 체면을 건다. 여기에 오기 전에도 거울을 보며 수차례 연습하고 왔는걸. 꿈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습관’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등 서점가엔 성공을 위한 습관을 일러주는 책이 넘쳐난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잠결에도 메모를 할 수 있도록 메모지와 펜을 항상 머리맡에 놓아둔다. 명상도 빼놓을 수 없다. 새벽 4~5시면 어슴푸레 깬다. 그렇게 일어날 때 아이디어가 섬광처럼 스치는 경우가 많다. 그 생각을 재빨리 적은 뒤 책상에 앉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머릿 속에 큰 공간이 생긴다. 마치 우주처럼 방대한 공간이다. 군대에 있을 때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명상을 했는데 심란했던 마음을 집중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명상을 통해서는 주로 ‘큰일’을 생각한다. 회사의 미래 같은 것. 일찍 깨니 일찍 피곤하겠다. 낮잠도 자나? 낮잠을 자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잠이 오지 않는다. 지금 자면 밤에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일까? 저녁 9시를 넘기기가 힘들다. KBS 뉴스를 못 보고 SBS 뉴스만(한 시간 빠르니까)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슬슬 전조가 온다. 졸고 있으면 아내가 “빨리 가지~” 한다. 오늘도 꿈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전진’ 중인 <럭셔리>의 독자들께 한 마디 해달라. 열심히 실패하라. 넘어지는 것, 나자빠지는 것 없이 꿈을 이룰 수는 없다. 단 의기소침하거나 기죽지는 마라. 수업료를 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수업료를 내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특히 꿈을 실현하는 과정은 엄청 비싼 수업료를 요구한다. 그야말로 모두가 이루고자 하는 ‘드림dream’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