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4월 19일, 미국 해군의 최대 수상함 중 하나였던 전함(Battleship) 아이오와함(USS Iowa, BB-61)은 푸에토리코 인근의 캐러비안海에서 통상적인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아이오와함은 아이오와급 전함(Battleship)의 선두함으로 배수량 45,000톤, 길이 약 270m, 폭 약 33m, 홀수 약 11m, 속도 약 33노트(61km/h), 승선인원 2600여명 등의 스펙을 자랑하는 초대형 순양함이다. 함재기를 80대 이상 싣고 다니는 미국의 대형 항공모함 덩치를 생각하시면 되겠다. 주로 2차 세계대전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이 거대한 순양함은 원래는 수십기의 함포만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나, 한국전 이후 1958년에 은퇴했다가 1980년대 초에 무기체계를 대폭 개량하여 냉전(Cold War)의 파수꾼으로 재투입된다.
완전 퇴역하기 전의 무기체계는 16인치(406mm) 함포 9문(함수 6, 함미 3), 5인치(127mm) 함포 20문, 40mm 함포 80문, 20mm 대공포 49문,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32기, 하푼 대함미사일 16기, 팔랑스 근접방어체계 4기 등으로 무장했었다. 여기에 헬기나 무인정찰기(UAV)도 탑재하고 다녔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잘 무장한 포병 연대 하나가 통째로 바다에 떠 다니는 셈이다.
그런데, 1989년 통상적인 사격 훈련 중 주포인 16인치 함포 3개가 장착된 2번째 포탑에서 강력한 폭발이 발생한다. 폭발은 이 포탑의 3개 포신 중 가운데 포신에서 일어났고, 이 폭발로 인해 47명의 수병이 사망하는 한편 전함 자체도 큰 피해를 입게 되고, 결국 미 해군은 이듬해인 1990년 전함 아이오와함을 퇴역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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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 원인은 동성애자의 자살 폭탄 테러?
"평화시의 해군 사고로서는 가장 재앙적인 사고 중 하나"(Richard L. Schwoebel)였던 이 아이오와함 폭발 사고에 대해 해군은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한다. 이 조사를 위해 약 3개월 동안 2,500만 달러(약 300억 이상) 가까운 비용이 사용되었고 해군은 물론이고 미 육군과 연방수사국(FBI)의 시설까지 활용하는 등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사고의 원인이 (1) 폭발 사고가 사망한 포수 Clayton M. Hartwig에 의한 고의적인 행위에 의해 있어난 것이며, (2) 특히 그 이유가 동성애자 연인(아이오와함의 다른 군인)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비관하여 자살하기 위한 것 같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언론을 통해 흘러 나오기 시작한다. 언론에 이런 내용을 흘린 것은 해군 장교들과 조사단원들 중 일부의 소행인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어디선가 많이 본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정치인들의 뇌물 수사를 하면서 피의자의 혐의내용(검찰이 의심하는 내용)을 (권력에 우호적인) 언론에 흘리면서 여론 재판을 유도하는 대한민국 검찰의 모습과 데자뷰되지 않는가? JSA 김훈 중위(당시 소대장) 사건 당시 그가 3성 장군 출신의 아버지 김척 장군의 뒷배경 덕분에 JSA에 오게 되었다고 거짓 발표하던 (육사 선배) 중대장의 모습과 겹쳐지지 않는가? 사건 초기 천안함에 탑승했던 좌빨 수병이 고의로 내부 폭발사고를 일으켰을 것이라는 일부 꼴통들의 주장이 연상되지 않는가?
결국, 수백억의 비용이 사용된 해군의 조사결과가 3개월 후에 발표될 때에는 이 수병이 동성연애자인지의 여부에 대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면서도 폭발 자체는 Hartwig가 자살을 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뇌관을 터트려 발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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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지탱시키는 힘... 견제와 합리
미국은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자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의 상징국이다. 그러한 미국에서조차 군에서의 사고에 대해서는 자기 중심적, 자기 보호적인 태도가 강하게 작동한다. 수백억을 투입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나 합리성 보다는 해군의 위신을 보호해 줄 무언가를 찾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 것이 바로 이 Iowa함 폭발사고였다.
희생자들의 가족과 언론, 그리고 의회(상하원)에서는 이러한 해군의 조사결과를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상원은 GAO(General Accounting Office)에 해군의 조사결과를 재검토할 것을 요청했고, 이러한 GAO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주로 핵관련 안전문제를 다루는 산디아(Sandia) 국립연구소가 과학적인 재조사를 하기에 이른다. 당시 이 새로운 조사팀의 팀장이었던 Richard L. Schwoebel 박사는 나중에 'Explosion aboard the Iowa'라는 책을 출판하여 당시 조사단의 활동을 자세히 기록하여 역사로 남긴다.
이 Sandia 연구팀의 추가적인 조사에 의해 결국 아이오와함의 폭발사고는 동성애자 수병이 고의로 일으킨 자살 폭발 테러가 아니라 사고에 의한 것이었음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인지는 밝히지 못했지만 그 가능성이 높음을 입증하였고, 최소한 누군가가 고의로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과학적 증거를 찾아서 제시했던 것이다.
Explosion aboard the Iowa의 머리말을 쓴 Sidney Drell 교수(스탠포드大)는 "이 사건에서 정의(Justice)가 작동했다는 점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국가는 물론 해군에게도 행운이다"라고 평했다. 단기적으로는 안전 사고가 발생한 해군에게는 전력의 차질도 크고, 특히 잘못된 조사결과와 사실의 은폐를 위한 악행으로 인해 해군의 위상에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결국 진실은 밝혀진다'는 사실을 대내외에 천명함으로써 모든 미군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일반 국민들에게조차 국가는 괴물이 아니라 보호막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엇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Sandia 연구소의 2년여에 걸친 추가 조사 덕분에 사고로 사망한 피해자임에도 불구고 '동성연애자+대량 학살범'으로 오인받았던 수병은 마침내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다. 미 해군은 최종 조사 결과 발표시 "폭발 사고가 고의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Clayton의 가족에게 심심한 사과(sincere regrets)를 표명했으며, 사망한 모든 수병들의 가족들에게도 사과(apologies)했다. 빌리 조엘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라는 말이 군 사고에도 적용될 것이란 생각은 이번에 처음 해 봤다.
그러나, 반전은 항상 있는 모양이다. 미 해군은 끝까지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서는 확실히 인정하지 않았다. (동성연애자 수병 1명이 실연당한 후 자살폭탄테러를 벌인 것이었다는) 최초의 조사결과는 당시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는 식으로 옹호하고 넘어가는 한편, Sandia 연구소의 방대한 과학적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어떤 우발적 사고 역시 아니라며, 따라서 확실한 사고 원인은 알 수 없다며 애매하게 끝맺음을 한다.
결국 50년 이상된 오래된 고폭약 사용문제, 훈련과 교육에 대한 문제, 완벽히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유지보수 문제 등 사고를 야기했을 수 있는 모든 잠재적 원인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이 문제들은 모두 관련자들에 대한 책임론, 즉 징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브 스토리의 명대사 "Love means never have to say you're sorry."... 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 뱀다리 : 미국 해군이 이렇다고 해서 한국 해군도 이럴 것이라는 선입견은 갖지 마시길 바란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이미 수많은 군 의문사 사건에서 봤듯이 우리 군 역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미국에 뒤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천안함 사건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되풀이 되고 있다. 얼마의 비용이 투입되었는지조차 모른 채 진행된 합조단의 2개월여에 걸친 조사결과는 이미 큰 과학적 반론에 부딪혀 있고, 국민의 절반 정도는 국방부나 합조단의 결론을 믿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자칫 드레퓌스(Alfred Drefus) 사건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었던 19세기 말의 프랑스와 같이 되기 전에 우리도 제 3의 신뢰할 수 있는 기관에 의해 재차 과학적인 조사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IOWA함의 비극... 영화로도 만들어져
아이오와함의 비극은 A Glimpse of Hell 이라는 제목으로 2001년에 TV용 영화로 제작되기 했다. 이 제목은 Charles C. Thompson II의 원저 A Glimpse of Hell : The Explosion on the USS Iowa and its Cover-Up에서 가져 온 것이다. 부제에 나온 바와 같이 '아이오와함의 폭발과 그 은폐'에 초점을 맞춘 영화였다. Thompson은 이 책에 현역 장교들을 실명으로 거론하며 비판한 덕분에 당사자들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 참고 : 웃기는 건 국내에도 비디오 형태로 들어 왔었던 모양인데... '특명-네이비씰'이라고 전혀 쌩뚱맞는 제목을 붙였었다.
※ A Glimpse of Hell 영화 포스터 (우측은 한국식 포스터로 아파치 헬기와 네이비씰이 등장)
JSA 김훈 중위 사건 vs 아이오와함의 비극
미국은 수백억원의 비용과 2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하여 아이오와함의 비극에 대해 진실을 파악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해군이 끝내 '사고로 인한 폭발'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비용과 노력이 헛수고는 아니었다. 그 자신이 희생자이면서도 자칫 동성애자이자 자살폭탄테러를 벌인 것으로 오인받을 수 있었던 수병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이렇게 책과 영화를 통해 해군의 치부가 들어남으로써 좀더 투명하고 건강한 해군이 되는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방영된 당시 소대장 '김훈 중위' 사건 역시 아이오와함의 비극과 비슷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타살 동기나 증거를 찾을 수 없으니 자살이다" 라는 최초의 결론은 "사고로 인한 폭발이라는 물리적 증거를 찾지 못했으니 고의에 의한 것이다"라는 미국 해군의 아이오와함 조사결과와 너무나 판박이였다. 특히, "동성연애자의 자살 폭탄 테러"라는 식으로 언론에 흘리는 것 역시 김훈 중위가 부대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느니, 아버지 배경으로 엘리트 부대에 왔다느니 하는 거짓 인신공격도 똑같다. 비열함의 극치를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필자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사고 초기부터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김훈 중위의 머리를 관통한 베레티 M9 권총(15연발)도 필자가 근무하던 1990년에 처음 도입된 것이고 그 이전에는 45구경(7연발)을 사용했었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M9이 비교적 큰 권총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민간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작은 권총에 비해서 그런 것이지 군에서 사용하는 것 중에서는 그닥 큰 것이라고 하기 어렵고, 특히 이전의 45구경에 비하면 그립감도 좋고 반동도 작아 사용이 편리하다. 대신 9mm인 만큼 파괴력은 45구경에 비해 (당연히) 낮다.
중요한 것은 오른손으로 쐈으면 무조건 오른손에서 화약반응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과학까지 갈 것도 없고 상식이다. 머리 우측에서 뚫고 들어가 왼쪽으로 빠져 나온 총알은 오른손으로 권총을 쏴야만 발생 가능한 것인데,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서는 아무런 화약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갑을 끼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화약 반응은 왼손에서 나왔다. 이는 오른손이 무력화된 상태(예를 들어 팔을 뒤로 꺽인 상태)에서 왼손으로라도 총을 막으려 하다가 타살된 것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살로 몰고가는 것은 JFK 사건때 오스왈도의 총탄 1발이 지그재그로 날아 다니며 3명의 몸을 관통했다는 것만큼이나 말이 되지 않는다.
※ 이미지 출처 :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캡쳐
결국, 3차례에 걸치 재조사가 이루어졌지만 결국 김훈 중위 사건은 '규명 불명' 상태로 종결되었다. 즉, 군의문사 진상조사위에서는 (조직의 한계로 인해) '타살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다'는 정도까지만 규명하고 더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이 진상조사위의 활동기간 연장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오와함의 희생자들이 제3의 조직에 의해 과학적인 재조사를 벌인 끝에 2년 만에 명예를 회복한 것에 비하면 미흡하지만, 최소한 '자살도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 것만으로도 한국 사회에서는 큰 진전이었다며 자위해야 할 처지인 것이다.
※ 참고(1) - IOWA함, 대통령 태운 채 어뢰 맞을 뻔 하기도...
아이오와함은 1942년 8월 27일 진수되어 2차 세계대전에 투입되었는데, 이듬해인 1943년에는 당시 카이로 회담과 테헤란 회담이 열렸을 때 루즈벨트 대통령이 탑승하고 회담장소로 항해한 경력 때문에 '대통령함'으로 불리기도 했다.
※ 소아마비 환자였던 루즈벨트 대통령을 위해 아이오와함에 설치되었던 욕조 (출처 : 위키피디아)
1943년 11월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열릴 예정인 회담(테헤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플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국무장관(외무장관) 및 주요 군 장성들과 함게 아이오와함을 타고 이동하게 된다. 당시 대서양에는 독일 잠수함(U보트)가 활동중이었기 때문에 대통령함이자 기함인 아이오와함을 호위하기 위해 많은 전함들이 아이오와함을 둘러 싸고 있었다.
대통령이 탑승한 김에 해군은 자신들의 역량을 뽐내고 싶었는 모양이다. 루즈벨트가 참관하는 가운데 아이오와함에서는 대공 사격 훈련을 실시했다.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일종의 위력시범이었다. 하늘에 큰 풍선(기구)를 띄워 놓고 대공포로 쏴서 떨어트리는 시범을 보이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아이오와함에서 맞췄지만 일부는 윌리엄 D 포터라는 구축함(Destroyer, USS DD-579)이 맞춰 떨어트리기도 했다.
대공사격에 이어 구축함들은 아이오와함을 상대로 어뢰 발사 시뮬레이션 시범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윌리엄 D 포터에서 실수로 진짜 어뢰를 아이오와함을 향해 발사해 버리는 황당한 사고가 발생한다. 어뢰가 발사되자 윌리엄 D 포터함에서는 통신침묵(radio silence) 명령 때문에 라이트를 이용한 수신호를 보내 아이오와함에 경고를 보내려 했다. 그런데, 이게 어뢰 경고가 아니라 지원해 준다는 것으로 거꾸로 신호가 보내져 위험이 가중된다. 결국, 윌리엄 D 포터는 통신침묵을 깨고 어뢰 경고를 하게 되고 아이오와함은 전력을 다해 회피기동에 들어간다.
어뢰는 아이오와함이 발생시킨 파도에 부딪혀 폭파됨으로써 다행히 아이오와함은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자칫 대통령이 탄 기함이 아군에 의해 피격될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윌리엄 D 포터함은 이전에도 다른 함정의 옆구리를 긁고 지나가기도 하고, 실수로 폭뢰를 떨어트려 폭발하는 바람에 인근 함정들이 (독일 U-Boat 출현인 줄 알고) 비상을 걸게 하기도 했고, 수병이 파도에 휩쓸려 가는 사고를 당하기도 하는 등 억새게 재수없는 배였다. 기함에 어뢰를 발사한 것은 그 재수없음의 절정이었던 것이다.
※ USS William D Porter (출처 : 아래 링크의 블로그)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사건 자체가 외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가 15년 후인 1958년 마이애미 뉴스가 보도하면서 알려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긴 전쟁중에 이런 실수가 알려 졌으면 사기저하에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아이오와함은 한국전 이후 주로 기함으로 활동하거나 훈련용으로 사용되다가 1958년에 대서양 예비함대로 편성되어 사실상 은퇴한다. 이렇게 예비용 함정으로 남아 있던 아이오와함은 냉전의 정점에 있었던 1982년 레이건 대통령은 더 많은 전함을 보유할 계획을 세운다. 이 노력의 일환으로 아이오와함은 2년에 걸친 대폭적인 업그레이드 수술을 받고 재가동된다.
하지만, 1989년의 포탑 폭발 사고 발생후 1년만에 다시 퇴역하게 된다. 50년이 넘은 낡은 배인데다 사고로 인한 피해도 컷고, 특히 소련이 붕괴되면서 더 이상 큰 비용이 드는 거대한 전함들이 많이 필요없게 된 것도 아이오와함을 퇴역시키게 된 계기가 된다.
이 은퇴한 아이오와함을 6.25 발발 60주년을 기념해 한국으로 들여와 안보교육용 활용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고 월간조선 2010년 5월호가 보도한 바 있다. 이 사업을 주도하는 사람은 김구 선생의 장손인 김진 회장으로 2005년에 트리니티 E&S(Education & Service)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6.25 관련 다큐 드라마 제작을 위해 해전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이미지 출처 : 월간조선 2010년 5월호
항공모함 만큼이나 큰 이 거대한 전함을 한국으로 가져와 어디다 어떻게 전시하려는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덩치가 장난이 아닌 만큼 국민들의 관심을 끌기는 충분하다고 보여 진다. 하지만,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는 사업비가 관광 수익만으로 충분히 확보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자칫 몇 년 후 거대한 고철덩어리로 전락하지는 않을지, (정부가 보조할 경우) 국민 세금만 낭비하는 것은 아닐지 우려가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아이디어만큼은 획기적인 것이니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아래 링크한 기사를 살펴 보시기 바란다.
1989년 4월19일, 미국 전함 아이오와함의 포탑이 폭발했다. 47명의 군인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후 2년6개월에 걸쳐 ‘진실게임’이 벌어졌다. 영국 서섹스대학에서 과학기술정책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석광훈 녹색연합 정책위원은 “군의 독단적 조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아이오와함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석 위원의 도움을 받아 아이오와함 사건의 전개 과정을 정리했다. 47명이 숨진 아이오와함 사건은 46명이 희생당한 천안함 사건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 1989년 4월19일 아이오와함 2번 포탑의 가운데 포가 폭발하고 있다. 사고 직후 아이오와함 장교들은 병사들의 ‘현장 청소’를 지휘하며 증거들을 치워버렸다. 이 사진은 사고 당시를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위키피디아
군은 증거를 보존하지 않았다
오전 8시31분, 세 개의 포탑에 정위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30분 뒤, 젊은 군인들은 사격 준비를 마쳤다. 1942년 취역한 낡은 배 아이오와함은 푸에르토리코 인근 해역에서 미 제2함대의 훈련에 참가하고 있었다.
9시33분, 1번 포탑이 사격했다. 그러나 재장전을 할 수 없었다. 규정에 따르자면 사격은 중단돼야 했다. 프레드 무살리 함장은 이를 무시했다. 함장은 2번 포탑에도 사격 명령을 내렸다. 1분여 뒤, 2번 포탑의 통신선을 타고 비명이 들렸다. “비상, 비상, 비상.” “이런 젠장, 화약이 불타고 있어.” 화급한 고함 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1989년 4월19일 오전 9시53분, 2번 포탑의 가운데 포가 폭발했다. 1,500도가 넘는 화염과 초속 610m로 날아간 파편, 그리고 장약 포장재에서 나온 유독가스가 군인들을 휘감았다. 2번 포탑에 있던 47명 모두 사망했다.
사고 직후, 아이오와함 장교들은 병사들의 ‘현장 청소’를 지휘했다.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2번 포탑의 안팎을 쓸고 닦았다. 손상된 각종 장비와 파편들은 바다에 던져 버렸다. 사고 다음날엔 2번 포탑 내부를 새로 페인트칠했다. 현장 사진은 찍지 않았다. 주검은 곧바로 수습돼, 헬기로 인근 해군기지까지 이송했다. 부서진 포탑을 제외하면 모든 증거가 치워진 상태로 아이오와함은 나흘 뒤 미국 남동부 노퍽 군항으로 돌아왔다. 군의 ‘현장 수습’은 사고 원인을 미궁에 빠뜨리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군은 ‘희생양’을 찾아 언론에 흘렸다
사고 당시, 아이오와함 근처에 있던 코럴시함에는 해군수사국 요원들이 타고 있었다. 군 관련 사건·사고 수사의 베테랑들이었지만 이들은 “아이오와함 사고(조사)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지시를 받았다. 대신 미 2함대 제독이 지명한 리처드 밀리건 해군 중장이 ‘비공식 초기 조사’를 맡았다. 이 분야에서 특별한 이력이 없던 밀리건 중장은 자신의 참모를 데리고 사고 다음날인 4월20일 아이오와함에 올랐다.
‘현장 청소’ 작업이 진행 중이었으나 비공식 조사단원들은 이를 막지 않았다. 1번 포탑을 지휘한 댄 마이어 대위가 “규정에 어긋난 화약을 과다하게 사용했다”고 증언했지만, 조사단은 이를 제지하고 그 발언을 진술 기록에서 지웠다. 조사단 가운데는 해군무기체계사령부의 조셉 미켈리 대위가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오와함에서 사용한 화약·포탄·대포·화약 포장재 등의 생산과 조달을 책임지고 있었다. 조사를 받아야 할 사람이 조사에 참여한 것이다.
대신 해군은 절대로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희생양을 골랐다. 5월 초부터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유력 언론이 병사 클레이턴 하트위그를 ‘용의자’로 지목하는 기사를 썼다. 하트위그는 2번 포탑에 있다 사망한 병사였다. 그가 다른 동료 병사와 동성애를 나눴는데, 군 지휘부가 이를 문제 삼자 불만을 품고 기폭장치를 들고 2번 포탑에 들어가 폭발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군 내부 ‘익명의 취재원’을 인용해 작성됐다. 이후 6주 동안 점점 더 선정적인 보도가 확산됐다.
군은 조사 주도권을 틀어쥐었다
밀리건 중장의 비공식 조사단은 ‘사전 정지’ 역할을 했다. 이들은 클레이턴 하트위그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다는 점을 아이오와함의 장교·병사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리며 압력을 넣었다. 5월 초, 미군은 비로소 해군조사단(NIS)에 공식 조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새로 구성된 해군조사단의 단장 역시 밀리건 중장이었다. 초기 조사의 ‘의도’를 그대로 관철하겠다는 뜻이었다.
해군조사단은 하트위그의 개인 사물함에서 <더러운 속임수의 완성>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내용 가운데는 기폭장치 제조법도 있었다. 조사단은 이 책이 하트위그의 ‘의도적 자폭’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군대 외부의 협조도 구했다. 조사단은 미연방수사국(FBI)에 “기폭장치에 의한 의도적 폭발인지”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FBI는 관련 자료를 분석한 뒤, “기폭장치에 의한 폭발이라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통보했다. 조사단의 ‘가설’을 뒤집을 만한 내용이었지만, 그 내용은 조사 보고서에 반영되지 않았다. 불리한 근거를 묵살해버린 것이다.
조사단은 7월28일 60쪽짜리 보고서를 해군사령부에 제출했다. 8월 말, 해군사령부는 “일반인들은 믿기 힘들지 모르겠으나, 하트위그가 자폭했다는 점은 사실에 기초한 논리적이고 명쾌한 분석으로 입증되고 있다”며 보고서를 승인했다. 사건 발생 5개월이 지난 1989년 9월7일, 밀리건 중장은 미국 펜타곤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한 달 뒤 해군은 아이오와함의 무살리 함장 등에게 지휘 소홀의 책임을 물어 ‘경고’ 처분을 내렸다. 47명이 사망했지만, 형사적 책임은 물론 인사상 불이익을 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군의 독단을 막은 것은 의회였다
‘군에 대한 시민 통제’의 원칙에 충실한 미 의회는 군 보고서를 신뢰하지 않았다. 미 상원 군사위원회는 1989년 11월 관련 청문회를 처음 열었다. 상원 군사위원회 의장은 민주당이 맡고 있었다. 그러나 청문회에는 훗날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될 존 매케인 등 공화당 의원들도 적극 참가했다. 의원들은 △장교·병사들의 훈련 상태 △화약의 종류 △화약 과다 사용 여부 △규정에 어긋난 사격 훈련 여부 △해군 조사 과정의 적합성 △해군 조사 보고서 결론의 근거 △조사 내용의 언론 유출 등에 대해 폭넓게 캐물었다.
청문회에는 미 2함대 제독과 조사단장은 물론 아이오와함 함장 및 부함장 등 주요 장교들이 모두 출석했다. 아이오와함에 승선했던 일반 병사들도 출석해 증언했다. 지휘관들은 하트위그의 ‘의도적 자폭’을 확신한다고 발언했지만, 동료 병사들은 하트위그가 자살할 이유가 없으며 “군 지휘부가 사건을 덮으려는 것 같다”는 의견을 밝혔다. 군 조사단 앞에서 입을 다물던 병사들이 의원들의 끈질긴 질의를 통해 비로소 속을 털어놓은 것이다. 미 상원 군사위원회는 1989년 11월부터 두 달 동안 6차례 이상 아이오와함 관련 청문회를 열었다.
“당신의 답변에는 비약이 있습니다. (군 조사 보고서에는) 과학적·기술적 설명이 없어요. 무기의 오작동을 입증할 근거도 없지만, (군이 주장하는) 의도적 폭발을 입증할 근거도 없잖아요.” 청문회 당시 민주당 아스핀 상원의원의 발언이다. 청문회를 진행하던 미 상원은 군 조사 보고서의 허술함을 발견하고, 1989년 12월 독자적 조사를 시작했다. 우선 미 회계감사원(GAO)에 군 조사 결과에 대한 ‘재검토’를 의뢰했다. 이와 별개로 폭발 원인을 규명할 공신력 있는 연구기관도 물색했다.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과학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미 의회는 미국 기술과학학회의 추천을 받아 국립 산디아 연구소에 특별조사를 맡겼다. 1949년 설립된 산디아 연구소는 핵무기 등의 안정성을 연구하는 기관이었다. 물리학 연구자인 리처드 슈워벨 박사를 비롯해 산디아 연구소 소속 과학자 40명이 조사팀을 구성했다. 이들은 이듬해 5월까지 450차례에 걸쳐 모형실험을 벌였다.
그 결과 ‘기폭장치에 의한 의도적인 폭발’이 아니라 ‘화약 과다 사용에 따른 폭발’의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미 상원에 통보한 산디아 조사팀은 ‘실제 환경’에서의 실험을 해군에 요청한 끝에 관철시켰다. 해군과 함께 벌인 공동 실험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비슷한 시기, 미 회계감사원도 해군이 사건 초기 각종 증거를 없애고 진술 기록을 조작한 사실을 밝혀냈다.
관련자 모두의 진술을 다시 듣고, 과학적·기술적 실험을 수백 차례 거듭해 진행된 조사 앞에서 결국 해군도 물러섰다. 산디아 연구소와 미 회계감사원이 미 상원 국방위원회에 각각 보고를 마친 직후인 1990년 6월, 미 해군은 2차 조사단을 구성했다. 1차 조사를 이끌었던 밀리건 중장은 제외됐고, 대신 산디아 조사팀이 합류했다.
▲ 군 사고의 경우, 군으로부터 독립된 의회의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5월24일 국회 천안함 침몰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서 박정이 민·군 합동조사단 공동단장이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진실을 밝히려면 집요하게 조사해야 한다
2,500만 달러를 투입해 17개월에 걸쳐 진행된 2차 조사 결과는 1991년 10월17일 공식 발표됐다. 2차 조사단은 “(1차 조사 때 사고 원인으로 제시됐던) ‘의도적 폭발’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나, 이번 사고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특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아울러 혐의자로 지목했던 하트위그의 유족에게 “깊은 유감”을 표시했다.
미 의회의 집요한 청문회, 회계감사원의 독립적 조사, 그리고 과학자들의 엄밀한 분석 등은 해군의 1차 조사 결과를 뒤집었다. 사건 초기 결정적 증거를 없애버린 탓에 사고 원인을 최종 규명하진 못했지만, 군 당국의 치부를 낱낱이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군 내부의 처벌 또는 문책은 없었으나, 관련자 대부분은 조사결과 발표 뒤 1~3년이 지나 스스로 퇴역했다. 해군은 ‘화약 과다 사용’이 사고 원인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후 아이오와함 등을 퇴역시키는 한편 화약 과다 사용도 엄격히 규제했다.
이 사건을 연구해온 석광훈 녹색연합 정책위원은 “당시 해군의 1차 조사에만 3개월이 걸렸고, 산디아 팀의 조사에 다시 6개월, 해군의 2차 조사에 다시 17개월이 걸렸다”며 “1개월 만에 조사를 끝낸 천안함 사건에 대한 체계적 검증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 국회는 뭐하나
산디아 조사팀을 이끌었던 슈워벨 박사는 1999년 펴낸 책 <아이오와함의 폭발>에서 “군 사고의 경우, 군으로부터 독립된 기관의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적었다. 체계적 검증의 권능은 의회에서 나온다. 그러나 국회 천안함 진상조사 특위는 지금까지 딱 두 차례 열렸다. 지난 5월24일 처음 열렸고, 감사원의 천안함 감사 결과 발표 직후인 6월11일 다시 열렸다. 민주당이 특위 소집을 요구했으나 한나라당 의원들이 집단 불참해 무산된 경우도 한 차례 있다.
특위에 참가한 최문순 민주당 의원은 “일단 특위 차원에서 생존자 면담을 비롯한 조사를 진행하고,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국정조사를 통해 전면적인 재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도 여러 의혹을 국회 차원에서 규명하려는 열의가 적다. 군에 대한 ‘시민통제’라는 국회의 권능과 의무를 스스로 접고 있는 형국이다. 국회를 우습게 아는 군의 자세도 문제다. 민주당 관계자는 “군이 특위가 요구하는 자료의 90% 이상을 내놓지 않아서 특위 활동에 어려움이 크다”고 토로했다.
조작을 밝힌 과학의 힘 검출 물질 분석으로 ‘의도적 폭발’설 뒤집어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을 치른 아이오와함은 1958년 이후 ‘예비 전력’으로 분류돼 사실상 퇴역했지만, 레이건의 군비증강 정책에 따라 1984년 다시 상시 전력으로 배치됐다. 노후한 배는 함포의 전기시설, 유압 시스템, 장약 운반시설 등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그러나 미 제2함대 훈련에서 ‘성과’를 보여주고 싶었던 아이오와함 함장은 함포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장약 분량과 포탄 중량을 바꿔 탑재했다.
사고 발생 뒤, 미 해군은 2번 포탑에서 사망한 병사 클레이턴 하트위그가 ‘의도적으로’ 화학 기폭장치를 장약 사이에 끼워넣어 폭발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해군 조사단이 제시한 증거는 2번 포탑 포신에서 검출된 폴리에틸렌 테트라프탈산, 글리콜, 칼슘, 염소 등의 물질이었다. 보통의 포신에서 발견되지 않는 이런 폭발 물질의 존재가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폭장치를 만들었음을 입증한다는 논리였다.
산디아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이를 뒤집었다. 우선 화학 기폭장치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장 유력한 물질이던 폴리에틸렌 테트라프탈산(일종의 플라스틱)이 실제로는 2번 포탑 잔해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해군 또는 해군 조사단이 ‘없는 물질’을 있는 것처럼 보고서에 써놓은 것이다. 그 밖에 글리콜은 탄피가 잘 빠져나오게 하려고 해군이 평상시에도 사용하는 윤활유의 한 성분이고, 칼슘·염소 등도 아이오와함의 다른 포신에서 똑같이 검출된다는 점을 밝혀냈다. 하트위그가 일부러 삽입한 기폭장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아이오와함 포탑에 있던 물질이라는 이야기다. 이를 통해 산디아 연구소 조사팀은 “화학 기폭장치를 썼다”는 해군의 주장을 뒤집었다.
아울러 50시간에 걸친 슈퍼컴퓨터 분석 결과, 2번 포탑에 사용된 장약의 양이 해군 조사단의 보고서보다 8㎝ 더 많은 61㎝(포에 들어가는 장약의 분량은 그 두께로 측정한다)였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를 바탕으로 산디아 팀은 아이오와함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장약을 실제 포탑보다 작은 모형에 적재한 뒤 450차례에 걸쳐 충격실험을 했고, 과다 적재된 장약이 폭발로 이어진다는 점을 입증했다.
해군은 이런 과학적 근거에 대해 “터무니없다”고 반발했다. 산디아 연구소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2번 포탑과 동일한 조건과 크기의 실제 모형으로 공동 실험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해군은 이 역시 거부했다. 결국 산디아 팀은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 이 사실을 보고했고, 의회가 직접 강제해 공동 조사를 성사시켰다. 해군이 참가한 가운데 2번 포탑과 동일한 종류의 포신에 동일한 장약을 실어 사격 실험을 했더니, 18번째 사격 때 주변의 모든 장비를 날려버리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 실험 직후 해군은 2차 조사단을 새로 구성했다.
해군은 2차 조사에서 같은 실험을 다시 했는데, 실제보다 장약을 줄이거나 충격을 덜 주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조작을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장약이 조금 줄거나 충격이 조금 덜해도 충분히 폭발이 일어난다는 점이 추가로 입증됐다. 그럼에도 해군은 최종 조사결과 발표 때 과도한 장약 적재가 폭발의 원인이라는 점을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았다. 해군의 주장을 그저 ‘반증’하는 것조차 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현재까지의 상황을 빗대어 얘기하자면, 머리에 상처가 있는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그냥 넘어졌는지, 맞았는지 어떻게 죽었나 알지 못하다가 우연히(?) 시체 주변에서 피묻은 쇠망치를 발견 소유주인 목수를 살해자로 지명한다. 목수를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난리를 쳤는데 시체를 부검하니 상처가 망치에 맞은 것 같지는 않고 더구나 결정적으로 쇠망치에 묻어있는 피의 혈액형이 피해자와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목수를 붙잡은 형사는 아직도 쇠망치가 거기 현장에 있었고 그 피가 그 피나 이 피나 다를 게 없이 똑같은 붉은색이니 목수가 범인이 맞다고 우기며 재판해서 벌주겠다고 버티고 있는 꼴...
첫댓글 아이오와 평원에는 바람이 불고... 서해안에서 일어난 바람은 어디로 가려나...
현재까지의 상황을 빗대어 얘기하자면, 머리에 상처가 있는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그냥 넘어졌는지, 맞았는지 어떻게 죽었나 알지 못하다가 우연히(?) 시체 주변에서 피묻은 쇠망치를 발견 소유주인 목수를 살해자로 지명한다. 목수를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난리를 쳤는데 시체를 부검하니 상처가 망치에 맞은 것 같지는 않고 더구나 결정적으로 쇠망치에 묻어있는 피의 혈액형이 피해자와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목수를 붙잡은 형사는 아직도 쇠망치가 거기 현장에 있었고 그 피가 그 피나 이 피나 다를 게 없이 똑같은 붉은색이니 목수가 범인이 맞다고 우기며 재판해서 벌주겠다고 버티고 있는 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