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도량 ‘천년 집들이’
현대적 열린 사찰로 거듭나려는 ‘제2의 창건’… 불자·환경을 생각하는 건축물로 재탄생 채비

경남 합천 가야산 서남쪽에 꽃술처럼 박혀 600년 가까이 국보 팔만대장경을 품어온 절 해인사. 지난해
12월28일 해인사로 오르는 길 입구엔 ‘신행문화
도량 건립 설계경기 현장설명회’를 알리는 펼침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한국 불교의 맥을 이어온 법보사찰 해인사가 개산 1200년 만에 일반 불자들을 위한 ‘열린 사찰’로 거듭나는 변화의 장면이었다.
해인사(주지 세민)쪽은 장경판전이 있는 기존 해인사는 스님들만을 위한 정진 공간으로 일반 불자의
출입을 제한하는 대신, 현재 성보박물관이 있는 옛
해인초등학교 터에 기도·염불·참선·수행·취침을 할 수 있는 다목적 공간을 건립할 예정이다. 새로운 사찰의 모범을 널리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난해 말 설계경기 공모를 발표했다. 모두 1·2차로 진행될 이 설계경기는 우선 내년 2월28일까지 일반 공모를 통해 5~6점을 뽑고, 두 번째 단계에서 지명설계를 통해 당선작
1점을 가려내게 된다.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 심사위원도 국내 건축전문가, 외국 전문가, 스님 등 모두 7명을 뽑아 맡긴다.
대규모 프로젝트로 설계경기 공모

한국 불교의 맥을 이어온 해인사가
‘제2의 창건’을 준비하고 있다. 기존의 도량은 스님들의 정진공간으로
쓰이며 옛 해인초등학교 터(위 사진
동그라미 부분)에 다목적 사찰이 들어갈 예정이다.
해인사는 신라 하대인 802년 애장왕
때 왕실 지원으로 지어진 이래 수백년 동안 중창을 거듭해왔다. 조선 태조 때 고려대장경판이 봉안된 이후로
성종 때는 판전 30칸을 비롯해 160칸의 건물이 새로 지어졌다. 하지만 이런 중창 불사가 법보종찰로서의 현재
모습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었다면, 앞으로 들어설 새 도량은 일반인과 청소년들에게
명상과 수련을 통해 현대적 불교 체험을 가능케 하는 ‘제2의 창건’이 될 예정이다.
공사비가 200억~300억원 정도 되는 규모 있는 프로젝트인데다 유서 깊은 사찰에 새
절을 더한다는 의미가 깊어 설계경기는 건축계의 뜨거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현장설명회에 앞서 마감한 공모 결과 무려 건축설계사무소 85곳이 참가신청서를 냈다. 현장설명회에선 응모한 건축가들이 연말의 바쁜 일정을 다 접고 가야산으로 달려와 터를 둘러보며 의견을 나눴다. 설명회에 이어 진행된 심포지엄에선 터의 해석을 둘러싸고 날이 저물도록 열띤 질의와 토론이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해인사가 설계경기를 통해 새 도량을 짓기로 전격적인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해인사는 1990년대 초부터 새로운 신행·포교 복지문화단지 조성을
추진해왔다. 이는 법당으로 쓰일 만불전, 회관 용도인 영빈관, 박물관 등을 포함한 대규모 계획이었다. 2001년 국가에서 지원받은 100억원을 들여 완공한 성보박물관 역시
이 계획에 따라 지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마스터플랜은 2001년 여름 벌어진 ‘청동좌불 논란’으로 전면 재검토에 들어간다. 당시 해인사는 60억여원을 들여 높이 43m에 이르는 청동좌불을 세우는 계획을 발표했다. 대불 조성사업 역시 신행·포교 복지문화단지 사업의 한 부분이었는데 아파트 15층 높이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놓고 비판의 목소리가 들끓어올랐고, 이는 폭력사태로까지 번졌다. 실상사 수경스님이
교계 언론에 청동불 건립을 신랄하게 비판한 글을 싣자 해인사에서 하안거 중이던 선승들이 전세버스를 타고 수경스님의 거처에 몰려가 기물을 파손한 것이다. 폭력 행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처음 문제를 제기한 실상사쪽 스님들이 21일
동안 삼칠일 단식기도를 마친 다음에 해인사 스님들도 8일간 참회 용맹정진 기도를 마쳤다. 대형 물량 위주의 불사에 대한 비판과 진단도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해인사 대불 조성 논쟁은 여러 기능들이 어수선하게 뒤섞여 있는 현재 사찰 공간의 문제를 뒤집어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청동대불 계획은 설계경기 공모와 함께 아예 백지화됐고, 불상은 법당 안에 두는 실내불로 조성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군림하는 사찰에서 대중의 공간으로

건축계는 해인사 새 도량 건립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28일 열린 신행문화 도량 건립 관련
심포지엄 모습. (이주현 기자)
지난해 여름 해인사는 스님들과 건축가 정기용(기용건축 대표)씨, 건축학자 이상해 교수(성균관대) 등으로 구성된 ‘해인사 신행문화 도량 건립
진행위원회’를 구성해 그동안의 과정을 다시 돌아봤다. 주지스님을 비롯해 진행위원들은 지난해 11~12월
두 차례에 걸쳐 ‘신성한 장소로의
여행’이란 주제로 일본·유럽의 수도원·묘지·사찰을 돌아보는 답사도 다녀왔다.
프랑스 토로네 수도원에선 스님들이 염불을 외며 그 소리의 잔향이 어떻게 공간을 채우는지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일본 교토 호류지사를 방문했을 땐 시끄러운 상가 옆에
절이 자리잡고 있는데도 그 모습이 낯설지 않고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눈을 높인’ 진행위원들은 새 사찰에 대한
전제조건들에 대해 의견을 정리했다. △사찰 개혁과 아울러 불교 사찰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훼손된 자연을 회복하고 치유해 자연이 주인이고 건물은 손님으로 머물게 한다 △일반인들이 단순히 관광·흥밋거리로 불교를 대하지 않고, 포교·참선 등을
통해 마음을 맑게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등이었다. 설계경기 코디네이터인 원철 스님(월간 <해인> 편집장)은 “앞으로 지어질 신행문화 도량은 옛 절집의 모습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21세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어야 하고, 환경에 거슬리지 않는 집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기용씨는 “새 도량 건립은 무분별한 신축·증축을 일삼으며 자연 위에 군림해온 요즘 사찰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될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도심 사찰의 건축적 대안으로
평가받는 능인선원은 절집의
고정관념을 깨뜨렸다(좌). 우물천장에서 부드러운 빛이 쏟아져내리는 도피안사의 향적당 내부 모습(우).
2005년 완공을 목표로 한 새
도량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불단과 1천명이 동시에 예불할 수 있는 실내공간, 참선·염불 등 일반 불자들이 불교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 도서실, 회의실, 전시실을 비롯해 스님과 일반 불자가 머무르고 취침할 수 있는 공간을 갖출 예정이다. 이를 위해 성보박물관만 남기고 현재 해인사 입구에 서서 시야를 가로막는 3층짜리 쇼핑센터 등은 대부분
철거할 계획이다. 이런 건물군은 196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의 유명 사찰을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절 밑 마을들을 옮기면서 생겨난 것들이다.
과학성 살린 감동의 건축물 기대
앞으로 새 절이 지어지면, 본래 해인사 큰절은 사람들의 어지러운 발길 속에서 물러나게 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도 고요한 안식 속에서 또
다른 천년을 맞는 셈이다. 장경판전이 당대에 가졌던 과학성과 합리성을 오늘날 21세기에 지어질 새 도량이 계승해낼 것인가, 성스러움을 찾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건축물이 탄생할 것인가. 해인사 새 도량에 거는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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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형 ‘사찰순례’
우리나라에서 산에 오르는 것은 절을 찾는 것과 같다. 웬만한 절들은 모두 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인들의 일상 속에 스며 있는 사찰은, 우리에겐 아직
낯설다.
1997년 건축가협회상을 받은 능인선원(황일인 작·일건 건축사사무소)은 한옥에 지붕을 이고 있는 절집의 고정관념을 깨고 도심 사찰의 대안을 모색한 시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서울 강남구 포이동에 자리잡고 있는 능인선원은 구룡산을 뒷배경으로 삼은 채 양재대로와 바로 맞닿아 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1천명의 신도가 모이는 대법당을 지하 2층으로 넣고 도서관·교육실·유치원·숙소 등은 지상으로 올린 점이다. 이는 건폐율이
20%밖에 안 되는 악조건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 선택이었는데, 건축가는 이를 기단과 마당이라는 전통 사찰건축의 중요 키워드로 풀어냈다. 화강석으로 치장하고 지하층을 품은 기단은 안마당의 벽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경사지가 많은 우리나라 지형에서 궁궐·사찰을 비롯한 대형 건축물은 물론 개인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기단은 대지의 높이 차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애용돼왔다. 또한 마당은 건물을 주변 자연과 조화시키며 건물 안팎을 이어준다.
설계를 의뢰한 지광 스님이 기자 출신으로 현실적 감각을 견지해서인지, 능인선원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내세우는 사회복지 시설과 불교의 교리를 강의하는 법당이
주요 기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은둔자의 공간이 아니라 생활 속의 불교로 자리잡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기 안성시 죽산면 용설리에 있는 도피안사가 2000년 완공한 향적당은 도심 사찰은
아니지만, 이 시대가 요구하는 합리적 사찰 건축의 모델을 보여준다.
보통 울긋불긋한 단청칠을 한 기와집 일색인 절집에서 이 건물은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건축가 이일훈씨는 무엇보다 “돈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옥에 기와지붕을 올리려면 인력과 목재 비용이 워낙 크게 들고 공사기간도 길어진다. 콘크리트로 짓는 것과 비교하면 많게는 10배까지도 차이난다.”
하지만 돈이 적게 들었다고 건축적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종무소·공양실·청소년 학습실·선방 등 다용도 기능을 갖춘 향적당은 진입부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향적당 입구는 기둥으로 띄운 선방 아래 빈 공간을 거쳐 드나들도록 돼 있는데 ‘활공루’라 불리는 이 빈 공간은 봄부터 가을까지 작은 모임의 공간이 된다. 기둥엔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 교수(홍익대)가 디자인한 주련이 달려 있다. ‘선지식들 함께 모여
동지를 삼고’ 등 쉽고 단순한 한글 주련 속엔 바다와 같은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활공루에서 2층 선방으로 올라가는 길은 넓어졌다 좁아졌다 환해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며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을 기대감으로 이끈다.
선방에 들어서면 격자로 짜인 우물천장에서 은근한 조명이 쏟아져내리며 마음을 편안한 빛으로 채운다. 향적당 순례의 끝은 옥상에서 마감한다. 옥상에 올라 계단 꼭대기를
쳐다보면 마치 성당의 종처럼 풍경이 매달려 있다. 하늘의 문, 도솔천이라 불리는 곳인데, 바람이 울려주는 소리를 듣는 장소다.
이일훈씨는 “우리가 오늘날 ‘문화재’로 귀하게 떠받드는 고건축들은 따지고 보면
당대엔 혁신과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마찬가지로 옛 건축의 전통을 되살리는 노력 또한 전통 건축의 형태와 장식을 그대로 본뜨는 것이 아니다. 그 공간적 해석을 새롭게
변용시키는 데 답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