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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 발췌 전문/장인수 - 2008.3.18
하나, 앞서서
정신세계사에서 1986년에 발행한 <桓檀古記>에서 역자(譯者)는「하늘을 桓이라 한다(天曰桓)」라는 고어를 들어 桓은 환으로 읽지 않고 한으로 읽어야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한(桓)이 곧 <하늘>의 준말이기 때문에 <한>으로 읽음이 옳다고 본문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은데, 솔직히 <한>으로 읽음으로써 오는 혼란스러움이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환이든 한이든 간에 난 이 한단고기의 내용을 발췌해보고자 한다. 한단고기의 원본은 소실됐다 한다. 필사본을 가지고 번역. 주해함으로 인해 잘못된 부분도 여럿 있을 것이다. 글자 몇 개 잘못되었다고, 내용의 일부 가 누락되었다고, 기타 등등의 이유로 이 책이 위서(僞書)니 조작이니의 의견은 싹 무시하기로 한다. 내용의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게 아니고 도대체 이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기에 말들이 그리 많은가를 알아보고자 함이다.
내가 <한단고기>를 처음 만난 것은 공교롭게도 정신세계사가 <한단고기>를 처음 펴낸 1986년의 일이다. 교양 과목으로 국사를 듣던 중 강사의 입에서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역사 얘기를 들으며 조금은 황당했던 기억이 나고 그 얘기의 근거로 제시한 책이 <한단고기>이었다. 그 책을 최근에까지 20년 넘게 간직하고 있었음에도 처음 잠깐 들춰본 걸 제외하면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고 손대본 적도 없이 가끔 언론으로만 접했을 뿐이었다. 이 책을 한 마디로 평한다면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책이라는 것이다. 맞다 안 맞다의 논란이 끊임없이 제시되고 있지만 이 책을 번역. 주해한 임승국 교수가 책머리에 밝혔듯이 결론은 독자의 몫이라 했으니 알아서 소화할 일이다. 1986년 초판 이후로 2004년 54쇄까지 나왔으니 그 열기를 짐작할 만하다. 이 책을 정리함에도 선뜻 망설여진다. 이해하기 어렵고 생소한 용어도 많으며 일단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럼에도 손을 댐은 내 못된 버릇 탓이리라. 최대한 사견 없이 내용만 발췌해본다. 항설(巷說)에 이 한단고기가 한문원문이 아닌 가지마 노보루(鹿島昇)의 일역판(日譯版)을 번역했다는 말도 있지만 이 또한 염두에 두지 않기로 한다.
이 책은 삼성기(三聖記) 상. 하와 단군세기(檀君世記), 북부여기(北夫餘記) 그리고 태백일사(太白逸史)의 네 가지 사서(史書) 다섯 권을 1911년에 계연수가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으로 그 당시에는 30부만 영인 인쇄하였다 한다. 들어있는 각기 네 권의 저자는 다르고, 편찬자 계연수는 경신년(1980)에 이 책을 공개하도록 부탁하였다고 하는데 70년이 지나 공개토록 한 것은 일본에게 숨기고 언젠가는 독립한 후에 공개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본문 마지막에 실린 편집자 후기를 보면 우리 자신이 자기비하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을 찾고자 하는 내적 동기가 무르익었을 때 공개하려는 의도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계연수가 편집한 <환단고기(원문임으로 환단고기라 한다)>를 가지고 있던 이유립은 이런 말을 직접 한 적이 없다 하니 그 진실여부는 모를 일이다. 그리고 환단고기 원본인 네 권의 책과 계연수의 환단고기는 유실되어 없고 지금은 다만 1949년 오형기라는 사람이 이유립의 지시로 필사한 필사본만이 있을 뿐이다. 책머리에서 역자는 책을 해제하면서 한반도만이 우리의 강역이라는 반도사관과 스스로 강국임을 포기하고 주체성을 상실한 식민사관을 버리고 우리 역사에 대한 주체의식을 되찾고자함에 이 책의 목적으로 두었다 강조했다.
한 예로, 우리는 임금을 왕이라 말해왔는데 왕이란 칭호는 중국이 제후들에게나 사용하던 것으로 이는 우리 스스로 제후 나라의 백성이라 인정하는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잘못된 칭호라 하였으며, 늘 우리의 귀에 익숙한 발해란 이름도 본명인 대진국(大震國)으로 돌아가야 하며, 엄연히 고려시대까지 칭제건원(稱帝建元: 우리나라도 왕을 황제라 칭하고 중국 연호가 아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하였고, 이 책 내용의 진위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라도 내팽개치지 말고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하였다. 이유나 과정이 어찌하였든 간에 우리는 각 권의 내용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우선은 맨 처음에 실린 삼성기(三聖記)다.
둘, 발췌에 들어서
1. 삼성기(三聖記)
제목 그대로「세 개의 성스런 기록」이다. 한국시대, 신시시대, 단군조선시대의 기록.
삼성기 상권은 신라의 승려 안함로(安含老)가 지은 것으로 한국(桓國)의 건국과 고구려 건국까지의 간단한 기록이 적혀있고, 하권은 원동중(元童仲)이 지은 것으로 우리 민족의 시발점인 한국(桓國. 하느님 나라라는 뜻)시대의 한임(桓因)으로부터 7세 단임(檀因)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神市)시대의 한웅(桓雄)으로부터 18세 단웅(檀雄)까지 1565년의 역사를 압축해놓은 것으로 하권엔 신시역대기가 덧붙여 있다.
⊙ 한임(桓因): 본문 26쪽 주해에서, 역자(譯者)는 桓因을 환인으로 읽지 말고 반드시 한임 또는 한님으
로 읽을 것을 강조 했는데 이는 한님이 하느님의 호칭으로 우리 민족 고유의 신칭(神稱)
이기 때문이다 했다.
⊙ 신시(神市): 본문에 따르면,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
려오시니 이 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하였으며,
신시개천의 주인공은 한웅이지 결코 단군이 아니며, 따라서 역자는 개천절의 주인은
당연히 한웅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단기(檀紀). 개천(開天). 한기(桓紀):
356쪽을 보면, 역자는 단군은 결코 우리 민족의 시조가 될 수 없다 하였다. 왜냐하면 단군 이전의 우리 역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단군은 단지 단군조선(고조선)의 시조일 뿐이라 한다. 그래서 단기 말고도 개천과 한기를 제시하는데 계산법은 단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서기에다 2333을 더하면 되고 개천은 단기에 신시시대의 1565를 더한 후 1을 뺀다. 그리고 한기는 개천에 한국시대인 3301을 더한 후 1을 빼서 셈한다. 즉, 올해 2008년은
단기(檀紀): 서기 2008+2333= 4341년
개천(開天): 단기 4341+1561-1= 5901년
한기(桓紀): 개천 5901+3301-1= 9201년이 된다.
삼성기 상편을 정리해보면,
우리 한(桓)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에 한 신이 있어 시백력(斯白力: 시베리아)¹의 하늘에 홀로 변화한 신이 되어 만물을 낳았는데, 어느 날인가 동녀동남(童女童男) 800이 흑수(黑水: 흑룡강) 백산(白山: 백두산)의 땅에 내려왔으니 그들에게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 익혀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고, 이곳을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르켜 천제한님(天帝桓因) 또는 안파견(安巴堅: 중국 발음으로 <안파첸>인 바 우리 말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말로 해석)이라 하였다. 한님은 일곱 대²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으며 뒤에 계속 한웅씨가 내려와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天坪: 백두산 정상의 어떤 땅)에 마련하시고 그곳을 청구(靑邱: 한반도가 아닌 중원中原 대륙 안에 있는 개념으로의 청구)로 정했다. 또 신시(神市)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倍達: 밝땅의 겨레)이라 불렀으며 웅씨(熊氏)³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았다.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治尤天王: 동방의 군신軍神으로, 신시 14세인 자오지한웅慈烏支桓雄을 말함. 붉은 악마 서포터스의 심벌)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⁴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하였다.
1. 시백력(斯白力): 우리 역사의 시발(始發)을 백두산이 아닌 시베리아로 보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2. 7세(世) 한님들: 한님, 혁서(赫胥) 한님, 고시리(古是利) 한님, 주우양(朱于襄) 한님, 석제임(釋提壬)
한님, 구을리(邱乙利) 한님, 지위리(智爲利) 한님. 역자는 이 일곱 분의 한님들의
이름과 함께 이 한국시대의 기간 3301년을 반드시 기억할 것을 강조한다.
3. 웅씨(熊氏)의 여인: <삼성기 상>의 저자 안함로는 아마도 웅녀라는 말을 피하기 위해 웅씨의 여인으
로 표현 한 듯하나 이는 그의 과오라고 역자는 지적한다. 물론 한웅의 배우자를 곰
으로 쓰기 황송해서인 듯하나 정작 곰녀 즉 웅녀가 정당하니 이는 한웅연대엔 씨
성제도가 생기기 전이니 웅씨의 여인이라 함은 날조된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19쪽 하단)
또한, 우리의 옛글에서 단군 탄생에 관한 글 중 웅녀를 「암콤」이라는 짐승으로
해석한 것은 곰처럼 미련한 해석이라고 비난했다. 단군의 기사가 쓰여지던 때는
한글이라는 표현 수단이 없을 때이므로 웅녀라는 한자를 뜻글자로 해석할 것이 아
니라 곰녀(원문에는 아래아를 써서 ㄱ.ㅁ녀라 했음)라는 소리글자로 읽어야 하는
데, ㄱ.ㅁ이라는 말은 우리 고대어에서 지신(地神)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라 한
다. (363쪽 하단)
4. 18세 한웅들: (삼성기 하권에 실린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
세(世) | 이름 | 재위 기간/사신 나이 |
1 | 한웅천왕/거발한(居發桓) | 94/120 |
2 | 거불리(居佛理)한웅 | 86/102 |
3 | 우야고(右耶古)한웅 | 99/135 |
4 | 모사라(慕士羅)한웅 | 107/129 |
5 | 태우의(太虞儀)한웅 | 93/115 |
6 | 다의발(多儀發)한웅 | 98/110 |
7 | 거련(居連)한웅 | 81/140 |
8 | 안부련(安夫連)한웅 | 73/94 |
9 | 양운(養雲)한웅 | 96/139 |
10 | 갈고(葛古)한웅 또는 독로한(瀆盧韓) | 100/125 |
11 | 거야발(居耶發)한웅 | 92/149 |
12 | 주무신(州武愼)한웅 | 105/123 |
13 | 사와라(斯瓦羅)한웅 | 67/100 |
14 | 자오지(慈烏支)한웅. 세상 은 치우천왕이라 한다 | 109/151 |
15 | 치액특(蚩額特)한웅 | 89/118 |
16 | 축다리(祝多利)한웅 | 56/99 |
17 | 혁다세(赫多世)한웅 | 72/97 |
18 | 거불단(居弗檀)한웅 또는 단웅(檀雄) | 48/82 |
뒤에 신인왕검(神人王儉)께서 불함산(하얼빈 남쪽의 완달산)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셔서 백성들의 신망을 두터히 받아 제왕으로 섬기니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오던 오랜 법을 되찾고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단군왕검은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케 하였고, 성조(成造)에게 궁실을 짓게 하고, 고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臣智)에게 명하게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那乙)에게는 호적 관리를, 희(羲)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尤)에겐 군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菲西岬:하르빈. 만주 하얼빈)의 하백녀(河伯女: 수신水神)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淳厖)의 다스림¹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병진(B.C 425)년,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고치고 백악(白岳)으로부터 장당경(藏唐京. 황해도 구월산 아래)으로 옮겼는데 단군왕검은 무진(B.C 2333)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世)를 전하니 그 햇수가 2096년²을 헤아렸다.
1. 순방의 다스림: 인정이 두터운 것을 순방이라 하니, 이는 곧 태평성대를 누렸던 요순의 정치시대를
뜻한다.
2. B.C 2333년으로부터 2096년이라함은 B.C 237년인 47세 단군 고열가(古列加)의 재위 58년까지이고,
이후는 시조 단군 해모수(解慕漱)로 이어지는 북부여시대이다.
임술(BC,239)년 진나라 시황(始皇. B.C 246-206)때 신인이신 대해모수(大解慕漱)께서 웅심산에서 일어났다(군대를 일으켰다).
정미(BC,194)년 한나라 혜제(惠帝. B.C 195~188)때 연나라의 추장이었던 위만(衛滿)이 은근히 서쪽 변두리 땅의 한 구석에 스며들었는데 번한(番韓)의 준(準)¹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다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했다. 계유(BC,108)년 한나라의 무제(武帝. B.C 141~87)때에 한나라가 군대를 움직여 우거(右渠)를 멸망시켰다²(고조선이 망했다). 이후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高豆莫汗: 북부여 5세 단군)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이라고 했다.
계해(BC,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高鄒牟: 동명성왕. 즉, 주몽)가 북부여에서 일어났다. 단군의 옛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 고구려 말로 옛 땅을 되찾다의 뜻)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1. 번한의 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준왕(準王 혹은 애왕哀王. 기준箕準이란 이름으로 더욱 알려져 있
다). 여기서는 많은 부분 이해하기 어렵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이 준왕을 고조선 마지막
왕으로 기술하는데 이 준왕의 재위기간은 위만에게 밀려 마한땅으로 달아난 B.C 194년까
지다. 그래놓고 고조선 멸망은 B.C 108년, 우거왕(右渠王. 실지 고조선 마지막 왕)이 한나
라에게 패망한 때로 하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건가? (지금 이
부분에서만 세 시간 넘게 자료검색 하고 있다.)
어쨌든 준왕이 마지막 왕이 아닌 것은 틀림없는 걸로 보이고 또한 기자조선은 여러 근거
로 인하여 이 한단고기에서 뿐만 아니라 이미 가공의 허위 왕조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번한이란, 단군은 영토를 삼한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그 중 하나이다. 참고로
삼한이란 신한(辰韓), 번한(番韓), 막한(莫韓)을 뜻한다고 단재(신채호)의 사학은 주장한
다. 이 삼한은 본문 중 태백일사 제4편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에서의 삼조선(진조
선, 막조선, 번조선)에 해당된다.
2. 한나라가 우거를 죽이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한사군 설치라는 우리에겐 치욕적인 기록이 있는데,
최근 이 한사군이라는 것도 위조라는 학설이 대두되고 있다. 이 책에서도 역자는 한 무제의 군대가
고조선을 멸한 게 아니고 번한 유목민 조선족 장수인 최(最)가 우거를 죽이고, 우거가 죽자 다시 반
항하던 성기(成己)를 죽였는데 이 일의 주역은 모두 (자기 나라를 팔아먹은) 조선족이었다 한다. 그
래서 육해 양군을 보내고도 고조선을 멸하지 못하자 출전했던 양군의 사령관인 순체와 양복(楊僕)을
기시(棄市) 즉 사형으로 다스리는 것으로 한무제가 그 욕구불만을 폭발시켰음을 사마천의 <사기(史
記)> 조선열전편에서 극명히 보여준다. <사기>가 저술된 이백 년이 지난 다음 발간된 <한서(漢書)>
에서야 비로소 한사군의 명칭이 기록되었는데, 이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우리의 강역을 축소하고 왜
곡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허구라는 것이다.
♣ 우리의 역사를 단군조선부터 보는 근거는 중국 25사의 하나인 위서(魏書)의 내용을 인용한 <삼국유사>에 기록된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딸랑 이 24자가 전부란다.
<한단고기>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에 풍부한 자료가 있음에도 정사(正史)의 기록이 아니므로 신빙성이 없다 배척하는 것은 중국 정사의 내용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일부러 무시하는 사대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이다.(357쪽)
원동중이 지은 삼성기 하편의 시작은,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 한다. 처음 아만(阿蔓)과 서로 만난 곳은 아이사타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한(九桓)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로 시작된다.
여기서 나반과 아만은 서양문화에서의 아담과 이브에 맞먹는 한국사의 최초 남녀 이름이고 아이사타는 바이칼 호 부근의 어떤 땅이 아닐까 비정(比正혹은 比定: 비교하여 정의함)한다 하여 혹여 <아라랏다>산이라고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지 마라 했다. 그리고, 구한(九桓)은 중국<25사>에서 구이(九夷)라 표현한 민족으로 우리 민족의 옛 조상들을 가르키는 말이다.
옛글에 말한다.
'파나류산(불함산. 즉, 하얼빈 남쪽의 완달산) 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天海: 바이칼호, 혹은 북해)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 리이니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혹은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혹은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裨國 혹은, 시위국豕韋國 또는 통고사국通古斯國), 수밀이국(須密爾國)¹이니, 합해서 12국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北海)라 한다. 7세에 전하여 역년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라 하였고, 나머지 뒷부분은 한웅들의 활약상이 그려져 있다.
1. 수밀이국(須密爾國): 삼성기 하편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것은 한국(桓國)에 속하는 12국 가운데 수밀
이국이 있다는 거다. 이건 참 예민한 부분이지 싶다. 이 수밀이는 물론 고대 바
빌로니아 남부에 있었던 세계 최고의 문명 발상지인 슈메르(Sumer)를 말한다.
슈메르 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이 수밀이국이다. 역자도 이 부분
에 대해서는 「슈메르는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오며 에리도우에서 왕권이 시작
된다는 전설 등으로 미루어, 과연 한국과의 유사점이 없지 않으니 주목할 만한
연구 대상이다.」라는 것 이외는 뚜렷한 주장이 없음으로 그냥 지나치기로 한
다.
2. 단군세기(檀君世記)
단군세기는 고려말 행촌출신의 문정공 이암이 쓴 책으로 아사달에 도읍하여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단군님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는데 1세 단군 왕검(王儉)으로부터 47세 단군 고열가(古列加)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編年體: 연월에 따라 순서적으로 기술하는 역사편찬의 한 체재)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일단 연대기부터 살펴보자.
<고조선 왕조 연대기>
세수 | 한자 | 이름 | 세수 | 한자 | 이름 |
1 | 檀君王儉 |
단군왕검
25
率那
솔나
2
扶婁
부루
26
鄒盧
추로
3
嘉勒
가륵
27
豆密
두밀
4
烏斯丘
오사구
28
奚牟
해모
5
丘乙
구을
29
摩休
마휴
6
達門
달문
30
奈休
내휴
7
翰栗
한율
31
登兀
등올
8
于西翰
우서한/오사함
32
鄒密
추밀
9
阿述
아술
33
甘勿
감물
10
魯乙
노을
34
奧婁門
오루문
11
道奚
도해
35
沙伐
사벌
12
阿漢
아한
36
買勒
매륵
13
屹達
흘달/대음달
37
麻勿
마물
14
古弗
고불
38
多勿
다물
15
代音
대음/후흘달
39
豆忽
두홀
16
尉那
위나
40
達音
달음
17
余乙
여을
41
音次
음차
18
冬奄
동엄
42
乙于支
을우지
19
緱牟蘇
구모소
43
勿理
물리
20
固忽
고홀
44
丘勿
구물
21
蘇台
소태
45
余婁
여루
22
索弗婁
색불루
46
普乙
보을
23
阿忽
아홀
47
古列加
고열가
24
延那
연나
=> 이 책에서는 역사책에 기록된 준왕(準王)과 우거왕(右渠王)은 단제(檀帝/임금)로 보지 않고 번한(番
韓/번조선)의 제후로 보고 있다.
◈ 1세 단군조선 시조 왕검(王儉): 재위 93년
고기(古記)에서 말한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며 신묘(BC 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박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신인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신시의 옛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름했다......이로부터 단군님의 교화는 온누리를 가득 덮어서 멀리 탐랑에까지 미쳤으며 가르침은 점차로 널리 퍼져갔다. 이에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5가(五加) 64족을 포함하였다.
◈ 2세 단군 부루(扶婁): 재위 58년
제순유우(帝舜有虞: 중국 삼황오제의 한 사람)가 유주 영주의 두 주를 남국(藍國: 연나라)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들을 모두 다 쫓아내시고, 동무(東武)와 도라(道羅) 등을 그곳의 제후로 임명하여 그 공을 표창하였다....
신시 이래로 하늘에 제사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크게 모여 함께 노래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¹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워하였으며 신인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게 곧 참전(參佺)의 계(戒)²가 되었다.
1. 어아가(고대가사 이름)
어아 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마세.
어아 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쁜 마음 과녁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줄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맘으로 똑같아라.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되어 과녁마다 뚫고지고, 끓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악한 마음.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 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원문에는 대조신大祖神)이시여, 한배검이시여.
2. 참전의 계: 고구려 재상 을파소가 지은 <참전계정>이 현존한다.
◈ 3세 단군 가륵(嘉勒): 재위 45년
경자 2년(B.C 2181), 아직 풍속이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眞書: 고대 상형문자를 말하는 듯)이 있다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 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특수문자라 기재하기 어려워 사진으로 찍어 올린다.)
< 한글의 근본이 된 가림토 문자>
◈ 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 재위 38년
갑신 원년(B.C 2137) 겨울 10월에,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으니 인삼이라고도 하고 선약이라고도 한다.
무자 5년(B.C 2133)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 5세 단군 구을(丘乙): 재위 16년
을축 4년(B.C 2096), 처음으로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다.
기사 8년(B.C 2092),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하다.
6세 단군 달문(達門): 재위 36년
7세 단군 한율(翰栗): 재위 54년
◈ 8세 단군 우서한(于西翰 혹은 오사함烏斯含): 재위 8년
무신 원년(B.C 1993) 이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며,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보충하도록 하였다.
9세 단군 아술(阿述): 재위 35년
10세 단군 노을(魯乙): 재위 59년
◈ 11세 단군 도해(道奚): 재위 57년
을해 46년(B.C 1846) 3월에, 삼신의 단을 산의 남쪽에서 제사지냈으니 술과 음식을 갖추어 올리고 치사를 드리며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 특별히 널리 술을 하사하시어 여러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면서, 여러가지 재주를 관람하시었다. 이 자리가 끝나자 마침내 누각에 오르셔서 천부경에 대하서 논하시고 삼일신고를 강연하시더니 오가를 돌이보시고 말씀하셨다.
" 이제부터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며 옥문을 열고, 떠도는 사람에게 밥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며 사형제도를 없애노라."
이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 12세 단군 아한(阿漢): 재위 52년
무자 2년(B.C 1833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시하였는데 요하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13세 단군 흘달(屹達 혹은 대음달代音達): 재위 61년
◈ 14세 단군 고불(古弗): 재위 60년
을해 56년(B.C 1666)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게 하니 총계 1억 8천만¹이었다.
1. 1억 8천만: 이 숫자는 당시의 중국대륙+만주대륙+몽고대륙+한반도의 인구 총계로 당시의 우리 국토
넓이를 추정케 하는 기록이다.
◈ 15세 단군 대음(代音 혹은 후흘달後屹達) 재위 51년
경진 원년(B.C 1661) 은나라 왕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구했다. 이 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신사 2년(B.C 1660) 겨울 10월 양운국과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정미 28년(B.C 1634) 단제께서는 태백산에 오르사 비석을 세워 역대 단군들의 이름과 역대왕들의 공적을 새겼다.
◈ 16세 단군 위나(尉那): 재위 58년
무술 28년(B.C 1583) 구한의 여러 한(汗)들을 영고탑에 모여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지냈으니 한인, 한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시었다. 닷새 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한(愛桓)의 노래¹를 불렀다.
1. 애한의 노래: 지금으로 치면 애한가(愛韓歌)요, 애국가인 셈이다.
<애한가(愛桓歌)>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山有花 山有花)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그루 심었지. (去年種萬樹 今年種萬樹)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春來不咸 花萬紅)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有事天神 樂太平)
17세 단군 여을(余乙): 재위 68년
18세 단군 동엄(冬奄): 재위 49년
◈ 19세 단군 구모소(緱牟蘇): 재위 55년
지리숙(支離叔)이 주천력(周天曆)¹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² 을 짓다.
1. 주천력: 별 등이 그 궤도를 일주하는 것을 주천이라 하니, 별들의 궤도를 관측하여 만든 책력.
2. 팔괘상중론: 제목으로 봐서는 팔괘가 중첩되었을 때의 변화를 해설한 책인 듯.
20세 단군 고홀(固忽): 재위 43년
21세 단군 소태(蘇台): 재위 52년
22세 단군 색불루(索弗婁): 재위 48년
◈ 23세 단군 아홀(阿忽): 재위 76년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申督)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B.C 1236) 남국의 임금 금달(今達)이 청구(靑邱)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蒲古氏)를 엄(淹)으로,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24세 단군 연나(延那): 재위 11년
25세 단군 솔나(率那): 재위 88년
26세 단군 추로(鄒盧): 재위 65년
27세 단군 두밀(豆密): 재위 26년
28세 단군 해모(奚牟): 재위 28년
29세 단군 마휴(摩休): 재위 34년
◈ 30세 단군 내휴(奈休): 재위 35년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골(奄瀆忽)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汗)들과 만난 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람들과도 수교를 맺었다.
31세 단군 등올(登兀): 재위 30년
32세 단군 추밀(鄒密): 재위 30년
33세 단군 감물(甘勿): 재위 24년
◈ 34세 단군 오루문(奧婁門): 재위 23년
병오 원년(B.C 795) 이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兜里歌)¹를 지어 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엔 아침해
맑은 빛 내려비추고
나라엔 어진 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큰나라 배달나라
사람마다 마음 편하고
밝고 밝은 노래 속에
끝없이 태평하라.
을묘 10년(B.C 786)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1. 도리가(兜里歌): 신라의 월명사(月明師)가 지은 도솔가(兜率歌)라는 향가도 경덕왕 19년(760) 4월에
해가 둘이 떠서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그 이변이 없어졌다 한다.
◈ 35세 단군 사벌(沙伐): 재위 68년
무오 50년(B.C 723) 단제께서 조을(祖乙)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燕)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 제나라 도읍지)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 36세 단군 매륵(買勒): 재위 58년
갑인 38년(B.C 667)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盤命)¹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고, 12월엔 삼도(三島: 일본)가 모두 평정²되었다.
1.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盤命):《일본서기》의 <니기하야히노미꼬도>를 배반명이라 하는데 진국과
부여의 조상에 해당한다.
2.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배반명이 일본을 평정하였다는 이 기사는 한국족(桓國族)의 조상들이 일본
으로 건너가 저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얘기이다.
무진 52년(B.C 653) 단제게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¹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1. 수유(須臾)의 군대: 역자는 주해에서 수유란 옛 어른들이 기자조선을 말할 때 쓰는 표현으로 <기자조
선>의 군대를 말한다 하였다. 어차피 앞에서 언급했듯 기자조선이 허구의 왕조
임을 밝혔으면 그냥 <번한>이라 하든지 아니면 <번조선>이라 했음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른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37세 단군 마물(麻勿): 재위 56년
38세 단군 다물(多勿): 재위 45년
39세 단군 두홀(豆忽): 재위 36년
40세 단군 달음(達音): 재위 18년
41세 단군 음차(音次): 재위 20년
42세 단군 을우지(乙于支): 재위 10년
◈ 43세 단군 물리(勿理): 재위 36년
을묘 36년(B.C 426) 융안(隆安)의 사냥꾼 우화충(于和沖)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 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사고 급하게 공격해오매 단제는 좌우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을 받들어 모시고 피난하여 해두(海頭: 해변인지 지명인지 확실치 않음)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붕어하셨다.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 구물(丘忽: 44세 단군)이 어명을 어기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니 구지(九地)의 군사들이 이에 따라 동서의 압록(鴨錄)¹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해 왔다.
1. 압록(鴨錄): 한반도와 만주 사이의 강을 현재 압록이라 하는데 이는 현대의 압록일 뿐이며, 현재의
요하나 송화강 및 흑룡강도 압록이라 불린 때가 있었으니, 압록이란 고대어로 크다의 뜻
인 <ㅇ.리>, <아리>, <오리>의 이두문이다.
♣ 삼육대례(三六大禮)라는 말이 여러 곳 나오는데 이는 천제(天祭) 때 천단(天壇) 앞에서만 행해지는
배례법으로 세 번 절하고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말한다.
◈ 44세 단군 구물(丘勿): 재위 29년
병진 원년(B.C 425) 서북 36군을 점령한 우화충을 죽이고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아 마침내 3월 16일 단을 쌓아 하늘에 제를 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扶餘)라고 고치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¹이라 바꿔 불렀다.
1. 이 <단군세기>에서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하편에 보면 22세 단군 색불루
때에도 삼한을 삼조선으로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211쪽)
◈ 45세 단군 여루(余婁): 재위 55년
신미 47년(B.C 350) 북막(北漠)의 추장 액니거길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하매,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申不私)로 하여금 병력 만 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上谷)을 공격하여 이를 도와 성읍을 쌓게 하였다.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오더니 이 싸움 이후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造陽)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 (여기에서의 지명은 역자도 짐작되는 몇 곳을 예시했으나 어딘지 확실치는 않음)
◈ 46세 단군 보을(普乙): 재위46년
경진 원년(B.C 341) 12월 번조선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오가(五加)가 다투어 일어났다.
을축 46년(B.C 296) 한개(韓介)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하니 대장군 고열가(古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단제께서는 수도로 돌아오셔서 대사령
(大赦令)을 내리셨는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단제께서 후사없이 붕어하셔서 고열가가 43세 단군 물리(勿理)의 현손으로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이 있었던지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 47세 단군 고열가(古列加): 재위 58년
임술 57년(B.C 239) 4월 8일 대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¹사람이었다.
계해 58년(B.C 238)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을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이에 단제는 오가들과 의논하여, ".....짐은 덕없고 겁이 많아 능히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니....오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 하시고, 이튿날 왕위를 버리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는 나라 일을 다스리기를 6년(B.C 232년 해모수가 등위할 때까지)이나 계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종실(宗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였다. 수유후(須臾侯) 기비(箕丕: 역사책에서의 준왕인 기준箕準의 아버지)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으니,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²라 칭하는 바라.
1. 고리국(藁離國): 몽고 내륙에 있었던 부여국의 모체라고 할 나라.
2. 역시 고구려라 칭하더라: 이 책에서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기 전인 북부여시대까지를 고조선으로
보고 있는데 이 시기(B.C 238년)부터 고구려라고 칭하였다 하니 근 200백
년이 고조선과 고구려가 중복된다는 얘기다. 삼성기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왕조 5~6대를 누실했다는 그
200년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얘기다. 한 왕조의 몰락 과정이 혼란스럽 듯,
역사기(歷史記)도 참 혼란스럽다.
3. 북부여기(北夫餘記)
북부여기는 고려말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 일명 범세동范世東)이 지은 것으로 북부여기는 몇 가지 기록상의 공통점으로 보아 바로 고구려의 전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하였으며 여기에는 상. 하권과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로 구성되어 있고, 시조 단군 해모수(解慕漱)로부터 6세 단군 고무서(高無胥)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를 기록해놓았다.
북부여기를 굳이 상. 하로 나눈 것은 5세 단군 고두막(동명왕)이 새롭게 북부여를 열었기 때문에 그리한 듯하다.
⊙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 가섭원은 동부여(東夫餘)의 도읍지로,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왕(解夫婁王)
이 을미 원년(B.C 86년), 북부여를 장악한 동명왕 고두막(高豆幕)의 강압
으로 인해 국상 아란불(阿蘭弗)의 권고에 따라 도읍지를 가섭원(혹은 분능
忿陵이라고도 함)으로 옮겼다. 그 이후 부여국을 흔히 동부여라 하며,
계유 36년(B.C 48년), 해부루왕이 아들이 없이 죽으매 금와가 즉위하였는
데, 이 왕조는 해부루, 금와, 대소, 이렇게 3세(世)만 이어졌다. 서기 22년
대소가 고구려 대장군 괴유(怪由: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 때의 대장군)에
게 전쟁터에서 살해당함으로 인해 108년 만에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다.
◈ 시조 단군 해모수(解慕漱): 재위 45년
임술 원년(B.C 239)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 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단제(檀帝)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고,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天王郞)이라 할 만하였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시고, 이듬해인 계해 2년(B.C 238)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烟戶)의 법(연호의 법: 오늘날의 호구조사법)을 제정하더니 오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 밖의 일에 대비토록 하였다.
기사 8년(B.C 232)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共和)의 정치¹를 철폐하시고, 만백성이 추대함에 단군이 되었다.
경진 19년(B.C 221) 기비(箕丕)가 죽으니 그 아들 기준(준왕)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신사 20년(B.C 220) 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²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도록 하시고 7월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병오 45년(B.C 195) 연나라의 노관(盧棺)³이 한나라를 배신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이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께서는 거절하시었다. 이 때 번조선의 왕인 기준⁴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주었다.
1. 공화의 정치: 47세 단군 고열가(古列加)가 스스로 덕없음을 인정하여 왕위에서 물러난 뒤 해모수가
등극하는 B.C 232년까지 오가가 합심하여 6년간 나라를 이끌었었다.
2. 백악산 아사달: 고조선의 도읍 변천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평양도읍시대(단군왕검)→백악산 아사달
시대(22대 색불루단군)→장당경시대(44대 구물단군)→아사달산신시대(?)로 구분된다.
3. 노관(盧棺): 노관은 한고조 유방과는 죽마고우요 창업공신인데, 유방이 죽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흉
노로 망명.
4. 번조선 왕 기준: 단재 신채호가 말한 대로, 기자가 조선에 들어와서 기자조선을 만든 게 아니라
기자의 먼 후손 중에서 번조선의 왕이 된 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기준이
바로 그러한 왕이었던 듯하다고 역자는 설명한다.
◈ 2세 단군 모수리(慕漱離): 재위 35년
정미 원년(B.C 194) 번조선 왕 기준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는데,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위만)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를 건너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卓)을 받들어 모두 산을 넘어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이를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무신 2년(B.C 193) 단제께서 상장(上將) 연타발(延陀勃)을 파견하여 평양¹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하니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내고 다시는 침범치 않았다.
기유 3년(B.C 192) 해성(海城)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 황제의 동생 고진(高辰)²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였다.
1. 평양: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도 평양이 아니고 중국 요녕성 해남에 있는 평양을 말함.
2. 고진(高辰): 이 책에서는 고주몽의 증조부라고 되어 있다.
「 주몽은 고진의 손자인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 고모수(高慕漱)의 아들이다. <
삼국사기>와 <유사(遺事)>에는 해모수의 아들로 되어있다.」(137쪽)
◈ 3세 단군 고해사(高奚斯): 재위 49년
임신 원년(B.C 169) 정월 낙랑왕¹ 최승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고, 이보다 앞서 최승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 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B.C 195)년 겨울이었다.
1. 낙랑국: 낙랑군(樂浪郡)과 낙랑국(樂浪國)은 이름, 성격, 지역 등 모두가 다른 것이라 역자는 말하는
데, 아직까지 낙랑왕 최씨가 한.중 어느 민족에 속하는 인물인지는 밝혀진 바 없다 한다.
◈ 4세 단군 고우루(高于婁 혹은 해우루解于婁)
신유 원년(B.C 120)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케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右渠)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¹로 삼았다.
계유 13년(B.C 108) 한의 유철(劉徹. 한무제)이 평나(平那)²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³을 설치코자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키자 고두막한(高豆幕汗)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했으며, 스스로 즉위에 오른 고두막한(동명왕)은 사람을 시켜 고우루에게 이르길,
"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오." 하니, 단제 고우루는 걱정하다 병을 얻어 붕어하고, 동생 해부루(解夫婁)가 이에 즉위하였으나 동명왕이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위협하였다. 이때 국상인 아란불(阿蘭弗)이 해부루에게 고하길,
" 통하(通河)의 물가 가섭(迦葉)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은 썩 잘 됩니다. 도읍으로 할 만한 곳입니다." 하며 마침내 도성을 옮기니, 이를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라 하며 동부여라 한다.
1. 고구려후: 중국의 제후국인 고구려후가 아니라 북부여의 고구려후였음을 비로소 발견한다고 역자는
말함.
2. 평나(平那): 우거를 멸한 장소로 구체적으로 어딘지는 모름.
3. 한4군: 사마천의 <사기> 115권 조선열전이 한사군 전쟁기록의 원전인데, 이 원전에는 한사군 설치
기록이 전무하며 사군의 이름조차 실려있지 않다고 역자는 말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중간에 각설하고, 한사군 전쟁의 발단은 한나라 섭하(涉河)라는 요동도위가 조선의 비왕(裨
王) 장(長)을 자객을 시켜 살해하자 그 보복으로 조선군이 습격하여 그를 죽인 것에 기인한
다. 하지만 사실은 곪고 곪었던 조선족의 불평 불만이 터져서 정변을 일으킨 것에 불과한 것
이다고 한다. 그래서 우거와 성기를 살해하고 우거 정권을 타도하여 위만조선의 땅이 혁명
주도자 네 사람인 참(參), 협(俠), 음(陰), 최(最)에 의해 4군으로 갈라져 각기 참의 홰청, 협의
평주, 음의 추저, 최의 날양으로 분립한 것이 한사군의 실체라는 것이다. 결국 조선족들간의
이권 다툼에서 낙랑, 진번, 임둔, 현도라는 유령같은 한사군이 생긴 것이라는 게 역자의 설명
이다.
◈ 5세 단군 고두막(高豆幕) 혹은 두막루(豆莫婁) 재위 27년
계유 원년(B.C 108) 이 해는 단군 고우루 13년이다. 단제(檀帝) 고두막은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찌기 북부여¹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卒本)²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는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B.C 106) 고두막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을미 23년(B.C 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해부루가 여러 차례 나라를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 고두막이 이를 들어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릉(가섭원)으로 옮기게 하고 수만 군대를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 해부루의 간청대로 북부여 국명을 유지하였다)
임인 30년(B.C 79) 5월 5일에 고주몽³이 분릉(가섭원: 동부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1. 북부여: 고구려의 건국 연대에 200년 정도의 시차가 있다함은 사학의 상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일
부에선 북부여의 건국을 실질적인 고구려의 건국 연대로 간주하려는 견해가 있다고 역자는
말한다. 실제로 동명(고두막)과 주몽은 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인데 김부식은 이를 한 사
람으로 잘못 묘사했다 한다.
2. 졸본: 종래엔 광개토왕비가 있는 흘본과 같은 땅, 지금의 혼강 유역의 한 지방이라 했으나 슈미야바
타르(몽고 과학원 교수) 주장에 따르면, 부이르 호수 근처, 지금의 북만주나 동몽고의 땅으로
비정(比正)한다 하였다.
3. 고주몽: 알고 있는 것(B.C 37)과는 달리 B.C 58년에 고구려를 세웠다 하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는 해모수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고진의 손자인 고모수의 아들로 되어있다. 동부
여에서 태어나 북부여로 남하하여 고무서의 사위가 되어 북부여의 왕이 되었다고 하며 소서
노를 부인으로 삼아 비류와 온조 형제를 두었다고 한다.
◈ 6세 단군 고무서(高無胥) 재위 2년
단제 고무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신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써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라고 불렸다.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의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고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고, 이어 고무서의 유언에 따라 주몽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의 나이 23세였다.
이 때에 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오이烏伊, 마리摩離 , 협보¹ 등 세 사람과는 덕으로써 사귄 친구였던지라 주몽은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함게 길을 떠나 분릉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으므로 뒤쫓아오는 군사들에게 몰릴까 두려워하여 물에게 말하길,
"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河伯: 물을 다스리는 신)의 외손인데 오늘 도주함에 있어 추격병은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 하니, 이 때에 물고기. 자라 따위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1. 협보: 주몽의 협력자로 뒷날 일본에 건너가 다파라국(多婆羅國)을 세웠다.
<북부여 연대기>
세수 | 왕명 | 재위기간 |
1 | 해모수(解慕漱) | 45 |
2 | 모수리(慕漱離) | 25 |
3 | 고해사(高奚斯) | 49 |
4 | 고우루(高于婁) 혹은 해우루(解于婁) | 34 |
5 | 고두막(高豆幕) 혹은 두막루(豆莫婁) | 49 |
6 | 고무서(高無胥) | 2 |
♣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 동부여(B.C 86~A.D 22)
◈ 시조 해부루(解夫婁) 재위 39년
을미 원년(B.C 86) 북부여 동명왕(고두막高豆幕)의 강압에 의해 가섭원(분릉)으로 옮겨왔다. 오곡이 다 잘 되었고 특히 보리가 많았고 범, 표범, 곰 , 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으며, 국상 아란불에게 명하여 널리 베풀어 주변의 유민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앞서 임인 8년(B.C 79)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高慕漱: 고진 高辰의 손자)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갔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 방에 가두어버렸는데 왕¹께서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 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 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을 고주몽이라 하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이로써 이름을 삼았다.
갑진 10년(B.C 77) 왕이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을 마주 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은 몹시 기뻐하며 그 아이를 거두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장성하매 태자로 삼았다.
임술 28년(B.C 59)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을 가르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어디 지명인지 모름)를 건너 졸본에 이르러, 이듬해 새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1. 왕: 처음으로 왕이란 호칭이 나왔는데, 이 책에서는 왕이란 군주(君主)의 개념이 아닌 한 지역을 다
스리는 제후(諸侯)로 보았으므로 동부여를 북부여의 속국으로 봐야하는지 그에 대한 역자의 설명
은 없고 한문원본에도 王으로 되어있다.
◈ 2세 금와(金蛙) 재위 41년
◈ 3세 대소(帶素) 재위 28년
임오 28년(서기 22년) 2월 고구려가 나라의 힘을 다 모아서 침범해오니 왕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을 만나 왕의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에 고구려 대장군 괴유(怪由: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 때의 대장군)가 바로 앞에 있다가 대소왕을 살해하였다. (실질적인 동부여의 멸망)
여름에 왕의 동생은 따르는 무리 수백 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였고, 그 길로 갈사수(曷思水)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하니 이를 갈사(국)라 한다. 갈사는 태조무열제(太祖武列帝: 고구려 6대 태조대왕) 융무(隆武) 16년(서기 68) 8월에 이르러, 도두왕(都頭王: 갈사왕의 손자)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갈사국은 대저 3세 47년만에 나라가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태(于台)라고 부르도록 하고 저택을 하사하더니 혼춘(琿春)을 식읍으로 삼게 하여 동부여후(東夫餘侯)에 봉하였다.
( 그 후 동부여의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고구려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 때 완전히 멸망하였다)
4. 태백일사(太白逸史)
태백일사는 연산군과 중종 때의 학자인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이 지어 묶은 것으로 단군세기를 쓴 행촌 이암의 현손이다. 이 책은 그가 귀양시절에 읽은 책의 내용과 들은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엮어놓은 것인데 감히 세상에 내어놓지 못하고 감추어 두었다 한다¹. 이 태백일사는 한단고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압권을 이루는 부분으로 한국(桓國). 신시시대(神市時代)로부터 고려에 이르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총 8개 부분으로 나뉘어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한국본기(桓國本紀). 신시본기(神市本紀).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로 구성되어 있다. 삼한관경본기에는 마한세가 상.하와 번한세가 상.하가 담겨있고 특히 소도경전본훈은 천부경(天府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실어 우리 민족의 전통적 종교와 철학 및 문자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시 된다 하였다.
책 제목 태백일사(太白逸史)란 말은 “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란 뜻이다. 태백이란 태백산, 즉 한인. 한웅. 단군의 역사란 뜻이다.
1. 조선시대의 세조, 예종, 성종 때에「고대 사서 수거령」이 내려졌었다. '고대 사서'란 성리학적 관점
이 아닌, 우리 민족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철학을 기록해놓은 책으로 추정된다.
1469년의 일을 기록한 예종실록에는 '서울에서 고대 서적을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10월 그믐까
지 승정원에 갖다 바치고, 지방에 있는 자는 11월 그믐까지 살고 있는 고을의 관가에 바쳐라. 바친 자
는 두 계급을 올려주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는 내용이 있다. (네이버 자료)
⊙ 천부경(天府經): 81자로 된 (대종교)경전으로 천체 한국(桓國)에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로써 한웅대
성존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자(鹿圖文字: 사슴 발자국 모
양을 본따 만든 문자로써 세계 최초의 문자)로 기록케 하였는데, 태백산에 있는 옛 비석(단군전비
檀君篆碑)을 보고 최치원(崔致遠)이 번역하여 이를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였다 한다.
역자는 이 천부경이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가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훤히 제시되었지만 팔쾌나 역
학, 오행 등의 심오한 학문 없이 이를 풀이하려는 것은 하나의 오만이라 하였다. 천부경에 대하여
현토(懸吐: 구결口訣)나 읽는 법조차 통일된 것이 없으므로 또한 통일된 해석도 없다 하였다.
(본문 231~234쪽 참조)
⊙ 삼일신고(三一神誥): 총 366자. 본디 신시개천시대에 나와서 책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대저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옴의 뜻으로 근본을 삼는다. 원본에는 분장(分章)하지 않
았으나 행촌선생이 처음으로 5장으로 나누어서 천신조화의 근원과 세상 사람들과 사물들의 교화를
상세히 쓴 것이다.
제1.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記)
태백일사의 제1편인 삼신오제본기에서는 태고적부터의 우리 고유 신앙과 구한(九桓)족의 풍속에 대한 기록이다. 내용들은 모두 다 소중하나 너무 길어서 핵심부분만 발췌했다.
<표훈천사表訓天詞¹>에서 말한다.
「대시(大始: 태초)에 위, 아래, 사방은 아직 암흑으로 덮여 보이지 않더니 옛 것은 가고 지금 것은 오니 오직 한 빛이 있어 밝더라. 상계로부터 또 삼신(三神)이 계셨으니 곧 한 분의 상제(上帝)시라. 주체는 곧 일신(一神)이니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나, 쓰임은 곧 삼신이시라. 삼신은 만물을 끌어 내시고 전 세계를 통치하실 가늠할 수 없는 크나큰 지능을 가지셨더라......이에 하늘 아래 두루 있으면서 오제(五帝)의 사명을 주관하는 바 이를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 하고, 지하에 두루 있으면서 오령(五靈)의 이룸을 주관하는 바 이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 한다.
생각컨대 저 삼신을 천일(天一: 하늘의 하느님)이라 하고, 지일(地一: 땅의 신)이라 하고, 태일(太一: 사람의 신)이라 한다. 천일은 조화를 주관하고 지일은 교화를 주관하며 태일은 치화(治化)를 주관하느니라.
생각컨대 오제는 흑제(黑帝), 적제(赤帝), 청제(靑帝), 백제(白帝), 황제(黃帝)를 말하나니, 흑제는 생명이 다함을 주관하고, 적제는 빛과 열을 주관하고, 청제는 기름을 주관하고, 백제는 성숙을 주관하며, 황제는 조화를 주관한다. 또 생각컨대 오령은 태수(太水), 태화(太火), 태목(太木), 태금(太金), 태토(太土)라 하나니, 태수는 크고 윤택하게 하며, 태화는 녹이고 익히며, 태목은 지어 이루고, 태금은 재량하여 자르며, 태토는 씨뿌림을 주관한다.
이에 삼신은 곧 오제를 감독하고 명령하사 각각 넓히고 나타내게 하고, 오령으로 하여금 기르고 이루
게 하도다. 해가 뜨면 낮이라 하고 달이 뜨면 밤이라 하며, 별의 움직임을 측량하여 춥고 더운 것과 연
대를 기록케 하니라.」
1. <표훈천사>: 본문에 설명이 없어 자료를 검색해봤다. 정확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데, 신라 고승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인 표훈이란 사람이 지은 사상집인 것 같다.
경(經)에서 말한다.
「사람과 물건은 같은 삼진(三眞)을 받았으나, 다만 무리는 땅에 혼미하여 삼망(三忘)이 뿌리를 내리고, 진(眞)과 망(忘)이 어울려 삼도를 이룬다. 어버이의 도는 하늘을 모범 삼나니 참됨으로써 하나같이 거짓 없고, 스승의 도는 땅을 모범으로 하나니 부지런함으로써 하나같이 게으르지 않으며, 다스림의 도는 사람을 모범으로 삼나니 협력함으로써 하나같이 어김이 없도다.」
<고려팔관기高麗八觀記>에 삼신설(三神說)이 있나니, 가로대
「상계(上界)의 주신(主神)은 그 호를 천일(天一)이라 하나니...이를 청진대(淸眞大)의 체(體)라고 하고, 하계의 주신은 그 호를 지일(地一)이라 하여.....이를 선성대(善聖大)의 체라고 하니라. 중계의 주신은 그 호를 태일(太一)이라 하여....이를 미능대(美能大)의 체라 하느니라. 한인씨(桓仁氏)는 한 번 변화하여 칠이 되며, 두 번 변하여 육이 되는 운을 받아 애오라지 어버이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에 쏟으매, 천하가 이에 교화되더라. 신시씨(神市氏)는 천일의 생수와 지이의 생화의 자리를 계승하여 애오라지 스승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를 인솔하매, 천하가 이에서 배운다. 왕검씨는 지름이 둘레를 한 바퀴 도는 길이인 3.14의 기(氣)를 받아 애오라지 왕의 도를 써서 천하를 다스리니, 천하가 이에 따른다고 한다.」
<오제五帝>의 주(注)에 말한다.
「오방(五方: 동.서.남.북.중)에 각기 사명이 있으니 하늘에서는 제라 하고 땅에서는 대장군이라 한다. 오방을 감독하고 살피는 자를 천하대장군이라 하고 지하를 감독하고 살피는 자를 지하여장군이라 한다. 용왕현구(龍王玄龜)는 선악을 주관하며, 주작적표(朱鵲赤標)는 목숨을 주관하며, 청룡령산(靑龍靈山)은 곡식을 주관하며, 백호병신(白虎兵神)은 형벌을 주관하며, 황웅여신(黃熊女身)은 병을 주관한다.」
삼신산을 천하의 뿌리산이라 한다. 삼신으로 이름 삼음은 대저 상세 이래로 삼신이 이곳에 내려와 노
닐으시고 삼계를 널리 감화하심을 믿기 때문이라.....
삼신산에 어떤 설에서 「삼(三)은 신(新)이 되고 신은 또 백(白)으로 되며, 백은 신(神)이 되고 신은 고(高)가 되고 고는 바로 두(頭)가 된다. 때문에 또 백두산(白頭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하고, 또 말하길 「개마(蓋馬)는 해마리(奚摩離)의 전음(轉音)이다」라고 했다. 고어에는 흰 것을 해(奚)라 하고 두(頭)를 마리(摩離)라고 하니 백두산의 이름도 역시 이에서 생긴 것이다.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 한다. 처음 아만(阿曼)과 서로 만난 곳을 아이사타라 한다. 또 사타려아라고도 한다....
천해(天海), 금악(金岳), 삼위(三危), 태백(太白)은 본디 구한(九桓)에 속한 것이며 9황(九皇: 오제 이전의 9대의 황제)의 64민(民)은 모두 그 후예이다. 그러나 일산일수가 각각 한나라가 되매, 사람들도 역시 서로 따라가 경계를 나누니 경계에 따라서 나라를 달리하게 되었다. 나라를 달리한 지 오래되니 창세의 조서(條序:줄기와 길)의 뒤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장구한 세월 뒤 제 한인(桓因)이란 분이 나타나셔서 여러 사람들의 사랑으로 추대되어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하고 거발한(居發桓)이라고도 하였다. 대저 안파견이라 함은 바로 하늘을 계승하여 아버지가 되었다는 뜻의 이름이고 거발한이라 함은 천, 지, 인을 하나로 정한다는 뜻의 이름이니라. 이로부터 한인의 형제 아홉 사람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셨으니, 이를 9황 64민이라 한다....
전(傳)에서 말하길
「사람과 물건은 같이 함께 삼신에게서 나왔으니, 삼신으로써 한 근원의 조상으로 삼느니라」
한인도 역시 삼신을 대신하사 한국의 천제가 되었다. 뒤에 나반을 대선(大先)의 천(天)이라 하고, 한인을 대중(大中)의 천이라 하고, 한인, 한웅, 치우(治尤)를 삼황이라 하며, 한웅을 대웅(大雄)의 천이라 하고 치우를 지위(智偉)의 천이라 한다. 곧 <황제중경黃帝中經>의 비롯된 유래이다.....
삼광오기(三光五氣)가 모두 시청 감각에 달려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불을 피우고 말을 하게 되고 글자를 만들었으니, 뛰어나고 열등하여 이기고 지는 다툼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웅족(雄族) 가운데 단국(檀國)이 있어 가장 강성했다. 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에 사시니,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으로 모시어 이를 단군왕검이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서 구한(九桓)의 삼한관경(三韓款境)을 모두 통합하였다. 신시(神市)의 옛 규칙을 회복하니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서 온 세상이 그를 천신과 같다고 보았다. 이때부터 숭보(崇報: 은덕에 보답함)의 예(禮)는 영세토록 바뀌지 않게 되었다.
이후의 내용은 구한 족속들의 풍속에 관하여 나오는데, 생략키로 한다.
제3. 신시본기(神市本紀)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紀)에서 말한다.
「한웅천왕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성되고 만물이 각각 그 자리를 가짐을 보시더니 곧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시고 이를 주곡(主穀)이라 하셨다. 그런데 이 때는 아직 농사의 방법도 잘 갖춰지지 않았고 불씨도 없음이 걱정이었는데....
마침내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 다시 돌을 쳐 불씨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쇠를 녹이는 기술도 일어나더니 그 기술도 점차로 진보하게 되었다.」
한웅천왕은 또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 대저 신지씨는 세세토록 명령을 전하는 직책을 맡고 출납헌체(出納獻替)의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는데, 다만 목소리에 의존했을 뿐 일찌기 문자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법은 없었다. 어느날 무리와 더불어 사냥에 나갔는데 갑자기 튀는 한 마리의 암사슴을 보고 활을 당겨 쏘려고 했으나 둘러보는 사이에 암사슴의 종적을 놓치고 말았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면서 산과 들을 지나 평평한 모래땅에 이르러 비로소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어지러이 흩으러져 연결되었으나 향한 곳은 절로 확실하였다. 마침내 머리를 떨구고 침묵 끝에 다시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다만 이것뿐이리라, 기록해 남기는 방법은 다만 이것뿐이리라>라고 하며 그날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 되풀이 하여 다시 깊이 생각하고 널리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오래지 않아서 처음으로 문자를 만드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태고문자의 시작이라 한다. 그런데 후세에는 연대가 까마득히 흘러서 태고문자는 다 사라져서 존재치 않는다.....
이때부터 치우, 고시, 신지의 후손들은 지극히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의 등극에 이르러 구야(九冶)를 만들어 동과 철을 채취하고 철을 단련함으로써 도극(刀戟)ㆍ대궁(大弓)을 만들고 사냥과 정벌, 전쟁의 무기로 삼았다. 생각컨대 신으로부터 멀리 있는 바깥의 여러 족속들은 대궁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컸던 듯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한 지 오래 되었다. 때문에 저들은 우리 종족을 가리켜 <이夷>라고 했다.....
<삼성밀기>서 말한다.
「한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이 있어 이를 우환으로 여겼다. 한웅께서는 나라를 위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삼아 무리를 모아 서약을 만드셔서 은밀하게 전제(剪除) 뜻을 가졌다. 그때는 종족의 이름이 서로 달랐으니, 풍속도 차츰 달라져서 원래 살던 백성을 호랑이라 하고 새로 살기 시작한 백성을 곰이라 했다. 그런데 호랑이는 성질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애오라지 약탈만을 일삼았고 곰은 어리석어 사람을 따르지 않고 자부하는 마음이 세어 조화되기를 거부하였으니, 같은 굴에 살았지만 점점 멀어지고 지금까지 한 번도 서로 돕지도 않고 혼사도 트지 않을 뿐 아니라 일마다 서로 따르지도 않고 아직 한 번도 뜻을 함께 한 적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웅녀(熊女)의 군(君)은 한웅에게 신덕(神德)이 있다 함을 듣고 곧 무리를 이끌고 가서 뵈옵고 말하기를 <바라옵건대 하나의 굴을 내리시어 하나같이 신계(神戒)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를 비옵니다>라고 하니, 한웅께선 마침내 이를 허락하사 이를 맞아 들이시고 아들을 낳게 하였다. 호랑이는 종내 깨우칠 수 없는지라 이들은 사해로 쫓아 버렸다. 한족(桓族)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었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 안파견(安巴堅: 천제한님天帝桓因)이 두루 금악(金岳)ㆍ삼위(三危)ㆍ태백(太白)을 살피더니 태백은 이로써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한 지라 한웅에게 명하여 가로대, <이제 사람과 물건의 업은 이루어진 듯하다. 그대 수고를 아끼는 일 없을지니 무리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가 하계에 가서 하늘의 뜻을 펴 가르침을 베풀고 천신에 제사지내는 것을 주관하라. 어버이의 권위를 세워서 늙은이와 어린이를 보살펴 모두 다 평화롭게 하라. 가르침의 도를 세워 재세이화(在世理化)하여 자손 만세의 큰 귀감이 되도록 할지어다>하시며 마침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시고 그를 보내어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한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처음으로 태백산의 신단(神壇) 나무 아래에 내려오시니 이를 신시(神市)라 한다.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데리고 농사를 주관하고, 삶을 주관하며, 형벌을 주관하고, 병을 주관하시고 선악을 주관하면서 무릇 인간의 360여 사를 두루 주관하시사, 세상에 계시며 이치대로 교화하여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 하셨다. 이를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
이에 한웅은 임시로 한(桓)이 되어 장소를 구하고 혼인하여 자식을 잉태케 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여자와 남자들은 차츰 윤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뒤 호를 단군왕검이라 하는 분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시니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이라. 처음으로 나라를 칭하사 조선삼한(朝鮮三韓)이라 하니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의 옥저(沃沮), 동북의 부여(夫餘), 예(濊)와 맥(貊)은 모두 그의 관경(管境)이었다.
신시시대에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이 있었다. 첫회의 날엔 천신(天神)에 제사 지내고, 2회의 날엔 월신(月神)에 제지내고, 3회 날에는 수신(水神)에 제하고, 4회 날에는 화신(火神)에 제지내고, 5회 날에는 목신(木神)에 제하고, 6회 날에는 금신(金神)에 제지내고, 7회 날에는 토신(土神)에 제지내었다. 대저 책력을 만듬은 이에서 비롯됨이라....
신시가 처음 시작 되었을 때에..... 먹을 것을 모아 놓고 기꺼워하며 배를 두드리며 놀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쉰다. 대저 하늘의 혜택을 널리 입어 궁핍을 알지 못함이라. 후세에 이르러 백성들과 사물들은 날로 번성하더니 소박한 것은 멀리 하게 되고, 절름발이도 있게 되고, 몹시도 마음 쓰일 일이 생기고, 기운 없고 피로하여 허덕일 일 생기고, 빈둥빈둥하는 이도 있게 되어 처음으로 생계를 염려하게 된다. 여기에서 밭 가는 자는 이앙을 다투게 되고, 물고기 잡는 자는 바다의 구역을 가지고 다툰다. 이렇게 된 이후 활이 만들어지니 새와 짐승들은 도망치고, 그물을 치니 물고기 새우가 숨게 되었고, 칼과 창과 병사들도 생기게 되었다. 너와 내가 서로 공격하고,, 이를 갈며 피를 흘리고, 간과 뇌를 땅바닥에 뿌리게 된다. 이것 역시 하늘의 뜻이였던가? 아아, 전쟁을 면할 수 없음을 알겠다.
이제 저들의 그 근원을 탐구해 보면 아마도 한 뿌리에서 비롯한 조상일 것인데, 땅은 이미 동서로 갈리어 각각 한 구석씩을 차지하였으니 땅은 멀리 떨어져 사람들의 인연은 통하지 않고, 백성은 나 있음을 알면서 남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천년의 세월을 셀수 있게 되자 시국은 이미 변하여 우리 한족 가운데 그 지역에 나뉘어 옮겨간 족속들은 침을 흘리며 이리저리 굴러 전전하고 토착의 백성들도 역시 마구 휩쓸려 모여들었다. 여기에서 어찌 같은 집안 식구들끼리 원수를 달리하고 창칼의 움직임을 노릴손가? 실로 만고의 전쟁의 시초더라.
한웅천왕으로부터 다섯 번 전하여 태우의(太虞儀) 한웅이 계셨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반드시 묵념하여 마음을 맑게하고 조식보정(調息保精)¹케 하시니 이것이야말로 장생구시(長生久視)²의 술이다. 아들 열 둘을 두었으니 맏이를 다의발(多儀發)한웅이라 하고 막내를 태호(太皥)라 하니 또는 복희씨(伏犧氏)라고 한다.....
1. 조식보정(調息保精): 호흡을 고르는 일. 우리 선도(仙道)에서의 기본수련법.
2. 장생구시(長生久視): 구시란 언제까지나 본다는 뜻으로 장생구시는 불로장생을 의미한다.
<밀기(密記)>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雨師)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거처 마침내 진(陳)에 옮겨 수인(燧人), 유소(有巢)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내었다. 후에는 갈리어 풍산(風山)에 살았으니 역시 풍(風)을 성씨로 가졌다.....」
♣ 백과사전을 보면,「복희는 3황 5제(三皇五帝) 중 수위에 있어 중국 최고의 제왕으로 친다. 복희씨는
팔괘(八卦)를 처음 만들고, 그물을 발명하여 어획.수렵(狩獵)의 방법을 가르쳤다고 전한다.」고 되
어있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로부터 나와 우사가 되었다. 신용(神龍)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그리고 신시의 계해을 바꾸어 갑자를 처음으로 하였다. 여와(女媧)는 복희의 제도를 이어 받다. 주양(朱襄)은 옛 문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육서를 전했다.」
<대변경大辯經>에서 말한다.
우리 치우천왕께서는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사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시니, 능히 하늘에 제사지내 삶을 아시고, 땅을 여시사 삶을 도모하시고, 사람을 발탁하시어 삶을 숭상할 수 있으셨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 될 만한 인재 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葛盧山)은 쇠를 캐내어 도개(釗鎧). 모극(矛戟). 대궁(大弓). 호시(楛矢)를 많이 만들어 한결같이 잘 다듬더니 탁록(涿鹿)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九渾)에 올랐다.....
이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그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쳐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 <관자管子>가 말하는 바의「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는 대목이 이를 말함이다.
..... 대저 당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힘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천황의 법력이 높고 강력함에 부딪쳐 마음에 놀랍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다.<운급헌원기雲笈軒轅記>라는 책에「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치우를 말한다」라고까지 썼으니, 역시 그 낭패한 모습이 대단했음을 상상해 알 것이다.
.....지금《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왕의 능은 산동성의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關鄕城) 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높이가 7척으로 진나라와 한나라 때 주민들은 10월이면 늘 여기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마치 필강(疋絳)¹같은 것이 뻗는데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 한다고 한다. 그의 영걸스러운 혼백과 사내다운 기백은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매우 다른 바가 천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아니 하는 듯하다.
1. 필강(疋絳): 한 줄기 붉은 띠 모양의 연기. 붉은 깃발 모양의 연기.
.....또<상서尙書> 여형(呂刑)에서는「고훈(古訓)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키다 라고만 적은 것은 그의 위엄이 무서워 기(氣)를 빼았긴 탓」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그의 훈(訓)을 전하는 까닭은 이로써 후인을 위하여 계명으로 삼자는 뜻도 역시 깊다. 그 뒤 300년은 별일이 없었는데 다만 전욱(顓頊)과 한번 싸워 이를 이겼을 뿐이다.
대저 신시개천(神市開天)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소 단군왕검이 나셨다. 웅씨의 비왕(裨王)으로서 마침내 신시에 대신하여 구역(九域)을 통일하고 관경으로 삼한(三韓)을 나누었으니 이를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고 한다.
<삼한비기三韓秘記>에서 말한다.
「 복희는 서쪽 변방에 봉토를 받더니 직(職)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무기를 쓰지 않고서도 한 지역을 감화시켜 마침내 수인(燧人)에 대신하여 지역 밖에까지 명령을 내렸다....
또 몇 대 지나 자오지천왕(慈烏支天王:치우천왕)한웅에 이르다. 자오지한웅은 귀신 같은 용맹이 몹시 뛰어났고 그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쇠로 되었다.....
치우천왕은 신농씨가 쇠약해짐을 보고 마침내 뜻을 크게 품고 여러 차례 천병(天兵)을 서쪽으로 일으켜 진격하여 회대의 사이에 웅거했다. 헌원이 즉위함에 이르자 즉시 탁록의 벌판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그를 신하로 삼은 다음에 오(吳)나라에 장군으로 보내 서쪽으로 고신(高辛)씨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
<대변경大辯經>에서 말한다.
「신시씨(神市氏)는 전(佺)으로써 계(戒)를 닦고 사람을 가르치고 하늘에 제 지내었다. 이른바, 전이란 사람이 스스로 완전이라 여기는 바를 쫓아 능히 그 성품에 통하고 이로써 참을 이루는 것이다. 청구(靑邱)씨는 선(仙)으로써 법을 만들고 사람에게 관경을 가르친다. 이른바 선이란 사람의 태어난 바에 따라 명(命)을 알고 이로써 선(善)을 넓힘이다. 조선씨(朝鮮氏)는 종(倧)으로써 왕을 세우며 사람들에게 가르쳐 화를 공동으로 책임지게 하였다. 이른바 종이란 사람이 스스로 근본이라 여기는 바에 따라 능히 정신을 잘 지키고 이로써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은 허하면서도 하늘에 근본을 두고, 선은 밝음에 있으면서도 땅에 근본을 두며, 종은 건전하면서도 사람에 근본을 둔다.」
주(注)에서 말한다.
「한인은 또한 천신이라고 한다. 천(天)은 곧 큰 것이요, 하나이다. 한웅은 또한 천왕이라고도 하니 왕은 곧 황(皇)이며 제(帝)이니라. 단군은 또한 천군이라 하니, 제사를 주재하는 우두머리이다. 왕검은 또한 바로 감군이며 관경의 우두머리이다. 때문에 하늘로부터의 밝음을 한(桓)이라 하고, 땅으로부터의 광명을 단(檀)이라 한다. 이른바 한은 즉, 구한(九桓)을 말하는 것이다. 한(韓)은 곧 크다는 뜻이다. 삼한(三韓)은 풍백ㆍ우사ㆍ운사라 한다. 가(加)는 곧 가(家)이다. 오가(五加)를 말하자면, 우가는 곡식을 주관하며, 마가는 목숨을 주관하며, 구가는 형벌을 주관하며, 저가는 병을 주관하며, 양가는 선악을 주관한다고 한다. 백성은 64종족이 있었고 무리는 3,000이 있었다....」
10월의 제천은 마침내 천하만세의 풍습이 되었다. 이는 곧 신의 나라 특유의 성대한 행사로서 외국에는 이와 견줄만한 것이 없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산은 명성을 누르고도 남는다. 옛날의 삼신산이라 함은 곧 태백산으로서, 역시 지금의 백두산이다. 대저 그 옛날 신시의 인문교화는 근세에 이르러 건재하게 행해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천경신고(天經神誥)는 오히려 후세에 전해진 바가 있는 듯 거국적으로 남녀가 역시 모두 말 없는 가운데 받들고 있는 바로서,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열살 미만일 때에는 목숨의 안전과 위험, 우환, 잘나고 못남 따위는 애오라지 모두 삼신께 의탁한다. 저 삼신은 곧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天一神)이시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는 한나라의 왕 유철(劉澈) 무제(武帝)에게 말하기를,「폐하께서 겸양하사 방탕치 않으시면 삼신의 즐거움을 얻으실 것인즉」라고 했는데, 위소(韋昭)는 삼신상제에 주를 달아「삼신의 설은 어느덧 저들의 땅에도 전파되었음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진역유기震域留記>에서 말한다.
유방(劉邦)은 동이 계통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병사를 풍패(豊沛)에서 일으켰는데 곧 풍패의 풍속은 치우에게 제를 지내므로 나라도 역시 그 풍속을 따라 치우에게 제를 지냈다. 그리하여 흔고(釁鼓)¹하고 깃발을 들고 마침내 10월에 패상(灞上)에 이르러 제후와 더불어 함양(咸陽)을 평정하고 즉위하여 한왕(漢王)이 되었던 바 이로인해 10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정하고 이것이 진나라의 정월 초하루를 빼앗는 일이긴 하나, 역시 동황태일(東皇太一)²을 받들어 공경하고 치우를 공경하여 제사지낸 때문이라 할 것이다. 뒤에 4년만에 진나라 땅이 이미 평정되니 축관(祝管)에게 명하여 치우의 사당을 장안에 세우게 하였다. 그가 치우를 존경함이 이와 같았다.
1. 흔고(釁鼓): 옛날에는 전쟁이 있으면 먼저 희생의 제물로 짐승을 죽이고 그 피를 북에 바르고 제사지
냈다고 한다.
2. 동황태일(東皇太一): 동쪽의 황제 단군왕검을 말한다는 설이 있다.
진나라의<천문지天文誌>는
<치우기(蚩尤旗)는 꼬리별 혜성과 비슷하여 뒤가 꼬부라져서 깃발을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에 병란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되신 때문이다. 또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엔 <치씨는 치우의 후예>라고 했고 혹은 <창힐(蒼頡)은 고신(高辛)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이다. 대극성(大棘城)에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산동의 회북(淮北)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으니, 대저 치우천왕의 영풍위열(英風偉烈)함이 먼 나라의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밀기密記>에서 말한다.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향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합쳐서 한 군데에 매장하고 표시하여 지석(支石)이라 하더니, 뒤에는 변하여 단을 만들고 지석단이라 불렀던 것이다. 또 제석단(祭夕壇)이라고도 했다. 산의 꼭대기에 있으며 산을 파고 성단(城壇)을 만들어 놓은 것을 천단(天壇)이라 했다. 산골짜기에 있고 나무를 심어 토단(土壇)을 만든 것을 신단(神壇)이라 한다. 지금 승도(僧徒)들이 혼동하여 제석(帝釋)을 단이라 부르는 것은 곧 옛 고사를 말함이 아니다. 삼신을 지키고 사람의 목슴을 이치대로 하는 자를 삼시랑(三侍郞)이라 하는데 본래 삼신의 시종랑(侍從郞)이다. 삼랑은 본래 배달의 신하요 역시 삼신을 수호하는 직책을 세습한 것이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서 말한다.
「삼랑(三郞)은 배달의 신하이다. 씨 뿌리고 재물을 주관하는 자를 업(業)이라 하고, 교화하고 복종하게 함을 주관하는 자를 랑(郞)이라 하고, 무리를 모아 공을 이루는 것을 주관하는 자를 백(伯)이라 한다. 즉 옛날에 시작된 신도(神道)이니 모두가 영(靈)을 받아 예언하는 일이 많은데, 하늘의 이치에 따라 종종 적중하기도 한다.....
불상이 처음 들어 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大雄)이라 불렀다. 이는 승도들이 옛 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의 승가의 말은 아닌 것이다. 또 가로대 승도와 유생(儒生)이 모두 낭가(郎家)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함을 이로써 알 수 있다....
혹은 땅을 평평히 하고 장사지내는 자도 있고, 둘레에 박달나무나 버드나무ㆍ소나무ㆍ잣나무 등을 심어 이로써 표시를 삼았다. 이는 신시의 시절에는 능이나 묘를 쓰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중고시대(中古時代)에 이르러 나라는 풍부해지고 민족은 강성하게 되었으니 점차 번거로워져서 장례를 사치스럽게 치르게도 되었고, 제사를 지냄에도 예의가 있었고, 묘를 쓰는 것도 자못 융성하게 되었다. 혹은 둥글게, 혹은 네모나게 하여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장식하였으며, 높이ㆍ크기ㆍ넓이ㆍ폭ㆍ모지고 바른 것까지 규격이 생겼으며, 안쪽의 벽과 바깥쪽의 덮는 것까지 고르게 정밀하고 교묘하였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능묘(陵墓)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
제4.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 삼한관경에서 관경(管境)이란 관할하는 경내를 뜻하는 매우 막연한 개념이지만 우리 선조들의 기개
를 보여주는 말로 온 <누리>라는 말의 <누리>의 뜻이 담겨 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주신
(珠申)이라는 말은 소속(所屬)관경을 뜻한다고 기록되었는데, (중국 기록에 영향을 줄 정도로) 우리
선조의 기개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37쪽 주해)
태백산은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고 높게 비서갑(斐西岬)의 땅에 우뚝 서 있다. 물을 뒤로 업고 산을 끌어 안고 있는데, 크게 둥그렇게 돌아 모이는 곳이 있으니 곧 대일왕(大日王)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라. 세상에 전하기를「한웅천왕이 여기까지 순수하시어 사냥하시었기 때문에 그를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 가고, 우사는 북을 치면서 돌아가며 춤을 추고, 운사는 백검(佰劍: 백 사람을 거느리는 지휘자를 상징함)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임하실 때의 의식은 이처럼 장중하였다. 산이름은 불함이라 하더니 지금은 또 완달(完達)이라 하니 그 음이 비슷한 바 있다. 뒤에 웅녀의 군(君)이 천제의 신임을 받아서 세습하여 비서갑의 왕검이 되었다. 왕검은 속어로 말하면 대감(大監)이니 땅을 관리하고 지키며, 포악함을 제거하여 백성을 돕는다. 천왕은 나라 사람들의 뜻을 살펴서 저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길,「부모는 공경해야 하며, 처자는 보호 양육해야 하며, 형제는 사랑하고 장노는 존경하고, 어리고 약한 자에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뭇 백성은 믿어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또 의약ㆍ공장(工匠)ㆍ축산ㆍ농사ㆍ측후ㆍ예절ㆍ문자의 법을 제정하고 땅을 하나같이 평등하게 하여 이로써 잘 교화시키니 멀리 떨어진 백성들까지 모두 서로 의심치 않게 되었다. 웅씨에서 갈려져 나간 자 중에 소전(少典)이라고 있었는데 안부련(安夫連)의 말기에 소전은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한웅 아들 신농(神農)¹은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烈山: 신농씨가 일어난 곳)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편리하게 하였다. 소전의 별고(別孤: 아비없는 자식 즉, 갈려나간 고아)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였으므로 헌구(軒丘)로 유배시켰다. 헌원(軒轅)의 무리²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와라(斯瓦羅)한웅 초기의 일이다. 웅녀군의 후손으로서 여(黎)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壇墟)에 책봉받아서 왕검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는 자 천여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 지나 신인(神人)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裨王)이 되었다. 섭정하신 지 24년에 웅씨의 왕은 전쟁하다가 붕어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곧 나라의 인물들을 불러 약속을 세워 가로대,
「앞으로는 백성의 뜻을 물어 공법을 만들고 이를 천부라 할지니, 그 천부란 만세의 강전(綱典)이며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삼한으로 나라를 나누어 통치하시니, 진한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시고 도읍을 아사달³에 세우고 나라를 여시사 조선이라 하시고, 이를 일세 단군이라 한다.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
1. 신농(神農); 염제(炎帝) 신농씨(B.C 3218~2698)와 그의 무리를 뜻한다. 중국 삼황 가운데 두 번째 황제
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한국에서 갈라져 나간 소전씨(少典氏)의 후예이다. 농사와 의
약의 원조라고 불리운다.
2. 헌원(軒轅)의 무리: 황제 헌원(B.C 2692~2592)씨와 그의 무리를 뜻한다. 황제(黃帝)는 제호요, 헌원은
그의 국호이다.
2. 아사달: 역시 고대어에 대한 조예 없인 해석할 수 없는 지명이다. <달>이란 말은 고대어로 산ㆍ땅을
뜻하는 말이다. 양달ㆍ음달의 달도 그 뜻이다. <아사>란 말은 물론 일본 말의 아사アサ와
같은 말이기도 하고 국호인 조선의 조(朝)와 관계되는 말이므로 한때 굉장한 설득력을 갖
는 해석으로 유력하였다. 그러나 일본말 아사アサ가 우리의 고대어 <아시>에서 간 말이
므로 <아시>가 처음ㆍ새ㆍ애벌의 뜻이 있어 아시갈이(초경初耕) 아시빨래(초벌빨래) 등
의 용법이 남아 있다. 우리 고대어의 어원을 일본 말에서 따옴은 본말이 전도된 논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사달은 처음 땅ㆍ새 땅ㆍ처음 산ㆍ새 산을 뜻하는 우리의 고대어이
다. 참고로 알아둘 것은 일본의 수도 동경을 옛날엔 <에또>라 했는데 이 에또가 우리말 <
애터> 곧 ‘새터→아시터→아사달’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일본 학자가 말하고 있으니 신
천지에 찾아간 일본의 개척자들인 우리 조상들이 쓰던 말로 '애터'라 했을 것이라는 충
분한 심증이 가는 해설이다.
에도라는 말의 어원은 조선어의 애터가 와전하여, 곧 새로운 곳을 뜻한다는 설도 있어 더
욱 더 흥미 있다. 이렇게 어문학으로 민족의 이동사를 탐구하는 학문도 매우 흥미로운 연
구 과제가 된다. 아무튼 그 아사달이 현재 만주의 하르빈 남쪽의 완달산이라고 단재 신채
호는 정의하였으니 우리 민족은 어쩌다가 개국의 터전마저도 지키지 못하는 약소국이 되
고 말았던가? 장탄식이 절로 난다.(197쪽 주해에서)
◈ 마한세가(馬韓世家) - 상
⊙ 삼한(三韓) 가운데 마한은 우두머리 격으로 단군이 따로이 왕을 세워 통치하였고, 변한. 진한이
제후국인 것처럼 기술하였으나, 단재는 진(辰: 단재는 신이라 읽음)이 상국이요, 번(番, 혹은변). 막
(莫, 혹은 말.마)이 하국이라 하였다. (130쪽 주해)
곰무리와 범무리가 서로 다투던 옛날 한웅천왕께서 아직 군림하시기 전 묘한(苗桓)은 구황(九皇)의 하나였다. 옛적 이미 우리 한족(桓族)이 유목 농경하던 때에 신시(神市)의 가르침이 열렸다......사람과 문물이 어느덧 풍숙하였으니 때마침 이때에 자부선생(紫府先生: 갈홍葛弘. 진나라 시대 도사)께서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을 만드시고.....이에 윷놀이¹를 만들어 이로써 한역(桓易: 주역에 대비되는 한국의 역)을 강연하니 대저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적은 바로 천부의 유의(遺意)였다.....책력을 만드사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일 년으로 하니 이것이 바로 삼신일체의 윗어른이 남긴 법이다.
1. 윷놀이의 도.개.걸.윷.모가 이 당시의 5가(五加)인 저가(猪加: 돼지), 구가(拘加: 개), 양가(羊加: 양),
우가(牛加: 소), 마가(馬加: 말) 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계속하여 치우(蚩尤)씨가 있었는데 구야(九冶)를 만들어서, 광석을 캐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돌을 날리는 기계도 만들었다. 이에 천하는 감히 그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때에 헌구(軒丘)가 굴복치 않으니 치우는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이를 크게 징벌코자하여 탁록에서 싸웠다. 탁록은 지금 산서성의 대동부(大同府)이다.
때에 유위자(有爲子)가 묘향산¹에 숨어 살았으니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으로 부터 나온 것이다. 지나가다가 웅씨군을 알현하니 웅씨군은「나를 위해 도(道)를 말하라」고 청했다. 대답해 가로대,
「도의 대원(大原)은 삼신에게서 나오나니 도란 도라고 할 것도 없으며 그 나타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도라고 할 것이 있다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며 나타남이 있다면 역시 도는 아닌 것이지요.....
대개 대시(大始: 태초)에 삼신님은 삼계(三界)를 만드셨으니, 물은 하늘을 본뜨고 불은 땅을 본 떴으며 나무는 사람을 본뜬 것입니다. 무릇 나무라는 것은 땅에 뿌리를 두고 하늘을 향하였으니 역시 사람도 땅을 밟고 서서 능히 하늘을 대신함이라.」라고 하니, 임금께서는「옳을시고 그 말씀이여!」하시더라.
1. 묘향산: 고려시대의 기록이라는 표가 난다. 묘향산이 고대사에 등장함은 크게 잘못이다. 한반도 평안
북도의 묘향산이 한국 고대사의 대상 강역으로 나타날 수 없고 이 글을 쓴 사람이 한반도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203쪽 주해)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으로 나누어 관경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熊佰多)¹를 봉하여 마한이라고 하였다. 달지국(達支國)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白牙岡)이라고도 불렀다.
1. 웅백다(熊佰多): 웅씨의 설명을 완벽하게 하기 위하여 등장시킨 이름으로 지나치게 작위적인 냄새가
짙다고 역자는 말한다.
웅백다를 마한의 왕으로 봉한 이후로 노덕리(盧德利), 불여래(弗如來), 두라문(杜羅門), 을불리(乙弗利), 근우지(近于支), 을우지(乙于支), 궁호(弓戶), 막연(莫延), 아화(阿火), 사리(沙里), 아리(阿里), 갈지(曷智), 을아(乙阿), 두막해(豆莫奚), 독로(瀆盧), 아루(阿婁), 아라사(阿羅斯) 등 17명의 왕의 업적과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아루가 죽고 무오년에 동생 아라사(阿羅斯)가 즉위하였다. 이 해에 고등(高登)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에 웅거하면서 천왕(단군)에게 항거했다. 마한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이를 토벌코자 하여 홍석령의 경계지점에 이르렀을 때 천왕께서 고등을 용서하고 우현왕(右賢王)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 토벌을 멈췄다. 을미년에 천왕은 해성에서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시고자 하니 마한은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의 아들 색불루(索弗婁)¹가 즉위하니 마한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1. 우현왕의 아들 색불루(索弗婁): 단군세기 22세 색불루편 주해에서는「 21세 단군 소태 때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우현왕이 되었으며, 단군 소태의 어지(御旨)를 어기고 그의 손자 색불루가 단군에 등극
하여 22세 단군이 되었으니, 색불루 단군에게 고등왕은 바로 조부가 되는 셈이다.」라고 했으니(100
쪽 주해) 둘 중 하나의 기록은 오류이리라. 참고로 색불루는 우리나라 최초의 쿠데타 정권을 이루었
다고 추정됨.
◈ 마한세가 - 하
⊙ 22세 단군 색불루는 요즘으로 한다면 쿠데타에 의해 단군이 된 셈이다. 아마도 단군조선 최초이지
싶은데 이는 더 확인해봐야할 내용이다. 색블루 단군은 즉위하여 제도를 개편하고 사회질서를 올바
로 잡아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한다.
마한의 왕은, 여원흥(黎元興)→ 아실(阿實)→ 아도(阿闍)→ 아화(阿火)→ 아사지(阿斯智)→ 아리손
(阿里遜)→ 소이(所伊)→ 사우(斯虞)→ 궁홀(弓忽)→ 동기(東芑)→ 다도(多都)→ 사라(斯羅)→ 가섭라
(迦葉羅)→가리(加利)→ 전나(典那)→ 진을례(進乙禮)→ 맹남(孟男)으로 이어진다.
단군 색불루가 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병(大兵)을 장악하니, 진한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도 역시 이길 수 없어 패해 버렸다. 전제(前帝)는 사람을 시켜 옥책(玉冊)과 국보를 전하여 제(帝)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 새 임금이 백악산(白岳山)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들이 아무도 승복하지 않았으나.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등이 명령을 받아 저들을 설득했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
병신원년 정월 마침내 녹산(鹿山: 어느 산인지 알 길이 없으나 중요한 산명이라는 것과 한반도의 산 이름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에서 즉위하니 이곳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그대들 아사달에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전함으로써 전제의 왕위를 선양케 하였느니라. 이제 이름을 세습하여 존귀함을 칭한다 하더라도 나라의 산천은 이미 그 이름이 장부에 실렸고, 제천의 예는 마땅히 나라의 법에 정한 바니, 남용할 일이 아니다. 반드시 옛 실례를 따를 지니라. 이에 성실하게 공경을 다하고자 하는 자는 이제 마땅히 제사를 환영하여 이전의 제물들을 골라 삼가 신의 영역을 깨끗이 하고 정결히 한 후, 생폐(牲幣: 희생으로 드릴 제물과 공물. 곧 산 짐승과 공양으로 바칠 제물)를 갖추어 이를 가지고 삼신에 보답할지어다.」
이에 단제는 날을 택해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향과 축문을 여원흥에게 내려 주었다. 16일 이른 아침에 경건하게 삼한(三韓)의 대백두산(大白頭山)의 천단에서 제사를 행하고, 단제가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 제사를 올렸다.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다¹. 조선이란 관경을 말한다. 진조선(眞朝鮮)은 천왕이 몸소 다스리고 땅은 곧 옛날의 진한대로 하고 정치는 천왕이 친히 다스리도록 하니, 삼한이 모두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흥에게 명하여 마한이 되어 막조선(莫朝鮮)을 통치케하고 서우여(徐于餘)로 하여금 번한을 삼아 번조선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단군의 관경²이라 한다. 이것이 곧 진국(辰國)³으로 역사에서 단군조선이라 함은 이것이다.
여원흥이 이미 대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이라 한다. 천왕도 역시 매년 봄에는 반드시 마한에 머무르시며 백성의 근면하기를 정치로써 장려하였으니 이에 자공후렴(藉供厚斂: 어떤 일을 빙자하여 물건이나 돈을 공여받거나 억울한 세금을 많이 거두어 들이는 일)의 폐단이 마침내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조서를 내려 가로대「생각컨대 짐 한 사람을 공양키 위하여 백성들을 들볶아 공물을 내게 함은 곧 정치가 없다는 말이니, 정치 없고서야 왕이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하시고는 엄하게 명하여 이를 철폐하였다.
1. 삼한을 삼조선으로 하다: [단군세기]편에서 44세 단군 구물(丘勿)의 기록에도 「나라 이름을 대부여
(大扶餘)라고 고치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바꿔 불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2. 단군의 관경: 반복해서 말하거니와 여기 마한ㆍ번한의 한은 왕을 뜻한다. 단군은 곧 진한으로 천자
(天子)에 해당하고 마한ㆍ번한은 천자의 통치를 받는 제후에 해당한다. 단군의 관경이라 하면 진한+
번한+마한의 넓은 강역 전부를 뜻한다.
3. 진국: 진ㆍ번ㆍ마의 삼한을 통틀어 진국이라 한다는 뜻이다. 상왕, 곧 천자를 진한이라 하니 진국이
라는 말도 어울린다.
갑진년에 궁홀(弓忽)이 즉위하더니 갑인년에 협야후(狹野侯)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海島)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가리(加利)가 즉위하였는데, 을묘년에 융안(隆安)의 사냥족 수만이 모반을 일으켰다. 관병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적이 마침내 급하게 도성에 쳐들어오니 가리도 역시 출전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병진년(B.C 425)에 상장(上將) 구물(丘勿: 44세 단군)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우화충(于和沖)을 죽여버리고 도성을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보다 먼저 가리의 손자라는 이유로 전나(典那)가 들어가 막조선을 계승하니 이때부터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다.
전나가 죽으니, 아들 진을례(進乙禮)가 즉위했다. 진을례가 죽으니 을묘년에 아들 맹남(孟男)이 즉위하였다. 무술년 수유(須臾)의 사람 기후(箕詡)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 왕이라 칭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우리와 함께 기후를 치자고 했으나 막조선은 따르지 않았다.
계해년(B.C 238) 단군 고열가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眞朝鮮)은 오가(五加)와 함께 진시황 정(政)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미처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마한세가 역대기>
세대 | 왕 명 | 세대 | 왕 명 |
1 | 웅백다(熊伯多) | 19 | 여원흥(黎元興) |
2 | 노덕리(盧德利) | 20 | 아실(阿實) |
3 | 불여래(弗如來) | 21 | 아도(阿闍) : 아실(阿實)의 동생 |
4 | 두라문(杜羅門) | 22 | 아화(阿火) |
5 | 을불리(乙弗利) | 23 | 아사지(阿斯智): 아화(阿火)의 동생 |
6 | 근우지(近于支) | 24 | 아리손(阿里遜) : 22대 아화의 아들 |
7 | 을우지(乙于支) | 25 | 소이(所伊) |
8 | 궁호(弓戶) : 을우지(乙于支)의 동생 | 26 | 사우(斯虞) |
9 | 막연(莫延) : 두라문(杜羅門)의 동생 | 27 | 궁홀(弓忽) |
10 | 아화(阿火) : 막연의 동생 | 28 | 동기(東杞) |
11 | 사리(沙里) | 29 | 다도(多都) |
12 | 아리(阿里) : 사리의 동생 | 30 | 사라(斯羅) |
13 | 갈지(曷智) | 31 | 가섭라(迦葉羅) |
14 | 을아(乙阿) | 32 | 가리(加) |
15 | 두막해 (豆莫亥) | 33 | 전나(典那) : 가리(加利)의 손자 |
16 | 독로(瀆盧) | 34 | 진을례(進乙禮) |
17 | 아루(阿婁) | 35 | 맹남(孟男) |
18 | 아라사(阿羅斯) : 阿婁의 동생 |
|
※ 비슷한 기간 동안 존재했던 번한이 74대의 왕이 있었던 점과 너무 차이가 나는데 본문에는
아무 설명이 없다.
◈ 번한세가(番韓世家) - 상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涿芮: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의 결전장)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를 평정하셨다. 산을 뚫고 길을 내시니 땅 넓이는 만 리에 이르더라. 단군왕검은 제요도당(帝堯陶唐)¹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虞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 형제가 다시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공경스럽게 효도함을 앞세우게 되었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게 미치니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塗山)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司空)인 우(禹)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우를 낭야성(琅耶城)에 두어서 이로써 구여분정(九黎分政)²의 뜻을 정하였다. 바로 <서경書經>에서 말하는 바의「동순(東巡)하여 망제(望祭)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東后)를 찾아뵙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辰國)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하는데 낭야에 한번씩 이르른다. 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에 조근(朝覲: 조정에 알현하는 것)하기를 네 번씩이었다.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게 세상에 소문난 자를 골라 번한(番韓)이라 하고 부(府)를 험독에 세우게 하였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한다.
1. 제요도당: 제요도당과 같은 때에 건국하였다함은 요임금의 즉위 원년을 기준으로 우리의 단기의 기
원을 비정했다.
2. 구여분정(九黎分政): 우리 민족으로서 중국 대륙에 진출한 민족을 구여(九黎)라 부르고 그 우두머리
를 치우(蚩尤)라 한 듯하다. 중국사는 이를「蚩尤爲九黎之後」라 하거나「苗族
之國名爲九黎 君主名蚩尤」라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여분정이란
말은 중국 진출의 동이족이 독립된 정치 기구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치두남(蚩頭男)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 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케 하였다. 경자년에 요중(遼中)에 열두 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ㆍ영지ㆍ탕지ㆍ용도ㆍ거용ㆍ한성ㆍ개평ㆍ대방ㆍ백제(百濟)¹ㆍ장령ㆍ갈산ㆍ여성이 그것들이다.
1. 백제(百濟): 요중에 백제성이 있으니 어찌 한반도 서남쪽의 백제를 연상할까? 실제 백제의 건국지 대
방이 이곳에 있었다. 결코 황해도가 아닌 것이다.
갑술년에 태자 부루는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 달 동안 낭사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했다. 우순도 역시 사악(四岳: 순임금 때 제후들을 통솔하던 우두머리들)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淮)와 대(垈) 지방의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虞司空: 제순유우의 사공벼슬했던 사람)에게 고하여 가로대,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三神上帝)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 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천부왕인). 또 여기 신침(神針)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또 황거종(皇鋸宗)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 이것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三寶)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고 하였다. 이에 우나라 사공은 삼륙구배(三六九拜: 삼육대례)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천제 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답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 반드시 그리하리이다.」라고 하였다.
해모라가 죽고 단군 소태(蘇台) 5년 우사의 소정(小丁: 은나라 14대 왕인 조정祖丁을 말함인 듯)을 번한에 임명하였다. 대저 고등(高登)이 항상 그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에 뛰어났기 때문에 제(帝)에게 권하여 임명하도록 한 것이라 때에 은나라왕 무정(武丁)이 막 병사를 일으켜 치려하매 고등이 이를 듣고 마침내 상장(上將) 서여(西余)¹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索度)에 이르매 병사를 보내 불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다. 서여는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1. 서여(西余): 기자조선의 기자(箕子)일 거라 여겨지는 서여(胥餘: 소태 단군 다음인 색불루 단군 때 등
장하는 인물)인지는 확인해봐야겠다. 시기적으로 동시대 인물인지라.
◈ 번한세가(番韓世家) - 하
단군 색불루(索弗婁)는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은나라왕 무정(武丁)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우여(徐于餘)¹를 폐하여 서인을 삼았더니 서우여는 몰래 좌원(坐原)에 돌아와 사냥꾼 무리 수천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개천령(蓋天齡)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단제께서는 몸소 삼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이에 먼저 사람을 보내 서우여를 비왕(裨王)에 봉할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서우여가 이에 따르므로 단제께서는 서우여를 번한으로 삼으셨다. 4년 기해에 진조선은 천왕의 칙서를 전하였는데 가로대「그대들 삼한은 천신을 위로 받들고 백성들도 이에 따르도록 교화하라」고 하다. 이때부터 백성들에게 예의ㆍ누에치기ㆍ베짜기ㆍ활쏘기ㆍ글 등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하여 금8법(禁八法)을 만들었으니,
1)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2)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케 하고,
3)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는 그집의 노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며,
4)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하게 하고,
6)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키며,
7)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자는 태형(笞刑)으로 다스리고,
8) 사기치는 자는 훈계 방면하나 스스로 속죄하려 하면 공표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면하여
주지만 백성들이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서 결혼도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서로 도둑질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 문을 닫거나 잠그는 일도 없었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이나 들, 도읍지를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올리니 어질고 겸양하는 풍속이 가득했다.
1. 서우여(徐于餘): 기자조선의 기자(箕子)일 거로 추정되는 인물. 한편, 본문 서두의 「 번한의 (準)」
을 설명하는 부분에서(23쪽 하단 주해),「 단재 신채호의 추측처럼 기자가 직접 들
어와서 왕조를 세운 게 아니라 기자의 먼 후손 가운데 혹 번한의 마지막 왕으로 추
대된 자가 있어 <기자조선>이라는 가공의 왕조가 생겨났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참고사항이다.
누사가 죽으니 을미년에 아들 이벌이 즉위하였다. 병신년에 한수 사람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 기미년에 상장 고력을 파견, 회군과 합쳐 함께 주나라를 치게 하였다....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임오년에 연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 와서 안촌골(安村忽)을 공격했다. 또 험독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須臾)의 사람 기후(箕珝)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움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번 2한(韓)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蓋城: 연나라 수도)의 남쪽에서도 싸우려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대신과 자제¹를 인질로 삼았다.
1. 대신과 자제: 자제(공자)는 누군지 모르고 대신은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이다. 이 진개는 B.C 339년
인질이 되고 탈출하여 모반침구하던 해가 B.C 311년이니, 무려 28년 동안 번한에 억류된
셈이다. 번한의 웬만한 군사 비밀은 다 알아가지고 탈출 귀국하여 쳐들어 왔으니 번한
이 크게 위태로왔음은 당연하다.
기윤이 죽자 기사년(B.C 172)에 아들 기비(箕丕)가 즉위하였다. 처음 기비는 종실의 해모수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여 했으니 열심히 명령을 받들어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은 생각컨대 기비 그 사람 때문일 것이다.
세대 | 왕 영 | 세대 | 왕 명 |
1 | 치두남(蚩頭男) : 치우 후손 | 38 | 마휴(麻床) |
2 | 낭사(琅邪) | 39 | 등나(登那) : 마휴의 동생 |
3 | 물길(勿吉) | 40 | 해수(奚水) |
4 | 애친(愛親) | 41 | 오문루(奧門婁) |
5 | 도무(道茂) | 42 | 누사(婁沙) |
6 | 호갑(虎甲) | 43 | 이벌(伊伐) |
7 | 오라(烏羅) | 44 | 아륵(阿勒) |
8 | 이조(伊朝) | 45 | 마휴(麻休 혹은 마목麻沐) |
9 | 거세(居世) : 伊朝의 동생 | 46 | 다두(多斗) |
10 | 자오사(慈烏斯) | 47 | 내이(奈伊) |
11 | 산신(散神) | 48 | 차음(次音) |
12 | 계전(季佺) | 49 | 불리(不理) |
13 | 백전(伯佺) | 50 | 여을(餘乙) |
14 | 중전(仲佺) : 백전의 동생 | 51 | 엄루(奄婁) |
15 | 소전(少佺) | 52 | 감위(甘尉) |
16 | 사엄(沙奄) | 53 | 술리(述理) |
17 | 서한(棲韓) : 沙奄의 동생 | 54 | 아갑(阿甲) |
18 | 물가(勿駕) | 55 | 고태(固台) |
19 | 막진(莫眞) | 56 | 소태이(蘇台爾) |
20 | 진단(震丹) | 57 | 마건(馬乾) |
21 | 감정(甘丁) | 58 | 천한(天韓) |
22 | 소밀(蘇密) | 59 | 노물(老勿) |
23 | 사두막(沙豆莫) | 60 | 도을(道乙) |
24 | 갑비(甲飛) : 사두막의 계부 | 61 | 술휴(述休) |
25 | 오립누(烏立樓) | 62 | 사양(沙良) |
26 | 서시(徐市) | 63 | 지한(地韓) |
27 | 안시(安市) | 64 | 인한(人韓) |
28 | 해모라(奚牟羅) | 65 | 서울(西蔚) |
29 | 소정(小丁) | 66 | 가색(哥索) |
30 | 서우여(徐于餘) | 67 | 해인(解仁 혹은 산한山韓) |
31 | 아락(阿洛) | 68 | 수한(水韓) |
32 | 솔귀(率歸) | 69 | 기후(箕詡) |
33 | 임나(任那) | 70 | 기욱(箕煜) |
34 | 노단(魯丹) | 71 | 기석(箕釋) |
35 | 마밀(馬密) | 72 | 기윤(箕潤) |
36 | 모불(牟弗) | 73 | 기비(箕丕) |
37 | 을나(乙奈) | 74 | 기준(箕準) |
※ B.C.194년 위만(衛滿)에 패하고 멸망하였다. (인터넷 자료 참고)
* 38대 마휴(麻床)에서 床 [평상 상, 상 상] => 아무래도 쉴 휴[休]의 오자로 보인다.
* 69대 기후(箕詡)에서 詡 [자랑할 후] => 이 字는 왜 한자 지원이 안 되지?
제5.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 <소도경전 본훈>에서 소도라는 것은 (아사달에 있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터를 소도라고 한다.
즉, 거기에서 배우고 공부하던 경전이란 뜻으로 이 소도경전본훈에는 우리 고유의 종교, 문화(문자
포함), 철학, 사상 등이 담겨 있는 중요한 기록들이다.
신시 때에 선인 발귀리(發貴理)가 있었는데 대호와 동문으로 학문을 배우고 도를 이미 통하여 바야흐로 저(渚:하북성 봉산에서 나와 우수에 합류되는 물길)와 풍산(風山: 산동반도에 있는 어느 산 이름)사이에서 노닐으니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아사달에서 제천의 예가 끝나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었으니 그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대일(大一) 그 극(極)은 이를 이름하여 양기라 하니,
없음과 있음이 섞여서, 빈 듯 하면서도 갖추어 묘함이 있도다.
삼일(三一)은, 그 체(體)는 일이요, 그 용(用)은 삼이라.
혼묘(混妙)가 한 둘레에 있으니 체와 용은 따로 갈라질 수 없도다.
......
원(圓)은 일(一)이 되어 무극(無極)이고
방(方)은 이(二)가 되어 반극(反極)이며
각(角)은 삼(三)이 되어 태극이라.
무릇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이란 천제 한웅에게 주어진 바니
일신(一神)은 내려와 충만하사 성(性)은 광명에 통하고
제세이화, 홍익인간이라 함은 이를 신시가 단군조선에 전하신 바이라.
한역(桓易)은 우사의 관리로부터 나왔다. 때에 복희(伏羲)는 우사가 되어 여섯 가축을 기르게 하였으며 또 신용(神龍)이 해를 쫓는 것을 살펴 하루에 열두 번 색을 바꾸는 것을 보고 이에 한역을 만들었다. 한은 곧 희(羲)와 같은 뜻이고 역은 옛날 용(龍)자의 본 글자다.
자부선생(紫府先生:갈홍葛弘.진나라 시대 도사)은 발귀리의 후손이다. 태어나면서 신명하여 도를 얻어 날아 오르사, 일찌기 해와 달을 측정하여 이를 정리하고 다음으로 오행(五行)의 수리(數理)를 따져서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저작하니, 이것이 칠성력의 시작이다....
한역의 체(體: 모습.외형)는 원(圓)이며 용(用: 쓰임)은 방(方)이다. 모양 없음으로부터 실(實)을 알게 되니 이것이 하늘의 이치다. 희역(羲易: 태호복희의 역)의 체는 방이며 용은 원이자. 모양있는 것에서 그 변화를 아니 이것이 하늘의 체이다. 지금의 역은 서로 체이면서 용이니, 스스로 원이면서 원하고, 스스도 방이면서 방, 스스로 각이면서 각이라. 이것이 하늘의 명이다.
천부경(天府經): 81자로 된 (대종교)경전으로 천체 한국(桓國)에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로써 한웅대성존
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자(鹿圖文字: 사슴 발자국 모양을 본따 만든 문자로써 세계 최초의 문자)로 기록케 하였는데, 태백산에 있는 옛 비석(단군전비檀君篆碑)을 보고 최치원(崔致遠)이 번역하여 이를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였다.
※ 천부경(天府經): 일부 학자는 천부경은 경전으로 볼 수 없고 이를 문장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일종의
기호나 부적이라 혹평하는 한학자들도 있는가 하면 주역의 수리학자들은 천부경의 수리학적 가치
만을 중시하여 삼라만상의 원리가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훤히 제시된 다시없는 경전이라 극찬하
기도 한다. 이에 해석 또한 각기 달라 본문에 실린 아래 해석본이 정확하다 할 수는 없다.
⊙ 천부경: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
일(一)의 시작은 무에서 시작하니 일이라 삼극으로 석(析)해도(쪼개도) 본(本)은 무진이니라.
天一一地一二人一三一積十鋸無匱化三
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三合六生七八九運三四成環五七
천에도 이삼이 있고, 지에도 이삼이 있고. 인에도 이삼이 있나니,
大三合六生七八九
대의 삼(천.지.인을 뜻함)에 삼극이 합쳐서 육이 되니 일이삼을 합하면 칠팔구가 생긴다.
運三四成環五七一妙衍萬往萬來用變動本
운의 삼은 사로써 성환하고 오와 칠은 일로써 묘연하여 만왕하고 만래해서 용변해도 본은 움직이지 않느니라.
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
본심은 태양에 본해서 양명하며 인중에서 천지는 일이라
一終無終一
일의 끝은 무로 끝이나 일이라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1328~1401)의 <농은유집(農隱遺集)>에 실린 원본
※ 최근에는 원본의 모양을 무(無)라기 보다는 무당 무(巫)로 해석하기도 한다. (네이버 참조)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은 자부선생이 헌원(軒轅황제)¹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맘을 씻고 의(義)에 돌아오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일찌기 삼청궁에 사셨으니 궁전은 청구국 대풍산의 남쪽에 있었다. 헌원이 몸소 치우를 배알했는데 가는 길에 명화를 거치게 되어 소문을 듣게 된것이다. 경문은 신시(神市)의 녹서(鹿書)로 기록되어 세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추연(推演)하고 주(註)를 더하여 따로 신선음부(神仙陰符))의 설이라고 한 것이다.
1. 헌원황제: <운급헌원기雲笈軒轅記>라는 책을 보면 헌원은 치우천황과 10년간 73회나 싸워 매번 패하
였다 한다. (180쪽 주해)
삼일신고(三一神誥)는 총 366자. 본디 신시개천시대에 나와서 책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대저 하나를 잡
아 셋을 포함하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옴의 뜻으로 근본을 삼는다. 원본에는 분장(分章)하지 않았으나 행촌선생이 처음으로 5장으로 나누어서 천신조화의 근원과 세상 사람들과 사물들의 교화를 상세히 쓴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장 허공(虛空): 36자. 제(帝) 가로되, " 너희들 오가의 무리들아, 파아란 것이 하늘이 아니며 까아
만(원문에는 玄玄으로 되어 있음) 것이 하늘인 것은 아니다. 하늘은 얼굴과 바탕
이 없으며 첫끝과 맞끝도 없으며, 위 아래와 사방도 없고 겉은 황하며 속은 텅하
여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싸지 않은 것이 없나니라."
제2장 일신(一神): 51자. 신은 위 없는 첫 자리에 계시사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을 가지사 하늘을
내시며, 셈 없는 세계를 차지하시고 많고 많은 물건을 만드셨나니 티끌 만큼도 빠
진 것이 없으며, 밝고도 영하여 감히 이름하여 헤아릴 수가 없다. 소리, 김으로 원
하여 빌어도 친히 보임을 끊나니 성품으로부터 씨(子)를 찾으라. 너희 머리 끝에
내려 계시나이다.
제3장 천궁(天宮): 40자. 천은 신국이라. 천궁이 있어서 온갖 착함으로 섬돌 삼고 온갖 덕으로 문을
삼나니 일신께서 계시는 곳이요, 신장과 석관들이 모셨나니 크게 좋으며 크게 빛
난 곳이라. 오직 성품을 트고 공적을 이룬 이라야 널리 영원토록 쾌락을 얻을지니
라.
제4장 세계(世界): 72자. 총총히 벌린 별들을 보라. 셈이 다함 없고 크고 적음과 밝고 어두움과 괴로
움과 즐거움이 서로 같지 않으리라. 일신께서 뭇세계를 만드시고 또 일세계(日世
界)의 사자를 시켜 700세계를 거느리게 하시니, 너희 땅이 스스로 큰 듯하나 한 둥
그런 세계이니라. 땅속 불이 올리어서 김(氣)을 불어 싸시고 밑까지 해와 빛과 더
움으로 쪼이시니, 기고 날고 되고 헤엄하고 심는 물건들이 번식하니라.
제5장 인물(人物): 167자. 사람과 만물이 한가지로 삼진(三眞)을 받나니 생각하면 사람들은 땅에서
헤매어 삼망(三忘)이 뿌리를 내렸고 진과 망이 서로 삼도(三途)를 지었다.
가로대, 성품과 목숨과 정기라. 사람은 온전하고 만물은 치우치니라. 참 성품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니 상철(上哲)이 통하고, 참 목숨은 맑음도 흐림도 없으니 중
철인(中哲人)이 알고, 참 정기는 두터움도 엷음도 없어 하철인(下哲人)이 보전하
니, 참으로 돌이키면 일신이 될지니라.
가로대, 심과 기와 신이라. 심이 성(性)에 의지하여 선악을 이루나니 선은 복이 되
고 악은 화가 된다. 기가 명에 의지하여 청탁을 이루나니 맑은 것은 오래 가고 탁
한 것은 쉬 사라진다. 신이 정(精)에 의지하여 두텁고 엷음을 이루나니, 두터움은
귀하고 엷음은 천하니라.
가로대, 느낌과 숨쉼과 부딪침이라. 굴러 열 여덟 지경을 이루나니 느낌에는 기
쁨. 두려움. 슬픔. 성냄.탐함. 싫음이요, 숨쉼에는 향내. 술내. 추위. 더위. 번개. 습
기요, 부딪침에는 소리. 빛. 냄새. 맛. 음탕. 다침이니라. 뭇사람은 착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두텁고 엷음을 서로 섞어서 가닥길을 따라 함부로 달아나다가, 낳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고, 철인은 느낌을 그치며 숨쉼을 고
르며 부딪침을 금하여 한 뜻으로 되어가서, 가닥을 돌이켜 참함에 나아가서 큰 고
동을 여나니, 성품을 트고 공적을 완수함이 이것이니라. 하였다.
(235~240쪽 참조)
<신지비사神誌秘詞>는 단군 달문(6세 단군) 때의 사람 신지(神誌) 발리(發理)가 지은 것이다. 본래 삼신께 올리는 옛제사에서 서원의 글이다. 저 상고제천(上古祭天)의 참 뜻은 백성을 위하여 복을 기원하고 신을 축복하여 나라를 일으킴에 있다.....
말하기를 「저울의 대는 부고량(扶蘇樑)이다」라고 했으니 곧 진한의 옛 서울을 말한다. 역시 곧 단군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이 그곳이니, 즉 지금의 송화강의 하르빈이다. 「또 저울의 추는 오덕지(五德地)」라 함은 번한의 옛서울을 말함이니 지금 개평부(開平府) 동북 70리에 있는 탕지보(湯地堡)가 그곳이다. 또 고려사에 말하기를 「저울그릇은 백아강이라」고 했으니 이는 마한의 옛 도읍지를 말하며 지금의 대동강이다.
곧 마한의 웅백다(마한의 1대 왕)가 하늘을 마한산에서 제사했다 함은 곧 이것이다. 삼가 삼한의 지세로써 여러가지 형석에 비교해보면 부소량은 나라의 저울대와 같고, 오덕지는 나라의 추와 같고, 백아강은 나라의 저울그릇과 같으니, 세가지 가운데 하나를 빼면 저울은 물건을 달 수 없고 나라는 백성을 보존치 못하리니, 삼신고제의 서원은 다만 삼한의 관경에 있는 백성을 기쁘게 하는데 뜻이 있다.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나니 지금 남해현 낭하리(浪河理)의 암벽에 신시의 옛조각이 있다. 부여사람 왕문(王文)이 쓴 바의 법류부의전(法類符擬篆)과 자부선생의 내문(內文)과 태자 부루의 오행(五行)은 모두 한단시대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은학(殷學: 갑골문자)과 한문은 아마도 왕문의 유범(遺範: 남긴 모범)일진저!
<유기留記>에「신획(神劃)이 일찌기 태백산의 푸른 바위 벽에 있었거늘」이라는 글이 있다. 그 모양은 ㄱ과 같으니 세상에서는 신지선인이 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말하기를「이를 글자 만든 것의 시작」이라고 한다.
대변설(大辯說)의 주(注)에 말하기를「남해현 낭하리의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대시(大始:태초)에 옛 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만 의지한 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신시엔 산목(算木)이 있었고 치우에게 투전목(鬪佃目)이 있었으며 부여엔 서산(書算)이 있었다. 그 산목이라하는 것은 이다. 또 전목(佃目)은 이다. 단군 가륵제(3세 단군) 2년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정음 38자를 찬하고 이를 가림다(加臨多)라고 했다. 그 글 모양을 보면 이렇다.
<이태백전서(李太白全書)>의 옥진총담(玉塵叢談)에는「발해국에 글¹이 있는 바 당나라에서는 아무도 이를 해득하는 자가 없었다. 이태백은 능히 이를 풀어 이에 대답했다」하고 있다. <삼국사기>엔「헌강왕 12년의 봄 북진으로부터 적국인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갔음을 상주하고는 마침내 그 나무에 쓰여진 15자를 취하여 바쳤는데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의 사람이 함께 신라국과 화통하고자 왔노라>고 써져 있다.」고 했다....
아마 거문고 바닥에 각문한 글은 옛 가림다 종류의 글이었을 것이다.
1. 발해국에 글: 발해 문자는 청나라 사람 김소발의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권20에 20여 자의
글자가 소개되고 있는데, 전자(篆字)도 예자(隸字)도 아닌 발해 독특한 문자이다. 심지
어는 한자를 거꾸로 적은 반자(反字)들도 더러 있다.
최치원은 일찌기 신지의 옛 비석에 새겨진 천부경을 얻어 다시 또 첩를 만들고 이로써 세상에 전했으니 낭하리의 조각은 바로 모두 그 실체의 자취이다. 세상엔 전하기를 「신시에는 녹서(鹿書)가 있고 자부에겐 우서(雨書)가 있고 치우에게는 화서가(花書) 있어, 투전문(鬪佃文)등은 즉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에겐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에겐 신전(神篆)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들은 널리 백산 청구 구려등에 쓰여졌다.」고 했다.....
진나라때 정막(程邈)은 숙신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隸法)를 한수(漢水)에서 얻었고, 또 그 휙을 계승하여 조금 바꾼 형으로 고쳤다. 그것이 지금의 팔분(八分: 팔분체)이다.
진나라의 왕차중(王次仲)은 또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의 먼 후예이다. 지금 글자의 근원으로 삼는 것을 탐구해 보면 모두 신시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그 지류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
신시의 음악을 공수(貢壽)라 하거나 혹은 공수(供授)라 하기도 하고 또 두열(頭列)이라고도 한다.
무리는 둘러서서 줄지어 합창으로써 삼신으로 하여금 크게 기쁘시게 하고, 나라가 번영하고 민심이 윤택해 질 것을 빌었다.
<백호통소의(白虎通疏義): 후한의 반고班固가 지은 책>에서는 조리(朝離)라 했고 <통전악지(通典樂志: 당나라 두우杜佑가 지은 책>에서는 주리(侏離)라 하였고 <삼국사기>는 도솔(兜率)이라 했다. 대저 즐겁고 건강하기를 신에게 기원하고 순리를 따라 족함을 안다는 뜻이 있음이라.
단군 부루(2세 단군) 때 어아(於阿)의 악(樂)이 있었으니, 대저 신시의 옛풍습으로, 삼신을 맞는 노래였을 것이다. 즉 가로대, 대조신(大祖神)을 삼신이라 부르고 하늘의 주재자라고 하였다.
<대변경大辯經>에서 말한다.
단군 구물(44세 단군)은 국호를 바꿔 대부여라 하고 수도를 장당경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개원(開原)이며 역시 평양(한반도 평양이 아니라 중국 요녕성에 있던 해성인 듯)이라고도 한다. 삼조선의 칭호는 단군 색불루(22세 단군)에게서 시작된다. 그렇더라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더니 이에 이르러 갖추었다. 삼한이란 분조관경의 뜻이 있으니, 삼조선이란 분권관경(分權管境)제도가 있다는 말이다. 먼저 큰 가르침은 매우 복잡하였으니 사람들이 능히 행하지 못하였고 연나라의 침입(진개秦開의 침입. B.C 311년)이래 전화가 여러 차례 있어 왔다. 해를 거듭하여도 일은 잘 풀리지 않으니 치화(治化)를 잃고 국력은 날로 약해져 갔다. 어느날 단제께서는 꿈에 천제의 가르침을 얻으셨다. 이에 다스림을 크게 바꾸려고 했다. 천제(天祭)의 묘(廟: 사당) 마당에 큰 나무를 세우고 북을 매어 달도록 하고 3.7일을 기한으로 하여 연령순으로 서로 마시면서 권화(勸化)하여 성책(成冊)하였다. 이를 구서(九誓: 9개의 맹세)의 모임이라 하고 항상 구서의 글¹을 사용했다.
1. 구서의 글
한 번 절한 뒤에 무리에게 말한다.
" 너희들 집에서는 효함에 게으름 없을지며, 집에 부모처자 있거든 곧 성심 성경(誠敬)하여 밀어줌에 우애로써 할지니라....."
두 번째 절하고 서약하여 말한다.
" 너희들 형제엔 우애 있기를 힘쓰라. 형제는 부모가 갈라진 것이요, 형이 좋아하는 것이면 동생이 좋아하는 것이어야 하고, 동생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면 형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세 번째 절하고 서약하였다.
" 너희들 스승과 벗에 믿음 있기를 힘쓰라. 스승과 벗을 도와 법이 서는 곳이라. 덕과 의는 서로 연마하고 과실은 서로 경계하라....."
네 번째 절하여 맹세한다.
" 너희들 나라에 충성하기를 힘쓰라. 나라는 선왕께서 세우신 것이라. 지금 백성들이 먹고 사는 곳이라....."
다섯 번째 절하며 맹세하기를," 너희들 뭇사람에게 겸손하기를 힘쓰라. 만인은 모두 천제의 백성이라. 나와 같이 모두 세 가지 참됨을 받아 주성(主性)의 바탕을 이룬 바이며 나라힘의 원천이 되는 바라....."
여섯 번째 절하며 맹세하기를,
" 너희들 정사를 밝게 아는 일에 힘쓰라. 정사는 난리를 다스리는 것에 관한 일이라. 풍백은 약속을 세우고, 우사는 이를 정무로 시행하고, 운사는 형(形)을 행하여 각각 직권이 있어 서로 침범치 못할 것이다....."
일곱 번째 절하여 맹세하여 말하길,
" 너희들, 싸움터에서는 용맹할 것을 힘쓰라. 싸움터는 존망이 결정되는 곳이라. 나라 있지 않으면 임금도 아비도 떨어져서 나무 우상처럼 되리니, 주인이 서지 않으면 처자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느니라....."
여덟 번째 절하며 맹세하여,
" 너희들 행동함에 있어서는 청렴하기를 힘쓰라. 청렴하지 않으면 양심은 절로 어둡고 능히 청렴하면 신명이 저절로 트이리라.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욕심을 내면 반드시 중풍을 앓을지며, 예절 없이 스스로 만족하면 스스로 해를 입고 남에게도 해를 끼치게 된다....."
아홉 번째 절하며 맹세하여 말하길,
" 너희들 직업에 있어선 의로움에 힘쓰라! 사람이 직업을 갖고 일을 행하면 반드시 책임이 있나니, 조금이라도 불의가 있거든 스스로 힘을 다하여 물리치지 못한다면 반드시 업신여겨 학대받고 무너져버릴 것이며, 만약 정의롭다면 백성들로 하여금 다 믿도록 하리니, 누가 있어 능멸하고 모욕하고 침탈하리오?....."
하니, 무리 소리내어 외치길,
" 옳소이다. 거부하는 자는 추방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풍속은 순박하고 도타운 것을 숭상하고, 의로운 싸움에 용감하고, 공동의 이익에 힘쓰며, 공동의 일에는 민첩하며, 공덕(公德)에는 밝았다. 선업은 권하고 과실은 바로 잡고 스스로 예의 있고 자애로운 풍속을 이루어 같이 삼신께 돌아와 의지하여 교화되었다.
<단군세기>에서 말한다.
"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키고 바른손을 올린 뒤에 삼륙대례를 행한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킴은 바른 엄지는 자(子)를 나타내고, 왼엄지는 해(亥)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른손을 더함은 태극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옛날에는 꿇어 앉기에 앞서 반드시 먼저 읍을 한 후 꿇어앉았으니 바로 보통의 예의이다.....배(俳)는 헌(獻)이다. 몸을 바치고 머리를 땅에 대며 선조에 보답하는 것이다. 헌은 또 현(現)이라고도 한다. 머리가 손에 닿는 것을 배수라 하고 머리가 땅에 이르름을 고두(叩頭)라한다. 고두는 곧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굽혀 절하는 것이다.
<참전계경參佺戒經>이 세상에 전해진 것은 을파소(乙巴素: 고구려 9대 고국천왕 때의 국상) 선생이 전한 것이라 한다. 선생은 일찌기 백운산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고 천서(天書)를 얻으니 이를 <참전계경>이라 했다.「 대시에(태초에) 철인(哲人)은 위에 계시사 인간의 360여 사(事)를 주재하시었다. 그 강령에 8조가 있나니 성(誠). 신(信). 애(愛). 제(濟). 화(禍). 복(福). 보(報). 응(應)이라 한다..... 고로 하늘은 비록 말은 없으나 척강(陟降: 하늘을 오르내림)하여 두루 보호한다. 나를 아는 자는 이를 열심히 찾아서 열매를 맺으리니, 하나같이 온전함에 이르고 모든 서람이 계를 받음이라.」하였다.
을파소가 덧붙여서 말했다.
" 신시이화(神市理化)의 세상은 8훈으로써 경(經)을 삼고 5사를 위(緯)로 삼아 교화가 크게 행해져 홍익제물(弘益濟物)하였으니, 참전(參佺)이 이뤄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의 사람들은 이 전계(佺戒)에 의해 더욱 더 스스로에 힘쓸지면,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일이 어찌 어려운 일로 될까 보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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