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에서 이른바 소피스트 저격수로서 한 시절을 풍미한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영악한 화술(즉 산파술 또는 변증술)로써 반성적 이성의 진수를 시연해보였다. 소크라테스의 그런 행적은 먼 훗날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를 괴물로 간주해버린 사연과도 일정부분 관련된 듯이 보인다. 하여간 그가 남겼다고 와전되어오는 이른바 "악법도 법이다"라는 루머만 오늘날까지 그토록 유명한데, 오래전에 나는 그의 애제자 플라톤이 남긴 <변명>이던가 <파이돈>이던가를 읽으며, 니체가 그를 그토록 역겨워했던 이유, 그리고 내가 그를 그토록 찜찜하게 여겼던 이유,를 자각하게 만든, 그의 마지막 유언을 발견하는 행운을 한 번쯤 누려보기도 했다.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
나는 이 그리스 의술신(醫術神)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단지 “의술신”으로만 기억해왔는데, 하여간, 오늘 그 신의 이름을 열 번이나 반복해서 중얼거리고 나서야, 이렇게 “아스클레피오스”라고 자판을 두드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는 이러고 나서 몇 초만 지나면 이 이름을 또 까먹어버릴 테지만ㅋ.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이하 '소쿠리'로 약칭)가 플라톤에게나 파이돈에게 남겼다고 알려진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는데, 나 대신 네가 그걸 좀 갚아다오.”
이 유언은 얼핏 보면 저 유명한, 그러나 그가 결코 말하지 않았다는, “악법도 법이다”에 비하면 너무나 소소하고 개인적인 유언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유언을 접하는 순간에 소쿠리의 인생관을 발견하고 말았다.
고대 그리스에는 병자가 의사의 치료를 받고 나으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예전에 아마도 펠로폰네스소스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저 유명한 히포크라테스에게 치료받은 후 아스클...에게 닭 한 마리 바치기를 깜박 잊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쩌면 당연한 듯하면서도 기묘한 사실은 하필이면 그가 죽기 직전에, 정확하게는, 자살하기 직전에, 바로 그 사실을 기억해내고, 그것을 유언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저 유언장면이 '죽을 때까지도 그 특유의 영악함 혹은 음험함을 잃지 않은 소크라테스 식 용감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저 유언은 나의 귓구녁에는
“내 인생은 병들어 있었다. 내가 살았던 세계도 병들어 있었다. 내 이제 죽어서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 그야말로 나의 죽음이야말로 병에서 낫는, 쾌유로다. 그러니 제자들이여 아스켈...에게 내 몫의 닭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라.”
로 들리더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소쿠리는 자신의 인생을 병든 인생으로 자신이 몸담았던 세상을 병든 세상으로 여겼다고 죽기(자살하기) 직전에 고백한 셈이다.
이 고백은 붓다교의 인생관 및 세계관과 일맥상통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 고백자는 죽기 전에 붓다교의 가장 초보적인 깨달음의 관문에 도달했을 뿐이라는 점에서만, 통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붓다교의 출발점. 나아가 그리스도교,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바울교” 전체.
소쿠리의 유언은 위상은 바로 이렇다.
아마도 그래서 무지불식간에 이른바 세계4대성자의 일원으로서 추앙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소쿠리의 저 유언만은 잘 알려지지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지도 않는데, 저 아스...라는 신의 암기되기 어려운 까다로운 이름 때문이었을까?
내 인생은 병든 인생이었고 내가 살았던 세계도 병든 세계였다!
고해이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계!
그러므로 내가 죽으면, 열반하면, 순교하면, 내가 병에서 나을 것이요, 해탈할 것이요, 천국에 오를 것이다!
이 고백의 저변에서는 그야말로 인생과 세계에 대한 저주의 연기가 몰캉몰캉 피어오르고 있지 않은가!
혹자는 이런 나의 해석을 과잉해석, 터무니없는 해석으로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기이한 것은 소쿠리, 붓다, 공자, 예수 이후 세계가 허무주의 양상을 띠어왔다는 것이다.
저들이 살다 죽은 시절, 그러니까 서기전 6~1세기에 이르는 500여 년에 걸쳐 시작된 대세.
인생과 세계는 고해이다!
이 고백은 지금 저주의 연기를 더욱 짙게 피워올리는 듯하다.
일단, 여기서 섬상을 접고, 두 가지 또다른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섬기해두자면,
하나는, 환자가 의사의 치료를 받고 병이 나으면 아스...에게 닭 한마리만 바치면 되던 시절의 의사들과 이 시대 의사들(?)의 차이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과 ‘고해’의 차이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야살스럽게 참으며 억누르는 이 변끼와 변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러니까 지금 나의 괄약근을 옴찔거리게 만드는 이 쾌통악시런 변끼가 소쿠리의 저주라면, 나의 변을 기다리며 꾸룩댈 허여멀건한 변기는 뒤샹의 저주일까?
하여간, 뿌직거려보렸다, 크힛.
(2007.05.05.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