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래 3.1 독립만세 운동의 역사성 ** < 자료제공: 동래 문화원, 동래고교>
89년전 3월7일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대표 (연희전문 김 0 0) 는 동래고보 학생대표
김귀룡, 고영건, 엄진영, 등을 찿아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함께 붕기할 것을 협의
하였다. 그리하여 동래고보는 졸업반 4학년생인 엄진영, 김귀룡, 고영건, 김인호,
이상덕, 박득용, 윤상동, 이병심, 손정줄, 배대효, 박임갑, 김철규, 등이 시위를 모의
하고 각 학급의 연락을 위해 3학년 추규영, 김기상, 손영수, 정호중, 박종관, 서진령,
등과 2학년 이수영,임명조 등을 비밀리에 모아 전 학생이 총궐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렇게 학생들의 시위가 무르익을 때인 3월10일경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경성공업고등
학교에 재학중인 곽상훈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동래에 내려왔다.
곽상훈은 도착 즉시 당시 동래고보 수학교사였던 이 환을 찿아가 3.1 독립운동 시위를
상의하였다.
이 환, 김병규 교사의 지원으로 사기가 고조된 학생들은 거사일을 동래장날인 3월13일
오후 2시로 잡고 고영건의 하숙방에서 서진령,엄진영,김인호,등이 학교에서 옮겨온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서 500장과 " 대한독립 만세" 라고 쓴 2개의 기치와 수백장
의 태극기 그리고 "오왕득실" 이라는 수백장의 전단을 준비하였다.
이와 같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동래고보 주동학생들은 동래장날인 13일 약속한 2시가
가까워지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동네 부인들도 몰래 전달받은 태극기
를 감추어 동래군청 ( 현 동래부 동헌) 앞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약속된 2시를 기해 엄진영은 군청 앞 맘미루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면서 " 대한독립만세"
를 선창하자, 주위에 모였던 200여명의 학생들과 부인들을 비롯한 장꾼들이 일제히
호응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2개의 기치가 세워지고 독립선언서와 '오왕득실'
이라고 쓴 수백장의 전단이 뿌려져 시장은 삽시간에 흥분의 도가니로 가득찼다.
이 때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던 일본경찰들도 극도로 당황하였고 그 중 한국인 경찰 한
명과 헌병보조원 한 명이 갑자기 모자와 제복을 벗어버리고 속옷차림으로 군중네 호응
하여 감격에 넘쳐 만세를 불렀다.
참으로 민족정기가 분출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일본경찰들은 시위군중과 학생들을 향해 발포를 하면서 폭압적인
진압에 나서 주동학생을 모두 검거하였다.
당시 시위에 참가하였던 학생들은 1919.4.22 부산지방법원에서 형을 받았다 .
한편 학생들이 검거된 뒤 그 다음 장날인 3.18 에는 일반군중들이 동래경찰서에 달려 가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를 볼 때 당시 동래고보생들의 시위가 얼마나 동래지역민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을 짐작힐 수 있다. 또 학생들이 갇혀 있는 동안 동래시장 모두가 하나 되어사식을 넣어주었던 동족애는 역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3.18 범어사 명정학교, 3.29.구포장터만세운동이 일어나는 등 부산 경남 지역 3.1독립만세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첫댓글 좋은 자료와 사진 잘 보고갑니다. 수고하셧어요.
1919.3.1 민족봉기는 그곳 부산 동래에서도 .... 이제 그 빛이 나는듯 하군요.... 잘 보고 갑니다 !
수고 하셨네.
89년전 민족봉기 재현....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