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세재(李世載)
[생졸년] 1648년(인조 26)~1706년(숙종 32) / 향년 58세
[경력] 조선후기 공조좌랑, 도승지, 형조참판 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지숙(持叔). 이사경(李士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후지(李後地)이다.
아버지는 나주목사 이하악(李河岳)이며, 어머니는 이중로(李重老)의 딸이다.
--------------------------------------------------------------------------------------------------------------
國朝人物考續三 / 卿宰
경기관찰사 이공 신도비명 병서(京畿觀察使李公神道碑銘 幷序)
이의현(李宜顯) 찬(撰)
고(故)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이공은 너그럽고 엄중한 자품에다가 나라를 다스리고 변방을 진무하는 재주를 지니고서 중외(中外)의 직임에 출입하며 명성과 공적이 크게 뛰어났다. 세상 사람들이 역량을 지녀 큰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자를 헤아릴 적에 공보다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조정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의 자리를 비워놓고 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공이 끝내 숙종(肅宗) 병술년(丙戌年,1706, 숙종 32) 3월 19일에 병으로 별세하고 말았다. 이에 관직에 있는 자들과 초야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 울부짖고 애통해하며 이르기를, “하늘이 이 사람을 남겨두지 않으니,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후로 38년 만에 공의 족자(族子)인 의현(宜顯,1669~1745)이 삼가 사람들의 말을 취합하여 글을 지어서 묘비에 새기게 되었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공은 용인인(龍仁人)으로, 시조 휘 길권(吉卷)이 처음으로 용인을 관향으로 삼고 태사가 되었으며, 이후로 관작이 이어졌다. 휘 사경(士慶,1563~1628)에 이르러 대사간이 되었는데, 왕의 모후(母后)를 위해 절의를 세워 사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니, 이분이 바로 공의 증조이다.
조고 휘 후지(後地)는 진사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선고 휘 하악(河岳)은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지내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북청 이씨(北靑李氏) 청흥군(靑興君) 중로(重老)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비범하였으며 자라서는 더욱 걸출하였다.
그러나 수차례 과거에 낙방하다가 35세가 되어서야 상사(上舍)에 오르고 49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의 명망이 대단하였다. 여러 차례 대각(臺閣)으로 옮겨갔는데, 논의가 강직하여 약한 자를 업신여기거나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에 정권을 잡은 자가 매우 좋아하지 않았다. 그 까닭에 옥당에 선발되려다가 갑자기 가자(加資)되어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목소리와 얼굴빛을 동요함 없이 명성이 절로 자자해져서 관찰사로 발탁되었을 때에 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뒤에 또 가자되어 평안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더욱더 풍교를 떨쳐 만사를 잘 소통시켜 마치 강물을 터놓은 듯, 잘 드는 칼날을 놀리는 듯 여유가 있었다. 동래는 왜인(倭人)이 출입하는 관문(關門)이었으므로 보통의 경우에 부사의 직임을 감당하기 어려워하였고, 남쪽 오랑캐의 풍속은 속임수가 많고 쉽게 화를 내었으므로 또한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자가 드물었다.
그런데 공은 부임하자마자 방(榜)을 내걸어 유시하여 약조를 거듭 밝히고 상인과 역관을 엄히 단속하여 농간을 부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왜인들 역시 공의 은혜롭고 믿음직한 인품을 경외하여 숨을 죽이고 복종하였다. 예전부터 울도(鬱島)에 관한 분쟁과 새 은돈을 통용하게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이러한 말들이 나왔다.
그러나 공은 이치를 들어 이를 일축해 버렸다. 그러자 왜인이 급기야 서로 이끌고서 관문(館門) 밖을 무단으로 나와 공을 위협하려 하였다. 공이 노하여 상인과 역관을 효수할 것을 계청하니, 상인이 두려움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에 왜인에게 약조를 어긴 책임을 물어서 제공하던 일용물품을 중단하여 사신의 예로써 대우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였다.
그리고 무단으로 관문을 나온 죄를 먼저 처벌하고 요구하는 바는 천천히 논의할 것을 거듭 계청하였다. 그러자 왜인이 크게 궁지에 몰려 정성을 바치고 잘못을 속죄하기를 간청하였다. 당시에 어떤 간악한 백성이 여종을 끌고 와서 왜인에게 중매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도망하였는데, 공이 군사를 풀어 관문(館門)을 지키며 대대적으로 수색하는 한편, 민가가 왜인의 관사와 가까워 교통하기가 쉽다는 이유로 이를 모두 불태워 없앴다.
그러자 왜인이 멀리서 바라보고 안색이 변하였다. 공의 위엄이 국외까지 떨쳐져 공이 재임하는 동안에는 감히 계략을 꾸며 대항하지 못하였다. 훗날 우리나라 사람이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갔는데, 왜인이 공의 근황을 묻고는 이어 탄식하며 말하기를, “청렴하고 명철하며 위엄이 있으니, 동래부 백 년이래의 제일가는 명관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오랫동안 남쪽 지방에 머무르며 온 도내의 이해(利害)에 대해 환히 알게 되었다. 그러던 터에 관찰사가 되자 반드시 크게 개혁하여 사명을 맡긴 뜻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백성들이 곤궁한 까닭은 군액(軍額)이 축소되고 전정(田政)이 문란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맨 먼저 쓸데없이 녹만 축내는 인원을 감축하였다.
그리고 휘하의 지방 관리로 하여금 이를 따라서 시행하게 하되, 시행하지 않는 자는 처벌하도록 계청하여 위엄으로 다스렸다. 그러자 모두가 두려워하여 명령을 잘 받들어서 마침내 남는 것으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가난한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다.
또 여러 고을의 토지 문서를 모두 가져다가 숨기거나 누락된 곳을 조사하여 곡식 만여 석을 찾아내었으며, 가산성(架山城)을 증축하고 병기를 정비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경주(慶州)에서 도적떼가 소란을 피우는 일이 발생하자, 조정에서 이를 지나치게 염려하여 연륜이 있는 장수를 보내어 진압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생쥐를 잡으려고 쇠뇌를 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도적을 진압하지 못했다 하여 해당 부(府)의 관원을 파직하고 도적을 체포하는 자에게 포상을 한다는 명을 내렸다. 이와 같이 하자 과연 도적을 사살하는 자가 나왔고, 생포한 도적의 수도 백여 명에 이르렀다.
마침내 도적의 두목 및 도적과 내통한 관리들을 처형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은 채 관련문서를 불태우니, 경주의 도적이 완전히 진압되었다. 어떤 자가 바다 건너에서 표류해 왔다고 일컬으면서, 그 하는 말이 수상하였는데, 공이 그의 한마디 말에 거짓임을 알아차리고 그를 처벌하였다.
어느 곽씨(郭氏) 여인이 혼사를 앞두고 있었는데, 한 장사꾼이 이 여인과 정을 통한 사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을 노파의 말을 증언으로 내세워 증명하였다. 공이 이를 의심하여 노파를 불러 심문하였는데 노파가 처음에는 자백을 하지 않다가 공이 위엄 있는 소리로 호통을 치자 그제야 장사꾼에게 돈을 받았다고 자백하였다.
이에 즉시 두 사람을 곤장 쳐서 유배 보내고, 혼수를 장만하여 여인의 혼사를 치러주었다. 여인은 감동하여 마음에 새기고 있다가, 뒤에 공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 곡을 하고 3년 동안 심상(心喪)을 하였다. 지친끼리 싸우는 자가 있으면 양쪽에 죄를 물었고, 산송(山訟)을 하는 자는 먼저 지관(地官)의 죄를 물었다.
소를 도살하는 자는 속전(贖錢)으로 대신하지 못하게 하고 도적을 처벌하는 법률대로 처벌하였으며, 재임한 3년 내내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이 덕분에 각 고을에 감히 법을 위반하여 소를 도살하는 자가 없어져서 밭가는 소들을 들에 방목한 채 밤을 보내도 아무 일이 없게 되었다.
공은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이름을 바꾸어 다시 송사하는 자를 반드시 알아채었고, 변장을 하여 도망하는 자를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알아보았다. 문서를 한번 눈으로 보면, 수십 일이 지나도 항상 눈앞에 펼쳐 놓은 듯이 환히 기억하여 결코 빠뜨리거나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고을의 사소한 죄과도 반드시 살펴, 때때로 갑자기 따져 묻기를, “너희들이 아무 일은 이렇게 하고 아무 일은 이렇게 하였으니, 감히 이렇게 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이렇게 하면 모두들 서로 돌아보며 두려워서 숨을 죽이고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였다.
공은 다스릴 적에 힘 있고 강한 자들을 위엄으로 제압하고 탐욕스럽고 부정한 자들을 엄중히 제재하여 일체 법률을 엄격히 적용하였다. 요컨대 이는 기강이 정돈되고 엄숙해지며 백성이 생업을 즐거워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어려운 일을 처리하는 능력은 더욱 뛰어나 안건이 산처럼 쌓여있어도 잠깐 사이에 다 처리하였고, 호령할 때에는 위엄이 있어서 명령한 그대로 따르는 효과를 보았다.
국조 이래로 영남(嶺南)을 다스리면서 뛰어난 행적이 있었던 사람으로는 관찰사 구봉서(具鳳瑞)를 으뜸으로 여기는데, 공이 충분히 그와 비견될 만하였으며, 강직하고 엄중함은 그보다 더 뛰어났다.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에는 수단과 재주가 더욱 노련해져서 마치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시원스럽게 일을 처리하였다.
큰 흉년을 만났을 때에는 백성을 구휼하는 일에 힘을 쏟아서 강화(江華)의 곡식을 수송해 오고 소금을 굽고 장(醬)을 만들어 백성들을 먹여 살렸다. 청나라 사신이 이어지자 역관들이 이들과 결탁하여 부정하게 이익을 취했는데, 그 액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므로 공이 평소에 이를 몹시 미워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여러 고을을 단속하여 명주를 뇌물로 주지 못하게 하니, 청나라 사람이 분노하여 함부로 항의하였다. 그러자 공이 즉시 통사(通事)의 목을 베어 용만관(龍灣館)에 내걸었다. 이에 청나라 사람들이 크게 놀라 벌벌 떨었으며, 청나라 사신 역시 두려워하며 역관에게 말하기를, “당신 나라 관서백(關西伯, 평안도 관찰사)은 훗날 충절을 지켜 의리에 죽을 사람이니, 우리가 어찌 감히 존경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사행에서 명주 수만 필을 줄여 이를 항식(恒式)으로 정하게 되었다.
자모성(慈母城)을 크게 보수하고 물자를 많이 저장하였으며, 영평후(營平侯)의 고사를 모방하여 영유(永柔)에 둔전(屯田)을 마련해서 이곳에 농기구를 비치하고 곡식 수만 곡을 비축하였다. 구성(龜城)을 서도(西道)의 요충지로 여겨 성곽을 보수하고 해자를 깊이 팠으며, 고려의 명장(名將)인 박서(朴犀)를 위해 사당을 세워 그를 제향하였다.
공은 관할하는 중임을 오랫동안 맡으면서 멀리 내다보는 계책에 힘쓰고 고식지계(姑息之計)를 일삼지 않았다. 평양성(平壤城) 안에 돌을 쌓아두어 후일을 대비하고, 활쏘기를 잘하는 군사를 선발하여 매달 시재(試才)를 행하였다. 이에 무사들이 경쟁하여 분발하고 병력이 튼튼해졌다.
어떤 재력가가 공금을 욕심내어 부정한 행각이 난잡하므로 그를 처벌하여 백성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계청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해 누차 반발이 일어도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공이 법을 엄수하고 공직을 잘 수행한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은 다스릴 적에 엄중히 할 것을 추구하여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촉(蜀)을 다스렸던 방법대로 따랐다.
그러나 형벌을 남용하지 않아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없었다. 수백 명의 부하들에 대해서 재주가 있는지, 용맹한지의 여부를 모두 알아서,
부릴 적에 제각각 적임대로 임무를 맡겼다. 공은 때때로 상대방이 견딜 수 없을 지경까지 대노하며 꾸짖다가도, 그 사람이 항변하여 굽히지 않으면 곧바로 화를 거두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너의 말이 참으로 옳으니, 내가 미처 잘 알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마음을 비우고 남의 말을 받아들임에 있어 고인(古人)의 풍모가 넘쳐났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감복하여 모두 기꺼이 공을 위해 일하였다. 공은 관직을 맡을 때마다 특별한 능력을 드러내었으므로 세상에서 공을 일컬어 ‘국가의 재신(才臣)’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말은 오히려 공을 제대로 알고서 말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재신’은 옛날의 장창(張敞)과 조광한(趙廣漢) 정도의 사람들도 충분히 해당될 수가 있으니, 공을 단지 재신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공은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와는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출사하여 군주를 섬길 때에는 충의(忠義)를 떨쳤다.
일찍이 황주 판관(黃州判官)이 되었을 때에 상관이 잔치를 베풀어 공을 초대하였는데, 공은 국모(國母)가 유폐되어 욕을 당하고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대관(臺官)이 되어서는 종신(宗臣) 이항(李杭)이 사명(使命)을 받들고서 불순(不順)하게 행동한 것을 논하였고, 또 적신 이의징(李義徵)의 죄는 극형에 처해야 마땅함을 논하였다.
이때에 국법을 인용해가며 끝까지 할 말을 다하여 윤허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두 적신은 모두 중궁을 모해한 자들이었으므로 여론이 이를 통쾌하게 여겼다. 장희재(張希載)가 대역죄를 범하였는데 정권을 잡은 정승이 그가 극형을 면할 수 있도록 힘을 써주니, 공이 이에 대해 강력히 간쟁하였다.
또 장희재의 노복이 처형을 당하게 될 때에 당시의 정승이 또 죄를 묻지 않으려 하자, 공이 국법에 근거하여 처벌해야 한다는 뜻을 견지하였다. 그러자 어떤 이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좋아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그대는 성조(聖朝)의 대신(臺臣)을 집정 대신의 사삿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신사년(1701, 숙종27)에 이르러 국가에 변고가 생겨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나의 선공(先公)이 당시 의정부에 있으면서 의연하게 정도(正道)를 지켰다. 이에 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우리 형이 성취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어찌 집안을 빛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아, 공이 집안에서 행실을 닦고 이것을 국무를 수행하는 데에까지 미루어 나갔으니, 높은 식견과 큰 포부가 본디 뿌리를 둔 곳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평소의 언행에 드러난 것이 모두 군주에 충성하고 나라를 수호하는 일이었으니, 어찌 하찮은 재주와 좁은 국량을 지닌 구구한 사람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공은 휘가 세재(世載)이고 자가 지숙(持叔)이다. 사람됨이 풍모가 빼어나고 체격이 건장하여 용맹스럽고 걸출한 자태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공을 바라보고는 그 엄숙한 모습에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다. 젊었을 때에는 공의 장인인 상국(相國) 이상진(李尙眞)이 공을 한 번 만나보고서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아보기도 하였다.
공은 처음에는 음직으로 벼슬을 하다가 도중에 높은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마침내 경(卿)의 반열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벼슬한 것은 겨우 22년이었고 향년은 59세에 그쳤다. 전후로 역임한 관직은 전설사 별검, 의금부 도사, 장원서 별제, 장흥고 주부, 사헌부 감찰, 공조 좌랑, 황주 판관, 남원 현감(南原縣監), 성균관 직강, 병조 좌랑ㆍ정랑, 세자시강원 사서ㆍ문학,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경기 도사, 동래 부사, 병조ㆍ형조ㆍ예조ㆍ호조 참의, 승정원 동부승지ㆍ우부승지ㆍ좌부승지, 경상도ㆍ평안도 관찰사,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호조ㆍ병조ㆍ형조 참판, 사간원 대사간, 승정원 도승지, 겸 동지의금부사ㆍ비변사유사당상, 경기 관찰사, 진주 부사(陳奏副使)였다.
관직은 판서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수명은 예순의 나이를 채우지 못하여 먼 길을 한창 달리다가 장구한 계책을 갑자기 끝마치게 되었으니, 아, 슬프다.
공은 다스릴 적에 법조항을 많이 두지 않고 오직 대체를 견지하였으며, 청렴한 생활로 스스로 몸가짐을 조심하여 선대의 훌륭한 점을 잘 계승하였다.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는 조행을 단속하는 것에 더욱 힘을 써서 중국 사람들로부터 탄복을 받았다.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정성을 다하고 부지런히 힘써서 오직 조정을 보익하는 것에 마음을 두었으며, 만년(晩年)에 법률대로 처벌한 정사는 또한 기강과 절목에 잘 맞았다. 이 밖에도 연석(筵席)에서 건의하고 조정에서 계책을 내고자 생각했던 것들이 마음속에 가득하였으나, 그 십분의 일밖에 펴지 못하였으니, 군자들이 이 때문에 거듭 탄식하였다.
성상 또한 공의 부음을 듣고는 애통해 마지않아서 특별히 애도를 표하는 전교를 내렸으니, 여기에서 군신 간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공은 평소에 당론을 좋아하지 않아서 한평생 무엇을 고집하거나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교우관계를 신중히 하여 막역하게 지낸 이들이 유수 이희무(李喜茂), 참판 이징명(李徵明) 등 몇몇 공에 불과했다.
나의 선공은 공정함을 고수하고 사심을 끊어서 세상에 뜻이 맞는 사람이 적었는데, 오직 공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공을 공경하고 추앙하여 매사를 반드시 선공에게 자문한 뒤에야 행동하였다. 선공 또한 공을 깊이 의지하고 중하게 여겨 친척을 천거한다는 혐의를 마다않고 수차례 격려하고 천거하였는데, 나중에 공의 명망과 행실이 더욱 높아지게 되자 세상 사람들이 선공의 밝은 안목에 대해 더욱 탄복하였다.
공은 광주(廣州)의 우산(牛山)에 장사하였고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를 함께 부장(祔葬)하였다. 아들이 없어서 의룡(宜龍)을 양자로 들였는데, 의룡 역시 아들이 없이 일찍 죽어 종인(宗人)의 아들 보철(普喆)을 양자로 들였다. 공의 사후가 쇠잔한 것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천도(天道)란 알 수 없는 것이다.
공이 선공의 연고로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었으므로 나는 지우(知遇)를 입은 것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니 지금 묘문(墓文)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어찌 감히 보잘 것 없는 정성이나마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졸렬한 글재주가 송구스러울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 維人所秉
윤리강상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 莫尙倫彝
저 옛날부터 이지러짐이 없었네 / 亘古靡虧
집에서 이를 돈독히 하여 / 在家而篤
나라에까지 미치게 하니 / 于邦則達
여러 훌륭한 점을 모두 포괄하였네 / 衆美斯括
아, 우리 공이여 / 於惟我公
그 근본을 두터이 쌓은 뒤에 / 旣厚其本
관건을 웅장하게 하였네 / 壯厥關鍵
황주(黃州)의 누대에서 연석(宴席)을 사양하고 / 黃樓辭席
백대에서 흉적들을 토벌하니 / 栢臺誅兇
계절이 추워져야 송백(松柏)의 지조를 아네 / 歲寒知松
의롭게 분변함이 드높아 / 義辨崢嶸
꼿꼿한 절개가 드러나니 / 聿著勁脊
오랑캐 우두머리가 넋이 나갔네 / 蜒酋褫魄
오산은 후중함을 더하고 / 鰲山增重
패수는 깨끗함을 드날려 / 浿水揚淸
서울에서 공적을 이루었다네 / 底績于京
우레가 땅을 진동하는 듯하고 / 如雷震地
바람이 공중을 다니는 듯하니 / 若風行空
어디를 간들 통달하지 못하겠는가 / 何往不通
외직에서 큰 공을 이룩하여 / 訖其外庸
평탄한 길이 앞에 있게 되었으니 / 坦道在前
명망과 실제가 모두 온전하였네 / 望實俱全
재신(宰臣)의 지위로 기다렸건만 / 揆庭之須
귀신이 갑자기 목숨을 재촉하니 / 鬼伯忽催
조정 선비들의 안색이 잿빛이 되었네 / 朝右色灰
찬란한 이 비석에 / 有瑩斯石
태사가 명문을 지으니 / 太史作銘
영령과 방불하네 / 髣髴英靈
아름다움을 드날리고 선행을 기록하여 / 颺休紀善
이로써 후인들에게 고하노니 / 庸告來後
영원한 후세에 없어지지 않으리라 / 永世不朽
--------------------------------------------------------------------------------------------------------------------------------------------------------
[脚註]
[주01] 사경(士慶) :
이사경(李士慶, 1569~1621)으로, 자는 이선(而善), 호는 쌍곡(雙谷),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1590년(선조23)에 생원시에 합격
하고, 1601년에 식년 문과에 장원하여 성천 부사(成川府使), 대사간, 승지, 병조ㆍ예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
고 청렴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주02] 왕의 …… 세워 :
1619년(광해군 11)에 경상도 관찰사 윤훤(尹喧)과 충청도 관찰사 이춘원(李春元)이 서장(書狀)을 올리면서 당시 폐위되어 있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존호를 그대로 쓴 일로 대각(臺閣)의 논의가 시끄럽게 일었다.
이사경(李士慶)이 이 무렵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처음에는 숙배하지 않다가, 이 일이 일어나자 잠시 출사하여 논의를 중지시키
고는 다시 사직하였다.《宋子大全 卷174 大司諫贈參判李公墓碣銘》
[주03] 예전부터 …… 버렸다 :
이세재(李世載)가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맡고 있을 때에 일본 사신이 이어지며 우리나라에 새 은돈을 통용하게 할 것을 요청하고
억지로 울도(鬱島)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이에 이세재가 일본 사신에게 새 은돈에 관하여 말하기를, “일상적인 거래에서도 반드
시 효용의 가부를 따지니, 사용하지도 못할 화폐를 억지로 이웃나라에 유통시켜서야 되겠는가.
은광(銀鑛)이 예전 같지 못하다면 응당 캐내는 양에 따라 정련(精鍊)하면 될 일이니, 굳이 우리나라에서 거듭 정련하게 만드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아주 작은 양이라도 관문 밖에 유통시킨다면 이는 우리가 허락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어서 그대들이 요행히 바라는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니, 만약 이를 위반하는 자가 있다면 즉시 효수(梟首)하여 본보기를 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울도에 관하여 말하기를, “울도가 우리나라의 영토인 것은 지도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너희들이 죽도(竹島)라고 일
컫는 것은 우리가 아는 바가 아니다. 지금 서계(書契)를 작성하면서, 국승(國乘)에 기록된 이름을 놔두고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죽
도라는 이름으로 바꿔 써서야 되겠는가.
국경은 본래 정해진 경계가 있으니, 다시 와서 억지로 떠들어 변경의 분쟁을 야기한다면 그책임이 누구에게로 돌아가겠는가. 나는
변방의 관리이니, 어찌 감히 번거롭게 조정에 아뢸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西堂私載卷12 京畿觀察使李公行狀》
[주04] 구봉서(具鳳瑞) :
1597~1644. 자는 경휘(景輝), 호는 낙주(洛洲),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1617년(광해군 9)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4년(인조
2)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수찬, 응교, 승지, 병조ㆍ호조 참의, 서천 군수(舒川郡守), 나주 목사(羅州牧使), 전라도ㆍ경상
도ㆍ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주05] 영평후(營平侯)의 고사 :
영평후는 전한(前漢) 때의 명장 조충국(趙充國)이다. 선제(宣帝) 때에 강족(羌族)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충국에게 조서를 내려 강족
을 제압하게 하였는데, 조충국이 상소하여 강족은 계책을 써서 격파하기는 쉬우나 무력으로 격파하기는 어렵다고 아뢰고 둔전(屯
田)을 경영하면서 강족을 회유하는 데에 힘썼다.《漢書 卷69 趙充國傳》
[주06] 박서(朴犀) :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고려 때의 명장으로, 1231년(고종 18)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을 때에 몽골 장수 살리타
이〔撤禮塔〕가 침략하여 구주(龜州)를 공격해 오자 김중온(金仲溫), 김경손(金慶孫) 등과 함께 구주성을 사수하여 1개월에 걸친
격전 끝에 물리쳤으며, 이후로도 누차 몽골군을 대파하였는데, 왕명을 받고 지병마사 최임수(崔林壽) 등이 와서 항복을 권유하자 이
를 거역하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그 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있다가 다시 문하평장사가 되었다.
[주07] 제갈공명(諸葛孔明)이 …… 방법 :
제갈공명이 유비(劉備)를 도와 촉(蜀)을 다스리면서 법령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던 것을 이른다. 유비가 익주 자사(益州刺史)로 있던
유장(劉璋)을 내쫓고 파촉(巴蜀) 지방을 차지하였는데, 공명이 유비를 도와 이곳을 다스리면서 법령을 엄격하게 적용하자 원망하는
백성들이 많았다.
이에 법정(法正)이 공명에게 한 고조(漢高祖)가 관중(關中)을 차지한 뒤에 법령을 최소화하여 삼장(三章)만을 시행했던 것처럼 형
벌과 금령(禁令)을 완화시킬 것을 충고하였는데, 공명은 유장이 어리석고 유약하여 형벌을 엄격히 시행하지 못하다가 지금의 피폐
함을 초래하게 된 것임을 말하고, 이어서 “지금 나는 법령으로써 위엄을 보이니, 법령이 행해지면 은혜를 알 것이며, 또 작위로써 제
한하니, 작위가 더해지면 영화로움을 알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영화와 은혜가 서로 이루어 주고 상하가 절도가 있게 되니, 다스리는 요점이 여기에서 드러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資治通鑑 卷67 漢紀 孝獻皇帝壬》
[주08] 장창(張敞)과 조광한(趙廣漢) :
둘 다 한(漢)나라 때에 경조윤(京兆尹)이 되어 정사를 잘 하기로 명망 높았던 자들이다.
[주09] 종신(宗臣) …… 논하였고 :
1696년(숙종 22) 7월에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사은 정사(謝恩正使)가 되어 청나라로 출발하였는데, 9월에 이항의 병이 위
중하다고 하여 사행 도중에 다시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으로 정사를 교체하였다.
이에 당시 정언으로 있던 이세재(李世載)가 이항을 논핵하여, 그가 출발 이전에도 여러 번 날짜를 미루어 사행을 지연시켰는데 지금
또 신병 때문에 정사를 교체하게 만들었다고 아뢰며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肅宗實錄 22年 7月 25日, 9月 2日ㆍ6日》
[주10] 적신 …… 논하였다 :
1694년(숙종 20)에 이의징(李義徵)이 장희재(張希載) 등과 함께 영합하여 기사환국(己巳換局)을 주도한 죄로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되는 처분을 받았는데, 이듬해 1월 22일에 당시 지평으로 있던 이세재(李世載)가 정언 이희무(李喜茂) 등과 함께 주강에 입시
하여 이의징의 흉패한 죄상에 대해 아뢰고 사사(賜死)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肅宗實錄 20年 7月 5日, 21年 1月 22日》
[주11] 장희재(張希載)가 …… 써주니 :
1694년(숙종 20) 5월에 의금부에서 장희재(張希載)가 중궁을 모해한 죄상을 두고 형률을 적용할 때에 숙종(肅宗)이 대신과 논의
하여 처리하게 하였는데,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남구만(南九萬)이 장희재가 세자의 지친(至親)임을 들며 형을 감면해 줄 것을 청하
여 결국 사형을 감면하고 절도(絶島)에 위리안치 하도록 만들었다.
이후에 여러 신료들이 장희재를 극형에 처할 것을 누차 간하였으나 남구만이 번번이 반대하였다.《肅宗實錄 20年 5月 20日, 閏5
月 2日》
[주12] 신사년에 …… 못하였는데 :
신사년(1701, 숙종 27) 8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한 뒤에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그의 오라비인 장희재(張希載) 등과
함께 인현왕후를 모해하여 저주한 일이 드러나 희빈 장씨는 사사되고 관련자들도 모두 처벌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주13] 백대(栢臺) :
어사대(御史臺)의 별칭으로, 한대(漢代)에 어사부(御史府) 안에 잣나무를 심은 데서 연유된 말이다. 조선의 관서로는 사헌부에 해
당한다.
[주14] 계절이 …… 아네 :
난세(亂世)가 되어서야 군자의 굳은 지조를 알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논어(論語)》〈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이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하였다.
[주15] 오산(鰲山)은 …… 드날려 :
오산은 경상도(慶尙道)를, 패수(浿水)는 평안도(平安道)를 가리켜 말한 것으로, 이세재(李世載)가 경상도와 평안도의 관찰사가 되
어 공적을 쌓았으므로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류재성 김창효 (공역) | 2014
--------------------------------------------------------------------------------------------------------------------------------------------------------
[元文]
京畿觀察使李公神道碑銘 幷序。
故京畿觀察使李公, 以宏厚嚴重之資, 抱幹方鎭邊之才, 出入中外, 聲績卓殊, 世數負力量堪大任者, 指無得先公屈。 廟堂方且虛大司馬位以待公, 乃以肅宗丙戌三月十九日疾卒。 官居野處, 無不驚呼痛惜, 以爲 “天不憖斯人, 國其如何” 後三十八年, 族子宜顯謹採輿誦, 刻之墓石。 其文曰 公世龍仁人也。 鼻祖諱吉卷, 始開籍爲太師, 自後圭組相望。 至諱士慶, 大司諫, 爲母后樹節, 後贈吏曹判書, 是爲公之曾祖。 祖諱後地, 進士, 贈左承旨。 考諱河岳, 羅州牧使, 贈戶曹參判。 娶北靑李氏, 靑興君重老之女, 生公。 公自幼已穎特不群, 長而愈騫, 顧婁屈公車, 至三十五, 始升上舍。 四十九文科, 時望蔚然。 婁遷臺閣, 言議硬亢, 無所茹吐, 柄人頗不喜。 垂登玉堂選, 而遽加階出東萊, 不動聲色, 威名自著, 方擇藩翰, 朝無異辭。 旣按嶺南, 又加階授關西節, 益奮風猷, 萬務疏通, 如水決刃游, 恢恢乎有餘地也。 東萊爲倭人門戶, 素艱其任, 而蠻俗多詐易怒, 亦罕有善其職者。 公下車, 卽揭榜布諭, 申明約條, 嚴束商譯, 使不得上下其手。 倭亦畏服恩信, 屛息從化。 舊有鬱島之爭新銀之請, 至是又以爲言, 公擧理折之。 倭遂相率闌出館門, 欲以撼公。 公怒, 啓請梟首商譯。 商恐, 嘔血死。 於是責倭違約, 絶日供, 示不以使价相待, 申請先正闌出之罪, 徐議所要。 倭大窘, 懇請輸誠贖過。 時有奸民引女口行媒於倭, 事覺而逸。 公發卒守館門, 大索, 以民舍近館易交通, 盡燒滅之, 倭望見色動。 公威振彊外, 終公在任, 不敢用其計枝梧。 後有我國人入馬島, 倭問公動靜, 仍嗟歎曰 “廉明有威, 當爲萊府百年來第一。” 公久於南, 熟知一路利病。 及都方岳, 必欲大有釐革, 報稱任使。 謂小民困敝, 由於軍額縮而田政紊也, 首汰宂食, 使任閫者視效, 不者啓請加罪, 以嚴威臨之, 皆恐懼奉令, 遂以所余充補, 蔀屋晏然。 盡取列州田簿, 鉤惕隱漏, 得穀萬餘石, 增築架山城, 鍛穀兵器, 爲陰雨備。 慶州有萑苻警, 朝議過慮, 至欲使宿將出鎭。 公笑曰 “此所謂爲鼷鼠發機也。” 卽以不戢盜罷府官, 下令能捕者賞, 果有射殺賊者, 生獲又百餘人。 遂誅渠魁及黨賊吏, 餘皆不問, 焚其籍, 慶盜悉平。 有何人稱漂海來, 言語詭異, 公一言得其詐, 誅之。 郭氏女將嫁, 有賈人稱曾與女奸, 左里媼詞證明。 公疑之, 進媼問, 不首。 公厲聲
威喝, 始服受賈人金, 卽杖配二人, 資奩具婚其女。 女感刻, 後聞公卒, 爲位哭, 心喪三年。 有至親相鬩者, 兩治其罪, 訟山者先罪葬師。 宰牛者不許贖, 用治盜律, 在官三載, 終不食其肉, 各邑無敢冒犯, 農牛至郊放經宿。 公聰明絶人, 變名再訟者必覺, 變形亡逃者, 遇諸塗便識, 文牒一經眼, 後過累旬, 常如羅列在前, 終無遺忘。 閭里銖兩之姦必察, 有時卒然問曰 “爾輩某事如是, 某事如是, 其敢爾耶” 咸相顧驚惶帖息, 不敢逞。 公爲治, 威制豪强, 痛繩貪汚, 一切用柱後惠文, 要使綱紀振肅, 民生樂業。 尤長於理劇, 積案如丘山, 頃刻掃盡, 號令風生, 有令行禁止之效。 蓋國朝以來, 治嶺南有迹者, 以具觀察鳳瑞爲首, 公足相埒而剛嚴過之云。 及按關臬, 則手益鍊、才益老, 沛然若無一事。 値歲大歉, 力於救民, 移粟江都, 煮鹽作醬, 以乳以哺。 胡使繹續, 舌官協同爲姦利, 其費無算, 公常痛嫉。 至是飭列邑, 勿給賂紬, 胡忿恚肆言, 公亟斬通事頭, 懸之龍灣館前。 群胡大驚震慄, 胡使亦懾伏, 語舌官曰 “爾國關西伯, 卽他日仗節死義之人, 吾安敢不敬” 是行, 減紬幾累萬匹, 定爲永式。 大治慈母城, 盛其儲胥, 倣營平故事, 開屯永柔, 偫農器其中, 積穀數萬斛。 以龜城爲西路咽喉, 修城浚濠, 享祀勝國名將朴犀。 公久綰管轄之重, 務爲經遠之圖, 不事姑息。 聚石平壤城內, 以待日後, 選善射士, 逐月試才, 武士競勸, 兵力壯實。 有千金子乾沒公貨, 姦跡狼藉, 啓請誅戮, 以除民害, 沮撓迭起, 終不聽。 其守法奉公如此。 公治尙嚴用孔明治蜀法, 然刑不濫, 無殞命者。 部下數百, 悉識其才鄙劫勇, 指使各當其任。 時或盛怒罵詈, 至不可堪, 其人抗辨不挫, 則便回嗔爲笑曰 “爾言良是, 吾殆不及也。” 其虛懷開納, 綽有古人風, 以此人人感服, 皆樂爲之用。 公官轍所及, 輒著異能, 世以公爲國之才臣, 余謂此言猶未爲深知公者。 所謂才臣, 如古之張敞、趙廣漢輩亦足以當之, 公則不可只以才臣論也。 公事親極其孝, 與兄弟極其友, 出而事君, 忠義奮發。 嘗爲海西貳倅, 上官設宴邀公, 公以聖母幽辱謝不往。 爲臺官, 論宗臣杭奉使驕蹇, 又論賊臣義徵罪合誅死, 引三尺極言, 得允乃已。 兩賊俱謀害坤聖者也, 公議快之。 希載罪犯大逆, 柄相曲貸其死, 公爭甚力。 及希載奴將刑, 時相又欲勿問, 公據法堅持。 或止之曰 “恐大臣不悅也。” 公曰 “子欲以聖朝臺臣, 爲執政私人耶” 及至辛巳, 國有變故, 人心靡定, 先公時在政府, 毅然守正。 公歎曰 “吾兄樹立, 殆非人人可及, 豈不有光門戶乎” 噫! 公行修家庭, 達於王國, 其識見之高, 抱負之大, 自有所本。 故見於日用云爲者, 無非忠君衛國之一端, 夫豈區區輇才小局所可倫比也哉公諱世載, 字持叔。 爲人風儀雋偉, 軀幹洪碩, 有熊豹奇傑之姿, 人望之凜然, 生怖畏心。 少時, 婦翁李相國尙眞一見, 知其非常人也。 公始爲蔭仕, 中擢巍第, 終登卿列, 立朝僅廿二年, 得年止五十九。 前後所踐歷, 典設司別檢、義禁府都事、掌苑署別提、長興庫主簿、司憲府監察、工曹佐郞、黃州判官、南原縣監、成均館直講、兵曹佐郞・正郞、侍講院司書・文學、司憲府持平、司諫院正言、京畿都事、東萊府使、兵・刑・禮・戶四曹參議、承政院同副・右副・左副承旨、慶尙・平安道觀察使、漢城府右尹、戶・兵・刑三曹參判、司諫院大司諫、承政院都承旨、兼同知義禁、備邊司有司堂上、京畿觀察使、陳奏副使也。 官未躋八座, 壽不及六旬, 脩途方騁, 長算遽終, 悲夫公之治理, 不多敎條, 唯持大體, 氷蘖自飭, 克繩先美。 使燕, 厲操益苦, 爲殊俗歎服, 奉職恪勤, 其所耿耿, 只在補益公朝, 晩歲薄違之政, 亦得綱節。 其他思欲建發筵席、籌畫廊廟者, 盤紆在腹, 十未一宣, 君子重以爲歎也。 上亦聞公訃, 悼慟不已, 特下隱卒之敎, 斯可以觀君臣之際矣。 公雅不喜黨論, 平生口不出適莫語, 友道益簡, 所與深者, 唯李留守喜茂、李參判徵明數公而已。 我先公秉公絶私, 與世寡合, 公獨一心敬仰, 每事必咨稟而行。 先公亦深加倚重, 不避內擧之嫌, 婁有尉薦。 及公望實愈隆, 世益服先公鑑賞之明也。 公葬于廣州之牛山, 以夫人全義李氏祔。 無子, 有繼子宜龍。 宜龍亦無子早死, 子宗人子普喆。 公之後事, 陵替至此, 亦天道之不可知者也。 公以先公之故, 愛余殊甚, 常有知遇之感, 今於墓文之託, 烏敢不磬竭微誠? 顧荒拙是懼。 銘曰。
維人所秉, 莫尙倫彝, 亘古靡虧。 在家而篤, 于邦則達, 衆美斯括。 於維我公, 旣厚其本, 壯厥關鍵。 黃樓辭席, 柏臺誅兇, 歲寒知松。
義辨崢嶸, 聿著勁脊, 蜒首褫魄。 鰲山增重, 浿水揚淸, 底績于京。 如雷震地, 若風行空, 何往不通? 訖其外庸, 坦途在前, 望實俱全。
揆庭之須, 鬼伯忽催, 朝右色灰。 有塋斯石, 太史作銘, 髣髴英靈。 颺休紀善, 庸告來後, 永世不朽。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