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우당기(飯牛堂記)
운학(雲壑) 조평(趙平) 찬(撰)
鰲山李君權仲。搆堂於其居室之東。旣落之。揭額於楣間曰飯牛。請余記之。余曰古人扁堂。取其淸而水月焉。愛其節而松栢焉。悅其靜而以山。樂其閒而以雲。贒者志於道。曰孝悌曰忠信曰誠敬。今君之名堂不以此。曰飯牛。飯牛豈士之所能爲哉。余思之久 。得君之所以名堂也。君少而業于文而不得於有司。長而抱其才而不試於事業。今年已七十有三矣。不得也不試也。乃天也命也。非力之所能強。強則有矣。安於分而易於力者。唯飯牛而已。飯牛有術。絡於頭而索於鼻。鞭之不迫。驅之不緩。無蹊人之田。勿齧人之稼。從容習成。克馴克擾。左焉而左。右焉而右。放乎中道。惟人所意。夫然後可以謂之飯牛。而牛得以全其性矣。飢而草渴而泉。牛之願也。于阿于原。豐草之中。而草旣飽矣。草旣飽而飮于泉。水亦充矣。飽而無飢。充而無渴。牛於是得所願 。遂其生而肥且澤矣。駕車而致於遠。服犂而利於農。此其所以飯之。將以有用。若有待於世而要之。如百里於秦。非君之心也 。然君之飯牛。徒以有用。則一牧竪事爾。豈知君者哉。飯牛之樂。有不可以語人者。樂而不可以語人。則誠君子安於所遇而自樂其樂也。方春三月之暮也。東風吹煖。芳草連阡。日高而晩起。右手扶藜。左手牽牛。緩步徐行於淸溪軟綠之間。而落紅亂飛於靑烟翠嵐之中。點點飄灑於衣裾莎路之上。微吟擧足。自不知身在於浮世塵埃之裏。翛然有武陵桃源之趣。前至南坡。放牛於沙汀之上。枕石高眠於柳陰之下。夢入羲皇。旣覺牛已臥眠而日欲西矣。淡雲輕飈。驅細雨而過前山。君將廻路。而披髮牧童三三五五 。自山上谷中。或披蓑倒騎。或桑弧蓬箭。相呼疾驅而來。與君爭路。君欣然大笑。任其所先後。前者歌後者笛。而滿天落紅如朝出時。巷路東西。各尋柴扉。而君又入門。牛自入于欄。君釋杖登于堂。徘徊望飯牛處。斜陽和雲與雨。橫連濃淡於南天之半。近而鉢山堂嶽 。遠而元通回文諸峯。若有若無。峭巒尖翠。點點露出於浮靄掩映之上。而歌笛餘音。裊裊然盈耳。景物之勝。殆非世有。而陶然之樂。難與俗子言也。故君以飯牛二字名君之堂。以爲暮年眞樂之一地也。噫。聞歌之用牛口之擧。皆是伯主之爲。如君之飯牛。人莫之知。玆非盛世事歟。君名經。權仲其字。 <끝>
출처> 雲壑先生文集卷之八
※반우당(飯牛堂)은 전라북도 임실군에 살던 이경(李經)의 소요처(消遙處)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1923년에 발간한 임실군지(任實郡誌)와 임실운수지(任實雲水誌)에 "飯牛堂 在九皐平地故處士李經所築有雲壑趙平霽湖梁慶遇石湖
尹候復元西溪公記文吟詠(반우당 재구고 평지고 처사 이경소축유운학조평제호량경우석호윤후복원서계공기문음영)"이라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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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李經)
국당공후 문정공파
이경『李經,1558년(명종 13)~1645년(인조 23)』은 조선중기 학행(學行)으로 자는 권중(權中), 호는 반우당(飯牛堂), 본관은 경주(慶州), 서계(西溪) 이위(李緯)의 형이고, 출생지는 전라남도 임실(任實)이다. 공(公)은 문효공(文孝公) 천(蒨)의 후손으로, 주부(主簿) 숭문(崇文)의 아들로서,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효도를 극진히 하였다.
제가(齊家)에 법도가 있어 부부사이에 손님처럼 서로 존경하며 누나와 동생들에게도 우애가 도타웠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당하여 관북(關北: 함경북도)에서 어머니 상(喪)을 당했는데. 다시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때 낡은 최질(衰絰: 상중에 입는 삼베옷)의 모습과 애통함이
역력해 얼굴을 보는 사람마다 그 효성에 감탄했다.
본성이 염정(恬靜: 평안하고 고요함)하여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전원(田園)에서 윤상(倫常: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을 실천했다. 묘는 전라남도 임실군 덕치면 시곡리에 유한다.
▲묘 소재지 : 임실군 덕치면 시곡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