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혼자가 아니다
2024.06.02.(성령강림후제2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22/ 제자들이 갈릴리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곧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23/ 사람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에, 성전세를 거두어들이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여러분의 선생은 성전세를 바치지 않습니까?” 25/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바칩니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냐?” 세상 임금들이 관세나, 주민세를 누구한테서 받아들이느냐 자기 자녀한테서냐? 아니면, 남들한테서냐?” 26/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남들한테서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자녀들은 면제받는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니, 네가 바다로 가서 낚시를 던져, 맨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서 그 입을 벌려 보아라. 그러면 은전 한 닢이 그 속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내어라.” (마태 17:22-27)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이 가진 적은 믿음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산을 향해 옮겨 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신비를 일깨우신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은 이제 갈릴리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다시 예고하십니다. 첫 번째 예고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였는데, 그곳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말씀 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대들었습니다.(마16:21-28) 어쨌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시작했고, 이제 그들의 고향인 갈릴리로 들어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난 곳이며 그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가 이루어진 곳입니다. 갈릴리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희망을 갖고 기뻐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 중에 다시 온 갈릴리는 더 이상 희망의 장소가 아닙니다. 제자들을 하나씩 불러 모았던 바로 그곳에서 제자들을 떠나는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삶의 기쁨과 희망을 보았던 제자들은, 이제 슬픔에 휩싸입니다. 슬픔은 그들이 희망을 잃어버렸음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절망과 고뇌 속에서 삶의 의욕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적은 믿음과 슬픔
이러한 제자들의 풀죽은 모습이 베드로에게서 드러납니다.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에게 드라크마 동전 두 개를 거두어들이는 곧 성전세를 걷는 사람들, 복수로 되어 있으니 여러 명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묻습니다. “여러분의 선생은 성전세를 바치지 않습니까?”(24) 혼자인 베드로에게 여럿이서 따지는 듯한 장면입니다. 위축되었는지 베드로는 아무런 설명 없이 “바칩니다.”(25) 라고 짧게 대답한 후 자리를 피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갈릴리로 오는 동안 베드로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스승인 예수님에게도 멱살을 부여잡던 베드로는 어느새 세상을 향한 열정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기쁨도 희망도 의욕도 잃은 채 집에 돌아온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먼저 묻습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냐?”(25) 예수님의 이 질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굴복해버린 베드로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려 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이 귀찮은 것 같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에게도 대들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기대가 사라지자 그 열정마저도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고향 땅에 돌아온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믿음은 적고, 암울한 현실 속에서 슬픔 가운데 체념한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여기서 그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곳은 그들을 반겨줄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지쳐버려 선택의 기로에 놓인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나요? 그들의 동료, 혹은 믿음의 선배, 때론 목자의 역할을 한다고 자처하는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한다면 마음을 다잡고 당신의 믿음을 굳세게 하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럴듯한 말과 차분한 어조로 위로하면서 설득하겠지만, 결론은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적은 믿음으로는 안 되니 큰 믿음으로 키워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적은 믿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더 큰 믿음, 굳센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먼저 나서는 주님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베드로가 집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희망과 삶의 의욕을 잃은 채 돌아온 우리에게 예수님은 언제나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적은 믿음조차도 사라져버린 듯 느껴질 때,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세상 임금들이 관세나, 주민세를 누구한테서 받아들이느냐?”(25) 그리고 덧붙여 묻습니다. “자기 자녀한테서냐? 아니면, 남들한테서냐?”(25) 베드로가 “남들한테서입니다.”(26) 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러면 자녀들은 면제 받는다.’(26) 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베드로가 밖에서 만난 사람들은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이었고, 성전세의 납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관세와 주민세가 국가를 지배하는 왕에게 바치는 것이라면, 성전세는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당시 왕의 자녀가 관세와 주민세를 바치지 않았듯이, 제사장들은 성전세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더더욱 성전세를 바칠 이유가 없습니다. ‘자녀들은 면제 받는다’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자녀들’은 복수이므로 예수님만이 아니라 제자들까지도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포함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교를 통해 베드로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므로 믿음을 굳세게 하고 용기를 가지라’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힘들어하는 베드로와 제자들,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드러내어 자랑하거나 주장하지 않고서는 참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지점에서 또다시 굳센 믿음을 요구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달았다면, 슬픔을 극복하고, 어려움을 이겨내라.’ 예수님과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베드로는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았지만, 그에게는 성전세를 내는 문제, 예수님 없이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혼자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믿는 것과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라는 타인의 주장 사이에는 현실의 문제, 베드로에겐 성전세가 놓여 있었습니다. 성전세를 안 낸다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베드로의 주장이 성립되는 것일까요? 반대로 성전세를 낸다면 베드로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타인의 주장이 입증되는 것일까요? 사실 성전세를 내느냐 안 내느냐가 하나님의 자녀를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점에서 내느냐 마느냐의 선택 대신 ‘세상을 방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들을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27) 여기서 예수님과 베드로는 ‘우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달았다면, 믿음을 가지고 이제 가서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지라’거나 ‘성전세는 너와 상관없는 것이니 내지 말라’ 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야, 너의 슬픔을 안다. 너의 꺾인 의욕을 잘 안다. 네가 나와 함께 가는 길에서 너를 짐 지우고 있는 것이 있다면 내가 해결할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베드로가 짊어지게 될 현실의 문제는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 즉 ‘우리’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로 나서지 않았다면, 그 사건은 베드로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전세는 적은 믿음과 슬픔 속에 있는 베드로를 다시 한 번 체념하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먼저’ 해결하십니다. “바다로 가서 낚시를 던져, 맨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서 그 입을 벌려 보아라. 그러면 은전 한 닢이 그 속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내어라.”(27) 물고기 입 속에 은전 한 개는 4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성전세는 2 데나리온이므로, 나와 너, 즉 우리의 몫으로 성전세를 거두어들이는 자들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사실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성전세만을 문제 삼았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의 문제는 베드로의 문제이며, 베드로의 문제는 예수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문제는 예수님의 현실문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물고기 이야기는 사실로 보기에는 신비롭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시와 벌어진 일을 생각할 때, 그분의 신비로운 능력에 놀라워합니다. 하지만 놀라움에 그친다면 그것은 ‘우리’라고 부른 예수님의 의도를 가리고 맙니다. 이야기 속에 있는 예수님의 신비와 능력만이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동화와 그 모티브가 같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이와 같은 동화는 존재합니다. 우리의 전래 동화 ‘은도끼 금도끼’, ‘흥부전’, ‘도깨비 방망이’도 비슷해 보입니다. 당시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동화와 예수님의 이야기가 비슷한 것은 동화가 전달하고 있는 중심 주제를 예수님에게서도 찾으라는 것입니다. 동화는 곤경에 처한 선한 사람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고 돕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문제로 씨름하는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며 해결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백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