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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현봉 목사(1884~1965) / 윤 사무엘 교수
(엄 두섭, 기독교 영성의 흐름, 서울:은성, 1998, 230-232; 정 봉기,
"신앙양심의 회복, 김 현봉”기독교 사상, 2000년 12월 호, 27-38.)
평생 예수님의 청빈과 순결로 목회하신 분이다. 김 현봉목사는 평양신학교를 나오고, 한 때 서울 아현동에서 기성교회 목회를 했으나, 교회 장로들 때문에 실패하고 교회를 사면하고 나와 마포구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7명 교인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다. 닭장을 개조하여 집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으며 계속 가난한 자들과 함께 검소하게 살았다. 별세 할 때 1,000명의 교인이 있어도 그의 생활은 거지에 가까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우리나라 기독교 최초 선교사가 들어오던 1884년 경기도 여주군 가내면 건장리에서 김현봉은 태어났다. 형이 한 명, 누나가 한 명 있어 막내로 자랐는데, 아주 어릴 때 서울 서대문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세 친구와 함께 동대문 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예배가 마친 후 목사께서 청년 현봉의 손을 잡으면서 ‘다음 주에 꼭 오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예’하고 대답을 한 것이 예수 믿게 되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였다. 1910년 8월에 한일합방이 되자‘조국을 위해’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으로 많은 날들을 고민하던 애국청년은 1912년 월남 이상재의 소개장을 받아 가지고 중국 서간도 땅으로 건너갔다. 교포 2세를 위해 한국학교를 세워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다시 러시아 영 삼위로 옮겨 학교를 세우고 한국말과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옥중 생활 중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게 되었다.1923년 출감해서 이듬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독립운동에 구체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40세에 신학생이 된 김현봉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신학생 시절에 광명리 교회, 시흥군 서면 한이 교회, 구읍 교회, 군포장 교회, 안양 붙임말 교회, 수원 학현교회 등을 차례로 돌보게 되었다. 재학 중 1927년 그의 나이 44세에 당시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이었던 28세 처녀 박천선과 결혼했다. 드디어 1928년 제23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공덕리 교회를 맡게 되었다. 경기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후에 공덕교회를 사임하고, 1932년 3월 31일 아현동 37번지에 일곱 사람이 모여 아현 교회 개척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터는 아현동 37번지는 공동묘지였으며 큰 소나무들이 꽉 들어 차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 초에 일본의 경제개혁 실패로 농민들이 몰락하게 되자, 소작농민들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아사상태에 빠져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못해 일본, 만주 등으로 흩어지고, 국내에 있던 농민들은 대도시로 몰려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보려고 했다. 이들 중 일부가 아현동으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 빈민촌이 형성되었는데, 김 목사는 이곳에서 집 짓는 일을 도와주기로 하였다.1925년 일제는 남산에 조선 신궁을 건설한 것을 시발로 해서, 1930년 들어서서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압박에 못 이겨 1938년 제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자, 큰 충격을 받고 김현봉 목사는 ‘자신과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살 수 있을까?’는 제목으로 기도하던 중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 낮아지고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몸에는 철저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궂은 음식을 먹고, 머리를 밀어버리고, 고무신을 신고 가장 낮은 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하였다. 교회에는 간판, 종,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 악기, 장로가 없었다. 목사 자신이 검소한 옷을 입고 다니기에 교인들 역시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이 없었다. 해방 후에도 계속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비가 오면 검은색 우산을 쓰고, 성경 찬송을 들고 ‘예수 믿으시오’ 하면서 길거리를 누비며 열심히 전도를 하였다. 200명 넘는 교인이 되자 부엌을 헐어내고 4칸 마루와 건너 방을 터서 예배실을 늘렸다. 6?25가 발발하자 김 목사는 삼각산에 들어가 39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기도 중 회개기도가 터져 15가지 이상의 죄를 하나씩 고백하며 크게 은혜 받은 체험이 그의 목회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기 시작을 하였고, 원고 설교에서 영감 설교로 바뀌어 설교 중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계속 임했다고 한다. 전쟁 후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자 사회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봉사와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간다.70의 나이에도 상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토요일에는 쌀밥과 고기 국을 끓여 배고픈 이웃을 대접하였다. 그래서 아현교회에는 주일날 시내의 거지들이 다 모여들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한 줄로 서게 하고 100원씩 주어서 보내기도 했다. 이때 교인수가 500명을 넘어섰다. 그는 기독교의 형식주의,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교회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교인이 늘어나면 자기가 손수 교회의 벽을 헐고, 예배당을 넓히면서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 올렸다.건물의 미관엔 관심이 없고, 창문을 많이 내어 다만 위생적으로 태양 광선이 잘 들고, 예배드리기에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교회가 산비탈에 있었기에 늘 정과 망치를 들고 바윗덩이를 일일이 깨 가며 예배장소를 확장했고, 기둥이 많아 일명 ‘기둥 교회’, 초라하여 ‘누더기 교회’의 별명이 있었다.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들을 보면 어느 피난민 수용소나 거지떼들이 흩어져 나오는 광경 같았다. 그러면서도 전 교인이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연보는 김목사 자신이 관리를 하는데, 그는 자녀가 없었기에 한 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오직 전도와 구제하는데 쓰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모든 헌금은 진정한 영혼을 길러 주기 위해 수고하는 인근 교역자들과 신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교단에 들어가지 않고 독립교회로 있었다. 목사의 사례금은 교회에서 정해지지 않고 목사의 생활을 위해서는 별도로 연보함을 만들이 교인들이 자유로이 넣도록 했다. 주일날은 오전 예배를 마치고 사모가 국수기계로 손수 만든 밀국수를 전 교인에게 대접했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2시에 저녁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어린아이는 자전거 뒤에 싣고 장사하고, 어른은 리어카에 실어 벽제 화장터에 가서 화장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사경회 하는 도중 쉬는 시간에 신랑 신부가 평소 입던 옷 그대로 불러 앞자리에 세우고 “잘 살겠소?” 하고 묻고 기도해 주면 끝이다.김 목사는 자신이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하고 교인을 늘려갔다. 다른 교회에서 불만이 있어 찾아오는 떠돌이 교인은 받지 않고, 김목사 친히 자기 손때를 묻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교회를 만들어가며 성장을 시켰다. 70세 넘어 81세 별세할 때까지 그의 목양 일은 계속 하였는데 교인수가 1200명까지 되었다. 예배는 두 시간이나 길게 드리는데도 교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다. 그 교회 남자 성도들은 김 목사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바지저고리 입는 이가 많았다. 김 목사는 키가 작으며, 삭발하고 항상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기에 그의 별명이 “중목사”라 했다. 그 교회의 여자들도 사치한 색깔의 옷은 입지 않고 한동안 머리에 파마도 못하게 했다. 모든 형식을 무시하고 김 목사는 때때로 강대 위에서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잡아가면서 설교를 했다. 사경회에 다니다가 힘들 때는 강대상 위에 올라가 타고 앉아서 설교하기도 했다. 김 목사는 후배를 기르는 일에 무척 애를 써서 그의 감화를 받고 김 목사를 따르던 목회자들과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중에 이 병규(신촌), 백 영희(부산 서부교회), 안 병모, 이 한영, 안 길옹(알래스카에서 개척교회) 등이 있다. 안 길옹목사(2001년 현재, 85세)는 노인 아파트에 살지만 아파트 공터에 있는 곳에 창고 같은 건물을 지어두고 매일 새벽부터 정오까지 머물면서 기도하며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생활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그의 아들인 안 정남목사(나성 성약교회)도 김 현봉 목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대한 정보는 임 형태 목사(콜로라도 스프링스한인장로교회)께서 제공해 주셨다.김 현봉목사의 사생활은 저녁 5시경이면 잠자리에 들고 밤 12시에 기상해서 고요히 단좌해 묵상에 잠기고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연세대학교 뒷산에 작게 마련한 기도실 마당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묵상에 들어간다. 낮 12시까지 그런 모양으로 머문다. 오후에는 심방을 다녔는데 아현동 일대에 교인들 집을 하루에 70호를 심방하는 때도 있었다. 교인 집에는 일일이 들어가 앉아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문 밖에서 “별일 없소?” 묻고 지나가고 간혹 가난한 교인 집에는 부엌에 들어가 연탄불이라도 피웠나 해서 방바닥에 손을 대보는 것이 심방이었다.1965년 3월 12일 오전 9시 50분 81세의 일기로 김 현봉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별세하셨다. 장례식은 늘 따르던 이 병규 목사(신촌 창광교회, 계약 신학교를 운영함)가 집례했고, 시신은 생전 김 목사의 정신에 따라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갔다. 그 뒤를 1200성도들이 따라 갔으며, 시신은 화장을 했다.
한국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중목사’ 김 현봉
서울 마포구 아현2동 354-21 아현교회는 1960년대 초 까지만도 영락교회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신자가 많았다. 하지만 아현교회는 멋진 예배당도 교육관도 목사관도 없었다. 날로 늘어나는 신자들이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하면 예배당 밖으로 지붕만 얹고 의자를 놓아 예배를 보게 했다. 그렇게 늘리고 늘린 교회는 마치 기운 누더기 같아 그 주변 200여 채의 판잣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현교회의 그런 모습은 가난 때문이 아니었다. 아현교회는 그 일대 판자촌의 상당수를 소유할 만큼 재정적으로 풍족했다. 그런데도 교회는 건물을 짓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대신 판잣집을 사들여 집 없는 교인들에게 나누어 살게 했고, 먹고살 길이 없는 교인들에겐 뒷돈을 대줘서 소금이나 고무신, 생선 장사를 해서 먹고살게 했다.
그런 교회를 만든 이는 김 현봉(1884~1965) 목사였다. 작은 키, 땅땅한 몸매에 눈매가 매서웠던 그는 언제나 머리를 삭발하고 있었기에 ‘중목사’로 불렸다.
그런 김 목사를 따르던 사람들은 신촌 창광교회와 염천교회, 신촌교회 등을 세워 그 뜻을 잇고 있다. 김 목사가 별세할 때까지 10여년 동안 전도사로서 보좌했던 이경자(78) 전도사를 만나러 창광교회를 찾았다. 나이를 가늠키 어려울 만큼 젊은 이 전도사는 김 목사에 대해 “얼굴에서 언제나 사랑이 지글지글 끓었던 ‘사랑의 사도’였다”고 전했다. 김 목사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김 목사만큼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오후 6시만 되면 잠자리에 들어 밤 12시에 일어나 묵상을 했고, 새벽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곧바로 연세대 뒷산에 돌로 만들어놓은 기도실로 올라갔다. 그는 그렇게 아침 해를 바라보며 점심 무렵까지 깊은 황홀경에 잠겨 있곤 했다. 김 목사의 기도의 삶을 따라 그대로 실천해온 창광교회 이 병규(83) 목사는 김 목사가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살았다”고 회고했다.
나중엔 아현교회의 수많은 신자들까지 김 목사를 따라 나무 하나씩을 정해 그 밑에서 정좌한 채 명상에 잠겨 연세대 뒷산 일대는 장관을 이뤘다.
김 목사는 교회에서도 소리 내어 기도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동네에서 방앗간 하나 놓으려고 해도 동민들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못 놓는 법이라면서 기독교인들이 이성을 잃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부흥회라고 떠들고 소란스럽게 해 이웃 주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찬송은 하나님과 연락해서 영혼으로 부르는 것이지 자기 육체가 흥분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고요히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회개해 양심을 찾아 자신을 만들어야한다는 게 그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누구든지 자기가 된 만큼 밖에 남을 만들지 못하는 법이니 요는 나 하나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고 했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고 누구를 바로 서게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김 목사는 산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교인들에게 심방을 갔다. 방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안부를 여쭙는 문전 심방이었다. 대신 살림이 어려운 교인들 집에선 방에 들어가 연탄불을 지피고 있는지 바닥을 만져보고 쌀독을 들여다본 뒤 도움을 주곤 했다. 그는 늘 안주머니에 돈을 가득 담아 갖고 다니면서 즉각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겐 돈을 쓰지 않았다. 평생 교회 지하의 방 한 칸에서 지낸 그는 고기도 먹지 않았고, 세 가지 이상의 반찬을 놓지 못하게 했다. 옷도 두루마기만 입고, 고무신만 신었기에 달리 돈 들 일이 없었다. 김 목사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22살 때였다.
그는 양정의숙 법과를 졸업한 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일제하 조선의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다가 중국으로 떠나 간도와 러시아 등에서 11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1923년 귀국하자마자 체포돼 투옥됐던 그는 석방된 뒤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44살 때 16살 연하의 세브란스 간호사를 만났다. 얼굴이 얽었던 그의 아내는 병으로 이미 자궁을 적출해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으나 그는 그런 아내를 택해 결혼했다.
그가 아현교회를 개척한 것은 48살 때인 32년이었다. 아현교회에선 허세는 통하지 않았다. 교회도 그렇거니와 신자들의 사치도 허용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대부분 삭발했고, 여자들은 파마도 하지 못하게 했다. 결혼식도 20명 이상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신자가 세상을 떠나면 24시간이 지난 뒤 김 목사가 예배를 올린 다음 손수 시신을 손수레로 끌고 가 화장을 했고, 아이가 죽어도 김 목사가 직접 지게에 지고 가 산에 묻었다.
65년 그가 숨을 거두자 교인들은 그의 뜻에 따라 시신을 손수레에 싣고 가 화장했다. 그러나 울지 말라는 그의 뜻을 지키는 교인은 없었다. 1200여 명의 교인들은 손수레를 따르며 통곡했다.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보이는 목회자를 이제 어디서 다시 찾겠느냐는 눈물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