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야스는 8살부터 19살 때까지 슨푸성에서 인질생활을 하면서 철저히 이마가와 가문의 사람으로 키워졌다. 가문의 원수인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이름 중 모토(元)를 받아 이름을 모토야스라고 개명까지 하였고 이마가와 가문의 여인 쓰키야마도노[築山殿]와 결혼하였다. 그는 이마가와 가문을 위한 전쟁에 출전하여 몇 번의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다

이에야스의 운명이 다시 한번 바뀌는 계기는 전국시대 3대 야전으로 알려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하고 죽으면서였다. 승승장구하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죽음으로 이에야스에게도 이마가와 가문을 벗어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에야스는 성급히 움직이지 않았다. 오다카 성에 주둔하던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의 동향을 끝까지 살핀 뒤 자신의 고향 오카자키로 돌아갔다. 이 이후에도 이에야스는 성급히 독립을 선언하지 않고 계속 이마가와 가문의 동향을 살피면서 2년 세월을 더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외가인 미즈노 가문의 중재로 오다 노부나가와 기요스성에서 역사적인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마가와 가문을 벗어나 오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은 대가는 혹독했다. 이마가와 영지에 남아 있던 이에야스 가신들의 가족들은 나무에 매달아 창을 찔러 죽이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고 이에야스의 장인과 장모도 자결하여야만 했다. 이에야스의 아내 쓰키야마도노와 첫째아들만이 겨우 인질교환을 통해 살아서 돌아왔다.
이에야스는 이후 자신의 영지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면서 치욕스러운 이름 모토야스에서 이에야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미카와쿠니에서 이마가와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후에는 조정에 청하여 성을 마츠다이라에서 도쿠가와로 바꾸었다. 이는 그가 미카와 전체를 아우르는 지위에 오르기에는 마츠다이라라는 성이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여 족보를 조작하여 만들어낸 성이라고 한다. 일본의 귀족은 모두 천황가로부터 파생되어 나와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세상이 혼란스러운 전국시대에는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어느 정도 자리에 오른 무장들 중에 자신이 천황가와 관련이 있다고 우기면서 성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후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장녀 도쿠히메[徳姫]와 자신의 장남 노부야스[松平信康]를 결혼시켜 오다 노부나가와의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이 결혼 동맹은 훗날 이에야스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주게 된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 전쟁에 함께 참여하여 그를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도 점차 그 세력을 확장하여 갔다. 그는 아네카와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돕고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를 격파하고 5개의 쿠니(스루가, 도오토미, 가이, 시나노, 미카와)를 경영하게 되었다. 이때 이에야스는 자신이 인질 생활을 보낸 슨푸로 본거지를 옮기면서 굴욕의 과거를 보란 듯이 씻어냈다.
이에야스의 비약적 발전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에 힘입은 것이 컸다. 명목상으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관계였지만 사실, 이에야스에게 오다 노부나가는 주군과 다름없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뜻을 거스른다면 이에야스는 존재하는 것도 어려울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은 결국 이에야스에게 뼈아픈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며느리로 들인 오다 노부나가의 첫째딸 도쿠히메와 이에야스의 처 쓰키아먀도노와의 고부간 갈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이마가와계였던 쓰키야마도노와 오다가문인 도쿠히메는 가문으로는 적대적 관계였다. 거기에 이에야스의 아들 노부야스도 도쿠히메와 불화를 일으켰다. 이러한 때에 도쿠히메는 쓰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가 다케다 가문과 내통했다는 고발장을 아버지 오다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딸의 고발장을 본 오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처자를 죽일 것을 명했다. 이에야스는 자신은 다케다와 내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결국 쓰키야마도노를 죽이고 아들에게는 할복을 명령했다. 이로써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신뢰를 되찾았지만 뛰어난 후계자였던 아들을 자기 손으로 제거하는 가혹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일본 닛코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사당 도쇼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고개 숙이다.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난 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織田信雄]와 손을 잡고 고마키 나가쿠데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맞섰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보다 군사 수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략으로 번번이 히데요시의 군대를 막아냈다. 그러나 오다 노부카쓰가 겁에 질려 의논도 없이 히데요시에게 항복을 해버림으로써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맞설 명분을 잃고 자신의 영지에 웅거하였다.
전국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통일전쟁을 치르던 히데요시에게 이에야스의 복종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멀리 규슈까지 원정을 나가기 위해서는 히데요시의 배후 지역에 있던 이에야스를 자기편으로 돌려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명목상이었지만 오다 노부나가와도 동맹관계였지 신하와 주군의 관계는 맺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원한 것은 신종(臣從)의 관계였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누이동생을 이에야스의 정실로 들이고 어머니마저 인질로 보내면서까지 이에야스의 복종을 원했다. 결국,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품으로 들어갔다. 히데요시와 정면으로 싸울 경우 불리한 입장을 고려한 것이다.
배후를 안정시킨 뒤 히데요시는 규슈로 원정을 가 승리하였다. 그러나 아직 동쪽에는 호죠씨가 남아 있었다. 오다와라성 호죠씨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공을 치하하는 척하면서 그가 20년간 다스리던 5개의 쿠니를 빼앗는 대신 호죠씨가 다스리던 머나먼 동쪽의 낯선 땅을 영지로 내렸다. 사실상 중앙 정치 무대에서 내쫓긴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처분이었다.
하코네를 기준으로 동과 서로 나누어 간토라고 불리던 이 지역은 땅은 넓었지만 교토로 가는 길이 높은 산으로 가로막혀 중앙 정치 무대와는 심리적 거리감이 매우 컸다. 거기에 이 지역은 최후까지 히데요시에게 저항한 호죠씨가 정치를 잘했기 때문에 지역민들의 충성심이 컸다. 이런 곳에 히데요시의 부하인 이에야스가 지역 영주로 부임한다는 것은 혼란을 자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히데요시가 노린 것이 이것이었다. 중앙의 땅을 몰수하여 이에야스가 돌아올 땅을 없애면서 혼란한 가운데 그를 방치하여 중앙을 쳐다보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 그의 방책이었던 것이다.
히데요시의 속셈을 아는 이에야스의 가신들은 분노했지만 이에야스는 오히려 덤덤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던 영지를 서둘러 떠나 동쪽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주 근거지를 비옥한 오다와라에 정하지 않고 뜻밖에 늪지대인 에도로 정했다. 이는 호죠씨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오다와라에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이 담겨 있었지만, 일본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의 근거지도 아닌 조용한 어촌이였던 에도를 주 근거지로 정한 것은 매우 특이한 선택이었다.
그는 에도의 늪지대를 메우고 길을 닦고 상인들을 불러 모아 에도를 어엿한 성으로 발전시켰다. 이에야스는 일본의 패권을 차지한 뒤에도 교토 인근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막부를 열어 이후 간토 지역의 발전을 꾀했고 특히 에도 지역의 개발을 통해 훗날 도쿄 탄생의 초석을 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