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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형성과 우크라이나 자포로제 카자크와 러시아의 돈 카자크
2022년 2월 하순에 러시아에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는 면적은 남한의 6배이고
인구는 4,100만인데, 우크라이나의 국호는 Оукраина 에서 유래했으니 크라이
(краи) 는 땅, 변경, 경계를 의미하며 역사적으로는 소러시아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키예프 공국이 세워진건 천년이 넘지만 오늘날 "우크라이나" 라는 나라를 형성한
직접적인 민족은 저 변경지대에 살던 "카자크 Cossack(코사크)족" 으로.....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 카자크 와 러시아의 돈 카자크( 쿠반 카자크) 로 대별됩니다.
러시아어로는 Казаки(카자키), 우크라이나어로는 Козаки(코자키), 폴란드어로는 Kozacy(코자치)
영어로는 Cossack(코삭, 코사크)라고 하며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족과는 발음이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를 형성한 민족인 카자크는 슬라브계 이고, 중앙아시아의
카자흐는 튀르크계 민족으로 전혀 다르며, 어원은 튀르크어 '얽매이지 않은 자들'
이란 뜻의 카자크(Qazaq) 이니...... '방랑하다', '떠돌아 다니다'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러시아인의 루간스크와 도네츠크
공화국을 지원한다면서 군대를 진입시켰는데..... 1991년 독립 당시 우크라이나 군대는
병력 78만명, 전차 6,500대, 장갑차 7,000대, 화포 7,200문, 항공기 2,000대 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20여년 세월이 흔른 후에는 인구 4천만인 우크라이나의 경제력이 뒷바쳐 주지 못하니....
2014년 크림 반도를 상실할때 병력은 20만명이었고 즉각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6,000명
이었으며 600대의 항공기 중에서 가동 가능한 것은 100대 미만이었으니 문제는 경제력 이라?
1. 우크라이나의 첫 민족인 스키타이인
기원전 8~2세기 흑해 북쪽 우크라이나에는 스키타이인이 살았으니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
는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에 대해 “그들은 도시도, 성과 요새도 짓지 않고 이동할 때는
포장을 둘러친 마차에 가재도구를 실어 소나 말에게 끌게 했다. 그들이 이러한 생활 방식
을 취하게 된 것은 스키타이의 토지가 목초로 우거지고 여러 하천이 흐르는 평원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은‘유럽의 곡창지대’라 불리는 우크라이나 영토가 이때부터 비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헤로도토스가 남긴 다른 기록에 스키타이인은 능란한 기마술이 특징인 용맹한
전사였으니... 말을 타고 질주해오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처음 본 그리스인이 기겁해서 말하는
반인반수 켄타우로스 Kentauros 이며 또 침공해 온 페르시아인을 격퇴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2. 키예프 루스 공국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첫 나라인 키예프 루스 공국은 스웨덴에서 건너온 노르만 바이킹의 일파인
루스족(Rus 바랑기아인)이 세운 나라로 882년 부터 1240년 까지 키예프를 중심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에 존재했던 루스인들의 국가이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
(백러시아) 3국은 모두 자신들이 키예프 루스 공국의 역사를 계승한 ‘직계 후계자’ 라고 주장합니다.
키예프 루스 전신은 노르만 류리크가 862년 건설한 노브고로드 공령으로 후계자 올레크 베시가 수도
를 드니프르강의 키예프로 옮긴후 키예프 루스 공국이 되니 동슬라브족의 영토를 정복하고
동로마 제국 원정에 나서기도 했으며 여성 대공 올가는 957년에 정교회로 개종해 기독교도가 됩니다.
아들 스뱌토슬라프 1세는 965년 부터 유목민인 볼가 불가르를 복속시키고 하자르 카간국을 무느
뜨렸으며 불가리아를 공격했고 블라디미르 1세는 반란이 일어난 동로마에 6천명을 파병해
도우면서 공주와 결혼해 그리스정교를 국교로 선포했으며 후임 야로슬로프 1세는 대공으로
불렸지만 분할상속으로 분열되니 1095년에는 쿠만족의 침략으로 수도 키예프가 약탈 당합니다.
12세기에 키예프 루스는 노브고로드 공화국, 폴라츠크 공국, 블라디미르 대공국, 랴잔
대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스몰렌스크 대공국, 페레야슬라우 공국, 체르니히우
공국등 여러 공국들로 분열되어 난립해서는 서로 싸우느라 국력이 현저히 약화됩니다.
1237년 부터는 몽골 징기스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가 세운 킵차크 칸국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제외한 루스 공국들이 점령되었으며, 1240년에는
수도인 키예프가 함락되면서... 키예프 루스는 멸망하고 "타타르의 멍에" 가 시작 됩니다.
모스크바는 로스토프-수즈달 공국의 유리 돌고루키가 1147년에 세운 도시로 1263년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류리크 왕조 왕족인 다닐 알렉산드로비치가 모스크바
를 영지로 획득한후 힘을 길러 1283년에 수도로 정해 모스크바 공국이 건국됩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일설에 의하면.... 킵차크 칸국이 루스인 공국들에 거두는 세금을 대신 징수해
주면서 경제력을 통해 군사력을 키워 14세기에 대공국이 되었으며,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1380
년 쿨리코보의 전투에서 몽골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반격을 받아 다시 속국으로 전락합니다.
킵차크칸국을 반격해 거둔 승리에 취해 방심하다 역습을 받아 패한 모스크바공국은 절치부심해
15세기 부터 영토 확장을 시작했으니, 이반 3세는 1478년에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합병하고
1480년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해 240년간 이어진 “타타르의 멍에” 에서 벗어납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490년에는 속령의 봉건 제후들을 숙청해 중앙집권화를 이루고 1510년
발트해 까지 확장하였으며 1521년에는 랴잔 대공국을 합병해 루스 공국들을 통일했으니,
이반 4세 때부터 차르 칭호를 사용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은 러시아 차르국으로 발전합니다.
러시아의 논리는 1240년에 키예프 루스 공국이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한 후에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왕국의 영토가 됐고 나라가 소멸해서 계승자가 없었다고 주장하며
반면에 키예프 루스 공국을 구성하던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존속했으니 공국의 제도
와 문화를 계승해 훗날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니 러시아가 적자(嫡子) 라는 것입니다.
반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논리는,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비(非)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일 뿐이며, 가혹한 전제 중앙집권 체제인 러시아·소련의
체제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체제는 전혀 다르므로 별개의 국가라는 것이고 1240년 키예프
함락 후에 한 세기 가까이 존속했던‘할리치나-볼린 공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할리치나-볼린 공국’덕분에 우크라이나 땅에도 키예프 루스 공국을 계승한 국가가 존재
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 여부에
따라.... 자기 나라가 1,000년 전부터 이어온 영광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러시아의 한 지방에 불과한 신흥국인지를 가늠하는 국격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4세기 중반에 할리치나 - 볼린 공국이 멸망한 후에는 17세기 중반 코사크 (준군사적
자치 공동체) 가 우크라이나의 중심 세력이 되기까지 약 300년 동안 우크라이나
땅에는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정치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우크라이나 땅
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세 민족으로 분화돼 언어도 제각기 다르게 됩니다.
우크라이나가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 왕국의 지배하에 놓였던 16세기 말에는 귀족의 힘이
강해지면서 자유로운 농민들 대부분이 영주의 농노가 되기도 했는데.... “서유럽에서는
농노가 사라지던 시대에 비로소 동유럽과 우크라이나에서는 농노가 출현한 셈”인 것입니다.
3.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지배
18세기 말 폴란드가 분할되고 튀르크족이 흑해 북안에서 물러난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
까지 120여년간 우크라이나 영토의 80% 는 러시아 제국, 20% 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지배됐는데, 1차 대전이 터졌을때 볼셰비키 적군, 폴란드군, 루마니아군, 프랑스군이 우크라이나
땅을 둘러싼 세력들이었으니 우크라이나는 여러 세력의 충돌로 무질서한 내란 상태에 빠졌습니다.
1차 대전으로 러시아 제정이 무너지고 소련이 탄생하니 레닌의 민족 자결 원칙에 따라 구 러시아제국
의 지배 아래 있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여러 국가들이 독립을 이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어느 민족보다 긴 시간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이 시기에 독립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1922년 소비에트연방이 정식으로 성립한 이후 70여년간 우크라이나는 소련 연방의 한 부분
이 됐는데... 소련 초기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상당히 자유롭게 자신들의 주장을 모스크바
에 전달했고, 이를 관철시켰지만 스탈린의 권력 장악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자치
영역은 점점 좁아지고 결국 모스크바에 의해 완전히 통제돼 소련의 일개 행정 단위가 됩니다.
1928~1932년 농촌의 우크라이나인들을 대거 공장 지역으로 이주시켰고 ‘농업 집단화’
를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떨어져 1932~1933년에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이 발생했으니... 홀로코스트에 필적할 만한 제노사이드로
지적하는 학자가 있었지만 소련은 공식적으로 이 기근의 존재를 부인하면서 은폐합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로 소련 체제에 대한 불신이 우크라이나에서 터져나오고,
복권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3년 후인 1989년‘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한 우크라이나 국민운동’이라는
조직이 결성돼 1990년 3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의회인 최고회의 선거가 이뤄지면서
소련이 지속될 수 없음이 분명해지니 8월24일 독립선언을 채택하면서 소련은 사실상 해체 됩니다.
4. 러시아의 돈 카자크
러시아의 돈 카자크도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 카자크 처럼 민족 형성 시기는 애매한데...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 대공국 등이 사라지고 몇몇 슬라브인들이 캅카스 산맥 북쪽
남부 러시아 스텝 지역으로 흘러들어가 반유목화가 된 것을 기원으로 하는게 첫번째 학설 입니다.
두번째는 몽골 제국에서 떨어져 나간 타타르인들이.... 키예프 대공국이 몽골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한후 이주해온 슬라브인들과 만나 통혼하는 과정에서 슬라브인에 동화되어 카자크
를 형성했을 것이란 학설도 있는데, 이들 카자흐(코사크) 집단은 주류 러시아인과 구분
되는 문화를 유지했고 러시아군, 소련군 소속으로 정예 기마 군사집단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돈 카자크는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드미트리 돈스코이' 대공에게 돈 강의 성모 이콘을
바치고 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에게 대항해 함께 싸웠으니, 타타르에 대항한 슬라브족
의 첫번째 반기라고 할수 있는 쿨리코보 전투에 참전한 것은..... 이들 자유인 집단은
드네프르 강 남쪽에 있는 크림 반도의 타타르(크림 칸국)의 위협에 노출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몽골인들이 세운 킵차크 칸국은 돈스코이 대공이 쿨리코보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이반 3세
가 모스크바 대공국의 독립을 선언한 때 부터 세력이 상당히 약화돼 있었지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보호국이 된 크림 칸국은 18세기 이전 까지 러시아에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습니다.
1) 시베리아를 개척한 돈 카자크
돈 카자크는가 15세기 부터 러시아군에 합류해서 현재까지 러시아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데,
이들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침략)에 앞장섰고 시베리아의 토착민들과 전투를
벌였으니 가장 유명한 것은 이반 뇌제때 이루어진 '예르마크' 의 동방 원정으로....
예르마크는 전사했지만 시비르 칸국은 수도 튜멘도 잃고 칸인 쿠춤이 살해되어 멸망합니다.
돈 카자크의 빛의 속도로 행한 확장은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 개척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카자크의 야쿠츠크 개척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야쿠츠크의 연교차는 섭씨
100도로 헬게이트라 할수 있는 지방이며 표트르 이바노비치 베케토프와 그의 동료
카자크 30명은 현재 서유럽과 비슷한 크기지만 훨씬혹독한 야쿠츠크 지역을 개척했습니다.
포야르코프 등 다른 카자크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사할린, 오호츠크해, 서태평양 연안
등이 러시아 제국의 지도에 추가됐으니 러시아 정부는 모피 무역에서 높은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개척의 대가로 선물, 빵, 무기, 화폐를 줬다는데 이 시기에
지간스크, 베르호얀스크, 자시베르스크, 스렛네콜릠스크와 같은 도시들이 생겼습니다.
"12월 25일 위대한 황제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가 나라에 선포하노니, 짐은 위대한 황자와
국가를 위해 종 된 이들과 함께 레나 강가에 도시를 세웠다. 짐이 오기 전, 레나 강과
야쿠츠크 땅엔 다른 도시가 없었다. 나 표트르는 야쿠츠크왕 마미코프의 진영 앞에 도시를 세웠다."
그리고 배를 타고 흑룡강을 내려와 청나라 군대와도 전투를 벌이고 조선 효종 때 나선정벌에서
조선군과 맞붙기도 했는데 카자크는 배도 잘 타는 사람들이니, 시베리아 동서를 왔다
갔다 하려면 종으로 흐르는 예니세이 강, 레나 강 등 큰 강과 지류들을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카자크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식량을 제대로 보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시베리아에 살던
현지 주민들과 갈등을 빚어 원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하는 일이 빈번했으며, 사적으로
착취하고 노예로 삼는 등, 잔인무도한 짓을 저질렀으니 러시아 제국 정부는 카자크와
시베리아 원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골머리를 썩혔고 19세기 중엽에야 간신히 화해 합니다.
2) 돈 카자크인들의 종류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 초창기엔 볼가강 강변에 볼가 카자크가 생성됐으며.... 후에
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하면서 18세기 부터 캅카스의 테레크 카자크, 우랄의
야이크 카자크, 바이칼 카자크, 우수리 카자크, 시베리아 카자크 등이 더 형성됐습니다.
이들 중 캅카스나 더 밖의 지역으로 진출한 카자크들은 그곳의 타민족, 특히 캅카스의 산사람들
이나 여타 무슬림들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으니 톨스토이의 “카자크인들” 의 '테레크
카자크' 가 대표적인데 테레크 카자크의 무곡(舞曲)을 보면 캅카스 문화적 요소가 뚜렷합니다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 카자크와 폴란드와의 관계처럼 종교 문제로 인한 갈등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자유의 제약이 심해지고 농노들이 카자크 마을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하자,
카자크의 특권 중 몇 가지가 박탈되는 가운데 러시아 제국이 더 많은 봉사와 의무
이행을 요구하면서 자유로운 생활, 관습과 의무가 충돌하며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튀르크와의 관계도 갈등의 핵심 요소였으니 러시아 정부는 튀르크와 분쟁을 사서 겪고
싶진 않았지만 자치권이 있는 카자크들은 튀르크를 매우 혐오해 자신들의
마음대로 국경 지대를 침범하고 약탈하는 일이 잦아졌던 것이니 이걸 러시아
정부는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자유에 제약이 계속 심해지자 많은 봉기가 일어납니다.
특히 정부와의 협력이 본격화된 17세기와 18세기 러시아 역사에서 거대한 봉기는 카자크
주도 봉기에 농민 봉기나 다른 봉기가 함께 엮이면서 거대화된 경우가 많았으니
대표적으로 스테판 라진, 불라빈, 그리고 황제를 참칭했던 예멜리안 푸가초프의
봉기가 있으니 푸가초프의 난을 배경으로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대위의 딸을 집필합니다.
하지만 많은 저항이 러시아 정부에 의해 진압됨에 따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카자크는
차츰 러시아 사회에 흡수됐지만 그 과정에서 카자크의 자유는 축소됐으니 불라빈
의 봉기 이후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 카자크와 마찬가지로 돈 카자크의 자치는 소멸
됐고, 푸가초프의 난으로 반란의 주역이던 야이크 카자크는 우랄 카자크로 개칭됩니다.
3) 러시아군이 된 돈 카자크
그러나 여전히 많은 전쟁에 동원돼 용맹성을 떨쳤으니 러시아 차르의 근위대로도 활약
하기도 했을 정도인데 차르는 카자크에게 '카자크의 대수령' 칭호를 받아 겸임했고
고용된 카자크는 대가로 황제의 친위세력으로 많은 혜택을 받아 숫자도 120만
까지 늘어났으니..... 이런 배경으로 황제의 명령을 받아 체첸 까지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돈 카자크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그리고 1812년에 러시아를 침략한 나폴레옹에 맞서
카자크의 용맹성과 잔혹성은 대불 동맹 연합군 지휘관들도 학을 떼게 할 정도였으니
나폴레옹은 "카자크는 존재하는 모든 경기병 중에서 최고이다. 내가 그들을 우리
군대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나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1800년대 중엽을 지나면서 카자크 내에 계층 분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는데 원래 카자크
는 모두가 평등하게 땅을 경작했고 누가 더 높은 계급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분이
없이 모든 구성원이 평등했지만 여러 차례의 농민 봉기후 러시아 제국 정부는
카자크의 자유로운 기질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을 군대식으로 서열화 하게 됩니다.
여러 특권을 박탈하는 대신 카자크의 상층부를 러시아 귀족으로 편입시키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카자크들이 황제의 호위병 역할을 해주고, 많은 전쟁과 전역에
꾸준히 참여하자 카자크들에게 주어지는 토지가 급격히 늘어남과 동시에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령이 발표되면서 계층 분화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습니다.
4) 카자크 땅에 들어온 비 카자크인들
1861년 농노 해방령이 시행되면서 해방된 농노 출신들이 카자크인이 보유한 비옥한 남부
러시아(우크라이나, 돈바스, 캅카스)로 일자리를 찾아 대거 이주하니 '이노고로드니예'
라 불렸고 카자크인 지주들의 소작농이나 농번기에 품팔이로 생계를 어렵사리 꾸려
나가니 1917년 남부 러시아 이노고로드니예의 95%는 어떤 토지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카자크 촌으로 과거 농노였던 사람들이 몰려오니 19세기 후반에는 러시아인이나 바시키르인,
타타르와 같은 여타 민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해 카자크인이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상당히 줄어들었으며 1차대전 무렵이 되면 돈-쿠반 일대에서 카자크인은 전체 인구의
43% 로 이들은 상층 카자크의 토지를 경작하며 하층 카자크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카자크들은 러시아 가축 시장의 큰 손이고 상품작물 재배와 와인주조등 상업적 농업이 성행했으나
'빈곤한' 카자크인들은 비 카자크 농업 노동자 (이노고르도니예) 나 러시아 제국의 다른 지역
주민들보다는 경제적 여건이 양호했다고는 해도 현실에 대한 불만과 환멸이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5) 러시아의 시위 진압군이 된 돈 카자크
19세기 말부터 20세기초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운동, 반봉건운동이 널리 퍼지게
되자 카자크는 시위 진압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떠올랐으니 1905년의 1차 러시아 혁명 당시,
시위대에게 말을 타고 달려드는 모습은 러시아 민중들에게 각인됐으니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의 영화 “전함 포템킨” 에서..... 카자크들이 잔인하고 악랄한 모습으로 그려진 건 우연이 아닙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볼셰비키 지지파인 적군과 황제, 멘셰비키, 민주당 지지파
백군 사이에 "내전" 이 벌어지자... 카자크들도 둘 중 하나의 세력을 선택해야만 했는데
원래 공동생활을 하던 카자크 족도 이때 쯤이면 계급 분화가 어느 정도 벌어진 상태
였고 남부 러시아에서 카자크인 사회는 백군과 적군으로 갈라서 치열하게 대립했습니다.
귀족 및 상류층 카자크인은 반혁명군 편에, 빈농 카자크인들은 소비에트 편에 섰으니 남부러시아
의 카자크인 및 같이 살던 이노고르도니예 출신은 내전기간 동안 백군과 적군 양측 기병전력
의 핵심이 되었는데..... 카자크의 대추장 아타만을 비롯한 상층부는 백군 기병대로 활약했고
하층민에 속하던 카자크도 많은 수가 세묜 부됸니 원수 휘하의 적군 기병대로 들어가 활약합니다.
러시아인뿐 아니라 카자크간에도 동족상잔이 자행됐으니 러시아 내전의 연장 선상에서 발발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선 카자크의 오랜 숙적이자 카자크와 함께 유럽 대륙 기병대의
투톱을 자랑하던 폴란드 기병대와 잦은 전투를 벌였고.... 러시아 내전은 소비에트 정권의
승리로 끝나자 패배한 백군 측 카자크는 외국으로 망명하든 추방당했든 결국 러시아를 떠납니다.
이 시기 좌우 갈등으로 죽어나간 카자크들의 비극을 묘사한 작품으로 '고요한 돈강' 이 있으니 소설의
주인공 멜레호프는 카자크족 빈민 출신으로, 혁명과 내전이 벌어지자 백군과 소련군을 오락가락
하면서 좌우 갈짓자 행보를 보여주는데 이것이 혁명에 휘말린 카자크족을 상징하는 모습
이니 책의 저자 '미하일 숄로호프' 는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1950년대에 컬러 영화로도 만들어집니다.
한국도 냉전 말기에 소련 영화 수입금지가 풀리자 비디오로 출시됐는데 사람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소련에서 만든 영화답게 크고 웅장한 스케일에 CG 없이 그냥 사람들을 동원했으니,
책은 서슬이 퍼렇던 스탈린 시절에도 높이 평가받았는데.... 주인공의 갈짓자 행보 때문에
공산당 측에서 비판을 했음에도 워낙 문학성이 뛰어나서 숄로호프는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6) 볼세비키혁명후 내전기의 카자크 병사
내전기 카자크는 굉장히 복합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이니 미국인 존 리드가 쓴 “세계를 뒤흔든
열흘” 이란 러시아 혁명 르포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보여준 카자크관과도 너무 다르니,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는 "토지 없는 카자크들",
즉 빈농 계열의 카자크들이 자신들의 소비에트를 만들어 볼셰비키에 합류 하라고 말합니다.
스탈린 집권시기인 1932년 무자비한 농업집산화와 식량 징수를 하면서 그에 대한 역효과
로 소련에 대기근이 닥쳤는데, 불행히도 이 기근이 우크라이나 외에도 쿠반강 유역의
돈 카자크들에게 까지 직격탄이 되어 지역 인구의 25% 가 사망했는데 이 기근은
우크라이나 전역과 캅카즈 지역 전체, 그리고 러시아 남부 지역을 덮친 것이었습니다.
소련 정부는 얼마없는 곡식들을 빼앗아 카자크족을 죽게 내버려둘 뿐만 아니라 겨울에 많은
카자크족들의 집을 부수고 협동농장에 부역하도록 했고, 이는 30만이나 되는 카자크
족 들이 겨울에 아사하거나 얼어죽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이들의 상황이 너무
참혹해 미하일 숄로호프는 스탈린에게 상황 개선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7) 2차대전 독일군과 싸운 카자크 병사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말에게 초가 지붕의 지푸라기를 먹여가면서 3일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려 허둥지둥 내빼는 독일군을 칼로 도륙하는 용맹함으로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를 질리게 했다고도 하는데, 내전 시기부터 소련군 기병부대엔 카자크 출신
이 많았으며 기병 총감인 세묜 부됸니 원수부터 카자크 출신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산하에 카자크 기병을 부대로 둔 소련군의 이반 코네프 원수는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카자크의 용맹을 묘사하면서 "걔네들은 항복하겠다고 든 독일군의 두 손까지
잘라버리더군..." 이라고 이들의 용맹성을 묘사했는데 독일군도 카자크들에게 항복
하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고 있었기에 카자크들을 사로잡으면 대부분 사살 했습니다.
카자크들이 잔인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 탓도 있었지만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집단학살을 계획적으로 진행했었고......
포로로 잡힐시 끔찍하게 죽을 것이란 공포감이 만연했던 이유도 있었다고 봅니다.
8) 2차대전에 독일군이 된 카자크 병사
카자크는 대개는 소련군으로 참전했지만 그와 반대로 독일군에도 카자크가 있었으니....
나치 독일이 독소전쟁에서 포로로 붙잡은 카자크들과 전향한 보수파 장군이
함께 2개 카자크 기병 사단을 창설했으니 독일인 헬무트 폰 판비츠 장군이 지휘합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후 망명했다가 독일에 붙은 카자크 출신 러시아군 장군들에 호응하거나
소련의 문화적 억압에 대한 반감 때문에 독일 측에 부역했는데, 독일은 이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기에 소련군에 대한 작전보다는 후방의 빨치산을 진압하는데 자주 동원
했으며 말기에 이들은 SS 15 카자크 기병군단으로 편입됐고 대소련 방어전에 투입 됩니다.
이들은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 영내로 진입했고 독일이 항복하자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연합군에 항복했으니 이때까지만 해도 카자크들은 연합군에게 항복했으니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아돌프 히틀러의 후임으로 독일 대통령이 된 카를 되니츠도 이런 기대를 하고
독일이 연합군과 강화를 맺으면 그나마 소련에게 넘겨지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얄타 회담으로 소련과 협의된 영국군은 이들과 피란 온 민간인 까지 포함해 5만명을
스탈린에게 넘겨버리니 지휘관급 인물은 모두 교수형에 쳐해졌고, 나머지는 시베리아로
끌려갔다가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시대에 사면되거나 일부는 그 사면마저도 다시 취소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들을 탄압하던 공산당원들을 무찌르고 좋았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감언이설을 들었으니 솔깃할 만도 했겠지만 소련 입장에선 그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들과 손잡은 반역자들일 뿐이었으니.... 007 골든 아이가 이때 배신당한
카자크의 아들 006 요원(숀 빈)이 소련과 영국을 상대로 벌이는 복수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8) 전후 기병 해체 이후의 카자크인들
돈 카자크들은 2차 대전때 용맹으로 전투 종족의 명성을 회복했지만, 소련군이 전후 대대적
으로 기계화를 추진하면서 기병 병과 부대가 모두 기계화 보병, 혹은 기갑 부대 등지로
개편되자 기병 부대 담당 카자크들은 또 다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고, 카자크족
부대는 해체됐으며 카자크족 자치공화국도 폐지되니 농민이나 일반 시민으로 돌아갑니다.
페레스트로이카후 카자크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1989년 소련이 약소민족에 대한 탄압을 인정했으며
소련 해체후 1992년 억압받은 민족에 대한 복권을 보장하는 법이 제정되었고 1996년~1998년
10개의 보이스코(1만명 이상일 경우)와 3개의 관구(2천명 이상), 4개의 개별 집단이 등록
됐는데 2002년 인구조사에 14만명이 러시아에 살고 있으며 95% 이상이 러시아 남부 관구에 삽니다.
카자크는 그들의 단합과 문화 복원, 전통전승 등을 위해 텔레비전 채널을 개통하거나 인터넷
방송을 만들고 자체적으로 영화를 만들기도 해 활발한 복원 운동을 벌이고 있으니
문화센터는 물론 카자크 자체 미인대회도 열리고 있을는데 이런 카자크 문화 강조 노력
중에서 성공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쿠반 카자크 합창단이니 유튜브에 동영상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거주하는 남부 관구는 캅카스 계통의 비슬라브 거주민이 상당히 많은 지역인데, 다양한
민족들의 기질은 유명했으니 특히 체첸인들이 악명이 높았는데.....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들도 같은 처지로 그곳으로 끌려온 체첸인들에게 크게 학을 뗄 정도였다고 합니다.
체첸인들이 유일하게 겁내는 사람들이 카자크족이니 체첸 사태 당시 체첸 및 잉구세티야에 거주
하던 테레크 카자크 공동체들은, 사태 당시 대규모 러시아인 탈출 혹은 추방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으니 아타만과 테레크 카자크 자체는 존속중이지만 그 숫자는 크게 감소 했습니다.
러시아군에서는 카자크족 대추장(아타만)에게는 원수의 계급을 수여했고, 군인의 용맹을 제일로
치는 카자크족들은 다시 군대로 들어가서 러시아가 관여하는 전쟁들의 선봉에 서고 있는데
특수부대 혹은 해외 원정군의 일원으로 체첸 전쟁이나,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습니다.
카자크들의 위대함은 시베리아의 개척에서 진가를 발휘했으니 16세기 몽골로 부터 독립한 러시아
가 이들을 앞세워 시베리아를 차지하고 있던 몽골계 유목민족들을 멸망시키고 시베리아
동쪽 끝까지 정복해 나가 예니세이스크, 하바롭스크, 토볼스크 등의 시베리아의 도시들은
대부분 이들이 요새화한 정착지에서 기원하며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가 이끄는 카자크
부대는 1581년 사설원정대 주제에 시비르 칸국의 수도까지 정복해 시비르 영주로 인정받습니다.
9) 대한제국에 전해진 돈 카자크인 군인 이미지
자포로제의 악명(?)은 러일전쟁 시기 대한제국에서도 유명했으니.... “아라사의 서북부에 가살극
(코사크)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사납고도 악독하여 구라파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와전되어, '가살극 사람들은 퇴화되지 않은 꼬리가 있으며, 사람 고기를
식량으로 삼는다'고 소문났는데, 그들이 요즘 우리나라에 들어와 강토를 짓밟으며 남하하였다.”
“ 안주의 어느 백성이 암말을 잡아매고 편자를 박다가 돌아다니던 아라사 병사를 만나자 말을 미처
풀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아라사 병사들이 암말을 보더니 돌아가며 음란한 짓을 하였다.
이들이 가살극인데 성품이 음탕해서, 부녀자를 만나면 늙었는지 젊었는지도 묻지 않고
문득 범한다. 숫양처럼 하루에 수십번이나 하므로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 부녀자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들은 또 의심이 많아서 늘 약탈하다가도 네댓명이 모여있는 것을 보면 침입하지 못하며, 먹을 것을
보면 소나 말처럼 반드시 생채로 씹어먹었다. 그들은 말도 잘 타서 한번 휘파람을 불며 달리면
눈 깜짝할 사이에 10여리를 달렸다. 용모가 비록 사납게 생겼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만나도
죽이지 않았으며, 도리어 부드러운 빛을 보였다. 그들을 볼 때마다 이를 가는 자는 오직 왜놈뿐이었다.”
“왜군은 황해에 퍼져 우리나라(조선) 사람으로 분장하여 평안도 지방을 드나들며 아라사를 정탐했는
데, 아라사가 그것을 알고 엄히 수색하여 머리 깎은 자를 보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래서 스님들
가운데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날씨가 추워서 사람들이 방한모를 썼는데.... 아라사 군사
들이 사람들을 만나면 칼 끝으로 모자를 벗겨 머리를 깎았는지 아닌 지를 조사했다.”- 매천야록, 황현 -
5. 카자크(코사크) 문화
율 브리너 주연의 영화 대장 불리바로 더 잘 알려진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타라스 불리바” 에
의하면 어린아이 같은 식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메밀죽을 얼마를 쑤든 간에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먹고, 남아돌면 전부 다 몽땅 먹어치워 버린 것이며 게다가 술도 무진장 퍼마시니
“타라스 불리바” 에선 두꺼운 코트를 껴입고 땀을 뻘뻘 흘리는 한 카자크 남자가 나옵니다.
타라스 불리바가 "왜 더운데 옷을 껴입고 땀을 뻘뻘 흘리나? 꼭 삶은 문어 같군"라고 하자, 남자의 대답이
가관이다. "벗을 수가 없어요! 이 옷마저 벗었다간 당장에 술로 맞바꿔 마셔버릴지도 모르니까요."
특히 고골은 우크라이나와 관련이 깊은 작가인지라 우크라이나 카자크가 소설의 소재로 자주 등장합니다.
1814년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파리에 들어온 러시아군대의 카자크들은 파리 카페란 카페는 전세를 내
프랑스엔 없던 보드카를 달라고 난리를 피우는가 하면, 성질도 급해서 "빨리빨리!" 를 외치면서
음식을 재촉하는데 러시아어로 '(더)빨리!' 를 브이스뜨러!(Быстро)라고 하는데, 여기서 간단한
식사를 빨리 할수 있는 카페와 식당의 중간 성격을 가진 프랑스 식당 '비스트로(Bistro)' 가 탄생 합니다.
카자크 민요인 “카자크는 두나이를 넘었다” 도 서유럽에 알려져서 베토벤등 몇몇 작곡가들이
모티브로 작곡하기도 했다는데 카자크족은 머리꽁지만 남겨놓고 박박 민 머리와
긴 콧수염, 테트리스에서도 등장하는 따라하기 힘든 춤으로 유명하며 보드카! 전통의상
으로 루바슈카란 품이 넓은 셔츠와 파자마 비슷한 바지를 입는데 말 타기에 특화된 복장입니다.
쿠반카 라고 불리는 털모자를 쓰는데 샤쉬카라고 불리는 기병도와 함께 카자크군의 상징으로 여겨져
오늘날 까지도 의장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의외로 카자크들은 전통민요를 많이 갖고 있는데,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에선 '반두라' 라고 부르는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카자크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고골의“대장 불리바 : 타라스 불리바)” 와 폴란드의 예르지 호프만 감독의 영화 “불과 칼로써 -
Ogniem i Mieczem)”영화는 한국에도 개봉됐고, <007 골든 아이>와 <엑소시스트>
에도 출연한 적 있는 여배우 '이자벨라 스코룹코‘ 가 주연을 맡은데다 고증까지 완벽해서
대히트를 쳤지만 180분이나 되는 영화분량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선 1/3 이 잘려나갔습니다.
우크라이나측은 흐멜니츠키등 카자크 지도자들과 자포로제 카자크의 반란을 나쁘게 묘사했다고
영화를 비난했으나 주인공은 결혼식을 앞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기병대원을 중심으로 한
폴란드인으로 나오지만 흐멜니츠키는 인망도 있고 카리스마도 좋으며 머리도 좋은 적군
두목으로 나오고 폴란드 대영주들의 카자크들에 대한 오만과 잔인함 또한 제대로 묘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