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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李成桂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고려(高麗) 말(末)의 정국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고려 정계(政界)의 내부(內部)에서부터 개혁(改革)의 의지(意志)는 고려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자는 쪽과 모든 것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도모하는 세력으로 나뉘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중심에는 고려 말 급부상(急浮上)한 신흥 무장세력(武將勢力) 이성계(李成桂)와 그와 뜻을 같이 하는 급진파(急進派) 신진사대부들이 있었다.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과 함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이전의 고려(高麗)와는 다른 새로운 성격의 나라, 조선(朝鮮)왕조를 열었다.
변방 출신의 무장 (武將)
이성계(李成桂)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기부터 급부상한 신흥 무장(武將)세력이다. 그는 고려의 중앙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라, 원(元)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지역에서 힘을 키워갔던 변방(邊方)의 세력이었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원(元)나라가 1258년, 고려에 침입하여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차지한 후 설치한 통치기구이었다. 철령(鐵嶺) 이북의 땅은 공민왕(恭愍王)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전까지 근 100여 년간을 원(元)나라의 지배 하에 있었다.
이성계의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는 원래 전주(全州) 지역의 향리(鄕吏)이었는데, 가솔(家率)을 이끌고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이주(移住)하였다. 이후 이성계의 가문(家門)은 고조부(高祖父) ' 이안사 (李安社) '부터 아버지 ' 이자춘 (李子春) ' 때까지 원(원)나라로부터 천호(千戶)라는 지방관의 자리를 얻어 대대로 이 지역 고려인(高麗人)과 여진인(女眞人) 위에 군림하는 세력가로 성장하였다.
공민왕과 아버지 이자춘
위와 같이 고려(高麗)의 중앙(中央)과는 거리가 먼 변경(邊境) 지역의 세력, 심지어는 고려의 관리(官吏)도 안었던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중앙 조정에 등장하게 된 것은 공민왕(恭愍王)의 반원(反元) 정책 덕분이었다. 중국의 ' 원,명 교체기 (元, 明 交替期) '의 혼란한 국제정세를 틈타 고려의 자주성(自主性)을 되찾고자 했던 공민왕은 1356년 원(元)의 간섭기(干涉期)에 잃어버렸던 땅,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수복하려 했다.
이때 공민왕이 보낸 동북면병마사 ' 유인우 '에게 협력하여 쌍성총관부 지역을 고려가 탈환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이었다. 당시 20대이었던 이성계(李成桂)도 아버지와 함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데 일조(一助)하였다.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이 지역에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한 공민왕(恭愍王)은 이자춘(李子春)의 공(功)을 높이 사 그에게 고려의 벼슬을 내렸다. 1361년 이자춘은 삭방도만호(朔防都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외침(外侵)에 시달리고 내적(內的)으로는 권문세족(權門世族)의 득세로 왕권이 약화(弱化)되었던 군사조직은 붕괴하고 국가 재정은 말이 아니었던 고려 말, 비록 변방의 세력이지만 착실히 군사력을 키운 이성계 가문의 힘은 만만히 평가될 것은 아니었다. 이성계는 언제든지 동원할 수있는 탄탄한 사병조직(私兵組織)을 가지고 있었고, 지역에 뿌리박고 살면서 키운 인맥(人脈)과 경제력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이성계는 급부상한 집안의 배경과 함께 뛰어난 무예(武藝)를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활을 매우 잘 쏘았으며 동북면(東北面)의 여진족(女眞族)과 고려인을 수하로 부리면서 장수(將帥)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의 노력으로 고려의 중앙무대에 명함을 내민 이성계는 자신의 능력에 힘입어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 잇따른 외적(外敵)의 침입은 약화된 고려 조정으로서는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지만, 청년 이성계에게는 무장(武將)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있는 하늘이 준 기회나 마찬가지이었다.
이성계 호적
원래 8폭(幅)으로 전해오던것을 연결, 배접하여 두루마리로 만든 것이다. 이 문서는 일본 정창원(正倉院)에서 뱔견된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 서원경(西原京)의 촌적(村籍)을 제외한 현존하는 장적(帳籍)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이 시기의 사회사(社會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어 국보(국보)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만, 임진왜란에 많은 분량이 훼손되고 지금은 8장만 남아 있다.
국보(國寶)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기 2년 전의 것으로, 원래 고려시대에는 양반(兩班)은 3년에 한 번 호적(戶籍) 2본(二本)을 작성하여 하나는 관청에 두고, 하나는 자기가 보관하였는데, 이 원본은 이성계 자신이 보존한 것이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이성계의 관직(관직)과 식봉(食封)이 명기되어 있고, 이방원(李芳遠)의 명단도 나타나고 있으며, 호주(戶主)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세계(世系), 동거(同居)하는 자식, 형제, 조카 사위 등 족파(族派)와 노비(奴婢)까지 기록하였다. 이 원본으 조선 개국(開國) 이전의 본향(本鄕)인 영흥(永興)에 있을 때의 호적(戶籍)으로, 고려 말 양반 호적의 체재를 전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왕조에 등장
고려조정에 내알(來謁)한 뒤, 이성계의 본격적인 활동은 1361년 독로강(현재의 강계 지역) 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부터 시작되어 승승장구를 계속하였다. 같은 해 겨울, 압록강이 얼어붙자 중국에서부터 쏟아지듯 침입해 온 10만 명의 홍건적(紅巾賊)들이 수도 개경(開京)을 함락시켰다. 이때 이성계는 고려인과 여진족 2,000명으로 혼합 구성된 자신의 사병(私兵) 조직을 이끌고 수도 탈환에 참가하였다.
그는 홍건적(紅巾賊)의 우두머리를 모두 활로 쏘아 죽이고 수도 개경(開京)에 맨 처음 입성하는 큰 공(功)을 세웠다. 이듬해에는 원(元)나라 장수 ' 나하추 '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1364년에는 공민왕(恭愍王)을 폐(폐)하려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침입한 덕흐군과 최유의 1만 명 군대를 최영(崔瑩)과 함께 무찔러 고려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한 자신의 이종 사촌이 되는 여진족 삼선, 삼개의 난(亂)을 평정하여 동북면의 안정도 되찾았다. 이로써 이성계는 고려 중앙 조정에서 탄탄한 입지를 확보하고 중요 벼슬을 거치게 되었다.
이성계의 활동은 동북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극심해진 삼남(三南) 지역의 왜구(倭寇) 침입을 막아내었다. 특히나 해안(海岸) 뿐만 아니라 내륙(內陸)에까지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던 극악한 왜구(倭寇)를 황산(荒山)에서 섬멸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부른다.
이후 이성계는 북쪽과 남쪽을 오르내리며 근 20여 년간을 고려 조정을 위해 일했다. 그가 치르는 전투는 모두 승리하였으므로 그는 불패(不敗)의 사나이, 난세(亂世)를 구원할 영웅(英熊)으로 명성을 쌓아갔다. 거듭되는 승전(勝戰)은 그를 고려조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만들었고 벼슬길은 승승장구이었다. 또한 그의 인기와 명성을 쫓아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였다. 그 속에는 이미 그 운(運)이 다한 고려(高麗)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생각을 품은 신진(新進) 사대부(士大夫)들도 있었다.
황산대첩 荒山大捷
역사 속에서도 한 인물이 지명도(知名度)를 높이고 대권(大權)을 잡아가는 과정은 작은 사건에서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원래 함흥(咸興) 출신의 변방(邊方) 무장(武障)이었지만, 그의 이름이 중앙에까지 알려지는 사건이 있었다. 고려 우왕(禑王) 6년인 1380년, 왜구(倭寇)를 격파한 황산대첩(荒山大捷)이 그것이다.
고려 말에는 특히 왜구(倭寇)가 변방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일이 잦았다. 이때 일본(日本)은 1336년부터 시작된 남북조(南北朝)의 분열(分裂) 시기이었다. 남북조(南北朝)가 합일되는 1392년까ㅣ 60여년 동안 왜구는 빈번하게 침범하였는데, 우왕(禑王) 때는 물 380여 차례나 침입해 왔다. 1380년 지리산(智理山) 동북쪽인 운봉의 황산(荒山)으로 쳐들어온 왜구는 특히 악명이 높았는데, 그해 8월에 지금의 금강(錦江) 어귀인 진포(鎭浦)에 500여 척(斥)의 함선을 이끌고 왜구가 침입하였다. 이때 삼도순찰사에 임명된 이성계는 변안열과 함께 남원(南原)으로 가서 왜적과의 맞대결을 준비하였다. 당시 고려군(高麗軍)을 가장 공포에 떨게 한 인물은 소년 장수 ' 아기발도(阿其拔都) '이었다. ' 태조실록(太祖實錄) '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적장(敵將) 가운데 나이가 겨우 15, 16세쯤 돼 보이는 인물이 있었는데, 골격가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아기발도(阿其拔都)는 갑옷과 투구로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화살을 쏠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太祖)가 말하기를, '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고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태조(太祖)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豆蘭)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의 기세가 꺾였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하는데, 최영(崔瑩)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倭寇) 토벌(討伐)의 일대 전기(轉機)를 마련한 중요한 전투이었다. 이제 이성계(李成桂)는 중앙 정계에도 그 이름을 부각시키면서 새로운 지도자의 길로 한걸음 더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
황산대첩비
14세기 후반에 극심하였던 왜구(倭寇)의 노략질은 1376년 홍산(鴻山)에서 최영(崔瑩)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하였다. 그러나 1380년 8월에 500척(斥)의 대선단으로 진포(鎭浦 .. 지금의 서천~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상륙하여 충청, 전라, 경사 3도 연안의 고을을 약탈, 방화, 살육하였다. 이 때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
황산(荒山)에서의 뜻 깊은 전승(戰勝)을 기리기 위하여 이성계는 다음해인 1381년 이곳을 찾아와 암벽(岩壁)에다가 전투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의 이름을 새겼다. 황산대첩이 있은 지 200여년이 지난 선조(宣祖) 10년 1577년에는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의 건의로 지금의 운봉읍 화수리에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가 세워졌다. 19세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茶山 丁若鏞)'도 이곳 황산(荒山)을 지나다가 황산대첩비를 보고 그 감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왜인(倭人)은 본디 보전(步戰)에 익숙하였고, 우리는 보전(步戰)에 약했는데, 더구나 그런 산골짜기에서는 말(馬)이 달릴 수가 없는데도 승첩(勝捷)을 거두었으니, 그 승첩(勝捷)을 거둔 것은 신통한 무용(武勇)에서 온 것이지 단순한 인력(人力)으로 된 것은 아니다. .. 다산문집
일제강점기 시기 일제(日帝)의 대표적인 패전(敗戰)을 기록한 황산대첩비의 운명(運命)은 순탄하지 않았다. 일제(日帝)는 민족혼(民族魂)을 말살시키기 위해 400여년 동안 보존되어온 이 암벽(岩壁)과 비석(碑石)을 폭파시켰다. 1945년 1월 16일의 일이었는데, 밤에 술에 취한 남원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몰려와 비석을 폭파학, 암벽의 글씨도 정(釘)으로 쪼아 뭉개버린 뒤 총질까지 하여 글자를 식별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후 1957년에 파손된 부위를 짜 맞추어 옛 모습을 되찾고자 하였으나, 이미 심하게 파손되어 어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검은 대리석으로 원형와 똑같은 비(碑)를 다시 만들어 대첩비각(大捷碑閣) 안에 보존하였고, 폭파된 비석 파편들은 파비각(破碑閣)을 세워 그 안에 한데 모아놓았다. 비문(碑文)에는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옛날 태조(太祖)가 승전(勝戰)한 황산(荒山)이 시대가 흐르고 지명(地名)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비석을 세우는것이 좋겠다는 청(請)에 따라 왕명(王命)으로 건립하였음을 비롯, 이성계가 10배의 왜구를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이 비(碑)를 세운다는 명문(銘文) 등이 실려 있다.
위화도 회군 위화도 회군
자신의 능력으로 승승장구하며, 아무리 그 입지를 화고히 한다고 하여도 이성계에게는 변방(邊方) 지역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기에, 누대(累代)에 걸쳐 뿌리내린 막강한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이 버티는 고려 중앙 정치무대에서 그의 성장(成長)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같은 시기에 이성계와 함께 외적(外敵)을 퇴치하는 데 혁혁한 공(功)을 세운 권문세족 출신의 최영(崔瑩)에게는 이성계로서는 넘어서기 어려운 존재감(存在感)이 있었다. 공민왕(恭愍王)의 사후(死後) 한때 중앙 정계를 주름잡던 이인임(李仁任) 세력을 최영(崔瑩)과 함께 물리친 이성계는 수문하시중(首門下侍中)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언제나 최영(崔瑩)의 다음 자리이었다.
당시의 국제 정세
이즈음 국제 정세는 원(元)나라가 북쪽 몽골지역으로 쫓겨나가고, 명(明)나라가 중국의 본토를 차지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중국 본토를 차지한 후, 명(明)나라는 원,명 교체기 (元, 明 交替期)의 혼란스러운 상황동안 돌아보지 못한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재정립(再定立)하려 했다. 고려(高麗)와의 관계에서 명(明)나라는 공민왕(恭愍王)이 회복한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나섰다.
철령(鐵嶺) 이북의 땅은 원(元)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적으로 점거ㅎ였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비역으로 명(明)나라는 이곳에 철령위(鐵嶺尉)을 세우면서 이전(以전)의 명(明)나라의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였다.
최영(崔瑩)과 그가 보호하고 있던 우왕(禑王)은 명나라의 이러한 요구에 반발하였다. 그리고 명나라 초기의 불안한 정국을 틈타 요동(遼東)까지 정벌하자고 나섰다. 이성계는 최영(崔瑩)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이성계는 최영(崔瑩)이 울분에 차서 전투의 시기(時期)와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있다고 판단하고, 요동정벌(遼東征伐)이 불가(不可)한 4가지 이유를 들었다.
4대 불가론 四大 不可論
그것은 여름철 농번기(農繁期)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하다는 점,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쓰기 힘든 점과 병사들이 전염병(傳染病)에 걸릴 염려가 크다는 점,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사이에 남쪽의 왜구(倭寇)가 침입할 우려, 그리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리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의 의견은 군사에 정통한 장수로서 일견 타당한 부분도 있었으나, 완강한 최영(崔瑩)과 우왕(禑王)에 의하여 무시되었다.
요동정벌 遼東征伐
드디어 우왕(우왕)과 문하시중 최영(최영)이 강력하게 주장하여 요동정벌(요동정벌)이 실행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에서는 8도(道)의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세자와 여러 비(비)들을 한양산성(한양산성)으로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禹玄寶)로 하여금 개경(개경)을 지키게 한 뒤 우왕(우왕)과 최영(최영)은 서해도(서해도)로 가서 요동정벌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해 4월에는 우왕(우왕)이 봉주(鳳州)에 있으면서 최영(崔瑩)을 팔도도통사(팔도도통사)로 임명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았고, 또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좌,우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동원된 총 병력(兵力)은 좌,우군 3만 8,830명과 겸군(謙軍) 1만 1,600명 그리고 말(馬) 2만 1,682필(匹)이었다. 곧이어 우왕과 최영장군은 평양에 머물면서 독전(督戰)하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좌,우군은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평양(평양)을 출발하여 다음달에 위화도(威化島)에 둔진(둔진)하였다.
그러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위화도(威化島)에 주둔한 이성계(李成桂)는 큰 비를 만나고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대로 물에 빠져 죽을 것인가, 아니면 군대를 돌릴 것인가의 기로(岐路)에서 이성계는 조민수(曺敏修)를 설득하여 회군(回軍)을 선택하게 된다.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면서 이성계는 이미 왕명(王命)을 거역한 반역자(叛逆者)의 신세가 되었다. 이러나 저러나 운명의 기로(岐路)에 서 있었던 그는 요동정벌을 위해 얻은 대군(大軍)을 개경(開京)으로 끌고 가 ' 쿠데타 '를 일으켰다. 요동정벌대(遼東征伐隊)에 대부분의 군사를 내주었던 최영(최영)은 적은 숫자로 이성계에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성계는 쿠데타에 성공하였고,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태산(泰山)과 같은 존재, 최영(崔瑩)을 제거하였다. 이성계(李成桂)는 우왕(禑王)을 왕위에서 내쫓고 고려 중앙 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의 쿠데타에 힘을 실어준것 은 공민왕 시절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는 신진 사대부(士大夫)들이었다.
당시 신진(新進) 사대부(士大夫)는 고려말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안에서 점진적(漸進的)인 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온건파(穩健派)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급진파(急進派)로 나뉘어 있었다. 온건파는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등이 있었고, 급진파로는 정도전(鄭道傳)이 대표적이었다.
처음에는 신진 사대부 전체가 이성계와 협력하여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왕위에 앉히는 등 정견을 같이 하였지만, 새로운 왕조를 향한 급진파(急進派)의 급격한 추진력은 결국 두 세력을 반목(反目)하게 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鄭道傳)과 결탁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반대하고 고려(高麗)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던 정몽주(鄭夢周)를 마지막으로 제거함으로써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 이성계는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전제(田制)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구세력(舊勢力)의 경제력을 박탈하고, 신진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새로운 나라를 향한 새로운 지배계층(支配階層)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 조선 건국
이성계의 조선(조선) 건국 과정을 요약하면, 무공(무공)을 세워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전횡(전횡)하는 최고 권력자 제거에 일익을 담당하여 권력의 핵심에 접근한 후, 불가피하지만 쿠데타를 일으켜 공동권력자가 되고, 그 후 공동권력자를 제거하고 1인자가 된다, 그리고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기회(기회)로 삼아 국왕을 폐(폐)함으로써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격상된후, 왕위를 선위(선위) 양식으로 찬탈하는 등 ... 이와 같이 이성계는 신하(신하)가 왕위를 차지하는 교과서적인 권력 찬탈의 단계를 차례로 밟아 조선 왕조를 개창(개창)하였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 위대한 전공(전공)을 바탕으로 무인(무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냄 .... 원(원)나라의 침략과 홍건적(홍건적)의 격퇴 그리고 왜구(왜구)의 토벌로 군지휘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내며 급부상한다. 2. 최영(최영)과 합세하여 권신(권신)을 제거하고 권력의 핵심에 접근 ... 공민왕(공민왕) 사후 우왕(우왕)을 옹립하고 권신이 된 이인임(이인임)이 나이가 들어 그 권력을 이어받은 염흥방, 임견미 세력이 백성들의 토지를 불법 수탈하여 민심이 이반(이반)된 것을 계기로 최영(최영)에 합세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함을 계기로 최영(최영)이 문하시중이 되고 자신은 수문하시중(ㅅ문하시중)이 되어 권력의 핵심에 접근하였다. 3. 위화도(위화도) 회군이라는 쿠데타를 주도하여 실권을 장악 ... 1388년 명(명)의 철령위 설치를 계기로 우왕(우왕)과 최영(최영)의 강력한 요동정벌 주장으로 인하여 요동정벌군의 우군도통사가 되어 출병(출병)하였으나, 위화도에서 장마에 도강(도강)을 못하고 발이 묶인것을 기회로 자신보다 상위직위인 좌군도통사 조민수(조민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회군(회군)을 감행, 최영(최영)을 제거하고 쿠데타에 성공하여 실권을 장악한다. 4. 성공한 쿠데타의 양대 세력이던 조민수(조민수)를 제거하고 권력 1인자가 되었다 ... 고려사(고려사)의 기록에, 이성계의 주장에 반하여 조민수(조민수)의 강력한 주장으로 우왕(우왕)의 아들인 창왕(창왕)을 옹립했다는 것에 근거하면, 당시 조민수(조민수)의 세력 또한 막강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성계는 자신이 고려조정의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는 데 마지막 걸림돌인 '조민수'이 제거를 위해 전제개혁(전제개혁)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읽고 활용하여 당시 급부상하고 있던 신진 사대부(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과감한개혁정책을 주장하고 이에 반대하는 조민수(조민수)를 탄핵하여 유배(윱)를 보내는데 성공하여 명실상부한 권력서열 1인자가 되었다. 5. 자신을 제거하려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였다 ... 공교롭게도 유배(유배) 중이던 우왕(우왕)의 사주를 받은 김저(김저)가 이성계 암살(암살)을 모의하다가 밀고(밀고)에 의해 전모가 밝혀졌고, 이를 기화로 이성계는 폐가입진(폐가입진)이라 하여 우왕(우왕)과 창왕(창왕)은 신돈(신돈)의 자손이므로왕씨(왕씨)에게 왕권을 돌려준다는 명분으로 창왕(창왕)을 폐하고 공양왕(공양왕)을 옹립하여 자신은 무소불위(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6. 공양왕(공양왕)의 선위(선위) 양식으로 역성혁명(역성혁명)을 성공함 ... 공양왕 옹립에 뜻을 같이 하였던 정몽주(정몽주)는 고려왕실을 유지하자는 개혁파로서,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여성혁명) 모의를 파악하고 길을 달리 하는데 이성계가 사냥하다 다쳐 거동을 못하는 틈을 이용하여 정도전(정도전) 등을 탄핵하여 유배(유배)를 보내버리고 이성계 일파 제거를 계획하였으나, 이방원(李芳遠)의 과감한 정몽주 제거로 온건개혁파(穩健改革派)는 무너지고 마지막 지지(支持) 세력이 없어진 공양왕(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선위(禪位)를 하게 되었다.
조선의 개국
고려 구신(舊臣)들의 반발 및 회유
이성계를 지지한 신진사대부의 무력 쿠데타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을으로 몰았고, 유능한 관리들로 하여금 벼슬길을 버리고 은둔(隱遁) 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이때 두문동(杜門洞)의 72현(賢)을 비롯하여 고려의 유신(遺臣)들에게 개국공신(開國功臣)가 그에 상응하는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의 지위를 내렸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거절하고, 낙향(落鄕)하거나 산으로 숨어버린다.
두문동(杜門洞)에 모여있던 고려의 옛 신하들이 마을에 불을 질렀는데도 한 사람도 나오지 않고 모두 타죽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새 왕조(王朝)에 대한 반감(反感)이 어느 정도로 심했는가를 알게 해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결국 이성계는 새로운 도읍지를 정할 것을 명한다. 바로 그는 지역의 민심과 사상적 기반을 달리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정도전(鄭道傳)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읍지 천도(遷都)와 국교(國敎)를 불교(佛敎)에서 유교(儒敎)로 개정할 것을 결심한다.
이성계는 즉위 초, 민심(民心)을 두려워 하여 나라 이름을 그대로 고려(高麗)라고 했으며, 모든 법제(法制)를 고려의 예(例)에 따르게 했다. 개국(開國) 직후 그는 길재(吉再), 이색(李穡) 등의 구신(舊臣)들을 방문하여 협력을 요청하였다. 권근(權近), 하륜(河崙) 등은 그의 요청에 협력하여 새 조정에 참여하였지만, 길재(吉再) 등은 그가 보낸 사신들의 면담을 거절하였다. 신진사대부의 스승인 이색(李穡) 역시 이성계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이색(李穡)은 한양의 왕궁에 온 뒤에도 그를 임금이라 하지 않고 그대, 송헌이라 불러서 남은, 정도전, 조준 등이 반발하기도 하였다. 이성계는 개국공신을 책록(冊錄)하면서 고려(高麗)의 구신(舊臣)들에게도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칭호를 내려 회유, 포섭하려 하였으나 일부만이 협력하고 대부분 고려의 구신(舊臣)으로 남겠다며 이성계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한양 천도 漢陽 遷都
새 왕조를 연 이성계는 즉위 한 달 만에 수도(首都)를 옮길 결심을 한다.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고치지 않고 수도(首都)도 그대로 개경(開京)으로 할 생각이었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천도(遷都)를 결심, 후보지를 고르기 시작하였다. 일설에 의하면,그가 고려의 왕족 왕씨(王氏)를 가혹하게 몰살시킨 후 악몽(惡夢)에 시달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왕족들에게 살기좋은 섬으로 보내 살게 해준다는 구실로 ㅘㅇ씨(왕씨)들을 배에 태운 다음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모두 물귀신으로 만들었는데, 그날 밤 고려 태조 왕건(왕건)이 꿈에 나타나 보복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도읍지의 맨 먼저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鷄龍山)이었다. 이성계는 곧바로 궁궐터를 닦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계룡산 천도(遷都)에 반대하는 상소(上疎)가 올라왔다. ' 너무 협소하여 백성들이 들어가 살기 어렵고, 토지가 비옥하지 못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금강(錦江)이 멀어 백성들이 고생하다 '는이유이었다. 정도전(鄭道傳) 등도 계룡산으로의 천도(遷都)를 반대하여 이성계는 새로운 길지(吉地)를 선정하게 된다.
두 번째 후보지는 한양(漢陽)이었다. 왕사(王師)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어명을 받고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무학(無學)은 삼각산(三角山)에 이어 목멱산(木覓山 .. 남산)에 올랐다. 이곳이 적당하다고 쾌재를 부르는 순간,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소리를질렀다고 한다. ' 이 놈이 소 ! 미련하기가 무학(무학)과 꼭 같구나.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아가다니 ... " 무학(無學)은 노인을 쫓아가 길지(吉地)를 알려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노인은 ' 여기서 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면 알 일이다 '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무학(無學)은 그대로 태조(太祖)에게 길지(吉地)를 보고하였다.
무학(無學)이 노인의 말을 쫓아 가보니, 그곳은 바로 고려(高麗)의 남경(南京) 터이었다. 다시 삼각산을 거쳐 백악산 밑에 도착한 무학은 인왕산(仁旺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우 용호(龍虎)를 삼는 이곳을 궁궐터러 정하고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는 무학의 말을 듣고 그 길지(吉地)로 향하고 그곳을 궁궐터로 정하였다.
그런데 무학(無學)의 의견에 정도전(鄭道傳)이 반대하고 나섰다. "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南面)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東向)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라며 반대하였다.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다시 잡은 자리가 북악산 밑, 경복궁(景福宮) 자리이었다. 본래 무학(無學)이 잡은 자리는 종로의 필운동(弼雲洞) 근처이었다.
백성들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役事)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반대로(遷都反對론)을 물리치고, 태조 3년인 1394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천도(遷都)를 명령하였다. 새 도읍지 한양(한양))이 조운(漕運)이 잘 통하고 사방이 이수도 고르니 사람들에게 편리하다는 이유이었다.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開京)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세 도읍지의 이름을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役事)에 들어갔다.
그의 치적
그는 고려의 임시 국왕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 그해 11월 29일 예문관학사 한상질(韓尙質)을 명(명)나라에 보내어,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에서 하나를 골라 새로운 나라의 국호(國號)로 삼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주청(奏請)하였다. 한상질(韓尙質)은 한명회(韓明澮)의 할아버지이다. 그러나 명(明)나라는 공식(公式) 승인(承認)을 하지 않은 채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을 쓰고 싶으면 알아서 하라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명나라로서는 고려(高麗)가 망(亡)하고 새로운 나라가 생겼다고는 하나, 앞으로 상황 변화를 지켜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유보적(留保的)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에 앞서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조림(趙琳)은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새로운 왕(王) 이성계(李成桂)를 권지국사(權知國事)로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왔었다. 이 두 상황을 종합해 보면,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명칭은 ' 조선국 권지국사 '가 되어야 하지만, 명나라는 공식 외교문서(外交文書)를 보낼 때 이성계를 ' 고려 권지국사 ' 로 불렀다.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으로 공식 인정하는 고명(誥命)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조선에서 보내는 외교문서에는 ' 조선국 권지국사 '라고 써도, 명나라에서 보내는 답신(答伸)에는 언제나 ' 고려국 권지국사 '라고 되어 있다가, 태종(太宗)의 즉위와 함께 고명(誥命)과 인신(印神)을 받고 나서 비로소 '고려 권지국사 '는 '조선 국왕 '으로 바뀔 수 있었다.
권지(權知)란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인턴 또는 임시 등의 뜻이다. 따라서 권지국사(權知國事)란 정식 국왕이 아니라 임금이 될 준비를 하는 임시(臨時) 국왕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대조(태조)와 정종(定宗)으 적어도 공식적(公式的)으로는 조선의 임금이 아니라, 고려(高麗)의 임시 국왕이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중종(中宗)처럼 반정(反正)에 의하여 왕위에 오르거나 선조(宣祖)처럼 왕통(王統)이 끊겨져 방계(방계)에서 왕위를 잇게 될 경우에는 명나라의 고명(誥命)이 오기 전까지 ' 권지국사(權知國事) '를 자처(自處)하기도 했다. 사실 조선으로서는 대단히 치욕적(恥辱的)인 부분일 수 있다.
건원릉 建元陵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태종(太宗) 8년인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別殿)에서 승하하였다. 영의정 하륜(하륜) 등이 산릉지를 물색하다가 그해 6월28일 현 위치로 결정하였고, 7월 5일 각 지방에서 군정(軍丁) 약 6,000명을 징발하여 7월말부터 역사를 시작하고 석실(石室)을 조성하였다. 9월 7일 태종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빈전(嬪殿)에 나아가 견전례를 행하고 발인하였다. 건원릉(建元陵)이라는 능호(陵號)는 두 글자로 ' 조선을 건국한 왕 '이라는 뜻으로 이후 모든 왕릉의 능호는 한 글자로 지어졌다.
건원릉은 고려(고려)의 왕릉인 현릉(현릉 .. 공민왕릉)의 제도를 표본으로 1408년에 조성되었다. 정자각(정자각)은 고려시대에도 건립되었으며 조선왕조도 건국 초기부터 왕릉에 정자각을 조성하였으므로 건원릉의 정자각도 능침(능침)의 조성과 함께 건립되었다. 정자각은 능제(능제)에 따라 능침 남쪽에 낮게 자리하고 있다.
정자각 丁字閣
건원릉 정자각(정자각)은 태종 8년인 1408년에 건원릉과 같이 건립되었고, 그 후 몇 차례의 중수(중수)가 있었지만, '국조오례의(국조오례의)' 길례 단묘도설과 비교해 볼 때 초기의 기본적인 특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조선 제 1대 태조(태조)의 능인 건원릉의 정자각이라는 상징적 의미 뿐만 아니라, 조선의 능침제도에서 정자각의 표준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여 보물 제 14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왕조에서 왕릉(王陵)이 가장 많이 조성된 곳이 바로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九里市)에 자리잡고 있는 동구릉(東九陵)지역이다. 이곳에는 조선의 첫 왕인 태조(太祖)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이 있다. 그런데 건원릉에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무덤만 덩그러니 조성되어 있다. 태조(太祖)에게 왕비(王妃)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신의왕후(神懿王后) 뿐만 아니라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까지 있었음에도 이성계가 홀로 묻힌 까닭은 무엇일까 ?
이성계 .. 홀로 묻힌 까닭?
유교사상이 국가의 이념으로 자리를 잡은 조선시대. 돌아가신 선왕(先王)에 대한 상례와 제례는 현왕(現王)이 최고의 정성을 다하는 의례이었다. 왕의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왕릉(王陵)에 왕조의 역량이 총결집되었던 것 역시 예법을 다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첫 왕인 태조(太祖)의 무덤부터 최선의 예(禮)를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태조가 왕비(王妃)없이 혼자 묻히는 불운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불운(不運)의 배경에는 조선 초기 태종(太宗)과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 강씨 "의 갈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태조 말년 태조(太祖)는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로 본처(본처)인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자식들을 제쳐놓고,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아들 방석(芳碩)을 지명하였다.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이자 가장 정치적 야심이 컸던 방원(芳遠)은 격분하였다. 급기야 1398년 왕자의 난(王子의 亂)을 일으켜 방석(芳碩)을 제거하고 형(兄) 정종(定宗)을 왕으로 올렸다. 태조 역시 막내 아들인 방석(芳碩)을 죽인 이방원(李芳遠)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방석(芳碩)의 죽음에 화가 난 태조는 고향인 함흥(咸興)으로 돌아가 태종과 한 곳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 함흥차사 (咸興差使) '이야기가 전해진 것은 태조와 태종의 갈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죽기 직전 태조와 태종의 화해(화햬)는 이루어졌지만, 태조 이성계가 죽은 후 왕릉(王陵)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태종(太宗)의 고민(苦憫)은 깊어졌다. 조선 건국 전에 죽은 친어머니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무덤은 개경(開京)에 있었고, 계모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무덤인 정릉(貞陵)은 서울에 조성되어 있었지만, 그 옆에 아버지를 모셔두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신덕왕후가 생존하던 시절에도 이방원과 그녀의 갈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였다.태조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정도전(鄭道傳) 등의 힘을 빌려 자신의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世子)에 앉히면서 이방원의 신덕왕후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그 분노(憤怒)는 그녀가 죽은 후에도 이어졌다. 태조에 앞서 계비 신덕왕후가 먼저 죽자, 왕릉도 궁궐에서 잘 보이는 곳에 조성하고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태조는 궁궐에서 정릉(貞陵)의 아침 재(齋)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 정도로 계비(繼妃) 신덕왕후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고 한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이방원의 눈에는 태조가 조성한 정릉(貞陵)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결국 정릉(貞陵)의 파괴(破壞)와 이전(移轉)을 지시하였다. 태종 9년인 1409년 정릉은 도성(都城) 밖 양주 지방, 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貞陵) 자리로 옮겨갔다. 이어 태종은 원래 정릉의 정자각을 헐고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하였으나, 1410년 광통교(廣通橋)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屛風石)을 광통교의 복구에 시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밞고 지나가도록 했으니, 신덕왕후에 대한 태종의 증오(憎惡)가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복원된 청계천의 광통교(廣通橋) 밑에는 신덕왕후의 무덤에서 가져왔다는 석물(石物)이 여전히 남아 있어 옛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태종(太宗)은 정릉(貞陵)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도록 했으나, 현종(顯宗) 시대에 송시열(宋時烈) 등의 건의로 복구되었다. 잡초(雜草)가 우거져 찾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정릉(貞陵)은 철저히 방치되어 있다가 비로소 왕비릉(王妃陵)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결국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무덤, 건원릉(健元陵)은 신의왕후나 신덕왕후의 무덤 곁에 조성되지 못하였다. 신의왕후(神懿王后)는 조선이 건국(建國)되기 이전에 사망하여 개성(開城)의 재릉(齋陵)에 묻혔으나, 개성(開城)은 새 왕조 조선(朝鮮)의 첫 왕이 묻힐 곳으로는 적절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태조(太祖)의 무덤이 신덕왕후(神德王后) 곁에 갈 수 없었다. 왕릉 조성의 실질적 집행자인 태종(太宗)의 의지(意志)가 워낙 강하였기 때문이다.
건원릉의 기본 능제(陵制)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현정릉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적으로는 석물(石物)의 배치와 장명등(長明燈)의 조형 등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 주위로 곡장(曲牆)을 구르는 방식은 조선시대의 능제에서 새롭게 추가된 것이며, 석물(石物)의 조형은 남송(南宋) 말기의 중국풍을 거의 따르고 있다.
조선의 왕릉은 좌향(座向)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좌(座)란 혈(穴)의 중심이 되는 곳이고, 좌(座)의 정면이 되는 방향이 향(向)이다. 능(陵)의 뒷쪽에 배산(背山)이 있고, 경사지 및 부분에 동, 서, 북 3면으로 곡장(曲牆)을 두르고, 곡장 안에 봉분을 조성하였다. 봉분 밑으로는 12각(角)의 호석(護石)을 둘러 봉분을 보호하였는데, 이를 병풍석(屛風石)이라고 한다.
병풍석(병풍석)은 지대석(지대석) 위에 우석(隅石)을 놓고 사이사이에 면석(面石) 12기를 세웠는데, 면석에는 중앙에 12방위(方位)를 담당하는 12지신상(支神像)을 해당 방위에 맞게 양각(陽刻)하였다. 이 심이지신상(十二支神像)은 모든 방위의 외침(外侵)으로부터 왕릉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병풍석이 감싸고 있는 봉분의 주위는 다시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보호하고 있다. 난간석은 망주석(望柱石) 모양의 제일 높은 기둥인 석주(石柱), 그 사이를 가로질러 접근을 막는 죽석(竹石), 죽석의 중간에 받쳐둔 작은 기둥인 동자석주(童子石柱)로 구분되었다.
난간석 바깥으로는 석양(石羊) 4기를 동서(東西)로 나누어 세우고, 석호(石虎) 4기를 북쪽에 2기, 동서의 석양(石羊) 사이에 하나씩 두어 봉분 밖을 향하고 있다. 석호(石虎)는 능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석양(石羊)은 사악(邪惡)한 것을 피한다는 의미와 함께 명복(冥福)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추존(追尊)된 왕릉의 경우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의 수(數)를 반(半)으로 줄여 일반 왕릉과 차별을 두었다.
봉분 바로 앞에는 상석(上石)을 두었다. 상석 아래에는 귀면(鬼面) 모양을 새긴 고석(皐石)이 상석을 바치고 있는데, 험상궂은 얼굴을 한 귀면(鬼面) 중에는 4개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1쌍을 세웠고, 이보다 한 단 아래에 장명등(長明燈)을 두었다. 장명등은 초기에는 팔각지붕을 하고 있다가 후에는 차츰 사각형 지붕으로 변하였다. 장명등 아래에는 양 쪽에 문인석(文人石) 하나씩과 석마(石馬) 한 필(匹)씩을 각각 세웠고, 그 아래에는 무인석(武人石) 1쌍과 석마(石馬) 한 필씩을 세웠다.
청완예초의 靑완刈草儀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유일한 건원릉 봉분의어새풀은 1408년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승하하면서 고향인 함흥(咸興)에 묻히기를 원하였으나, 유언(유언)을 따르지 못한 아들 태종(太宗)이 함흥(咸興) 땅의 억새풀로 봉분한 것이 유례가 되어 지금까지 600여년을 이어오고 있는 전통이다. 다른 왕릉의 봉분은 잔디가 자라면 수시로 깎지만, 건원릉의 봉분은 억새풀이어서 년(年) 1회에 한하여 한식일(寒食日)을 전후하여 깎고 제향을 올린다. 청완(靑완)은 억새를 의미하는 단어로 ' 청완예초 '란 억새를 예초하는 의식을 의미한다.
조선왕조실록 인조(仁祖) 7년 3월 19일자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동경연 홍서봉과 인조(仁祖)가 강론을 하다가 주고받은 대화에서 홍서봉이 ' 건원릉(健元陵) 사초(莎草)를 다시 고친 경우가 없었는데, 지금 본능에서 아뢰어 온 것을 보면 능 앞에 잡목들이 뿌리를 박아 점점 능(陵) 가까이까지 뻗어난다고 합니다. 원래 태조(太祖)의 유교(遺敎)에 따라 북도(北道)의 청완(靑완)을 사초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습니다 '고 말하자, 인조(仁祖)는 ' 한식(寒食)에 쑥뿌리 등을 제거할 때 나무 뿌리까지 뽑아버리지 않고 나무가 큰 뒤에야 능 전체를 고치려 하다니 그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지금이라도 흙을 파서 뿌리를 잘라버리고 그 흙으로 다시 메우면 그 뿌리는 자연히 죽을 것이다. 예로부터 그 능(陵) 사초(沙草)를 손대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든 것이니 손을 대서는 안된다 '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高麗)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체성이 나라 조선(朝鮮)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의 재위 기간은 1392년부터 1398년까지 불과 6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자리인 왕위(王位)에 스스로 오르는 영웅(英雄)다운 삶을 살아낸 그였지만, 말년(末年)에 자식들이 벌이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의 권력 다툼 앞에서 그는 권력의 무상(無常)함을 느끼고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성계의 末年
비극(悲劇)의 시작은 세자(世子) 책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데는 정도전(鄭道傳)을 대표로 하는 급진적(急進的) 신진(新進) 사대부(士大夫)의 힘도 컸지만, 안으로는 이성계의 집안에서도 새나라를 개창(開創)하는데 큰 공(功)을 세운 사람이 두 사람 있었다. 그것은 이성계의 첫 부인 '한씨'의 소생인 다섯 째 아들 이방원(李芳遠 .. 훗날 태종)과 그의 두 번째 부인 '강씨 .. 신덕왕후(神德王后)'이었다.
개국공신(開國功臣)에게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듯이 집안의 큰 조력가들에게도 논공행상이 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다음 왕위를 예약하는 세자(世子)의 자리이었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공(功)을 세운 이방원(李芳遠)은 그 세자(世子) 자리가 당연히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참모 역할을 했던 정도전(鄭道傳)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도록 불철주야 내조(內祖)한 두 번째 부인 '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생각은 달랐다.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조화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성리학(性理學)의 골수 깊은 신봉자인 정도전(鄭道傳)에게 너무 강한 성격의 이방원(李芳遠)이 다음 왕위를 잇는 것은 부담이 매우 컸다.
한편 신덕왕후(神德王后)는 내조(內助)의 공을 전실(前室) 자식이 이방원이 가져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성계와의 사이에 두 아들은 두고 있던 신덕왕후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가 다음 왕이 되기를 강력히 희망하였다. 이미 첫 부인 '한씨'가 사망한 뒤라 이성계의 곁에서 이방원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방원으로서는 너무나 억울하게 신덕왕후 소생의 막내 아들 방석(芳碩)이 세자(世子) 자리를 차지하였다.
고려(高麗)라는 나라도 무너뜨린 이방원이었다. 눈 앞에서 왕위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인물이 아니었던 이방원은 즉시 정도전(鄭道傳)과 맞서 ' 왕자의 난 (王子의 亂) '을 일으켰다. 자신의 사병(私兵)을 일으켜 정도전을 급습하여 죽이고 이복동생 방석(芳碩)과 방번(芳蕃)을 모두 살해하였다. 아버지 이성계가 번연히 살아 있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성계는 이 변란(變亂)에서 두 아들과 사위까지 잃었고, 권력 앞에 인면수심(人面獸心)으로 행동하는 자식들의 다툼에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꼈다.
이성계는 마침내 1398년 9월에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芳果 .. 후일의 정종)에게 물려주었다. 정종(定宗)의 즉위는 난(亂)을 일으킨 후 바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아버지를 협박해 왕위를 찬탈한것처럼 보일까 염려한 이방원이 마련한, 왕으로 가기 전 일종의 유예 기간인 셈이었다. 이후 2년 뒤 이방원은 제2차 ' 왕자의 난 '을 일으킨 넷째 형 방간(芳幹)마저 물리치고, 정종(定宗)으로부터 왕위를 넘겨 받아 조선의 3번 째 왕으로 등극하였다.
함흥차사 咸興差使
조선 태종 이방원(李芳遠)이 태조(太祖)의 환궁(還宮)을 권유하려고 함흥(咸興)으로 보낸 차사(差使)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차사(差使)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세간에 퍼지면서,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이는 태종 이방원이 저지른 ' 왕자의 난 '과 그것을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바라보던 백성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 사실과 다르다. 야담 수필집 ' 노봉집시장 (老峰集諡壯) ' 그리고 선조(宣祖) 때 차천로(車天路)가 지은 ' 오산설림(五山說林) ' 등의 책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함흥본궁 咸興本宮
함흥본궁(咸興本宮)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잠저(潛邸)를 의미하나. 잠저(潛邸)란 국왕이 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사저(私邸)를 말한다. 때로는 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신분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는 주역(周易)의 ' 잠룡(潛龍 ... 덕을 닦으며 숨어 사는 성인 혹은 영웅)은 쓰지 말라 '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의 태조, 중종, 인조, 선조, 철종, 고종 등은 왕족이나 왕자가 아니었던 자로서 혁명, 반정(反正), 추대 등의 방법으로 왕이 되었거나, 세조, 효종, 영조 등 당초 세자(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왕자로서 궁궐에서 나가 살다가 뒤에 왕이 되어 입궐한 자들의 즉위 전(前) 사저(私邸)를 지칭하였다.
이성계는 즉위 후 이곳에 선조 4대, 즉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曺)와 왕후의 위패를 안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왕위에서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한동안 기거하였는데, ' 함흥차사 (咸興差使) '라는 말이 비롯된 곳이기도 하다. 함흥(咸興) 지역은 이웃한 영흥(永興)과 함께 조선창업의 선조들이 살았던 소위 ' 풍패지향 (豊沛之鄕) '으로서 본궁(本宮)뿐만 아니라 경흥전(慶興殿 .. 이성계의 옛집에 지은 전각), 복도팔릉 (北道八陵 .. 4대조와 왕후의 능), 격구정(擊毬亭 .. 태조가 격구하던 곳), 독서당(讀書堂 .. 태조가 독서하던 곳), 치마대(馳馬臺 .. 태조가 무예를 연마하던 곳) 등 이성계와 그 선조들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풍패지향(豊沛之鄕)은 중국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의 고향인 패군(沛郡) 풍현(豊縣)에서 비롯되어 왕의 고향을 의미하는 말이다.
또 함흥과 영흥 지역과 이곳에 있는 유적들은 그림 및 지도(地圖)로 자주 그려졌다. 조중묵(趙重默)이 그린 이 함흥본궁도 (咸興本宮圖) '는 정전(正殿), 이안전(移安殿), 풍패루(豊沛樓), 풍파루 앞의 연못 등 함흥본궁의 여러 전각과 정원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고 옆에 명칭을 써넣어 이해를 돕고 있다. 정전 옆에는 오조성전(五祖聖殿)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태조와 선조 4대를 모신 전각이라는 의미이다.
화폭의 맨 윗부분에는 빈 자리에 빼곡히 글이 쓰여 있는데, 1889년에 지역 관찰사로 부임한 조병식(趙秉式)의 글씨이다. 대강의 내용은 ' 본궁 정전 뒤에 있는 소나무는 태조(太祖)께서 직접 심은 것인데, 말라 죽은 지 100여 념난인 1874년에 홀연히 한 가지가 돋아 푸르고 울창하게 자라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세자송(世子松)이라고 했다 ...는 내용과 ' 이후 세자 저하의 탄생이 있었는데 이는 태조대왕의 도우심이며 이를 특별히 일컬어 남기기 위해 그림을 바친다 '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함흥차사의 실제
함흥차사의 실제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398년 ... 태조 이성계가 정종(定宗)에게 왕위를 양위한 뒤 함흥(咸興)으로 갔다. 1400년 ...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다. 그리고 태종이 아버지 이성계를 모셔오라고 성석린(成石璘)을 차사(差使)로 보낸다. 1401년 4월 ... 태조 이성계가 성석린(成石璘)의 청을 받아들여 한양으로 환궁(還宮)한다. 1401년 11월 ... 태조 이성계가 다시 한양을 떠난다. 태종이 왕사(王師)무학대사(無學大師)를 차사(差使)로 함흥에 보내고, 태조는 환궁을 약속한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환궁하지 않고, 소요산(逍遙山)에 머문다. 1402년 1월 ... 성석린(成石璘)을 다시 보내 환궁을 청하지만, 성석린은 혼자 돌아온다. 1402년 ... 조사의난(趙思義 난)이 발생한다. 1402년 12월 ... 태조 이성계가 드디어 환궁(還宮)한다.
차사(差使)와 이성계의 반응
성석린과 무학대사가 태조의 환궁에 큰 역할을 하였고, 태종 2년 11월 3일, 환관(宦官) 김완(金完)을 보내 문안케 하였다. 같은 달 7일에 예문관 대제학 이직(李稷)을 보내 문안케 하고, 청원군 심종(沈淙)과 예문관 제학 유창(劉暢)을 보내 시위(侍衛)케 하였다. 이들 가운데 태조 이성계에게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뒤에 이성계는 시위(侍衛) 이자분(李自芬)을 태종에게 보내 제사에 사용할 물건을 빨리 보내라고 말했다고 한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에게 제사에 쓸 신성한물거늘 요구할까 ?
또한 태종 2년 12월에 평양(平壤)에서 머무를 때 시자(侍者)에게 ' 내가 동북면에 있을 때 국왕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고, 맹주(孟州 .. 평안남도 맹산군)에 있을 때도 사람을 보내지 앟았으니 감정이 없지 않으리라 '고 말하자, 시자(侍者)가 ' 주사에서 안평 부원군 이서와 승려 익륜과 설오를 보냈으나 중간에 길이 박혀서 돌아갔씁니다 '라고 변명한다. 차사(差使)를 죽이기는 커녕 보내지 않아 섭섭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태종실록(太宗實錄)에서는 이성계가 성석린(成石璘)의 요청을 받아들여 태종 1년인 1401년 4월에 환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해 11월에 다시 한양을 떠나자, 다음해 1월 다시 성석린을 보내 환궁을 요청한다. 이때 이성계는 부처를 모시기 위해 돌아갈 수 없다고 거절하자 종친(宗親)과 함께 환궁을 요청하던 성석린은 ' 염불(念佛)하고 불경(佛經) 읽는 일이 어찌 꼭 소요산(逍遙山)이라야만 하겠씁니까 ? '라고 따지자, 이에 이성계는 ' 그대들의 뜻은 이미 알고 있으나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두 아들과 한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 '라고 본심을 밝힌다.
두 아들이란 이방원에게 죽은 방번(芳蕃)과 방석(芳碩)을 말하고 한 사람의 사위란 역시 이방원에게 죽은 경순공주(慶順公主)의 부마 이제(李濟)를 말하는 것이다. 성석린은 그대로 빈손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 태상왕(太上王)께서 빨리 돌아오실지, 늦게 돌아오실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라고 보고한다. 이후에도 성석린은 두 차례나 차사(差使)로 이성계에게 갔으나 살아 돌아온다.
무학대사와 함흥차사
태종 2년 11월, 이성계가 다시 함흥으로 돌아가자 태종(太宗)이 차사(差使)로 보낸 인물은 왕사(王師) 무학대사(無學大師)이다. 이에 대해서는 ' 태종실록 "과 ' 오산설림 '의 기록이 일치하며, '오산설림(五山說林) '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무학(無學)이 함흥에 가서 태조를 알현하니 태조(太祖)가 ' 그대도 나를 달래러 왔구나 '라고 말했다.
무학(無學)이 웃으면서 ' 전하께서 빈도(貧道)와 안 지 수십 년인데 제 마음을 모르십니까 ? 저는 특별히 전하를 위로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무학(無學)이 그 뒤로 함흥본궁(咸興本宮)에 머물면서 태조(太祖)와 환담을 하는데, 태종(太宗)의 단점(短點)만 말하였고, 이에 이성계가 그를 믿게 되었다. 수십 일이 지난 뒤에 무학(無學)이 밤중에 태조에게 환궁을 청하자 환궁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성계가 소요산(逍遙山)에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자, 태종이 성석린(成石璘)을 그곳에 보내었다.
조사의의 난과 함흥차사
이성계는 이후에도 한참이 지난 뒤 함경도에서 ' 조사의의 난 (趙思義의 亂) ' 이 평정된 이후 한양으로 돌아온다. 당시 ' 조사의 난 '이 발생하여 조정으로부터 박순(朴淳), 송류(宋琉) 등이 차사(差使)로 파견되어 반군(叛軍)을 회유하였으나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다. 초기에는 반군(叛軍)이 우세하여 관군(官軍)의 선봉 이천우(李天佑)를 격파하였으나, 그후 조정에서는 대규모의 징벌군을 파견하여 반군을 진압하고, 이성계(李成桂)를 시위(侍衛)하고 돌아왔다.
조사의(趙思義)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의 친척으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의 아들인 방석(芳碩)이 제거되자 이들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난(亂)을 일으켰다. 이 지역은 이성계의 수하가 많은 지역이라 이성계의 양위(讓位)에 대한 지역민과 여진족(女眞族)의 불만이 겨랍하여 일어난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란 초기부터 이성계의 행적도 심상치 않았고, 그의 관련설때문에 진압과 사후처리에 논란이 많았다.
야사(野史) ... 함흥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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