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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晉 王 朝 世 家
西晉(서진) AD. 265∼AD. 316 위치 중국. 베트남 북부 성 司馬(사마)
代數 | 在位期間 | 位 | 諱 | 관계 | 首都 | 現地名 |
宣皇帝(선황제) | 司馬懿(사마의) | 洛陽(낙양) | 河南省(하남성) | |||
景帝(경제) | 司馬師(사마사) | 선황제의 장남 | ||||
文帝(문제) | 司馬昭(사마소) | 선황제의 차남 | ||||
제 1대 | AD. 265∼AD. 290 | 武皇帝(무황제) | 司馬炎(사마염) | 사마소의 장남 | ||
제 2대 | AD. 290∼AD. 301 | 孝惠皇帝(효혜황제) | 司馬衷(사마충) | 사마염의 차남 | ||
임시 | AD. 301∼AD. 301 | 趙王(조왕) | 司馬倫(사마륜) | 선황제의 9남 | ||
복위 | AD. 301∼AD. 307 | 孝惠皇帝(효혜황제) | 司馬衷(사마충) | 사마염의 차남 | ||
제 3대 | AD. 307∼AD. 311 | 孝懷皇帝(효혜황제) | 司馬熾(사마치) | 사마염의 25자 | ||
제 4대 | AD. 313∼AD. 316 | 孝愍皇帝(효민황제) | 司馬鄴(사마업) | 사마염의 손자 |
사마의(AD. 179∼AD. 251)
字(자)는 仲達(중달)이며, 河內郡 溫縣 孝敬里(하내군 온현 효경리, 금 하남성 온현 초현진) 출신으로, 京 兆尹(경조윤)을 지낸 司馬防(사마방)의 둘째아들이다. 삼국시대 魏(위)나라의 曹操(조조, AD. 155∼AD. 220),曹丕(조비, 文帝 문제), 曹叡(조예, 明帝 명제), 曹芳(조방 哀帝 애제)등 4대를 보필하며 공을 세워 舞陽侯(무양후)로 봉해졌다. 손자인 司馬炎(사마염)이 西晉(서진)을 세운 뒤 宣帝(선제)로 追尊(추존)되었 고, 묘호를 高祖(고조)로 하였다. 형인 司馬郞(사마랑)을 포함해 가문의 8형제가 모두 총명해 司馬八達(사 마팔달)이라고 불렀으며, 그 가운데서도 사마의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조가 이를 듣고 등 용하려 했지만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하지만 건안 13년(AD. 208년), 승상이 된 조조는 사마의를 압박해 문학연으로 삼았고, 그 뒤 황문시랑 등의 벼슬을 했다. 조조가 위왕이 된 뒤에는 태자중서저가 되어 조비 를 보좌했다. 당시 사마의의 건의로 屯田制(둔전제)가 실시되었는데 이는 위의 국방을 강화하고, 농업생 산력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AD. 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중용되었으며, AD. 224년, 상서로 임명되었다. AD. 226년, 조비가 죽자 曹眞(조진), 陳群(진군), 曹休(조휴) 등과 함께 보정대신으로 명제 조예를 보좌하였다. 명제 태화 원년(AD. 227년), 본래 촉나라의 장수로 新城(신성, 금 후베이성 팡현)의 태수자리에 있다가 항복한 팽달이 모반을 일으키자 사마의가 신속하게 성을 함락하고 맹달의 목을 벴다. 명제 경초 2년(AD. 238년),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요동의 공손연 을 대파하고 그의 목을 베고 요동의 4개 군을 다시 통일했다. 그러나 얼마 후 사마의와 조상의 권력 다 툼이 시작되어 권력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가평 원년(AD. 249년), 그는 제왕 조방과 대장군 조상이 낙양 성을 나서 명제 조예의 무덤인 고평능에 간 틈을 타서 고평원의 정변을 일으켜 조상 형제와 그 무리들을 처형하고 조정의 대권을 쥐었다. 그 후 가평 3년(AD. 251년), 향연 73세로 서거하였다.
사마사(AD. 208∼AD. 255)
자는 子元(자원)이며, 사마의와 장춘화의 장자로 사마소의 친형이다. 약관의 나이 때부터 같은 세대 인물 이자 처남인 夏侯玄(하후현)과 더불어 이름을 날렸다. 경초 연간(AD. 237∼AD. 239)에 산기상시가 되어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거듭 승진하여 중호군까지 이르렀다. 사마사의 아내 하후휘는 남편이 위의 충 신으로 남지 않을 것을 눈치챘는데,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이 있었던 AD. 234년에 그녀를 독살한다. AD. 249년, 아버지 사마의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대장군 조상을 제거하려 하자 함께 출병하여, 조상과 그 일족을 제거하였다. 이른바 고평능 사변이다. AD. 251년, 사마의가 서거하자 무군대장군 벼슬을 받았다.
이듬해 가평 4년(AD. 252년)에는 대장군이 되었다. AD. 254년, 황제 조방이 李豊(이풍), 장집 등과 사 마사를 죽이고 하후현을 대장군에 앉히려는 친위 쿠데타를 세우다 발각되었다. 이풍과 하후현 및 장집 등을 체포해 삼족을 멸하였다. 그해 3월에 황제로 하여금 황후 장씨를 폐하도록 하였으며, 조방을 폐위하 고 같은 달 22일 조모를 황제로 세운다. AD. 255년에 揚州都督 毌丘儉(양주도독 관구검)이 합비에서 文 欽(문흠) 등과 더불어 사마사의 황제 폐위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군사를 일으켰으나, 사마사가 공격하여 그들을 패퇴시켰다. AD. 256년, 양주의 도독인 諸葛誕(제갈탄, 제갈량의 사촌 동생)이 기병하여 사마소를 토벌하려 했으나 사마소가 공격하여 죽였다. 사마소는 상국이 되었고 晉公(진공)에 봉해지고 九錫을(구석)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마소(AD. 211∼AD. 265)
자는 子上(자상)이며, 사마의와 장춘화의 차남으로 사마사의 친동생이며, 서진을 건국한 사마염의 부친이 다. 왕능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는 군을 이끌고, 이를 격파하였다. 강유가 늘 군을 이끌고 농우를 공 격했는데, 사마소가 군을 이끌고 여러 차례 막았다. 또한 강유가 강족과 연합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자 사 마소가 군을 이끌고 강족을 격파하니 강족의 여러 병사들은 사마소에게 투항하였다. 이공으로 인하여 AD. 238년, 위의 대신으로 신성향후라는 지위를 받았다. AD. 249년에는 사마의, 사마사와 함께 고 평능 사변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 AD. 257년, 제갈탄이 양주자사 악침을 죽이고 회남에서 반란을 일으켰 다. 사마소는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오나라를 먼저 격파하고, 제갈탄까지 격파하였다. 제갈탄은 수춘으로 도주하였고, 사마소는 수춘을 포위하였다. 문흠이 여러차례 공격하지만 사마소는 이를 격파하였 다. 제갈탄과 문흠이랑 사이가 않았으므로 문흠이 늘 사마소에게 패하자 제갈탄이 문흠을 죽였다. 이에 그의 아들 문앙, 문호가 사마소에게 투항하고 사마소는 문앙에게 시켜 적들에게 항복을 권하게 하였다. 수춘에서 항복하는 병사들이 많아지자 사마소가 총공격을 하여 제갈탄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제갈탄의 삼 족을 멸하였다. 이공으로 사마소를 상국으로 봉했다. 위나라의 천자 조모가 신변의 불안을 느켜 사병을 모아 사마소를 공격했지만 패하였다. 그 후 조환을 위나라의 황제로 옹립하였다. 사마염을 후계자로 세울 때 사마소는 중풍을 맞고 쓰러져 얼마 못가 사망하였다.
제 1대 무황제(AD. 236∼AD. 290)
자는 安世(안세)이며, 司馬懿(사마의)의 손자이며. 司馬昭(사마소)의 장남으로서 모친은 문명황후 왕원희 다, 위나라 가평 연간에 북평정후에 봉해졌다가 봉군도위를 지내고 여러 차례 승진해 장군이 되었다가 산기상시 까지 겸임했다. 조환이 즉위하기 전에 영접해 중무군으로 승진하면서 신창향후로 승진했다.
아버지 사마소가 진왕이 되자 세자가 되어 무위대장군에 임명되었다가 사마소가 사망한 뒤 사마염은 황 제 조환을 폐위한 뒤 자신이 제위에 오른 뒤 국호를 晉(진)으로 바꾼다. 오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삼국시대 를 마감했다. 진서 동이전 부여조에 이런 글이 있다.
夫餘國 在玄菟北千餘里. 南接鮮卑.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戶八萬. 有城邑宮室. 地宜五穀
부여국. 재현토 북천여리. 남접선비. 북유약수. 지방이천리. 호팔만. 유성읍궁실. 지의오곡
부여국은 현토 북쪽 1천 여리에 있고 남쪽으로는 선비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약수가 있으며. 땅의 둘레가 2천리 인데 호는 8만이고. 성읍과 궁실이 있으며. 땅은 오곡이 있다.
무황제 때에 자주 와서 조공하였는데 태강 6년(A. 285년), 慕容廆(모용외)에게 습파되었는데 그 왕 依慮 (의려)가 자살하였고 의려의 자제들은 沃沮(옥저)로 달아나 지켰다. 황제가 조를 내려 나라를 존립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유사가 아뢰기를 護東夷校尉 鮮于嬰(호동이교위 선우영)이 부여를 구하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고 하자 선우영을 파면하고 何龕(하감)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듬해 AD. 286년, 부여의 후왕 依 羅(의라)가 돌아와 나라를 회복함에 하감이 도와주었으며. 모용외가 그 종인들을 노략질하고는 중국에 팔 았다. 황제가 관청의 재물로써 팔려온 부여사람들을 속환하게 하였고, 司州(사주). 冀州(기주)의 두 주에 명을 내려 부여의 인구의 거래를 금하였다. AD. 290년 사망하였다.
제 2대 효혜황제(AD. 259∼307)
사마염의 장남 사마궤가 요절했기에 AD. 265년에 황태자가 되었다. 武元皇后 楊艶(무원황후 양염)의 소 생으로 AD. 290년에 사마염이 죽자 황제로 즉위한다. 가충의 딸인 혜문황후 가씨, 죽 가남풍을 황후로 맞이했다. 외척의 득세와 팔왕의 난까지 겹치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정작 황후 가씨의 전횡으 로 그의 외아들이었던 첩 사씨의 소생인 태자 사마휼이 죽었고 AD. 301년, 사마의의 9남이자 사마염의 숙부인 조왕 사마륜이 찬탈했을 때는 사마휼의 아들이자 손자였던 사마장이 살해당했으며 그 동생 사마 상은 요절해서 사마충의 대는 확실히 끓겼다. 사마륜이 방계 혈족이라 정통성이 있었던 사마장을 죽인 것인데 만천하에 찬탈자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았으므로 성도왕 사마영. 장사왕 사마예 등 다른 사마씨들 의 손에 살해당했다. 폐위되었다가 복권한 효혜황제는 동해왕 사마월이 올린 음식을 먹고 죽었다.
조왕 사마륜(AD. ?∼301)
사마의의 9남으로써(막내) 첩인 백부인의 소생이다. AD. 265년에 사마염이 즉위하여 서진을 개창하자 삼 촌으로 량야왕이 되었다가 AD. 277년에 조왕이 되어 업군을 지키는 일을 감독했다. 296년에 저족과 강 족이 일어나자 사마륜의 총신인 손수와 옹주 자사 혜계가 군사적인 문제로 다투자 구양견이 사마륜의 죄 악을 표문에 올리자 사마륜을 소환 거기장군이 되었다. AD. 300년에 우장군을 지내면서 병권을 잡고 가 남풍의 무고로 태자 사마휼이 폐위될 때 우위독 사마. 상장독 허초. 전중중랑 사의 등이 사마휼을 회복시 키기 위해 사마륜의 힘을 빌리려 했는데 손수의 의견을 따라 가남풍이 사마휼을 죽이기를 기다렸다가 사 마휼이 살해되자 군사를 동원해 가남풍을 몰아냈어 금용성에 유폐하고 장군과 상국. 시중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다. 4월 조서를 고쳐 賈南風(가남풍)을 죽게했으며 이때 齊王 司馬冏(제왕 사마경) 등의 황족과 손 을 잡았다.
회남왕 사마윤이 몰래 자신을 토벌할려는 것을 알고 명예직인 태위로 임명해 병권을 빼앗으려 하고 그를 역모로 몰아 죽이려다가 결국 사마윤의 공격을 받아 죽을뻔 했지만 되려 사마윤이 살해당했다.
AD. 301년, 황제로 즉위해 연호를 건시라고 했으며, 혜제를 폐의해 금융성에 살게 했다가 사마충을 태상 황으로 높이면서 영양궁을로 고쳤다. 아들 사마과를 태자로 삼았다. 제왕 사마경이 여러 왕들에게 격문을 돌려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등과 연합해 공격하자 패했으며 결국 혜제 사마충이 2개월만에 황제로 복귀한다. 금융성에 유폐되었다가 양왕 사마융의 건의로 사마륜 부자는 함께 주살되었 다.
제 3대 효회황제(AD. 284∼313)
무제 사마염의 25남으로 자는 풍도이며 사마염의 후궁 왕원희의 아들로 사마충의 이복동생이다. 예장왕 이었으며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옹립되어 태제가 되고. AD. 307년, 사마충의 사후에 즉위한다. 이미 흉 노족 등의 이민족들의 성장으로 나라는 위급했고 화북 지방에서는 흉노족 유연의 뒤를 이은 前趙(전조)의 3대 황제 유총이 점점 침공해왔다. 그리고 옛 촉 땅에서는 저족 이웅이 成漢(성한)을 세워 이미 나라는 분열 되고 있었다. 당시 대권은 사마월이 쥐고 있어서 사마치는 실권이 없었다. 사마월은 유총이 남하해 오자 허창에 주둔해 항전을 했지만 병력도 모자라고 병력도 보충 안되자 계속 패배하여 위기를 느겼다.
사마치가 그를 주살코저 밀서를 내렸지만 구희가 체포되어 사마월이 이를 알게 되자 울분에 차 끝내 분 사해 버렸다. 311년 유총이 보낸 그의 친족이자 총사령관 유효. 석륵. 한족. 호연안 등의 군대가 낙양 주 변을 모두 함락시켰다. 이렇게 낙양이 고립되자 사마치는 장안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도적들을 만나 그것 도 무산되었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12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패배해서 3만 명이나 죽었음에도 분전했 지만 병력 부족으로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311년, 낙양은 공방전이 벌어진지 1달 만에 점령되었다.
사마치는 변장을 하지않고 도망치는 바람에 적군에게 사로 잡혀 단무에 유폐되었다. 유요의 군대는 무기 고에 이르러 태자 사마전을 죽이고 무기고도 점령했다. 낙양 함락으로 3만여 명이 살해당했고 사마치 등 은 유총의 나라 한의 수도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사마치는 독살당했다.
제 4대 효민황제(AD. 300∼AD. 318)
진 무제 사마염의 15남인 오왕 사마안의 아들로 숙부 사마간의 양자가 되어서 사마간이 요절한 후 뒤를 이어서 진왕이 되었다. 영가 5년(AD. 311년), 영가의 난으로 인해 낙양이 떨어지자 숙부 사마치가 사로 잡혔고. 아버지 사마안도 죽었다. 당시 11살이었던 사마업은 영가 6년(AD. 312년)에 밀현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만난 친척이자 서진 관리들인 순번. 순조에 의해 군주로 추대되었다. 영가 7년(AD. 313년), 전조 의 유총에 의해서 희제 사마치가 처형되었고 이후에 숙부 사마치의 상을 치르고 결국 황위에 올랐다.
건흥 4년(AD. 316년) 가을 전조의 장군이자 유총의 친척이었던 유요가 민제의 영토에 대규모 침공을 해 왔고 북지의 비밀기지가 함락되면서 관중에 있었던 다른 곳들도 붕괴된다. 결국 사마업은 항복을 하여 前趙(전조)의 수도 平陽(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유총은 포로로 데려온 사마업을 희평후에 봉했다. 온갖 수 모를 주었다가 죽였다. 나중에 유총의 아들 유찬을 죽인 근준의 난을 틈타 동진의 사마예가 태상 한윤을 보내 사마치와 사마업의 영구를 가져와 안장했다.
“八王의 亂
팔왕의 난은 AD. 291년∼AD. 306년까지 이어진 중국 서진의 내란으로 서진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 었다. 서진 황실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발생하였으며 명칭 또한 내란을 주도한 주요 황족 제후왕이 8명인 데서 유래하였다. 팔왕의 난으로 인해 계속된 오랜 혼란의 결과 서진의 통치기반은 급격히 약화되 어 흉노족 침입(영가의 난)으로 서진이 멸망 하였다. 이후 살아남은 황족 사마예가 강남으로 피신하여 나 라를 다시 일으켰지만 옛 서진이 차지한 화북영토는 되찾지 못하였다. 화북지방에는 흉노족 등이 세운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고 수나라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약 250년간 이상 전란의 시대를 겪게된 다. 관련된 8명의 왕은 아래와 같다.(관계는 서진 무제 사마염 기준으로 서술되었다)
汝南王 司馬亮(여남왕 사마량) 무제 사마염의 숙부. 사마의의 5남
楚王 司馬瑋(초왕 사마위) 무제 사마염의 5남
趙王 司馬倫(조왕 사마륜) 무제 사마염의 숙부
齊王 司馬冏(제왕 사마경) 무제 사마염의 조카. 무제의 동생인 제헌왕 司馬攸(사마유)의 아들
長沙王 司馬艾(제왕 사마애) 무제 사마염의 16남
成都王 司馬潁(성도왕 사마영) 무제 사마염의 6남
河簡王 司馬顒(하간왕 사마옹) 무제 사마염의 6촌. 사마의의 동생인 안평현왕 司馬孚(사마부)의 손자
東海王 司馬越(동해왕 사마월) 무제 사마염의 6촌.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규의 손자 고발문헌왕 사마태의 손자
제 1대 황제 무제는 건국 후 황족의 권위와 국가의 힘을 과시하고 지방통치 강화를 위해 아들. 조카. 등 황 족을 왕으로 임명하여 군대와 조세권 등을 주고 해당 지방을 통치도록 했다.(왕 지위의 세습도 허용) 그 러나 무황제 사후 중앙정부 권한이 약화되면서 지방 번왕들은 그들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에 간 섭하는 도전세력이 되어 정치 훈란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제 2대 황제 혜제는 暗愚(암우)한 제황으로 무제 사후 즉위하자마자 계모인 황태후 양씨(무제의 황후)가 정치 에 관여하게 되면서 그녀의 친정인 楊駿(양준)일가에게 대부분의 권력이 주어졌다. 이에 정치적 야심이 있는 황후 가씨(혜제의 황후)는 실권을 잡기위해 음모를 꾸민다. 사실 무제는 황태자 사마충(후에 혜제)의 무능함에 실망해 황태자를 제왕 사마경으로 바꿀 것을 고려했었는데 이를 미리 알아챈 신하 가충(혜제의 장인)이 무제에게 황태자에 대한 능력을 테스트해 보도록 권유하고 미리 답을 황태자에게 알려줘 무제의 의심에서 벗어나 황태자 지위를 유지했음으로 가씨 집안이 혜제에게 기여한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으나 권력에서 배제됨에 따라 양씨일족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여남왕 사마량
황후 가씨는 여남왕 사마량과 초왕 사마위를 회유하여 도움을 청하니, 초왕 사마위는 군사를 이끌고 수 도 낙양에 쳐들어왔고 황제의 칙서를 위조하여 양준을 반역제로 몰아 양준과 그 일쪽(약 3.000명)을 죽였 다.(태후 양씨는 황궁에 유폐되어 굶어죽음) 사후 권력은 연장자인 여남왕 사마량에게 맏겨졌으며 황후 가씨는 그녀의 정치적 영양력이 미미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에 가씨는 당시 친위대장인 초 왕 사마위와 결탁하여 황제의 칙령을 위조해 사마량을 반역자로 몰아 공격했고(사실 양준 제거의 공이 큰 사마위는 중앙정부 진출을 희망했으나 사마량이 그를 지방으로 철군토록 압력하고 있어서 서로간에 이해가 일치함)군사 기반이 취약해 궁지에 몰린 사마량은 자살한다.
초왕 사마위
사마량 제거 후 권력장악 기회를 사마위가 주저하던 이틀 동안 황후 가씨는 권력장악에 방해가 되는 사마 위를 제거하기 위해 사마위가 단독으로 황제의 칙령을 위조해 사마량을 살해했다고 소문을 퍼뜨려서 정치 적 입지를 무너뜨리고 결국 체포해 처형하도록 했다. 이후 정적이 없어진 가씨는 가충 등 그녀의 일족과 함께 권력을 독점하였다.
조왕 사마륜
혜제와 황후 가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고 다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황태자 사마휼이 있었다. 가씨는 사마휼의 재능에 위기감을 느끼고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가씨의 야심을 느낀 사마휼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했다. 노점을 궁궐에 열 정도로 노력했으나 가씨에 의해 모반 누명을 쓰고 황태자 자 리에서 폐위되고 AD. 300년 결국 가씨에 의해 살해되었다.
제왕 사마경
혜제 복위 후 정치실권을 장악한 사마경은 함께 궐기한 동지들을 배제하고 권력을 독점하였고 실제로 황태 자도 독단으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사마예. 소영. 사마옹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사마경을 살해했다.
장사왕 사마애
사마경 사후 국정 운영권을 놓고 사마애 등 3인간 다툼이 벌어져 무력충돌이 발생하면서 사마애는 사마영 과 사마웅에게 공격당해 죽고 말았다.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
이제 사마영이 황태자이자 승상으로써 정치를 맡게 되었으나 낙양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사마영 은 사마옹의 부하 張方(장방)에게 낙양을 통치하게 하였다.
동해왕 사마월
서서히 사마영이 독자적으로 권력을 전횡할려고 하자 이에 대해 동해왕 사마월과 혜제의 막내동생 예장왕 사마치가 반기를 들었다. 한때 사마영에게 패했던 그였으나 흉노와 선비 등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이번엔 사마영을 황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이후 낙양을 수호하던 장방과 사마옹을 공격하여 강화를 원했던 사마옹을 체포하였다. 기어코 사마영과 사마옹을 살해한 사마월은 AD. 306년에 죽은 혜제의 뒤를 이어 사마치를 회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그를 보좌하였다. 가씨에 의해 양씨추방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팔 왕의 난은 이로써 종결되었다.
팔왕의 난 이후
팔왕의 난때 각 왕들은 군사력의 강화를 위해 주변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전장에 투입했다. 이민 족들은 서진의 무력함과 약세를 느끼고 제각기 독립에 대한 야심을 갖게 되었으며 또한 많은 전투로 인해 수많은 인재와 무장들이 죽어 국가체계가 크게 약화되고 큰 혼란을 빚게 되었다. AD. 304년, 흉노족 족장 유총이 서진의 수도 낙양을 점거하여(영가의 난), 회제를 죽임으로써 서진은 멸망하고 유총이 전조를 세운 것을 시발로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화북지방은 오호십육국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거대한 전장터로 발전하게 되어 오호십육국 시대의 개막이 되었다.
建康(건강)--AD. 333년, 楚(초)나라 威王(위왕)이 趙(조)나라를 멸망시킨 뒤 그곳 石頭山(석두산)에 성을 쌓 고 金陵(금릉)이라고 불렀다. 진시황 때는 末陵(말릉)이라고 고쳐 불렀다. 그 후 강동에 할거했던 손권은 AD. 211년에 이곳을 자신의 처소로 삼고 석두성을 요새화 하면서 建業(건업)이라고 개칭하였다. 서진이 오 나라를 멸망시킨 뒤 AD. 282년에 建業(건업)을 建鄴(건업)이라고 개칭했다. 그러다가 AD. 313년에 민제의 이름 鄴(업)을 피해 建康(건강)이라고 이름을 다시 고쳤다.
사료 출처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과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 및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