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없이 눈 맞으며 겨울 설산 정취에 취하다, 오대산
1. 일자: 2020. 2. 22 (토)
2. 산: 오대산 (1563m)
3. 행로와 시간
[상원사 주차장(09:42) -> (상원사) -> 중대사(10:10) -> 적멸보궁(10:30) -> (긴 오르막) -> 비로봉(11:25~12:10) -> (주목군락) -> 상왕봉(13:06) -> 두로봉 갈림(13:24) -> 임도(13:42) -> 상원사 주차장(14:40)]
< 오대산 산행을 준비하며 >
겨울엔 처음이다. 아주 오래 전도 10년 전도 겨울은 아니었다. 문뜩 오대산을 다시 찾고픈 생각이 들었을 때 마음은 이미 상왕봉에 가 있었다.
적멸보궁 오름 길의 고요함, 가팔라 힘겨웠던 비로봉 길,
너무 평탄해서 불안했던 상왕봉 가는 길, 작은 북대사 그리고 긴 임도 길, 내려 와 다시 본 색 고운 단청과 만다라…. 옛 기억을 따라 길을
추체험해 본다. 산에서의 추억은 언제나 아련하다.
길은 외길이다. 5시간 남짓의 산행이 될 것이다. 간 밤에 내린 눈이 변수겠지만, 비로봉 오름 길의 된비알만 이겨내면 큰 무리는 없는 코스다.
< 희망사항 >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퍼진다. 그리 공을 들여 막아 보았지만 역부족이다. 도시 전체가 착 가라앉는 느낌이다. 덩달아 기분도 울적해진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지금은 어디에 있으며, 그 끝은 언제일까? 꼬리를 무는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금요일 밤 9시, 망설이다 PC 앞에 앉는다. 마음은 이미 정했다. 가자.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일이나 하자. 옛 기록을 뒤적인다.
며칠 전 웬 일인지 오대산에 끌려 덜컥 신청을 했다. 시간은 흐르고 산행 전날 밤, 메모장에 적힌‘옴뷔,
오대산 자연명상마을. 밥, 살아 있음을 오감으로
느끼는 순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걱정 많은 나와
대화를 하라. 무수한 이야기들이 오대산 밤하늘을 헤입니다.’란
글귀를 보자, 아! 그렇구나, 오대산을 택한 건 우연이 아니었구나. 지난 일요일 아침 다큐멘터리 3일 편이 오대산 월정사 템플스테이였구나. 무의식의 위력은 대단하고, 내 망각의 속도는 두렵다.
밤과 새벽에 비 예보가 있다. 산엔 눈으로 변해 있으리라. 흠뻑 눈에 젖고 싶다. 등산은 생각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철저히 생각을 지우는 행위이라 했다. 잊고 또 새로 채우려 가자.
(여기까지는 산행을 준비하며 기록한 것들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다르리라.)
< 상원사 가는 길에 >
잔뜩 흐린, 싸늘한 바람이 부는 사당에 당도한다. 한산한 버스 풍경, 15명이 함께 하는 아마도 가장 단촐한 산행이 아닌가 싶다. 마스크를
쓰고 이어폰을 꽂고 수면 모드로 돌입한다. 잠이 깨면 날은 맑아 있으리라.
평창 땅에 들어선다. 희뿌연 연무 끝에 산줄기가 선명하다. 다행이다. 들녘엔 눈 흔적이 없는데 먼 산 정수리는 흰 눈을 뒤집어 쓰고 있다. 설렌다. 하늘이 조금씩 맑아 온다.
< 상원사 ~ 비로봉 >
09:42, 예상보다 이른 행보다. 클램폰에 스패츠까지 차고 길을 나선다. 상원사의 절집은 특이하게도 1.5km산길을 따라 드문드문 산재해
있다. 산문에 들어서니 사천왕이 있어야 할 자리 천장에 동자승들이 춤추는 만다라가 고운 빛깔로 채색되어
있다. 옛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유물로 지정된 동종이 있는
상원사 본원에 들어선다. 법당 창호의 문양과 색이 참 곱다. 너른
마당이 시원하다. 법당 계단을 올라 바라보는 풍경엔 눈발이 날린다.
중대사 가는 길은 좁고 길었다. 밤이 되면 불을 밝힐 석등을 따라 계단을 오른지 20여분 중대사에
당도한다. 오대의 한 축을 이루는 곳이다. 비탈을 따라 들어선
당우의 용마루가 하늘을 찌른다. 흰 눈을 배경으로 화려한 단청의 상승감이 일품이다. 잠시 서서 쉬어간다. 모든 절은‘바람’으로 지어졌다 한다. 당연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말이다. 그 뜻을 새겨본다.
완만한 오르막이 계속된다. 배낭에 설피 문양의 나무에 한자로 된 글자를 새긴 모습이 멋져 말을 건낸다.
고수의 풍모를 느껴지는 분이다. 적멸보궁은 그리 멀지 않았다. 거북이님과 함께 뒤편 작고 오래된 비석을 보려 갔다. 내가 알기론
이곳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묻었던 곳이다. 이곳 저곳을 둘러본다. 본진은
곧바로 비로봉으로 향했나 보다. 이곳까지 와서 적멸보궁을 들리지 않고 가면 후회할 일일 것 같아 다리
품을 조금 더 팔았고, 덕분에 마음은 홀가분해진다.
흩날리는가 싶더니 눈발이 굵어진다. 바람도 세차다. 제대로 된 겨울 눈 산행을 한다는 설렘에 발걸음이
가볍다. 적멸보궁에서 비로봉은 1.5km 거리이다. 초반 400미터는 워밍업이고, 본격적인
된비알은` 1.1km 이정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계단의 턱이
없어질 정도로 눈이 많다. 이렇게 만설이 쌓인 건 근래 보기 드문 일이다.
오르다
눈길을 숲으로 돌린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겨울 나무는 비탈에 꼿꼿이 서 있다. 혹자는 비탈에 선 나무들의 간격이 그리움의 간격이라 한다. 그 그리움
중에는 머리에 눈을 인 키 큰 전나무도 있고 구상나무를 닮은 나무도 있다. 적당한 경쟁과 공존의 조화를
본다.
고도가 1500미터가 넘자 주변 풍경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비로봉에서
흠뻑 취하려 슬쩍 곁눈질만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팽팽해진 종아리가 평지를 갈망할 때쯤 산은 옅은 능선
하나를 펼쳐 보인다. 조금 더 힘겹게 치고 오르자 마침내 비로봉 정상석이 보인다. 바람이 엄청나게 분다. 대장님이 정상 인증 사진을 찍어주자 마자
비닐 안으로 직행한다. 누군가의 고마운 마음으로 아늑한 식당이 차려진다. 음식 냄새가 진동하고 바람은 깔고 앉은 비닐 끝을 날려 버릴 기세로 요동친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겨울 백두대간 종주 때의 분위기가 싫지 않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아산 분들은 먹을 거리를 많이도 준비해 온다. 빵 몇 쪼가리 준비한 손이 부끄럽다.
덕분에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남을 길을 나아갈 에너지를 얻고 상왕봉으로 향한다.
< 비로봉 ~ 상왕봉 >
잠시
눈이 멈추고 하늘이 열린다. 흰 눈을 정수리에 인 대간 능선이 유유히 흘러간다. 크고 넓다는 느낌뿐이었던 곳에 눈이 더해지니 더 없이 풍요롭고 낭만적이다. 이내
희뿌연 연무가 모든 걸 앗아가 버렸지만 순간 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했다. 정상석 뒤편 난간에 서서 다시
작가들의 초라한 모델이 되어 본다.
기억은
비로봉에서 상왕봉으로 향하는 등로는 높낮이 변화가 크지 않고, 지나는 길에 식생이 다양해 볼거리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잠잠하던
눈발이 거세지더니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그치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바람은
몸이 느끼는 날씨를 혹한으로 몰고 간다. 대장님과 소소가와님이 눈 내리는 숲 이곳 저곳을 넘나들며 연신
사진을 찍어준다. 보통 정성이 아니다. 간간이 대상이 되어
보지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길가를 살핀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예외 없이 밑 둥 주변이 원형으로 파져 있다. 바람이 눈을 날랐다면 물체 주변으로 쌓여야
정상인데 동심원을 그리며 안으로 들어간 건 납득이 가지 않는다. 혹시나 해 주변을 살피니 동일하다. 나무가 클수록 원은 더 커진다. 신기할 따름이다. 무릇 생명이 있는 곳엔 온기가 생기고, 그 온기에 눈이 서서히 녹아
든 게 아닌가 하는 근거 없는 생각을 해 본다. 하여간 재미난 발견이다.
눈 내린 세상이 평화로운 이유는 명암의 경계가 사라지기
때문이고, 하늘을 넓히기 때문이라 했다. 눈발이 거세지고
바람이 불고 해도 산꾼들은 모두 자기만의 속도로 길을 간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이내 잊어버린다. 산에서의 사고는 깊어질 수가 없다. 걷기에도 힘겨운데 생각은 무슨….
산새님이 가장 먼저 인지 알았더니, 상왕봉에 도착해 보니 앞서 간 두 분이 더 있었다. 비로봉 출발 1시간 만에 오늘의 두 번째 이정 상왕봉에 도착했다. 산이란 이름이
부끄럽게 정상은 초라했다. 단체사진 한 장을 찍고는 내려선다.
< 상왕봉 ~ 상원사 >
상원사로
올라서며 오늘 산행은 1시간 워밍업, 1시간 치열한 본 게임, 3시간 여유 있게 걷기가 되겠다 예상했다. 상왕봉도 지났으니 지금부턴
좀 편하게 걷자 했는데, 내리막 경사가 예사롭지 않다. 역시, 눈 내린 산을 오르는 것은 힘들고, 내려오는 건 어려웠다.
일행들의 간격이 벌어진다. 눈은 소리 없이 때론 거세게 내린다. 이리 큰 눈을 맞아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점점 눈이 귀해지는 세상, 복 받은
날이라 여긴다. 바람이 실어 나른 눈을 줄기에 품은 커다란 나무들이 자주 목격된다. 물푸레 나무 흰 몸통에 벗겨지듯 붙어 있는 표피에도 눈이 날린다. 최고의
설경을 경험한다.
두로봉 갈림을 지나고도 한참을 더 가파르게 내려서 임도
삼거리에 도착했다. 북대사 방향으로 넓게 열린 길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작가들과 함께 찍을 사진 몫으로 남겨 두자 한다. 옳은 판단이다.
일행들이 본진을 기다리겠다 했지만 거세게 불어오는 눈보라에
난 먼저 자리를 뜬다.
상원사까지는 5km 거리다. 아무리 임도 길이라지만 지친 다리를 생각하면 만만치 않아 보인다. 터벅터벅
눈보라에 모자를 눌러 쓰고 하염없이 걷는다. 걷다 지겨워 뒤로 걸어본다. 처음엔 불안했는데 할수록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걷는 거리가 늘어난다. 익숙해진다는
건 불안감을 떨쳐낸다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길에 끝이 보인다. 모퉁이를
돌자 차들이 보인다. 상원사 입구에 도착했다. 읍내로 들어갈
시내버스가 올라오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이들의 말을 듣고는 다시 현실에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눈발은 오락가락, 도로는 진창으로 변해 있고, 어두워지는 하늘은 을씨년스럽다.
찻집에 들어갔다. 터무니
없는 가격은 둘째치고 분위기가 차를 즐길만한 곳이 못되었다. 버스로 돌아온다. 5시간 만에 다시 내 자리에 앉아본다. 아득하고 편안하다. 오늘 산행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 에필로그 >
참 좋았다. 눈을 원 없이 맞으며 겨울 설산의 정취를 제대로 느낀 하루였다. 참석자가
적어 오붓한 분위기 속에 몇몇 분들과 이야기도 나누었다. 낯 섬은 서서히 스며드는 과정에서 해소되는
것이리라.
눈을
감고 오대산을 복기해본다. 눈이 내려 어두워지는 하늘이 은회색 커튼이 되어 주고, 주름진 검은빛 산들이 앞 뒤 피사체가 되어 능선을 따라 너울져 흐르고 있는 모습이 아른거린다. 운치 있는 수묵담채화가 그려진다. 창 밖에는 내 머리 속과는 다르게
늦겨울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오후 6시가
넘어선다. 서울로 들어선다. 땅거미가 진다. 서녘 관악산 너머로 붉게 해가 진다. 하루 종일 흰 눈만 보고 산에서
뒹군 눈이 화려한 색의 조화에 번쩍 뜨인다.
대비되는 또
다른 산의 매력에 반한다.
오늘은 오고 가며 참 많은 사진을 찍혔다. 고수들의 렌즈에 잡힌 내 모습이 궁금해진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