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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생 김지영 (2) 아브라함 (창 22; 7 - 8)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100세에 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대단한 믿음의 조상입니다..그래서 많은 교회에서 우리도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나가자 그래서 승리의 자리 ....복 받는 자리로 나가자 ...이게 대부분의 교회에서 나누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복 받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란 단회적으로 어떤 기적을 체험하거나 마음의 결심으로 금방 얻어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되기 까지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자아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고집이 얼마나 집요한 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일생을 통하여 믿음의 시작과 그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성도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판단하고 결정하여 자기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내는 자아성취의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힘으로 자기 인생을 멋있게 만들어 가려고 노력합니다. 자기 인생항로의 결정권을 누구가 가지고 있는가?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반듯이 점검하여야 할 문제라고 성경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의 자아성취에 대하여 여자가 임신하고 출산하여 아이를 키우는 것을 영화 82년 김지영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자가 결혼하여 일단 아이를 임신하고 나면 뱃속의 아이에게 조종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배가 불러오는 현상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 결정 밖의 일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일정나이에 이르기까지 육아를 담당하는 일의 내용도 아이에 의하여 조종당하고 아이의 요구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지 자기가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뱃속에 아이가 생길 때부터 엄마는 그 아이의 말없는 요구에 올인 하여야하는 것이지요. 그 동안 엄마인 자기는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상황....자기이외의 존재에게 무조건 조종당하여야 하는....자기가 없는 그 상황을 인간은 견딜 수 없어하는 것입니다.
영화 1982년생 김지영이가 결혼하여 출산한 후에 그렇게 힘들고 서러운 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여성이 남성의 지위에 눌리는 사회형태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자아성취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떠안게 되는 인간의 고통이 그만큼 처절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기 결정권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성취의 욕구를 스스로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비극이기도 한 것입니다.
설사 하나님이 말씀하여도 인간은 자기의 판단과 결정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는 인간의 자아성취의 욕구는 상상이상으로 집요하고 강력하다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설명하시는 것으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영웅적으로 만들어 무조건 그들을 닮아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통하여 인간의 고집과 인간의 죄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처리되어 가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그리고 복의 근원으로 불리우는 것은 아브라함의 일생을 통하여 믿음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여정을 거쳐 하나님이 바라시는 믿음에 이르는지를 설명하고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아갔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주도권을 내려놓지 않앗습니다.....그는 자기 주관대로 가뭄이 들자 살기 위해 남방으로 가서 애급에 이르고 거기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 말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로 인하여 거대한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에 자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자기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도권은 내가 가진다는 것입니다.
여러 번 자기실수가 분명하여 졌음에도 자기 주도권을 행사하는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바다의 모래알 같이 자손이 많으리라고 했는데....나이가 85세쯤 되었는데도....자식이 없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여 주신 일이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하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종 하갈을 취하여서 아들을 얻었습니다.....그가 이스마엘이고 그는 나중에 유대인의 큰 대적자가 됩니다.
이 대목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인간은 무언가 하나님을 향하여 해드리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잠잠히 오래 기다리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노력하여 자기 인생을 자기방식대로 멋있게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 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여러 가지 교회행사에 열심을 냅니다...제가 초 신자 때 다녔든 교회 목사님은 강단에 올라갈 때 마다 새 양말로 갈아 신고......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는 가를 강조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그렇게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무언가 카리스마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바리세인들이 그랬습니다. 번제의 제물을 드릴 때 그들은 참으로 엄숙하게 정성을 다했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켜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우리가 우리 마음에 드는 데로... 우리 멋대로 사랑할까봐서 너희 방식대로 하지 말고 내가 사랑한 방식대로 하라는 말씀입니다.......예수님이 사랑하신 방식은 육적인 자신이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그렇다면 우리의 육적 자아가 죽는 것이 사랑일 것입니다
아브람의 입장에서 하갈을 들인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켜나가는 육적인 자기 정성을 다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을 얻고부터 본처인 사라를 무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시당하는 사라도 딱하지만 한 지붕 밑에서 두 여자가 싸우는 것을 감당해야 하는 아브람은 미칠 지경이었습니다....가정이 서서히 파괴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 날 성도들의 겉 사람과 속사람의 갈등으로 비유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가 되어 성경의 표현대로 죽은 자와 방불하게 되어 그때 비로소 이삭을 얻었습니다...얼마나 아브라함과 사라가 감격했겠습니까....
이삭을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웠을 것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이 이십년 가까이 키운 그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번제는 짐승을 불에 태워드리는 제사 의식이지요.....마른하늘에 벼락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지요.....천금 같은 아이를 주실 때는 언제이고...그 아들을 불에 태워 바치라니 우리 생각은 하나님이 그때 정신이 나가신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이 맞지요 ....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나는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말이 되는 말씀하셔야지요? 하고 펄펄 뛰어야 할 아브라함이 ...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두말없이 순복하는 것입니다......이것은 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미친 짓이지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논리로는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이 이야기....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이 이야기가 ...성경에서 말이 되는 이야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위 상황이 자기에게 조금만 어려워져도 자기유익과 자기가 안전한 방향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든 아브라함이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이런 말씀에 순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성경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는가 다만 우리가 유추 해 볼 따름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평생을 살아오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봤습니다...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자기가 행사하고 살았습니다...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두 번씩이나 거짓말도 하고 ,,조카 롯 때문에 전쟁도 하고 ,,,이방여인에게서 아들 낳아 보기도 해보고 ..자기 집의 하인 중에서 제일 신실한 자를 후사로 새우겠다고 고집을 피워 보기도 하고....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자기가 가지고 오만 일을 다해보고 인생의 쓴 맛 단 맛을 다 보았지만 ...
....인생이란 것이 자기 뜻대로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을 깨달아 안 것입니다......아들 이삭을 낳을 때 그 감격은 대단하였지만 이십년 가까이 키우면서 이 아이 하나로 인하여 그 후손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될 것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될 것 같지 않는 것입니다.........아 내 힘과 내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바다의 모래알 같은 후손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구나를 깨달아 안 것이지요........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인생 전부를 들어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아브라함의 육적 자아가 죽고 아브라함 안에 하나님이 살아나신 것입니다....성경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너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라 할 때 그 죽는 다는 의미가 이런 것입니다.....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 거기에 달린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달린 자기자아의 모습이 보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스스로 항복하여 나올 때까지 오래 참아 주신 것이지요...이 일들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오래 참아 주실 것을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내 아들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하나님이 그걸 바라시니 내가 희생하는 뜻으로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갰다고 내가 생각하고 그 결정을 내가 한다면 그것은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아직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자기 인생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의 인생 주도권 즉 너의 인생을 통째로 하나님께 내어 놓으라는 말씀으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번제로 들이든 아니면 살리든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에 맡기는 것입니다. 단순히 100세에 난 아들을 바쳤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육적자아가 죽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분별하는 자기 인식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삭을 받아 가셔서 어디에 쓰시려고 이삭 바치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이 내는 십일조 그것 얼마 된다고 내면 복주고 안내면 벌주겠다고 하시겠습니까....만유의 하나님이 그런 것이 필요할 이유가 없습니다..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그렇게 하시라는 것은 거기에는 분명히 다른 뜻이 있다고 언질을 주는 것입니다...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런 행위로 자기 정성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려 왔노라고 하십니다...(마20;28)
이렇게 자기 힘과 노력으로 자기가 떳떳해지고 자랑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것이 죄의 본 모습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신을 경영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이 늘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힘과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고...자기라는 인생을 하나님께 통째로 내어 드리는 것이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
요21장에 베드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부활 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젊어서는 네가 네 마음대로 네 인생의 주도권을 가지고 다녔으나 늙어서는 네 인생의 주도권을 네가 아닌 남이 가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앞뒤의 문맥을 따르면 이제 네 육적 자아는 죽고 네 인생은 성령님이 주관하실 것이란 말씀이고 네 육적자아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살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혁혁한 공로를 새워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고 있으십니다.
이것을 재정리 하면 내 육적자아가 죽어 성령님이 새 주인이 되셔서 이제는 내가 예수님을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다” 하니까 불경스럽습니까. ..나 같은 것이 감히 주님의 반열에 서다니 ...그렇습니까....그렇게 생각하는...“나 같은 것이” 하는 자기를 판단하고 비하하는 그 자아가 죽어지면 우리가 주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들로 불러 주셨습니다.(롬8;15-17).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라 부르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일인칭으로 오신 예수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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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 자존심을 살리려고 자기 목숨을 죽음에 내어 놓을 수 있지만
진리를 위하여 자기 자존심을 죽음에 내어놓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