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신앙생활
2023.11.5. 주일오전예배
오늘 예배당으로 오는 차 안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왔습니다. 큰 딸이 네 살짜리 자기 아들 현우에게 “안전벨트 매야지” 하니까 현우가 안 매는 거예요. 그러자 큰 딸이 “안전벨트는 무슨 벨트?”하고 물으니 “생명 벨트” 현우는 대답하고 그때서야 안전벨트를 매기 시작했습니다. 또 큰 딸이 현우한테 “생명이 뭐게?”물어보는 거예요. 제가 궁금해서 듣고 있는데 현우의 대답은 “걸어다니는 거”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것도 생명이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것이 생명이다”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화를 들으면서 운전하던 제 큰 사위가 “살아 있는 것 중에 중요한 것이 뭐지요?” 물어보는 거예요. 저는 “예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이지”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위가 “네” 라고 짧게 대답하면서 그 말 나올 줄 알았다는 뜻이지요. 오늘 말씀의 제목이 ‘살아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열두 살 된 예수님을 모시고 그 부친과 모친이 살던 나사렛을 떠나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가는 모습과 돌아오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을 마치고 나사렛 땅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하루가 거의 마쳐질 때쯤에야 예수님이 자기 일행 중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없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은 혼비백산했습니다. 그래서 가던 길을 돌이켜서 예루살렘으로 급히 돌아와서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사흘 만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어른들과 대화하는 예수님을 발견했지요. 저는 좀 생각해보았어요. 왜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을까? 그들은 분명히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냈으니까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집에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멋있어. 볼 때마다 자랑스러워” “이번에 대제사장님 말씀은 꼭 나를 위한 말씀 같아” “제사장들의 찬송도 멋있었어” “이번에는 유독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집에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예수님은 안 계신 것예요. 예수님을 잃어버린 유월절! 앙꼬 없는 찐빵이지요.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 그것은 죽어 있는 것과 똑같지요.
계시록 3장 말씀에도 사데 교회를 가리켜 예수님이 책망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름은 살았다는 것인데 실상은 죽은 자라는 것이지요. 죽은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일깨워서 나머지 죽게 된 것을 살리라는 뜻이지요. 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의 교회들인 동시에 교회사적인 모습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사데 교회는 로마 카톨릭이라는 영적 암흑기를 거쳐서 종교개혁을 해서 개신교가 태어났는데 그 개신교를 사데 교회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당시 유럽은 종교가 기독교밖에 없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라 했지만 더 올바른 표현은 교회개혁이지요. 1517년 마틴 루터의 개혁 뿐 아니라 여러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초대교회같이 세우려고 예수님의 복음에 집중했습니다. 그 교회개혁의 네가지 기둥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서로, 만인 제사장’ 이와 같은 기치를 들었습니다. 교회는 날마다 주님 앞에 새로워져야만 교회다운 교회가 되고, 우리 각자도 날마다 새롭게 예수님을 의지하여야만 살아 있는 신앙생활이 될 줄 압니다.
로마서 1장 17절은 참 중요한 말씀인데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처음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의 믿음도 소중하지만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의인답게 살 수 있는 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말씀에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이 로마서 7장의 사도바울 선생님은 예수 믿는 사람이예요. 그런데도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원함은 있지만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라면 비참하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8장 1절, 2절 말씀처럼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 아래 복종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시므로 살아 있는 신앙생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참 인격자이신 것 같아요. 우리 인격을 무시하지 않고 다가오시고 우리가 주님께 갈 때에도 인격적으로 주님을 존중하며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 보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어린 사무엘을 통해서 엘리 제사장과 이 땅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하면 살아 있는 신앙생활, 인격적이고도 주님께 기쁨이 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늘 새롭게 전심으로 의지하고 믿는 것이지요. 예수님께 물어보고 예수님의 허락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 가는 삶이라면 조금 가난해도 괜찮고, 조금 연약해도 괜찮고, 조금 부족해보여도 그 길이 온전한 길인 줄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저는 요한복음 15장의 이 말씀을 자주 묵상합니다. ‘주님, 제 가족들을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웃에 대해서도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제 속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의가 있고 선함이 있고 베풀어줄 사랑의 능력이 있고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이기고 남을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저의 성품이 아니고 저의 인격과 생활이 아니고 주님이 나의 뿌리이시고 주님이 나의 실상이시므로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 은혜 속에서 내가 사랑도 하고 섬김도 하고 근무지에서도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보면 주님이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영어로는 'Divine nature'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 간단히 말해서는 예수님이 나의 포도나무이신고로 예수님께 가지로 붙어있는 것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것은 우리 안에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인격과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와 있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도 우리 속에 스스로 열매 맺을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맺을 때 저절로 주님의 인격과 삶이, 주님의 생명이 우리를 변화시켜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기뻐할 수 있는 사람, 평강을 줄 수 있는 사람, 오래 참고 자비가 있는 사람, 선을 행하며 충성된 사람, 온유하고 절제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지요. 이 같은 것은 세상에서도 바라는 바고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그 사랑이 설명되어 있는 말씀도 고린도 교회가 이런 성도들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너희가 서로 질투하거나 투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지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안에서 예수님이 살아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신앙생활이지요.
에베소서 5장과 6장을 살펴보면 부부간의 도리, 부모 자식간의 도리, 우리 사회에 나아가 근무지에서 상사와 부하직원과의 관계도, 노동자와 고용주와의 관계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에게 대할 때 “주께 대하듯이 하라” 종이 상전을 대할 때 “주님께 하듯이 하라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삶의 기준이 엄청나게 높은 것 같습니다. 가족의 관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근무지에서 상사들한테, 좀 까다로운 상사를 만날지라도 그를 대할 때 주님께 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 능력을 우리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이지요. 할렐루야! 사랑하는 목사님께 배운 바로는 율법은 명령을 하지만 명령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주지 않고, 복음은 명령을 하지만 그 능력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 되신 분이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의 생명과 성령의 법이 나를 주장한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더라도 주님께서 보실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칭찬을 받을 줄 압니다.
제가 아래쪽 전남 장성에서 형제 교회를 섬길 때 광주에 가서 통닭을 배달하는 냉동탑차를 몰면서 직장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사야 기념관에 식구님들이 오실 때가 되어서 회사에 그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사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박기사님, 이제 과장으로 승진시켜서 자동차도 주고 기름도 넣어주고 내근직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그만두면 어떻게 됩니까?”하시기에 제가 “그런 이야기를 빨리 하시지” 그러면서 웃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사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박기사님과 똑같은 사람 세워놓고 가시게"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운전기사들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때에 기름은 이만오천원어치 넣었는데 주유소에서는 삼만원짜리 영수증을 주는 것이었어요. 저는 순진해서 “이만오천원어치 기름을 넣었는데 왜 삼만원짜리 영수증을 줍니까?” 주유소 직원은 “알잖아요” 저는 “이만오천원짜리 영수증으로 주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회사에 돌아와서 일지를 기록할 때에도 제 마음이 편하고 기뻤습니다. 이런 사정을 왜 사장님이 모르시겠어요? 그것을 관례라고 하더라구요. 그런 못된 관행을 그리스도인이 따라가서는 안 되겠지요. 그것을 알고 있는 사장님이셨기에 과장으로 승진시켜주시겠다는 것이었지요. 이제 그만둔다고 하니까 지사장까지 승진시켜준다고 스카우트 레벨이 막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나 저는 “죄송합니다. 이번 달까지 일하고 인수인계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음성으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자라신 갈릴리 나사렛은 ‘무슨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오겠어’ 할 만큼 천박하고 알아주지 않는 촌동네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목수의 아들로 목수의 일을 하셨지요. 그러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 보시기에는 예수님의 삶과 그 마음씀이 너무 너무도 사랑스러운 것이예요. 예수님이 묶어가는 마음은 아버지 앞에서 꾸려가는 생활이었습니다. 비록 손이 거칠고 얼굴에 내세울 것 없는 햇빛에 그을린 얼굴이시라도 하나님 아버지가 보실 때는 너무 너무 사랑스럽고 귀한 아들이며 나의 기쁨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삶을 꾸려간다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는 말씀을 우리도 성령님 안에서 들을 줄 압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가지 말고 주님 모시고 가야 합니다. 주님 모심이 아니면 그리스도 없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는 죽은 기독교, 주님이 없는 유월절은 죽은 유월절 아니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믿음, 주님이 주신 힘으로 가족들에 대해서도 오래 참고 사랑하면서 이웃들에 대해서도 긍휼의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작은 일에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입니다. 낭만도 있겠지만 나무가 낙엽을 만들고 떨어뜨리는 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꽃도 열매도 나뭇잎도 다 떨어버리고 뿌리에 집중하는 것이 겨울철 나무의 할 일입니다. 내 삶의 뿌리 되신 예수님, 보이는 화려함은 없지만 나의 예수님을 나의 뿌리로 삼고 주님께 집중해서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흐르므로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 어디에서나 잘 감당하는 몸 된 교회 식구님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