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이야기는 서로를 서로에게 연결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다.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몸 전체와 뇌 전체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다른 유형의 글보다 훨씬 강력한 감정을 일으킨다.
(나의 글로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메리 파이퍼) 20페이지)
요즘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다. 2달 전 명절 끝자락에 오래 병을 앓으시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지금 처음으로 아버지 없는 삶을 살아내고 계신다. 장례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집 변기에 물이 새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아빠가 있었으면 이런 건 금방 고쳐 주셨을텐데....... 아빠가 손재주가 좋잖아.” 하시고, 맛난 음식을 마주하면 “이건 아빠가 좋아하던 건데,,,..” 하시며 선뜻 수저를 들지 못하신다. 결정적으로 “엄마는 평생 아빠한테 사랑받으며 살았다. 참 감사해.”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데 사실 두 분은 대체로 잘 지내셨지만 최근 10년간은 정말 많이 다투셔서, 어머니의 이런 반응이 우리 형제들에게는 생경스럽다.
어머니가 6살 때,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기독교로 개종하셨고 덕분에 어머니는 교회에 딸린 그 시절 동네에 딱 하나 있던 유치원을 졸업하셨다. 유치원 졸업 단체 사진을 보면 흰색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일자로 짧게 자른 단발머리를 한 여자 아이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나는 어머니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외할머니를 쏙 빼닮은 아이가 바로 어머니다. 나에게는 한없이 좋은 외할머니인데 어머니에게는 엄한 어머니였고, 어머니는 평생 외할머니 말을 거역하거나 토 달지 않고 사셨단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닮지 않고 매사 어머니 말에 토를 달고 살았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닌 어머니는, 교회 장로님이 소개해 준 ‘교회 잘 다니는 청년’이랑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결혼했다. 그 교회 잘 다니는 청년이 황해도에서 피난 온 집안의 장남인 줄은 알았는데, 그 집안이 그렇게 가난한 줄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언제라도 이북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남한에 정착하기를 거부하셨고 그래서 평생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셨다. 유복하게 자란 나의 어머니는 결혼 후에는 가난한 공무원의 아내로, 자존심만 남은 피난민 시댁의 맏며느리로 남 못지않은 고생을 하셨다.
나의 어머니는 머리가 좋은 편이셨다. 80을 바라보는 지금도 가족, 친척 생일이며 40년, 50년 전 일들을 꽤 정확히 기억하고 계신다. 어머니는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전체 3등을 했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교회 성경 암송 대회에서 거의 항상 1등을 하셨는데, 길고 긴 성경을 줄줄줄 외우는 어머니를 보며 10대의 나는 꽤 놀라곤 했다. 영특한 어머니였지만, 아버지에게는 종종 핀잔을 들으셨다. 좋은 게 좋은 편안한 성격의 엄마가, 말 실수를 하거나 뭔가 잊어버리는 일이 생기면 아버지는 바로 타박을 하신다. 아버지는 내향적이고 꼼꼼하며 매사가 명확하고 분명한 분이다. 반면 어머니는 사람 좋아하고, 일이 없어도 밖에 나가야 살 것 같은 외향적인 사람이다.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고, 주변 사람 모두에게 친절하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교회 사랑방이어서 다양한 연령대의 교회 집사님들이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집 냉장고와 부엌에 있는 것들을 편하게 꺼내 먹으며 놀다가곤 했다.
부모님 두 분이 성격은 달랐지만 젊을 때는 크게 부딪치지 않았다. 그저 성실하게 자식들 키우고, 양가 챙기는 데 두 분이 힘을 모으셨던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는 두 분이 사사건건 충돌하신다. 아버지는 은퇴 후 한동안 이런 저런 활동으로 바쁘셨는데, 연세 70이 넘고 외부 소일거리가 줄어들자 남은 에너지를 어머니 타박에 쓰시는 것 같다. 이전에 어머니는 아침 먹고 집을 나서면 오후에 저녁거리 장을 봐서 집에 들어오셨는데, 요즘은 삼식이 아버지 눈치 보느라 외출을 맘껏 못하신단다. 원래도 집돌이 아버지는 기운도 없는데 부부가 조용히 집에서 밥 먹고 집에 가만 있으면 된다 하시는데, 어머니는 왜 기운이 없냐며, ‘남편이랑 여기저기 잘도 다니는 친구들처럼’은 바라지도 않지만 노인 둘이 집에 있는 게 뭐가 좋냐고 하신다. 두 노인이 집에서 티비나 보는 것보다는 밖에 나가 사람도 만나고 햇볕도 쐬고 여기저기 다녀야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다고 어머니가 목 놓아 주장하시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않으신다.
연세가 드시면서 총명한 어머니도 단어가 생각이 안 나 버벅이거나, 가스 불 끄는 걸 깜빡하는 등의 사고가 잦아졌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바로 타박을 하신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왜 그럴까 싶다.
“네 엄마는 평생 저렇게 말을 똑 바로 못하고 버벅인다.”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핀잔을 주시고,
“대충 알아들으면 됐지, 그걸 못 알아듣고 사람 무안을 준다.”고 어머니가 기분 나빠하면,
“뭐 낀 놈이 성내는 것도 아니고, 거참. 잘못을 인정 안 하는 건 더 나쁘다.”고 아버지가 전쟁을 이어가신다. 그럼 어머니는
“저러니 내가 말하기가 싫다.”며 대화를 끝내려 하신다.
두 분이 요즘 거의 매일 이런 대화 아닌 말싸움을 하시다가 가끔 상황이 심해지면, 자녀들에게 전화를 거신다. 하소연도 하루 이틀이지, 딸들이 지쳐 대충 전화를 받자 이제는 사위에게 전화를 걸어 상대를 흉보신다. 거참, 노년에 두 분이 누워 얼굴에 침 뱉는 일을 하고 계신다. 그런데 미스테리한 것은 어머니가 이런 핀잔과 타박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남편의 밥을 차려주며 같이 지내신다는 거다. 그러다 손재주 좋은 아버지가 고장 난 물건을 고쳐주기라도 하면,
“맞아, 당신이 최고야. 당신이 기술이 좋아.”하고 쿨한 칭찬까지 날리신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다. 그 순간은 잠시 아버지도 기분이 좋아지지만 잠시 후면 두 분은 다시 톰과 제리가 된다.
그런 중에 어머니랑 통화를 하면, 시작은 분명 아버지에 대한 고소와 고발이었던 것 같은데, 마무리는 “그래도 아버지가 평생 성실히 살아서 지금 연금으로 넉넉히 살 수 있으니 감사하고, 자녀들 다 건강하게 잘 사니 그 또한 감사하고, 감사할 것이 참 많다.” 였다. 50년을 넘게 지켜본 어머니지만 이 여인이 살아가는 법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아버지가 떠난 요즘 어머니는 식사 때마다 음식 타박을 하던 아버지가 없어서 좋다고 했다가 눈물을 흘리시고, 매일 아침 루틴으로 시청하던 ‘아침 마당’을 보다가도 맥락 없이 눈물을 쏟으신다. 늘 명랑하던 어머니의 다른 모습에 우리 형제들도 긴장이 될 때가 있지만 그렇게 어머니는 지금 홀로서기를 연습하고 계신다. 힘든 걸음을 내딛는 어머니를 온 마음으로 응원한다.
사진 설명:아버지 돌아가신지 얼마 안 돼서 화사한 옷을 입기가 조심스럽다 하시더니
지난 주 선거가 있던 날 벛꽃 구경 가자고 했을 때 고운 노란색 옷을 차려입고 나오셔서 잠깐 놀랬다.
어머니는 날리는 꽃잎을 보며 소녀처럼 좋아하셨다.
첫댓글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 어머님이 많이 신경이 쓰이시겠어요… 어머님의 생애사를 본 느낌입니다. 누군가 자기를 이렇게 중요하고 애틋하게 바라봐주고 글로 써주는 일이 얼마나 드문일인지 생각합니다.
이번 글이 초고여서 그렇지만 글에서 ‘나’ ‘나의’ 라는 단어가 자주 반복되어요. 꼭 필요한 곳이 아니라면 나의 어머니 —> 어머니 로 바꿔도 좋을 것 같고요,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 과거 시제로 써야 할 곳을 현재시제로 쓴 문장이 종종 보이네요. 퇴고하실 때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
글을 읽는 내내 샘의 어머니 모습이 제 눈 앞에 그려지는 것을 보며 글의 힘이란 멋지구나 생각했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정원과 텃밭 가꾸는 봄이 되면 서로 사이가 좋으시고,
추운 겨울이 되어 집 안에 같이 계시면 자주 다투세요.
문득 부모님이 보고 싶어지네요~ 조만간 뵈러 가야겠어요.
선생님의 부모님에 대한 글을 읽으며 각자 부모님을 생각한 많은 분들이
이야기로 서로 연결되지 않을까 싶어요. 잘 읽었습니다!
-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
이런 글에는 뭐라고 토를 달기가 어렵죠. 어머님의 삶을 아주 정성껏 공들여 썼다는 게 느껴집니다.
하...두분믜 이해할 수 없는 티격태격에 대해 더 듣고 싶어요. 뒷이야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