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2절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이런 말을 지금까지 지겹도록 들었다는 뜻입니다. 체념하고 살아라 인생은 다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엘리바스의 말입니다. 이는 사람을 번뇌케 하는 안위입니다
병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한다는 말이 환자에게 오히려 역겨울 수도 있습니다.
3절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4절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입장이 바뀌면 나도 너희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5절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6절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이와 같은 독이 그 속에 있으면 밖으로 떠들어대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애통이나 토설 같은 것입니다. 이를 테면 술주정으로 취중 진심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에 의해 액화(요7:38-39)되어 우리 속에 스며듭니다.
그래서 생수가 우리 속에 쌓여 갑니다. 유명한 목사들의 메시지는 액화되어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묵상하다가 주일 날 빵하고 터지는 겁니다. 고체화된 성경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액화가 되었다가 설교로 기화가 되면서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돈을 모으는 사람은 돈을 항상 쌓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항상 쓸 생각을 합니다.
그렇듯 개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 속에 가득 채우도록 부지런히 묵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쓰든지 안 쓰든지 욕심으로 계속 모으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설교감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에 노회에서 성경공부를 할 때 이야깁니다.
목사들이 계속해서 자료만 달라고 조릅니다. 이건 지식의 파일만 늘어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체내에 축적해 가면 어느 순간 레에마가 쏟아집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음에 채워져서 모국어를 하듯 입술에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8절 “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라”
나를 대적하여 나의 죄를 증거하므로 나를 시들게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바른 말을 해도 시들게 합니다.
11절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12절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서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이는 실재와 다른 순전히 욥의 과민한 반응입니다.
13절 “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없이 나를 쏨으로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 나오게 하시는구나”
무엇을 좀 했다는 사람은 문제만 생기면 꼭 하나님을 이렇게 물고 늘어집니다.
악인의 특징은 자신을 보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부정적인 측면으로
자신의 추함을 보게 하시고 그 다음에 긍정적으로 구원의 진리를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왜 자기의 속을 보지 못 보는가?
과연 속이 안 보이는 걸까? “너는 누구냐?”하는 말씀이 왜 들리지 않을까?
16절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17절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자신의 속에 있는 것은 못 보고 지금까지 행한 업무수행만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수용(대접)하지 않고서 주일 성수, 십일조, 새벽기도를
다 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의 항변과 다름이 없습니다.
18절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이와 같이 억울하고 괴로우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다 알아주길 원합니다.
목회가 힘이 드는 것은 성도들이 잘 될 때는 가만히 있다가 고통이 오면
당신도 나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는 식으로 목사를 걸고넘어지는 일입니다.
19절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희 중보자가 놓은데 계시리라”
나의 이 비참한 형편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당연하지요.
20절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21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를 원하노니”
하나님이 대신 나의 형편을 사람들에게 설명 해 주세요 하는 뱃심입니다.
지금 질병 등의 고난을 받고 있는 사역자들의 신앙생활과 사역의 활동은
다 인정해 주긴 하지만 ‘지금 당신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면 욥의 트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길게 고난에 끌려가게 됩니다.
따라서 언제나 우리는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아버지께 어떻게 나아가는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얻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항상 대답할 영적인 비밀을 장착하고 있어야 전문사역자가 됩니다.
22절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흐르는 세월 속에서 반드시 인정을 받아내야겠다는 고집스러운 말입니다.
세상의 환난과 고난 가운데서 우리의 상급은 저 천국에 쌓였다는 애드립도
문제가 많지만 고난은 다 이유가 있어 이 풍랑을 견디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상을 해 주실 거라고 얼렁뚱땅 달래는 말도 참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 욥은 하나님이 원인이 아닙니다. 땅의 사물과의 사이에서 원인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는 귀로만 들은 지식들뿐입니다. 현재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8:18)는 말씀은 욥이 귀로만
들은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 순간 훅하고 그 속에 들어오는 감격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알고 거룩함과 영광을 얻어 주님과 하나
되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자신이 아니라 지금까지
한 일을 생각하며 그에 미치지 못하는 대접을 받고 있는 형편에 대해
궁시렁거리는 신앙이라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실패하고 있는 롬7장의
상황입니다. 욥과 같은 수준입니다. 따라서 이기고 성공하는 롬8장 안에서
발견이 되도록 왜 인간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그 구원 받은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해 골똘하게 추적해야 할 겁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시는 진리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