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와 벽시계
김 성 도
1
날이 갈수록 노루는 어리둥절해집니다.
노루는 그때 그때마다 당하는 일이 신기합니다.
때로는 신이 날 적도 있읍니다.
그런데 요즈음 너무 생각이 골똘해졌음일까요?
그 맑고 고운 눈이 자꾸만 흐려집니다.
노루가 처음 영이네 집에 왔을 땐 귀여움을 독차지했지요.
특히 영이 아가씨가, 이따금 깨끗한 천으로 몸통도 닦아주고 눈도 말끔히 씻어줬어요.
그런데 이젠 집안사람들이 노루에 대해서 그리 흥미를 깆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2
영이네 집에 온 지 몇 달이 지났읍니다.
노루는 그때의 일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삼고 있읍니다.
노루가 살아나고, 생각도 하게 된 것이 바로 그때였으니까요.
영이오빠가 노루 엉덩이 숨구멍에,
“후우.”
하고 숨을 불어넣었을 때 일입니다(노루는 그때만 해도 무슨 천조각처럼 착착 접힌, 하잘 것 없는 것이었읍니다).
영이오빠 볼이 불룩해지며 숨구멍에 바람이 들어갔읍니다.
노루는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것을 느꼈읍니다.
몸뚱이가 금방 부품하게 부풀어올랐읍니다.
머리 양쪽에서 뿔이 솟고, 다리가 밋밋하게 뻗고, 짧은 꼬리가 발딱 일어서며 위로 까부러졌읍니다.
그때 일올 생각할 때마다 영이의 고마움을 잊지 못합니다.
영이가 솜같이 희고 깨끗한 천으로 자기 몸을 닦아주고, 또 눈을 깨끗이 씻어주던 일을 기억합니다.
온몸에 힘이 솟구치는데다가 눈앞이 환해지던, 그때의 황홀하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습니다.
노루는 흙빛 몸뚱이에 흰 점이 많이 박힌 흰 점박이였읍니다.
누가 보아도 산노루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읍니다.
영이는 노루가 너무 귀여웠던 모양이지요.
노루 콧잔등에다 쪽 하고 입맞춤을 했읍니다.
그러자 벽시계가 놀라서 땅 소리를 냈읍니다.
노루로서는 이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인 입맞춤이었읍니다.
노루를 본 집안식구들은 각기 한마디씩 말을 했읍니다.
잘 생겼다느니, 싱싱하다느니, 뿔이 탐난다느니.
그런데 숨구멍에 숨을 불어넣어준 영이오빠는 이상한 말을 했읍니다.
“아버지, 난 저 노루가 가없어요.”
“가없다니 ?”
아버지가 되물었읍니다.
“노루는 말입니다. 들로 산으로 뛰돌아 다녀야하잖습니까. 길 없는 길을 뛰돌아 다니다가 때로는 생물에 목을 축이고.”
아버지는 아들의 이야기를 듣더니 싱긋이 웃으시고, 그 이상 더 말씀하시지 않았읍니다.
“내가 가없다니?”
노루는 그때 당장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3
어느 날입니다.
대낮인데도 방안이 조용했읍니다.
영이 혼자뿐이었읍니다.
영이가 느닷없이 노루의 등을 가볍게 잡아내렸읍니다.
그리고 방바닥에 앉더니 노루 귀에 대고 속삭였읍니다.
“노루야, 난 공주다 알겠니 ? 날 태워서 저기 먼 산성에 있는 왕자님한테 데려다 다오, 용?”
이게 무슨 소릴꼬?
노루는 또한번 어리둥절했옵니다.
영이는 아직 국민학교 육학년에 다닙니다.
글을 많이 읽어서 그럴까요?
꿈이 많은 소녀입니다.
“자, 이제 떠나볼까?”
영이는 제자리에 앉아서 노래까지 부르며 노루를 껑충껑충 뛰게 했읍니다.
“노루야, 노루야. 껑충 껑충.”
노루는 영이가 시키는 대로 뛰었읍니다.
걸음이 점점 빨라집니다.
영이의 노래도 점점 빨라집니다.
노루야, 노루야.
드올로 드올로.
노루는 발목이 꿀렁꿀렁 꿀렁입니다.
또 다리가 휘청휘청 휘청거립니다.
그러나 신이 납니다.
영이가 뛰게 하는지, 제가 뛰는지도 모릅니다.
노루야, 노루야.
산으로, 산으로.
노루는 힘이 솟구쳤읍니다.
아, 내게 언제 이런 힘이 있었던가. 이렇게 한창 신나게 달리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읍니다.
때로는 날으는 듯합니다.
영이 머리 높이로 치솟기도 합니다.
“노루야, 너무 고되다. 잠간 쉬어가자. 잠시 숨을 돌리자.”
한숨을 돌린 노루는 다시 뛰기 시작했읍니다. 그러나 이내 멈추고 말았읍니다.
영이가 지친 모양입니다.
그런데 노루는 얼마든지 뛸 것 같습니다.
어딘지 모르지만 왕자가 있는 산성까지 단숨에 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도 가도 왕자의 산성이 나타나지 않는구나. 또, 이다음에 달리자.”
땅 하고 시계가 말참견을 했읍니다.
“그렇지, 그렇지.”
노루는 다시 텔레비전 위에 놓여졌읍니다.
노루는 아까 당한 일올 곰곰이 되새겨보면서 꿋꿋이 서 있읍니다.
영이와 너무 달려서 지친 탓일까요.
아니면 너무 골똘한 생각 탓일까요.
그날밤 이속해서 노루는 픽 쓰러지고 말았읍니다.
노루는 이튿날 아침에야 되살아났읍니다.
그것도 영이오빠 덕입니다.
엉덩이 숨구멍에 숨을 불어넣고 노루 폼올 주물럭 주물럭 주무르며, 귀에 대고 뭔지 엿듣기도 했읍니다.
“아, 여기에 병이 드셨군.”
하더니, 노루 귀 밑에 뭔가 질적질적한 것을 발라주었읍니다.
그리고 다시 볼을 불룩해가지고 숨올 불어넣었읍니다.
노루는 다시 살아난 셈이지요.
그것도, 두 번 다 영이오빠가 살려준 셈이지요.
4
며칠 후입니다.
영이오빠가 커다란 그림틀 하나를 텔레비전 위에다 세웠읍니다.
노루가 서 있는 뒷벽에 기대 세웠읍니다.
여기서 영이오빠 이야기를 약간 곁들여야 하겠군요.
영이오빠는 아주 덜렁입니다.
취미가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또 그만큼 아는 것도 많습니다.
쇼팡의 왈츠 한곡쯤 칠 줄 압니다.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집도 뒤집니다.
캔버스를 대하면 그림 한장쯤 거뜬히 그리고요.
때로는 등산도 하고, 문학 이야기도 제나름대로 합니다.
아직 고동학교 학생이지만, 때로는 어른스런 소리도 하고, 가끔 엉뚱한 짓도 합니다.
이 날은 등산에서 돌아온 모양입니다.
영이오빠 몸에서 흙냄새, 풀냄새, 게다가 산바랍 냄새 같은 것이 풍겼읍니다.
노루도 뭔가 시원스런 것을 느꼈읍니다.
영이는 그림틀을 세워놓고 말했읍니다.
“노루야, 자 여기가 네 고향이다, 알겠니?”
그러고는, 뭔가 바쁜 일이라도 생겼는지 급히 나가버리고 말았니다.
급히 나가느라고 노루 머리를 그림틀을 향한 채 두고 말았습니다.
노루는 또 생각에 잠겼읍니다.
“고향! 고향이라! 무슨 뜻일꼬?”
노루는 그림을 들여다보며 생각해봅니다.
숲이 무성합니다.
노루들이 노닐고 있읍니다.
그림 맨앞에는·한 마리의 노루가 샘물을 마시고 있읍니다. 저 멀리 몇 마리도 풀밭에 누워 있읍니다.
노루야, 노루야 또깍 또깍
그것도 몰라 또깍 또깍.
벽시계가 말을 했읍니다.
“자세히 보라구. 네 친구들이 몇이나 그 속에 있잖아. 또깍 또깍. 원래 넌 저런 숲속이나 산에서 살아야만 해, 알겠니? 또깍 또깍.”
“옳아, 그래서 내 고향이라 그랬구나.”
그 말을 들은 당장이라도 그 숲에 뛰어들고 싶었융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시계가 열둘을 쳤읍니다.
자정이 됐읍니다.
시계가 말을 건냈읍니다.
“노루야, 네 몸집이 너무 커서 그 숲속으로 못 들어간다. 또깍 또깍.”
“그럼 어쩌면 좋지?”
“걱정 마, 내가 저 숲올을크게 해주마, 또깍 또깍.”
시계는 이렇게 말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읍니다.
그림아, 커져라,
또깍, 또깍.
노래에 따라 그림이, 아니 숲이 챔점 커졌읍니다. lll·---
그림아 커져라.
또깍, 또깍.
풀밭이 넓어지고, 나무 키가 자랍니다.
어느 것보다 맨 앞의 노루가 뚜렷이 보입니다.
그런데 커지던 그림틀이 뚝 소리를 내고, 커지기를 그쳤읍니다.
그림틀이 천정에 부딪친 것입니다.
노루는 앞뒤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읍니다.
맘이 급했읍니다.
껑충, 노루는 그대로 숲속으로 뛰어들었읍니다.
그런데 노루는 톡 도로 퉁겨나와서 키대로 나동그라졌옵읍니다.
숲은 노루가 들어가기엔 너무 적었읍니다.
시계는 그냥 또깍거릴 뿐입니다.
노루야, 얼마나 아프냐, 또는 미안하다. 이런 말 한마디 없읍니다.
기계라 그런지 동정심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읍니다.
기계는 다시 말했읍니다.
“이젠, 별 수 없다. 네가 작아지는 수밖에.”
그리고 다시 노래를 불렀읍니다.
노루야 쓰러져 있거나 말거나 아랑곳 없읍니다.
노루야, 작아져라
또깍, 또깍.
노루의 몸이 작아지기 시작했옵니다.
노루야, 작아져라.
또깍, 또깍.
노루의 몸은 작아집니다.
아니 작아지는 게 아니라, 힘이 빠집니다.
몸이 나른하고 눈이 감깁니다.
숨이 갑갑합니다.
그런데도 시계는 여전히 노래를 부릅니다.
노루야, 작아져라.
또깍, 또깍.
노루는 시계한테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그만 픽 쓰러졌읍니다.
다시 옛날 모양으로 천조각처럼 착착 접혀지기 시작했읍니다.”
그런데도 시계는 그대로 노래를 부릅니다.
노루야, 작아져라.
또깍, 또깍.
아마 시계는 딴 생각을 하며 입만 놀리는 모양입니다.
노루야, 작아져라.
또깍, 또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