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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이제는 혼자서...
여기까지 170여 km, 8일을 걸어 아라곤 코스 구간을 마친 인야와 Wh는 바르셀로나로 돌아갔다.
주말이라 마땅한 호텔을 구하기 어려웠던 두 사람은, 다소 비싸더라도 인터넷과 전화가 편리한 E호텔에 짐을 풀었다.
Wh는 좀처럼 방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식사 때만 근처 바에 나가 비노를 곁들여 끼니를 때우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꼼짝않고 머물기 시작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인야는 이미 스페인 친구 마놀로 가족과 통화를 했는데, 갈리시아 고향에서 조카딸이 애인을 데리고 인사차 온다며, 온 가족이 모이는 식사자리가 있으니 꼭 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Wh는 가고 싶지 않다며,
"나 혼자 알아서 점심은 챙겨 먹을 테니, 걱정 말고 혼자 다녀 와." 하고 고집을 피웠다.
인야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이 몇 년을 살았던 이 나라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Wh에게도 직접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야, 호텔에 죽치고 있는다고 서울 일이 저절로 풀리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이미 우리가 함께 간다고 얘기해 놓았거든?" 하며, 인야는 딱 한 번만 같이 가자고 우겼다.
결국 두 사람은 마놀로의 집에 가게 되었고, 온 가족의 환영을 받은 뒤... 그들과 함께 바르셀로나 근교 해변의 유명한 빠에야 식당으로 향했다.
온 가족과 함께한 자리에서 인야는 통역까지 하느라 정작 음식 맛을 볼 새도 없었지만, 훌륭한 빠에야만큼은 분명한 식당이었다.
물론 거기서 마놀로의 조카딸 크리스티나 커플을 만났고, 얘기를 나누다... 인야가 며칠 뒤 혼자 프랑스 코스를 걷게 될 거라는 말에 크리스티나는,
"어머, 정말이야?" 하고 깜짝 놀라더니,
지금 자신이 빰쁠로나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며, 인야에게 그곳을 지날 때 꼭 오라고...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첫 번째 순례 때 그녀의 고향 갈리시아에서, 인야를 위해 께마다를 열어준 장본인이기도 했던 그녀와는 이미 구면이었다.
많은 스페인 가족의 환영을 받은 Wh 역시 그 자리가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더구나 까미노를 끝내지 못한 채 돌아가야만 하는 그에게 가족의 질문이 쏟아져, 인야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통역을 하느라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훌륭한 식사대접을 받고, 그들은 아들 라울이 차로 데려다 줘서 호텔에 돌아왔는데, 그 뒤로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때까지 남은 3일, Wh는 대부분 호텔 안에 머물렀다.
인야는 틈틈이 다른 스페인 친구들 얼굴이나 비추고 돌아와 식사 시간을 함께했다.
호아낀 씨네, 마놀로네, 일본인 친구, 한국 식당을 하는 친구까지, 다들 오라고 했지만 인야는 혼자 가서 먹을 수는 없다며 다음을 기약했다.
Wh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친구는 새벽 비행기를 타야 했다. 모닝콜이 울리기 전, 인야는 이미 깨어 있었다. 서둘러 공항에 도착하니 아직 업무도 시작하지 않은 한산한 시간이었다.
6시 40분 비행기였지만 Wh는 5시 조금 넘어 수속을 마치고 탑승구로 향했다.
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인 듯 별다른 감흥도 없어 보이던 그가, 관세지역으로 들어서며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순간, 인야의 콧등이 찡해졌다.
'아, 가는구나. 잘 가야 할 텐데......'
그리고 잠시 뒤, 인야는 갑자기 이 세상에 홀로 뚝 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밝고 즐거운 여행은 아니었어도, 그동안은 늘 Wh와 함께였는데... 이제 그는 혼자였다.
'외로움'이라는 게 자신에게 그리 익숙한 감정이 아니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 외로운 것 같았다.
인야는 공항 대기실에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감정을 추스렸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나가봐야 버스도 없을 시간이라, 하는 수 없이 인야는 공항에서 한국의 지인들에게 엽서 몇 장을 썼다.
그러느라 미적댔던 인야는, 하마터면 빰쁠로나행 기차를 놓칠 뻔했다.
겨우 출발 5분 전 산츠역에 도착해 표를 사고 뛰어 오른 등에는 땀이 흥건했다.
기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인야는, 눈을 떠 보니 레리다 지방을 지나고 있었다. 들판마다 붉은 아마폴라가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그 선홍의 빛깔에 시선을 뺏기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Wh였다.
벌써 비엔나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앞으로 열한 시간을 혼자 기다려야 한다는 친구가 걱정스러웠다.
기차가 아라곤을 지나 나바라 지방으로 접어드는 동안, 인야는 토라진 아이처럼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지 말자. 어차피 나 혼자 남은 것이고, 이제 프랑스 코스가 남아있을 뿐이다. 정신 차리자.'
스스로를 다잡으며, 인야는 다시 카메라를 들어 창밖 풍경을 담기 시작했다.
점심 무렵 빰쁠로나에 도착한 인야는, 피레네 산맥 쪽 출발점인 론세스발예스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멘 한 서양 청년이 다가와 영어로 물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을 거예요?"
인야도 배낭을 메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구별이 된 모양이었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왔다는 R이었다.
그날 아침 비행기를 갈아타고 막 도착했다는 그는, 이 길이 완전히 처음인 초보 순례자였다.
자기도 오늘 론세스발예스로 가려는데 택시비가 83 유로나 해서 누군가 같이 타고 갈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라기에, 인야는 마침 잘됐다며 함께하기로 했다.
R은 호기심 많은 만큼 걱정도 많았다.
피레네에 눈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며 지레 겁을 내는 그에게, 인야는 자신이 세 번째 걷는 길이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지만 좀처럼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버스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인야는 R에게 배낭을 맡기고 슈퍼마켓에서 며칠 치 먹거리를 사 왔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R은, 그때까지 인야의 배낭끈을 꼭 쥐고 앉아 있었다.
'퍽 순진한 친구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 같아, 인야는 절로 웃음이 났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선뜻 배낭을 맡기던 인야가 도리어 이상해 보였던지, R도 자기 짐을 봐달라며 씩 웃더니... 인야처럼 자신도 먹거리를 사왔다.
각자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인야는 그의 순진함에 자꾸 웃음이 났다.
동행할 사람을 더 찾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 오후 세 시 반, 초조해하는 R에게 인야는 큰소리를 쳤다.
"나를 믿고 따라오기만 해!"
그러자 R이 애처럼 밝게 웃었고, 인야가 불쑥,
'Don't worry, be happy~' 한 소절을 부르자, 동양인 입에서 나온 그 노래가 신기했는지... R도 따라 불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크게 웃었다.
그렇게, 아라곤 코스를 함께한 친구가 떠나고 혼자였던 인야에게 새로운 동행이 생겼다.
그 뒤로 두 사람은 프랑스의 '생 장'까지 동행이 되었는데, 현지의 순례자 사무실은 사람들로 붐볐다.
이미 아라곤 코스를 마쳐 끄레덴시알이 있던 인야는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어, R에게, 끄레덴시알은 다음 날 론세스발예스에 가서 얻을 수도 있으니... 그냥 숙소부터 잡자고 나왔다.
가까운 알베르게들은 이미 만원이었고, 결국 제일 먼 사설 알베르게에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보기 드물게 남녀가 방을 달리하는 곳이었다.
창가의 편한 자리를 R에게 양보한 인야는, 어리둥절해하며 고마워하는 그를 뒤로하고 옆방에 든 동양 여자 셋을 눈여겨봤다.
잠시 후 복도에서 그중 한 사람과 마주쳤다. 한국인이냐고 묻는 그녀는, 처음 이 길을 걷는 휴학생이었다. 방을 잡느라 시간을 다 써버려 저녁 먹을 시간도, 먹거리도 없다는 그녀에게... 인야는 자신이 사둔 빵과 하몬으로 보까딜료를 만들어 나눠주었다.
"입에 잘 맞을지 모르겠는데, 이 길을 걸으려면 이런 음식에도 익숙해져야 해요."
"예, 괜찮은데요."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그녀에게 인야는, 이 길을 걷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니... 사흘만 지나면 익숙해질 거라며 다독였다.
이튿날, 인야는 5시 경에 일어났으나 너무 일러서 그냥 누워 있었다. 그런데 남자들만 잤던 그 방보다 한국 여학생이 자던 옆방에서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가 더 컸다.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하다가 6시가 넘어, 일어나 조심스럽게 배낭을 챙겼다. 그랬더니 옆에 자던 R도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배낭을 싸기 시작했다.
배낭을 다 싸고 아침을 먹으러 1층에 내려가는데, 인야는 복도에서 한국여학생을 또 만났다.
"아침 먹어야 하는데, 날 따라와요."
"아, 예..."
"근데 누가 그렇게 코를 곯아, 그 방에서?"
"예, 한 독일 아줌마가......"
식당에 들어가니 역시 몇명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때 마침 나왔던 주인 남자는 까만 정장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고, 그들에게... 냉장고 안에 야채도 있으니 꺼내 먹으라고 얼굴에 웃음 가득하면서도 친절하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야가 냉장고를 열어보니, 약간 마른 토마토 하나가 있을 뿐이었고 양파는 썩어 있었다.
말이, 알베르게에서 '아침식사 제공'이었지, 여간 부실한 게 아니었다. 우유는 각자 알아서 데워 마셔야 했고, 빵도 별로고... 잼 하나를 제공 할 뿐이었는데, 요란하게도 '아침은 제공한다.'는 안내로 벽에 붙여있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6시가 되자 틀었던 클래식 음악이 알베르게 전체에 묘하게 울려퍼지고 있는, 우스꽝스럽고 묘한 겉치레(?)가 특색인 곳이었다.
아무래도 쭈뼛쭈뼛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학생에게, 인야는 접시도 꺼내고 컵도 준비시켜 주면서 우유에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미숫가루를 타 딸아주었다.
"저도 미숫가루가 있는데요......"
"그래요? 그 건, 아꼈다가 나중에 먹고... 아, 피레네 산맥을 넘는 도중에 물을 받는 곳이 자주 있으니, 물병에 너무 무겁게 물을 채워넣을 필요는 없을 거요. 첫날이라 짐이 많기도 무겁기도 할 텐데......" 하면서 인야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조그만 물병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배낭을 메고 나오는데, 주인 남자가 인야를 따라나오며 부드럽게 웃으며 잘 가라고 했다.
아마 동양 사람인데다 그나마 스페인 말이라도 해서 의사가 통하기 때문에 그런가 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가 사진을 찍어줄 테니 카메라를 달라며, 인야의 카메라를 뺐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사실 인야는 사진을 별로 찍고 싶은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는 극구 인야더러 자기 집 정문 앞에서 포즈를 잡으라더니... 인야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는 것이었다.
어째, 불필요했던 과잉 친절(?) 같기도 해서, 좋지만은 않았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자기 집이 배경으로 나온 사진을 위해서였을 거라는 생각이 아니 들지 않았다.
어차피 인야는 남아공의 R과 동행이 되었고, 물론 한국 여학생이 출발하는 모습도 관찰을 했다.
피레네 산맥의 완만한 목초지 길을 오르던 인야는, 저만치서 점심을 먹고 있는 한 동양인 커플을 발견했다. 다가가 보니 붉은 옷의 여자가 다름 아닌, 알베르게의 그 여학생이었다. 아침에는 다른 옷차림이었는데, 산을 오르다 보니 겉옷을 벗었던 것이었다.
"어? 아저씨!"
"여기 있네? 나는 학생이 언제 올라오나... 저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셨어요? 저는 오다가 이 아저씨를 만나서..."
순간 인야는, 이 여학생이 같이 있던 이 분에게 이미 나에 대한 말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그런데 그 분이,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에서 온 0 00라고 합니다." 하고 정식으로 인사를 청해 왔다.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인야는,
"아, 그러세요? 이렇게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했지만, 딱히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순 없었다. 예의가 아닌 줄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인야의 특성 상... 그저, 머뭇머뭇 거리는데,
"누구신데, 어떻게 이 먼길을 오셨습니까?" 하고 그 분이 조금 더 세세하게 물어온 것이었다.
인야는 낭패였다. 그래서 역시 얼버무리느라,
"저는, 그저 이 길이 좋아서... 왔는데, 어젯밤 이 여학생하고 같은 알베르게에 머물었기에...이렇게......" 하고 끝내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고 애를 쓰는데,
성질이 급하신 듯 그 분이 갑자기,
"나는 이 길을, 이 인야씨가 쓴 '아름다운 고행 산티아고 가는 길'을 읽고 왔는데요." 하니,
인야는 뒤로 넘어질 듯한 상황과 직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은 도망칠 수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인야가,
"제가 바로 그 사람인데요......" 했고,
그 자리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때마침 지나던 한 한국인이, 그들간의 한국말을 듣고 다가와 물었다.
"한국사람들이세요?"
"예."
하고 그 분이 다가오자,
"이 양반이 바로 이 인야씨래요!" 하니,
"정말요?"
그렇게 그 사람들 한테는 걷기 시작한 첫 날, 이 길에 대해 책을 썼던 '이 인야'란 사람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인야에겐 전혀 뜻밖의 일이 되고 말았지만.
아무튼 인야는,
자신이 그렇게 유명한지(?) 몰랐다.
허기야, 이 길에선 유명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자신의 책과 인터넷 사이트로......
(우리나라에선 이 '산티아고 가는 길'에 대한 책도 인야가 처음 냈고, 사이트도 처음으로 운영한 것이니.)
그렇게 인야는 그들과 동행이 되었다.
며칠 뒤 한 마을을 지날 무렵, 무리 지어 핀 아마폴라가 눈에 들어왔다. 인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붉은빛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아마폴라의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라라소아냐에 잠시 들러 자료 삼아 알베르게 사진을 몇 장 찍고 돌아 나오던 인야는, 숲길에서 길을 잃었다가 개에게 물릴 뻔했다는 R과 다시 마주쳤다. 그와 다시 얼마간 함께 걷게 된 인야는 문득,
'이 친구도 보내야돼. 이젠, 그 스스로도 그런 준비가 돼 있을 거야......'
사실, 인야는 아침에 그와 헤어질 때에도 그냥 아무 인사도 없이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다음 알베르게에서 그를 보게 될 것인데, 그 때 가서 정식으로 말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더 머뭇거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 조금 정색을 한 상태로 R을 불렀다.
"R, 너는 시간이 없는 사람이잖아? 가능한 빨리 이 길을 걷고, 바르셀로나 구경도 한 뒤 니네 나라로 돌아간다면서? 그런 너에 비해 나는 천천히 걷고, 바쁠 일 없는 사람이니... 우리 이제 이쯤에서 헤어지자. 아니, 니가 나를 앞서 가면 되는 거야." 하자,
R은 적잖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이내 인야의 뜻을 알아차린 듯,
"그동안 너무 고마웠는데......" 하는 것이었다.
"이 길이, 원래 그래......" 하고 웃는 것으로, 인야는 그를 먼저 보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가 먼저 가고 그가 뒤에 따라온다면, 앞으로도 다시 만날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는 일정이 바빠서, 앞으로 내가 그를 만날 가능성은 이제 없을 것이다......' 하면서는 뭔가 가슴이 꽉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며칠 그와 동행이 됐다가, 어느새 정이 들어있었단 말인가? 내가 왜 이런단 말인가, 이 길에선 다 부질없는 걸 잘 알면서도......'
인야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괜히 핸드폰 버튼을 눌러보았다.
그때 숲길 옆 공터에서 누군가 팔뚝만 한 송어를 낚아 올리는 게 보였다.
인야가 급히 카메라를 꺼내는 사이, 낚시꾼은 그 송어를 도로 놓아주는 것이었다.
그 광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R에 대한 생각은 어느새 옅어져 있었다.
홀가분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뭔가 새로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고, 생각이 떠오르려 할 때마다 인야는 애써 주변의 꽃이나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혼자 걷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많아졌다.
함께 왔던 친구도, 스쳐 지났던 동행들도 이제 곁에 없었다. 그 사실이 인야를 조금 감상적으로, 또는 절박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뜨리니닫 데 아레에 닿았을 때는 아직 알베르게 문도 열리지 않은 시각이었다.
한 시간여를 기다리던 중, 피레네 산맥에서 만났던 K님이 나타났다.
그 얼마 뒤 알베르게 문이 열리고 방을 배정받은 뒤, 두 사람은 K님이 가져온 초리소로 간단히 보까딜료를 만들어 먹었다.
인야의 식량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점심 후 잠깐 눈을 붙였지만 30분도 못 자고 깨어난 인야는, 무료한 오후에 지인들에게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잠했던 오전의 감정이 다시 밀려왔다.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였다.
그 만남은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순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인야는, 그해 9월 R에게서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사흘을 함께 걷다 "이제 혼자 가라"며 앞서 보낸 그 친구였다. 떠나보내던 그 순간에도,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 가슴 한켠이 아려왔었다. 이 길에서는 미련을 두지 않기로 매번 다짐하면서도, 매번 실패하고 마는 자신을 인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뒤늦게 답을 보내온 것이다.
"Thank you so much for the email!!! I finished the Camino on 2 June... you made things a lot easier for me and I am very appreciative."
짧은 문장 몇 줄이었지만, 인야는 그 메일을 받는 순간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다. 함께 걷던 길 위에서, 겁먹은 그를 다독이며 불러주었던 그 노래.
Don't worry, be happy.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강엔 청둥오리가 떠다니고, 다리 위에서는 낚시하는 사람도 보였다. 오후로 접어들어 순례자들의 발길도 뜸해진 시각이었다.
알베르게 안에 있을 때보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있을 즈음, K님이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세요?"
"예... 글쎄, 제가......"
인야의 이야기를 다 듣던 K님이 말했다.
"저도 이 길 떠나올 때 마누라랑 싸우고 왔는데, 조금 전에 일기를 쓰다가 갑자기 마누라 생각이 나면서 울컥해지더라고요."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인야야 혼자 사는 몸이라 아내 생각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충분히 그럴 법했다.
K님은 주변 경치가 아름답다며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녔고, 인야는 여전히 모든 게 귀찮고 허무해... 그대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