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북경친구로 부터 골프초대를 받았다.
북경에 있는 몇 안되는 시내에 위치한 골프장인데, 남들에게 보여줄게 많은 분들이 비싼 돈을 주고 시내 골프장 회원권을 살 수 있을테니 얼마나 으리으리할까 기대를 하고 갔는데, 클럽하우스에는 골동품 피아노 한 대가 전시되어 있을뿐 대체로 소박하고 차분한 분위기였으며 식당 음식도 가정식 수수한 식단이어서 곧 마음이 편안해 졌다.
식당에서 주문을 마치고나자 내친구 '지앙'이 오늘 다른 친구 두 명을 불렀다고 말한다. 지앙은 영어가 서툴고 나는 중국어가 부족한 터라 홍콩, 난징 등에서 그를 만날때마다 언어가 편한 친구들과 섞여서 만났으므로 이번에도 역시 영어가 되는 중국인들일거라 생각했는데, 고작 일년 공부한 내 중국어 실력을 놈이 과대평가 했는지 이번에 초대한 친구들은 토종 중국어만 쓰는 분들이었다. 처음 도착한 친구는 왕머시기라고 자기를 소개했고 곧이어 도착한 이는 슌머시기라 하는데 지앙이 왕종, 슌종이라고 부르면 된다고 하니, 놈들도 지앙처럼 사업깨나 하는 놈들인듯하다. (중국말로 누구누구선생하면 시엔셩, 누구누구사장하면 종, 교수/직업선생은 라오슈 자를 끝에 붙인다.) 지앙은 한국사람 찐(김)라오슈라고 나를 소개하고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유유상종이라던가, 지앙은 별로 말을 많이 안하는 친구인데, 그 두사람들도 대체로 말수가 적고 제법 점잖아 보인다.
필드에 나가서도 가끔씩 조용한 목소리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가벼운 얘기를 하는둥, 이곳 코스가 처음인 나를 배려해주는 마음을 느낄수 있어서 쉽게 골프에 집중할수 있었다.
왕종과 슌종은 지앙과 다르게 북방인 특유의 건장한 신체조건을 갖고 있는데 골프 스윙은 매우 간결하다.
첫 홀 티업, 왕종이 거침없이 먼저 티샷을 한다,, 페어웨이에 안착. 곧 슌종의 티샷,, 우측으로 슬라이스. 지앙의 샷은 정타가 안되어 멀리가지 못했고, 드디어 내 차례. 흐음,, 놈들의 첫 티샷을 보니 실력들이 크게 겁먹을 정도는 아닌듯,, 지앙이 나보다는 다섯타 정도 잘치기는 하지만 그동안 나도 연습을 많이 했으니 이번엔 녀석을 이겨봐야지,, 티를 꽂고 공을 올려 놓은후 심호흡을하고 조용히 연습스윙을 한차례 해본다. 백스윙 탑에서 팔이 쭈욱 펴지고 오른쪽 다리의 힘줄이 무쇠처럼 당겨지며 다운스윙에서는 골반회전이 유연한게 클럽헤드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매끄럽다. 이 느낌 그대로,, 셋업을 하고 숨을 고른후 드디어 힘차게 티샷을 했다. 윙~ 빠악~ 클럽헤드가 공을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공이 창공을 가른다. 푸른 가을하늘 높이 날아가는 공을 내시선이 쫒는다. ,, 어어어,, 저쪽으로 가면 안되는데,, 안돼, 안돼,, 뒤에서 영어를 못할게 확실한 캐디가 또렷한 영어발음으로 말한다,, "OB!!"
이런 젠장,, 첫티샷에서 기선을 제압해야하는데 오히려 스타일을 구겼네,,
그런데 갑자기 슌종이 말한다. 자아,, 연습타를 하나씩 쳤으니 그럼 지금부터 진짜로 시작합니다 하면서 티박스로 다시 올라간다. 이건 필시 나를 배려하는 것이렸다. 첫티샷 오비로 김빠졌던 마음이 갑자기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기분좋게 시작한 라운딩은 18홀 내내 편안하고 즐겁게 마칠수 있었다. 평탄한 지형에 만들어진 코스이기는 하지만 평균거리가 사백야드나 되는데다가 이곳 저곳에 모래벙커와 워터헤저드를 배치해 놓아 결코 쉬운 코스라고 할수는 없고 특히 그린이 상당히 까다로워 쓰리퍼팅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어서 긴장감을 계속 유지한채 골프의 재미를 만끽할수 있었다.
새로운 친구들은 싱글핸디캐퍼들이었다. 홀이 지날수록 그들의 스윙은 안정되어 갔고 퍼팅이 정교해졌다. 나도 집중할수 밖에 없었고 덕분에 내 평소실력 이상의 스코어를 만들수 있었다.
만추의 오후, 트럼프 방중 덕분에 북경시내 공기는 유난히 깨끗하고^^, 쌀쌀하다 느낄 정도로 차갑지만 가을 햇살이 다사롭고 넓게 펼쳐져서 필드 저멀리까지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하였다.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18홀이 다 지나가고 클럽하우스에 돌아와 샤워를 하기 전에 중국차를 끓여주는 부스에 앉아 중국윈난 홍차를 마시며 라운딩 복기를 한다. 여전히 놈들의 대화는 점잖다. 당신의 몇번 홀 티샷은 그림 같았어,, 당신의 몇번 홀 퍼팅이야말로 프로들도 하기 어려운 샷이지,, 찐라오슈 당신 스윙을 보면 마치 스물다섯 청년처럼 유연하더군요,, ㅎㅎㅎ 내 골프스윙이 그렇지 않다는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안좋을 방법이 없다. 나도 짐짓 점잖은체 대꾸를한다. 점잖으신 분이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시는군요,,허허허,, 암튼 좋게 보아주시니 고마운 마음으로 제가 저녁을 사지요. 놈들이 손사래를 친다. 북경에 손님으로 오신 분이 북경인들에게 저녁을 사신다고 하니 찐라오슈께서는 우리를 너무 모욕하시는거 아니냐며 웃는다. 지앙이 자리를 마무리한다. 오늘 저녁식당을 제가 이미 예약해두었으니 어서 샤워를 하시고 저녁먹으러 가시지요.
식당은 골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동라이슌"동래순"이라는 이름의 훠궈전문점으로 솨양로우-양고기를 끓는 물에 스치듯 살짝 익혀먿는다는 뜻- 요리가 특히 유명하단다. 육십년쯤 된 식당답게 내부는 세월의 두께를 가늠할수 있을 만큼 낡았지만 종업원들의 수더분한 모습과 손님들을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이 편안하다.
슌종이 양고기, 거위고기 및 각종 야채 등등을 주문하고, 갖고 온 가방을 열어 술 한병을 소중하게 꺼낸다.
흔히 보는 우량예 육각 크리스탈 케이스에 병이 넣어져 있는데 술 색깔이 노르스름하다. 무슨 술이지,,? 옆에 앉은 지앙도 궁금한지 술병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내게로 건넨다. 병은 틀림없는 우량예인데 상표에는 우량예 마카주라고 씌여있다. 한번도 본적이 없다. 슌종이 설명한다. 우량예 백주회사에서 장난삼아 만들어 본 특주라는데,, 윈난지방에서 자라는 마카라는 이름의 식물을 함께 넣어 만든 백주란다. 천연미네랄 우짜고 남성정력이 우짜고,, 어쨌든 첫잔을 들고 냄새를 맡아보니 예의 백주의 짙은 향기가 반갑다.
술에는 격식이 있다. 좋은 친구를 만날때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것처럼 술도 예의를 갖추어 마셔야 한다. 술은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이 있는 이들이게만 스스로의 맛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뚜껑을 열면 오랜시간 병속에 감추어 두었던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나온다. 노련한 주객이라면 그 향기만으로도 대번에 년의 성격을 파악한다. 하지만 아직은 년을 함부로 평가할게 아니다. 콧등만 간지럽히고 제대로 맛이 익지 않은 것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술이나 사람이나 설익은 것들은 상대하기가 여간 고역스럽지 않은것이다. 우량예 마카주의 냄새가 나쁘지 않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잔을 입에 살포시 대어본다. 강렬한 첫울림이 온다. 영혼을 울리는 강하고 짜릿한 첫키스의 추억이다. 혀끝에서의 울림이 혀 뒤로 흐르더니 목뒤로 그 꼬리를 감춘다. 혹시나 걱정했던 마카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고 우량예 고유의 부드러운 목넘김과 달달한 뒷맛이 여간 맛이 좋은게 아니다. 눈을 뜨자 슌종이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고 덩달아 다른 친구들도 내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신중하자. 다시 한번 눈을 감고 미세하게 고개를 앞뒤로 끄덕인다. 그리고 눈을 뜨고 천천히 말한다. 나쁘지 않군,,, 슌종의 얼굴이 환해진다.
원형탁자 가운데로 구리로 만든 훠궈냄비가 놓이고 그 가운데에 역시 구리로 된 고깔을 씌워 놓는다. 고깔 꼭대기에 공기구멍이 있어서 그리로 불의 세기를 조절한다. 걸쭉한 장소스가 담긴 종지가 각자 앞에 놓여지고 샹차이와 다진 쪽파가 놓여진 접시에서 적당히 각자의 종지에 담아서 소스를 만든다. 이것저것 잔뜩 집어넣는 사천식 훠궈의 소스와는 확실히 다르다.
역시 친구들끼리 먹는 훠궈는 편하다. 일반적으로 샤부샤부 먹을때 처럼 각자가 한점씩 집어서 탕속에 담그는 국자모양의 도구에 넣어 익혀서 제 접시에 가져와 따로 제 입에 들어가는 젓갈로 바꿔 집어서 먹는, 그런 잡다하고 귀찮은 행위를 일체 무시하고 고기 한 접시를 한꺼번에 탕속에 투하하고 잠시 기다려 내것네것 할것없이 편하게 건져서 먹는다. 살짝 익은 양고기 한점을 소스에 찍어 입안에 넣는다. 고소한 기름기가 입안을 빠르게 뒤덮고 짭졸고소한 소스가 혀를 자극한다. 고기를 씹어본다. 부드럽게 씹히는 고기에서 무언가 마구 새어나온다. 뭐지,, 아,, 고소함이다.
다른 반찬들은 별로 필요없을 정도로 양고기만 먹어도 엄청나게 맛있다. 네명이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보니 양고기 세접시와 거위고기 한접시가 금새 비워졌다. 고기 좀 더할까,, 배가 부르긴한데 술이 아직 남았으니,, 그럼 거위고기로 하지, 양고기는 열이 너무 많으니,, 새로 가져온 고기를 탕에 넣고 잔에 남은 술을 들어 건배를 했다. 마지막 술이었다. 어라,, 안주가 더 나올텐데 술이 떨어졌네,, 네명 모두 서로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껄껄웃는다, 슌종이 북경 얼콰토우 큰병 하나를 주문한다. 잔에 한잔씩 따르더니 마개를 닫는다. 찐라오슈, 남은 병은 집에 가져가시지요. 뭐시라,, 흥,, 어림도 없는 소리,, 내가 살짝 깔보는 어조로 말한다. 여보 슌종, 술병을 비우는 방법은 익숙한데 남겨서 가져가는 방법은 애시당초 내가 모르는지라 비우고 갈수밖에 없지 않겠소이까,, 옆에서 왕종이 껄껄 웃으며 슌종이 내게 술마시는걸 더 배워야 할거라 말하며 웃는다. 밤은 깊어가고 술도 깊어가고 새 친구들과의 우정도 한치 한치 깊어져간다.
첫댓글 ㅎㅎ 장면 장면의 묘사가 마치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하군요.
성님의 글솜씨는 원래 타고 났지만 이제보니 더욱 유장해지고 화려해 지셨구려. 문단에 등단해도 전혀 손색없을 정도로 거침없이 달리는 필력과 번득이는 재기. ^^
가까운 친구일수록 최선을 다하고 배려하는 그들 대국 사람들의 풍모도 멋스럽게 다가오는군요.
해학과 위트가 곁들인 멋진 글 재밌게 감상했시유~
우~~왕!
소설 속의 한 페이지를 넘기 듯한 착각을 했음다..
기막힌 묘사와 글솜씨에 조정래님의 '정글만리' 속을 휘젓는듯해요..
대단하십니다^^; 쵝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