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밀양광장 (밀양의 문화, 관광, 역사, 지명....) 원문보기 글쓴이: 레나
밀양시 상동면 금산리 금곡마을 <1>
상동면(上東面)
□ 상동면의 지세와 연혁
운문산 줄기가 서남으로 힘차게 뻗어내린 곳에 우뚝하게 되솟은 소천봉을 중심으로 그 북쪽 오지에는 신곡, 매화 두 동리가 자리 잡았고, 남쪽에는 도곡리, 서쪽으로는 고정리 라는 산중 분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소천봉(小天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산자락이 흘러내려 낙하산(落霞山)과 보두산(步斗山)이 우뚝한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그 서편으로는 금산리, 남쪽으로는 가곡리 등 역사 깊은 동리가 자리 잡고 있다.
금산, 가곡 두 마을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 너머에는 동창천과 청도천의 물을 함께 모은 북천수가 남북으로 길에 흘러 이 면의 젓줄이 되어 있다. 응천강(凝川江) [(주) 레나 : 응천강은 밀양강의 옛 이름임, 사행천이 더 발달하면 응천이 됨] 상류에 해당하는 북천수 건너에 자리 잡은 안인리는 옥교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있으며, 그 북쪽에 위치한 옥산리는 험준한 철마산을 배경으로 유천 앞으로 마을이 열려 있다
이 면의 동쪽 경계는 용암봉을 사이에 두고 산내면 용전리와 인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옥교산을 분수령으로 하여 부북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에는 중산(中山), 낙하산(落霞山), 비학산 등의 능선을 경계로 하여 산외면과 이웃해 있고, 북쪽에는 운문산을 사이에 두고 경북 청도군과 도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비록 사방으로 첩첩이 둘러 싸여 있으나 이 지대의 젖줄이라 할 운문천(동창천)과 북천수(밀양강)를 중심으로 그 언저리에는 들마들, 원아래들, 밤갯들, 중섬들, 빈지들, 신안들과 같은 기름진 들판이 군데군데 전개되어 산 좋고 물이 맑아, 인심 좋은 고장으로 평판이 높은 곳이다
상동면이란 이름은 조선 초기 밀양도호부 시대 이래 줄곧 변함없이 사용되어 온 것으로 그 위치가 북동쪽(상동)이라 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는 부의 정동쪽을 중동면으로, 남동쪽을 하동면으로 이름지은 것과 대비가 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1884년(고종 21년) 행정 구역 정비 시에도 그대로 상동면이라 했으며, 면사무소를 고답리에 두었는데 1912년에 이르러 사지(사포동)를 경북 청도군으로 넘겨주는 대신 청도군에 속했던 대율포(용운동)를 편입하여 행정 구역을 재편하였다. 1930년에는 면사무소를 고답에서 옥산리로 옮겨왔으며, 해방후 1948년에는 다시 금산리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밀주구지에 나타나 있는 상동면의 방리를 보면 평능리, 가곡, 신원, 구칠, 금곡, 유천, 분항, 고답, 사지, 오곡 등의 지명이 있는데, 이는 대체로 지금 이 면에 소속된 마을이며, 그 후 청도군과의 경계 조정시 일부 마을이 넘어가고 편입되는 과정을 거쳤다.
또 상동면은 이미 오랜 옛날부터 운문천을 사이에 두고 경북과의 도계를 이루어 온 만큼 그 지리와 역사상의 특수한 유적과 고담도 많은 곳이다. 고대 이서국의 접경지로서 마전암에 얽힌 고사를 비롯하여 평능부곡지, 철마산성지, 경락암, 밀암, 박연정이 있는가 하면, 삼남대로에 이르는 유일한 교통 요충지로서 금곡원, 신원, 분항봉수대, 유천관, 같은 교통 통신의 유적지도 있다. 현재 면내에는 8개의 법정리와 31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1. 금산리(金山里)
분항을 등에 지고 전면에 북천수와 탁 트인 넓은 들을 바라 볼 수 있는 마을이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 종래의 금곡, 유산, 평능, 평호를 합쳐서 금산리 라는 법정리를 이루었는데 평능부곡의 예터라고 한다. 동으로는 고정리, 서로는 북천수,를 사이에 두고, 안인리와 인접했으며, 남으로는 가곡리, 북으로는 운문천을 사이에 두고 경북 청도군과 도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앞으로 25번 국도가 강을 끼고 남북으로 달리고 있는데 현재 금호(상동면사무소 소재지), 금곡, 유산, 평능 등 네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1) 금호(금호, 평호, 어목진 魚目津)
종래의 금곡의 일부와 평호를 합친 마을이라 하며, 금산리의 본동이다. 또 이 곳은 어목이라는 지명도 있는데, 그 것은 마을 앞 여울물에 뛰노는 비늘이 고기눈처럼 반짝거린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 하며, 그 나루터를 어목진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어목진나루터
금호 마을 뒤편에 있는 어목산 북쪽 절벽 밑에 동창천과 청도천의 물이 합쳐지는 곳이다. 이곳에는 깊은 소를 이루어 물도 깊은데 어목소라 한다. 옥산리를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또 나루터 옆에는 물방앗간도 있었는데 나루터와 함께 사라지고 지금은 다만 철교의 교각만 남아 있다. 2010년 현재는 경부선 개량사업으로 교각도 없어지고 철도 교량이 새로이 건설되었다
어목들
마을앞 철도 건너에 있는 들판의 이름인데 지금은 마을 이름이 어목에서 금호로 바뀐 것과 같이 철둑너머들로 통용되고 있다
분통
어목산 중턱에 층석이 있는 골짜기를 가리키는데 먼 옛날 건너편 옥교봉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이 놀다가 이 곳 물이 하도 좋기로 사뿐히 날아와 세수를 하고 분단장을 한 곳이라 하여 분통골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이 곳에는 물이 분에 탄 것 같이 뿌옇다는 말도 있다
명당자리
언제부터인가 금호동에는 명당자리가 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맨 처음 국민학교가 들어서자 그 자리가 그 자리가 명당이라 하였고, 그 후 유천역사가 세워지자 또 그 자리라 했으며, 면사무소.농협 등이 들어설 때마다 각각 명당이라 하였다. 그래서 현재 에는 동네의 번창한 모습을 보고 금호동 전체가 명지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2) 금곡(상금동)
금호동 남쪽 분항산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인데 응천강 상류를 끼고 넓은 들판 내려다 보는 곳이다. 상금동이란 다른 이름도 있으나 이는 금산리 뒤쪽 마을이라는 뜻이다. 금곡이란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마을 뒤 골짜기에서 쇠를 녹인 듯한 쇠찌끼가 발견되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며, 지금도 산비탈을 개간할 때는 쇠가 나온다고 한다. 쇳골이라는 지명을 아직도 부르고 있다
한말에는 한홍유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들아와 터전을 잡았는데 그는 당시 동민들이 주색잡기로 마을이 황폐해지는 것을 개탄하고 식산계를 조직하여 자립 자조 운동을 일으켜 마을을 구제하였다
탐복산(분항산)
유산과 금곡의 경계 지점에 있는 직은 산 이름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분항산으로 표기했는데 봉수대가 있어 남으로 추화산 봉수대, 북으로 청도 남산 봉수대와 서로 응보했다고 하였다. 탐복산에 대한 지명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밀주지 등에는 분항산(盆項山) 외에 분항산(粉項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산꼭대기에는 평평한 지점이 있어 봉수대의 유적이 있으며, 북쪽 기슭에는 약물샘도 있어 피부병에 좋다고 좋다고 한다
새나무등
재말리에서 분통(粉筒)골로 가는 등성이를 가르키는데 새나무에 대한 지명 유래는 일 수가 없다
뒷갓(후림)
금곡 마을 뒷산에 있는 나무숲을 이른다
재말리(嶺遠里)
금곡 북쪽의 금호와의 사이에 있는 고개 이름인데 재(嶺)는 넘는 길이 멀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고개말리(영촌리)
금곡에서 금호로 넘어가는 길 옆에 수령 200년의 우산 모양을 한 포구나무가 서 있다. 그 아래에 연자방아껄을 기리켜 고개말리라 했다. 고개밑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지금은 지형이 바뀌어 그 유래를 알 수가 없다
내방우골(내방곡)
금곡 마을 뒤를 감싸고 있는 골짜기의 이름을 마치 안반과 같이 안온한 골짜기라 하여 붙인 지명이라 한다
골안거렁(내곡계)
금곡 마을 뒷산에 흘러내리는 개천 이름이다. 쇠꼴거렁(금곡구)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는데, 거렁이란 말은 도랑 또는 개천의 이 지방 사투리이다
효열각껄(효자각가)
금곡 마을 앞 들 가운데 있으며 효열각이 있는 땀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주인공은 1900년경 이 마을에서 살았던 순청박씨 태동의 부인으로서 벽진이씨이다. 그 남편이 18세에 죽으니 함께 순사하려 했으나 늙은 시부모도 별세한 지라 하는 수 없이 대를 이을 양자를 정한 다음 드디어 남편이 있는 저승으로 가기 위해 헛간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 순절을 갸륵하게 여겼고, 1907년 당국에서 그 효를 표창하여 정려를 내림에 집을 세웠다
(3) 유산(酉山, 酉方, 柳坊, 留芳)
금곡의 동쪽 평능 마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본래는 유방(酉方)이었다가 조선 말기 행정 구역 조정하면서 평능의 아래땀인 평호를 합쳐 유산(酉山)이라 했다. 유방(酉方)은 십이지로 보아 서쪽에 해당하는 방위로 조선 말기에 평능의 동세가 번창했을 때 평능의 서쪽이라는 다소 앝잡아 본 뜻에서 동네이름을 붙인 것이라 하며, 그 후 유방(柳坊) 또는 유방(留芳)이라 표기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에 밀성박씨의 한 파가 이 마을에 정착한 후 지금까지 세거지가 되었고, 한성부 우윤 박선승을 추모하기 이하여 세운 송강정과 문중 강학소인 동화정을 보존하고 있다. 또 조선 숙동 때 광주안씨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복거(卜居)했으며, 안구원의 ?모정과 안균원의 도남대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그 후 순천 박씨와 김해 김씨. 기계 유씨(兪氏)가 이 곳에 이거 했으며, 여주이씨도 이중구가 호산정사를 지어 이 마을을 세거지로 삼았다
바랑골산(冠冒山, 풍곡산)
금산리의 여러 산 가운데 종산이라고 할 만큼 큰 산인데 일명 바람골산이라고도 한다. 바람골은 동남풍이 일어나는 골짜기를 뜻하며 관모는 이 산에 탕건바위가 있는 것으로 보아 풍수지리레 의한 관모 형상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라 한다
꽃밭등(화전등)
유산 마을 왼쪽에 있으므로 이 마을 사람들은 청룡등이라고도 하는데 위평능과 아래평능의 중간지점에 있다. 봄철에 진달래꽃이 유난히 많이 핀디고 붙여진 이름이다
영장등(영장등, 평능등)
평릉의 본래 마을 뒷산의 등성이 지명인데 영장(營將)의 무덤이 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조선 숙종 때 순천 영장을 지낸 참헌(參軒) 이만전으로 이 곳은 여주이씨의선산이다. 또 이 산등성이에는 사각형의 고분이 몇기 있지만 시대를 알 수가 없다. 평능등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갈뫼등(갓모산)
관모산 북쪽의 봉우리를 가르키는데 갈모처럼 뾰족하게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양달산
금산리에서 가장 큰 산인데 동리 한가운데 양지바른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콩바탕
양달산에 있는 등성이 이름인데 마을 초동들이 산에 오르내리면서 공놀이를 하던 장소이다. 어원은 공놀이 바탕(유구장)에서 온 듯 한데 어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공바탕이 어느새 콩바탕으로 은어화(隱語化) 했다는 것이다
밤나무등(율림등)
양달산 아래쪽에 있는 지명인데 옛날에는 밤나무가 무성했다
안산
유산 마을 밤나무등 뒤에 있는 산으로 마을 맞은 편에 있다 하여 안산이라 한 것이다
매봉산(응봉산 鷹峰山)
양달산 맨 윗봉우리를 가리켜 부르는 이름이다. 속칭 매봉지라고도 한다. 어느 술사가 관모산에서 쇠(나침반)을 놓고 지리를 살피면서 매봉산을 뭉게야 한다는 마을 펴뜨렸다고 한다. 매의 형상을 한 산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독뫼(독산)
유산의 안골인 마을 앞에 두 독뫼가 있는데 작은 독뫼(안 독뫼), 큰 독뫼(바깥 독뫼)라고 불려지고 있다
신덕산
신덕 마을 뒤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옛날 이 산에는 신덕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 자취는 찾을 수 없다. 이 곳 골짜기를 신덕안이라고도 한다
무등
유방 마을 중간에 있는 뒤편 등대인데 옛날 마을 앞의 학의 늪(학포소)에 서식하던 학들이 이 등대배기의 낙낙장송 사리를 날아다니며 춤을 추었다는 데서 생긴 지명이다
층임상(층암산)
유방 안골에 있다. 바위들이 포개어져 있는 산이라 하묘, 1900년 전후에 이 근방에서 경부선 철도공사를 할 때 이 산의 석재를 캐어 가고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어 옛 모습이 없어졌다
성만당(城場)
층암산 평평한 등성이를 성마당이라 하는데 성마당(城場)에서 온 말인 것 같다
꿀듬뫼
층암산 북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옛날에 이 산의 바위층듬 사이에 꿀벌집이 많았다 하여 생긴 지명이며, 산꼭대기에는 국토측량의 표석인 삼각점 표시 석주가 있다
한밭등
봉수대가 있는 분항산에는 한밭등, 불선등과 같은 세등성이가 나란히 있는데 가운데 등성이를 한밭등이라 한다. 세 등성이 중에서 가장 중심이고 큰 등대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목잘래기(항교목)
분항산 산등성이의 잘록한 부분의 지명이다. 산의 목이 잘렸다는 뜻으로 목잘래기라는 이름이 통용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곳 산의 정기가 왕성함을 보고 그 정기를 눌러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이 산의 맥을 잘라버린 곳이 목잘래기라는 말이 전해지고 잇다. 지금도 맥을 자르기 위해 흙을 파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불선등(火立嶝)
분항산 등성이의 하나로 불선등이라 하는데 봉홧불을 올리는 등성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라 한다. 또 마을의 뒤쪽에 있다 하여 뒷뫼(후산)라고도 한다
매롱샘
분항산 불선등 중턱에 있는 샘의 이름이다. 여름에 매미가 성하게 울면 샘물이 풍성해 진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또 이 샘에서 치성을 드리면 소원 성취한다는 말이 전해져 촛불을 켜는 풍습 때문에 불을 켠 등이라 하여 불선등이라 한다는 것이다
말발등(마목장)
유산 마을 앞에 있는 구릉지의 지명인데 옛날 이 곳에서 말을 방목했기에 생긴 이름이다. 근처에 금곡원과 유천관이 있어 역마가 많았다
대밭골(죽전곡)
유산과 평호 사이에 있는 지명으로 옛날에 대밭이 무성하였다 하여 생긴 이름인데 지금도 들머리에 대밭이 조금 남아 있다
가매바위(교암)
대밭골 골짜기 중간 지점에 있는 조그마한 바위를 가르킨다. 옛날에 가마가 지나가면서 쉬어가던 바위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활바우골(궁암곡, 봉오골)
분항산 봉수대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봉홧불을 올리는 봉우리 아래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배실(이곡)
신덕으로 가는 산 중턱에 있는 골짜기인데 옛날에 큰 배가 많았다 한다
봉우재(봉화치, 봉오재)
유방 뒤의 봉화산(분항산) 고대를 가르키는 지명이다
큰고개(대현, 장고개)
신덕마을 동쪽에 있는 고개 이름으로 옛날에 산 안에 사는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이다. 이 곳 산 안 사람들이 밀양 시장에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 유방 앞 나루를 건너가야 하는 것이 순로인데 유방 앞 나루가 없어진 뒤부터 평호 마을 뒷산 고개로 왕래하였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 길 고개라 하여 큰고개 또는 장고개라고 했다. 이 고개는 상동면 고정리 쪽에서 유산마을로 넘나드는 고개를 말한다
앞고개(전현)
일명 신덕 고개라고도 한다. 신덕 마을 앞 산등성이에 있다고 해서 앞고개이다. 옛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산의 정기를 없애기 위하여 혈을 잘랐다고 전해 오는 곳이다
믹서리듬
지장암 뒤쪽의 직은 층암 절벽을 말하는데 그 형상이 미거리를 포개 놓은 것 같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미거리란 볏짚으로 만든 알곡 용기인데 믹서리는 그 전음이라 할수 있다. 옛날에는 여러 가지 산새들이 서식했으나 지금은 없고 근처에는 옛 기왓장 조각이 출토되고 있어 주거지임을 짐작하게 한다
송강(송연강)
평능 앞을 흐르는 하천의 다른 이름으로 송연강이라 하였고, 흔히 송강으로 불리었다
유방거렁(유방계)
유방 뒷산에서 흐르는 골짜기의 물이 모여서 마을 한가운데를 지니가는 시냇물의 이름이다
평호천
신덕마을 안 골짜기에서 활바위골을 흐르는 물과 양달산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이 합쳐져서 평호마을을 지나가는 시내의 이름이다
대밭거렁(죽곡계)
관모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대밭골 계곡을 거쳐 훌러가는 작은 시내의 이름이다
학의 늪(일명 학포소, 하그낙)
옛날 마을 앞 밤갯들 아래 끝에 튼 늪이 있었다. 이 늪에 많은 학이 서식하여 뒷산 노송에 둥지를 틀고 한가로이 날아다니면서 그 곳의 풍치를 돋고었다. 지금 그 늪은 모두 전답으로 변하였고, 학도 간 곳이 없어졌지만 학의 늪, 학은앞의 지명은 그대로 남아 있다
밤갯들(율포평, 북림평, 방개들)
옛날 유산 마을 앞에는 넓은 개(포 浦)가 있었고, 밤나무를 심어 관율수픙로 지정이 되었다. 부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림으로 불리운 이 지정 밤나무 숲에서는 매년 관수용으로 밤을 상납하였다. 밤나무 숲이 있는 갯가라 하여 율포가 되었고, 밤갯들이라 한 것이다
정자나뭇걸(정자목가)
밤갯들 한가운데 있는 수령 200년이 넘는 냇버들(일명 조선 버들) 나무가 서 있었다. 이 나무는 그 그늘로 하여 정자나무 구실을 하면서 농꾼들의 휴식처가 되엇고, 당목으로 동민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 나무 높이 16m 나무 밑둥의 둘레가 4m나 되는 큰 나무이다.
갓골(임곡, 신덕사지)
신덕마을 뒷산에 있는 산간 분지를 가르키는 지명인데, 나무가 우거진 곳이라 하여 갓골이라 한다. 옛날 이 곳에 신덕사라는 절이 잇었다 하여 지명을 신덕이라 하였다. 현재 절터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산 속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수도원이 들어서 있다
선지비알(현지)
금산리 공동묘지 밑에 있는 비탈진 곳을 가르킨다. 옛날 금곡 망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이 곳에 있어 고개 마을 이었는데 현지로 표기했다. 선지는 이 현지의 변음으로 곧 비탈진 고개 마을이라는 뜻이다
(4) 평릉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평능부곡의 옛 마을이다. 부곡이라는 말은 향.소와 함께 대체적으로 신라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특수한 지방의 하부 행정 구역이라는 해석을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평릉부곡도 중세 시대 이래 이 곳에 특수한 행정 구획의 하나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지명으로 보아 현재의 평릉 마을을 중심한 유방과 평호 마을 일대가 아닌가 여겨진다
본래의 평릉리는 서쪽에 있는 평호와 유방 일부를 포함하여 이를 다시 상평릉과 하평릉으로 구분했으나, 단위 마을을 이루었다
조선 초기에 군수 김시보, 진사 김시필 형제가 이 마을에 정거한 후 대대로 수원 김씨가 살았고, 나주 丁씨도 이 곳에서 세거하였다. 그 후 약 250년전에는 밀양 손씨가 입촌하여 살고 있으며 약 150년 전부터는 밀성 박씨와 광주안씨가 잇따라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경암 안효천을 추모하기 위하여 송연정이 있다
돌굿산(일명 음달산 音達山, 돌구산)
마을 남쪽에 우뚝 솟아 있는 산 이름이며 그 능선이 가곡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일명 음달산이라고도 하는데 삼베를 짜기 위한 실을 감아두는 돌굿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옛날부터 돌굿에 감아 놓은 것 같은 실을 건너편에 있는 물방앗간으로 내리게 하는 모양과 같다 하여 이 방앗간에 많은 곡식이 드나들 것이라는 전설이 있어 왔다. 돌구산이라고도 했다
빈대말리
낙화듬의 북쪽과 성지골 사이에 있는 산봉우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빈대말리에 대한 지명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산 중간 지점에는 약물샘이 있어 유명하다
망좌봉(望坐峰)
소뫼골(小山) 앞에 우뚝 솟은 봉우리인데 마치 무슨 물체가 앉은 채로 고개를 쑥 내밀고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정자등
치살 북쪽에 있는 등성이로 소나무 정자가 있다고 하여 정자등이라고 한다
장고개(場嶺)
상동면 산(山) 안의 마을인 고정, 도곡, 신곡, 매화리의 주민들이 밀양 시장으로 내왕하는 고개라 하여 장고개이다. 도로가 나기 전에는 이 고갯길이 유일한 교통 요지였다고 한다
질매치(안령 鞍嶺, 질매재)
평릉 마을 뒤쪽으로 장고개 못 미쳐 동쪽으로 올라가면 산 안쪽으로 내왕하는 고갯마루가 있다. 고갯마루의 모양이 마치 짐을 싣기 위하여 소등에 올리는 길마(안 鞍)과 같이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질매는 길마의 이곳 사투리이다
막당골(幕堂谷)
평릉마을 북쪽 가마소 등성이 너머 몇집 인가가 있는 땀의 이름이다. 지난날 평릉 본마을에서 걱정거리가 생겼을 때 마을과 동떨어진 이곳에 움막을 짓고 살던 골짜기라 한다
성지골(性智谷)
빈대말리 북쪽에 있는 널찍한 골짜기를 가리키는데 소뫼골과 인접해 있다. 조선 때 풍수지리를 잘 본 지사 성지가 이 곳에 살았으므로 이름이 생겼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네 개의 큰 바위를 사람들이 일부러 세워 놓은 것처럼 서 있다는 곳이다
절터골(寺墟谷, 절골)
평릉마을 뒤쪽 소뫼골 북쪽의 산꼭대기에 약 3000평 가량의 오목한 분지가 있는데 옛날 절터라고 한다. 절 이름과 내력은 알 수가 없다
돌방껄
평릉 마을 북쪽에 있는 강 가에 막당골거렁 끝 부분 지점에는 지난 날 밤나무 숲이 있었고, 그 숲속에 돌방앗간이 있었다. 돌방아란 연지방아의 사투리이고 껄은 길거리의 이 지방 사투리이다
서나무징이(소나무정자)
평릉 마을 뒤쪽에서 장고개로 가는 길 옆 묘지에 높이 한 길쯤 되는 바위가 하나 있는데 마침 큰 정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그 그늘이 짙어 초동들의 휴식처가 되어 있다. 소나무 정자라는 뜻에서 서나무징이 이름이 생겼다
움풍징이
뫼마리 고개를 조금 지나서 골구산 동쪽에 움푹진 비탈이 있는데 움푹 파여진 땅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돈구딩이(일명 곤구덕, 공구덕)
평릉 마을 뒷골짜기 안쪽에 있는 골안거렁 옆에 옛날 나무꾼들이 모여서 새끼공을 만들어 치고 놀던 평평한 광장을 가르킨다. 공치기 놀이를 하던 곳이라 하여 공구덕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또 이 곳에서는 조통들이 돈치기 놀이도 했다. 돈치기를 하던 곳이라 하여 돈구덕 또는 돈구딩이라고 했다
불선방우
선지비알 북쪽에 있는 바위인데 소원성취를 비는 곳이다. 주로 섣달 그믐날 밤에 행하던 풍습이었으나 요즘은 사라졌다
마당방우(場岩)
절터골 복쪽 높은 등성이에 있는 바위인데 소 먹이는 아이들이 소뿔에 줄을 감아 방목한 후 이 바위에 모여 앉아 꼰도 두고 밤돌 줍기 놀이도 하던 곳이다
탕건바위
평릉마을 뒤 절터골 북쪽 마당바위 아래에 잇는 바위이다. 탕건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바위가 마을에 보이면 화액이 생겼다 하여 마을 쪽에 나무를 심어 길렀는데 이 나무숲을 치살숲(治殺숲)이라 했다. 곧 살기를 다스리는 숲이라는 뜻이다
안거렁
절터골과 성지골에서 흘러 내리는 물이 합쳐진 시내를 가르키는 것으로 음달산 앞을 흐른다. 일명 큰거렁이라고도 한다. 큰 가뭄이 없으면 일년 내내 물이 있기 때문에 마을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사용되었다
종골대이(종곡대, 종골댕이)
골안거렁의 끝이고 길 남단으로 가는 모퉁이에 있었다. 층암 위에 다시 돌을 쌓아 둘레에는 소나무를 심어 만든 조망대였다. 10여명이 함께 놀 수 있는 곳으로 대 아래에는 골안거렁과 길 남단소의 물이 합쳐진 못이 있다. 소나무 그늘도 우거져 여름에는 피서하기 좋은 곳이었는데 25번 국도에 편입되어 지금은 자취가 없어졌다
경암대(耕岩臺)
길 남단 沼 위쪽의 암벽을 깎아 만든 대라고 해서 경암이다. 한말에 이 마을에 거주한 안효천이 대 앞에 백일홍을 심어 식목을 가꾸고 휴식처로 삼았으나 국도에 편입됭너 자취가 없어졌다
길남단소(기남당, 지남당)
평릉 마을 남쪽 끝에 가곡리와 경계를 이룬 지점에 있었다. 길 남쪽 끝에 있는 못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응천강 상류의 물이 이 곳 바위에 부딪히면서 생긴 자연의 소택이다. 깊은 소택 한가운데 대문 형상으로 생긴 바위가 잠겨 있어 대문바위라 하였다. 길남단이 기남단 또는 지남당으로 음이 변하였다
가마소와 가마소등
평늘마을 부곡 막당골 사이에 있었는데 소의 모양이 가마솥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소 위에 있는 산등성이를 가마소등이라 하는데 지금은 소가 메워지고 등성이만 남아 있다
중섬보
평릉 마을 북쪽 응천강 상류를 가로 질러 만든 보인데 중섬ㄴ들의 물을 대기 위한 수리 시설이다
평능다리
평릉 마을 앞에 설치한 다리였는데 산 안 4개 리 7개마을과 유산 평릉 등지의 응천강 동쪽 주민들이 밀양 시장 나들이를 위한 다리이자 또 강 건너 들에 농사짓는 사람들의 농로를 겸한 내왕의 교량이기도 했다
다리의 구조는 수숫대 얼개 속에 돌을 넣어 채운 교각을 여러 개 세우고 그 위에 통나무 땟목을 걸쳐 잔솔가지를 두툼하게 깔아 흙을 덮어 만든 상판으로 이루어진 재래식 교량이다. 이 다리는 가을철이 들 때 설치하여 겨울과 봄을 지내고 여름의 우수기에는 유실을 막기 위하여 거두어 두었다가 다음 해 가을에 다시 설치하곤 하엿다. 지금은 그 자리에 콘크리트 잠수교가 새마을 사업으로 이루어져 매년 설치하는 번거러움이 없어졌다
길남단나루(기남단 나루, 지남당 나루, 도남단딘)
평릉 앞길 남단에 있는 경암대에서 강 건너 중도로 가는 나루터가 잇었다. 여기에 이용된 나룻배는 경암대 밑에 있는 바윗돌과 건너편 물방앗간 큰밤나무 사이에 연결한 굵은 밧줄을 통하여 배에 고리를 걸고 밧줄을 당기면서 강의 양안을 왔다갔다 하는 사공 없는 나룻배였다고 한다. 이 나루는 주로 밀양 시장을 내왕하는 사람들과 방앗간에 방아 찧으러 드나드는 사람들이 이용하였다
중섬방앗간(일명 물방껄)
경암대 건너편 중도 수로 옆에 물방앗간이 있었는데 주로 평릉 사람들이 이용하던 곳이다. 지금은 방앗간이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있다
가메솥
평릉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으로 모양이 가마솥처럼 생겼다 하여 생겼다
기와막(와막)
유산 앞에 있는 옛날 기와 굽던 터인데 지금은 땅속에서 기와 조각이 촐토되고 있다
꽃디미(화령)
불선등 북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으로 봄에 진달래꽃이 만발한다 하여 꽃등이라고도 하였다
비암고개(飛岩峴)
평릉에서 가곡리의 비암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유산방개소
유산 북쪽에 있는 소택으로 그 앞에 있는 들을 방갯들이라 했으며, 물을 대는 보를 울림보라 했다
의목모랭이
의목은 금산리의 땀 이름이며 유산에서 금호로 돌아가는 모퉁이를 의목모랭이라 했다. 또 봉오재산(분항산)을 의목산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