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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파리코뮌]
2. 파리의 분노
휴전은 파리 민중에게 실망과 분노를 안겼다. 사실 휴전 교섭은 파리 민중의 눈에 띄지 않게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며칠 전의 22일 사건으로 과격파의 두목들이 체포되고 클럽과 신문들이 억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휴전협정을 반대하려고 해도 앞장설 지도자도 신문도 클럽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휴전은 하나의 기정사실로서 파리 민중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게 되었다. 파리는 휴전에 동의한 일이 없었다. 파리는 이제 분노와 굴욕과 실망과 체념의 눈초리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게 될 터였다.
파리의 임시 국방정부는 비스마르크와 더불어 3주일간의 임시 휴전에 합의하고, 2월 8일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2월 12일에 의회를 보르도에서 소집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이 강베타에게 전해지자 그는 파리 정부로부터 정식 통고를 받기 전에 총선거에서 공화파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나폴레옹 3세 치하의 대신들, 원로원 의원들, 행정재판소의 재판관들, 여당 의원들의 피선거권 박탈을 내무 장관의 이름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파리 정부와 독일의 임시 휴전조약은 자유선거를 약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베타의 포고는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였다. 여기 2월 8일 총선거의 결과가 왕정파에게 유리하게 된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있다. 강베타는 스스로 정부에서 물러났다. 강베타는 끝까지 항전파로서 파브르의 휴전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다. 파브르가 파리 정부를 대표했다면 강베타는 보르도의 3인 정부를 대표했다고 볼 수 있었다. 국방정부 안에서 전자는 평화를 교섭한 화평파 온건파였고 후자는 끝까지 항전파 과격파였다. 이제 이 둘 가운데서 후자가 후퇴함으로써 국방정부는 한결 더 온건한 성격의 것이 되었다.
2월 8일의 총선거는 프랑스 선거 역사상 가장 특이한 선거였다. 그것은 첫째 독일의 침략군이 43개 도를 점령하고 있는 가운데서 실시되었다. 둘째, 그것은 프랑스 선거사상 가장 조급한 선거로서 선고 공고 후 불과 11일 만에 실시되었다. 셋째로 그것은 전쟁의 혼란 속에 지방과의 교통이 거의 끊긴 가운데서 실시되어 지방이 도시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다. 이 둘째와 셋째 조건에 의해 공화주의 정치의식을 지방에 선전할 수 없어 지방 정치의 전통적 성격인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보수적 경향이 선거 결과에 그대로 나타났다. 그리고 넷째로 이 선거는 전쟁을 계속할 것이냐, 적군의 막대한 침략을 받은 그대로 휴전할 것이냐, 즉 끝까지의 항전이냐, 항복 강화냐를 국민에게 묻는 특수한 선거였다. 전쟁이냐 평화 말고는 어떤 정파의 선거 공약도 슬로건도 없었다. 그러므로 국민은 상식적 판단력을 가진 믿음직한 인물들을 대의원으로 뽑았다. 따라서 선거에서 선출된 대의원들은 새 프랑스의 국가 체제나 정치체제에 명백한 의식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상과 같은 특이한 환경과 동기에서 2월 8일에 실시된 선거에는 1849년의 선거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투표하였다. 제2제국의 선거법을 적용하지 않고 1849년의 선거법을 적용한 것은 9월 4일에 선포한 공화정의 합법적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의 표현이었다. 선거의 결과는 앞에서 얘기한 특수한 사정의 영향으로 온건하고 보수적인 평화파가 대거 진출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거의 대부분 왕정의 재현을 바라는 인물들이었다. 총 의석 768석 가운데에서 약 400석이 군주정치를 지지하는 왕정파였고, 순수한 공화파는 150석을 넘지 않았다. 150명 정도의 순수 공화파도 파브르를 지지하는 온건파와 로슈로프를 지지하는 과거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과격파는 20여 명밖에 안 되었다. 이 과격파 의원들은 거의 전부가 파리 출신이었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휴전 자체를 반대해 온 파리 시민에게는 하나의 청천벽력이었다. 지난 9월 4일 선포된 공화국의 운명이 새국민대표들에 의하여 뒤집어질 위험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 꼴을 만들려고 지난 반년간 피투성이 항전을 해야 했으며, 지난 4개월 간 파리의 포위를 추위와 굶주림으로 견뎌내야 했단 말인가! 파리는 한층 더 분노하였다. 더구나 총 의석 768석 중 파리에 할당한 의석이 43석밖에 안 되다니! 일찍이 당통이 말한 바와 같이 파리는 곧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운명은 파리가 결정했다. 이런 파리에 43석밖에 배당하지 않은 것은 보수파의 장난이고 파리에 대한 모욕이며 4개월간의 포위에 대한 평가절하였다. 파리의 43석이 전부 공화파에 돌아가기는 했으나 과격파의 지도자는 몇 명밖에 당선되지 못하였다. 파리 출신 중에서도 들레클뤼즈, 피아(Felox Pyat), 밀리에르(Jean Baptiste Milliere)가 가장 과격하였다. 강베타, 가리발디, 로슈포르, 클레망소, 위고가 덜 과격했는데 이들은 앞으로 올 파리 코뮌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러한 선거결과는 파리 민중에게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들은 보르도 의회를 불신하게 된다.
보르도 의회가 행한 첫 결의는 휴전 찬성이었다. 이것은 너무나 명백히 예견된 일이었다. 그 다음으로 파리 민중의 불만 요인은 티에르를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티에르는 샤를 10세 시대 이래의 노숙한 정치가로서 7월혁명에서는 샤를 10세에 반대하였다. 오를레앙파인 그는 루이 필리프의 장관으로서 대내적으로는 기조의 정적이고 대외적으로는 영국의 파머스턴의 적수였다. 1863년 이래로는 나폴레옹 3세에 반대하는 야당 영수로서 트깋 황제의 외교정책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였고, 독일에 대해서는 강경론자였다. 더구나 그는 1870년 9월 임시 국방정부에 입각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패전과 휴전의 책임에서 해방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1871년 2월 현재에는 정통파까지도 티에르만 한 군주주의자를 달리 발견할 수 없어 그를 새 헌법이 개정될 때까지 우선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추대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2월 27일 보르도 의회는 임시 국방 정부의 사임을 승인하는 동시에 티에르를 프랑스 공화국 행정부반(Chef du Pouvoir Executif de la pepubique Francaise)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파리 민중의 눈에는 티에르는 왕정파이고 항상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반동 정치가로밖에는 비치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1834년 내무 대신으로서 리옹 폭동의 불똥을 파리에 튀게끔 유도하여 트랑스노냉 가의 학살을 감행한 자가 바로 티에르라고 믿고 있었다. 파리 민중은 그를 정부 수반으로 선출한 보르도 의회와 함께 그와 그의 새 정부도 철저히 불신하였다.
티에르에 대한 파리 민중의 불신은 그가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자 분개와 혐오로 폭발하게 된다. 임시정부 수반으로서 티에르의 가장 긴급한 일은 독일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휴전협정에 의한 휴전 기간은 2월 19일로 끝났다. 티에르는 우선 휴전 기간을 24일까지 그 다음에는 26일까지 연장해 가면서 비스마르크와 회담을 진행하였다. 티에르는 파브르보다 훨씬 강한 비스마르크의 상대였다. 회담은 비스마르크의 요구대로 척척 진행되지 않았다. 26일 두 번째로 연장된 휴전 기간이 끝나는 날, 비스마르크는 티에르에게 이 이상 더 휴전을 연기할 수 없고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않는 한 독일군은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공갈을 놓았다. 티에르도 지지 않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전 유럽을 격분하게 할 것이라고 응수하였다. 이날 밤 드디어 평화조약이 조인되었다. 그것은 프랑스에 굴욕적인 것이었다. 알자스 지방 전체와 로렌 지방 대부분을 독일에 할양하고,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되 완전히 지불될 때까지 독일군의 프랑스 주둔을 허락하고, 그리고 독일군이 승리의 상징으로 만 이틀 동안 파리에 진주하는 것을 허용해야 햇다. 파리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티에르는 흐느껴 울었다.
28일 이 평화조약이 인준을 받기 위해 보르도 의회에 보고되었을 때 의회는 경악하였다. 알자스와 로렌의 할양은 평화의 가면 밑에 전쟁을 항구화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티에르가 몇 번이고 비스마르크에게 강조한 것도 그 점이었다. 의회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국에서 평화조약 반대, 심지어 즉각적인 전쟁 재개를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의회는 펴오하조약을 546대 107, 기권 23으로 인준할 수밖에 없었다. 알자스-로렌 출신의 의원들과 파리 출신의 로슈포르, 피아, 강베타 등 여섯 명이 당장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3월 8일에 위고도 의원직을 사임했다. 의회는 이런 과격파의 사임에 만족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파리의 격분을 한층 더 자극하였다.
보르도 의회는 파리의 오랜 생리도, 4개월의 포위와 패전에 실망한 수도의 심리도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고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느 초선 대의원은 “우리 시골 사람들은 파리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지 않고 뭔가 병에 걸려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보르도 의회 대의원들은 그 병이 과연 어떤 병인지 깊이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낡은 껍데기 안에 처박혀서, 세 번이나 공화국을 수립하고 낡은 우상을 때려부순 혁명의 도시 파리를, 낡은 색안경으로 이방시하고 적대시하였다. 그 보르도 의회는 처음부터 사사건건 파리의 상처를 건드리고 바리의 배알을 뒤틀게 하였다.
티에르는 파리 국민 방위대 사령관 토마(Clement Thomas)를 파면하고 도렐 드 팔라단(Louis Jean Baptiste D'Aurelle de Paladines) 장군을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도렐 장군은 본래 보나파르티스트이고 악명 높은 반동 군인이었다. 도렐의 임명은 티에르의 파리 국민 방위대의 힘을 누르려는 의도임이 분명하였다. 도렐이 파리에 부임한 것은 3월 3일이었는데, 파리 방위대의 260개 대대장 중 그의 소집에 응한 자는 30명뿐이었다. 도렐과 그를 임명한 자에 대하여 파리의 감정을 정직하게 표시했던 것이다.
보르도 의회는 첫 회기 막판에 파리 각계 각층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련의 입법을 서둘렀다. 첫째, 소급법을 제정하여 지난 10월 31일 폭동에 참가한 블랑키, 플루랭스 등 네 명을 사형에 처하고, 여섯 개의 좌익 잡지를 폐간시켰다. 그리고 한층 더 드넓은 분노를 일으키기에 알맞은 채무 만기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전쟁 중 지불이 유예되었던 모든 채무를 48시간 이내에 물어야 하고, 그동안 밀린 집세를 전부 집주인에게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난 4개월간 상공업이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져 있었던 파리 주민을 우롱하는 가혹한 법이었다. 또한 동시에 매우 어리석은 법이었다. 왜냐하면 집세를 물어야 하는 파리 주민은 노동자만이 아니라 소상인, 소규모의 공장주, 하급 관리, 기타 봉급 생활자 등의 광범한 소시민층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법을 제정함으로써 소시민층을 무산 노동자와 한패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법은 국민 방위대의 힘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그들에게 지급해 온 일당 1.5프랑의 지급을 정지시켰는데, 이 조처는 보르도 의회의 무모한 실책이었다. 파리 방위대는 스스로를 영웅으로 자처했는데 일당의 지급 정지는 그들의 자존심을 크게 손상시켰다. 그리고 일당 이외에는 달리 생계의 수입이 없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일당의 지급 정지는 채무를 갚거나 집세를 물어야 하는 것보다 더 직접적인 생활의 위협이 되었다. 당시 파리는 휴전과 평화조약과 티에르 정부 반대 시위의 열기 속에서 일종의 반란 상태에 있었는데,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힘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국민 방위대였다. 실제로 치안의 실권을 쥔 자들은 방위대의 대대장들이었다. 국민 방위대의 향배야마롤 정국의 방향을 결정할 열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보르도 의회는 그들의 자존심과 생활권에 타격을 가하는 입법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막대한 실책이었다.
시골뜨기들의 회합이었던 보르도 의회가 내놓은 마지막 결의는 3월 10일에 일단 휴회를 하고 3월 20일에 베르사유에서 속회를 한다는 것이었다(427대 154). 지난 10월 31일과 1월 22일의 경험에 비추어 소란스럽고 무질서한 파리 말고 다른 곳으로 의회를 옮기고 싶다는 동기를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베르사유로의 이전은 파리에 대한 불신의 표시였을 뿐만 아니라 파리를 얕잡아보는 태도였다. 보르도 의회와 티에르 정부의 모욕과 악의에 대해서만도 참기 어려운 파리에 마지막으로 가해진 능욕은 독일군의 파리 입성이었다. 벨포르 시를 독일에 할양하지 않는 대가로 독일군이 3월 1일 파리에 입성하여 48시간 머물게 한 것은 독일과의 강화 조약에 들어 있는 한 조항이었다. 파리 방위대는 2월 24일 독일 입성군에 무력으로 저항할 것을 결의한 바 있었으나, 27일 그 결의를 철회하고 다만 시민의 반항 의사만 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집집마다 축 늘어진 조기, 인적 없는 도로, 문 닫은 가게들, 물을 뿜지 않는 분수, 덮개를 뒤집어 쓴 콩코르드 광장의 동상, 밤에도 불이 켜지지 않는 가스등. 이 모든 것이 정복되지 않은 도시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폴레옹군을 맞은 모스코바도 아마 이러했겠지...... 센 강과 루브르 궁과 바리케이드 선 사이에 갇힌 독일군은 덫에 걸린 것 같았다.
이는 파리 코뮌의 연구자 리사가레(Prosper Olivier Lissagaray)가 당시 파리를 묘사한 글이다.
파리의 분노는 이제 절정에 이르렀다. 그들은 독일군에게 당하는 능욕을 이를 악물고 참고 견뎠다. 누구를 위하여? 프랑스를 위하여. 그런데 그 프랑스를 대표한 자들과 그들이 선출한 정부는 독일군에 못지않게 파리를 모욕하고 업신여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