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청화수 ’ 님의 움직그림
- 움직그림이 올라온 곳 :
https://www.youtube.com/watch?v=EH76EhZenOg
▶ 옮긴이(잉걸)의 말 :
나도 『 삼국유사 』 를 읽었지만, 수로부인의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풀이할 수 있다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나의 어리석음과 둔함과 멍청함을 탓해야 할 판이다).
좋은(그리고 흥미진진한) 움직그림을 올려주신 청화수 님에게 감사하고 싶다.
덧붙이자면, 만약 이 움직그림의 내용대로라면 가야 유민들과 신라 왕족/귀족들(더 정확히는 경주 김씨들)의 갈등은 가야가 망한 뒤에도 계속되었고, 그것이 후기(後期)신라 왕실이 김유신의 후손을 처형하는 일이나, 가야 유민들의 수로부인 납치나, 후기신라 왕이 삼모 왕비를 내쫓는 일로 터져나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까지는 한국의 역사학자나 역사학도들이 양국( ‘ 남북국 ’ ) 시대 말기에 터져나와 후삼국 시대를 연 까닭이 된 (후기신라 땅 안에서 후기신라 정부의 지배를 받던) 전기(前期) 고리(高麗)[장수왕과 보장왕의 나라] 유민들과 남부여(南扶餘) 유민들의 후기신라에 대한 불만만 강조했는데, 이제 그들은 후기신라 땅 안에 살면서 후기신라에 대한 불만을 품었던 가야 유민들도 재조명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연구결과는 당연히 『 역사 』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
전기 고리/남부여/(이른바 “ 임나가량[任那加良] ” 을 비롯한) 가야 여러나라의 유민들이 후기신라 왕실과 정부에 불만을 품고 살다가 양국시대 말기에 들고 일어나 후삼국 시대를 연 사실은, 영정(시호 ‘ 진시황 ’ )의 진(秦)나라 군사에게 망한 여섯 나라(연/제/한/위/조/초)의 유민들이 원한을 품다가 영정보다 능력이 떨어지면서도 영정 못지않게 잔인했던 영호해(시호 ‘ 2세 황제 ’ )가 진 제국의 새 황제가 되자, 들고 일어나 초한(楚漢) 시대를 열고 진 제국을 무너뜨린 것과 비슷하다(다른 점이 있다면 중기신라는 진나라와는 달리 남(당 왕조)의 힘을 빌렸고, 후기신라는 진 제국과는 달리 2세기 동안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스물 한 해 전, 서기 562년에 중기신라에게 멸망한 가야 여러나라( 『 삼국사기 』 「 강수(强首)전 」 에 나오는 “ 임나가량 ” 포함) 유민들이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인 중원경으로 끌려가 뿌리내렸고(중기신라 정부가 밀고 나간 강제 이주 정책이라고 한다), 그들이 “ 신라 말 고려 초 ”, 그러니까 후기신라(양국시대) 말기 ~ 후기 고리(왕건이 세운 나라) 초기에 “ 범(凡) 중원경 세력(청주 부근의 서원경과, 원주 부근의 북원경 포함) ” 으로 “ 다시 등장하여 ” 태봉/마진을 세운 김궁예와, 후기 고리(高麗)를 세운 왕건 “ 군사력의 핵심 ” 을 이루었다는 학설을 담은 글을 읽었는데, 그 글에 따르면 비록 그들은 후기 고리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중기 고리(대조영이 세운 나라) 유민들을 흡수한 뒤 “ 모두 왕건에게 축출되지만 ”, “ 결국 외가가 범 중원경인 고려(후기 고리) 제 3대 정종과 제 4대 광종의 즉위 ” 를 불러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글과 비슷한 때 쓰인(그리고 내가 직접 읽은) 또 다른 글에 따르면, 가야 유민들은 “ 충북과 강원에 걸쳐 비교적 넓은 범위로 분산 ” 되었고, 이들은 온 스무 해(120년) 뒤 중기신라가 무너뜨린 전기 고리/남부여의 유민들과 합류했으며(중기신라 조정이 두 나라를 무너뜨린 뒤, 그 나라의 유민들을 본거지에서 충청북도와 강원도로 끌고 간 것이다), 따라서 후삼국 시대에 김궁예가 “ 죽주와 청주, 철원 등의 고구려계를 배경으로 ” 일어선 사실과, “ 양길을 중심으로 하는 내륙세력 ” 이 후기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사실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한다(양길[梁吉]을 “ 백제계 사민[徙民. 옮겨진 백성] ” 의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또 그 글은 “ 중원경의 가야계 집단도 이미 신라의 중앙으로 편입된 진천지역의 가야계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친(親) 신라적인 집단으로, 친(親) 백제계 성향이 조금 더 강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 ” 다고 끝맺었다.
만약 이 두 글이 옳다면, 그리고 그 글들의 내용을 이 움직그림과 견주면서 살펴본다면,
(임나가량을 비롯한) 가야 여러 나라의 유민들은 (고향인 경상남도에 남은 사람도 있었고, 일부는 월성[오늘날의 경주]로 옮겨갔지만) 많은 수가 충청북도와 강원도로 끌려갔고, 어느 곳에 살건 중기신라에 원한과 반감을 품었으며,
비록 김유신 집안처럼 중기신라를 따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 출세한 ’ 가야 유민의 후손들조차도 이른바 ‘ 통일전쟁 ’ 과 신/당 전쟁( ‘ 나/당 전쟁 ’ 을 일컫는 바른 이름)이 끝난 뒤에는 처형당하고 쫓겨나, 가야 유민들의 (중기신라에 대한) 배신감과 반감과 분노가 더 강해졌고,
그래서 그들이 여러 번 후기신라 왕실과 귀족들에게 반항했다가, 후기신라가 (말기의 동한[후한] 왕조처럼) 삐걱거리고 흔들리고 힘을 잃자, 김궁예(법명 선종)나 양길(梁吉)이나 기훤이나 진훤[ ‘ 견훤 ’ ]이나 왕건 같은 성주(城主)/장군(將軍)들[ 『 역사 』 교과서에 나오는 “ 호족 ” 은 후삼국시대에는 딱 한 사람만 썼던 명칭이고, 실제로는 지방 세력 대부분이 자신을 “ 성주 ” 나 “ 장군 ” 이라고 일컬었다]이 들고 일어났을 때 ( ‘ 적의 적은 나의 동무 ’ 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그들의 편을 들며 그들과 함께 싸웠던 게 아니냐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앞으로 더 연구하고 고찰해야 할 주제다.
(덧붙이자면, 나는 후삼국 시대가 열리기 예순일곱 해 전, 그러니까 서기 822년에 후기신라의 “ 웅천주 도독 ” 이었던 김헌창이 후기신라에 반기를 들고, [다른 곳도 아니고, 원래는 백제/남부여의 도시였던] “ 웅진[熊津] ” 을 중심지로 삼고 “ 장안[長安] ” 이라는 나라를 세워 후기신라와 싸우다가 죽은 일[이른바 ‘ 김헌창의 난 ’ 으로 불리는 사건]도 예사롭게 볼 수 없다.
당나라에 굽히며 사대주의를 실천했던 후기신라와는 달리, 김헌창은 “ 경운[慶雲] ” 이라는 “ 연호 ” 까지 만들어 천자를 자처했으며, 신라 정부군이 죽이거나 붙잡은 장안국[國]의 군사는 “ 셀 수 없이 많았 ” 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것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아예 후기신라를 부정하거나 무너뜨리려고 한 시도가 아니었느냐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김헌창이 들고 일어났을 때, 그가 직접 다스리던 땅인 웅천주뿐만 아니라, 무진주/완산주/청주/사벌주의 네 주 도독과 국원경(國原京)/서원경(西原京)/금관경(金官京)의 임신(任臣. [일을] 맡은[任] 벼슬아치들), 그리고 여러 군/현의 수령들이 동조한 점, 그리고 한 때는 김헌창의 세력이 강해 “ 반란군(장안국 군사)의 위세가 한산주/우두주/삽량주/패강진/북원경 등이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를 지켰다. ” 고 할 정도였던 점을 보면(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 따져보면, 청주/광주광역시/전주시/진주/상주/충주/김해다), 원래 후기신라의 왕족이었으나 왕이 되지 못하고 지방으로 밀려난 김헌창은 그 때문에 불만을 품었고, 후기신라라는 나라를 그대로 놔 두고서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으며,
그 때문에 후기신라의 전신(前身)인 중기신라가 무너뜨린 나라(남부여)의 도시였던 웅진(공주)을 도읍으로 삼고 새 나라를 세우고 내친김에 후기신라의 국가 이념 가운데 하나였던 사대주의도 버리고 신라가 무너뜨린 가야나 남부여나 전기 고리 유민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새 이름/새 정체성인 ‘ 장안(長安. 글자 뜻대로 풀이한다면, “ 오래도록[長] 편안하다[安]. ” 는 뜻이다) ’ 을 내세워서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던 건 아닌지.
그때 [대가락/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뿐 아니라, 가야 유민들의 후손이 살던 충주와 청주에서도 김헌창의 장안국을 도운 사람들이 많이 나온 걸 보면, 가야 유민들의 후손은 그때까지도 후기신라에 반감을 품었으며, 그래서 그 ‘ 대안 ’ 으로 김헌창과 장안국을 골랐으나, 거사(擧事)에 성공하지 못하고 후기신라의 군사에게 학살당하거나 붙잡혔던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그로부터 예순일곱 해 뒤인 서기 889년에는 결국 후삼국 시대가 열려 후기신라는 공중분해되며, 일찍이 진[秦] 제국이나 동한[후한] 왕조가 그랬던 것처럼 쪼그라들고 말고, 가야 유민의 후손들은 여러 성주/장군에게 합류한다.
나는 청화수 님이 말씀하신 ‘ 가야 유민들의 반발/반항 ’ 에 김헌창의 장안국에 협조한 김해/충주/청주 사람들의 행동도 집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장안국은 무너졌고 그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두 세대가 흐른 뒤 그들은 다시 한번 일어서서 결국 옛 원수인 신라를 무너뜨리고 왕건을 비롯한 성주/장군들이 새 시대[후삼국 시대와 후기 고리시대]를 여는 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들이 날린 ‘ 마지막 결정타 ’ 가 후삼국시대의 개막이었고, 그 전까지의 반항들은 ' 후기신라라는 나무 ' 에 ‘ 꾸준히 내려찍는 도끼질 ’ 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저도 청화수님의 움직그림을 보았는데 충격을 먹었네요...역사공부는 끊임없이 고증에 의해 문헌에 의해 사실 그 자체를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할듯 하네요..
옳은 말씀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번에는 제가 청화수 님에게 크게 한 방 먹었습니다. 제 모자람과 멍청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저는 아직도 많이 배워야 하는 사람이고, 많이 '깨져야' 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