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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남도유배길 1코스(다산수련원-영랑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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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마땅히 담백하고, 말은 마땅히 과묵해야”
부슬부슬 내리던 봄비가 강진읍에 접어들자 그치기 시작한다.
대지를 촉촉하게 적신 봄비에 막 돋아난 풀들이 먼저 자라겠다고 아우성이다.
승용차를 강진터미널 근처에 주차해 두고 다산초당 가는 군내버스를 탔다.
할머니 몇 분과 우리 일행 세 사람만을 태운 군내버스는 푸른 보리밭과
강진만의 시원스러운 풍경을 뚫고 2차선 도로를 달려간다.
우리는 귤동마을을 지나 다산수련원 앞에서 버스와 헤어진다.
다산수련원과 다산유물전시관이 생기기 전까지는 귤동마을에서 곧바로 다산초당으로 올라갔었는데,
지금은 다산유물전시관을 거쳐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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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오면서 걸었던 길을 연결하여 ‘다산 정약용 남도유배길’을 열었다.
‘다산 정약용 남도유배길’은 다산초당·백련사·영랑생가·무위사 등 유홍준교수가 명명한 ‘남도답사 1번지’를,
걸어서 탐방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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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유배길의 첫 발을 이곳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떼기 시작한다.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초당 남쪽 800m 지점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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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유물전시관에는 목민신서·흠흠신서 같은 저작과 편지를 비롯한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으며,
영정·다산연보·가계도·학통·다산의 일생·다산의 업적도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해 놓았다.
다산유물전시관 뒤편 다산수련원은 지하 1층 지상 3층에 강의실과 2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생활관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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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나와 왼쪽으로 돌아가니 두충나무숲으로 이루어진 산책길이 나온다.
4~5월에 꽃이 피는 두충나무는 고혈압·관절염·요통 등의 약재로 쓰인다.
두충나무숲을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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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충나무숲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낮은 둔덕을 넘어야 한다.
이 둔덕을 넘으면 귤동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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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소나무, 편백나무, 참나무와 대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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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 경사진 곳에는 나무뿌리들이 울퉁불퉁 밖으로 노출되었다.
정호승 시인은 이 길을 걷다가 ‘뿌리의 길’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을 지었다.
시인은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고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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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 소나무 등이 울창한 숲 가운데에 다산초당이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다산초당은 조선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 중 10년을 머문 곳이다.
다산은 여기에서 생활을 하면서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에 열중하여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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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은 원래 초가였으나 1936년 노후로 붕괴되어 없어진 것을 1957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중건하면서 기와를 얹었다. 현판에 판각된 다산초당(茶山草堂)이란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다.
다산초당 아래에는 서암이 있다. 이곳은 다산의 제자들이 지냈던 곳으로 197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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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선생은 다산초당 뒤편 바위에 정석(丁石)이라는 글씨를 직접 새겨놓았다.
차를 좋아했던 다산은 정석 아래의 약천이라 이름붙인 샘물에서 찻물을 받아 다조에서 차를 마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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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옆에는 직사각형의 작은 연못을 만들고 가운데 원형의 섬을 만들어 연지석가산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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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에서 연지석가산을 지나 동쪽으로 가면 동암(東庵)이라고 하는 작은 건물이 있는데
송풍암(松風庵)이라고도 한다. 1976년 복원된 동암에는 추사가 쓴 보정산방(寶丁山房)과
다산의 친필을 모각한 다산동암(茶山東庵)이라는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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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을 지나면 강진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각정자 천일각(天一各)이 있다.
이 천일각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各)의 준말이다.
이곳에서 다산은 흑산도로 유배를 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바다를 바라다보곤 했다고 전해진다.
천일각에서 내려다보니 강진만이 지척이다. 강진만에 간척이 되기 전에는 귤동마을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니, 그때는 천일각에 앉아있으면 파도소리까지도 들렸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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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로부터 굳건한 신뢰를 받았던 다산은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 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그때 다산의 나이 40이었다. 첫 유배지는 포항 장기였으며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서울로 불려와 다시 조사를 받은 후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때 다산의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귀양을 갔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생활 중에 추사체라고 하는 성숙한 글씨체를 만들었듯이
다산도 강진에서 귀양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외롭고 힘들었던 유배생활은 다산으로 하여금 후세에게 길이 남을 대학자가 될
토양이 되었던 셈이다. 다산은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저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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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은 오붓한 산길이다. 걷기 좋은 오솔길에는 진달래가 피어 있고,
산벚꽃도 화사하게 피기 시작하였다. 오솔길을 걷다보니 숲속의 나무들이 속삭이고, 새들도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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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다산선생이 백련사에 주석하고 있던 선승인 혜장스님을 만나러 다녔던 길이다.
다산은 이 길을 오가면서 생각을 가다듬고,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혜장선사를 만날 설렘을 안고 가서 선사와 나눈 대화와 녹차 맛을 되새기며 돌아왔을 길이다.
그러니 이 길은 사색하고 명상하는 길이다. 그래서 이 길을 ‘사색과 명상의 다산 오솔길’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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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과 백련사 사이에는 해월루(海月樓)라 불리는 2층 누각이 구강포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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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세워진 해월루는 차에 심취했던 다산이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교유하며 걸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강진군에서 세운 누각이다. 특히 보름날 해월루에 오르면 바다에 비친 달무리가 한없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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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루에서 숲길을 따라 내려가면 녹차밭이 나온다.
다산이 혜장선사와 교유하면서 남긴 편지글에는 선생의 차에 대한 애틋함과 유머가 물씬 풍겨 나온다.
“나그네는 요즘 차를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로 시작하여
“듣건대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마시고 베풀어 주소서”로 끝나는 걸명소(乞茗疎)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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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밭을 지나면 그 유명한 백련사 동백나무숲이다. 백련사에 닿기 전에 먼저 동백나무숲으로 들어간다.
하늘을 가린 동백나무숲에는 진홍색의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빨간 꽃잎과 노란 꽃술로 이루어진 동백꽃의 아름다움 속에는 처연한 정서가 깃들어 있다.
매서운 추위를 견디고 나서야 꽃을 피운 동백꽃은 온갖 고난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고고한 면모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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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 숲 속에는 부도 네 기가 숨바꼭질 하듯 숨어 있다.
이끼 낀 부도에도 동백꽃이 활짝 피어 빨갛게 화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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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은 1962년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백련사 주변에 군데군데 자생하고 있는 동백나무숲은 그 규모가 1.3ha, 1,500 그루에 달한다.
3~4월에 꽃이 피지만 3월말에서 4월 초순에 가장 흐드러지게 핀다.
동백나무 주변에는 비자나무·후박나무·푸조나무 같은 온대림도 공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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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꽃은 지고나면 볼품이 없는데, 동백꽃은 낙화한 뒤에도 그 아름다움이 당분간 그대로 유지된다.
그래서 동백꽃은 30% 정도 낙화한 상태에서 보았을 때 가장 아름답다.
변색하지 않고 통째로 떨어진 꽃송이들은 땅 위에다 또 하나의 꽃밭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백꽃은 나무에서 한 번, 땅 위에서 또 한 번, 두 번 피어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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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고 두터운 잎 위에 빨갛게 핀 동백꽃은 세상의 한(恨)을 아름답게 곰삭힌 정숙한 여인 같고,
땅위에 떨어진 동백꽃은 울컥 눈물이 쏟아질 듯 애절하다.
땅위의 동백꽃은 자신을 사뿐히 밟고 가라 하지만 우리는 한 송이의 낙화라도 밟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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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 군락지를 지나 백련사로 들어선다. 백련사는 만덕산(409m)을 등지고,
구강포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백련사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로 신라 문성왕 때 무염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후 절이 없어지고 터만 남았다가 1211년(고려 희종 7년) 원묘국사 요세스님이 중창하였다.
요세스님은 참회와 염불을 통하여 현세를 정토로 만들자는 최초의 민간결사운동인 백련결사를 벌여 이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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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백련결사의 이름을 따서 만덕사를 백련사로 바꾸었다.
백련사는 요세스님 이후 120년 동안 8명의 국사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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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백련사도 고려말 왜구의 침입으로 폐사될 지경까지 내몰렸고 사찰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세종 때인 1426년 주지 행호스님이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후원을 받아 중수를 하면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효령대군은 이곳 백련사에서 8년 동안 기거하였다.
영조 36년(1760년)에 큰 불이 나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버려 지금의 백련사는
그 후에 중창된 건물들이다. 현재는 10여동의 전각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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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로 들어서려면 만경루를 통해야 한다. 만경루 앞에서는 커다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만경루(萬景樓)에 올라보니 그 이름이 실감난다.
만경루에 서니 배롱나무 너머로 구강포 앞 바다가 정겹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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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풍경에 취한 조선 성종대의 문신 김유(金紐)는 시 한 수를 읊었다.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티끌 없는 거울이네
울 옆의 긴 대 바람에 소리내고
난간 앞의 그윽한 꽃 눈 속의 봄이라
지금도 만경루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전에는 스님들이 만경루를 선방 삼아 수행을 했고,
지금은 템플스테이 수련공간으로 쓰인다. 백일홍 활짝 피는 날
‘만경루에서 우리음악 듣기’ 같은 문화행사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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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루와 좁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대웅보전이 높은 계단 위에 당당하게 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대웅보전은 1762년 중건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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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등록된 백련사 대웅보전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과
아름다운 벽화, 조각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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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현판은 만경루(萬景樓) 현판과 함께 조선조 3대 명필 중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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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왼쪽 계단을 올라가면 응진전과 천불전이 구강포 앞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
응진전 앞마당의 배롱나무 한 그루도 만경루 앞 배롱나무와 함께 여름이면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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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전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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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강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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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2542FF475338FF6A2B)
1681년에 탄기스님은 절의 사적이 오래되어 없어져 버릴 것을 염려하여 만덕산 백련사 사적비를 세운다.
다산 정약용이 편집한 <만덕사지>에는 “옛 비는 유실되어 그 소재를 알 수가 없고 귀부만 남았는데
탄기 스님이 다른 돌로 비를 세우면서 옛날 비석의 귀부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적비 전면에는 백련사의 역사를 기록하고 뒷면에는 당시 불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양 측면에는 아름다운 초화문을 양각했다. 백련사 사적비는 보물 제1396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 남도유배길 1코스-2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