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소몰이 소년
2화 회색 도시
3화 달님의 슬픔
4화 고향의 설음
5화 루즈-내츄럴 캔디
6화 낯선 만남-하나 그리고 열하나
7화 그녀, 또 다른 그녀
8화 그녀의 향기, 그녀의 아픔
9화 아아, 달님
10화 벼랑의 끝자락
11화 어머니의 끝섬
12화 작은 장구벌레의 우화(羽化)
13화 아담과 이브, 만개하다
14화 꽃잎 떨어지다
끝섬(EDGE ISLAND)
<13화>아담과 이브, 만개하다
어두컴컴한 경찰 호송차 안에서 숙희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손바닥에서 솟아나온 습기가 서로의 손바닥을 눅눅하게 적셨다. 누구의 습기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녀가 얼마나 두려움에 떠는지는 충분히 가늠되었다. 침침한 호송차 미등 앞에서도 파랗게 질려 변색된 입술색이 확연히 보였다. 숙희의 입술은 경련으로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활주로처럼 곧게 뻗은 16차선 도로에서 잠시 내 세상인 듯 흥분에 휩싸였었다. 마치 그녀와 나를 위하여 비행장이라도 준비해 둔 것처럼 통행금지가 가져다 준 흥분은 실로 탁월했다. 그 흥분에 도취되어 노래를 부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다가오는 단속원의 손전등 불빛조차 온전히 축복으로 받아 호흡했다. 그러나 그 끝은 우리의 고조된 감정과는 달리 통행금지 위반이었다. 통금 단속원에게 통사정을 했지만 통하지가 않았다.
통행금지 위반 문제는 두 번째고 피 묻은 옷가지를 소지하고 있는 것이 큰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리처드와 있었던 일을 해명했지만 사실 여부가 명확하게 입증되어야 한다고 했다. 조사과정에서 리처드와 맞대면을 해야 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리처드가 처벌을 원하면 영락없이 철창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른다. 참으로 끈질긴 리처드와의 인연이었다. 그러나 리처드를 한 방 먹인 것은 잘한 일이었다. 어느 누구도 유정숙을 대신해 항변조차 하지 않았다. 비록 유정숙이 자살했다고는 하지만 자살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한데 모두들 비겁하게 침묵하지 않았던가!
맞은편의 술 취한 사내가 곧 시비라도 걸어올 분위기로 몸을 꼬고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바닥을 뒹굴다 끌려온 듯 구토한 내용물과 먼지가 옷자락에 덕지덕지 붙어있어 구역질이 났지만 애써 참았다. 소란을 피워서 득 될 일도 없고 술 취한 자의 주정을 이길 수도 없을 테니 참고 가기로 했다.
불안해하는 숙희를 끌어당겨 어깨 가까이로 밀착시켰다. 그녀는 소스라치듯 몸을 떨면서 내 왜소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맞은편 사내의 눈이 시실시실 초승달이 되었다.
“히야, 그림 좋다아!”
그러나 침묵했다. 두려움에 떠는 숙희 앞에서 그 따위 빈정거림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이었다. 혹여 주먹다짐으로 번진다면 리처드의 사건과 겹쳐 대책 없는 벼랑으로 치달을 것이 당연했다.
“히힛, 아예 비비구 있네. 비비구 있어!”
사내는 더 노골적으로 빈정대기 시작했다. 숙희가 이내 소리 없이 훌쩍이기 시작했다. 얼굴을 묻고 훌쩍이는 울림이 어깨에서 가슴으로 아리게 전해졌다. 숙희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싫었지만, 숙희가 능욕당하는 꼴을 보니 다시 눈에 핏발이 솟구쳤다.
“에이, 염병할…….”
나는 순간적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며 용수철처럼 일어섰다. 내 머리가 차량 지붕에서 북치는 소리를 냈고 숙희가 어깨에서 튕겨져 나가 좁은 의자에 벌렁 나동그라졌다. 사내는 더욱 키득거렸다.
“히히힛, 꼴 보기 좋다아.”
숙희가 나동그라지리라곤 차마 예상하지 못했었다. 울화통은 송곳처럼 머리 위로 삐져나왔다. 나는 마침내 공을 차듯 사내를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가슴을 맞은 사내가 욱, 하는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단박에 사내의 목울대가 쿨럭쿨럭 오르내리기를 반복하였다. 검붉은 액체덩어리가 토악질과 함께 튀어나와 금방 바닥에 흩어졌다. 구역질날 정도의 퀴퀴한 알코올 냄새와 붉은 핏덩이로 좁은 호송차 안이 순식간에 오염되었다.
숙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소스라치게 몸을 떨었다. 나는 금방 후회했다. 싸늘한 공포감이 등줄기에 손톱자국을 내며 엉덩이까지 미끄러졌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상황은 더욱더 꼬여가고 있었다.
“이 새끼들, 지금 뭐 하는 거야!”
때마침 뒷문을 연 단속원이 소리를 질렀다. 한바탕 벌어질지도 모르는 싸움이 그 상태에서 멈춰졌다. 단속원은 바닥에 흩어진 핏덩이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소리쳤다.
“이게 뭐야? 피야 뭐야?”
그는 손바닥으로 냄새를 틀어막으며 거칠게 씹어뱉었다. 덜 소화된 음식찌꺼기가 핏덩이와 함께 바닥에 질펀하게 흩어져 흘렀다.
“우욱! 뭘 처먹은 거야! 씨펄.”
검붉은 토악질로 여긴 단속원은 상황이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말 대신 연신 내리라는 손짓만을 보냈다.
숙희를 먼저 내려 보내고 나도 따라 내렸다. 술 취한 사내가 내리자 단속원이 나와 사내의 엉덩이를 번갈아 걷어찼다. 단속원은 마치 똥개를 대하듯 나를 윽박질렀다.
“새끼들아, 핥아서라도 깨끗이 치우고 있어. 조금 있다가 검사하러 올 테니까!”
이번에는 단속원의 주먹이 내 머리와 이어서 가슴을 내질렀다. 숙희가 비명을 지르며 경악했지만 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미 파출소 문안으로 끌려온 다수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공포에 질려있는 것을 창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호기와 다르게 금방 공손해진 사내와 나는 각자 양동이로 물을 떠다가 호송차 안을 정신없이 청소했다. 얼마 후 단속원에게 통과검사를 받고 파출소 안으로 인계되었다. 사내와 나는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사람들 옆에 나란히 무릎꿇림을 당했다. 다행히 숙희는 의자에 앉도록 배려해 주었다.
파출소 근무자들은 돌아가며 사람들의 머리를 때리고 정강이를 걷어찼다. 굴욕적이고 치욕스러운 조사가 이어졌다. 다행히 사내가 먼저 시비를 건 사실을 시인하고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여 합의를 할 수 있었다. 더욱 다행스러운 일은 사내가 토해낸 붉은 덩어리는 충격에 의하여 역류한 포도주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별다른 상처가 아닌 사실이었다. 하지만 숙희와의 관계와 부쩍 심해진 대학생들과의 데모 연관성을 꼬치꼬치 캐묻는 경찰의 눈가에는 진실 여부를 알려는 것보다 숙희를 탐하는 음흉스러움이 드러났다. 차라리 숙희가 그 음탕한 눈빛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이 다행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통행금지가 해제되어야 피 묻은 옷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다며 진술 그대로만 조서가 꾸며졌다. 숙희는 새벽이 되면 훈방 조치될 것이고 나는 수사를 더 해서 형이 확정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조사가 마무리되고 본서로 이송되었다. 10평 정도의 좁은 공간에 50여 명은 족히 수용된 듯 보였다. 유리창은 깨져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술 취한 사람들이 토하고 뭉갠 흔적이 곳곳에 얼룩져 있는 상태였다. 퀴퀴하고 시큼털털한 냄새에 숨쉬기조차 거북했다.
새우처럼 몸을 움츠렸다. 시멘트 바닥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냉기가 엉덩이를 핥았다. 그다지 추운 날씨가 아닌데도 시멘트바닥의 냉기는 심장을 오그라뜨렸다. 어쩌면 꼽추처럼 휘어지기만 하는 몸과 오그라드는 마음 때문에 느껴지는 감각일 터였다. 유치된 사람은 각양각색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장발 단속에 걸렸고, 통행금지에 걸렸고, 패싸움에 걸렸고, 노상방뇨에 술주정과 기물파괴에 걸렸고……. 시위대에 가담했다가 잡혀온 학생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근래 들어 격렬해지는 데모와 강력해지는 억압으로 학생과 정부의 충돌 횟수가 부쩍 늘고 있는 상황이었다. 숙희의 남동생이 불쑥 떠올랐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남동생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데모의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젊음을 바쳐 싸우는 것을 보면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소속된 단체는 의로운 목표를 가지고 있을까? 의로운 일이라면 목숨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할까?’
숙희의 동생을 떠올리자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휘저었다.
숙희가 떠올랐다.
‘숙희는 어찌하고 있을까?’
낙천적인 성격의 그녀지만 처음 겪는 일 앞에서 당황하고 있을 건 뻔한 일이었다. 괜한 치기에 숙희를 힘들게 한 건 것들로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참으로 대책 없고 속수무책인 불안이 머릿속을 핥으며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한숨도 잘 수 없는 밤이 속절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아침 일찍 구내식당 종업원이 보호실에 나타나 식사주문을 받았다. 메뉴와 가격을 이야기하면서 주문을 받았고 밖에 있는 연고자에게 경찰서에 잡혀있다는 전화를 해준다는 대가로 심부름 값까지 받아갔다. 몇몇은 터무니없이 비싼 요금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주문했고 절박한 나머지 전화까지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숙희도 파출소에 유치된 입장이었으므로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식사를 주문하지 않은 내게는 꽁보리밥 도시락에 단무지가 주어졌다.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주문한 사람들은 철창 밖으로 나가 당직근무자와 겸상을 하는 특혜가 주어졌다. 나는 아침을 먹지 않고 그대로 밀쳐버렸다. 동태를 살피던 후줄근한 영감이 다가와 슬금슬금 내 도시락을 가져갔다.
즉심에서 벌금형을 받았다. 10여 명씩 줄지어 세워놓고 한꺼번에 판결을 했다. 변론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벌금을 내지 못하면 벌금 액수만큼 4일을 살아야 했다. 경범만 즉심에서 판결했고 피 묻은 옷에 대한 진위는 유보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풀 죽은 얼굴로 다시 유치되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이름을 호명 받고 보호소에서 나왔다. 경찰서를 나오자 벌금을 마련하여 지불한 숙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애교스럽게 팔짱을 끼며 밀착해 왔다. 잔뜩 기죽어 있을 나의 기를 살려주려는 의도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그런 숙희가 눈물겨워 그녀의 어깨를 말없이 감싸 안았다.
“숙희 씨는 어떻게 나왔어?”
“훈방으로 나왔어. 나오면서 노수 씨가 어떻게 하면 나올 수 있는지 미리 알아놨거든!”
그녀는 한숨도 못자고 꼬박 밤을 새운 듯했다. 지난 번 거문도를 내려오려다가 실패하여 이미 수척했던 얼굴이 하루 사이에 부쩍 더 야위어 보였다. 생기 있던 얼굴도 푸석푸석 빛을 잃었고 밤새 모진 마음고생을 겪었는지 눈은 퀭해 보였다.
“노수 씨, 미안해하지 마! 어디 가서 아침부터 먹자!”
숙희는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날카로운 송곳이 코끝을 찔렀다. 코끝을 찡하게 찔렀던 송곳은 이어서 눈동자를 찔렀고 눈물을 밖으로 밀어내었다.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떨어뜨리고 애꿎은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허름한 식당에서 순두부백반을 주문한 숙희는 내가 풀려나온 이유를 궁금해 하는 눈치를 알아채고는 경위를 설명했다
“아침 일찍 태평양기획 임 실장을 찾아갔어. 임 실장에게 자초지종을 알리고는 사정했지. 임 실장이 리처드를 끈질기게 설득해서 우호적으로 매듭지어 줬어. 하지만 회사는 퇴사하겠다는 조건이 붙었어.”
숙희가 태평양기획을 찾아가 얻어낸 결과는 실로 감동적이었다. 된통 얻어맞은 리처드가 그 정도까지 양보한 것도 의외였다. 어쩌면 유정숙과의 관계를 호의적으로 의식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되지도 않는 영어지만 리처드에게 군입대를 핑계로 퇴사 의사를 밝힌 마당에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숙희와 아침을 함께하면서 고향을 다녀오겠다는 생각을 전했다. 민기의 송별회도 송별회지만 아버지 산소며 벽돌공장을 한다던 정 씨도 찾아볼 참이었다. 어머니와 유 씨 사이에 있을지 모를 비밀을 마지막으로 정 씨에게 확인해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회사도 그만두는 입장에서 더 이상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거문도 귤 밭의 문제를 해결하고 숙희와의 결혼도 차근차근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우선 우리 집으로 가. 옷 빨아놨어. 갈아입어야 하잖아.”
내 모습은 하룻밤 사이에 부쩍 꼬질꼬질해지고 볼품없어 보였다. 구겨진 옷처럼 구겨진 내 마음을 숙희는 사랑스럽게 보듬으며 펴주려 애쓰고 있었다.
깔깔한 아침을 대충 마친 후 버스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나는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내내 달게 졸았다. 한꺼번에 밀려온 피로 때문이기도 했지만 숙희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졸음은 여름햇살처럼 까무룩까무룩 쏟아져 내렸다. 몇 번씩 고개가 꺾어지는 것에 놀라 머리를 털고 곧추세워 보았지만 끝내 헛수고였다. 결국 나는 그녀의 어깨에 아예 머리를 맡겨버리고 말았다.
숙희가 어깨를 툭툭 쳐서 내려야 할 곳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눈을 부비고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버스에서 내려 여동생과 생활하고 있는 그녀의 연립주택 2층, 그녀가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던 그곳에 처음으로 들어갔다.
여동생은 직장을 나가고 없었다. 여자 둘이 사는 자그마한 공간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화장품 향내가 온화하게 스며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의 향기였다. 그것은 언젠가 어머니 품에서 풍겨 나오던 향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되도록 많이 그 향내를 흡입하였다. 숙희의 향내가 머릿속 깊숙이 박하사탕처럼‘화’하게 번졌다. 향기는 온몸으로 날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봄꽃처럼 피어나게 하였다. 진달래처럼 벚꽃처럼 온몸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숙희의 화장대 위에는 월미도에서 그렸던 초상화가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마치 주인에게 왜 이제 왔냐는 듯 초상화는 나를 힐책했다. 초상화가 화장대 앞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숙희는 유정숙의 사건으로 진정한 결별을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옹졸한 내가 미련스럽게도 숱한 세월을 허비했을 뿐이었다.
등 뒤에서 살며시 숙희를 안았다. 뭉클한 그녀의 가슴이 손바닥에 닿았다. 갓 만들어낸 인절미 같은 몰랑몰랑한 가슴에서 전해지는 촉감은 손바닥을 타고 머리끝을 전율시켰다. 손바닥에서 시작된 촉감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불꽃을 일으키던 스파크가 실핏줄을 타고 뒤통수를 찔렀다. 얼굴은 달아올랐고 땀구멍마다 전율이 송곳으로 돋아났다. 치명적인 짜릿함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 내가 있었다. 내 눈동자에도 그녀가 있을 터였다. 입술을 포개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여전히 포도향이 느껴졌고 또 개화되었다. 개화된 꽃샘에서 묻어나는 향기가 나의 혀끝으로 옮겨졌다. 혀끝에 물씬 풍기는 내음은 파릇한 봄내음 같았다.
그녀를 조심스럽게 뉘였다. 한 겹 두 겹 소담스런 꽃잎을 따서 가지런히 옆에다 놓았다. 내 몸을 에워싸고 있던 껍질도 한 겹 두 겹 탈피를 했다. 그녀의 속살은 순백이었다. 유리창 틈을 살짝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속살을 훔쳐보려는 햇살이 민망했다. 커튼을 쳐 햇살을 쫓아버렸다. 그녀의 뽀얀 복숭아 두 개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내밀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봉곳한 수밀도처럼 탄력을 유지하고 있는 그곳에 얼굴을 묻었다. 수밀도의 감촉은 순백의 순수함보다 고요했다. 그녀의 숨결은 깊고 맑았다. 얻기 어려워 남겨 놓았던 사랑이었다. 얻기 어려웠기에 차마 어찌하기가 부끄러운 소담스러운 사랑이었다.
그녀의 손이 등을 타고 붓끝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붓끝의 놀림은 조심스러웠다. 소름이 돋았다. 숨이 막혔다. 온몸의 뼈마디가 이완되며 녹아내리고 몸속에 흐르는 피가 덩어리로 곤두섰다.
눈물이 났다.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안았다. 입술을 안았고 가슴을 안았고 온몸을 안았다. 내 몸이 그녀 안에 있었다. 그녀의 몸이 내 안에 있었다. 숭고한 나눔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두를 주고 나누는 인고의 성인식이었다. 나를 버리고 숙희가 되었고 숙희를 버리고 내가 되었다. 나는 아담으로 태어났고 그녀는 이브로 태어났다.
나는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 산소를 먼저 찾았다. 끝섬에서부터 태풍을 타고 날아온 어머니의 빗물을 머금고 아버지는 동그랗게 파릇이 다시 태어나 있었다. 어머니의 정성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봉분에 늦가을 햇살이 따사롭게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절을 하고 술잔을 채우고 잡풀을 뽑고는 어스름한 저녁 무렵 민기를 만나기 위해 산을 내려왔다.
입대가 얼마 남지 않은 민기는 소몰이 일을 접은 상태였다. 어머니의 소식을 알려주었던 국밥집에서 민기와 나는 몹시 취했다. 취기가 높아질수록 서로의 설움에 복받쳤다. 민기는 제대 후 외가에 가서 정착하겠다고 했다. 나는 끝섬의 어머니와 귤 밭, 광주가 고향인 숙희와의 결혼계획을 이야기했다. 귤 밭과 숙희의 이야기에 민기는 무척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새벽녘에 민기도 나도 토했다. 연탄처럼 검은 선지가 배 속에서부터 조각이 되어 튀어나와 피처럼 흩어졌다. 나라의 부름에 청춘을 묻어야 하는 혈기가 몸속에 정착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사방에 버려졌다. 우리는 국밥집에서 꼬꾸라진 채 밤을 보냈다. 지독한 울분의 송별회였다. 민기는 물론 나 또한 오후가 되어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주인아주머니가 끓여준 콩나물국으로 끼니를 때우고 민기와 헤어졌다.
정 씨를 만나기 위해 하천을 훑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정 씨를 찾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정 씨는 소전에서 가볍게 떠벌렸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별반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알려고 공연히 어머니와 유 씨의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말이 말을 만들어 화근이 될 뻔했다. 정 씨는 어머니와 유 씨의 사연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다만 자신을 변명하는 넋두리만을 들었다. 노름으로 사기를 당해 몇몇 소장수의 돈을 가로채 야반도주했지만 또 실패를 해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 하천에서 벽돌 공장을 하며 숨어 살았는데, 하천 모래를 사용하다 보니 원자재를 공짜로 취하게 되어 많은 이득을 보고 이제는 소전에서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빚을 갚으며 산다는 이야기. 오래 걸릴 거라 예상했던 고향에서의 일이 단 이틀 만에 끝나버렸다. 고향에서는 더 할 일도 없고 출근할 직장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유도 모를 불안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정신줄 놓고 살아내야만 했던 금단현상이었다.
숙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다르게 할 말은 없었지만 고향에서의 일을 다 보았으니 올라가겠노라는 말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집에 없었고 함께 산다는 여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숙희 씨 여동생인 모양이군요. 언니한테 전화 왔었다고만 전해줘요.”
“그걸 왜 제가 전해 주어야 하는데요?”
매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여동생은 나로 인해 힘들어 하는 언니를 지켜보다가 악감정이 쌓였던 모양이었다. 그동안의 일들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감정이 그다지 좋지는 않으리라 짐작했지만, 싸늘한 말투에 일순간 주춤해졌다. 숙희는 물론 여동생에게까지 부끄럽다는 생각까지 지울 수가 없었다.
서둘러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굳이 숙희의 직장 인근에 도착해 그녀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저녁을 함께 했다. 으레 그랬듯 저녁을 먹고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줄 참이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숙희에게 주말에 거문도에 동행할 것을 부탁했다. 어머니가 태어난 고향 신추와 귤 밭을 둘러보고, 결혼 후 정착할 계획을 의논하고자 함이었다.
더불어 상경하는 길에 숙희의 고향 광주에 들러 그녀의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인사도 여쭐 요량이었다. 숙희는 순순히 내 의견에 동의했다.
숙희와 거문도행 여정에 몸을 실었다. 오랜 염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어머니의 소식을 접하고 혼자 서둘러 내려가던 조급했던 길과는 달리 사뭇 흥분되었다. 급행열차가 출발하자 마냥 재잘거리던 그녀는 대전을 지나고부터 내 어깨에 기대어 피곤한 잠을 달랬다. 간헐적으로 덜컹거리는 울림이 심해질 때면 깜짝 놀라 실눈을 뜨며 나를 훔쳐보고는 또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웃옷을 벗어 그녀를 감싸주고 내 어깨를 그녀에게 편안한 각도에 정지시켰다. 그녀가 되도록 포근하게 깊은 잠을 잘 수 있도록 해주려는 의도였다.
창밖을 응시했다. 추수하고 난 볏짚 더미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겨울잠에 들어간 우렁이 흔적을 찾는지, 아이들 서넛이 논을 뒤지는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논바닥에서 공을 차는 한 무리가 스쳤고, 밭두렁을 태우는 쥐불연기가 차창에 부딪혔다 사라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나 또한 그녀에게로 기울어지는 머리를 몇 번씩 도리질했다. 하지만 결국 나 역시 떨어진 고개를 그녀에게서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단꿈을 꾸며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철길은 여수에 닿았다. 부두에 도착해 끝섬의 표를 구입했다. 자칫 게으름을 피웠다가는 배를 놓쳐버릴 듯 촉박하여 여객터미널 안에서 가볍게 끼니를 해결했다. 드디어 여객선이 닻을 올리고 출발을 알리는 고동소리를 뿜어 올렸다. 그토록 꿈꿔오던 끝섬의 길을 비로소 숙희와 함께 출발하는 심정이란, 그 어떤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진즉에 느껴보지 못한 희열과 감격이 파도처럼 밀려와 순간을 정지시키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를 앞세워 갑판으로 올랐다. 뱃머리부터 갈라지는 하얀 포말은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길게 꼬리를 물었다. 가까운 섬과 먼 섬, 섬은 섬끼리 꼬리를 물었다. 분주히 들고나는 고깃배들의 흐름도 역시 섬처럼 꼬리를 물었다. 숙희와 함께 명화를 찍었다. 이제는 홀로 갑판에 앉아 짝을 이룬 연인들이 찍어내던 관광엽서의 그림을 바라만 보던 때가 아니었다. 그녀와 내가 곧 엽서의 주인공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작약도에서처럼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올올이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는 손가락에 머리칼이 정리된 것도 잠시, 숙희의 머리칼은 작약도보다 거센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날렸다. 바다를 만끽하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무구하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나도 덩달아 무구해졌다.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섬들의 끝자락이 점점 바다 속에 묻혀 사라져갔다. 사라진 섬들은 이내 점처럼 작아졌다. 마침내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광활한 수평선이 드러나고 끝섬이 뿌옇고 희미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나로도를 지나고 초도를 지날 때 광주리 아주머니들에게서 주전부리를 샀다. 숙희에게 주전부리 아주머니들과 어머니의 관계를 설명했다. 나는 목이 메어 주전부리를 먹을 수가 없었다.
거문도에 내려 어머니의 고향 신추로 향했다. 혼자 찾아가던 길을 둘이 가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자살을 꿈꾸며 오르던 산등성이, 다시는 밟지 못할 줄로만 알았었다. 어머니가 수없이 넘어 다녔을 구불구불한 길을 더듬으며 내내 어머니를 떠올리고 훌쩍이던 길이었다. 마침내 간첩 침투라는 고통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잔해를 보고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던 신추에 도착했다. 끝 모를 하늘처럼 트인 신추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숙희와 나란히 바위에 걸터앉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쏜살같이 뛰어와 얼굴에 달라붙었다. 출렁이는 바다 위를 어린 어머니가 까르르 웃으며 온통 뛰어다녔다.
나는 숙희의 어깨를 가만히 얼싸안았다. 힘주어 껴안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안고 바위처럼 앉아있었다. 그녀는 거문도로 내려오는 동안 내 마음 가는 대로 맡기려는 듯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늘과 바다가 어우러져 겹쳐진 수평선에 낙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낙조로 떨어지는 태양의 언저리가 붉게 물들었다. 낙조는 붉었고 바다로 떨어진 낙조는 더욱 아름다운 빛으로 출렁거렸다. 붉은 해가 빠르게 바다로 가라앉고 있었다. 숙희의 얼굴에도 낙조가 있었다. 붉은 노을이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에, 발그레한 볼에, 어깨 위에서 까르르 웃으며 온통 뛰어다녔다. 수평선 끝자락에 고깃배의 불빛들이 별빛처럼 듬성듬성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빛은 아득히 출렁이는 너울에 가라앉아 사라졌다가 다시 떠오르며 나타나곤 했다. 붉은 해가 바다 속으로 숨어버리자 어둠은 순식간에 수평선을 덮었다. 서둘러 산을 넘어 마을로 가지 않으면 칠흑같이 캄캄한 밤길이 될 일이었다.
우리는 신추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산 정상에 이르자 이미 어둠이 끝섬을 집어삼켰으나 발아래의 항구는 오히려 한낮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의 배 속과도 같은 명당이었던 항구는 여전히 물위에도 바다에도 똑같은 크기의 불빛을 잉태시키고 영롱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끝섬의 항구는 아득한 아름다움뿐 어둠이 결코 두렵지 않았다. 산꼭대기정상에 당당히 서서 벅찬 감격으로 끝섬을 호흡하는 그녀를 나는 한동안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마을로 내려와 활어와 매운탕으로 저녁을 했다. 약간의 술도 곁들였다. 그녀는 더없이 행복한 얼굴이었다. 이제라도 그녀에게 나에 대한 믿음을 각인시켜 주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홀로 끝섬에 내려와 자살에 실패하고 죽기를 작정하고 술에 꼬꾸라지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그녀를 잃지 않으려 염원했던 것이 진정 다행스러웠다.
이제 귤 밭으로 가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어머니 산소에 올릴 술과 간단한 포와 과일을 준비했다. 그녀와 나눌 작은 샴페인도 마련했다. 손을 잡고 귤 밭으로 향했다. 산등성이를 넘을 때는 없던 달빛이 어느 결에 둥실 떠올라 수평선을 밝히고 있었다. 어느 순간 별들도 하늘과 바다에 떠올라 반짝였다. 앙증한 해수욕장에는 달빛과 별빛이 쏟아져 내려와 파도에 반짝였다. 띠를 이루며 어깨동무를 하고 해안으로 달려오는 하얀 포말에 달빛도 별빛도 일순간 묻혔다. 하얀 영원을 품에 안고 내처 달려온 파도는 해안을 탐하고 되돌아가기를 수억 년은 즐겼을 터였지만, 어제도 그랬듯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을 것이다. 아아, 숙희와 나의 끝섬이, 어머니의 끝섬이 별빛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마침내 산소에 도착했다. 준비해 온 과일과 포를 정중히 배치했다. 어머니 산소에 엎드려 숙희를 인사시키기에 달빛은 손색없이 그윽하였다. 숙희가 먼저 내게 술을 따라주었다. 어머니에게 술을 올리고 절을 하고는 어머니 무덤에 올렸다. 이어서 숙희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숙희는 예를 갖추어 어머니에게 큰절을 했다. 정성스런 몸짓으로 예를 올리는 그녀가 더없이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숙희가 있는 한 이제는 어머니 앞에서 더는 울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귤 밭 작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또 다시 어머니의 체취를 더듬었다. 초라한 부엌이며, 흙 때 묻은 손잡이와 썩은 귤 조각이 뒹굴던 헛간 창고, 작은 바람에도 요란하게 흔들리는 창문을 어루만지며 다시 어머니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훌쩍이지 않았다.
숙희가 방 정리를 끝내고 가볍게 술자리를 마련했다. 어머니에게 드렸던 과일과 포와 샴페인으로 바닥에 마련한 술자리는 보잘것없었으나 둘만의 신혼여행 기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샴페인으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다. 알싸한 향긋함이 입안을 맴돌다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퍼져나간 샴페인은 그녀의 얼굴을 붉혔고 나의 눈에 사랑을 갈구하도록 유혹하였다.
촛불이 운치를 더해 주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불꽃을 젖혔다가 일으켜 세우며 그녀와 나를 소중하게 밝혀주었다. 그 살랑거리는 촛불 속의 숙희는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오늘 내내 단 한순간마저 잊고 싶지 않으리만치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샴페인 향이 났다. 향긋하고 순백한 입술이었다. 그녀의 꽃잎 속 살내음 또한 순백이었다. 봉곳한 복숭아 사이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숨결을 애무했다. 숨결은 깊고 맑았으며 따뜻했다. 어느 순간 작은 돌기가 입안에 살짝 들어왔다. 치아를 움직거려 잘근거려 보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돌기를 통하여 생명을 싹틔우던 기억할 수 없는 동물의 타고난 습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몸에서 작은 경련이 감지되었다. 나의 모두가 일깨워져 거룩하게 솟아났다.
그녀는 봄꽃이었고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었다. 내 몸 안에 그녀의 몸 안에 서로가 있었다. 다시 아담이었고 이브였다.
아침 일찍 눈을 뜨니 그녀가 옆에서 어린아이처럼 곤하게 새근거렸다.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천년은 함께 살아온 여인 같은 착각이 일었다. 연인의 행복이 이럴진대 부부의 행복은 얼마나 깊을까 생각하니 그녀의 소중함이 더욱 새로웠다. 그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다가 또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숙희는 이미 가벼운 화장을 끝내고 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둘러 채비를 해야만 했다. 숙희에게 왜 깨우지 않았느냐며 통박을 부리려다가 그녀 또한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듯싶어 속내를 감췄다.
우리는 귤 밭을 나와 먼저 교회에 들렸다. 목사를 만나고 싶었으나 만나지 못했고 여신도를 만나 자초지종과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여신도는 신도가 더 늘어나는 것에 고무된 듯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녀와 나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기도를 했고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아침을 해결하고 여수행 여객선에 승선했다. 하지만 선실은 평소보다 적은 인원에다가 문득 낯선 분위기의 냉기마저 감돌았다. 태풍주의보가 발령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술렁거렸다. 소곤소곤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승객들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완연했다. 나는 슬그머니 그들 가까이로 다가가서 대화를 엿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신경을 더욱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지난밤 대통령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아침 일찍 짤막하게 서거 방송만이 있었다고 했다. 때가 때이니만큼 비상계엄령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사건의 진위가 드러나진 않았지만 대통령의 죽음은 18년간 이어져 온 장기 집권의 붕괴를 의미했다.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가 오게 되었다고 침을 튀기며 열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며칠 전 부산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반독재투쟁을 벌였다. 야당 총재의 제명에 자극받아 분노한 사람들이 부산시청 앞에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경찰력이 무너져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 공수부대의 무력진압에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고 대학생과 시민은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마침내 학생과 시민은 물론 노동자까지 합세하였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이어 위수령이 선포되었다. 시위는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그 불씨가 단초가 되었다고 했다.
한동안 나라가 어수선해질 것 아니냐며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행여 북에서 어떤 징후라도 보인다면 나는 곧바로 징집될 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결혼이나 거문도에서의 정착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튀어나갈 것이 자명했다.
불안한 마음에 갑판으로 올라간 숙희를 불러 내렸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녀는 남동생을 걱정하는 듯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손을 잡고 힘을 주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녀는 더욱 불안해하며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멈춰 있었다. 종착부두인 여수항에 내렸으나 사람들의 부산함도 전 같지 않았다. 배를 타거나 내리는 사람들도 현저하게 줄어 있었다. 서성이는 사람들도 하나 없이 모두 바쁘고 잰 걸음이었다. 개찰구를 빠져나오자 경악할 소식이 전해졌다. 대통령은 총탄에 맞아 암살된 것이고 범인이 대통령과 최측근인 부하라는 것이었다.
광주로 향하는 길이 더없이 멀게 느껴졌다. 광주에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은 초조해졌다. 왠지 모를 불안함도 가중되었다. 숙희가 서울에서 미리 연락을 해두었던 터라 서울에 있는 여동생을 빼고 모든 가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큰딸이 애인과 함께 온다고 한 것은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광주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와 의논하여 정종과 고기, 그 밖의 선물을 샀다. 초면임을 의식해 좀 더 과한 선물을 사려는 나와 약한 선물을 고집하는 알뜰한 숙희와의 언쟁에 결국 내가 양보하고 말았다. 직장도 없는 주제에 마음만 앞세웠던 욕심이 그녀의 알뜰함에 민망해졌다.
도청에서 10분 거리인 숙희의 집은 그다지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은 평범한 분위기였다. 작은 마당이 있는 집 언저리에는 탱자나무 울타리로 옆집과의 경계가 이루어져 있었다. 겨울철이어서 말라비틀어진 탱자나무 가시가 어지럽게 엉켜 서로를 찔렀다.
먼저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어서 순서대로 오빠와 올케에게 인사를 했고 남동생과는 악수를 했다. 아버지는 왜소했지만 오빠나 남동생은 제법 몸집이 튼실했다. 남동생의 엄지손가락 끝은 돌덩이 같이 느껴졌는데 탄탄한 힘이 감지되었다. 어린 조카들은 종합선물세트를 들고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서울로 일찍 상경하여 사투리를 쓴다고 못 느꼈던 숙희도 가족들과는 광주 사투리를 감칠 나게 썼다.
숙희 아버지의 의례적인 물음에 솔직하게 답변했지만 보잘것없는 내 처지가 공개되면서 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숙희 아버지의 말수가 점점 줄었고, 그럴 때마다 숙희는 나를 변론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 숙희가 몹시 안쓰러웠다. 숙희의 오빠는 아버지가 물었던 일상적인 물음 외에는 더 물어볼 것 없다는 듯, 데워진 정종만을 말없이 마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정종을 가득 채워주었다. 나는 침이 마르는 갈증을 느끼던 터라 정종을 한숨에 들이켰다. 따뜻한 온기가 식도를 타고 온몸의 핏줄로 내달렸다.
“사내라카믄 그 정도는 해야쟤!”
술 마시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는지 숙희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려 숙희를 바라보았다. 유일한 응원군인 숙희 앞에서 내 초라함을 감추려는 보잘 것 없는 위장술이었다.
그녀가 울먹이며 털어놓았던 바람피운 아버지의 얼굴, 그녀를 몰아붙여 타향의 식모생활로 내몰았던 얼굴, 그 얼굴은 아버지에게 없었다. 왜곡되고 맹목적인 신앙생활로 형제간의 불화를 촉발시킨 올케, 그것을 방관한 오빠, 그들에게도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들도 변한 것일까? 숙희가 제일 안타까워하는 막내 남동생만이 진즉부터 나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정종의 따스함이 몸속에 자리 잡으면서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긴장이 다소 풀어졌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처음의 긴장을 바닥에 스르르 내려놓고 말았다.
“거시기, 혹시 앞으로의 계획은 머시여?”
숙희 아버지의 물음에 거문도 귤 밭의 내역과 미래의 계획을 설명했다. 갑자기 아버지의 표정에 생기가 돌고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비록 섬이라고는 하지만 적지 않은 면적의 땅과 귤 밭이 형편없던 체면을 살려준 셈이었다. 그것은 재산에 연연한다기보다 오로지 딸을 시집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당연한 마음일 뿐이려니 생각되었다.
잠깐 방심한 사이 정종이 서너 잔씩 빠르게 옮겨 다녔다. 아버지가 마시고 내게 따라주었고 오빠가 마시고는 또 내게 따라주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정종이 신기하게도 착착 달라붙고 감칠맛이 입안을 녹였다. 정종을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마다할 수도 없어 멈추지 못하고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장시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술잔이 돌수록 별반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에 웃음소리가 커졌다. 대통령의 암살사건과 앞으로 전개될 정국에 대해 격론도 벌였다. 북한의 돌발 행동을 걱정하는 아버지와 공무원의 파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는 오빠, 투쟁으로 비로소 민주화의 봄을 얻어냈다는 남동생 사이에서 나는 정종만 마셨다. 정치나 시국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술에 무너졌다. 술이 무너뜨린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이미지나 기대조차 모두 무너뜨렸다. 정종은 뼈마디마저 낙지처럼 흐물흐물 무너뜨려 나를 팽개쳐 놓아버렸다. 그들의 논쟁이 어느 틈에 가물가물 들리다가 사라졌고 혼미하게 증발되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이미 술주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마비된 혀가 발음을 비틀며 헛소리를 밖으로 밀어내었다.
“아버님, 숙희 씨 불쌍합니다! 따님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꺼억.”
어디서부터 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주정이었다. 점수를 따도 시원찮을 판에 난데없이 벌어진 객기였다. 그러나 이미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술이란 놈이 오로지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버님, 숙희 씨 고생시키지 마십시오. 눈물 납니다!”
무엇보다 숙희가 소스라치게 놀랐고 격론을 벌이던 가족들도 일순 조용해졌다. 부모가 자식을 고생시킨다는 항변은 대관절 어느 근거로 비롯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숙희가 자신의 집안사정을 이야기하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내 마음속에도 은연중 숨어있었던 모양이다. 설령 내재되어 있던 불만이라고 치더라도 첫인사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럴 자리가 결코 아니었다. 남동생은 어이없어 하며 실소를 지었다. 오빠는 그의 아버지가 능욕하는 것을 보며 얼굴색이 검붉게 변해 버렸다. 그러나 나는 가족들의 가느다란 자부심인 치부마저도 땅바닥에 팽개쳐 곤두박질시켰다.
“숙희 씨, 하고 싶은 말 많잖아. 불만이 뭔지 속 시원히 말해 봐요.”
나의 주책에 남동생이 쌩하고 찬바람을 휘둘렀다.
“형핀없는 사람이고만! 누나는 이 사람이 뭐가 좋다그 데꼬온 거여?”
“영호야, 너 손님한테 그게 뭔 소리니?”
숙희가 두둔하고 나섰다. 방 안 공기는 점점 싸늘하게 냉각되어 얼어버렸다.
“근게 데끄올 사람이 없어서 이런 사람을 데꼬온 거여! 초면에 술도 지대로 조절하지 못함시롱 이거시 뭐당께?”
가뜩이나 숙희를 믿고 따르던 남동생 영호의 불만이 제일 컸다. 그만큼 나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활발한 저항운동을 한다던 동생의 열정적인 성격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나는 절제하지 못하고 형편없이 취해 계속 주책을 부렸다. 끝내는 미처 숙희가 제지하기도 전에 그녀의 올케와 오빠에 대한 불만도 내뱉고 말았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올바로 믿어야지. 혼자만 잘난 체하면 다 용서됩니까?”
오빠의 반응은 더욱 거셌다. 올케의 신앙생활을 들먹인 것이 화근이었다. 오빠가 벌떡 일어나 나의 멱살을 잡으며 언성을 높였다.
“대체 무신 억하심정이 있는 짓거리여 시방. 잘 보여도 시원찮을 판에……. 숙희 넌 으디서 이밖에 안 되는 넘을 사웃감이라고 데꼬온 게여!”
숙희가 울음을 터뜨렸다. 꼴이 우습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조차도 자각하지 못하고 비틀댔다. 도대체 언제부터 생긴 버릇인지 측정할 수가 없었다. 사사건건, 부딪히는 족족 시비를 걸게 되고 불만을 쏟아내고 문제를 일으켰다. 그 행동이 점점 과격해지고 잦아지는 것이 거의 병적이었다. 술이 깨면 곧 후회할 잘못을 서슴없이 되풀이하는 작태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내 안의 또 다른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술만 마시면 내 속에 통제할 수 없는 악마의 씨앗이 자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숙희가 흐느끼면서 나를 변론했다.
“선호오빠, 제발 이러지 마! 이 사람도 불쌍한 사람이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아직 서러워서 그래. 우리한테 기대고 싶어서 투정부리는 거야. 오빠가 이해해.”
그러나 오빠는 숙희의 만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소리쳤다.
“영호야, 네가 이 사람 좀 안고 밖으로 나와. 우선 근처 여관에 데리고 가서 재워야겠어!”
숙희의 요청에 영호가 양팔을 당차게 쥐어틀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영호의 힘은 굵고 매서웠다. 아마도 소리치며 눈물로 만류하는 숙희의 말을 영호가 따르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더욱 곤혹스럽게 전개될 뻔했다.
나는 영호에게 맥없이 질질 끌려 나와 인근 여관에 집어넣어졌다. 말귀라고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동물 같은 신세였다. 그런 내 꼴을 나는 알아보지 못했다. 토했다. 언제부터인가 술만 마시면 토했다. 리처드에게 주먹을 휘두를 때도 토했고 민기의 입대 송별 술자리에서도 토했다. 마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버려야 하듯 술과 함께 버려졌다. 숙희에 의해 토한 옷이 벗겨지고 웃통이 벌거숭이가 되었다. 내 옷을 벗기며 숙희는 훌쩍였다. 수건에 물을 적셔 나의 얼굴과 웃통을 닦아주며 그녀는 훌쩍였다. 선호가 여관으로 찾아왔다. 부끄러웠다. 한없이 부끄러웠다. 토하고 나서 다소 정신이 돌아온 나는 숙희의 오빠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친구야. 시방도 이란디 어케 자네를 믿고 동상을 맡기것능가!”
숙희의 말대로 온전히 기대고 싶었던 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피붙이 하나 없이 외로웠던 것이 그녀의 가족 앞에 환희로 벅차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족끼리의 격론은 기대할 수 없어도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도 없었던 외로움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절대 없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녀의 오빠 앞에서, 가족 앞에서 열 번 백 번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왜소하게 말라서 보잘것없는, 차라리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초라한 웃통이 부끄러워 두 팔로 가슴을 가렸다.
겨울이 되었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민주화의 봄이 온다며 모두들 흥분하고 들떠 있어 여느 겨울보다 사뭇 따듯한 겨울이었다. 휴교령이 해제되고 대통령이 다시 선출되었으며 긴급조치 또한 해제되었다. 정국이 빠르게 안정되어 가는 것과 때를 같이해 나의 귤 밭 소유권 또한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는 그동안 귤 밭을 재배해야 하는 앞날을 위해 틈틈이 공부를 했다. 우선 귤과 관련된 기술서적을 보면서 생면부지의 지식을 습득해 두는 것이 급선무였다. 또한 거문도와 광주를 오가며 목사를 만나고 귤 밭 이전에 필요한 관할부서를 다녔다. 거문도를 다녀올 때면 어김없이 광주에 들렀다. 술주정으로 실추되었던 이미지를 불식시켜야 하는 강박감도 있었지만, 마음 놓고 찾아뵐 수 있는 어른들이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좋았다.
방문 횟수가 늘수록 나의 이미지도 빠르게 회복되어갔다. 첫 방문 때의 술주정이 왜 그랬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서서히 그녀의 가족에게 이미 결혼한 것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특히 나에게 실망하고 불만을 품었던 남동생 영호도 나를 우호적으로 대했다.
숙희는 귤 밭에 정착할 예정인 봄에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직장을 계속 다녔다. 그녀에게 먼저 그만둘 것을 종용했으나, 미리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싫다고 하여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휘문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로 밤을 새울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숙희를 만나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12월 12일, 휘문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단행본 한 권을 편집해야 했으므로 밤을 꼬박 새우고 다락에서 잠깐 눈을 붙이려던 참이었다.
저녁을 먹기 전 숙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노수 씨, 나 할 말이 있는데 저녁에 잠깐 좀 만나줘!”
전화기 속의 그녀 목소리는 다소 가라앉아 힘없어 보였다. 약속 장소를 경양식으로 잡는 것을 보니 그녀가 긴히 할 말이 있으려나보다 생각하며 충무로로 나갔다. 그녀는 스파게티를 주문했고 나는 볶음밥을 시켰다. 그러나 식사를 모두 마칠 때까지도 숙희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녀를 재촉하면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아 그녀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다. 숙희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노수 씨…… 나, 아이 생겼어.”
잠시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숙희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아래로 향하고 오물오물 스파게티의 마지막을 음미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어깨를 껴안았다. 그녀의 심장소리가 어깨를 타고 내 가슴으로 빠르게 흘러들었다. 그녀가 머리를 살며시 어깨에 기대어 왔다.
“노수 씨,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축하할 일이잖아! 걱정하지 말고 낳자.”
“미안해. 결혼 전까지는 집에다 말하지 않기로 해.”
“알았어. 신비롭다! 우리한테 아이가 생기고…….”
그녀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어깨에 몸을 의지한 채 눈을 감고 잠이 든 듯 한참을 기대어 있었다. 숙희는 여자로서의 온전한 행복을 호흡하고 있는 듯 보였다.
행복했다. 벅찬 감격이 울컥 복받쳤다. 사랑하는 여인의 몸 안에 또 사랑해야 할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니 경이로울 뿐이었다. 녀석이 세상에 나오면 적어도 내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힘들어 목 놓아 울고 싶을 때 내 앞에서 울게 하고, 잘못한 일이 있을 때 무작정 펑펑 때려줄 수 있는 아버지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녀석이 쉴 수 있는 그늘이 되고, 그래서 녀석이 뛰어놀 수 있는 언덕이 되고, 그래서 녀석이 날아갈 수 있는 하늘이 될 것이다. 녀석보다는 내가 더 행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리할 것임을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휘문인쇄소 아르바이트 일은 늦은 밤으로 미루어야 했다.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도 숙희는 내 어깨에 기대어 내내 다소곳하였다. 얼마쯤 가던 버스가 한강다리에 못 미쳐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무슨 큰 사고가 있었는지 다리 앞은 한강을 건너려고 기다리는 차량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앞좌석에 앉은 승객들이 갑자기 웅성거리며 소란을 떨었다. 뒤이어 총을 든 군인이 버스에 올라탔다. 승객들은 물론 숙희와 나는 적잖이 놀라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혹시 탈영한 군인이라도 잡기 위해 검문을 하려나 싶었다. 그러나 다리 앞에는 육중한 탱크가 가로막고 있었고 무장한 군인들이 트럭에 실려 분주히 이동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띠였다.
결국 버스는 그녀의 집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한강다리를 건너지 못했다. 숙희와 나는 군인들에 의해 강제로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야만 했다. 통행금지가 밤 10시로 앞당겨졌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통행금지에 대한 안 좋은 기억과 함께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우리는 여관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휘문인쇄소의 아르바이트는 양해를 구했다. 이미 특수 상황이 벌어진 것을 알고 있던 사장은 납기를 다음으로 미루어 놓았다고 전했다.
그녀의 입술은 여전히 향기롭게 개화되었고, 봉긋한 앞섶은 숨 막히는 갈증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녀의 온몸을 사랑했고 그녀는 나의 온몸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녀와 나의 육체적 나눔은 서로를 탐하고 받아들이기 이전에 숭고한 사랑이 동반되었다. 그녀와 나는 태초의 아담과 이브로서의 거룩한 사랑을 주고받았다. 사랑의 씨앗이 그녀의 몸속에 착상되어 자라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랑 또한 새록새록 자라나고 있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