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기행] 중구
서울사랑 매거진에서....
서울의 중심.. 대한민국의 중심...
조선시대, 한양(漢陽) 도성(都城)의 남부 절반을 차지했던 중구. 크기는 10km²로 서울시 면적의 1.6%에 불과하고.
상주인구 역시 14만 명 수준이다. 서울의 25개 구 중 크기와 인구 모두 최소인 자치구. 하지만 중구가 지닌 내공은 깊다. 대한민국 역사·정치의 중심이요, 경제․문화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종로구와 쌍벽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맞다. 종로구와 중구는 조선 516년(1394~1910년), 일제강점 35년(1910~1945년), 그리고 현대(1945년 이후)에
이르기까지 ‘서울(한양)의 핵(核)’, 아니 ‘대한민국(조선)의 핵’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600년 역사가 들고 나는 곳
우선 역사. 중구는 한국의 600년 역사를 지켜본 증인이다. 1394년 개경(開京)으로부터 한양(漢陽)으로 천도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즉위 7년인 1398년 한양 도성의 신축을 완성한다. 도성에 4개 대문(大門)과 4개 소문(小門)도 함께
낙성한다. 그 중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과 남소문인 광희문(光熙門)이 중구에 소재하고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숭례문은 대한민국 국보 제1호다. 삼남지방에서 한양 도성으로 들어오거나, 그 쪽으로 가는 길손들이 반드시 거쳐야 했던 문.
칠패(七牌)거리에 입하될 삼남지방의 물산(物産)들이 통과하던 곳, 주상 전하의 어명(御命)을 지닌 어사 박문수(朴文秀)가 허름한 선비 복색으로 삼남을 향해 출사(出師)하던 곳.
숭례문은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기록됐으나, 2008년 2월 10일 한 광노(狂老)의 방화로 거의 소실된 후, 현재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현판이 다른 대문과 달리 세로로 돼 있는 바, 이는 조산(祖山)인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첫 현판을 쓰면서 비롯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한양의
하수도 역할을 해온 관문이다. 그래서 이름도 시구문(屍軀門) 또는 수구문(水口門). 한편 숭례문과 광희문 사이엔 해발 265m의 남산(원명 목멱산木覓山)이 북으로 중구를 내려 보고 있다. 조선 시대 디지털 통신수단이었던 봉수대가 있는
남산 일원은 100만㎡ 넓이의 공원으로 지정돼 시민을 품안에 거두고 있는 바, 서울에서 가장 큰 공원이다.
개화기 몸부림의 흔적, 장충단
남산 북동 자락의 장충단(獎忠壇) 역시 역사의 숨길이 살아 숨 쉬는 공간. 2월 중순 토요일 해거름,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내려 6번 출구를 나선다. 을지지구대로 바뀐 공원파출소를 끼고 들어가는 겨울 황혼녘의 장충단공원은 고요한 설움이다. 한여름 인근 달동네 악동들의 단골 피서처였던 어린이 수영장은 동국대에 이름을 앗긴 채 경로당으로 변신,
복판의 화강석을 바라보고 있다. 비석은 순종(純宗)의 휘호 전서(篆書)를 기둥에 새긴 채 이곳의 유래를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다.
장충단, 서울시 무형문화재 1호. 이곳은 대한제국을 지키기 위한 조야의 분투와 일제의 간악한 조선혼 말살 음모가 실타래처럼 엉킨 역사의 현장이다. 장충단은 한일병탄(韓日倂呑)이 되던 1910년 고종(高宗) 황제의 명에 의해 차려졌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일당으로부터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보호하기 위해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훈련대장 충의(忠義) 홍계훈(洪啓薰)을 비롯한 호국 영웅들이 배향 대상이다. 군훈련소인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단을 꾸미고 봄 가을 두 번 순국 장졸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한일병탄 직후 장충단 일대 구도는 돌변한다. 일제가 단을 치우고 일대를 공원으로 지정해 벚나무 등을 심고 각종 시설물을 꾸민 것이다. 상해사변 때 전사한 일본군을 기리는 '육탄 3용사상(像)'을 세웠는가 하면, 호텔신라 자리엔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기리는 절(博文寺)을 창건한다. 한술 더 떠 경복궁(景福宮) 선원전(璿源殿)과 부속 건물을 뜯어다 본전과 서원 건물로 쓰고 경희궁(慶熙宮) 흥화문(興化門)을 정문으로 쓰는 등 조선 능멸의 극치를 연출한다.
1945년 광복 후 일제 잔재가 소멸되고 애국 열사 동상과 비석들이 속속 세워져 장충단의 정체성을 돈독하게 한다. 임진왜란 때 무공을 드높인 사명대사(四溟大師)와 헤이그 밀사사건의 주역 이준(李儁) 열사의 동상, 을사늑약 때 순국한 외교관 이한응(李漢應) 열사 비석을 차례로 둘러보다 인라인스케이트장 근처에서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라는 이름의
오석비(烏石碑)를 발견한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유림대표 137인이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장문의 청원서를 회의에 제출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이제 단(壇)에서 장충체육관 쪽으로 놓인 수표교(水標橋)를 건넌다. 화강석을 나무처럼 정교하게 쪼아 맞춘 이 다리는,
본시 청계천2가에 있었던 것을 1963년 개천 복개에 따라 옮긴 것이다. 광통교(廣通橋)처럼 정월 대보름 답교놀이 때 선남선녀의 대표적 ‘만남의 광장’이었던 이 다리를, 오늘 저녁엔 몸을 꼭 붙인 청춘남녀가 스쿠터로 건넌다.
장충단은 현대사의 굴곡이 녹아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박정희(朴正熙)와 김대중(金大中)이 사활 건 유세를 편 곳도 이곳이고(71년 4월 장충단공원), 장충체육관에서 종신 대통령으로 뽑힌 독재자가 국모로 추앙받던 아내를 잃은 곳도 이곳이다(74년 8월 15일 국립극장). 그런가 하면 대한민국 부자의 대명사였던 재벌 회장이 살던 곳도 이곳이었고(체육관 건너편), 새누리당의 잠룡(潛龍) 둘이서 어릴 적 함께 다닌 학교도 이 곳이다(장충초등학교).
민주화의 메카를 품에 안은 곳
중구엔 민주화의 전환점을 이룬 군중의 운집처가 적지 않다. 우선 태평로. 이곳은 1960년 4월 이승만(李承晩)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학생과 시민, 교수들이 경무대(현 청와대)를 향하여 분노의 행진을 했던 거리. 경찰의 발포로 학생, 시민이 희생당함으로써 독재 정권은 종말을 향하여 치닫고 이승만은 결국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한다.
다음 서울역 광장. 1980년 5월 15일 전두환(全斗煥) 신군부의 독재에 맞선 대학생, 시민 20만의 노도와 같은 행진이 서울역 광장으로 집결, 계엄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 시위는 신군부의 광주 탄압으로 이어져 실패한 듯 보였으나, 7년 뒤인 87년 6월 18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李韓烈) 군의 최루탄 피격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 100만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 집결하면서 결국 6·29 민주화선언을 쟁취하는 단초가 됐다. 그 후 시청 앞 광장(서울광장)은 2002년 6월 한일월드컵대회 땐, “대~한민국!”의 함성이, 2008년 5월엔 미국산 쇠고기수입 반대 시위로 100만개의 촛불이 타오르는
참여민주주의의 광장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중구는 대한민국 민주화의 분기점이 된 주요 역사 현장을 품에 안은 유서
깊은 곳이다.
중구는 인근은 한동안 대한민국의 입법부, 사법부의 중심이었고, 그리고 지금도 서울시 행정의 중심이다. 국회는 1975년 여의도로 이전하기까지 태평로 서울시의회(옛 부민관) 자리에 있었다. 대법원을 비롯, 각급 법원과 대검찰청 등의 청사도 1995년 서초구로 이전하기까지 서소문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서울시 청사는 정부 수립 후 줄곧 현재 재건축 중인 신청사 자리에서 시정의 중심축으로 존재해 왔다. 지금은 서소문에 임시 청사가 있다.
아름다운 청년을 만나다
서울광장을 뒤로 하고 대한민국 언론의 중심 프레스센터를 지나 청계광장에 이른다. ‘절반의 성공’, ‘거대한 어항’이라는 비아냥이 없진 않지만, 수다한 시민과 외국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청계천을 따라 내려오다가 평화시장 근처 버들다리 위에 선다. 이곳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全泰壹) 열사의 흉상(제작 임옥상, 글 김정환)이 서 있다.
전태일은 누구인가! 1948년 대구 출신으로 봉제공장 노동자였던 그는, 1970년 11월 13일 22세의 꽃같은 나이에 분신자살로 삶을 마감한 당대의 노동운동가다. 남대문국민학교가 최종학력인 그의 분신 이유는 간단했다. 열악한 근로환경과
처우에 대한 절망. 그는 당시 자신이 속했던 청계피복노동조합원들이 당하는 노동착취를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미성년 소녀 고용 착취, 과도한 노동 착취(15세 시다공의 주당 근로시간 98시간), 환기도 안되는 열악한 환경, 용변 시간제한,
필름 없이 X-레이 찍기, 휴무일 격주제 2일 등. 그러면서 근무시간 10~12시간으로 단축, 매주 휴무, 성의 있는 건강검진, 시다공 임금 50% 인상(150원으로) 등을 요구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호소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자 사회의 비정함과 무관심, 미래가 없는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형식에 불과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고 자신도 그 불에 타들어가 생을 마감한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분신은 처참했으나, 그의 의거는 우리 사회의 노동 인권이 개선되는 단초가 되는 동시에 세계 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남겼다.
전태일의 흔적을 지나 청계천을 더 내려가다가 흥인지문(興仁之門)을 왼쪽으로 두고 방향을 튼다. 두타타워 등 거대한 섬유제품 쇼핑몰을 오른쪽에 두고, 길 건너편을 보니 거대한 구조물이 축조되고 있다. 이름 하여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신축 현장. 이라크 출신의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 작 '환유의 풍경(Metonymic Landscape)'. 주변의 사물을 참조하여 특정의 사물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수사학적 의미의 '환유'와 인간과 환경 사이의 관계를 물질적으로 재현한다는 의미의 '풍경'을 조합한 이 작품은 이름처럼 몽환적이면서도 세련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하디드는 조선시대의 성벽 이미지를 시발로 이 공간이 지니는 역사적, 문화적, 도시적, 사회적, 경제적 요소들을 환유적으로 통합하려 애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환호와 탄식… 이데올로기를 녹여낸 ‘용광로’
이곳은 반세기를 뛰어넘는 세월동안 대한민국 스포츠의 메카였다. 경평(京平)축구대회가 1930년 제2회를 시발로 6회(1935년)·7회(1946년) 이곳에서 개최됐고, 이후로도 수다한 경기가 열렸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1960∼70년대 이곳에서 축구대표팀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온 국민은 일손을 멈추고 라디오와 TV 앞에 모여들었다. 1970년 9월 한국대표 1진 청룡 팀이 포르투갈 벤피카 팀과 가진 경기에서 벤피카의 세계적 스타 에우세비오에게 한 골을 허용했지만, 이회택이 기어코 동점골을 뽑아내 1 대 1로 비기자 온 국민이 환호했다. 축구뿐 아니라 육상, 심지어 국제타이틀 복싱경기도 열렸다. 겨울철엔 한쪽에 아이스링크를 설치해 스케이트장으로도 활용했으니 말 그대로 대한민국 유일의 종합경기장이었던 셈.
이곳은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이 얼룩진 공간이기도 했다. 1925년 5월 일제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화하기 위해 조선 500년을 지켜온 성벽을 허물고 근대식 운동장(당시 명칭 경성운동장)을 지은 자리가 바로 조선시대 훈련도감(訓鍊都監) 분영인 하도감(下都鑑) 터였다. 그런가 하면 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 청나라 장수 오장경(吳長慶)이 군사 5000을 인솔해 진을 친 곳도 이곳이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고종이 파천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1945년 12월31일 영하 20도를 밑도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김구(金九)와 임시정부가 이끄는 신탁통치 반대운동대회가 열렸는가 하면, 해방공간 이념 투쟁의 좌편향 쪽에 서 있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의 궐기대회도 열렸다. 그뿐이었나.
북한의 대남 무력 책동이 있을 때마다 반공 궐기대회가 열렸고, 각종 기념행사도 열렸다. 아무튼 1984년 잠실종합경기장이 완공돼 동대문운동장으로 개명되기까지 이곳은 명실 공히 서울을 대표하는 운동장, 즉 서울운동장이었다.
그 옆 야구장은 또 어땠나. 서울운동장야구장이라는 이름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명소였다. 야구 시즌의 개막을 알리는 황금사자기대회를 비롯해 수다한 고교야구대회가 열렸고, 1982년 3월27일 프로야구 개막전 MBC 청룡 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가 열린 곳이기도 했다. 프로야구도 야구였지만 황금사자기, 청룡기, 봉황대기, 대통령배 등 고교야구가 열리는 날이면 모교 응원하러 온 졸업생들로 스탠드가 메워졌다. 삼삼오오 몰려온 졸업생들은 교가와 응원가를 목이 터져라 불러제꼈다. 이기면 이긴 대로 지면 진 대로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 밖으로 나와 인근 대폿집에서 축배를 들며 호연지기를 나누기도 했고. 잠실야구장의 완공에 따라 동대문야구장으로 개칭되자 그 역할도 고교야구 전국대회나 대학야구대회 등 아마추어 전용구장으로 축소되었다. 급기야 2007년 11월13일 ‘2007 서울시고교야구’ 가을철 리그 배명고 대 충암고의 결승전을 끝으로 문을 닫고 동대문운동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거대한 공사장으로 변한 동대문운동장에선 지금 유적 복원과 랜드마크 공사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 2008년 말 이곳에서 옛 서울성곽이 양호한 상태로 발견됐다. 흥인지문과 광희문 연결 선상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성곽은 길이 123m, 최고 높이 4.1m, 폭 8∼9m 규모로 태조 때 축조된 후 세종·숙종조 등 두 차례에 걸쳐 개축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성곽 양편에서 배수 시설인 이간수문과 방어 시설인 치성(雉城)도 온전히 보존돼 조선시대의 축성 양식을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특히 도성 안에서 바깥으로 물을 내보내려고 축조된 이간수문은 상부 홍예석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완벽하게 남아 있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유물 발굴 및 복원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특히 세종 때 축성된 석재엔 순천(順天)이란 지명이 새겨져 당시 전국에서 노역을 징발했음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서울시는 성곽 부분을 현 위치에 그대로 복원하는 동시에 야구장 터에서 발견된 하도감(下都監)터와 축구장 터에 있던 유구(遺構) 중 양호한 부분을 성곽 외부 공간에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일제의 횡포로 파묻혔던 조선의 흔적이 타임캡슐로 보존돼 있다가, 수십 성상을 거친 후 부활하는 기적. 동대문운동장은 고전과 현대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공존하는 ‘환유의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경제․문화 수월성도 탁월
중구는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수월성이 탁월한 공간이다. 먼저 경제부문. 10개 재벌(파산한 대우까지 11개) 중 3개 그룹의 본부가 있었거나(삼성=태평로, LG=남대문교회 옆, 대우=남대문경찰서 옆), 현재 4개의 그룹 본부가 있다(SK=을지로 2가, 롯데=소공동, 한진=남대문로2가, 한화=장교동).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도 중구는 경제의 중심이었다. 염천교(鹽泉橋) 칠패 거리에서 비롯된 장마당은, 남대문시장으로 외연을 넓혀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대표시장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이 근방을 돌아 볼 때, 빠트리면 안 되는 곳이 있다. 바로 옛 서울역사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발주해 도쿄대 교수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의 설계로 1925년 완공된 서울역사(당초 남대문역사)는, 일제의 조선 및 만주 수탈을 위한 물류 중심기지로 건설됐지만, 그 의도에 상관없이 한 세기 동안 배달민족의 애환을 굽어본 증인이었다. 경부(京釜)와 경의(京義)로 한반도의 남북을 이을 뿐 아니라 의주를 지나 만주로 통하는 동맥 역할도 했다. 일제강점기, 초근목피 하던 민초들이 남부여대 만주행을 했던 것도 이곳이요, 교통수단이 미흡했던 시절 명절 귀성의 출발점도 이곳이었으며, 60~70년대 이농민이나 철부지 처자들이 치열한 서울살이를 시작했던 곳도 이곳이었다.
서울역에서 숭례문을 지나 명동으로 향하면, 맞은편에 거대한 현대식 건물을 목도하게 된다. 포스트타워. 이 건물은 일제부터 광복 후 한 동안 우리 사회의 전화․통신을 담당했던 중앙전신전화국이었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조선은행 본점(현 화폐금융박물관) 건물, 오른쪽으론 조선저축은행 본점(옛 제일은행 본점) 건물이다. 조선저축은행 옆 6층 건물은 예전 미쓰코시(三越)백화점 경성 지점(현 신세계백화점 본관)이다. 이처럼 남대문로 일대는 일제강점 시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을지로1가 사거리 근방도 예전의 흔적을 적지 아니 간직한 추억의 공간이다. 외환은행 본점 부근은 예전 일제가 조선반도는 물론, 만주, 네이멍구(內蒙古), 둥베이(東北), 몽골, 러시아, 필리핀 및 말레이반도까지 확장시켜 대륙에 대한 침략자금의 공급, 기타 척식사업을 경영하던 동양척식회사(동척)가 있던 곳이다. 급기야 1926년 12월 28일 의열단원 나석주 열사가 동척을 기습하여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동척의 야욕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지금 롯데백화점 본점이 있는 자리엔 예전 한국산업은행 본점과, 국립중앙도서관이 있었다. 맞은편엔 지금은 한국전력 홍보관이 된 한국전력 본사(옛 경성전기 본사) 건물이 있다.
유행의 메카였던 명동
이제 예전 본정통(本町通․현 충무로)으로 불렸던 명동(明洞) 일대를 돌아보자. 일제강점기 명치좌(명치좌․현 명동예술극장)가 있었던, 그래서 당시 모던 뽀이와 모던 걸들이 연애질을 하던 이곳은 광복 후 암울한 시대에도 당대 문화예술인들이 출몰하던 첨단의 거리였다. ‘명동백작’ 이봉구, 시인 김수영이 은성다방(최불암 모친 운영)과, 나애심, 현인, 박인희 등이 부른 ‘세월이 가면’을 작사한 박인환과 작곡한 이진섭이 들락거리던 경상도집 등이 산재했던 문화 공간. 지금 종로구 신문로의 서울역사박물관에선 ‘서울반세기종합전3 명동 이야기-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3월 31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그 뒤 80년대까지도 유행의 첨단을 걷던 명동은, 한동안의 침체기를 거친 후 이젠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몰려온 관광객들이 실용적인 물품을 구매하는 상가로 변신해 있다.
7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에게 명동을 또 다른 노스탤지어를 선사하는 공간이다. 그 시절, 지금의 외환은행 본점에서 남쪽으로 들어오다 보면, 막걸리집 25시가 있었고, 인근엔 맥주집 카이저호프와 뢰벤브로이가 빈약한 경제력의 젊은이들을 유혹했다.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의 거점인 명동파출소를 겨우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면 유네스코회관 뒤 OB's 케빈에선 송창식과 양희은이 포크송을 불러댔고, 조금 고상한 이들은 사보이호텔 앞의 필하모닉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클래식 선율에 눈을 지긋이 감기도. 당시에도 앙팡테리블(enfant terrible)들은 새로운 사조를 좇았다. 필하모닉에서 계성여고 교문 쪽 참피온다방(프로권수선수 김기수가 주인)으로 가다 보면, 왼편에 르실랑스라는 술집이 있었는데, 이곳에선 대마초가 상습적으로 피워지고 있었다.
민주화 성지 명동성당과 YWCA회관
‘명동’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두 곳. 명동성당과 YWCA회관이다. 명동성당은 잘 알려진 대로 반독재투쟁을 하다 쫓긴 시위대가 단골 피신처로 찾던 곳. 그것은 ‘아름다운 바보’ 고(故)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평소 인자하기만 했던 김 추기경. 그러나 그는 박정희와 전두환에겐 쓴소리를 마다않던 시대의 양심이었다. YWCA회관은 위장결혼식이 열려던 곳으로 이름나 있다. 79년 10월 26일, 일명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의원 간선제로 최규하 총리를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하려고 했고, 재야인사들은 대통령 직선제, 유신헌법 폐지, 양심수 석방을 골자로 한 문민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대회를 열기로 한다.
방식은 위장 결혼식. 윤보선, 함석헌, 박종태, 임채정 등의 재야인사들은 그해 11월 24일 계엄군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대회장을 연세대 복학생인 신랑 홍성엽과 신부 윤정민의 결혼식으로 위장해 계엄군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윤보선과 함석헌 등을 각각 미행하던 경찰관들이 행사장에 난입, 아수라장이 됐고 이어 경찰관이 출동, 집회를 강제 해산한다. 집회 종료 후 경찰관에 의해 140명은 불구속 입건, 주동인물 중 윤보선, 함석헌은 소환조사 및 서면조사로, 기타 주동자 14명은 용산구 서빙고동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하고 퇴계로 3가로 향하면 남쪽으로 보이는 이 남산골 한옥마을. 98년 옛 수도경비사령부 부지에 조성한 이 마을은 인위적이라는 게 흠. 하지만 전반적으로 한옥의 맛을 흠미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한옥은 변형이 없는 순수한 전통가옥을 선정하였다. 조선조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尹)씨 친가는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 가옥을 그대로를 본떠 복원했고, 그의 부친인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댁 재실(서울민속자료 24)은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던 것을 이전했다.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서울민속자료 18)은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것을, 오위장 김춘영 가옥(서울민속자료 8)은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걸 이전 복원했다. 경복궁 중건시 도편수였던 이승업 가옥(서울민속자료 20)은 이승업이 1860년에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에 있던 것을 이전 복원했다.
한옥마을에서는 프로그램에 의해 진행되는 한국의 연극, 놀이, 춤 등이 공연되어 옛 문화를 접하며 배울 수 있는 장소로도 활용된다. 무엇보다 압권은 수시로 진행되는 전통 혼례. 여기서 열리는 혼례엔 유독 벽안의 신부나 신랑이 많은데, 그건 국제 결혼하는 한국인 배우자의 입김이 강력히 작용한 탓으로 사료된다.
이제 발길을 을지로 쪽으로 돌린다. 을지로3가 쪽은 타일 욕조 등 가옥용 집기류 도매상이, 을지로4~5가는 건어물 집산지인 중부시장이, 그 맞은편은 각종 화학재료와 타월 등을 파는 방산시장이, 그 옆으론 대한민국 섬유․봉제의 본류인 평화시장 군이 형성돼 있다.
문화의 중심 중구
문화적으로도 중구는 대한민국의 중심이다. 명치좌→시공관→국립극장으로 바뀐 기구한 명칭사의 명동예술극장말고도, 남산의 국립극장, 충무로아트홀 등 클래식 문화 공간 뿐 아니라, 국도극장, 중앙극장, 스카라극장(이상 폐쇄)과 대한극장, 명보극장 등 대부분의 개봉관이 중구에 있었다. 특히 ‘영화=충무로’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중구는 대한민국 영화의 산실이었다.
이제 중구 순례를 그칠 때가 됐다. 중구는 아직도 미흡한 유적 발굴을 위해 서소문성지 역사문화공원과 충무공 생가 기념광장, 박정희 전 대통령 가옥 기념 공간 조성, 광희문 주변 관광활성화, 성곽길 예술인의 거리 조성, 손기정 기념관 건립 등을 지속할 계획이란다. 문화를 원천으로 한 고부가가치 창출로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컬처노믹스(culturenomics)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