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곡 작사하신 이 상진 선생님에 대하여
선생님께서는 1946년 9월 내가 2학년때 모교에오셔서 바로 우리반을 담임해 주셨다.
너무나 재주가 많으셨던 분으로 문학, 붓글씨 등 다재 다능 하셨다' 해방 직 후는 교육과정(학생들에게 가르칠 법으로 정해진 교육내용)이 제대로 정해져 있지 않을 때라 선생님 임의로 우리 반은 2학년인데 붓글씨를 배우게 되는 행운을 갖도록 해 주셨다. 이는 일찍 소질이 발견되어 붓과 친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음악에 또한 실력을 돋보여 주신 선생님께서는 당시 중학교음악교사 자격 시험에 합격하셔서 중등교사자격(음악과)증을 따셨다.
우리 모교 교가 악보는 당시 음악교사자격시험에서 작곡부분 합격한 곡으로 교가가 없던 우리 모교 교가로 완성시키셨던 것이다..
4학년 학기말(당시는 9월이 신학기였음)이 다가온 6월에 6.25전쟁이 터졌다.
그리하여 9월에 새학년을 올라가지 못하고 유엔군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감행으로 수복한 후 6개월이 늦은 다음해 4월에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이때가 내가 5학년으로 올라가는 해인데 선생님은 또 우리 반 담임을 맡으시게 되었고 내리 이어 6학년까지 담임해 주셨다.
이때부터 교가는 물론 음악시간에 모든 노래는 계명창으로 외워 부르게 하셨고 또한 악보를 외워 쓰게까지 하셨다. 2부합창곡은 빠짐없이 그대로 가르쳐 주셨고. 6학년때는 우리에게 작곡까지 가르쳐 주시는 정렬을 불태우셨던 선생님이시다.
내가 사범학교에 입학했을때 우리반에서 시창(악보보고 바로 노래 부르는 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학생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 덕이었고,
신도초등학교총동문회를 서울에서 창립하면서 교가를 복원하여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의.철저한 가르침 덕분이었다.
2. 교가 악보에 대하여
엄사리에 신설한 초등학교 교명을 모교의 학교 이름 ' 新都'라는 이름을 찾아 놓았으나, 2005년 6월 3일 개교식 때에는 새로 지은 교가(이영찬작사, 이성진작곡)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첫 출발하는 신도초등학교는 신도초등학교총동문회와 아무 상관이 없는 학교라하며(공문서 보관하고 있음)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당시 회장은 복교를 포기 했었습니다.(2005년5월6일서울종로3가한일장 총동문회 운영위원회에서)
어렵게 新都라는 모교 이름을 찾아 놓았으나 개교식때 신도초총동문회회장 자리도 없었습니다. 그리하며 개교식때 교가는 새로 지은 교가(이영찬작사, 이성진작곡)를 불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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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 교가(이영찬 작사, 이성진 작곡)는
5행시로 작사가 먼저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작곡자가 5악절로 악보를 만들었습니다.
작곡형식에는 한도막형식, 두도막형식, 세도막형식이라는 것이 있는데 노래 가사가 5행시가 되어 있어 이러한 기본형식도 갖추지 못한 곡이 되어 버렸습니다. 작곡자가 조금 신경을 썼더라면 어느 한 부분 (보통 첫째악절이나 마지막 악절)을 되돌이표를 사용하여 보완하여 악곡형식에 대한 하자를 없앨 수가 있었습니다.
이를 보완하지 못하고 노랬말에 따라 그대로 5악절로 작곡하다 보니 무리가 따르게되고 곡의 흐름도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생겨났으며 마지막 마무리 부분이 약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이의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2) 44회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교가가 나와. 이를 교가로 채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계명창해보니 이상진 선생님께서 지으신 계명이 맞는 곡이었습니다.
원래 이 상진 선생님의 곡은 바(b)장조로 약간 높았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랬는지 바장조보다 1음 높은사(#)장조로 변조하여(음역을 전체적으로 내리기위해 일단 으뜸음이 1음 높은 것을 택한것 같음) 다시 1옥타브를 낮추어 음역을 설정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44회앨범에 수록된 교가는 전체적으로 음정이 너무 낮아 패기가 없고 쳐져 버렸습니다. 또한 작곡, 작사자도 나타나 있지 않고 붙임줄, 이음줄을 하나도 나타내지 않았으며 2절 가사도 없는 교가였습니다..
신도초등학교총동문회를 창립할 때 나는 바(b)장조로는 음역이 높아 우리가 부르기에 힘들어 누구나 부르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내림나장조로 복원하였었습니다. 계명을 외워가며 복원한 것이기 때문에 더러 오기가 발견되어 44회 앨범을 참고로 하고 10년동안 모교에서 가르칠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오기를수정하여 완전하게 복원하였습니다. 이것을 제9차 정기총회(2007.10.03)에서 만장일치로 결의 채택하여 지금의 모교 교가로 복원 되었습니다.
3. 맺는말
교가 (이상진 작곡 작사)를 복원한 곡으로 계승을 끝가지 주장 한 것은
(!).독립정신의 전통을 가진 모교 신도초등학교의 전통계승을 위한 것입니다.
일제때 사립학교설립은 곧 독립운동정신의 실천입니다. 사립신도학교(임기창선생님)),사립신성학교(김정묵선생님)를 모체로 일정때 출발한 공립학교(두마석계공립심상소학교)를 하방직후 신도초등학교로 학교명을 개명한바 이는 이러한 독립정신의 전통의 계승에 뜻을 둔 것입니다.
(2). 모교 교가(이상진 작사 작곡) 계승은 모교의 맥을 이었으니 전통이 계승되어야 함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3). 앞에서 지적한것처럼 신교가나 44회 앨범에 수록된 교가는 모두 음악이론상이나 악보의 하자, 곡의 표현상 하자가 너무 많아 영원한 모교의 교가로 채택 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4). 그런데 모교 교가 계승과 연계하여 조건을 내 건 모든 행동들은 모두 적절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장학금 모금 목표를 10년을 세워 추진 하느니 뭐니 하며 서면 약속을 해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현 학교장의 정년퇴임(2009년2월) 전에 결말 지을 일이기 때문에 그간 까페를 통하다가 그마저 답은 없고 글쓰기 제약을 받아 부득이 학교당국에 직접 모든 조치를 해 놓았습니다.(공문 발송 함).
이는 앞으로 10년 안팎에 신도초등학교총동문회 운영을 맡을 30회 전후한 여러분들의 짐을 지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이제는 밝힐 때가 된 것 같습니다.(질문에 답도 없고 글 쓸 권리도 없어지고 결말 볼 시한은 다가와 어쩔수 없음)
(5). 우리가 모교를 복교하고 학교상징(교가,교화등)을 계승하려는 것은 계룡시의 문화자산 발굴이란 큰 뜻과 이지역 교육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한 숭고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긍지를 갖읍시다..
1). 우리는 장차 내 손자를 이 학교에 보내고 덕이나 볼려고 모교를 복교하지 않았습니다.
2>. 사안마다 조건을 내세워 결정하려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대처들입니다.
(6). 우리 스스로 모교를 위한 활동을 총회의 결의에 의해서 얼마든지 지원해주고 추진 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렇게 총회를 통해 전체동문들의 의사를 존중하며 나 갈때 신도초등학교총동문회의 밝은 미래가 있고 총동문회를 정도의 길로 발전시켜 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덧붙입니다.
첫댓글 교가도 까득히 잊어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지세한 설명 글을 읽어보니 교가을 찾아서 흥얼흥얼 불러 보았지요 가슴이 뭉클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랫만에 들렸더니 열매님의 글을 접하게 되어 너무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모교를 찾고 모교 교가를 찾아 중얼거릴 수 있다는 이 모든 것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들이 주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은 정렬을 식히기엔 빠른 것 같아요 무엇이든 하고 싶어요. 모교, 그리고 新都案에 관련한 일에 내가 알고 있는 관심 사항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답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끄럽지 않게 당당한 길을 걷고 싶어요.
아불싸!!..,선생님 글에 분명 소감과 댓글 달았엇는데,,,등록을 안 했는지,,,없군요,..꼭 빠지지 않고 댓글 다는 운영자인데요.. 거듭 재송해요. 더러 그러네요. 그리고 요즘 무척 바뻐서 이 카페에 게시글 올리기만 햇네요.~~~얼마전 29회 정순 아우가 준 악보를 기타로 쳐 보앗네요, 옛생각나더군요. 저 개인적인 생각인데 우리가 부르던 교가라는 사실은 정말 중요하고 그 시절에 대단한 작곡이었다고 믿네요...그러나 지금 보니 군가 같기도 하고 먼가 좀 덜 끝난듯한 느낌은 있더군요,,,아마도 한 15번 연주하고 직접 불러 보앗네요....사견이오니 게의치 마세요...넘 애쓰신 선생님께 감사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