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고 있는 국민학생도 표적
증언자 : 김문수(남)/ 김철수(형)/ 최시형(매형)
생년월일: 1969. (당시 나이 13세)
직 업: 국민학생 (현재 무직)
조사일시: 1989. 2
개요
1980년 5월 24일 광주시 효덕동 효덕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동네 선배, 친구들과 놀고 있던 이 학교 5학년인 김문수가 공수부대가 쏜 총에 맞아 부상 당했다. 그날 공수부대끼리의 오인사격으로 김문수는 어깨에 한 발, 허리에 두 발의 총알이 박혔다. 곧바로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현재까지 무거운 짐은 들지도 못하고 상처부위의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5월 24일 그 장소에 함께 있었던 김문수의 형 김철수(당시 21세) 씨와 매형인 최시형(당시 18세) 씨의 당시 회고이다.
김철수 : 그날이 5월 24일이에요. 점심을 먹고 난 뒤 동네 선후배들끼리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고 있었어요. 운동장에는 야구를 하던 청년 20여 명과 구경하던 아이들 10여 명 정도가 있었을 거예요.
한참 야구를 하고 있는데, 백운동 쪽에서 시민군 7명이 탄 군용 트럭이 오더라고요. 학교가 거리보다 약간 높은 지대에 있어서 그런 장면들이 훤히 보여요. 시민군이 탄 군용 트럭이 학교 앞 사거리에서 멈추자 시민군 7명이 차에서 내렸어요. 시민군이 내리고 나자 군용 트럭은 방향을 돌려 시내로 갔어요. 바로 그때 계엄군들이 원제마을 쪽에서 장갑차를 앞세우고 엄청 밀려왔어요. 탱크와 군용 트럭에 탄 계엄군이 원제마을(효덕국민학교에서 지원동 쪽으로 난 군사도로변에 위치한 마을)에서 학교 앞까지 쭈욱 늘어섰으니까요.
아마 시민군들이 선제공격을 했을 거예요. 그것과 동시에 계엄군들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었지요.
최시형 : 장갑차에서 신호탄을 쏘고, 계엄군들은 M16을 허리에 대고 사방을 향해 무차별 난사를 했어요.
갑자기 총소리가 진동하자 우리는 각자 정신없이 도망을 갔지요.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동산교실로 숨었어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학교 뒤 쪽 약간 높은 곳에 동산교실이 있었어요. 동산교실에 엎드려 있는데, 어찌나 총을 쏘아대던지 총알이 핑핑 스쳐갔어요. 옆에 있던 애는 야구 글러브를 낀 채 머리를 감싸고 있는데 총알이 글러브에 있던 철사를 맞고 튕겨나가 살았대요.
무사히 몸을 피하고 나서 보니까 문수가 운동장 옆 비석에 쓰러져 있었어요. 문수가 죽은 줄 알고 기어가서 보니 피를 많이 흘린 채 있었는데 그래도 살아 있더구만요. 문수를 업고 길로 나왔지요.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더니 계엄군들이 우리를 보고 주위 가게로 들어가라고 했어요. 잠시 후 계엄군들이 붕대와 약을 가져와 응급치료를 해주었어요. 응급치료를 한 후 철수형 친구에게 자전거를 빌리러 갔어요. 그분이 문수를 자전거에 태워 원광대 부속병원(백운동 소재)으로 데려갔지요.
조사자 : 김문수씨는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총에 맞았나요? 그리고 치료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김문수 : 나는 그때 교실에서 놀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자 당황해서 학교 뒤로 숨으려고 했어요. 총알이 어찌나 빗발치던지 쉽게 도망칠 수 없었어요. 기어가다가 비석 부근에서 총에 맞았지요. 굉장히 아파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어요. 병원에 가서 보니까 왼쪽 어깨에 한 발, 허리에 두 발이 박혀 있었어요. 병원에서 총알을 제거하고 일주일간 통원치료를 받았습니다. 통원치료를 끝낸 후로도 한동안 학교에도 못 가고 집에서 몸조리를 했어요.
그런데 이상스러운 일은 내가 오랫동안 결석을 했는데도 생활기록부를 보니 전부 출석 처리되어 있었어요.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조사자 : 김철수씨는 총소리와 함께 도망친 후 어떻게 하셨어요?
김철수 : 나도 동산교실로 피했어요. 총성이 계속해서 30-40분간 울려댄 것 같아요. 총소리가 잠잠해진 후 군인들이 총을 들고 학교로 들어왔어요. 운동장에 들어와서 공포탄을 쏘더니 손들고 나오라고 소리를 치더군요. 교실에 엎드린 채 벌벌 떨고 있던 우리들은 손을 들고 나갔어요.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10여 명 정도 됐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데리고 학교 밖으로 나갔어요. 길 옆 낭떠러지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처박으라고 시키대요. 무서워서 시키는대로 하고 있었지요. 그때 동네 아저씨 한 분이 우리를 보고 와서 "우리동네 아이들인데 왜 그러느냐. 이 애들은 내가 보장한다"고 말해줘서 풀려났어요.
그렇게 마을을 향해 총을 갈겨댄 통에 온 동네에 야단이 났다고 해요. 저쪽 개방대학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있는 벽돌공장에서는 총소리가 나자 모래에다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고 합디다.
칠면조까지 몇백마리를
동네 형님 한 분은 부엌에 숨어 있는데 계엄군이 부엌문을 열자 한쪽 바지가랑이를 걷어올리고 병신 흉내를 내면서 손을 들고 나와 살았다고 하고, 위쪽 마을에서 칠면조를 키우던 김행남씨 집은 완전히 벌집쑤셔 놓은 것처럼 되었어요. 총을 얼마나 쏘아댔던지 몇백 마리의 칠면조가 다 죽어버렸어요. 그때 김행남씨 부인은 마침 목욕을 갔다오던 중에 그 난리를 만나 세수대야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있어서 총알을 피했대요. 나중에 세수대야를 보여주는데 총에 맞은 자국으로 험하게 찌그러들어 있습디다. 동네 개들도 총소리에 놀라 아궁이로 들어갔는지 흰 개가 시커멓게 되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총 쏘기를 멈춘 계엄군들이 집집마다 수색을 했는데 천정까지 대검으로 찔러가며 시민들이 숨어 있는가를 확인했대요. 계엄군들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는 비싼 담배는 다 가져가버리고 화랑담배만 놓고 갔더만요.
최시형 : 우리 집에 와서도 우유을 달라고 해서 소독도 하지 않은 것을 한 바가지 줬더니 다 마시고 가더래요. 어머님께서 돌아서서 "개새끼들, 설사나 하고 죽어버려라"고 욕을 퍼부었답디다.
우리 집은 젖소를 길렀는데, 광주시내에 난리가 나서 차가 막혀 짜놓은 우유를 가져가지 못했지요. 마을 사람들이 나눠먹고도 남아돌았어요. 그래서 시위대가 탄 차량이 오면 실어주기도 했어요.
조사자 : 그날 이후에는 별일없었습니까?
최시형 : 웬걸요. 덕분에 뱀한테 물려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집집마다 수색해서 청년들이 있으면 다 죽인다는 소문이 나돌아서 동네 청년들과 함께 산으로 피신을 했어요. 그날이 아마 24일 밤일 것입니다. 갑자기 뒤에서 쉬익 하고 뱀이 나타나데요. 허허. 그 후로도 밤이 되면 더 무서워서 칼을 한 자루씩 차고 청년들과 함께 산을 넘 어 노제부락까지 도망가 있다가 날이 새면 다시 돌아오곤 했지요.
조사자 : 5.18 광주민중항쟁 기간에 목격하신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최시형 : 그날이 20일이었던가? 남평에서 시체를 실은 차가 들어오다 우리 동네 앞에서 멈췄어요. 운전수가 물을 먹고 잠깐 쉬는 틈에 가마니를 들춰보니 20대 청년으로 보이는 남자의 시체가 한 구 있었는데 얼굴 반쪽이 날아가버리고 없었어요. 22일날인가는 자가용에 일가족 여섯 명이 타고 남평 쪽으로 가기에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말렸어요. 그때는 계엄군이 연탄공장 부근에 진을 치고 있었거든요. 우리가 말렸는데도 승용차 안테나에 백기를 꽂고 가더니 잠시 후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어요. 그곳까지 가서 사실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일가족이 몰살당했을 거예요.
조사자 : 그때 젊은 나이들이셨는데, 5.18 항쟁에 직접 참여하신 경험은 없으신지요?
김철수 : 그때 나는 충장로 3가 수양다방 옥상의 가건물에서 양복점 일을 하고 있었어요. 18일날 오후 옥상에서 공수들이 아가씨와 청년을 마구잡이로 때리는 것을 봤어요. 하도 성질이 나서 파이프랑 벽돌 등을 공수를 향해 던져댔지요. 공수들이 우 리를 잡으러 건물 안으로 뛰어오는 것을 보고 도망가느라고 혼났어요. 그리고 21일 오후에는 화순 동면지서로 무기고를 털러 갔어요. 나는 20여 명의 청년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갔고, 뒤에서는 지프차가 우리를 호위해 주었지요. 총으로 무기고 방아쇠를 따고 M1, 카빈, 다이너마이트 등을 싣고 광주로 왔어요. 학동 배고픈다리 부근에서 시민들에게 나눠줬어요. 나도 총을 한 자루 받았어요. 그 총을 메고 담양에도 가봤는데, 경찰들이 다 도망가 버리고 지서가 텅 비어 있었어요. 그렇게 시위차량을 타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는데 내가 탄 트럭에서 오발 사고가 발생해 시민이 팔을 다쳤어요. 그것을 보고 무서워서 집으로 와버렸어요 .
조사자 : 어떻게 해서 김철수씨는 시위차량에 탑승하게 되셨나요.
김철수 : 시내가 온통 난리가 나자 2 일부터인가 직장이 문을 닫았어요. 그래서 동네에서 놀고있는데 시위차량이 왔어요. 그러자 마을 형님이 '저사람들은 저렇게 데모하고 다니는데 너희들은 빈둥거리며 놀고 있느냐'고 호통을 쳤어요. 그래서 그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시위에 가담하게 되었지요.
최시형 : 21일 오전 11시경에 나는 친구 8명과 함께 시내로 갔어요. 금남로에 있던 시민들이 전남대학교에 있는 공수들을 쳐부수러 가자고 해서 그곳으로 가게 되었지요. 학교 안에는 계엄군들이 있고, 밖에는 시민, 학생들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서로 대치한 상태였어요. 한참 밀고 밀리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계엄군들이 타협을 하자면서 30분의 여유를 달라고 하대요. 그러더니 우리를 몰래 포위 한 뒤 총을 쏘기 시작했어요. 나는 전남대학교 앞 다리 밑으로 도망쳐 가는데 총알이 귓전을 핑핑 스치데요. 나는 용케 총에 맞지 않고 도망쳤어요. 그곳을 빠져 나온 뒤 시내를 빙 돌아서 산을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조사자 : 그날 동네에서 차량에 탑승한 여덟 명 중에 대학에 다니던 친구는 없었나요?
최시형 : 대학에 다니던 친구나 선배들은 난리가 나자 모두 피신해 버렸어요. 그 사람들은 이미 알아서 도망을 쳐버리고 멋모르는 사람들만 남아 계속 데모하다가 죽었지요. 우리 집에도 언젠가 영광이 집이라던 대학생 한 명이 와서 숨겨 달라고 했어요. 그 학생은 헬기 소리가 나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밖에도 나오지 못합디다.
조사자 : 시내에 돌아다니면서 혹시 특별한 상황을 목격하신 적이 있었나요?
김철수 : 그때는 경상도 차만 보면 다 깨부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한 일이지요. 경상도 출신 공수들이 광주에 와서 전라도 새끼를 다 죽인다는 소문이 쫙 퍼져서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유언비어였던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계엄군들이 총, 칼을 들고 와서 그토록 무자비한 학살만 하지 않았다면 광주시민들 역시 총을 들고 맞서 싸우지는 않았을 거예요. 놈들이 먼저 무자비하게 총을 갈기고 잔인하게 때려죽였기 때문에 흥분한 시민들이 자구책으로 무기를 탈취하여 대응했던 것이에요.
조사자 : 김문수씨는 그 후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그리고 총상의 후유증은 없나요?
김문수 : 나는 전남공고에 다니다가 집안 사정도 어렵고 건강도 좋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뒀어요. 학교 다닐 때에는 가끔씩 아픈 정도였는데 졸업 후 직장에 다니면서 힘든 일을 하다 보니 허리가 많이 아팠어요. 고통이 무척 심합디다. 지금도 무거운 것은 전혀 들지를 못해요. 학교를 중퇴한 후 서울로 가서 친구 매형이 하는 공장에서 일 하다가 허리가 너무 아파서 그만 두고 집으로 왔어요. 지금은 형님이 하시는 양복점 일을 도와주면서 쉬고 있습니다.
조사자 : 부상자회는 가입하지 않으셨습니까?
김문수 : 1988년 6월에 부상자회에 가입하여 한 달에 한 번 정도 월례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다른 활동은 특별히 하는 것 없고 연락 있을 때 모임에만 참석 하는 정도예요.
조사자 : 5.18 당시 국민학생의 어린 몸으로 총을 세 발이나 맞았는데 그에 대한 생각을 해보셨나요.
김문수 : 워낙 어린 나이에 당한 일이라 왜 죄없는 내가 다치게 되었는지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보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총상의 후유증으로 몸져눕거나 하는 날이면 굉장히 원망스러워요.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다니.... 그리고 부상자회에 가입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거의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활동을 하다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해야죠. (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
첫댓글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