慧菴 宗正스님은 1946년 伽倻山 海印寺에 出家한 날로부터 평생토록 눕지 않고 정진하는 長坐不臥와 하루에 한끼만 먹는 一日一食을 하며 오로지 爲法亡軀의 頭陀 苦行精進으로 參禪修行에만 몰두해온 本分宗師이며 한국불교의 대표적인禪僧이다.
일생을 淸淨한 수행자로 올 곧게 살아온 慧菴스님은 性徹 方丈의 뒤를 이어 海印叢林의 方丈을 역임하였으며, 1994년 4월 조계종 元老會議 議長, 1999년 4월 조계종 宗正으로 推戴되었다.
평소,“가야산 대쪽”이라 불릴 정도로 원칙과 소신이 뚜렷하여 당시 원로회의 의장으로서 1994년 조계종 改革佛事와 1998년 조계종 宗團事態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한국 불교계 최고의 精神的 指導者이다.
이제 慧菴 宗正스님의 修行履歷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慧菴스님은 1920년 全南 長城에서 태어나 長城邑 聖山 普通學校를 졸업하고 書院에서 漢學을 修學하였다.
어려서부터, 인근의 사찰을 자주 찾아 참배하며 東,西洋의 偉人傳 읽기를 좋아하였던 스님은 특히 佛敎經典에 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는 배움에 뜻이 있으면 日本으로 건너가고 삶이 극도로 궁핍하면 만주로向하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17세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구약과 신약, 유교의 四書三經, 불교의 祖師語錄등을 두루 섭렵하며 東洋哲學을 공부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의 高僧全集을 읽다가 「一休禪師 모친의 유언서」에 感化를 받고 發心하였으며, 또한『禪關策進』을 耽讀하다가 「我有一卷經하니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不因紙墨成이라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네) 展開無一字호되 (펼치면 한 글자도 없으되) 常放大光明이로다 (항상 큰 광명을 놓도다)」
라는 대목에서 크게 발심하여 出家를 결심하고 解放이 되자 즉시 歸國하였다.
초가을 무렵, 供養主를 계속하며 行者로서 당시 伽倻叢林의 祖室이신 曉峰스님을 찾아 뵙고 "無"字 話頭를 결택받아 生死를 뛰어넘는 용맹정진을 계속하였으니 그 精進力은 他의 追從을 不許하였다.
어느 날, 밥을 푸다가 大憤心이 일어나 소임을 다른 스님에게 부탁하고 백련암 뒷편 환적대로 올라갔다.
환적스님이 공부했다는 환적굴은 찾지 못했으나 다른 바위굴에서 “일주일 안에 道를 깨치지 못하면 죽어도 좋다”는 결연한 각오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長坐不臥하며 일 주일 동안 三昧에 들어 斷食 勇猛精進하였다.
그러나, 끝내 道를 깨치지 못하고 해인사로 내려왔다.
이때, 해인사 대중들은 스님을 찾으러 가야산을 헤매고 다녔다.
이로부터, 스님은 “공부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50여년을 長坐不臥하며 계속 용맹정진 하였다.
늦가을, 우연히 해인사에 들른 西翁스님께서 이와 같이 정진하고 있는 行者를 보고 堆雪堂에 住錫하고 계시는 麟谷禪師를 親見케 하였다.
인곡선사께서 행자를 보자 대뜸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행자는 "아 ───── 악" 하고 一喝을 하였다.
또, "네 고향이 어디냐?" 하시니
행자는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또,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셨다.
행자는 즉시 손가락으로 허공에다 一圓相을 그렸다.
선사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우리집 소가 여물을 먹었는데 이웃집 말이 배탈이 났다. 天下의 名醫를 불러서 말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더니 아랫집 돼지의 넓적다리에 뜸을 떴다.이 理致를 알겠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러자 마자, 행자는 주먹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이에 인곡선사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행자의 머리를 만져 주시고 上佐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10월 15일(음) 麟谷스님을 은사로, 曉峰스님을 戒師로 沙彌戒를 受持하여 得度하였으니, 『性觀』이라는 法名을 받았다.
수계하자마자, 久參衲子들의 용맹정진 도량인 堆雪堂 禪院에 방부를 들이려 하자 갓 계받은 사미라 하여 대중들이 반대하였다.
그러자, 효봉 조실스님께서 "공부하는데 久參, 新參이 어디 있느냐, 性觀수좌만큼 공부하는 사람이 있느냐?" 고하시자 대중들이 아무 말을 못했다.
그리하여 가야 총림의 퇴설당선원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一日一食과 長坐不臥勇猛精進을 계속하며 冬安居를 成滿하였다.
이 丙戌년 동안거는 가야총림 개설직후 첫 안거이자 혜암스님의 수계이후 首先安居였다.
1947년(28세) 봄, 첫 안거를 마치고 곧바로 五臺山 上院寺로 行脚하여 漢岩스님을 모시고 四部大衆과 함께 봄 安居를 하였는데 소임은 鐘頭였다.
어느날 새벽, 話頭一念에 들어 鐘聲을 하였으나 종이 제대로 쳐지지 아니하였다.
이때 종소리를 묵묵히 듣고 계시던 한암스님께서는 "저 수좌가 참으로 공부하는 衲子다" 하시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스님은 상원사에서 봄 안거를 마치고 다시 가야총림으로 발길을 돌려 해인사퇴설당 선원에서 夏安居내내 용맹정진 하였다.
이때, 정진대중은 曉峰 조실스님을 비롯하여 麟谷, 愚鳳, 靑潭, 飛龍, 梵龍, 鴻根, 九山스님과 구참납자등 60 여명이 되었으니 훗날, 敎團 淨化運動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의 主役이 된 분들이었다.
한편, 혜암스님은 麟谷 은사스님으로부터 講院에서 履歷을 보라는 가르침을 세번이나 받았다.
그럴 때마다 "生死가 無常한데 어느 겨를에 글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하고 참선에만 전념하였다.
얼마 후, 東山스님 會下에서 공부 잘 한다는 소문을 듣고 인곡스님은 더 이상말씀하시지 아니 하였다.
47년 가을이었다.
혜암스님은 해인사에서 성철, 우봉스님과 함께 봉암사로 向하여 慈雲, 普門, 道雨, 普眼, 일도스님등 20여 衲子와 함께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結社』를 시작하였다.
결사 대중은 一日不作, 一日不食의 百丈家風에 따라 自給自足을 원칙으로 하여하루에 땔 나무를 두짐씩 하였으며 직접 경작을 하였다. 또한 대중적으로 托鉢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金龍寺 金仙臺로 들어가 용맹정진 도중에 마음이 밝아져서 祖師스님의 말씀에 걸림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해인사에 住錫하고 계시는 麟谷 은사스님을 찾아 뵙고 一如한工夫 境界를 일러 바치니 인곡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날 德山 스님께서 남방으로 가는 도중 점심을 먹으러 떡집에 들어가서 노파에게
'떡 좀 주시오' 하니 노파는
'등에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이에 덕산스님은 '금강경 疏抄요' 하였다.
그러자, 노파가 금강경에 '過去心도 不可得, 現在心도 不可得, 未來心도 不可得'이라 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點을 하겠오' 하고 물으니 덕산스님이 아무 대
답을 못했다 한다.
그러면, 너는 어느 마음에 點을 하겠느냐?" 라고 물으셨다.
혜암스님이 "저는 무조건 떡을 먹겠습니다" 하니
"寤寐一如가 되느냐?"
"안됩니다" 라고 대답한 즉 인곡스님께서는
"그러면 더 부지런히 용맹정진 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다시 문경 봉암사로 들어가 결사대중과 함께 용맹정진 하였다.
여름에는 해인사 퇴설당 선원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9월 15일 해인사에서 霜月스님을 戒師로 比丘戒를 受持하고 다시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가 한암스님을 모시고 동안거를 하였다.
1949년(30세) 3월 15일, 金井山 梵魚寺에서 東山스님을 戒師로 菩薩戒를 受持하고 金魚禪院에서 하안거를 하였다.
그리고, 가을부터 이듬해 겨울 안거까지 해인사 퇴설당 선원에서 용맹정진 하였다.
6.25 사변으로 인하여 총림이 解散 되자 대중은 거의 흩어졌지만 스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계속 정진하였다.
1951년(32세) 초봄, 은사이신 麟谷스님께서 스님의 工夫를 점검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게송과 함께 "慧庵堂"이라는 法號를 내리셨다.
只此一段事를 (다만 이 한가지 일을)
古今傳與授하니 (고금에 전해주니)
無頭亦無尾호되 (머리도 꼬리도 없으되)
分身千百億이니라 (천백억 화신으로 나투느니라)
이 해 늦은 봄에는 해인사 주위에 공비가 자주 출몰하여 더 이상 정진하기가어렵게 되자, 스님은 南으로 雲水行脚하며 金井山 梵魚寺에 당도하여 金魚禪院에서 東山 祖室스님을 모시고 이듬해(52년) 하안거까지 용맹정진 하였다.
51년, 범어사 겨울 안거 때의 일이다.
耘虛스님이 보제루에서 楞嚴經 法會를 열었다.
법회시간에는 學人뿐만 아니라 선원 대중도 모두 참석하였으나 혜암스님은 一日一食, 長坐不臥, 默言하며 오직 面壁精進만 할 뿐이었다.
解制時에 東山스님께서는 "이번 철에 참으로 공부한 수좌는 혜암 뿐이다." 하시며 스님에게만 安居證을 주셨다.
52년 가을, 범어사에서 여름 안거를 마치고 성철스님이 정진중이던 통영 安靜寺 闡提窟로 발걸음을 옮겼다.
혜암스님은 이곳에서 성철스님과 함께 동안거를 하였는데 신도들이 오지 못하도록 인법당 구들장을 파버리고 불도 때지 않은 방에서 三冬 한철동안 좌복 하나만 가지고 정진하였다.
1953년(34세) 봄, 6.25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강원도 지역에 전투가 점점 치열해지고 있었다.
이때, 혜암스님은 죽음을 무릅쓰고 爲法亡軀의 一念으로 苦行精進하기 위해서 쌀 1되와 콩 1되만을 걸망에 짊어지고 적군의 삼엄한 검문검색을 하나씩 통과하면서 목숨을 잃을 뻔도 하였지만, 그때마다 순간의 機智를 발휘하여 千辛萬苦의 노력 끝에 간신히 雪嶽山 五歲庵에 들어갔다.
그러나, 방에는 들어갈 수 없어서 露地에서 生食으로 一日一食, 長坐不臥하며 가을까지 용맹정진을 하여 더 深奧한 三昧之境을 얻었다.
혜암스님이 이와 같이 두려움 없는 死志 苦行精進을 하였던 것은 頭陀衲子로서의 철저한 修行觀의 發露였다고 할 것이다.
스님은 6.25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세암에서 두 차례나 더 용맹정진 하였다.
혜암스님은 설악산을 떠나 오대산 적멸보궁에 참배하고 南方으로 行脚하여 다시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성철스님과 함께 동안거를 하였다.
1954년(35세), 스님은 다시 北方으로 행각하여 오대산 西臺에서 일타스님과 함께 생식과 장좌불와를 하며 하안거를 마친 뒤, 적멸 보궁에 하루 3천배씩 일주일간 禮懺하고 금생에 기필코 見性度生할 것을 誓願하였다.
그리고, 再次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一念으로 더욱 용맹정진하여 겨울 안거를 지냈다.
1955년(36세) 늦은 봄, 스님은 太白山 覺華寺 東庵으로 옮겨 정진하였다.
동암에서는 57년 가을까지 2년간 용맹정진 하였는데 더욱 一如한 경지를 體得하여 크게 得力하였다.
1
957년(37)세 초겨울, 혜암스님은 "공부하다 죽으리라" 결심하고 오대산 史庫庵(영감사) 土窟에 들어갔다.
영하 20℃를 오르내리는 酷寒의 추위에도 방에 불을 때지 아니하고 오직 잣나무 생잎만을 따먹으면서 超人的인 苦行精進을 하였다.
몇 달이 지나자 通便이 되지 않아 斷食精進을 반복하고 나서 하루에 잣잎과 생콩 10알씩을 먹으며 용맹정진 하였다.
혜암스님은 이 때에 睡魔를 완전히 항복받아 4개월 동안 한 순간도 昏沈에 빠지지 아니하고 睡眠이란 본래 없는 것임을 확연히 체험하였다.
그러고 나서, 하늘과 땅, 晝夜와 朝夕을 분간하지 못한채 며칠동안 疑團이 獨露하더니 몰록 心眼이 열려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迷則生滅心이요 (미혹할 땐 나고 죽더니)
悟來眞如性이라 (깨달으니 청정법신이네)
迷悟俱打了하니 (미혹과 깨달음 모두 쳐 부수니)
日出乾坤明을 (해가 돋아 하늘과 땅이 밝도다)
1958년(39세)여름부터는 다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용맹정진 하였다.
그런데, 오세암에서 동안거 중에 은사스님이 危篤하다는 연락을 받고 고성 玉泉寺로 내려가 門徒들과 함께 인곡 은사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다.
1959년(40세) 1월경, 동화사 金堂禪院의 조실로 계시는 효봉스님께서 옥천사에 계시는 은사스님께 함께 살자는 편지를 보내 왔다.
그리하여, 해제가 되자 인곡 은사스님을 모시고 동화사로 향하여 金堂禪院에서 하안거를 났다.
동화사에서 정진 할 때의 일화이다.
어느날, 길에서 우연히 金烏스님을 만나뵙고 내원암 입구에서 쉬게 되었는데 이때 금오스님께서 바위에 새겨진『諸惡莫作 衆善奉行 自 其意 是諸佛敎』라는 글을 보시고 그 뜻을 일러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스님은 금오스님의 턱 밑에 주먹을 대고 뒤로 사정없이 밀어 버렸다.
금오스님께서는 "동화사에도 사자새끼가 한 마리 있군" 하시며 좋아하셨다.
여름 안거를 마치고 오대산으로 곧바로 올라가 西臺에서 동안거를 하였다.
臘月八日을 기하여 상원사 선원에서 대중과 함께 1주일 용맹정진을 하였는데, 이때 정진대중은 活眼, 眞際, 月現스님등 10여명이었다.
이듬해 봄에는 東臺(관음암)로 거처를 옮겨 하안거를 지내고 겨울에는 해인사 에서 정진하였다.
1961년(42)세, 혜암스님은 은사스님을 모시고 해인사에서 하안거를 하였는데 解制日에 인곡 은사스님께서 入寂하셨다.
그리하여, 해인사에서 은사스님의 四十九齋를 봉행하여 마치고 난 다음, 스님은 다시 오대산으로 行脚하여 北臺에서 겨울 안거를 지냈다.
다음은 북대 정진중에 있었던 생사를 뛰어넘는 수행일화 한 토막이다.
이 해 겨울, 오대산에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폭설이 쏟아진 어느날 아침, 혜암스님은 步行을 나갔다가 두눈에 시퍼런 불을켜고 쏘아 보고 있는 호랑이를 만났다. 스님도 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용맹정진해온 衲子답게 두 눈을 부릅떴다.
잠시후 호랑이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이듬 해에는 南臺(지장암)로 수행처를 옮겨 하안거와 동안거를 지냈다.
혜암스님이 五臺山의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등 五臺에서 두루 안거하며修行하였던 것은 多生으로 오대산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3년(44세)봄에 해제가 되자 南方으로 雲水行脚하여 영축산 通度寺 極樂庵鏡峰스님 회상에서 하안거를 하였다.
그리고, 겨울에는 해인사 선원에서 정진하였다.
이듬해 여름에는 월내 妙觀音寺 선원에서 香谷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으며, 해인사 선원에서 다시 동안거를 하였다.
1965년(46세), 다시 남방으로 내려가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을 모시고 하안거를 하였으며, 겨울 안거는 해인사 선원에서 지냈다.
다음 해에는, 道峰山 천축사 無門關에서 西翁스님을 모시고 하안거를 하였는데 전 대중이 한 철동안 용맹정진 하였다.
겨울에는 다시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다.
1967년(48세) 여름, 해인사 뒷편 산록에 위치해 있던 中峰庵 토굴에서 정진하였으며, 겨울에는 10월 15일(음) 개설된 海印業林 선원에서 性徹 方丈 스님을 모시고 維那 소임을 보며 정진하였다.
1968년(49세) 봄에 수행처를 지리산 上無住庵으로 옮겨 동안거까지 용맹정진하였으며 인근에 文殊庵을 창건하였다.
이듬해 여름에는 인천 龍華寺로 올라가 田岡 조실스님을 모시고 禪德으로 정진하였는데 스님의 禪機가 빼어남을 보고 전강스님께서는 대중들에게 "혜암 수좌는 배우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조실을 가르치러 다니는 사람" 이라고 하였다.
동안거부터는 해인총림 선원 鎖關(堆雪堂)에서 玄宇, 日陀스님등 4명의 衲子와함께 3년 結社에 들어갔다.
1970년(51세) 4월, 해인총림 쇄관에서 결사 안거 중이었다.
지난 동안거 중에 발생한 소위 "구들장 사건"이 수습되지 않고 方丈 스님과 住持의 辭退로 확대되었다.
이에 총림대중은 쇄관에서 3년 결사중인 혜암스님에게 이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여 줄 것을 적극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혜암스님은 8월까지 5개월간 住持職을 遂行하여 사태를 해결한후, 바로 辭任하고 문경 봉암사 백련암으로 들어가 이듬해 여름 안거까지 정진하였다.
그리고,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 조실스님을 모시고 동안거를 하였다.
安居中에 경봉스님께서 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三段語로 물으셨다.
첫째, "路逢達道人하면 不對語默이라 하니 以何爲對耶잇고" 하시니
혜암스님은 "아 ───── 악" 하고 一喝을 하였다.
둘째, 공부에 대한 所感談을 말해보라 하시니 혜암스님은
"言語文字는 學習하기 쉬우나 道通은 天上天下에 第一容易하고도 最上難也라.
다만, 爲法亡軀의 용맹정진 밖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하였다.
마지막으로,「峰通紅中空」의 韻字에 맞추어 禪詩를 지으라 하니 혜암스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올렸다.
靈山會上靈鷲峰 (영산회상의 영축봉이여)
萬里無雲萬里通 (구름한점 없으니 만리에 통했도다)
世尊拈花一枝花 (세존께서 들어보이신 한송이 꽃은)
歷千劫而長今紅 (미래제가 다하도록 길이 붉으리)
拈花當時吾見參 (꽃을 들을 때 내가 참석하여 보았다면)
一棒打殺投火中 (한 방망이로 때려 죽여 불속에 던졌으리라)
本來無物亡言語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언어마저 끊겼는데)
天眞自性空不空 (진실한 본래의 성품은 공하되 공하지 아니하도다)
<辛亥年 冬安居 慧岩 合掌>
이에 경봉스님께서는 혜암스님의 禪旨가 뛰어남을 보고 대중으로 하여금 혜암스님에게 절을 올리게 하였다.
1972년(53세) 봄, 해제가 되자 혜암스님은 남해 龍門寺로 수행처를 옮겼다.
이때의 南海島는 배를 타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 큰 섬이었는데 숨어서 공부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러나, 제방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淸風衲子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당시 주지였던 帶妻僧의 양해를 얻어 통도사 慧覺스님에게 주지 소임을 맡기고 선원을 개원하였다.
스님은 이곳에서 40여명의 납자를 지도하면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지냈다.
1973년(54세)초봄, 혜암스님은 남해도를 떠나 해인총림으로 向하였다.
해인사 少林院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태백산 각화사 東庵으로 들어가 75년(56세)가을까지 2년간 杜門不出하며 용맹정진 하였다.
동암대중은 玄宇, 玄機등 4, 5명 이었다.
이곳은 20여년전 용맹정진 할때 工夫에 힘을 얻은 바 있어 늘 마음에 그리던 道場이었으니 오대산 西臺,지리산 上無住庵과 더불어 혜암스님이 특별히 좋아하는 수행처였다.
1975년 겨울에는 曹溪叢林 松廣寺 선원에서 동안거를 하고 이듬해 초봄에는 지리산 百丈庵을 거쳐 七佛庵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하였다.
이때 정진대중은 玄宇, 活眼, 性牛, 玄機, 仁覺, 圓融스님등 20여명이었다.
혜암스님은 一日不作, 一日不食의 百丈家風에 따라 대중들에게 지게를 하나씩 지급하여 날마다 運力을 하도록 하고 午後不食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중을 外護하느라 각처에서 탁발해온 공양물을 雙磎寺 入口에서 부터는 하루에도 몇번씩 짐을 져 올렸는데, 모진 폭풍우가 내리는 날에도 한결 같았다.
이 해 겨울, 雲上禪院을 重修하며 먼지 속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忽然히 白衣老僧이 나타나 혜암스님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전해 주고 "拈起吹毛劍 할 지어다" 라고 하며 문득 사라졌다.
塵凸心金剛 하야
照見蓮攝顧悲하라
때 묻은 뾰쪽한 마음을 금강검으로 베어내서
연꽃을 비추어 보아 자비로써 중생을 섭화하여 보살피라
칠불암에서 대중을 지도하며 정진하던 스님은 1977년 해인총림 선원에서 다시 維那 소임을 보며 정진하였다.
1978년(59세)에는 지리산 上無住庵에서 4, 5명의 납자와 함께 夏,冬安居를 지내며 용맹정진 하였다.
그리고, 1979년(60세) 다시 해인사로 돌아와 祖師殿(解行堂)에서 3년 결사를 시작하였다.
1980년(61세)에는 해인총림 維那에 거듭 任命되었으며, 1981년(62세) 해인총림首座에 임명되어 총림대중의 修行風土 확립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1982년(63세)겨울에는 지리산 靑梅祖師 토굴터에 草菴을 짓고 동안거를 하였다.
스님은 성도절 무렵에 해인사 대중의 초청을 받고 해인총림 동안거 일주일 용맹정진에 참여하여 대중을 警策하면서 함께 정진하였다.
이듬 해부터 71세가 되던 해인 1990년까지 8년동안 해인총림 선원에서 성철 방장스님을 모시고 대중과 함께 정진하였다.
1985년(66세) 에는 해인총림 副方丈에 위촉되어 총림의 발전과 총림대중의 勇猛精進 家風振作을 爲하여 心血을 기울였다.
혜암스님은 선원대중들에게 항상
"공부하다 죽어라"
"밥을 적게 먹어라"
"안으로 부지런히 정진하고 밖으로 남을 도와라"
라고 가르치며 衲子로서 철저히 수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1987년(68세) 조계종 元老議員으로 선출되었고 1990년(71세)에는 지리산 兜率庵에서 동안거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