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서예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三道軒정태수
의당 이현종선생 근영
작가의 세계 24 / 의당 이현종
궁체에 사랑을 담아온 40년 서예의 길
정태수(서예문화 편집주간, 서예세상 지기)
“서예는 사랑입니다. 특히 궁체는 순수한 사랑을 주어야 글씨가 됩니다. 잡념을 가지고 욕심을 부리면 글씨가 안됩니다” 이 말은 지난 40여 년 붓을 들고 궁체와 함께 살아온 의당 이현종선생의 서예에 대한 지론(持論)이다.
의당 선생(이하 선생으로 호칭)은 1932년 경기도 평택에서 아버님 이행규(李行奎) 어른과 어머님 남상덕(南相德) 어른의 7남1녀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서울의 진명여고(39회)를 졸업했고, 평택중앙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서울의대(10회)를 졸업한 심승옥(沈承玉)박사(이비인후과 전공의)와 결혼해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75년(43세) 갑자기 마흔여섯의 전도양양(前途洋洋)하던 남편을 병마로 잃는 아픔을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불굴의 정신력으로 삶을 헤쳐왔다. 자식들과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56세(1988)때 방송대 국문과에 입학해 한글서예의 학문적 토대를 다졌고, 뒤이어 한양대 산업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이처럼 선생은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잘 성장시켜 책임을 다하였고, 작가로서도 탁월한 예술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여성서예계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서예에 대한 선생의 관심은 어려서부터 늘 있었지만 가정을 돌보는 질곡의 세월을 보내면서 붓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 1975년 본격적으로 붓을 잡을 기회가 있어서 그 때부터 오늘까지 하루도 붓을 놓지 않고 4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먹향 가득한 자신의 세계를 가꿔가고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선생의 서예역정(歷程)을 공모전을 통해 공부해 온 1991년까지를 학서기, 그 뒤 궁체의 진수를 깨우치기 위해 교학상장하면서 노력해 온 2005년 까지를 연구기, 그리고 2006년 이후 자신의 조형시각과 철학이 담긴 글씨를 구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현재까지를 창작기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한다.
학서기, 궁체를 통해 서예를 깨우치다.
선생은 국내에서 저명한 한글서예가이고, 한글 가운데 궁체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서예가의 길을 걷게 된 시점은 3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5년 5월, 늘샘 권오실선생을 혜화초등학교 어머니교실에서 만난 이후 오늘날까지 사승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한글 서예를 하기 전 한문서예를 잠깐 공부했는데 삼남매 교육에 전념하면서 한문서예를 지속하지 못하던 차에 어머니교실이 개설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평소 좋아하던 서예를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곧바로 수강신청을 하면서 궁체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서예가의 길은 그리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공모전에서 일곱 번 낙선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도전하면서 궁체학습에 매달렸다. 낙선할 때 마다 “좋은 약은 입에는 쓰나 병에는 이롭다[良藥苦口利於病]”는 신념을 가지고 좌절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선생은 돌이켜 보면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 정도의 작품도 할 수 있다고 회고한다.
입문한 뒤 6년만인 1981년 미술대전에 별주부전 흘림으로 첫 입선을 했다. 8년 뒤인 89년 흘림으로 쓴 <인현왕후전>(그림1)으로 첫 특선을 했다. 91년에 <농가월령가 4월령> (그림2)으로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미술대전초대작가로 등단했다. 93년 발표한 <정완영의 시조> (그림3)를 보면, 전통 궁체의 단아함과 고전자료를 철저하게 임모한 흔적이 드러난다. 이 때까지 작품에는 ‘진원’이란 아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선생의 작품에는 안정적인 결구, 점획속에 적당한 근골혈육이 들어 있기때문에 외유내강(外柔内剛)의 아취가 풍긴다. 점획의 표정은 굳셈보다 단아하고, 고우면서 부드러운 면이 두드러진다. 그 만큼 지도자의 수본(手本)과 고전자료를 철저하게 공부했다는 방증( 傍證)이 된다. 청대 강유위(康有爲)가 『광예주쌍즙(廣藝舟䉶楫)』에서 “처음 글씨공부를 하는 사람은 형(形)이 닮도록 노력해야하니, 몇 백번 연습하면서 고전자료[拓本]도 부지런히 임서하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한 공부방식을 그대로 지속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 이 시기 선생의 궁체공부는 정자와 흘림을 거쳐 진흘림까지 섭렵했고, 붓끝의 서선(書線)에 정묘함을 더해 가고 있다. 고전글씨본은 처음 입문했을 때 <옥원듕회연> 권지육을 완전히 소화하면 다른 고전을 선택해서 공부하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연마했다. 정자체는 고전자료와 꽃들 이미경선생의 글씨본을 함께 공부했는데 차츰 텍스트[text]와 선생의 글씨가 닮아가고 있음이 살펴진다. 흘림은 <낙셩비룡> 권지이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반흘림은 덕온공주 일촬금, 진흘림은 편지글, 인현왕후 등의 글씨를 모본으로 삼아 완전히 소화할 때 까지 임서를 해나갔다. 다소 지루하더라도 한 권씩 철저하게 임서를 한 뒤 진도를 나가는 방식은 요즘도 후학을 지도하면서 그대로 적용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서예공부는 왕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1
그림2
그림3
연구기, 거울이 빛나면 먼지가 못 앉는다.
“거울이 빛나면 먼지와 때가 앉지 못하고 앉으면 빛나지 않는다.”는 글귀가 『장자(莊子)』에 나온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주변을 두어야 하고, 삶이나 인생에 있어 스스로 모자라는 것을 채워가라는 가르침이다. 이 글귀를 좋아하는 선생은 서예공부 과정에서 직접 이 글귀의 뜻을 실천하기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궁체를 평생 동안 연구해 온 선생에게 가장 어려운 서체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정자라고 대답한다. 누구든 비슷한 대답을 하는 편이다. 서예를 잘 모르는 문외한이 보더라도 정자의 점획은 삼엄해서 잘못된 부분이 쉽게 드러난다. 선생에게 있어 정자는 가장 힘든 과정이었고, 가장 어려운 관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누구보다 정자를 잘 쓰는 작가로 정평이 나있다. 그건 어떤 사람보다 정자연마에 많은 공력을 쏟아부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모전을 마친 90년대 초반 이후 선생의 예도에서 또 한 번의 고행은 이어진다. 서예공부의 끝이 아니라 지금부터 제대로 된 연구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더욱 철저하게 정자와 흘림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바탕은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하면서 공부한 교학상장(敎學相長)에 있었다. 82년부터 92년까지 10년 동안 서울YWCA에서 서예를 지도했고, 동방플라자문화센터, 평택문화원 등에서 90년대 초․중반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궁체의 서예미를 전수해 주었다. 90년대 이후에도 KBS문화센터, 영등포신세계백화점, 서울시립양천도서관 등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1998년 문하생들이 의당붓글모임을 만들어서 선생의 예술혼을 이어받고 있다. 그들의 작품은 2011년 열린 제4회『의당붓한글전』도록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대부분 15년 이상 선생의 의발을 이어받고 있는 작가들인데, 계정 신영순, 지송 이정옥, 물빛 김명순, 솔샘 김영란, 송전 김영자, 다원 김월옥, 소전 박미숙, 평양 박숙희, 상원 박정희, 일초 송옥희, 설봉 심효숙, 서총 안경숙, 국사 이경화, 삼우당 장선숙, 꽃뫼 정현애, 창해 최말옥, 갈산 홍성분, 상리 황인숙씨 등 40여명이다.
이 시기 선생의 작품에는 '의당'이란 아호가 사용되었고, 작품양식에서도 선생특유의 개성적인 문자형태미가 드러나고 있다. 2000년 선보인 작품 <이태선의 여름냇가>(그림4)에는 한자 내천자[川]의 세로획 속에 한글흘림으로 글자를 써 넣은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2002년 월드컵을 기념해 만든 작품 <온누리> (그림5)에는 월드컵 형태를 그린 뒤, 그 밖을 에워싸듯이 월드컵에 참여한 32개국의 국명을 정자로 써서 장식성이 돋보이게 처리했다. 2002년 제작된 <노산의 무등차의 고장> (그림6)과 2001년 휘호한 <옛시조> (그림7)에서는 장법상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기 작품을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에 전통궁체의 멋을 살려 작품으로 옮긴 선생의 조형미감을 읽을 수 있다.
특히 97년 발간한 저서 『궁체흘림』과 『옥누연가 해설』을 통해 이론과 실기를 통합해 연구하면서 선생이 체득한 궁체흘림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98년『뎡미가례일기 역주』의 출간에 대해 국문학자 김진세 교수는 “이 기록이 비록 한글로 씌어졌다 해도 궁중어를 이해해야 되고 복식과 수식에 따르는 언어와 양식 등 쉬운 것이 없는데 이현종 선생께서 정력과 열성으로 동분서주하면서 마침내 놀랄만한 사업을 이룩하시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시기 10여 년 동안 선생은 하루도 벼루가 마르지 않게 먹을 갈면서 후학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고전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연구한 결과를 책으로 발간하기도 하고, 그런 이론적 바탕 위에 자신의 조형미감이 가미된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전재형(全才型)의 작가로 우뚝서게 되었다.
그림4
그림5
그림6
그림7
창작기, 한글궁체의 새길열기
인서구로(人書俱老)라는 말이 있다. 사람과 글씨가 오래되면 함께 노련해 진다는 의미이다. 오랜 경륜과 정성으로 수놓아진 선생의 작품세계도 2000년이 지나면서 불필요한 수식은 줄이고 번다함이 제거됨으로써 골력있는 궁체의 진수를 펼쳐 보이고 있다.
2006년 라메르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면, 지금까지 궁체를 위해 정성을 쏟은 선생의 농익은 작품세계를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다. 농가월령가 전문과 또박또박 정자로 쓴 독립선언문에서는 많은 글자들의 자형(字形)이 하나같이 통일되어 있고, 결구(結構)가 안정적이다. 이제 바햐흐로 정자, 흘림, 진흘림, 편지글 등 한글서예의 모든 분야에서 군더더기를 덜어낸 청아(淸雅)한 필치(筆致)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 시기 선생의 작품에서 어려운 삶의 노정(路程)을 이겨낸 인간적 면모와 오랜 예술경험에서 빚어낸 아취(雅趣)가 어울어진 달관의 경지를 발견할 수 있다.
정성으로 가꿔온 작품세계도 이때부터 독자적인 조형미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006년 옛시조 천수를 모아서 정성을 다해 휘호한 『옛시조 일권』(그림8)은 이시기 작품세계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렇게 선생의 작품세계가 널리 알려지면서 빗돌을 세우려는 곳에서 선생의 글씨를 받으려는 요청이 쇄도했다. 예컨대 영산칠갑 명승공원에 세워진 <은항 이우재박사 시비> (그림9), 원주 <치악산 구룡사 송비> 등의 빗돌에서 흐트러짐 없는 의당식 궁체정자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작품속에 선생의 진솔한 정감을 담아냄으로써 작품과 작가가 혼연일체가 되어 감상자로 하여금 저절로 동감하게 한다. 2011년 제작된 <어머니 마음> (그림10) 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60년 전 노랫말에 오선지를 넣어서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또한 <정깊은 우리 할아버지(MY COMPASSIONNATE GRANDFATHER)> (그림11)라는 작품에서는 친손자인 심성보가 쓴 글을 외손녀인 남궁연이 번역한 것을 선생이 직접 영어와 한글로 정성을 다해 휘호했다. 이 작품에서는 외국어를 통해 새로운 형식의 서예작품을 선보이는 한편, 따뜻한 가족애를 보여주고 있다. <기도하는 마음> (그림12)에서는 이해인 수녀의 시를 흘림의 원칙을 지키면서 유려하게 처리했고, 장법상 하단부를 들쭉 날쭉하게 참치(參差)함을 줌으로써 자연스럽게 마무리를 하고 있다.
또한 최근 현대인들의 가로쓰기 추세를 반영하고 컴퓨터가 보편화된 시대문화에 부응하기 위해 선생의 글씨로 만든 폰트체를 세상에 선보였다. 정자로 제작된 ‘의당 이현종 글씨’ 폰트는 실용성과 예술성을 표현하는 도구로 새롭게 자리매김될 것이다.
이와 같이 현재 선생의 작품은 고전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 시대의 미감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모름지기 작가는 늘 깨어 있어서 주변을 선도해야 한다고 선생은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선생은 스스로 날마다 신문사설을 정독하고, 시사성이 있는 내용을 글감으로 채용하고, 작품의 표구형식도 현대가옥의 구조에 맞게 제작하며, 고전양식을 지켜나가면서도 바탕면에 색을 도입해서 화면의 변화를 모색하기도 한다. 게다가 실생활과 유리(遊離) 되지 않게 ‘혼인육례’를 한글정자로 휘호해서 주목을 받았다. 아울러 현대인의 시대미감을 고려한 서예작품의 제작에도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서여기인(書如其人 ;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이라고 했던가. 선생은 글씨공부에 있어서 문자의 외형적인 형태미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글씨를 쓴 사람의 인격이나 정신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라고 강조한다. 즉 선생 자신의 좌우명이기도 한 ‘원만하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씨’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거듭 말한다. 2012년 휘호한 <원곡선생 말씀> (작품13)을 보면, “서예는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평생을 두고 해야 한다. 한 서예가의 진정한 평가는 관뚜껑을 덮어야 나올 수 있다.”는 글귀에서 평소 선생의 서예관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선생이 후학들에게 강조하기도 하지만 흐트러진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자주 곱씹는 말이라고 한다. 이런 경건한 자세로 서예를 대하는 선생의 행보에 기대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한다. 필자는 불굴의 의지로 가정과 예술의 두 개 수레바퀴를 성공적으로 끌고 온 선생의 작품세계가 더 넓고 깊어지길 진심으로 기원드리면서 붓을 놓는다.
그림8
그림9-1
그림9-2
그림10
그림11
그림12
그림13
금강산 답사
자녀들과 출판기념회에서
세종한글서예큰뜻모임 총회에서
의당붓한글전 네번째 전시에서
평생 도반들과 (가운데 권오실 선생)
이 글은 월간 서예문화 2012년 7월호에 실려있습니다.
출처 : 다음카페 서예세상 작가세계 : http://cafe.daum.net/callipia
|
첫댓글 단아하신 모습에 인품이 깃드신 분으로 보이시네요.
온누리, 시조집 일전 등 작품이 참 인상적입니다.
귀한 작품과 소개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