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세계 시니어 그랑프리 파이널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며 빙판의 여왕으로 등극한 김연아는, 그러나 아직 열여덟 살의 어린 소녀일 뿐이다. 그 또래 여느 여고생들처럼 그에게도 은사(恩師)가 있고, 추억을 함께 나눈 친구들이 있으며, 천재적 재능을 가진 ‘선수’와 낯을 많이 가리던 평범한 ‘소녀’의 모습이 공존한다. 은반을 비추는 화려한 조명 뒤에 숨어 있던 ‘소녀 김연아’를 따라가봤다.
김연아는 1990년 김현석·박미희씨의 두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피겨 스케이팅을 처음 시작한 것은 유치원에 다니던 일곱 살 때로, 어린 시절 피겨 스케이팅을 배웠던 어머니를 따라 집 근처 과천시민회관 빙상장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그의 재능을 대번에 알아보고 선수로 키워낸 유종현 전 코치는 김연아를 “순발력이 굉장히 뛰어난 아이”로 기억한다.
“제가 국가대표 출신이고 많은 아이를 지도했기에 연아의 뛰어난 재능은 한 눈에 들어오더군요. 기초적인 점프를 배울 때부터 순발력이나 유연성에서 정말 남달랐어요. 신체적으로는 타고났다고 봐야죠.”
과천에서 코치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어린이를 가르쳐온 그가 먼저 학부모에게 지도를 맡겨달라고 부탁한 경우는 김연아가 유일했다. 비슷한 시기 유 코치와 함께 김연아를 가르친 과천시민회관 변성기 코치가 기억하는 김연아의 첫인상도 그와 비슷하다.
“기술적으로 연아는 서전트 점프(제자리 높이뛰기)가 굉장히 높았어요. 피겨의 경우 점프력이 좋은 선수들이 고난도 기술을 해낼 수 있거든요. 그걸 보고 유 코치가 연아를 발탁한 거죠.”
코치들이 주목한 김연아의 천재성은 열두 살 무렵에 다섯 종류의 트리플 점프를 완성하는 것으로 증명됐다. 어린 김연아는 지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그리고 ‘강단지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만큼 담이 컸다. “어린아이들이라 간단한 게임 같은 걸 많이 했는데, 연아는 아무리 하찮은 승부라도 꼭 이겨야 만족했다”는 게 유 코치의 회고다.
“처음 스케이트 타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7개월짜리 초보자 코스가 있어요. 과정 중에 스케이트를 타고 돌면서 빙판 위에 원을 그리는 과제가 있거든요. 연아가 장갑을 짝짝이로 끼고 있길래 장난 삼아 놀렸는데 전혀 동요하지 않고 과제에만 집중하더라고요.”
변 코치는 김연아가 지금껏 큰 기복 없이 꾸준하게 높은 성적을 유지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저 아이, 군인 같아요”
“군인 성격이라고 하면 맞을 거예요. 사춘기 때 여자아이들은 아주 예민한데, 연아는 그런 면이 없었어요. 자기가 해야 할 일 외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남자같이 무덤덤해서 자기 감정도 조절할 줄 아는 편이었죠.”
초등학교 때 김연아에게 점프 기술을 가르친 신혜숙 코치는 미국 전지훈련 때 지켜본 김연아를 이렇게 기억한다.
“연아가 5학년 때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갔어요. 어느 주말에 비가 와서 오후 훈련을 쉬었어요. 그래서 아이들 모두 오랜만에 놀고 있었는데 연아가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깜짝 놀라 찾아보니까 장갑을 손수 빨아서 침대 머리맡에서 말리고 있더군요. 다음주에 쓸 장갑을 주말에 미리 준비해놓은 거죠.”
도장중학교 2학년 때인 2004년 그랑프리 준우승을 차지하고 귀국해 어머니 박미희씨와 함께 인터뷰를 하는 김연아. 다른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도 연습 준비를 잊지 않던 어린 김연아는 스케이트에 관한 한 정말 악바리 같았다. 기술을 하나 가르치면 그게 제 맘대로 될 때까지 연습하느라 링크를 떠나지 않았다. 스케이트를 신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겨 신동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99년 전국동계체전에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각종 국내 대회를 휩쓸게 되는 이후의 일들은, 김연아의 그런 면모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김연아의 학교생활은 어땠을까. 그가 군포 신흥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윤명자씨는 “성격이 매우 조용하고 차분한 아이였다”고 기억한다. 요즘 TV 인터뷰를 보면 예전보다 많이 활달해졌다고 느낄 만큼 내성적이고 연약했다는 것이다. 김연아는 담임을 맡은 지 1년 만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야 했던 윤씨에게 ‘선생님, 저 안 잊어버릴 거죠?’라고 편지를 써 보낼 만큼 정이 깊은 아이기도 했다.
이미 피겨 스케이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을 맡은 임민옥씨는 김연아의 ‘겸손함’을 떠올린다.
“워낙 바쁘니 숙제를 빼주는 등 이런저런 배려를 했어요. 그러면 그 나이 때 애들은 잘난 척하기가 쉬운데 연아는 오히려 미안해 하더군요.”
그 무렵 김연아는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슬럼프에 빠져 스케이트를 그만둘까 깊이 고민한 적이 있다. 그 모습을 기억하는 임씨에게 고비를 넘기고 지금의 자리에 이른 옛 제자는 그저 대견할 뿐이다.
대부분의 선수가 그렇듯, 김연아도 연습시간에 쫓겨 다른 아이들처럼 마음껏 노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김연아와 함께 유종현 코치 밑에서 훈련한 안민지씨의 말.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으니 일반인이 링크를 사용하는 자유시간에 노래에 맞춰서 피겨 안무를 스스로 만들어보고, 그걸 서로 보여주고 하면서 놀았어요. 연아는 피겨 점수 집계하는 방식에도 관심이 많아서, 쉴 때면 직접 점수를 매겨보고 재미있어 했죠. 피겨를 스포츠라기보다는 놀이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영광과 시련의 순간
6학년이 되던 2002년, 김연아는 4월에 열린 슬로베니아 트리글라브 트로피 대회 노비스(13세 이하) 부문에서 우승하며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이듬해에는 크로아티아 골든베어 대회 노비스 부문에서 우승을 거머쥐고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기쁨을 맛본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피겨부문에서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갔던 것이다.
도장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김연아는 선수로서는 좀더 도약할 수 있었지만, 그 전보다 학교생활을 더 많이 포기해야 했다. 그때 3년간 김연아를 지켜본 도장중학교 류정식 체육부장은 “학교에 따로 빙상팀이 없었기 때문에 선수도 김연아 혼자였다. 학교도 시즌이 아닐 때만 잠깐 나와서 중간고사만 보고 나머지는 리포트로 대체하곤 했다”고 말한다. 김연아에게 중학교 시절은 시련의 시기로 기억될 듯하다.
무엇보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 때문에 생기는 잦은 부상이 김연아를 힘들게 했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느낄 때까지 연습을 쉬지 않았던 것도 부상이 끊이지 않은 이유였다. 그런 와중에도 2004~2005시즌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와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2위, 주니어 그랑프리 헝가리에서 1위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때의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은 ‘영원한 맞수’인 동갑내기 아사다 마오(일본)와 처음 대결했기에 김연아에게 잊을 수 없는 경기가 됐다.
국가대표였지만 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는 나이 제한에 걸려 출전하지 못했고, 그 대신 3월에 열린 2005~2006시즌 세계 주니어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최고성적을 거둔다. 높아만 보이던 마오의 벽을 처음 넘었다는 점에서, 또 김연아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서 그의 선수 인생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경기였다. 그후 2006~2007시즌 시니어 그랑프리 2차대회에서 3위에 오르며 시니어 무대에 입성한 김연아는, 일주일 뒤 열린 그랑프리 4차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1위에 오르며 그랑프리 파이널 출전 자격을 얻는다.
이후의 일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김연아의 앞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06년 12월의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아사다 마오를 12점차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고, 2007년 3월에 열린 세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 쇼트 프로그램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1위, 11월의 그랑프리 3차대회, 5차대회 우승, 12월 이탈리아 토리노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역시 아사다 마오를 제치고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지켜보며 대한민국은 새로운 스포츠 스타의 등장에 열광했다.
울면서도 점프 연습
2006년에 입학한 과천 수리고등학교는 이미 거물이 된 김연아를 위해 빙상팀을 창단하고 기념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유명해진 만큼 더 바빠진 탓에 학교에 있는 시간은 더욱더 줄어들었다.
2007년 김연아의 담임을 맡은 수리고 변유미 교사는 “시험 때나 학교에 올 수 있는 정도지만, 그래도 성의 없이 시험을 치르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영어를 좋아해요. 아무래도 캐나다에서 오래 훈련받다 보니 영어엔 익숙하니까요. 연아가 학교에 오는 날은 인기가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할 만큼 학교가 시끌시끌하죠. 옆 반이나 다른 학년 아이들까지 교실로 몰려와 카메라를 들이대곤 해요. 원래 낯가림이 심한 아이라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을 텐데, 싫은 소리 한번 안 하고 다 받아주더군요.”
가끔 주고받는 e메일로 ‘자랑스럽다’고 써보내면 무척이나 쑥스러워한다는 제자를 변 교사가 대견해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꽤 되는데도 한번도 차를 타고 온 적이 없어요. 늘 걸어왔죠. 유명해졌다고는 해도 잘난 척하거나 튀는 걸 싫어하고 평범하게 보이고 싶어 해요. 하굣길에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죠. 갑자기 짧은 시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됐는데, 모두가 연아에게 우호적이기만 한 건 아니잖아요. 악플 달고 이상한 소문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런 게 부담이 되는 모양이더라고요. 원래는 그런 내색을 잘 안 하는 아이가 그런 얘기를 하니 더 안쓰러웠죠.”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 보니 단짝 친구처럼 지내는 이들은 아무래도 예전부터 같이 스케이트를 탄 선수들이다. 특히 최지은(20) 선수와 김수진(19) 선수는 지금도 끈끈한 친분을 이어가는 사이다.
“연아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신혜숙 코치님 밑에서 만났어요. 주니어대회에서 처음 메달을 땄을 때 연아가 약간 슬럼프상태였거든요. 힘내라고 제 스케이트를 빌려줬더니 그걸 신고 1등을 했죠. 그래서 더 친해졌어요.”(최지은 선수)
같은 선수의 눈으로 봐도 김연아는 정말 타고난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기술 습득이 빨랐다. 독한 성격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시즌이 끝나고 해외 전지훈련을 가면 정말 강행군이에요. 다들 못 견디겠다고 하소연하죠. 연아도 말로는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꼭 남보다 훈련을 더 했어요. 고집이 센 아이라 연습이 뜻대로 안 되면 소리도 지르고, 울기도 많이 울었죠. 그런데 놀라운 건 울면서도 점프 연습을 계속 하는 거예요. 그것도 아주 정확한 동작으로.”(김수진 선수)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김연아의 미니홈피에는 두 선수와 함께 찍은 사진이 가득하다. 바쁜 연습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김연아가 유명해지고 난 후에도, 틈틈이 짬을 내어 보낸 즐거운 시간들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저희는 평소 체중 조절에도 신경 써야 하니까 음식도 함부로 못 먹어요.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면 일부러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곤 해요. 연아는 노래를 잘 부르는데, 특히 목소리가 비슷한 가수 보아의 노래를 즐겨 불러요. 노래방에도 자주 가고요.
가장 힘들 때 같이 지낸 사이라 친할 수밖에요. 피겨 선수들은 일주일에 많아야 이틀 노는데, 그나마 너무 힘들어서 집에서 쉬거든요. 그래도 저희끼리는 말도 잘 통하고 서로 하소연하면 위로도 받으니까 자주 보는 거죠.”(김수진)
두 사람은 너무 어린 나이에 나라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는 김연아를 볼 때마다 안쓰럽다고 했다.
“중·고등학교 때 친구가 평생 간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연아는 학교생활을 거의 못하고 지내왔으니 나중에 커서 고민을 털어놓거나 허물 없이 어울릴 사람이 없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요. 이제까지 주변의 많은 사람이 도와줬기 때문에 나중에 연아가 뭔가를 혼자 하려고 할 때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최지은)
“연아가 방송 출연을 위해 과천 빙상장에 갔을 때 연아가 제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해서 저도 갔었죠. 그런데 매니저가 시간이 없다고 해서 거의 얘기도 못했어요. 연아가 속상해 하더라고요.”(김수진)
하지만 예전보다 한층 성숙해진 ‘동생’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과거에는 친한 사람이 아니면 무뚝뚝하게 인사만 할 정도로 낯가림이 심하고 관심이 없는 분야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웃음도 많아지고 말도 편하게 해서 좋았다는 것.
한순간에 은반의 신데렐라로 떠올라 세계 무대를 호령하게 된 김연아. 그러나 이제까지 김연아를 지켜봐온 사람들은 그의 재능과 성격, 노력을 생각한다면 그의 성공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성공하는 것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