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사 반야어린이집 이명우(59, 해월) 원장의 서재에는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우리말 팔만대장경 한 질이 있다.
빛바랜 이 불서는 지난 40년 간 이 원장이 맺어온 불연(佛緣) 그 자체에 다름없다.
인생의 고비마다 정신적 귀의처가 되어 준 부처님 가르침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 원장은 “구입한지 40년이 지난 후, 얼마 전에야 비로소 완독했다”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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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건강악화로 가수활동과 교직생활을 접었던 이명우 원장은 “힘든 고비를 불법으로 극복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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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이 책장에 잠자고 있던 40년의 세월동안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훌쩍 나이를 먹었고 인생의 고비도 무사히 넘기면서 어느덧 삶도 무르익었지요. 팔만대장경의 마지막 장을 덮으니 참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오랜 기간 쌓이고 쌓였던 불교와의 인연들이 오롯이 가슴 속에 박히는 느낌이랄까요. 부처님께서 근기에 상관없이 모든 중생을 아우르는 가르침을 남기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월의 때가 묻어 누렇게 변색된 이 한질의 팔만대장경과 이 원장의 인연은 그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원장은 “어린 시절 딱히 스스로가 불자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지만 불서로 접한 부처님 가르침은 막연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었다”며 “책방에 문제집을 사러갔다가도 불서가 눈에 띄면 문제집 대신 불서를 사서 돌아오곤 했다”고 회상했다.
무작정 불서를 사 모으는 특이한 학생이었던 이 원장이 당시 충동적으로 구입한 팔만대장경 한 질을 완독하기까지의 40년 세월은 남다른 삶의 굴곡으로 주름져 있었다.
충남대학교 국어국문과 재학 시절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했고, 이후에는 가수 활동을 병행하며 서울 시내 사립고등학교 국어교사로 12년 간 근무, 또 교직을 떠나 강원도로 온 후에는 신흥사복지원 산하 반야어린이집 원장으로 아이들과 살을 부비며 살고 있다.
그러나 큰 곡절없이 보이는 그 이면에는 이 원장이 지나온 크고 작은 인생의 고비들이 속속들이 담겨 있다.
이 원장은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민중의 애환을 담은 ‘가시리’라는 곡으로 입상한 후,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가수로 데뷔했다.
독특한 음색과 풍부한 감성으로, 당시 보기 드문 인재라는 극찬까지 받았다.
언젠가 만났던 민중가수 안치환은 그에게 “가시리는 나를 가수의 길로 이끈 노래”라며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가시리’로 제1회 대학가요제 입상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교직생활과 가수활동을 병행하고자 서울로 올라와 성남고등학교 국어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가수 활동보다는 교직자로서 학생들을 올바르게 이끌고자 하는 신념으로 가득 찼던 시절이었다.
가끔 수준급의 실력으로 노래 한 곡조 뽑아내는 유쾌한 국어 선생님은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걸음걸이가 참한 아내와 예쁘고 착한 딸도 둘이나 얻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부러울 것도 없었고 만족스러운 인생이었다.
그러나 교직생활 12년 차가 되던 해 모든 것이 급변했다.
지속적으로 발병해 왔던 목의 통증이 심해지면서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더 이상 교단에 설 수 없을 정도였다.
학교 측에서는 그를 도서실에서 일할 수 있게 배려했지만, 결국 그는 교직을 떠났다.
제자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쉬는 동안,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힌 것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심적인 고통이었다.
갑작스레 닥쳐온 고비였기에 더욱 그랬다. 노래도 부르지 못하고 제자들과도 함께 할 수 없게 된 자신의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
가까이 불교 성전을 두고 읽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려 애썼다.
달리 기댈 곳이 어딨으랴. 자애로운 부처님의 가르침은 구절구절마다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의지처였다.
1996년 속초 신흥사가 반야어린이집을 설립했을 무렵, 서울서 자주 다니던 관적사 포교당의 스님이 그를 어린이집 원장으로 추천했다.
오랜 교직생활로 원장 자격이 있었기에 그는 그 길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아내, 두 딸과 함께 강원도로 왔다.
그렇게 새로운 지역에서 천진불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하루종일 정신없이 뛰노는 아이들은 그에게 활력소로 다가와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넣었다. 부처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돌보다보니 어느새 반야어린이집은 종교를 떠나 속초시내 선호도 1위를 자랑하는 어린이집으로 성장했다. 밝은 마음과 깨끗한 공기에 건강도 자연히 회복됐다.
고비를 딛고 인생의 제2막이 열린 것이다.
1999년부터는 신흥사 회주 무산 스님의 권유로 제1회 만해축전의 기획, 연출, 사회까지 도맡았다.
이 원장은 이를 시작으로 이후 10년간 만해대상시상식의 연출을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점등식, 제등행렬, 법요식부터 산사음악회까지 불교계에서 진행하는 각종 행사에 발벗고 동참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연 덕분에 다시 찾은 행복을 나눔으로 회향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원장은
“병 때문에 원치 않게 교직을 떠나 참 힘들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기가 오히려 부처님 가르침에 더욱 깊이 녹아들어 새롭게 발심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고 회상했다.
“예전의 나는 아상이 참 강했지요. 내 능력으로 삶을 평탄하게 살수 있을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힘든 시기를 맞고, 새로운 발심으로 불교 공부를 하면서 나를 비우고 하심하는 법을 배웠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 부처다 하여 지었던 ‘다불’이란 법명 대신 바다와 같이 넓고 달과 같이 은은하게 비춘다하여 구로종합사회복지관장 소희 스님이 지어주신 ‘해월’이란 법명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힘들 때마다 불법에 의지해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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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화암사 산사음악회 공연 모습. |
그는 “무엇보다 사찰에서 노래하고, 천진불들과 함께하는 지금의 삶이 참 행복하다”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매일 아침 노란버스를 타고 어린이집을 들어서는 아이들과 마주하고, 공손히 손을 모아 서로 합장인사를 하는 순간은 10년이 넘게 해왔지만 항상 새롭다.
“매일 200명이 넘는 천진불들과 함께 부대끼며 생활하니 웃음이 가실 날이 없다”는 이 원장.
그의 두터운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은 얼핏 강한 느낌을 줄 법도 하건만, 얼굴 깊이 배여 있는 웃음 주름 때문에 온화하고 인자한 인상이다.
시종일관 머금는 잔잔한 미소와 밝은 웃음이 60세 가까운 나이에도 맑게 빛나는 비결이 아닐까.
“언제나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경구대로 마땅히 머무는바 없이 끝없이 마음을 내며 살고 싶다”는
이 원장은
“남은 인생 동안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작은 일이라도 주변에 베풀면서 회향하는 마음으로 매순간마다 정성스럽게 살아가는 것”
이라며 예의 환한 미소를 전했다.
속초=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1021호 [2009년 11월 02일 14:16]
첫댓글 가시리 가시리랏다. 청산에 가시리랏다.~~~~. 노래 만큼 맑으신 얼굴이십니다. 천진불과의 아름다운 만남이 바로 회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세월은 흐르나 봅니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어떤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몸이 아프지 않았더라면 이 분의 인생여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중생을 성숙시키시는 부처님의 자비...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