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걸어온 자, 바실리스크 도마뱀 이야기 / 최금진
진지함이라곤 없는 코미디처럼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돌아보면 저수지 수면에 내가 남긴 발자국들 지워지고
한 발이 빠지기 전에 서둘러 한 발을 내밀어 다음 길을 계속하던 날들
등에 뿔 나고 머리에 혹 나고, 발톱에 살기가 돋은 한 사내의 이야기는
기실 너무 겁이 많아 빠르게 세상을 도망쳐간 데서 시작된 것
도전이 아니라 도주였으며,
위대한 첫발이라고 믿고 싶었던 결심은 늘 위태한 마지막 발이었다
발바닥이 경배했던 바닥이여, 바닥을 받쳐주던 어둠의 부력이여
서너 발쯤 앞에 당신이 당도해 있기를 얼마나 많이 바랐던가
우스꽝스러운 몸동작으로 수면에 써나갔던 모든 개인과 공동체의 서사여
두려움이 우리의 결말이었구나
지나온 족적들이 나뭇잎처럼 가볍게 물 위에 떠간다
추락을 일으켜세워 다시 앞길을 만들어내는 낙엽과 눈송이와 새들
면전에서 무너져내리는 길을 다시 세워 저 공중에 던져올리고
나 또한 도망치듯 당신을 떠나왔습니다, 달도 뜨지 않은 그 밤에
그리고 역사는 배신처럼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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