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장로교(통합측)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용어 32개를 선정해서 발표 한 바 있다. 그 가운데 “예배 봐 준다”는 말은 “점을 봐 준다”는 미신적 용어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므로 신학적으로 볼 때 받아드릴 수 없는 잘못된 용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요즘 이사를 하고 출석할 교회를 아직 정하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떠돌이 교인 생활을 하고 있다. 다 같으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예배드리는 모습도 천태만상이다. 어떤 경우에는 “예배를 봐 준다”는 말이 오히려 무색할 지경이다. 차라리 “예배를 봐 치 운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적잖았다.
성찬예식을 집례하는 목회자가 떡과 포도주를 배정하는 사람들에게 “빨리, 빨리”를 연발하며 채근할 때는 민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서두르는 배정위원들에 맞추어 떡과 포도주를 받아 재빨리 입에 털어 넣어야만 하는 교인들의 모습은 차라리 눈물겹기까지 하였다.
고난의 주님을 기억해야 할 시간, 그것도 1년에 한 두 번 밖에 가질 수 없는 시간마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내둘려야 한단 말인가?
이제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일 저녁예배를 오후 2, 3시 경에 드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몇 시에 저녁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가 문제가 될 수 없다. 시대가 바뀌고 생활 패턴이 변하면 예배시간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구도 들어내 보이고 싶지 않은 속내가 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예배시간이 이리저리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시인들의 바쁜 생활을 고려할 때 주일 저녁예배는 솔직히 부담스럽다. 주일 낮 예배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고, 저녁까지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백년 넘게 지켜 내려온 주일 저녁예배의 전통을 일순간에 없앤다는 것은 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이런 마음의 자락을 깔고 드리는 주일 오후예배에 무슨 감격이 있을까 싶다. 예배는 기다리고 준비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 시간이 더 귀하다. 프로그램으로 사람을 잠시 감동시킬 수는 있을는지 모르나 성령의 감동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한 동안 주5일 근무제를 놓고 교계 안에 논란이 뜨거웠다. 이것이 성경적이냐는 문제는 신학자의 몫으로 남겨 놓더라도 주5일 근무제가 실제로 우리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간과할 수 없다.
주5일 근무제가 시작되면서 주일예배가 금요일 저녁시간으로 옮겨지고 있다고 한다. 주일성수의 면죄부를 주기 위한 예배, 마음은 이미 콩밭으로 내몰아 놓고 드리는 예배 가운데 신령과 진정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예배의 감격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껍데기만 요란하게 포장되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내용물 없는 껍데기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내 생애에 가장 감격스러웠던 예배는 한국교회에서가 아니다.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 모스크바의 한 침례교회에서 드린 주일예배였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정책으로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한 때였다. 교회는 밀려드는 사람을 복도와 통로에도 수용할 수 없었다. 교회 문을 열어 놓고 교회 마당에서도 예배를 드렸다. 눈물 없이는 찬송도, 기도도, 설교도 할 수 없었다. 공산치하에서 예배를 기다렸던 무리들의 감격이 표출되는 현장이었다.
빵과 포도주를 들면서 내 앞에서 한 없이 눈물 흘리던 한 러시아 아주머니는 나를 이천년 전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현장으로 인도하는 듯 하였다. 고뇌에 찬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신 골고다의 현장을 그 때 잠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예배는 기다림부터 시작된다. 기다림 없이 드린 예배는 내 속의 영혼을 흔들어 깨울 수가 없다. 그저 예배를 봐 치울 뿐이다.
심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