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Structuralism)란 일종의 철학적 이론으로서 모든 ‘의미’는 인간 문화 체계들로 구성된 이른바 ‘구조’(Structure)를 통해서 인지되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구조주의 이론은 이 이론이 제출된 이후 거의 모든 분야의 과학과 인문학에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되어 왔는데, 구조주의를 적용한 이들 연구들은 모든 경우에 연구 대상이 되는 주제의 고유한 의미나 중요성을 밝히려 하기 보다는 연구 대상의 ‘의미’를 인류가 그들의 지적 체계를 형성하고 구조화한 방식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밝히려 하였다. 구조주의가 발현하고 발전함에 따라 제 학문 분야에서 이를 방법론으로 차용하게 되었고, 신학과 성서 해석 분야에서도 구조주의를 성서 연구 방법론의 하나로 차용하여 성서를 구조주의라는 방법론에 의거하여 해석하고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언어학, 인류학 등 다양한 학문적, 철학적 배경으로부터 발전되어 온 구조주의는 그 개념에서부터 구체적인 방법적 적용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오해와 남용을 겪어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본고는 구조주의적인 성서 해석 방법에 대해 논하기 전에 먼저 인문학의 한 갈래로서의 구조주의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구조주의와 성서 연구와의 관계를 논하는 순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먼저 구조주의가 어떻게 대두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간단한 연혁을 살펴보고 그 후에 구조주의의 방법론적 특성을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런 다음 구조주의가 성서 연구에 어떻게 방법론적인 틀을 제공해 줄 수 있는지, 성서본문에 구조주의적 읽기를 적용한 구체적인 예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2. 구조주의 언어학의 대두
구조주의는 통상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소쉬르(F. de Saussure)는 1916년에 그의 제자들에 의해 출판된 자신의 유고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에서 인간의 언어를 하나의 사회현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전통적 언어학이 통시적 관점(通時的 觀點, Diachronic)에 의거하여 언어의 ‘기원’과 그 ‘역사적 변천’을 중요시하여 다룬데 반하여, 인간의 언어가 하나의 사회현상이라는 관점에 기초를 두고 소쉬르는 공시적 관점(公示的 觀點, Synchronic)에 입각하여 무엇보다 언어의 현 상태와 그 상호간의 관계를 문제 삼았다. 그리하여 복잡한 인간의 언어활동에 하나의 체계를 세워보려는 시도를 하였는데 이것이 현대 언어학이라 불리어지는 ‘구조주의 언어학’이다.
소쉬르는 먼저 언어체에 있어서 ‘랑그’(langue)와 ‘빠롤’(parole)을 구분했다. ‘랑그’는 사회적 계약과 관습에서 유래한 일종의 언어규칙으로서 개인은 이것을 변경시킬 수 없으며 오히려 그는 여기에 적응해야 한다. 따라서 ‘랑그’는 항구성과 자율성을 갖는다. 이에 반해 ‘빠롤’은 개인적인 언어행위이며 구체적인 언어사건이다. 따라서 ‘빠롤’은 일종의 자유로운 표현 또는 변형을 구성할 수 있지만 언제나 ‘랑그’의 엄격한 제한을 받는다. 소쉬르는 이 두 가지 중에서 주로 ‘랑그’를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았으며, 언어행위보다 언어구조에, 언어사건보다는 언어의 기능에 관심을 쏟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언어학이 구조주의적 언어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소쉬르는 또한 언어가 ‘기호’(記號, sign)라는 점에 착안하여 기호에 있어서 ‘씨니피앙’(記票, signifiant)과 ‘씨니피에’(記意, signifie)를 구분하였다. 여기에서 ‘씨니피앙’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을 뜻하고 ‘씨니피에’는 의미의 내용을 뜻한다.
소쉬르와 그를 추종하는 현대 기호학 이론에 따르면 모든 기호는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를 품고 있다. 예컨대, ‘나무’라는 언어 기호가 있을 때 우리는〔namu〕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 소리는 귀를 지나 뇌로 와서는 뇌 세포를 자극해 ‘목질이 줄기를 가진 다년생 식물’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언어 기호에서 청각 영상(acoustic image)의 면을 기표라고 하고, 언어기호에서 개념(concept)의 면을 기의라고 한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표는 의미전달 또는 운반체를 뜻하고, 기의는 그 속에 담겨 이는 내용이나 의미를 뜻한다. 꽃집에 있는 꽃은 사물에 지나지 않지만 한 다발 엮어 애인에게 바쳐진다면 그것은 기호로 전환되며 애인은 꽃다발이라는 기표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의미를 읽고는 기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는 기호 자체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기호는 구체적이고 일정한 구조에 놓였을 때 비로소 의미를 드러낸다. ‘나무’의 의미는 광합성작용을 한다든지 탄소동화작용을 한다든지 목질의 줄기를 가졌다든지 하는 나무의 본질이나 현상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풀’과의 차이(혹은 관계나 구조)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는 의미를 드러낸다. 풀과의 차이 및 나무가 풀과 맺게 되는 관계나 구조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불, 뿔, 풀’이 음운 차이로 의미가 갈리고 다른 낱말이 되듯이 언어에는 차이가 있을 뿐이며 ‘불, 뿔, 풀’이라는 낱말 자체에 이들이 가진 특성이나 개념이 포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수천 년간 이데아와 실체를 찾아 헤매던 서양의 인문학에 경종을 울리고 구조적 사유에 새 지평을 연 핵심이다. 이로써 그는 언어가 기호라는 관점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독자적인 기호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기호학’(記號學, Semiology)이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호에 대한 그의 이러한 설명이 구조주의를 태동시킨 근본적인 이유는 종래 ‘기표’가 그 자체적으로 ‘기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전통적인 관점을 거부하고 기표 자체는 일정한 기의를 본래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표가 어떠한 구조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기의를 갖게 되며, 이러한 기의는 기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일정한 내재적 본질에 의해 부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표가 배척한 다른 기호가 가지게 되는 기의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혁명적인 주장 때문이다.
3. 구조주의 언어학의 방법론적 적용
이러한 구조주의적 언어학의 방법론을 인류학에 적용하여 구조주의 구체적인 발현을 가능케 한 학자가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이다. 레비스트로스는 2차 대전 중에 뉴욕의 ‘사회조사연구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교수로 봉직하였는데 이 때 그는 같은 연구원의 동료 야콥슨(R. Jacobson)을 통해서 구조주의 언어학의 방법론을 습득하게 되었다. 이 방법론은 레비스트로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드디어는 구조주의의 탄생을 가능케 해 주었다. 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로서 마르크스, 프로이드, 지질학 등에 깊은 영향을 받은 레비스트로스는 마치 지질학자가 지층을 꿰뚫어 보듯이, 그리고 마르크스가 다양한 사회 현상 속에서 하부구조를 찾아낸 것처럼, 그리고 프로이드가 무의식 층의 구조를 밝혀낸 것처럼 표면 현상 뒤에 숨어서 그것을 지배하고 규정짓고 있는 ‘기본 구조’를 발견해내려 하였다. 이러한 연구에 대한 방법론을 그는 소쉬르로부터 발전한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찾은 것이다.
그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통찰을 인류 문명의 여러 양태들에 적용시키고 그것들을 분석하면서 언어학적 분석을 유비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먼저 철학으로 정형화되기 이전 단계의 신화들을 분석하면서 개별 신화를 ‘빠롤’로 파악하고 전체 신화를 구성시키는 체계를 ‘랑그’라고 상정하여서, 개별적인 신화는 이야기들의 근저에 구조화되어 있는 체계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신화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체계가 아직 추상적인 개념화 능력을 구비하고 있지 못한 자들에게 실재(reality)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즉 개별신화인 ‘빠롤’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화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는 전체 신화들의 구조인 ‘랑그’의 지배를 받으며, 다른 신화들과의 대조와 비교를 통해서 일정한 의미를 가지게 되고, 아직 철학적 사고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개별적인 신화가 아니라 그 신화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체계적인 구조를 통해 신화의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만일 인간의 정신작용이 일정한 내용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라며, 또한 이 형식들은 고대인에게나 현대인에게나 또는 원시인에게나 문화인에게나 그 근본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라면, 모든 제도나 관습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구조를 발견해 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언어학에서 차용한 방법론을 활용하여 남미 원주민의 친족관계를 분석하였다. 그는 남미 원주민의 친족관계를 분석한 결과 모든 친족제도의 기본구조가 ‘교환’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 친족제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근친금혼(近親禁婚)이라고 간파하였다. 어떤 유형의 친족구조이든 그것은 두 명의 남자 또는 두 개의 남자 집단이 여자를 교환의 수단으로 삼기 위하여 자매 또는 자기 집단에 속하는 여자와는 결혼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집단의 여자를 다른 집단에 주고, 다른 집단에서 여자를 데려오기 위한 조처가 바로 근친금혼의 숨은 의미라고 주장하였다. 즉 근친금혼은 전통적인 견해처럼 생리적, 유전학적 자연 조건이나 도덕적 질서가 아니라 집단이 존속하기 위한 사회적 조건이며, 집단들은 여자를 집단간에 교환할 수 있는 ‘기호’로 보고 이 기호를 교환함으로써 공동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레비스트로스는 친족제도를 여자를 축으로 하는 ‘교환의 구조’로 보면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인간은 사회를 가능케 하고 또 그를 통해서 문화를 가능케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서 처음으로 ‘사회현상의 구조적 성격’을 뚜렷이 부각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대부분의 분과 학문으로 확대되어 인류학을 비롯한 문학, 사회학, 정치학 분야에로까지 확장되었으며, 신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4. 구조주의 언어학의 방법론
첫째로, 방법론으로서의 구조주의는 현대 언어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미체계(예컨대 언어, 사회, 심리분야)를 그 연구대상으로 할 때 그 기원, 또는 발전과정 즉 그 ‘역사적 관계성’(通時性, Synchronic)을 도외시해버리고 다만 그 ‘현재의 상황’(公示性, Diachronic)만은 그 안중에 두고 작업을 해나간다. 다시 말하면 방법론으로서의 구조주의는 통시성을 도외시한 공시성의 방법론이다.
둘째로, 방법론으로서의 구조주의는 ‘구조주의적 분석’(structural analysis)을 채택한다. 구조주의적(structural)이라는 말은 이 분석이 ‘실재’(reality)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구상된 의미체계와 관련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의미체계가 객관적인 실재와 상응하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구조주의적 분석은 객관적인 실재와 관계되는 구조적인 면을 문제 삼지 않고 다만 의미체계 속에서의 법칙을 발견해 내려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구조주의적 분석의 두 단계는 다음과 같다. 그 제1단계는 ‘분석 작업’(decoupage)이다. 이 분석 작업 단계에서는 주어져 있는 의미체계에서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 단위인 ‘기본 구조’(elementary structure)를 분해해 낸다. 물론 이 의미체계의 최소단위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실체로 고려되지 않고 다만 다른 최소 단위와는 상이하다는 관점에서 또 그들과 여러 가지 관계를 가진다는 관점에서만 고려된다. 그 제2단계는 ‘재구성’(agencement)이다. 즉 찾아낸 기본구조들 속에서 연결과 구성의 법칙을 찾아낸다. 최소단위들은 이러한 법칙들을 통해서 일정한 의미체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재구성이란 주어진 의미체계의 전형적인 형식을 찾는 작업이다.
이러한 구조주의 분석 방법은 성서 연구에 있어서, 한 텍스트에 등장하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이 서로 스미고 짜여 이루어내는 질서에 주목하여, 그것의 체계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일종의 설명 이론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작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구조주의 비평가는 언어 표현의 특징적인 면, 이를테면 반복법, 교차대구법, 정형화된 공식, 이항 대립(binary opposite) 등과 같은 요소들이 뒤얽혀 텍스트를 형성하고 그것의 의미를 생산해 내는 일련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그 분석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주어진 텍스트의 이면에 일관되게 흐르는 신념이나 사고체계가 있는지, 그 유형은 어떤 구조적인 특징을 드러내는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주의 방법의 한 장점은, 외견상 잡다한 요소로 뒤얽혀 일관된 체계를 포착하기 어려운 파편적이고 혼란스런 텍스트의 구조도 이른바 그 ‘심층 구조’(deep structure)를 파악하기 위한 실마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구조주의와 성서연구
스파이비(Robert. A Spivey)는 구조주의에 대한 자신의 소논문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역사적 주석은 성서본문을 당시의 삶의 정황에 놓음으로써 ‘객관성’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 체계에 놓고 보는 다른 접근법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역사적으로만 보는 데서 생기는 잘못을 바로잡아 본문을 더 객관적으로 보도록 해주지 않을까?” 그에 따르면 성서 이야기에 다가서는 구조주의자들의 접근법에는 아래와 같은 중심적인 원칙이 있다. (1) 인간의 행위와 사건의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실재가 아니다. (2) 실재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3) 이 구조는 암호와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구조주의자들의 과제는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의 뜻을 서술하는 일이 아니라, 이야기 하나하나의 뒤에 숨어있는 기본적인 뜻, 혹은 암호를 푸는 일이라고 하겠다. 역사비평에 근거한 성서비평가들은 문학작품을 다루는 사람들이지만, 이러한 문학작품의 역사적인 면에만 집착한다. 그러나 구조주의자들은 성서 자료를 반복해서 보는 가운데 그 심층에 자리하고 있는 구조를 마치 암호를 풀듯이 풀어냄으로써 그러한 편향적 자세를 시정하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앞서 설명한 해체와 재구성의 방식을 통해서 구조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 본문의 참된 의미이고 무엇이 그것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일정한 현상들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지 그 과정을 찾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주의자들의 활동은 본문이 함축하다고 상정된 ‘의미’에 결정적인 해답을 주는 것도 아니요, 색다른 또 하나의 해답을 주려는 것도 아니다. 본문에 나타난 여러 현상에 질서를 주어 이를 설명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결국 본문을 통해 말을 주고받으려는 사람의 체계를 묘사하려는 것이다. 스파이비는 이러한 구조주의자들의 성서 해석 방법을 음악 연주, 지층(地層), 신호등이라는 세 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설명한다. 스파이비의 설명에 의거하여 구조주의자들이 성서 본문을 연구하면서 무엇을 추구하려고 하는지 간략하게 살펴본 후 구체적인 구조주의적 성서 해석의 예를 살펴보자.
가. 음악 연주
인간 활동의 역사적, 심리적, 사회학적 연구는 대개 일차원적인 이론 즉 인과율 이론, 실증 이론, 행태론, 자극과 반응 이론 등에 의거하여 진행된다. 그러나 스파이비는 ‘사람이 음악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면 인간의 두뇌는 화음과 선율을 동시에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는 인간의 활동이 일차원적인 접근 방법에 의해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구조주의자들이 성서나 그 밖의 다른 문헌을 분석한 것을 보면 흔히 ‘악보’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라, 그들의 분석이 ‘수평적인 면’(Syntagma)과 ‘수직적인 면’(Paradigm)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수평적인 축은 줄줄이 이어 내려가는 이야기들을 말하고 수직적인 축은 같은 내용으로 된 다른 이야기들에 나오는 관계들의 체계를 말한다.
예를 들어, 리치(E. Leach)라는 학자는 구조주의적인 관점에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세 창조 설화(1:1-2:3, 5:1-8;2:4-4:1;4:2-16)를 분석하면서 이 세 창조설화를 ‘악보에 올린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 세 본문에서 수평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고리들은 대략 ‘이레에 걸친 창조-에덴동산-가인과 아벨에 관한 설화’의 세 가지이다. 그러나 수직적인 축은 서로 반대되는 것, 곧 이상적이요 완전한 것과 현실적이요 불완전한 것(하늘과 땅, 서와 동, 생명과 죽음)으로 분류되며 이것이 서로 엇갈리는 항목(창공, 낙원에서 추방당함, 생명과 죽음)으로 분류되어 혼선을 빚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게 본문을 해체하고 다시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그 이야기들이 자신의 의미를 끄집어낸 보다 심층적인 구조가 있었다는 주장이 성립한다. 즉 성서의 이야기들은 자신이 이미 전해 받은 것을 후세에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쓰여 진 것이며, 각각의 창조 관련 이야기들은 이들이 전해 받은 이야기의 일부분씩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 심층에 서로 엇갈리는 항목들의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 것은 마치 음악 연주를 듣는 것과 같아서 청중은 개별 연주자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합쳐져서 들려주는 음악 전체를 듣게 되는 것이며 개별적인 연주자들의 연주 이면에 담긴, 혹은 그 연주를 통괄하는 일정한 법칙이나 메시지를 ‘가슴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이 찾아내려고 추구하는 것은 본문이 자리하고 있는 문맥적 관계나 언어적 연관성이라는 ‘표층 구조’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심층적 구조’이며, 그러한 구조가 어떻게 구체적인 개별 단화들을 통해서 표현되고 의미 지워졌는지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 지층(地層)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자서전적인 저서 『이지러지는 세계』(A World on the Wane)에서 지질학적인 관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덕, 자갈밭, 골짜기, 나무, 계곡 등으로 된 지상의 풍경은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무질서는 숨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각기 다른 형식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뚜렷한 공간-시간 곧 지질학적인 시기들이 한데 모인 것이다. 언어도 그렇지만 지상의 풍경도 통시적이며 동시에 공시적이다.” 이처럼 땅 밑에는 인류의 근거가 되는 동시에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한 지층이 엄연히 존재해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사고도 지질학적인 세계처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구조주의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합리적인 것을 넘어서 우리의 사고를 결정하는 틀(category)이 있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에 대한 증거로 세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신화들 간의 유사성을 제시한다. “신화에서는 안 되는 일이 없다. 그러나 반면에 신화란 멋 대로인 듯이 보이기는 해도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서 수집된 신화들도 놀랍게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다. 신화의 내용이 우연이라면 전 세계의 신화들이 그토록 유사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유사성을 사고에 앞서는 과정, 곧 사고의 기초가 되는 과정의 마지막 결과라고 생각해야 비로소 서로를 비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 가면 마치 대지를 떠받치고 있는 지층을 발견할 수 있듯이 인간의 사고 저변에 놓여져 있는 기본적인 사고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맥락에서 구조주의자들은 본문의 표면적인 의미나 구조를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해당 설화나 이야기 이면에 놓인 근원적인 구조를 밝혀냄으로써 그러한 본문에 표현되어 있는 구조의 단면을 파악하려고 한다.
다. 신호등
구조주의자들의 성서해석에 대해 스파이비가 제시하는 마지막 이미지는 교통 신호등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레비스트로스가 주장한 ‘이항 대립쌍’(binary opposite) 이론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소쉬르의 기호 모형은 이분법과 변증법적 합성이라는 대립되는 두 가지 조작을 포함하고 있다. 소쉬르에 따르면 우리가 자연 속에 있는 어떤 현실체의 의미를 붙잡을 때 다음과 같은 이분법이 연속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우선 우리의 인식 체계는 대상에 대해 나와 다른 것(나 아닌 것)으로, 다른 것의 모양과 그것의 배경으로, 그 다른 것의 기호와 그 다른 것 자체로 갈라져 나가며, 이 연쇄 고리의 마지막에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저 밖의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표하고 있는 기호이다. 소쉬르는 이 기호를 다시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 이 모든 이항 대립쌍들 간의 변증법적인 합성이 일정한 의미작용을 일으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마치 자연의 빛을 일정한 범주에 따라 나눈 후, 어떤 색감을 파악할 때 이들 범주에 속한 빛들 간의 비교와 대조를 통해 변증법적으로 한 가지 색을 확정짓는 작업과정과 흡사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라와 파랑, 초록, 노랑, 빨강에 이르는 빛깔들은 자연 속에서 연속되는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사람의 머리는 이렇게 연속되는 것을 연속되지 않는 것처럼 풀이한다. 그래서 이들 중에 어떤 쌍을 대립되는 대립쌍으로 삼아 그 두 극단 사이의 중간 위치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긴 대립쌍과 그 중간의 위치가 교통신호로 대변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빨강과 파랑은 서로 대립쌍이고 그 중간이 노랑이라는 것이다. 교통 신호등이 대변하고 있듯이 우리는 자연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분류해서 항목을 따라 정리한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이러한 과정이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보편적인 사고체계라는 것이다. 이런 언어학의 논리는 신화의 논리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구조주의자들은 생각한다. 신화에서도 모순(반대되는 것)은 변증법의 과정을 거쳐서 매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본문에 대한 ‘연사적 읽기’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며, 구조주의자들을 ‘이항 대립쌍과 이들 간의 매개와 조정’이 인간 사고의 기본 구조이며, 이러한 구조에 입각하여 일체의 이야기나 신화가 전개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기본 구조를 ‘연사적 읽기’(연속적 읽기, 수평적 읽기)를 통해 도출해 내고 이를 다시 ‘범례적 읽기’(수직적 읽기)를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심층 구조를 밝히려고 한다.
아래에서는 갈라디아서 1장 1절-10절에 대한 구조주의자들의 ‘연사적 읽기’의 한 예를 살펴봄으로써 구체적으로 구조주의자들이 이항 대립쌍이라는 기본 도구를 가지고 본문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지 보도록 하겠다. 아래의 분석은 ‘복음’, ‘바리새인들의 신화체계’, ‘헬레니즘의 신화체계’, ‘반(反) 복음’이라는 네 가지 ‘이항 대립쌍’(binary opposition)의 조합을 통해 각 구절 이면의 기본 대립 구조를 도출해 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6. 구조주의적 비평의 예
- 갈라디아서 1장 1절-10절의 연사적 읽기(syntagmatic reading)
1절a - ‘바울 사도’
이 두 단어는 ‘바울-사도’의 동일시가 자명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바울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을 때에는(1장 13-14절) 사도가 아니었으며, 그가 다른 복음을 선포함으로써(1장 8절) 자신의 사도성을 버릴 수도 있는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여기에 ‘일반인(바리새인 혹은 다른 방식)으로서의 바울’과 ‘사도로서의 바울’이라는 대립이 나타나 있다. 본문은 이 대립의 매개(mediation)가 발생했다는 것을 ‘바울은 사도이다.’라고 표현한다.
6절과 갈라디아서의 여러 곳에서 이것은 또 다른 대립을 매개하는 용어로서 현시되고 있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바울’ 이라는 ‘광의의 신화소’(the broad mytheme)는 복음의 신화적 구조의 긍정적 측면에 속하지만, ‘일반인으로서의 바울’은 이 구조의 부정적 측면에 속해 있다. 바울 서신의 전체 문맥에서 볼 때, 후자의 광의의 신화소는 ‘바리새인으로서의 생활방식을 갖는 사람들’ 또는 한층 더 ‘바리새파 신화체계에 속하는 사람들’로 정식화 될 수 있다. 앞서의 지적대로, 이 본문에서 어떤 다른 완전한 신화체계가 광의의 신화소의 역할을 맡고 있다. 따라서 이런 다른 체계들도 광의의 신화소로서 기능하고 있는 복음의 신화적 체계의 요소로 볼 수 있다.
1절b - “사람에게서도 아니요 사람을 통해서도 아니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가. ‘바울/사도’라는 대립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매개된다. 이것은 ‘바리새인으로서의 바울-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사도로서의 바울’과 같이 도식화 할 수 있다. 매개자의 위치에는 하나의 용어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라는 두 개의 용어가 있다. 이것은 확실히 신학적 논증의 간섭이다. 우리는 둘 중에서 어느 하나가 신화적 구조의 단계에서 실제의 매개자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광의의 신화소 두 개가 상관관계에 있다고 지적할 수는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하나님 아버지’라는 도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나. 근본적인 대립이 또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인간’이란 형태로 존재한다.
1절c-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일으키신 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예수’라는 대립이 신학적 논증에 따라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행동에 의해 매개된다.
2절 - “그리고 나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이 갈라디아의 교회에게”
‘형제들’이 바울 사도와 상관관계에 있다. 따라서 두 개의 광의의 신화소는 구조의 긍정적인 면에 속한다. 또한 갈라디아서 자체에 의해 매개되는 ‘갈리디아인들/바울과 형제들’이라는 대립이 있다. 이 대립이 전술한 갈등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신화체계인 ‘반(反) 복음’에 속하는 갈라디아인들과 신화체계 ‘복음’에 속하는 바울과 그의 형제들 사이의 대립이다.
3절 -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가. ‘은혜와 평화’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되어 있으며 축복을 주는 바울 사도와도 관련되어 있다.
나. 축복으로서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은 실재성을 확립하는 권위있는 종교적인 말이다. 여기에서 이 축복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실재적인 것으로 확립해 준다. 즉 그들은 복음의 신화체계 안에 포함되어 있다. 6절은 갈라디아인들이 참으로 복음체계로 재통합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축복은 갈라디아인과 복음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의 조정이라고 볼 수 있다.
4절a - “우리의 죄 때문에 현재의 악의 시대에서 우리를 건져내려고 자신을 바친”
두개의 대립이 그리스도 자신의 선출에 의해 매개되고 있다.
가.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사도, 형제들, 갈라디아인)/죄인들
나.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사도, 형제들, 갈라디아인)/현재의 악의 시대의 세력 밑에 있는 사람들.
여기에서 두 번째 항목은 헬레니즘의 우주론적 용례를 보여준다. 복음의 입장에서 보면,갈라디아인들은 헬레니즘의 신화적 체계에 포함될 때에는 ‘악한 현시대의 세력 밑에’ 있는 사람들이다. 바울이 악한 현시대의 세력 아래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우리를’)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신화체계에 속해 있는 바울≡헬레니즘의 신화체계에 속해 있는 갈라디아인’이라는 상관관계를 표현해 준다. 헬레니즘의 신화체계와 바리새인의 신화체계는 여기에서 신화소의 다발로서 기능하고 있다.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완전한 체계로서의 두 신화체계는 신화구조의 부정적 측면에 속한다. ‘악한 시대에서 해방된 사람들/악한 현시대의 세력 밑에 있는 사람들’의 대립은 ‘갈리디아인과 복음/갈라디아인과 반(反) 복음’이라는 대립에 상당한다. 최초의 대립 용어는 복음의 신화체계에 속하는 갈라디아인으로 읽을 수 있다. 구조의 긍정적인 측면은 일정한 신화체계에 긍정적으로 속해 있다는 것을 표현해 준다.
유비에 의해,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죄인들’의 대립은 유대교의 용어법을 표현하며, 이것은 복음의 사람들과 반 복음의 사람들 사이의 대립으로 읽을 수 있다. 이 대립과 그리스도를 통한 이 대립의 매개는 갈라디아인들의 경험과 상관되어 있는 바울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관관계 ‘헬레니즘적 신화체계≡바리새파적 신화체계’를 지적할 수 있다.
4절b, 5절 -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아버지께 있기를, 아멘”
그리스도의 매개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관계에 있다. 게다가 신학적인 논증에도 불구하고, ‘시대’라는 용어가 다시 사용되고 있으나 이번에는 하나님과의 상관관계 속에서이다. 복음과 헬레니즘이라는 대립 안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악한세대’의 대림은 따라서 ‘하나님≡시대’의 상관관계를 용인하도록 매개되어 있다.
6절 -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돌아서서 다른 복음을 따라 간 것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 ‘복음/다른 복음’의 대립이 나타난다. 이것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들을 은혜 안으로 불러준 자와 함께 있는 갈라디아인들’과 ‘다른 복음을 따라가고 있는 갈라디아인’ 또는 간결하게 ‘갈라디아인과 복음/갈라디아인과 반(反) 복음’으로 표현된다. 이 대립이 해결될 때, 두 번째 극이 지배적이 된다. 그리하여 첫째 극 즉 갈라디아인과 복음은 두 번째 극 즉 갈라디아인과 반(反) 복음에 종속되게 된다. 복음에 속해 있었던 갈라디아인이 이제 반(反) 복음에 속해 있다.
나. ‘여러분을 은혜 안으로 불러주신 분’이란 구절은 ‘이교도로서의 갈라디이인/그리스도인으로서 갈라디아인’의 대립을 내포하고 있다. 매개는 ‘여러분을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통시적인 읽기로는 이 구절이 애매하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할 수도 있고 바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시적인 독해로 보면, 그 애매성이 복음체계 안에서 바울 사도와 하나님과의 상관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편지의 나머지 부분이 밝혀주는 바에 따르면, 갈라디아인들이 복음으로 돌아서게 된 것은 바울의 전도활동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논증의 구조에 따르면 바울 사도가 그 대립의 매개자이다.
7절 -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교란시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 따름입니다.”
‘복음’과 ‘반(反)복음’의 대립은 다름과 같이 3개의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복음 대 비(非) 복음.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즉 갈라디아인들 대 어떤 사람들.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 하고 있다.’ 즉 복음 대 어떤 사람들. 따라서 갈라디아인들은 ‘복음’에 속하며, 어떤 사람들은 ‘반(反) 복음’에 속한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8절 -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가정적인 진술에서는 바울과 형제들이 반(反)복음에 속해 있고, 천사도 반(反)복음에 속해 있다고 표현되어 있다. 결국 ‘바울≡천사’의 상관관계가 암시되어 있다. 이 가정은 실제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죄인과 바리새인으로서 바울이 ‘다른 복음’을 선포할 수도 있다.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죄인들’ 즉 ‘복음체계 안의 바울’과 ‘반(反) 복음 체계 안의 바울’이라는 대립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복음에 속해 있는 바울이 원래 죄인 바울에 의해 대립되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의 신화체계는 반(反) 복음의 신화체계와 상관관계에 있다. 유비적으로 말하면, 하늘에서 온 천사 역시 악한 현시대와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악한 시대에서 해방된 사람들’ 역시 ‘악한 현시대의 세력 밑에 있는 사람들’과 대립하여 읽혀질 수 있으며, 이는 ‘복음’ 대 ‘반 복음 체계의 천사’라는 대립 구도를 양산할 수도 있다. 따라서 ‘헬레니즘의 신화체계’는 ‘반(反)복음의 신화체계’와 상관관계에 있다.
9절 - “우리가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 내가 다시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이 받은 것과는 다른 복음을 여러분들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복음 설교자/반(反) 복음 설교자’라는 대립이 8절의 대립과 더불어 저주를 선포하는 바울 사도에 의해 철저하게 해결되고 있다. 저주는 축복처럼 실재성을 확립해 준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저주를 받아야 하며,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신이 내리는 유죄 선고 아래 놓여 있다. 따라서 그 대립은 변증법적 매개보다는 오히려 대립의 양극 용어 중 한 쪽을 배제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모든 다른 경우에서는, 대립들은 복음의 신화체계에 있는 두 용어를 포함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대립은 반대자를 복음체계에서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해결되고 있다.
10절 - “내가 지금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립이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설적인 상관관계’(hypothetical correlation)보다는 오히려 ‘바울≡사람’이 결합되어 있다. 10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그리스도’의 상관관계에 대립되고 있는 ‘바울≡사람’의 가설적인 상관관계가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가설적인 대립들은 그 구조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상 우리는 한 본문의 요소들을 광의의 신화소와 동일시할 수 있는 연사적 읽기를 요약해 보았다. 이것은 본문을 신화체계의 요소들로 해체하는 과정이다. 연사적 읽기에서 해체는 잠정적인 것으로서, 신화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구조를 식별해 내는 범례적 읽기에 의해 입증되어야 한다. 실제로 분석자는 이 과정을 반복해서 수행할 필요가 있다. 즉 최초의 범례적 읽기 다음에 행하는 제2의 연사적 읽기는 제2의 범례적 읽기를 이끌어가는 광의의 신호소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분석자는 순차적인 접근에 의해, 현상을 가장 잘 대표하는 구성체를 발전시킨다.
7. 구조주의적 비평의 한계와 전망
가. 구조주의적 비평의 문제와 한계
구조주의자들의 접근법에는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한계가 있는가? 먼저 구조주의자들의 쌍수 개념(binary opposite)은 현대 언어학에서 적지 않는 비판을 받고 있다. 언어란 형태심리학적인 ‘자극과 반응’이라는 형식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일찍이 들은 일이 없는 무한한 표현을 창조적으로 할 수도 있고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쌍수로 대를 이룬다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이해하는 여러 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구조주의자들의 성서 연구에 있어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구조주의자들이 문학작품이나 현상을 한 모형으로 환원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구조주의는 문학에 접근하는 한 방법일 뿐, 그것으로 문학을 다 알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구조주의자들의 활동은 문학 작품 자체를 대상으로 삼지 않고 문학적 진술 자체에 있는 어떤 한 면을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어떤 작품이든지간에, 그것은 훨씬 더 일반적인 추상적 구조의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구조가 입을 수 있는 많은 표현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구조주의자들은 그 모형이 어떤 것이냐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런 접근법의 강점은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보내는 사람의 뜻에 압도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문학을 대하는 근본적인 자세는 문학을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지 해답을 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론가의 일은 작품의 뜻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통해서 그 작품의 뜻에 나타난 법칙, 그 작품을 있게 한 그것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따라서 극장도 그렇지만, 문학의 본질은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호의 체계에 있고, 뜻이 전개되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평론가의 과업은 그 체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성서 비평학은 교리를 증명하는 구절들이나 찾는 것을 능사로 삼던 방법(proof-texting)에 나타난 것과 같은 본문의 횡포에서 풀려나겠기에 이를 환영하겠지만, 성서 비평학에 대한 결정적인 문제는 구조주의자들의 활동은 작품을 대하는 현상학적, 실존주의적, 역사적,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제외하느냐? 아니면 이런 방법들과 공존하느냐? 다른 법들을 지배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다른 방법들에 예속되느냐? 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에 대해 제기되는 비판 가운데 중요한 비판은 구조주의가 모형이나 체계를 찾다가 부재(不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문을 싹싹 지워버리고 만다는 말이다. 자명한 질문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역사적 주석은 성서본문을 당시의 생의 정황에 놓음으로써 ‘객관성’을 찾으려고 하지만 구성하고 있는 체계에 그 본문을 놓고 보는 새로운 접근법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역사적으로만 보는 데서 생기는 잘못을 바로 잡아 본문을 더 객관적으로 보도록 해 주지 않을까? 구조주자들은 독자가 본문에 실존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평가가 할 일은 대리 참여의 길을 여는 것이라고 하면, 이를 부인한다.
나. 구조주의 비평에 대한 전망
스파이비(Spivey, Robert A)는 논문의 결미에서 ‘구조주의자들의 활동은 어디에 미래가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 학문은 거의 다 어깨를 펼 수 없을 정도로 융통성이 없다. 그런데 구조주의자들의 활동은 그리 되지 않으면서 성서와 초대 기독교 전통을 다시 열 가능성이 있다는데 그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은 터무니없는 글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최종적인 의미보다는 관계가 드러나도록 본문들을 본다. 또한 성서의 전승을 다른 종교의 전승과 비교할 때 중립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편협하게 경전 전승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을 바꾸어 놓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구조주의자들은 고전적인 성서학을 시정하면서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 넣을 기회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구조주의자들이 성서 자료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인하여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구조와 역사의 관계이다. 구조주의가 역사를 보는 관점은 단순하지 않다. 구조주의자들이 한 일 가운데서 가장 성공했고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일은 원시 문화와 문학 작품과 민속 문화 그리고 대중문화의 분석에서 성취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어떤 의미에서 구조주의란 역사가 관계되지 않는 사회문화와 전달 현상을 집중적으로 다룰 때에만 성공적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구조주의 일반은 역사에 대해서 반감을 품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구조주의자들은 역사주의자들의 지배에 반발하다가 사건,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과 같은 실재적 역사를 삼켜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은 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밑에 깔려있는 구조가 합리주의의 지배를 벗어나서 그것 자체의 힘을 일으킬 때, 바로 이 시점에서 이야기는 단순한 사건의 연대기에 머무르지 않고 연극이 된다.” 극장에서 막이 오르면 많은 메시지가 한꺼번에 전달된다. 이것은 인간의 전달 방식의 표본과도 같은 것이다. 무대장치, 옷, 빛깔, 배우들이 차지하는 자리, 배우들의 말과 태도를 통해서 무대는 여러 가지 기호가 빽빽이 들어찬 곳이 된다. 연극의 메시지는 선으로 이해되는 ‘역사적인’ 탐색으로서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구조주의 방법은 성서 텍스트의 통일성을 옹호하기 위한 해결사적 기능을 갖추고 있는 양 편파적으로 이해되어, 일각에서 보수주의 성서학자들의 구미에 맞는 것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서의 특정 교리를 체계적으로 변증하거나 성서적 구조의 완결성 및 전일성을 드러내는 일은 정통 구조주의자들의 관심 밖이다. 다만 그들은 주어진 텍스트로 하여금, 그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나름의 자율성을 가지고 스스로 말하게 하며, 제 스스로의 질서를 드러내게 하는 데 주력할 뿐이다. 이로써 현존하는 텍스트의 내용과 형식상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산출한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잠재의식이 패턴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그 심층적 구조를 추적하고자 할 따름이다.
또한 구조주의의 한계는 명백하다. 구조주의 방법으로 드러낼 수 있는 의미의 구조는 무한히 열려있는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체계화하는 작업인 터라, 그 구조의 ‘심층’이 오리무중이거나 백화제방(百花齊放) 격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는 구조주의가 탈구조주의로 발전 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내장한다. 구조주의가 텍스트의 구조와 체계에 집착할수록, 텍스트의 역동적인 풍경은 시들해지고, 형해(形骸)화되고 구조화된 의미의 외피만 양산할 가능성이 항존 한다. 특히 신약성서의 해석에 적용되는 구조주의 방법은, 가령 예수나 바울 등의 특정 인물에 담긴 역사적, 신학적 특수성을 외면하고, 그를 평준화된 하나의 주인공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이는 역사비평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제출된 공시적인 독법이 곧 구조주의의 강점으로 작용하지만, 동시에 그 약점이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첫댓글1)1 Anchor Bible Dictionary, vol. Ⅵ, s. v. “Structuralism” by John Barton. p. 214. 이하 AB 로 약기(略記)함. 2) 1 이러한 관점에 의거하여 일체의 어휘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전이 『신약신학사전』(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이라고 할 수 있다.
6) 1 김경용,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 기호의 우리, 우리의 기호』(서울: 민음사, 1994) 19쪽 이하. 이러한 기의가 기표와 결합되는 과정을 ‘의미작용’이라고 하는데, 의사소통 과정에서의 의미작용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빠롤’ 즉 언어행위가 기존의 ‘랑그’에 의해 관습화되고 계약적으로
계약적으로 한계 지워져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기의가 기표 내에 함축되어 있어서 기표가 전달될 때 기의가 함께 전달되는 것이 아니므로, ‘랑그’의 법칙이나 구조에 대해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자들 간에 이루어지는 ‘기표’의 교환은 아무런 의미작용을 일으키지 못할 수도 있다. 예컨대, 국어를 전
11)1 정달용, 위의 글, 92쪽. 12)1 구상된 의미체계란 해당 본문에는 실재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본문의 이야기 진행이나 본문에 포함된 어휘, 구문, 문법, 수사적 표현 기법 등의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본문의 그러한 제 요소들을 통해 일정한 의미를 양산해 내는 구조를 뜻한다.
141 정달용, 위의 글, 94쪽. 구조주의자들의 성서 해석 방법 역시 ‘분석’과 ‘재구성’이라는 방법을 반복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분석은 ‘수평적인 면’(Syntagma)에 대한 분석과 ‘수직적인 면’(Paradigm)에 대한 분석으로 나누어진다. 수평적인 면에 대한 분석은 일차적으로 기본 구조를 찾
15)1 Spivey, Robert A, "Structuralism and Biblical Studies; The Uninvited Guest," Interpretation: A Journal of Bible and Theology vol.28 no.2 (1974. 4), p. 133에서 재인용.
23)1 Spivey, Robert A, p. 141. 24)1 아래에서 제시되는 갈라디아서 본문에 대한 연사적 읽기의 예는 의 Daniel Patte의 책 『What is Structural Exegesis?』(Fortress: Philadelphia, 1976), pp. 63-68에서 인용한 것이다.
251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연사적 읽기’(syntagmatic reading)란 ‘범례적 읽기’(paradigmatic reading)와 함께 구조주의 비평적 읽기의 대표적인 본문 읽기 방식이다.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본문을 분석하면서 본문이 ‘수평적인 면’(Syntagma)과 ‘수직적인 면’(Paradigm)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이를 차례로 분
분석하고, 동시에 반복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본문의 저변에 숨겨진 ‘구조’를 발견하려 한다. 여기에서 수평적인 축은 줄줄이 이어 내려가는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이항 대립’(binary opposition)들을 말하고 수직적인 축은 같은 내용으로 된 다른 이야기들에 나오는 관계들의 일정한
28)1 Patte는 같은 책의 이어지는 장에서 이러한 연사적 읽기에 기초하여 본문을 다시 범례적 읽기로 분석함으로써 본문 기저에 놓여있는 심층 구조를 밝히려 한다. 그에 따르면 본문은 ‘하나님-인간’, ‘복음-반(反) 복음’이라는 근본적인 대립 구도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러한 대립 구도가 다양한 ‘이항 대립쌍’(예
29)1 Roger C. Poole, "Structuralism and Phenomenology: A Literary Approach," Journal of British Phenomenology(May, 1971), p. 11. Spivey, Robert A, p. 142에서 재인용.
첫댓글 1)1 Anchor Bible Dictionary, vol. Ⅵ, s. v. “Structuralism” by John Barton. p. 214. 이하 AB 로 약기(略記)함. 2) 1 이러한 관점에 의거하여 일체의 어휘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전이 『신약신학사전』(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이라고 할 수 있다.
3) 1 정달용, “構造主義,” 『사목』, 제42호(1975년 11월), 91쪽. 4) 1 정달용, 위의 글, 92쪽. 5) 정달용, 위의 글, 92쪽.
6) 1 김경용,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 기호의 우리, 우리의 기호』(서울: 민음사, 1994) 19쪽 이하. 이러한 기의가 기표와 결합되는 과정을 ‘의미작용’이라고 하는데, 의사소통 과정에서의 의미작용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빠롤’ 즉 언어행위가 기존의 ‘랑그’에 의해 관습화되고 계약적으로
계약적으로 한계 지워져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기의가 기표 내에 함축되어 있어서 기표가 전달될 때 기의가 함께 전달되는 것이 아니므로, ‘랑그’의 법칙이나 구조에 대해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자들 간에 이루어지는 ‘기표’의 교환은 아무런 의미작용을 일으키지 못할 수도 있다. 예컨대, 국어를 전
예컨대, 국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외국인인과의 의사소통이 불가능 한 것을 우리는 기표가 전달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환되는 기표와 거기에 함께 전달하고자 하는 기의를 결합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7) 1 정달용, 위의 글, 91쪽.
8)) 1 AB, p. 214 이하. 9)) 1 AB, 같은 곳. 10) 1 정달용, 위의 글, 같은 곳에서 재인용.
11)1 정달용, 위의 글, 92쪽. 12)1 구상된 의미체계란 해당 본문에는 실재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본문의 이야기 진행이나 본문에 포함된 어휘, 구문, 문법, 수사적 표현 기법 등의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본문의 그러한 제 요소들을 통해 일정한 의미를 양산해 내는 구조를 뜻한다.
13)1 정달용, 위의 글, 93쪽.
141 정달용, 위의 글, 94쪽. 구조주의자들의 성서 해석 방법 역시 ‘분석’과 ‘재구성’이라는 방법을 반복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분석은 ‘수평적인 면’(Syntagma)에 대한 분석과 ‘수직적인 면’(Paradigm)에 대한 분석으로 나누어진다. 수평적인 면에 대한 분석은 일차적으로 기본 구조를 찾
일차적으로 기본 구조를 찾아내는 단계이고, 수직적인 면에 대한 분석은 기본구조들의 관계를 분석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심층 구조’를 재구성해내는 단계이다.
15)1 Spivey, Robert A, "Structuralism and Biblical Studies; The Uninvited Guest," Interpretation: A Journal of Bible and Theology vol.28 no.2 (1974. 4), p. 133에서 재인용.
16)1 Spivey, Robert A, p. 134. 17) 1 Spivey, Robert A, p. 135. 18)1 Spivey, Robert A, p. 137.
19)1 Spivey, Robert A, p. 137-8에서 재인용.20) 1 Spivey, Robert A, p. 138에서 재인용.
21)1 이분법은 ‘이항 대립쌍’(binary opposition)을 지칭하고, 변증법은 이들을 매개(mediation)함으로써 이항 대립쌍 간의 대립을 조정하고 합성해가는 과정을 말한다.
22)1 의미작용이란 기표에 기의가 부가되는 과정이며, 어떤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대상에 대한 기의는 천차만별이다. 김경용,『기호학이란 무엇인가 - 기호의 우리, 우리의 기호』(서울: 민음사, 1994) 25쪽 이하.
23)1 Spivey, Robert A, p. 141. 24)1 아래에서 제시되는 갈라디아서 본문에 대한 연사적 읽기의 예는 의 Daniel Patte의 책 『What is Structural Exegesis?』(Fortress: Philadelphia, 1976), pp. 63-68에서 인용한 것이다.
251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연사적 읽기’(syntagmatic reading)란 ‘범례적 읽기’(paradigmatic reading)와 함께 구조주의 비평적 읽기의 대표적인 본문 읽기 방식이다.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본문을 분석하면서 본문이 ‘수평적인 면’(Syntagma)과 ‘수직적인 면’(Paradigm)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이를 차례로 분
분석하고, 동시에 반복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본문의 저변에 숨겨진 ‘구조’를 발견하려 한다. 여기에서 수평적인 축은 줄줄이 이어 내려가는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이항 대립’(binary opposition)들을 말하고 수직적인 축은 같은 내용으로 된 다른 이야기들에 나오는 관계들의 일정한
관계들의 일정한 체계를 말한다. 즉 일단 연사적 읽기를 통해 본문의 이항 대립쌍들을 구분해 내고, 그것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본문의 ‘심층구조’(deep structure)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26)1 중간에 있는 단어가 신학적 논증에 따라 매개 용어를 대표한다.
27)1 고린도전서 15장 3절이 시사하듯이 유대교 성서의 해석학에서 유래된 구절이라는 의미이다.
28)1 Patte는 같은 책의 이어지는 장에서 이러한 연사적 읽기에 기초하여 본문을 다시 범례적 읽기로 분석함으로써 본문 기저에 놓여있는 심층 구조를 밝히려 한다. 그에 따르면 본문은 ‘하나님-인간’, ‘복음-반(反) 복음’이라는 근본적인 대립 구도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러한 대립 구도가 다양한 ‘이항 대립쌍’(예
이러한 대립 구도가 다양한 ‘이항 대립쌍’(예를 들어, 죄인 바울-사도 바울 등)의 형태로 본문에 녹아 있다는 것이다.
29)1 Roger C. Poole, "Structuralism and Phenomenology: A Literary Approach," Journal of British Phenomenology(May, 1971), p. 11. Spivey, Robert A, p. 142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