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시혁씨는 “대중에게 사랑 받는 곡을 쓰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내가 쓴 곡이 이전의 내 히트곡을 넘어서지 못할까 늘 걱정스럽긴 하다”고 말했다. [안성식 기자]
요즘 가요계는 그야말로 전쟁터다. 하루에도 수십 곡이 쏟아져 나오고, 한 달에도 수십 명의 가수가 명멸한다. 그 숨막히는 전쟁터에서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이들이 있다. 우리 시대 히트 작곡가들이다. 그들의 손끝을 거치면 대중을 중독시키는 매력적인 노래가 툭 튀어 나온다. 2010년 우리 가요계를 뒤흔들 ‘히트곡 메이커’ 다섯 명을 만나본다. 발라드&댄스, 일렉트로닉 댄스, 싱어 송 라이터, 록, 트로트 등 각 장르를 대표하는 대중음악가들과 ‘뮤직 토크’를 해본다.
작곡가 방시혁(38)은 우리 대중음악계의 거대한 호수다. 2000년 이후 대중을 열광시킨 대부분의 히트곡이 그 호수에서 길어졌다. 비의 ‘아이 두(I do)’, 백지영의 ‘총맞은 것처럼’ ‘내 귀에 캔디’, 2AM ‘죽어도 못 보내’ 등이 방시혁의 호수를 채우고 있는 물이다.
음악이 그의 밥벌이가 된 건 1997년 무렵이다. 제6회 유재하가요제에서 입상하며 대중음악계에 입문했다. 그는 “왜 작곡을 직업으로 삼았는지 또렷한 이유는 모르겠다”고 했다. 다만 “본능처럼 음악에 이끌리듯 살아왔다”는 단서만 달았다.
실제 음악을 빼면 그의 성장기는 앙상하다. 중학교 시절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는 잘 했지만, 헤비메탈 밴드를 조직해 기타와 뒹굴던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생애 처음 작곡한 노래도 중학교 시절 쓴 메탈 곡이었다.
“팝 음악에 푹 빠져 살았어요. 중학교 시절 제 노래를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가 근처 여학교에도 돌았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하지만 밴드는 오래가지 못 했다. 성적이 급락하던 경기고 2학년 때 돌연 음악을 접고 공부에 매진했다. 이듬해 서울대 미학과에 합격했고, 이내 음악에서 멀어졌다. 밴드라면 대학에 더 많았겠지만, 교수가 꿈이었던 그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무슨 까닭으로 다시 음표를 매만지기 시작했을까.
“어느 날 신시사이저로 작곡을 한번 해본 것 같은데…. 재미도 있고 워낙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곡의 길로 접어든 것 같아요.”
유재하가요제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위해선 수상 경력이 필요하다”는 둘레 사람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싱어 송 라이터에 초점을 맞춘 가요제가 솔직히 탐탁진 않았단다. 그렇게 떠밀리듯 도전했는데 덜컥 동상을 받았다.
“작곡가의 자기 표현이 강조되는 유재하가요제는 안 맞는 부분이 많았죠. 자기 만족보다 대중이 좋아해주는 음악이 좋거든요. 어쨌든 가요제 경험이 하나의 출발점이 된 건 분명합니다.”
본격적으로 작곡가로서 이름을 알린 건 가수이자 프로듀서인 박진영과 손을 잡으면서다. 우연히 그의 데모 CD를 들은 박진영이 “마치 해외파 음악처럼 세련된 음악”이라며 연락을 해왔다. 그렇게 JYP엔터테인먼트의 창립 멤버로 참여했고, 그가 작곡한 GOD의 ‘프라이데이 나이트(Friday Night)’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히트 작곡가’란 별칭도 얻게 됐다.
“타고난 재능은 없어요. 차근차근 좋은 곡을 쓰고자 노력했고 다행히도 제 노래를 대중이 좋아해준 것 같습니다.”
종종 ‘천재 작곡가’란 수식어가 붙지만, 그가 정규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피아노는 체르니 100번까지가 전부고, 기타 역시 독학으로 익혀 수준급이랄 수 없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에게 곡 쓰는 법을 가르쳤을까.
“작곡이란 게 배운다고 배워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음악을 좋아하니까 본능에 이끌리듯 작곡도 하게 된 거죠. 남의 노래를 따라 해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직접 노래도 써보고, 그렇게 작곡을 익혔던 것 같습니다.”
그는 2005년 JYP로부터 독립해 ‘빅히트엔터테인먼트’란 기획사를 차렸다. 곡만 쓰는 게 아니라 가수의 매니지먼트까지 담당하게 됐다. 한 걸음 더 음악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그는 “경영에 대한 부담은 있지만 내 스타일로 음악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만족하더라도 대중의 호응이 없으면 싫어진다.음악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는 대중의 소비”라는 확고한 가치관도 드러냈다.
그러니까 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천마 페가소스를 닮았다. 페가소스의 날개는 그의 음악이 천박한 상업주의로 추락하는 걸 막아주고, 그 다리는 대중으로부터 달아나는 걸 막는다. 최근 엠넷 가요 프로그램 ‘방시혁의 비샵’에서 아이돌 그룹 카라와 인디 밴드 국카스텐과의 합동무대를 주도했던 그다. 그는 “메이저와 인디, 신·구 세대의 조화를 통해 우리 음악을 더 풍부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강현 기자
방시혁의 작곡 노트
방시혁은 빌보드 팝의 세례를 받은 작곡가다. 중학교 시절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를 듣고 빌보드 세계로 미끄러졌고, 빌보드와 더불어 음악적으로 성장했다. 그는 “내 멜로디는 전반적으로 팝의 영향 아래 있다”고 말했다. 평단이 방시혁표 히트곡을 두고 “감각적이고 세련된 빌보드풍 음악”이라 진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히트곡 제조기’로 불리기 시작한 건 2008년 백지영의 ‘총맞은 것처럼’이 각종 차트에서 압도적인 1위에 오르면서다. 이 곡은 그가 생애 처음으로 갔던 찜질방에서 썼다고 한다. 뜨끈하게 등을 지지다가 ‘총맞은 것처럼’의 전반부 여덟 마디가 불현듯 떠올랐고, 작업실로 돌아와 나머지 부분을 완성했다. 그는 “특별한 작곡 비법은 없지만 찜질방처럼 무언가 새로운 경험을 하면 곡이 잘 써질 때가 있다”고 말했다.
올 초 가요계를 강타한 2AM의 ‘죽어도 못 보내’는 그가 “건축하듯 만든 곡”이라고 한다. 그는 “2AM의 경우 아이돌과 발라드, 버라이어티가 엉성하게 조합돼 있어서 정확한 타깃으로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20대 초반 젊은 남자들이 사랑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을 떠올렸고, 첫 가사인 ‘어려도 아픈 것 똑같아’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대중 친화적인 아이돌 그룹이라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감성적인 멜로디로 접근했다”고 말했다. 최근엔 ‘잘못했어’란 댄스곡을 2AM에 건넸다. 그는 “발라드 중심이었던 2AM의 비주얼로 접근한 곡이다. GOD처럼 감성적인 댄스곡으로 2AM의 끼를 풍부하게 보여줄 생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