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刊朝鮮은 지난 10월호에서 열린당 金希宣(김희선·61) 의원의 아버지 金一鍊(김일련)씨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日帝 괴뢰국인 만주국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金學奎 장군의 며느리인 田鳳愛(전봉애)씨의 증언을 통해 보도했다.
金希宣 의원은 지난 9월17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친척 10여 명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선친(金一鍊)은 1936년 할아버지(金成範)가 돌아가시자 작은할아버지 金學奎 장군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광복 후에 韓獨黨(한독당) 비밀당원으로 작은 할아버지와 함께 활동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9월20일엔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金學奎 장군의 막내딸 金恩順(김은순·75)씨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金希宣 의원의 아버지 金一鍊씨가 만주 시절에 경찰로 활동했느냐」는 질문에 『그 아버지가 경찰 노릇을 했어요』라고 확인해 주었다.
金一鍊씨가 만주 경찰로 복무했다는 신빙성 있는 증언들이 이어지는데도, 언론들은 「김희선 의원과 월간조선의 의혹 공방」이라고 보도했다.
기자는 지난 10월8일 김일련씨의 일제 하 행적을 입증해 줄 물증을 찾기 위해, 먼저 중국 길림성 長春(장춘, 옛 新京)으로 향했다. 옛 만주국의 수도였던 長春에 만주국 경찰 자료가 보관돼 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국 경찰자료가 長春의 어느 곳에든 보관돼 있다면, 열람을 신청해서 김일련의 근무사실을 입증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외국의 민간인이 관공서에 보관중인 문서를 열람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아는 데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기자가 갖고 있었던 단서는 단 하나, 김일련의 창씨개명한 이름이 金山英一(금산영일·가네야마 에이이치)라는 사실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11월 조선민사령을 개정하고 創氏改名(창씨개명)에 관한 조문을 공포했다.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이 시행됐다.
金一鍊이 광복 전 만주국 柳河(유하)경찰서에 근무했다면, 「金一鍊」이란 이름보다는 「가네야마 에이이치(金山英一)」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金希宣 의원의 아버지가 「영일」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사실은 金希宣 의원의 홈페이지에서 확인된다. 金希宣 의원은 지금까지 「시베리아 벨호얀스크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던 독립운동가 아버지가 1954년에 보냈다」는 한 장의 엽서를 「독립군 가계」의 증거로 제시해 왔다.
「金山英一」이란 이름의 배경
그 엽서 봉투에 발신인으로 등장하는 이름이 「오영일」이다. 金의원은 아버지 김일련의 이름이 「오영일」로 적혀 있는 사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오영일은 아버지 김일련이 사용하던 가명이다』
왜 김일련은 하필 「오영일」이란 가명을 썼을까?
지난 9월23일자 「일요신문」 보도를 통해 이 의혹이 해소됐다.
일요신문은 「金學奎 장군이 (김희선 의원의) 작은할아버지 맞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金一鍊의 둘째 아우인 金一鍵(김일건)씨의 증언을 소개했다. 金씨는 자신의 형이 1954년 소련의 벨호얀스크에서 보냈다는 엽서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이름을 바꿔서 쓴) 고건 이제 왜정 때의 일입니다. 영일이라고 그 당시에 (시베리아) 형무소에 가가지고 편지할 쩍에 진명을 쓰게 되면 무슨 우언이 될 것 같아서 그게 가명해서 편지 보낸 거라… 吳(오)는 어머님 이름이고 어머님 성이고 영일이는 과거 저 계시명할 때 가나잇어여 金山英一(금산영일)이거든. 창시명(창씨개명) 창시명할 때…>
김일련의 창씨개명한 이름은 金山英一(금산영일·가네야마 에이이치)였다. 김일련은 어머니 吳炳熙(오병희)의 성에서 「오」를 따고, 창씨개명한 이름 「영일」을 여기에 붙여서, 「오영일」이라는 가명을 만들어냈다는 얘기다.
『가네야먀 에이이치, 가네야마 에이이치』
5박6일 동안 만주를 헤매면서 머리 속으로 이 이름을 외웠다.
인구 270만 명의 도시인 長春은 吉林省(길림성) 省都다. 1932년 일본이 만주국을 건설함에 따라 「新京(신경)」이라 개칭되었고, 1945년까지 만주국 수도였다. 長春에 만주국 시절의 각종 史料(사료)가 집결돼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했다.
『보여줄 수 없다』
長春의 국립 문서보관소나 도서관에 가서 자료 열람으로, 金一鍊의 만주 경찰 복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걸로 쉽게 생각했던 기자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얘기를 들었다.
『♥案(당안: 분류 보존된 문건이나 자료 등)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하겠지만, 설사 ♥案이 존재하더라도 외국인에게 중국의 내부 문서를 열람시켜주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長春에 도착한 첫날 만난 吉林省 黨(당) 간부 출신인 A씨는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나라』라며 『官이 보관 중인 자료를 민간이 요구해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吳기자의 오산』이라고 잘라 말했다.
A씨는 金學奎 장군의 장남인 金一鉉(김일현)씨와 山城鎭(산성진)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게다가 그는 金學奎 장군의 후처인 독립운동가 吳光心(오광심·본명 吳信愛)씨와 같은 동네에 살았다.
그는 『소학교 시절 미모의 吳光心을 보았다』며 『마음씨 좋고 인심 좋은 吳光心은 혁명가정(독립운동가)의 딸로, 아이를 낳지 못해 첫 결혼에 실패했고, 두 번째 남편인 강홍락 선생(동명중학교)과 헤어진 후 金學奎 장군을 만난 것』이라고 기억했다.
동명중학교 교장이었던 金學奎 선생은 한 학교에 근무하던 新여성 오광심과 사랑에 빠졌다. 유부남 교장과 유부녀 교사의 로맨스는 당시 만주지역을 떠들썩하게 했다고 한다.
長春에서 머물면서 만주국 경찰기록이 보존돼 있는지 알아봤다. 우여곡절 끝에 「長春에는 만주국 시절의 柳河縣(유하현) 경찰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중국에서는 국민당파, 반혁명 분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1979년 중단됐다고 한다. 「성분 문제(연좌제)」가 사라지면서, 과거의 개인 기록이 많이 사라졌다고 했다.
지난 10월10일, 기자는 長春에서 유하현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비관과 낙관이 수시로 교차했다. 초겨울이 시작되는 만?벌판, 농부들이 끝간 데 없는 벌판에서 옥수수를 베어서 탈곡하고 있었다. 세 시간 30분을 달려 柳河에 도착하니 거리에는 수양버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B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한국에서 역사를 바로 쓰려 하는데, 어떤 사람에 대해 혁명사업(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이 있고, 만주 경찰이라는 주장도 있어 확실한 것을 알고 싶다』고 했다.
在職 증명서
유하현에 도착한 직후 일본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月刊朝鮮의 요청으로 일본 외무성 산하 일본외교사료관을 샅샅이 뒤진 鄭權鉉(정권현) 조선일보 특파원이 『유하에 기록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 준 것이다. 鄭특파원은 이렇게 얘기했다.
『1937년, 1938년 무렵에 만주에서 경찰로 복무했던 사람들의 발령, 면직사항에 관한 기록은 찾아냈다. 그 이후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이 패망하고, 만주지역이 러시아軍에 점령되는 과정에서 만주국의 인사서류를 본국으로 가져오지 못했다고 한다. 金一鍊이 광복 직전에 만주 경찰로 활동했다면, 중국 현지에 복무기록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유하지역은 러시아軍과 일본軍 사이에 큰 격전이 없어서 戰禍(전화)를 피했을 가능성이 있다』
10월10일 B씨의 안내로 柳河縣 공안국(한국의 경찰서)을 방문했다.
柳河縣 공안국은 유하역에서 3.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만주국 시절 柳河경찰서 청사는 유하현 교통경찰대가 이용하고 있었고, 본 청사는 그곳에서 500m 떨어진 곳에 3층 건물로 신축돼 있었다.
柳河縣 공안국에 「문서 열람과 복사」를 요청했다. 공안국에서 돌아온 답은 「절대 불가」였다. 도저히 돌파할 수 없는 철벽같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만주국 시절의 당안이 존재하는지, 당안이 존재한다면 가네야마 에이이치(金山英一)나, 金一鍊(김일련)이라는 이름이 명부에 기록돼 있는지 알아 달라」고 공안국에 요청했다.
중간에서 발이 닳도록 뛰어준 B씨가 10월11일 한밤중에 숙소로 돌아왔다. 뜻밖에도 B씨는 『僞滿(위만: 괴뢰 만주국이란 뜻) 시절의 ♥案이 보존돼 있고, 명부에 「金山英一」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柳河縣 공안국 「♥案庫(당안고)」의 당안들은 중국 건국 직후인 1949년 말에 정리됐고, 「僞滿 시대(괴뢰 만주국 시대)」, 「국민당 시대」, 「건국 이후」 등으로 잘 분류·정리가 돼 있다』
金山英一이 등재된 문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문서 복사와 사진촬영은 절대 불가하다』는 얘기였다. B씨는 허탈해하는 기자를 보고 자신의 일처럼 안쓰러워했다.
그렇다고 B씨나 柳河縣 공안국 사람들의 증언을 청취하는 것은, 田鳳愛 여사 등의 증언이 이미 나온 마당에 불필요한 일이라고 판단이 됐다. 문제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物證의 확보였다.
밤새 고민하던 기자를 지켜보더니 B씨가 아이디어를 냈다. 『柳河縣 공안국에서 가네야마 에이이치의 재직증명서를 받아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과연 가능할까 반신반의하는 기자에게 B씨가 『열람하는 것도 아니고, 사진 찍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B씨는 『가네야마 에이이치는 중국과 한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한 「반혁명 분자」다. 공안에서 협조를 안 해 줄 이유가 없다』고 자신했다.
10월12일 柳河縣 공안국에 다녀온 B씨가 누런 봉투를 하나 내놓았다. 겉봉투에 「柳河縣 공안국」이라고 붉은 글씨가 적힌 관용 봉투였다. 봉투를 열어보니, 金山英一이 일제하 만주국 경찰에서 근무했음을 증명하는 서류가 들어 있었다. 편지지에는 柳河縣 공안국의 관인이 붉게 찍혀 있었다. 문서의 작성일은 柳河공안국에 가네야마 에이이치(金山英一) 관련 「문서열람과 복사」를 요청했던 10월10일자로 돼 있었다.
特務=特高
B씨는 『중국에서는 사진이나 문서 복사본보다 중국 정부 기관의 官印(관인)이 찍힌 手記 문서를 제일로 친다』고 설명했다.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證明: 經査我局 ♥案査實: 金山英一, 男, 1919年生. 1945年前系柳河僞警務科特務股特務. 此證明. 2004年10月10日. 柳河縣公安局>
(본 柳河縣 공안국에 보존돼 있는 문건을 세밀히 조사해 본 바, 다음과 같음: 金山英一은 男子로서, 1919年 出生한 자이다. 이 사람은 1945년 광복 전까지 僞滿(만주 괴뢰 정부) 시대 유하현 공안국 경무과 특무계에서 특무로 근무하였음. 위와 같이 증명함. 2004년 10월10일, 유하현경찰서>
기자가 확인한 족보에서도 金一鍊의 출생연도는 1919년생(己未)으로 적혀 있었다.
B씨는 『당시 조선인들은 창씨개명을 했기 때문에 일본 이름으로 등재된 것』이라며 『특무를 했다면 사상범을 비밀조사하는 경찰이기 때문에 가장 악랄한 경찰일 것』이라고 말했다.
金希宣 아버지 金一鍊의 행적을 추적하게 된 것은, 한 달전 예기치 않게 걸려온 전화제보 때문이었다. 金學奎 장군 집안과 가깝다는 그는 당시 전화로 이렇게 알려줬다.
〈金一鍊은 柳河경찰서에서 형사로 근무했다. 독립운동가를 색출해서 취조했고, 그 과정에서 고문을 했다. 동족끼리 취조하다보니 때로는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취조한 독립운동가에게서 욕을 먹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제보가 柳河縣 공안국의 공식 문서로 확인된 것이다.
「경찰전사, 아! 살아있다! 대한민국 경찰의 혼」 저자인 金光燮(김광섭·77)씨는 『만주국 경찰의 特務(특무)라면 일제 강점기의 일본 비밀경찰인 특별고등경찰(特高)과 같다』고 설명했다. 김광섭씨의 얘기다.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이 주도적으로 만든 국가이기 때문에 경찰·군대 시스템을 일본과 조선의 것을 그대로 적용했을 것이다. 特別高等警察(특별고등경찰)은 일제 강점기의 일본 비밀정치경찰·고등경찰 또는 약칭하여 特高(특고)라고도 불렀다.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여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데 앞장섰으며, 특히 사상범에 대한 잔학한 고문으로 악명 높았다』
B씨의 협조로 기자가 찾아낸, 유하현에 거주하는 崔峯鶴(최봉학·77)씨는 柳河국민우급학교 재학 시절, 金希宣 의원의 아버지 金一鍊을 직접 보았다고 했다. 그는 『유하현에는 당시 4~5명의 조선인 경찰이 있었는데, 「가네야마」라고 하는 조선인 경찰이 한 명 있었다』면서 『그의 가족은 서쪽 砲臺(포대)에 살았다』고 했다.
崔씨는 『가네야마 에이이치는 「당코 바지」에 긴 경찰도를 차고 경찰 정복을 가끔 입고 있었고, 견장에는 별이 두 개 달려 있었다』고 말했다.
金一鍊의 최후 행적은 수수께끼
1945년 이후 金一鍊, 즉 가네야마 에이이치의 행적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의 생사 여부조차 불명확하다.
金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1954년 시베리아 벨호얀스크 감옥으로부터 오영일이라는 사람이 쓴 편지가 왔는데, 오영일은 아버지 김일련이 사용하던 가명으로 그것이 마지막으로 전해들은 아버지 소식」이라고 적고 있다.
金希宣 의원이 시베리아 벨호얀스크에서 왔다고 주장한 엽서의 봉투에는 발신지가 「하바로프스크」로 돼 있다. 金의원은 이 엽서가 하바로프스크에서 왔다는 사실도 확인하지 않은 채, 「벨호얀스크 감옥에 갇혀 있는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만주 시절 김일련의 행적을 잘 아는 金學奎 집안의 한 여성은 이렇게 증언했다.
『김일련은 만주 경찰로서 그의 부인(조인숙)이 경찰 일을 싫어했다. 趙仁淑(조인숙)은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가면서, 김희선이는 삼촌집에 맡겨졌다. 김일련은 광복 직후 만주에서 체포돼 소련으로 끌려갔다』
김일련이 광복 직후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시 중국으로 갔고, 거기서 毛澤東(모택동) 군에게 사살됐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金希宣 의원은 「아버지 金一鍊이 김구선생 암살(1949년 6월) 직전, 밀명을 받고 중국 천진 혹은 대련으로 갔다」고 주장해왔다. 1949년 초반은 國共내전이 최정점으로 치달아 100만 명의 국민당軍과 중국 공산당軍이 격전을 벌여, 천진과 대련 일대는 전쟁의 한복판이었다. 韓獨黨이 이 불바다 속에서 무슨 비밀 임무를 수행해야 했는지, 김일련이 그곳에 있지도 않은 소련군에 끌려서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는지, 미스터리다.
金一鍊의 부인 趙仁淑과 친척이 되는 한 사람은 『중국과 밀무역을 하던 金一鍊은 1949년경 중국에서 毛澤東 군대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얘기했다. 그의 증언이다.
『金一鍊의 부인 조인숙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金一鍊은 만주에서 소련에 끌려갔다가 돌아와 남한의 美 군정下에서 군용트럭 등을 밀수해 큰 배에 싣고 중국의 毛澤東 군대와 무기를 밀거래하다가 1949년 무렵 피살당했다. 남편 사망 소식을 접한 조인숙은 1953년에 재가했다. 金希宣 의원이 「1954년 시베리아 수용소에 있는 아버지에게서 엽서를 받았다」고 하는데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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