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3월 14일 화요일 맑음
“여보, 잘 갔다 와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안사람이 상냥하게 말을 건네고 교문을 들어선다.
여기저기 흙 범벅에다 거름까지 한 차 가득 실린 트럭으로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정산으로 직행할 참이다. 저희들 선생님이 웬 지저분한 트럭에서 내리나 하고 의아하게 쳐다보는 아이가 보인다. 안사람은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하긴 갱년기가 올 나이이니 철도 나고 무덤덤해 졌겠지’
충희는 중학교 때까지는 트럭을 타고 가다 제 친구가 보이면 몸을 웅크려 숨으려고 했고, 충정이는 아직까지는 트럭을 타고 등교를 하려하지 않는다.
‘충정이도 철이 날 때가 오겠지’
톨게이트를 향하다 보니 기름이 반 이상 비어있다.
‘기름을 채우고 가자. 청양은 비싸니까....’ 단골집이 있다. 대전에서 제일 싼 집이다. 복합터미날 앞에 셀프 주유소다. 간판은 셀프이지만 종업원이 기름을 넣어준다. 경유가 리터에 1235원, 정산에선 싼 집이 1325원이니 90원이나 싸다. 50리터만 넣어도 4500원이 더 든다. 나도 많이 알뜰해졌다.
싼 기름을 넣고 나면 떨어질 때까지 기분이 좋다.
정산에 도착하니 장모님께서 고구마 싹을 낼 씨고구마를 심고 계셨다.
‘벌써, 때가 되었구나.’ 이제부터 시골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장모님께서 90도로 구부러진 허리로 밭고랑을 헤집고 다니시는 모습을 어떻게 보나 ? 가을이 끝나면 “아이구 내년부터는 일 못 혀” 하시다가도 봄만 되면 ‘내가 언제 그랬냐’시다
오늘도 달래를 한 바구니나 캐셔서 다듬으신다. 내일이 정산 장날이니까....
날이 쌀랑해서 그런지 아직 길이 녹지 않아서 불당골 꼭대기까지 차를 몰고 올라갔다. 올 겨울에 줄 거름을 쌓아 놓고. 올라온 김에 그곳부터 밤나무 전지를 시작 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아랫동네 풍광은 언제나 아름답다.
멀리 너른 평야가 보이고, 고속도로를 씽씽 달리는 차들의 모습이 시원하다.
쉬는 시간에 모처럼 카톡을 보니 슬픈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서울에 사는 성철이가 별이 되었다네. 뜻밖의 소식이다. 가슴이 쿵한다.
교대를 같이 졸업하고 예산의 이웃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다가 서울로 올라간 친구다. 이미 발인까지 마쳤으니 다시는 못 볼 친구가 하나 늘었다.
‘성철아, 몸이 안 좋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너무 빨리 떠났구나. 이젠 모든 것 내려놓고 편안하게 쉬거라’ 허공에 성철이 얼굴이 스쳐 지난다.
‘카톡을 미리 보았더라면 떠나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었을 텐데....’
마음이 울적해서 해넘이에 앞서 산을 내려왔다.
집에 오니 또 일거리가 눈에 띈다.
장모님께서 말린다고 통째로 널어놓은 칡뿌리가 보인다.
‘저렇게 해서 언제 마르겠나 ? 잘라서 말려야지. 절단기로 자르자’
정육점 절단기로 자르기 시작했다. 자르기는 쉽지만 위험하다.
‘송촌건강원 사장님은 매일 이렇게 칡을 자르시던데 참 대단하구나’ .
손가락 끝에서 1cm 떨어진 곳에서 톱날이 핑핑 돌아가는데 으스스하다.
“아빠. 경진이예요” 큰 딸로부터 전화다. “우리 큰 딸 웬일이야 ?”
“아빠 생신인데 전화가 늦었어요. 죄송해요 ” “생일은 무슨....”
“수진이하고도 전화라도 드리자고 약속했는데 일이 바빠서 깜빡 했어요”
“괜찮아. 너는 잘 있지 ?” “네, 제 걱정은 마세요” 고맙다 내 자식...
“아빠, 나 수진이” 이상한 신호음이 들리더니 화면에 작은딸 얼굴이 확 나타난다. 캐나다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것 같다. “에이구, 막내딸 많이 이뻐졌네” “아빠, 생신 축하해요” “그래 고맙다. 잘 있지 ?”
“나야 뭐, 아빠 너무 힘들게 일하시지 마시고 건강 챙기세요”
“그럼, 그럼. 너 이민은 어떻게 되는 거야” “얼마 전 신청이 들어갔는데 잘 되겠지 뭐” 어차피 국내로 들어와서 직장을 잡을 것도 아니고, 여자는 이중국적도 가능하다고 해서 신청을 하라고 했었다.
막내딸과는 자꾸 멀어지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하다.
딸들의 전화를 받고 나니 왠지 마음이 흐뭇하다. 부모 마음이 이렇다.
나는 내 부모님께 어떻게 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