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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이 있는 땅, 뉴질랜드
자연의 품에서 평안과 고요를 느끼고 싶다면 뉴질랜드로 향해야 한다. 다소 거칠고 호전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는 남섬과는 또 다른 매력을 드러내는 북섬. 그곳에서라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진정한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을 테니.
뉴질랜드 북섬.
북섬이라 쓰고 대자연이라 읽다
뉴질랜드라고 하니 반사적으로 양떼, 키위 그리고 <반지의 제왕>이 떠올랐다. 꽤 친숙한 나라임에도 호주 남동쪽에 있는 영국연방 섬나라, 아름다운 대자연, 낙농업 등의 1차산업 발달 국가 외에는 별다른 여행 지식이 없었다. 좀 더 덧붙이자면 뉴질랜드 대표 와인 ‘클라우디 베이’의 소비뇽 블랑과 그 산지인 남섬의 말보로 지역과 피오르 협곡으로 유명한 밀포드 정도? 더군다나 가장 번화한 도시 오클랜드를 제외한다면 뉴질랜드 북섬은 백지와도 같은 여행지였다. 한국에서 오클랜드까지의 비행 시간이 약 11시간이라는 것도, 두 개의 섬을 중심으로 이뤄진 뉴질랜드가 한국의 1.2배 정도로 자그마하다는 것도, 영어와 원주민 언어인 마우리어가 공용어로 쓰인다는 것도 출장을 앞두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러나 착륙 전, 오클랜드 상공에서 내려다본 뉴질랜드는 그 여백을 단번에 세상의 모든 초록색 물결로 가득 채우기에 충분했다.
‘하루에 1년의 날씨가 모두 있다’고 표현하는 섬나라 특유의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도 온화한 기후와 평온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북섬이다. 11월이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즌(1~2월은 완연한 여름)이지만 도착했을 때는 초봄처럼 다소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운 좋게도 하늘만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지만. 뉴질랜드의 첫 목적지는 노스랜드(Northland, 북섬 중에서도 북쪽 행정 지역) 최고 휴양지라 불리는 카우리 클리프(www.kauricliffs.com) 리조트다. 2013년 여행 매거진 <콘데나스트 트레블러> 독자 선정 1위 호텔&리조트, 세계 100대 골프 리조트 리스트(뉴질랜드에서는 3대 골프 리조트)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리는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오클랜드에서 차로 약 4시간 또는 비행기로 노스랜드의 소도시 커리커리(Kerikeri) 공항까지 50분가량 이동해 차로 30분 정도를 더 달려야 한다.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골프 코스와 한적한 고급 로지가 있는 리조트 정도를 기대했으나 카우리 클리프는 그 이상의 풍경을 선사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와 산책로, 작은 조개가 모래 대신 해변을 채운 핑크 비치를 비롯한 3개의 프라이빗 해변, 승마와 클레이 사격, 테니스와 수영을 즐길 수 있는 시설, 개인 헬리콥터 투어 서비스, 거기에 리조트 내 다이닝 식재료를 자급자족하는 친환경 농원까지, 600에이커에 이르는 이 리조트는 오히려 조용하고 거대한 휴양 마을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싶었다. 카우리 클리프는 리조트 이름이자 지명과도 같다는 현지인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고요한 풍경 속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감당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이라면 ‘지구의 끝에 자리한 럭셔리의 정수’라는 해외 매체의 표현에 다소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럭셔리’를 대리석, 유명 디자이너의 가구, 대규모의 웅장한 시설로 이해하거나 쇼핑, 화려한 엔터테이닝으로 받아들였다면 말이다. 그러나 카우리 클리프는 ‘럭셔리’의 방점을 ‘나만의 시간과 대자연을 향유하는 삶’에 찍는다.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가공된 유기농 메뉴나 공해와 높은 인구밀도에 시달리며 시간에 쫓기듯 생활하는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천혜의 자연 속에서 시간의 속도와 내 몸의 리듬에 맞춰 하루를 보내고 운동과 산책을 즐기며 천연 먹거리를 섭취하는 호사를 짧게나마 누릴 수 있었다.
커리커리에서 차로 각각 약 30분 거리인 작은 항구 마을 파이히하(Paihia)에서는 노스랜드의 일상과 사람들을 좀 더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었다. 조그마한 항구에 늘어선 레스토랑, 작은 바, 숍들로 활기가 넘치는 소박한 마을인 파이히하는 영국인과 마우리족이 첫 조약을 맺은 와이탕기 문화 지역이 있고, 뉴질랜드 최초의 수도인 러셀(Russell)로 가는 짧은 노선의 페리도 탈 수 있어 노스랜드를 여행하는 백팩족, 가족 단위 관광객, 노부부까지 다양한 여행자들이 거쳐가는 곳이다.
이곳 뉴질랜드에서 마우리족의 힘은 대단하다. 영국인과 마우리족 간의 와이탕기 조약은 조선과 일본의 불평등조약을 연상시키지만, 영국이 그나마 대등한 입장에서 ‘조약’이라는 형식을 거쳐 식민 통치한 나라는 뉴질랜드가 유일하다는 사실은 꽤 놀라웠다. 와이탕기 센터 마케팅 디렉터에 따르면 2016년에는 전통문화 공연과 와이탕기 트리티 그라운드(조약을 맺은 기념 장소) 외에 뮤지엄과 워크숍 프로그램, 다양한 투어도 더해져 한층 업그레이드된 와이탕기 종합센터(www.waitangi.org.nz)로 거듭날 예정이라고. 파이히하에서 25분 정도 페리를 타거나 바다를 낀 만을 따라 차로 40~50분 달리면 요트와 아기자기한 주택이 늘어선 러셀을 만나게 된다.
영국이나 이탈리아의 바닷가 마을과도 닮은 이 지역은 뉴질랜드 역사상 첫 수도답게 초기 유럽인이 거주하던 주택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으며, 소박한 분위기와는 달리 빌 클린턴을 비롯한 해외 정치가, 배우들의 휴양지, 럭셔리 세컨드 하우스 타운으로도 사랑받고 있다. 늦은 오후쯤 파이히하에서 출발해 클래식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이 지역 대표 레스토랑 ‘더 듀크 오브 말보로(www.theduke.co.nz)’에서 저녁을 즐긴 후 떠나려는 찰나 웨이터가 급하게 취재 일행을 붙잡았다. “이곳의 노을을 절대 놓치지 마세요!” 그렇게 바닷가 벤치와 돌아오는 페리 안에서 마주했던, 하늘과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였던 노을은 연신 사진을 찍어대던 이들의 카메라를 내려놓게 할 만큼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북섬의 땅끝 마을이라 불리는 레잉가의 해변.
지구 저편, 땅끝 마을을 찾아서
‘땅끝’이라는 표현은 마치 세상의 끝을 찾아가는 것처럼 모든 이에게 호기심과 모험정신을 불러일으킨다. 노스랜드에서 가장 상징적인 관광 스폿이라 꼽히는 뉴질랜드의 ‘땅끝 마을’, 케이프 레잉가(Cape Reinga)를 찾아가는 날의 기분이 딱 그랬다. 북섬의 끝에 위치한 이 지역에 가기 위해 커리커리 공항에서 사설 경비행기 회사인 솔트에어(www.saltair.co.nz) 투어 코스 6인승 경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취재 일행 외에 각각 독일과 스위스에서 온 노부부와 함께였다. 약 40분가량 비행기로 이동하는 동안 파일럿의 짧은 지역 설명이 이어지고 발밑으로는 커리커리부터 케이프 레잉가 지역까지 이어지는 일명 ‘90마일 비치’라 불리는 노스랜드 서부 해안의 절경이 펼쳐졌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모래사장과 바다, 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섬(노스랜드 쪽에만 140여 개의 작은 섬이 있다고 한다)을 내려다보는 동안 경비행기는 어느새 허허벌판에 6명의 일행을 떨어뜨리고 잠시 시야에서 사라진다. 여기서 또 다른 픽업 차량이 6명의 일행을 싣고 다시 30분쯤 더 갔을 때야 케이프 레잉가의 상징인 등대 언덕을 만날 수 있었다.
화창한 날씨 덕이었을까, 땅끝 마을이 주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경사가 완만했다 급해지기도 하는 굽이굽이 언덕길을 따라 절벽 끝 등대에 당도했을 때는 한국 정반대의 나라, 그 북쪽 끝에 서 있다는 사실에 막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인생의 황혼기에, 한창 에너지가 넘치는 20대에 각각 다른 기대감을 품고 이곳으로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니 유독 혼자보다 부부나 커플 수가 많았다. 낯선 섬의 끝에서 두 손을 맞잡고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자니 ‘끝’이라는 단어에는 ‘또 다른 시작’을 되새기게 하는 힘이 있단 걸 새삼 깨달았다.
등대 주변 산책을 마치고 경비행기 일행은 90마일 비치 중 일부인 작은 해안에 들러 마우리 출신 가이드가 준비한 소박한 티타임도 가졌다. “우리는 6주간 뉴질랜드를 여행 중이에요. 은퇴 후 겨울이 되니 따뜻한 나라가 그리워 마치 살 듯, 여행하듯 천천히 돌아보는 중이죠. 조용하고 아름답지만 이제껏 못해본 도전도 감행하는 나라가 이곳이 아닌가 싶네요.” 스위스에서 날아온 노부부가 말을 마치자 그 옆 독일인 부부도 한마디 건넸다. “우리도 장기 여행 중인데 시간에 쫓기지 않고 슬렁슬렁 다닐 때 진짜 이곳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을 거예요. 며칠로는 모자라. 한참 모자라지.(웃음)” 그렇다고 이곳이 은퇴한 부부들의 로망인 것만은 아니다. 케이프 레잉가에는 거센 바람에 바닷모래가 날아와 쌓여 마치 사막 같은 형태를 이룬 거대한 사구가 있는데 이곳의 샌드 서핑은 뉴질랜드의 다이빙이나 번지점프만큼 20~30대에 인기 있는 스포츠다.
해변가만 사구로 바뀌었을 뿐, 자유로운 젊은 영혼들이 사구에서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핑을 옆구리에 끼고 고소공포증을 가진 이라면 심장이 다소 두근거릴 만큼 꽤 급한 경사지만, 사구 언덕에 오른 다음 뜨거운 모래를 타고 단번에 쏜살같이 내려오는 그 기분은 꽤나 신나고 유쾌했다! 흰머리의 노부부가 다소 힘겹게 사구를 오르는 뒷모습을 보니 20~30대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액티비티를 위해, 50~60대는 더 늦기 전에 또 다른 도전을 감행하기 위해 사구의 샌드 서핑을 찾는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절벽 끝 등대를 돌아보고 샌드 서핑을 즐긴 뒤 돌아가는 길에 해변에 누워 잠깐 선탠을 하며 느긋한 휴가를 보내는 것, 이것이 뉴질랜드인도 한참 벼르다 실행에 옮긴다는 꿈의 휴가 루트다.
커리커리에서 경비행기를 40분간 타고 이동하면 케이프 레잉가의 경사진 언덕 위 아름다운 등대를 만나게 된다.
오클랜드, 와인과 미식의 도시로 부상하다
며칠간 북섬 노스랜드의 자연과 문화를 돌아본 취재 일행은 다시 북섬의 중심 도시 오클랜드로 돌아왔다. 미국의 행정수도 워싱턴 D.C와 대표적인 코스모폴리탄 시티 뉴욕처럼, 뉴질랜드의 수도는 웰링턴이지만 과거 두 번째 수도였던 오클랜드가 가장 번화한 도시로 꼽힌다. 다른 나라 대도시에 비하면 오밀조밀한 규모인 오클랜드에서는 해변과 항만이 있는 도시 특유의 이국적인 정취와 더불어 도심과 자연 속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150만 도시인의 삶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특히 해안이나 농장이 있는 오클랜드 도심, 그리고 그 주변에 자리한, 페리로 30분 거리의 섬들에서 통근하는 인구가 꽤 많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만끽할 수 있는 큰 즐거움 중 하나는 그 도시의 풍경이 내다보이는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다. 오클랜드 시내 금융가와 맞닿은 페리 항 근처에는 마치 뉴욕의 첼시를 연상시키는 운치 있는 레스토랑들과 조그만 카페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도심 한가운데 우뚝 선 스카이시티 오클랜드는 호텔 2개, 스카이워크 등의 아찔한 레저 시설을 갖춘 복합 엔터테이닝 타워다. 328m 높이의 타워 위 모던한 레스토랑 ‘Orbit 360 Dining’은 미처 둘러보지 못했던 이 도시 곳곳을 짧은 시간에 느끼고 돌아갈 수 있는 장소다.
오클랜드 빌딩 숲이 바라보이는 항구.
도심과 와이너리를 반나절 가까이 오가며 두루 즐길 수 있는 와이헤케 섬(Waiheke Island)의 와이너리 투어는 짧은 일정으로 자연의 정취와 미식을 고루 누리고픈 이들에게 속성 코스로 권하고 싶은 곳이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뉴질랜드 최대 유명 와인 산지이자 ‘소비뇽 블랑’으로 대표되는 말보로 지역에 비견될 만큼 좋은 품질로 승부수를 띄우는, 북섬의 대표적인 와인 재배지다. 단, 이곳은 시라나 말벡을 중심으로 한 레드 와인 품종에 더 특화되어 있었다. 오클랜드에서 오전 10시행 페리를 타고 와이헤케 섬에 도착해 3~4개의 와이너리를 돌아보고 와이너리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일정이 적당한데, 대량 생산보다는 품질 좋은 와인을 소량 생산하는 부티크 유기농 와이너리가 많은 것이 이 섬의 특징이다.
섬에 도착해서 가장 처음 들른 곳은 100% 유기농 공정으로 와인을 생산하는 케네디 포인트 와이너리다. 옅은 비치색 연못과 진초록의 방갈로에서 시라와 말벡 품종의 테이스팅을 즐겼는데, 1년에 7000병만 한정 생산하고 뉴질랜드 국내 소비량이 높기 때문에 해외 지역에서는 이곳의 와인을 쉽게 만날 수는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다음은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력으로 생산하며 음식과 페어링한 와인 테이스팅을 선보이는 피콕 스카이 와이너리, 그리고 와이헤케 섬에서 손꼽히는 유명 와이너리인 머드 브릭에 연달아 들렀는데 테이스팅을 하는 동안 그들의 와인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인들이 오크통에서 오래도록 숙성된 와인을 즐긴다면 뉴질랜드인들은 5개월~1년 정도 숙성시킨 산뜻한 와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는 짧지만 소량 생산에 초점을 맞춘 수작업, 깨끗한 공정, 뜨겁고 긴 여름 덕분에 단기간에 품질 좋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죠.”
와이헤케 섬이 나무들은 12월이 다가올 때쯤 빨간 꽃을 피우고 주민들은 여기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시작한다.
테이스팅을 모두 마치고 머드 브릭 와이너리 레스토랑에 앉아 점심 식사를 한 다음 오클랜드로 돌아오는 페리 안, 창밖으로 금융권과 높은 타워가 늘어선 시내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단번에 반하게 되는 절세 미녀는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정이 드는 순박해서 더 매력적인 여인의 모습을 닮은 뉴질랜드. 다시 서울로 돌아가 숨가쁜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뉴질랜드의 드넓은 평야와 바다, 포도밭에서 맛본 와인의 향기가 문득문득 떠오를 것만은 분명했다. 글=조민정 헤렌 , 사진=김춘호 협조=뉴질랜드 관광청 2014.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