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교헌교수님의 강의안을 본인의 허락을 얻어 글을 올립니다.
성남문화해설강의자료(어르신문화학교)제18강 (2012.10.10)
병자호란(丙子胡亂)을 통해 본 주화(主和)와 척화(斥和)의 논리
- 경상(經常)과 권변(權變)의 철학적 성격 -
지 교 헌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명예교수)
차 례
1. 머리말
2. 병자호란의 경과와 귀추
3. 주화의 논리(최명길)
4. 척화의 논리(홍익한 윤집 오달제 김상헌)
5. 맺는 말
1. 머리말
잘 알려지고 있는 바와 같이 중국의 명(明)나라와 청(淸)나라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국제적 외교문제를 야기하게 하였으며 전쟁이 발발하기에 이르기도 하였다.
중국의 북방에 활거하던 여진족 누루하치(奴爾兒赤)가 건국한 후금(後金)의 태종(太宗,皇太極)은 1627년(인조5년)에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키고 1636(인조14년)년에는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치고, 12월에는 조선을 침입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때 조선의 왕자 등은 강화로 피란하고 인조와 세자는 황급하게 남한산성으로 들어 가 항전하였으나 다음 해 1월에는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화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이 때 조정을 중심으로 일어난 주화론(主和論)과 척화론(斥和論)은 양극의 형태를 보이며 한민족은 경상(經常, 綱常, 常道)과 권변(權變, 權道, 反常)의 철학을 현실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2. 병자호란의 경과와 귀추
이 때 청태종은 12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임경업(林慶業)장군이 지키는 백마산성(白馬山城)을 피하여 한양(漢陽)에 육박하였다. 너무나 위급한 상황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강화도를 엄중히 수비하는 한편 원임대신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인도하여 강화도로 피신케 하였다.
이 때 인조도 같은 날 밤에 숭례문으로 나와 강화로 향하려 하였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 와 청군이 벌써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여 양천강을 차단하였기 때문에 강화로 가는 길이 끊어졌음을 보고하자 인조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 숭례문 누각에서 비상대책을 묻게 되었다. 이 때 전 철산도호부사 지여해(池汝海)가 정병 500명을 주면 사현(沙峴)에 나아가 청군의 선봉부대를 무찌르겠다고 하였으나 반대론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결국엔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이 홍제원에 주둔한 청군의 진영에 나아가 술과 고기를 대접하며 출병의 이유를 물으면서 시간을 버는 사이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케 되었다.
한편 강화도에서는 원손만이 겨우 피신하고 부성(府城)이 함락되어 청군이 성 안에 들어가 숙의와 빈궁, 봉림대군, 인평대군, 대군들의 부인을 협박하여 나오게 하고, 관가와 민가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다음 물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진격하였다.
청군에게 포위당한 남한산성에서는 지여해 별장이 체부(體府:체찰사의 관청)에 청하여 말하기를 ‘성을 나가 적의 창끝을 물리치고 신하의 절개를 보이겠다’고 하니 체부의 보고를 들은 임금은 어전으로 그를 불러 주과를 하사하고 보냈다. 병자 12월 29일, 지여해는 포수들을 거느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가 평원에 이르러 진을 쳤으나 적군이 모두 달아나 전투하지 못하다가 해가 저물어 군사를 거두자 적군의 철기(鐵騎)가 갑자기 공격해 오는지라 발길을 돌리지 아니하고 전투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지여해와 함께 죽은 자가 수 백 명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특별히 슬퍼하고, 후에 가선대부병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를 증직하였다. (지여해묘표참조)
이 때 남한산성에서는 청군의 포위 속에 있으면서 식량도 거의 떨어지고,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타개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 있었고, 강화(講和)하느냐, 항전(抗戰)하느냐 하는 상반되는 의견이 나오게 되고, 이것은 주화론(主和論)과 척화론(斥和論)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강화도 어려운 일이요, 항전도 어려운 일이었다. 오랑캐와 강화하는 것은 곧 무릎을 꿇고 항복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주권과 권위를 포기하는 것이요, 항전한다는 것은 중과부적이라는 대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왕과 신하와 백성이 모두 멸망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화론(주화론)도 묘책이 될 수 없고 항전론(척화론)도 묘책이 될 수 없지만 양자 중에서 한 가지만은 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의론이 분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화론은 비겁하나마 구차하게 사직과 종묘와 왕과 신하와 백성을 지켜보자는 것이요, 척화론은 나라도 한 번 망할 수 있고 사람도 한 번 죽을 수 있는 법이니 모두 멸망하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오랑캐에게는 항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권변(權變)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요, 후자는 경상(經常)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주화론으로서의 권변과 척화론으로서의 경상은 그 외관적 측면에서 볼 때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전자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하여 목숨을 구걸하자는 것이요, 후자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목숨을 바쳐 싸우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약자는 강자에게 무릎을 꿇고 노예가 되어 생사여탈을 강자에게 맡기지 않으면 끝까지 반항하다가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류역사의 일관된 사실이었다. 얼핏 보면 강대국이 약소국을 항상 지배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약소국이 강대국을 지배하는 경우도 볼 수 있으나 결론적으로는 승리하고 지배하는 국가를 강자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병자호란 당시의 정세를 보면, 청나라 군사에게 포로가 된 대군(大君)의 수서(手書)와 재신 윤방과 한홍일(韓興一) 등의 장계를 통하여 강화도의 함락은 명백히 확인되었다. 이리하여 주화론이 우세하게 되자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과 이조참판 정온(鄭蘊)이 화의를 반대하여 자결을 꾀하기도 하였지만 결국엔 조선의 조정과 청군의 협상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첫째,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행할 것.
둘째,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치고 명과의 교호를 끊으며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셋째,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넷째,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말고 원군을 파견할 것 등을 포함하는 11개 조항이었다.
비록 한 달 남짓한 짧은 전쟁이었으나 그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요,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청나라에 복속되었고 이러한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전할 때까지 약 26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병자호란을 통하여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항복한 상징물로서는 서울특별시송파구삼전동에 있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들 수 있다. 이것은 흔히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 부르는 것인데 삼전도는 본디 삼전동에 있었던 한강의 나루였다. 한강의 남쪽에 위치하여 부리도(浮里島) 또는 잠실도(蠶室島)를 연결하는 나루터였는데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고 교통의 요지이었다. 현재의 삼전도비는 송파구잠실동(松坡區蠶室洞)47번지에 세워져 있으나 본디는 1639년에 삼전동(삼밭나루터,삼전도)에 있었으나 1895년 청일전쟁 후에 물속에 묻혔다가 1913년에 다시 세우고, 1945년 광복 후에 묻었다가 1963년에 다시 드러나 1983년에 석촌동(石村洞)289-3번지로 옮겨 세우고, 2010년 4월 25일에는 잠실동47번지로 다시 옮겨 세웠다. 송파구일대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기 전에는 경기도 광주군중대면(廣州郡中垈面) 송파리에 속하였고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초에는 1639년(인조17년)에 세워졌지만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더 큰 규모로 확대하였고, 이경석(李景奭,1595~1671)이 찬자로 되어 있다. - 비신의 전체높이는 570cm, 비신높이는 395cm, 너비는 140cm이며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거대한 규모이다. 비양에는 왼쪽에 몽고문, 오른쪽에 만주문이, 비음에는 한문으로 자경 7푼의 해서로 조각되었으며, 비액은 전서(篆書)로 ‘大淸皇帝功德碑’라고 조각되어 있다.
당초에는 비문의 찬자로 장유(張維,1587~1638)와 조희일(趙希逸,1575~1638)이 지명되었으나 청의 불만으로 다시 이경석이 찬진하게 되었다. 이경석은 이때 ‘회학문자’(悔學文字)와 ‘괴부오계백장애’(愧負浯溪百丈崖; 당나라 현종 때 일어난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숙종의 공적을 찬양한, 원결(元結)이 지은 <대당중흥송>. 일명 마애비라고 칭함)라는 글을 남겼다고 전한다.
이경석은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문인으로 증광별시알성문과를 거쳐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1646년에는 효종의 북벌계획이 청나라에 알려짐으로써 사문사건(査問事件)이 일어나게 되자 국왕을 보호하고 관련자들을 모두 옹호하고자 자신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위급한 형편을 해결하였지만 자신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백마산성에 위리안치 되고 벼슬에서 물러나 경기도광주군의 판교(板橋)와 석문(石門; 현재의 분당구석운동)에서 은거하기도 하였다. 그의 묘지는 현재 석운동51번지 (속칭 대감능골)에 자리 잡고 있다.
3. 주화의 논리
주화파의 논리는 병자호란이 진정된 인조15년 5월 15일 최명길이 올린 차자(箚子)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지난겨울에 있었던 변(變)은 천지개벽 이래 미증유의 병란으로 멸망의 화가 순식간에 임박했던 것인데 전하가 모욕을 참고 몸을 굽혀 종묘사직을 보존하였습니다. 시대의 형세를 참작하고 의리로 헤아려 볼 때 이것과 바꿀 계책이 없었습니다. ……천안을 살펴보니 늘 근심에 싸여 있는듯합니다. ……아마도 고금의 사변을 달관하지 못하여 전일에 출성(出城)하였던 일만을 가지고 매우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가령 전하가 융통성 없이 필부(匹夫)의 절개를 지켰다면 종묘사직은 멸망했을 것이고 백성도 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하늘이 전하의 마음을 열어 단번에 깨닫게 하여 묘당(廟堂)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백성들의 바람을 따르니 종묘사직의 혈식(血食)을 연장하게 되고 생령이 어육(魚肉)됨을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전하의 지극한 어짊과 큰 용맹 때문입니다. 공자는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 계획을 망친다’고 하였고, <춘추공양전>에 이르기를 ‘권도를 실시하는 것은 죽거나 망하는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권도를 행하는 데는 도리가 있으니 스스로를 폄하하여 권도를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세상의 변동이고 무궁한 것은 의리입니다. 천하가 무사할 때는 현명한 자나 불초한 자나 다 같이 상경(常經)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경을 만나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처지가 되면 능히 변통하여 도(道)와 더불어 함께 행한 다음에야 마침내 성인(聖人)의 큰 권도라 할 수 있습니다. ……. 오늘의 일로 보면 편벽되고 고집스런 무리가 있어 시의(時宜)에 달하지 못하고 융통성 없이 자기견해만 고수합니다. 대체로 식견이 밝지 못하고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믿음으로써 그것이 그릇되고 망녕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이하 생략)
차자의 내용을 요약하면 당시의 형세와 의리로 볼 때 다른 계책이 없었다는 것, 전하가 모욕을 참고 몸을 굽힌 것은 미자계(微子啓)나 관중(管仲)의 그것과 같다는 것, <역경>(易經) 명이(明夷)의 괘사(卦辭)와 단전(彖傳)을 인용하여 문왕이 유리(羑里)의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 곧 전하의 경우와 같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욕을 참고 몸을 굽힌 것이 곧 권도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경상이 무사(안일)할 때의 윤리라면 권도는 어려울 때의 윤리이다. 권도는 평상시가 아닌 비상시에 나타나는 새로운 모습의 경상이다. 권도는 경상의 근본을 벗어날 수 없다. 만일 벗어나면 권도가 아니다. 필부의 경상은 평상시의 윤리로 그치고 말기 때문에 비상시의 권도로 나아가지 못하지만 군자의 경상은 변화무쌍한 현실에 대응하여 무한한 권도로 창조된다. 이것이 곧 주화의 논리요, 화친(강화)의 논리이다. 이러한 권변의 논리는 최명길이 청나라의 심양(瀋陽)에 감금당하고 있으면서 척화론자로 유명한 김상헌에게 전한 시에서도 나타난다.
정처관군동(靜處觀群動) 고요한 가운데 묻 움직임을 보면
진성난만귀(眞成爛漫歸) 참으로 난만히 돌아감을 이루리라.
탕빙구시수(湯氷俱是水) 끓는 물이나 차가운 얼음이나 다 같은 물이며,
구갈막비의(裘褐莫非衣) 갖옷이나 갈포 옷이나 다 같은 옷이로다.
사혹수시별(事或隨時別) 일은 혹시 때에 따라 다를지라도
심녕여도위(心寧與道違) 마음마저 도에서 어긋나리오.
군능오사리(君能悟斯理) 그대가 능히 이 이치를 깨우친다면
어묵각천기(語黙各天機) 말없이 각자의 천기를 지켜나가세.
일은 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 마음가짐은 도에서 멀어질 수 없으니 권변이나 경상은 그 표현이 다를 뿐, 근본은 같다는 것이다.
권도의 사전적 의미는 ‘저울질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저울질은 사물의 경중을 측정하는 것이며 그 측정된 경중에 따라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 결정되는 가치의 구체성과 차별성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알맞고 타당하게 판단하고 처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권도는 특수한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욕(人慾)에 따라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선비는 백번을 꺾어도 꺾이지 않는 진심이 있어야 비로소 만변하여도 다함이 없는 묘용이 있는 것(士有百折不回之眞心纔有萬變無窮之妙用)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속유(俗儒)는 권도와 거리가 멀고 통유(通儒, 君子)라야 권도를 알고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권도는 <맹자>(離婁 上)에서 맹자가 순우곤(淳于髡)과 나눈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곧 ‘남녀수수불친’(男女授受不親)이 예(禮)라고 할 수 있지만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는 (평상시의 예를 초월하여) 손으로 건져주는 것(嫂溺 援之以手者)이 권도인데 그것이 또한 예라는 것이다. <춘추공양전>(환공11년)에서 ‘경상에 반한 후라도 선함이 있는 것’(反於經然後有善者也)이리고 한 것도 또한 같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권도가 결코 경상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고 경상이 있으면 당연히 권도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권도의 논리는 고식적인 신의를 고수하는 미생지신(尾生之信)을 타파하는 논리이며, 법고창신(法古創新)이나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논리, 또는 상황논리와도 긴밀히 연관을 이룬다.
4. 척화의 논리
척화의 논리는 우선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와 김상헌(金尙憲)이 주장한 항청의리(抗淸義理)에서 나타난다.
먼저 홍익한의 주장을 살펴보자.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그의 <삼학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공(홍익한)은 심양에서 한(汗)의 심문을 받게 되자 “내가 잡고 있는 것은 다만 대의뿐이다. 성패와 존망은 논할 필요가 없다. 듣건대 너희나라는 형살할 때에 반드시 마디마디 저며서 죽인다고 하던데 왜 빨리 그 형벌을 시행하지 않느냐?”고 하고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썼다. “……너의 나라는 조선에 대해 먼저 배신하였고 대명은 조선에 대해 옛날부터 자소(字小; 사랑하여 돌보아 줌)해 준 은택이 있어 더욱 깊이 맺어졌는데, 깊이 맺어진 은택은 잊어버리고 먼저 배신한 공약(空約)을 지킨다면 이치에 어긋나고 사리에 매우 부당하다. 그러므로 이 의논을 으뜸으로 건의하여 예의를 지키려 한 것은 바로 신하의 직책이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청나라의 요구는 형제국의 의리에 어긋난다는 것, 천하에 두 천자는 없다는 것, 조선의 열성(列聖)은 명나라의 번직(藩職; 번방의 직책)을 수행해 왔다는 것, 조선은 명나라의 은택을 입어 왔다는 것, 청나라는 명나라의 반적(叛賊)이라는 것, 이러한 의리를 밝히는 것은 신하의 마땅한 직책이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주목을 끄는 것은 명나라 정통성(正統性, 法統性)의 절대성과 조선의 의리라고 할 수 있다.
윤집은 병자호란 당시에 교리가 되었는데 이 때 최명길을 중심으로 화의(和議)가 진행되면서 일을 주달할 때에는 주화론자들이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을 물리치기를 청하였다. 윤집은 이에 분개하여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요즘 사특하고 해괴망측한 일이 있어 위로는 천총(天聰)을 가리고 아래로는 인망을 끊어버리니 천지가 캄캄해지고 의리가 단절되어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 꼴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대저 화의가 국가를 망치고 종사를 단절시킨 것이 오늘날에만 있는 것은 아니나 이제처럼 심한 것은 없었습니다. 천조(天朝)는 우리나라에 대해 바로 부모이고 노적(虜賊)은 우리나라에 대해 바로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고 부모는 돌아 본체도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임진왜란 때의 일로 말하면 아무리 미세한 일까지도 모두 황제의 힘이었으니 우리나라로서는 잠시도 그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나라와 함께 쓰러질지언정 의리를 구차하게 보전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승지와 시신(侍臣)을 물리쳐야 한다는 말은 너무 심합니다. 나라 일을 꾀하는 말은 귀엣말이 아니고 군신 간에는 밀어(密語)의 의리가 없습니다. ……오달제의 말은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엄한 꾸지람을 받았으니 뇌정(雷霆) 같은 전하의 노여움에 꺾이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국역송자대전>XI 민족문화추진회 1983. pp.174~176참조)
그는 화의를 주장하는 자들을 군중에 효시하여 중지를 단합시켜야 하며, 최명길이 묘당에 있으면 반드시 사의(邪議)를 일으켜 나라를 망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임금을 독대하여 화의를 주장한 자들을 중률(重律)로 다스리기를 청하고 ……결단성 없이 대세에 따른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죄를 말하였다. (같은 책 pp.176~179참조).
그는 대명의리(對明義理)를 중시하고 강화(講和)로 나라를 살리자고 주장하는 주화론을 향하여 나라를 망치는 주장이라고 규탄하였다. 이것은 경상을 고수하고 권변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주장이었다.
오달제는 홍익한과 윤집에 못지않은 척화론자였다. 그는 소(䟽)를 올려 ‘시무8조’를 논하였는데 주로 임금에게 성학(聖學)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노(虜)가 매우 급히 상에게 출성할 것을 청하자 중의가 또 따르려 하므로 윤집이 상(上)의 앞에 나아가 머리를 부수어 간쟁하려 하니 오달제가 이를 만류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환난을 잘 막지 못하여 이제 아주 위태하고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주화론자들의 행동이 비록 옳지 못한 줄은 알지만 저지하기는 어렵다. 우리들은 마땅히 자정(自淨)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할 뿐’이라고 하였다. 화약(和約)이 체결되자 척화신들을 군진에 압송하라는 청의 요청에 따라 오달제는 윤집과 더불어 김상헌(金尙憲)과 정온(鄭蘊)의 뒤를 이어 비변사에 자수하였다. 정축년 정월 28일 행궁에 배사하자 왕이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이자, 오공은 윤공과 함께 ‘주상의 굴욕이 이 지경에 이르매 신들은 항상 죽지 못한 것을 한하였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용골타(龍骨打, 청나라 장수)는 두 사람에게 다른 척화론자들을 고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고,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서 살라는 것도 거절하고, ‘몸을 굽히는 치욕이 도리어 죽음보다 심하다. 만일 저들의 말을 따르면 끝내는 오랑캐가 되고 만다’고 하였다.
삼학사에 대한 기록은 <인조실록> <효종실록>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등에 산재하고 있으나 그 중에도 <인조실록>인조15년 3월 5일 ‘홍익한의 졸기’와 인조 14년 11월 8일 윤집이 최명길의 죄를 논한 상소문이 주목을 끈다. 윤집은 그 상소문에서 ‘옛날 화의를 주장하여 필주(筆誅)를 당한 진회(秦檜)로서도 감히 하지 못할 짓을 최명길이 하였다’고 하였다. 진회(1090~1155)라는 인물은 중국 남송의 고종 때 재상이 되어, 당시 금(金)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화의를 주장하고, 악비(岳飛, 1103~1141. 浙江省 杭州에 岳飛廟가 있음)를 비롯한 많은 주전론자들을 모살하고 오랫동안 권력을 누렸으며, 성품이 음험하고 잔인하였다고 전하는 터인데 최명길은 그보다도 더 악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최명길과 이민구(李敏求, 1589~1670) 같은 인물은 이른바 ‘더러운 사나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더러운 사나이(비부;鄙夫)와 더불어 가히 임금을 섬길 수 있으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였을 때는 얻을 것을 근심하고 이미 얻고 나서는 잃을까 근심하니 진실로 잃을까 근심하면 무슨 짓이라도 못할 것이 없다’(鄙夫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 <논어> 양화편 참조)고 하였다.
오달제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죽음을 택하였다.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마지막으로 시한 수를 남겼다.
‘외로운 신하는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 / 성주의 깊으신 은혜, 죽음 또한 가벼워라 / 이승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 홀로 계신 어머니를 두고 가는 거라오.’
김상헌은 삼학사의 대열에 뒤지지 않을 만큼 척화론자로 유명하다. 그는 청나라의 심양에서 옥중에 갇혀있으면서 옥중의 최명길에게 시 한 편을 보냈다.
성패관천운(成敗關天運) 성공과 실패는 천운에 달렸으니
수간의여귀(須看義與歸) 모름지기 의로 돌아감을 보아야 하느니
수연반숙모(雖然反夙暮) 비록 아침과 저녁은 바뀔지라도
미가도상의(未可倒裳衣) 치마와 저고리는 바꿔 입지 못한다.
권혹현유오(權或賢猶誤) 권도는 어진이도 그르칠 수 있으니
경응중막위(經應衆莫違) 경상은 사람들이 어길 수 없도다.
기언명리사(寄言明理士) 이치에 밝은 선비에게 말하노니
조차신형권(造次愼衡權) 급한 때라도 저울질을 삼갈지어다.
이러한 척화론을 전적으로 지지한 송시열은 인조를 계승한 효종에게 중용되어 북벌론(북벌정책)을 추진하였다. 송시열은 정몽주(鄭夢周)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愰) 이이(李珥) 조헌(趙憲) 김상헌을 숭배하였고, <이순신비문>과 <삼학사전>을 지었으니 그 근거는 대의명분을 앞세우는 춘추의리정신이며, 숭명배청(崇明排淸)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 송시열이 주축이 되었던 화양서원의 금사담(金沙潭)에는 ‘大明天地崇禎日月’이라는 글귀가 있고 암벽에는 ‘萬折必東’이라는 글귀가 있다. 효종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말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 후에 선조가 휘호한 ‘재조번방’(再造藩邦)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척화론의 희생자로 대표적인 인물은 삼학사이지만 김상헌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척화론을 지지하였다. 특히 삼학사의 순국정신은 (현절사 참조) 청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하여 청태종이 제단을 모으고 ‘삼학사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학사비는 훼손되고 민멸되었다가 후에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네 글자만 있는 비액이 발견되었고, 1935년(병자)3월에 요녕성 심양에 거주하는 한국동포들이 ‘삼학사유적보존회’를 결성하고 성금을 모아 비신과 귀부를 갖추어 심양에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혁명기(1966~1976)에 파손되었다가 혼하(渾河)에서 어느 농부가 비신만을 보관하고 있는 것을 천문갑(千文甲,요녕대학교수,요녕발해대학학장)이 인수하여 요녕대학에 임시로 보관하다가 발해대학으로 옮겨 놓은 것을 한국의 허창무(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전보삼(신구대학 교수)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이인구(李麟求, 계룡건설명예회장)의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아 원본을 그대로 모조하여 2기를 제작하고 그 하나를 2005년에 독립기념관에 건립하였다. (광개토대왕비도 세워짐).
5. 맺는 말
주화론과 척화론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현상을 볼 때 매우 큰 차이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주화론자들도 척화론자들과 같이 호국애민의 충정과 숭명배청의 사상을 견지하면서, 다만 일시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강화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양자를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주화론을 이끌던 최명길도 일보전진을 위한 일시적인 비퇴(卑退)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주화론자였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청나라에 구인되어 감금을 당하였던 것이다. 호란 당시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김상헌이 빼앗아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최명길은 그것을 다시 주워서 수습하여 청군진영으로 가지고 갔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아니 되고 줍는 사람도 없어서는 아니 된다(裂之者不可無 拾之者不可無. <대동기문>)고 하였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항상 무사태평한 처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기치 않은 환란과 위기를 맞을 수 있는 것이니 만큼 경상만을 절대시하여 권변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 역사적 현실이며, 병자호란을 당하여 일어난 주화론과 척화론은 경상과 권변의 원리를 보여준 유교철학의 전형이라고 평가된다. (끝)
*** 참고문헌***
<仁祖實錄> 권33. 34. 41. <孝宗實錄>권2. <顯宗實錄>권19.
崔鳴吉 <遲川集> 영인본. 동축문화사 1980
宋時烈 <국역송자대전>XI (고전국역총서218) 민족문화추진회 1983
姜斅錫 <大東奇聞> 한양서원 1928(윤영구 이종일 교정)
<四部備要>32. 북경중화서국영인 1989
<論語> <易經> <孟子> <史記> <宋史>
城南文化院 <城南金石文大觀) 고려금석원 2003
宋時烈찬 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池公汝海墓表 (鐵山公諱汝海墓表)
柳承國저 傅濟功역 <韓國儒學史> 臺灣商務印書館 중화만국 78 (1988)
申採湜 <동양사개론> 삼영사 1999
金文俊 <우암송시열의 철학사상에 관한 연구>성균관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6
최준하 ‘우암송시열의 전(傳)문학 연구’<송자학논총>창간호 충남대학교송자학연구 재단 1994
장삼현 ‘남한산성과 의리사상에 대한 연구’ <성남문화연구>4호 1996
박상규 ‘삼전도비문의 원문재구와 해석 및 색인’ <성남문화연구>4호 1996
허창무 ‘제1회국제학술회의를 통해 본 남한산성의 위상과 가치 재조명’
<성남문화연구>4호
張哲洙 ‘남한산성 현절사의 건립배경’ <남한산성과 삼학사> 성남문화원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제2회학술회의논문집 1997
池敎憲 ‘常道와 權變의 生存哲學’ <남한산성과 삼학사> 성남문화원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제2회학술회의논문집 1997
池敎憲 ‘<三學士傳>과 抗淸義理의 儒學的 評價’ <城南文化硏究> 8호 2001
池敎憲 ‘丙子胡亂과 池汝海의 忠節’ <淸原文化> 4호 1995
이하 생략 (2012.6.3 - 원고지 69.9장)
*** 토론 주제 (나의 탐구)
1. 병자호란의 근인(近因)과 원인(遠因)은 무엇인가.
2. 주화론의 정당성은 무엇인가.
3. 척화론의 정당성은 무엇인가.
4. 주화론과 척화론의 현대적(역사적) 교훈은 무엇인가.
5. ‘역사란 모래 위에 쓰여지는 것이다.’란 말은 무슨 뜻인가.
6. 국가흥망의 원인은 무엇인가.
7. 국력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
첫댓글 변변치 못한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상만을 집착하는 것도 문제지만 권변을 남용하는 것도 문제이니 양자의 철학적 원리를 체득함이 중요하며, 여기서 통유와 속유의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비는 백절불회지진심이 있어야 비로소 만변불궁지묘용이 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그 어느 하나에 집착하고 과격하게 고집하는 극단적인 현상이 자주 나타나며, 그것이 여러가지 형태의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도화선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념, 계층, 노사, 지역, 세대등 여러가지 분야의 갈등도 비슷한 차원의 문제라고 보입니다. 회원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필자 지교헌드림(2013.1.4)